명군이 되어보세! |
등장인물 (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
1. 개요
1.1. 철도
2.
대아주2.1.
대한
3.
대유주2.1.1.
정치2.1.2.
언어2.1.3.
지역2.1.4.
인구2.1.5.
소수민족2.1.6.
군사2.1.7.
치안2.1.8.
경제2.1.9.
외교2.1.10.
사회2.1.11.
교육2.1.12.
문화2.1.13.
식생활2.1.14.
의학2.1.15.
과학,
공학2.1.16.
환경,
생물2.1.17.
종교2.1.18. 연도별 주요 사건
2.2. 대한의 국외 영토(대한령 미주 제외)2.3. 대한의 번국2.4. 중원2.5. 건주2.6.
일본2.7.
섬라국2.8.
준가르 칸국2.9.
아라칸 왕국2.10.
면전국2.11.
아체국2.12.
천축국2.13.
벵골 칸국2.14.
파수둔3.1.
외수터국3.2.
포뢰선3.3.
불랑국3.4.
루스국3.5.
폴수국3.6.
수배국3.7.
잉글국3.8.
내달국3.9.
서반아3.10.
벌기국3.11.
포도아국3.12.
양시칠리아 왕국3.13.
그리스 왕국3.14.
법왕국3.15.
돌궐국
4.
대미주4.1. 대한령 미주4.2.
대미주 북부4.3. 서반아령
신서반아 →
멕시코(맥고국)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4.5.
미주합중국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4.7.
아이티 공화국
5.
대삼주6.
대상주7.
오세아니아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4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1852년 안남 분할 시점 세계지도
4부에서 동아시아의 황제국 중 유구와 후금이 각각 대한과 청의 번국이 되면서 독립을 잃는 큰 변화가 생긴다.
1.1. 철도
대한으로부터 시작된 철도가 유럽으로도 전파되나 원역사도 그렇지만 궤간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대한식: 궤간 1500mm(대한식으로 5척, 미국식으로 4피트 11인치)로 원역사의 광궤와 비슷하다. 대한, 건주 양국, 러시아, 대한령 미주, 신불랑, 미국이 채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태평양 표준궤라고 부른다.
- 프랑스/라인/유럽 표준궤: 궤간 1300mm(프랑스식으로 4피드)로 원역사의 스코틀랜드 협궤와 비슷하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표준궤'라고 명명했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 연방도 이 규격을 받아들였지만 국가 자존심 상 '라인 표준궤'라고 명명한다. 이후 이 표준궤를 쓰는 국가들이 모여 회의를 한 끝에 '유럽 표준궤'로 명칭을 바꾸었다. 영국, 스페인, 러시아, 오스만의 발칸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다.
- 영국식: 원 역사의 표준궤(1435mm)와 동일한 궤간이다. 영국과 스페인, 오스만(발칸 지역)이 채택하고 있다.
- 일본식: 아직 정확한 수치는 언급이 안되었지만 일본의 지형과, 타국과 철도망 연결이 어차피 안되는 점 때문에 원역사처럼 협궤를 채택했다고 한다.
- 후송식: 영조척 3척(대략 960mm)의 협궤. 어차피 수로 운송이 주류고 철도는 보조적인 역할만 맡기에 비용을 절감하고자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매우 좁은 협궤를 채택했다.
2. 대아주
2.1. 대한
대한국 大韓國 |
||
국기 | 군함기 | |
위치 |
한반도,
요서주, 북한 10도[1], 북변[2]], 동토[3],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아모 열도, 연역주, 빙주, 북미주[4], 남미주, 동미주, 동변[5], 중미주, 서미주, 누손주[6], 해사도, 영귀 제도 등 |
|
번국 | 하와국, 조홀국, 술루국, 유구국, 불나이, 사라왁, 남월국, 중월국 | |
역사 | ||
수도 | 황도 한성부(皇都 漢城府) | |
민족 |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말레이인, 필리핀인 유럽계 백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하와이 원주민 등 |
|
언어 | 근대 한국어 | |
문자 | 한자, 국문 | |
종교 |
유교(
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덕성도, 무속 신앙 등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정 | |
국가원수 | 태황(太皇)( 임금) | |
국성 | 전주 이씨(李) | |
연호 |
건원(建元) (1632년 ~ 1650년) 연가(延嘉) (1651년 ~ 1678년) 건복(建福) (1679년 ~ 1699년) 건흥(建興) (1700년 ~ 1740년) 원강(元康) (1741년 ~ 1775년) 영태(永泰) (1776년 ~ 1782년) 원평(元平) (1783년 ~ 1829년) 광덕(廣德) (1830년 ~ 1834년) 흥선(興宣)[7] (1835년 ~ ) |
|
통화 | 대한통보, 푼(分)<전(錢)<냥(兩) |
2.1.1. 정치
-
정도전 복권
원 역사에서 1차 왕자의 난으로 조선조 내내 역적 취급 받다가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관직이 회복되었던 정도전이 여기서는 원 역사보다 정통성과 권위가 막강한 대한 황실을 배경으로 둔 덕분에 태황 원평제가 대한(조선)이 건국되는데 큰 공훈을 세운 점은 인정해야 한다며 자비를 베풀어 원래 역사보다 40년 빨리 신원되었다. 마찬가지로 왕자의 난과 관련된 태조의 후처 신덕왕후 역시 복권되었다.[8]
-
경화사족과
붕당
원 역사처럼 중앙 정계의 주요 직위는 한양에 세거하는 경화사족들이 점차 독점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진입장벽이 있을 뿐 경화사족으로 편입은 가능하며, 4색 붕당은 있으나 원역사와는 달리 당쟁 없이 공존하고 있다.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 천주교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압록-두만강 이북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지 출신의 관료들은 대체로 비교적 개방적인 남인과 북인에 들어간다. 나라가 큰 굴곡 없이 번영해서인지 세도정치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가문들 간의 긴장관계도 어디까지나 내부의 권력투쟁이지 황권을 넘보진 않으며 분쟁도 의견충돌에서 그치고 있다. 다만 경화사족들이 요직을 독식하고 외지 출신을 차별하는 문제는 있다. 현재 가장 우세한 붕당은 서인이라고 한다.
-
대명공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써 대한에게서 그동안 받은 은혜에, 목종 때 서나라가 운남으로 밀려나면서 한양의 서나라 주재관들이 대명공에게 귀부하는 것을 대한이 허락한 은혜까지 입고, 대명공이 대한 태황에게 보내는 축하 서한이나 공물도 더 격상되는 등 태황에게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은 대명공은 대한의 신하가 아니라는 것이며,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외적으로 공작위의 4대 이상 세습이 가능한데, 원칙상 장자 계승이나 장자의 일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차자, 혹은 삼남 이하라도 계승이 가능하다. 황실 행사가 있을 땐 황태자 바로 다음 자리, 친왕 및 군왕이나 번국 왕들보다 상석에 앉을 자격이 있다.
대신 조금이라도 정치에 욕심을 내거나 자기 세력을 만들려 들 경우, 꼭 그런게 아니더라도 천자 후손이라며 겸손하지 못 할 경우 해당 대명공이나 공자가 '좀 일찍 세상을 떠나' 다소 이른 계승 혹은 후계자 교체가 이뤄진다. 이 부분은 재석은 물론 역대 태황들 모두가 공통적인 입장이라 4부 시점에선 말 그대로 제사 지내고 찬시 올리는 토템 역할만 하며 사는 중. 앞서 언급한 '친왕보다도 상석에 앉을 자격이 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것으로, 실제로 참석한 적은 한 번도 없기에 그런 상황이 실현된 사례도 없다. 외부와 혼인하면서 세력을 키운다면 문젯거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로 혼인도 대명동 내 중국인 가문들 하고만 한다.
대명동 내부에서는 대명공의 세자인 대공자를 전하라고 부르는 등[9] 외왕내제를 넘은 '외공내제' 놀음을 하고 있다. 물론 대명동 밖에서 그러면 큰일 나는 줄은 본인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외부에 나가면 호칭에 단단히 주의를 준다. 대한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지만 밖에서 철저히 주의한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에 일단 모른 척 해주고 있다.
-
심왕부
4부 시점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초대 심왕이었던 이준이 처음 심왕부가 설치되었을 때 한청금 세 나라로부터 받은 재산을 낭비하지 않고 철도와 포경선을 비롯한 생산적인 사업들에 투자하였고 이후의 후손들도 재산을 늘리는 데 공을 들인 덕택에 심왕부의 자산이 3부에서 연수익 10만냥이었던 게 4부 시점에서는 50만 냥으로 다섯 배 이상 늘었다. -
심양전석
그동안 심왕부가 부유해진 덕분에 새로운 요리가 계속 추가되어, 70가지 요리가 차려진 상 7개가 나오는 것으로 메뉴가 크게 늘어나 더 대단한 요리가 되었다.
-
국수주의와
지역 갈등
무종 이래 한 번도 국력이 쇠퇴하는 일 없이 수백 년 동안 성장만 거듭해 동북아시아 최강의 강대국이 되었고, 장조 때 경인왜란을 마지막으로 200년이 넘도록 본토를 침략당한 경험이 없어서 조정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국수주의가 퍼졌다. 천하에서 대한이 가장 뛰어난 나라라고 주장하는 서적이 잔뜩 나올 정도. 그리하여 엄연히 대등한 황제국이자 황실이 혈연을 맺은 형제국인 건주 양국에 대해서도 조야를 막론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분위기로, 건주 양국도 서서히 불만을 품는 중이다.
여기에 광덕제와 태자 재석이 서부 캐나다와 옐로스톤 지역을 신불랑에서 구입하려 하자 본토의 시보들이 '미주 놈들이 장난을 쳐서 황상의 눈을 가린다'며 미주 백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등 지역갈등까지 팽배했다. 또한 외지 출신의 관료들은 모두 합쳐도 1할을 넘지 못하고[10][11] 승진에서도 큰 차별을 받는다. 이로 인해 미주 중 먼 외지에서는 불만이 상당하며 그 영향으로 공화주의까지 들어온 상태이다. 이러한 국수주의와 지역주의가 4부에서 재석이 겪을 위기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유구 번국화와 아모국 포기
1830년 제2차 경인조약에 따라 대한이 유구를, 일본이 아모국을 정식으로 번국으로 들이기로 하고 설득 작업을 거쳐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정식으로 유구 황제 상육이 대한 태황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는 선위식을 갖고 유구는 대한의 번국인 왕국으로 격하된다. 대한 태황의 칭호도 '대한의 태황 겸 유구의 황제'가 된다. 반면 유구 황제의 칭호는 명에 칭신하던 시절로 돌아가 '유구국 중산왕'이 되었다.
-
역사관
대한의 공식적인 역사관은 단군으로 시작된 천명이 기자를 거쳐 삼한으로 전해지고,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갈라졌다가 신라로 합쳐지고, 그것이 고려, 그리고 대한(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부여, 가야, 동예, 옥저 등의 소국들은 천명을 받지 못한 지방정권, 발해는 신라가 힘이 부족해서 얻지 못한 고구려의 잔재로 취급한다. 또한 대동양 일대를 지배하는 명분을 문무왕의 유훈에서 찾아 신라 정통론을 밀고 있다.
-
친왕의 시강원, 익위사 폐지
대한은 칭제건원한 이래 태자뿐 아니라 적통 친왕들에게도 시강원, 익위사를 배정하였다.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 이런 제도는 자신이 과거 중종이었을 때 경험했듯이 친왕들의 세력이 강화되는 문제가 있으므로 폐지하고, 태자에게만 시강원, 익위사를 배정하게 한다. 친왕들도 다른 종친들처럼 종학에서 공부하도록 하고 경호도 금군에서 맡도록 한다.
-
실용주의
이미 3부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4부에선 아예 재석이 미주로 건너가서 나폴레옹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 국정을 미리 돌보는데 너무 빡세서 숨을 좀 돌리려고 경연을 하자고 하자, 신하들이 국정이 더 중요하다며 경연을 거부해서 말을 꺼낸 재석을 아연실색하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12]
-
의회 개설
나라의 규모가 너무 커지고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재석이 더 이상은 임금 혼자서 나랏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걸음마 단계부터라도 시작하기로 했다. 중추원을 둘로 나누어 공신이나 재상들이 모이는 자문기관 추밀원(樞密院)과 향선으로 뽑힌 산림 출신들이 모이는 민의 수렴 기관 참의원(參議院)으로 개편한다.
참의원에 모이는 이들은 그 이름처럼 정3품 참의 직을 받으며 인원은 본토 황도 한성부, 23도, 요서주에서 260명 속지에서 40명 총 300명이다. 총재는 정2품, 부총재(2인)는 종2품이다. 임기는 4년, 재임 횟수는 제한이 없으며 선발 방법은 각계의 추천을 받아 관찰사가 선발한다. 본국 바깥 속주에도 똑같은 제도를 시작하는데 향의원(鄕議院)이라고 부르며, 구성원은 향의원(鄕議員) 혹은 향의라고 부른다.
일단은 추천 형식으로 뽑지만, 재석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완전히 선거제를 정착시킬 생각을 한다. 진짜 의회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는 속지 출신 참의는 모두 추밀원으로 올릴 생각으로 한다.
-
속지 지방관 품계 상승
기본의 미주 전체를 관할하는 미주대총관은 본국의 관찰사와 같은 급인 종2품, 그 아래의 주지사는 본국의 도호부사와 같은 급인 종3품이었으나 이들이 다스리는 땅 넓이나 사람 숫자에 비해 품계가 너무 낮다고 여긴 재석은 미주대총관을 미주 총독으로 개칭하고 기존의 종2품에서 좌우참정대신과 같은 급인 종1품으로 올렸다. 미주대총관 아래의 주지사 역시 관찰사와 동일한 종2품으로 올렸다. 대남주와 누손주를 관할하는 지방관 역시 기존의 정2품 도독을 종1품 총독으로 올렸다.
2.1.2. 언어
-
마트카
폴수국어발 외래어. 후궁 소생 황자녀들이 생모를 부를 때 쓰는 호칭. 폴수국어로 어머니를 뜻하는 'matka'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3부에서 귀비 소씨 올렝카가 자기 딸 루시아, 율리아에게 공식적으로는 어머니로 불리지 못하는 법도를 우회하기 위해 자신을 부를 때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는 폴수국어로 '마트카'라고 부르도록 했던 데에서 유래했다. 올렝카 사후 이 단어는 후궁 소생 황자녀들이 친모를 부르는 명칭으로 정착하였다. 3부 때 사람들도 눈치가 있으니 마트카가 무슨 뜻인지는 알았지만 당사자들인 재석과 상희가 그걸 이유로 올렝카를 벌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대로 관습이 된 듯하다.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재석이 이를 알고 있는 걸 보면, 3부 당시 올렝카가 이 수를 쓴 것은 재석과 상희에게 사전에 허가를 구한 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3~4부 시점에 라틴어는 경화사족 기본 소양이고 가장 보수적인 유림계 관료조차 인도유럽어계 외국어 1~2개는 구사해야 교양인 소리 듣는 나라가 대한이다. 고르고 골라진 인재인 중신들은 당연히 라틴어, 불어, 영어 등 인도유럽어계 언어에 능숙했다. 폴란드어를 모른다 치더라도 수상하게 'madre'나 'mother'를 닮은 'matka'와 화자를 보고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사람이 수십 년 동안 한 명도 없었다면 말이 안 된다. 하물며 유럽과 교류가 더 커진 4부 시점이면 뜻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렇게 대놓고 황실 법도를 우회하는 행위를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올렝카가 특별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재석이 건흥제의 몸에 들어가서지만, 겉으로는 건흥제가 망나니 황자에서 명군의 재목으로 탈바꿈한 것이 견서사를 빙자한 유주 유배형 시절 올렝카와 만난 덕분이라고 알려졌다. 이후 상희가 중전으로 들어오며 후궁으로 밀려났을 때도 불만 없이 받아들이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올렝카는 유주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조선 선비들에게도 현모양처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친정이 이역만리에다가 끈도 떨어진(실리적으로는 외척의 전횡이나 외세의 내정간섭 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도의적으로는 가엾은) 처지라 올렝카는 여러모로 특별 취급을 받았다. 4부 시점에서 대한 태자와 러시아 황녀의 국혼을 다룰 때 황녀와 시녀들의 복식을 대한 황실의 것과 러시아 본국의 것 중 무엇을따르느냐 같은 문제로도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올렝카와 폴란드 시절부터 그녀를 따라온 시녀 두 명은 대한 황궁에서 폴란드 복식을 입는 것이 용납되었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13] 어쨌든 3부 시점에서 '마트카'를 별다른 문제로 만든 이는 없었고 그대로 관습으로 굳어져 4부 시점에 이르렀다.
2.1.3. 지역
-
마포
3부에서 중종이 경희궁을 세운 이후 크게 발전하여 4부 시점에서는 불야성을 이룬 번화가가 되었고, 유럽의 전란을 피해 온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해 상업에 종사하여 정통 프랑스식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을 정도이다.
-
부안
2부 시절 이주한 내달국계 후손들이 250년 전 풍속을 그대로 지키며 살고있으며 이주한 지 수백 년이 지난 1851년 시점에서는 인구가 2만여 명까지 늘었다. 본국에서는 사라진 16세기 당시의 풍속을 체험하려는 내달국인들의 관광 수요가 은근히 있으며 인류학적으로 '먼 지역으로 이주한 이주민의 문화는 이주 당시의 풍속과 문화로 고정된다'는 학설의 근거로도 이용되고 있다.
-
연희동
실제 역사에서도 서울 연희동 지역.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다른 나라 공사관보다 더 크고 화려한 공사관을 짓기를 원하여 은 100만 냥을 들여[14] 4층짜리 호화건물 '대서관'을 지었는데, 함녕제가 청나라에 잡혀가고 서나라가 운남에 갇히게 되면서 본국과 연락이 단절되자 청과 후송이 전리품으로 간주하고 4년 동안 대서관의 소유권을 다투었다. 그러자 대서관 주재관들은 청이나 후송에 귀부하기 싫어 명나라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겠다고 선택하여 대서관은 대명공의 한양 저택인 '대명관'으로 바뀌게 되고, 그 주변에 점차 새로 중원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모여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유흥가도 형성되어 '연희동(宴姬洞)'으로 불리다가 좀더 점잖은 한자인 '연희동(延禧洞)'으로 바뀌었다. -
대명관(명빈관)
대명관을 대명공이 물려받은 후에도 대명공은 주로 대구에서 지내므로 빈 집으로 남아있다가. 제11대 대명공 주성진이 대명공 작위를 승습한 후 대명관을 특급 빈관(호텔)로 개조해 돈벌이를 한다. 침실, 객실, 욕실, 사우나가 포함된 스위트룸은 하루 숙박비가 대한 은화 100냥(프랑스 1000프랑에 상당)이다.
-
황천동
신불랑과의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북부 캐나다 지역 땅을 추가로 대한에 팔겠다 제안했다. 재석은 당장은 춥고 황량해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지지만 향후 자원의 보고가 될 것임을 알고, 대한이 안 산다고 하면 영국에게 팔 가능성이 높아 차라리 사들여 완충지대를 만드는 게 낫다는 점에서 태황 광덕제와 의견이 일치해 매입을 결정하고, 여기에 추가로 천혜의 자연경관인 옐로스톤 지역도 돈을 더 얹어 매입하려 한다. 그러나 조야에서 춥고 넓기만 하고 별 쓸모도 없는 땅을 백성들이 낸 세금으로 사들이려 한다며 격하게 반대해서 결국 캐나다 지역은 포기하고 옐로스톤만 샀다.
-
부산, 의주 신도시
영종의 명으로 국상 정약용이 대한 본토의 양 끝 관문인 부산과 의주에 대대적인 신도시 건설을 시행한다. 부산은 부산진과 동래부를 통합하여 종2품 부윤이 맡는 신도시 부산부를 건설하였고, 의주는 실제 역사의 신의주 자리로 옮기고 압록강 건너편 실제 역사의 단둥 지역까지 다스리는 신도시 의주부를 건설하였다. 또한 수원에는 유수부 치소를 둘러싼 수원성[15]과 5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수원화성[16]을 건축하였다. 이외에도 북한의 주요거점으로 심양, 요양, 북평, 용원, 삼성, 할빈, 순원, 해삼위, 북정원 등이 발전하고 있다.
-
아차산 별궁
황실의 위신을 위해 3부에서 완공한 경희궁(용산별궁) 이후 짓지 않은 궁궐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김좌근의 권유에 따라 양주목 고양주면 아차산 밑[17]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다. 1841년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태평천국 토벌전 개입으로 지연되어 1848년 완공되었다.
-
행정구역 개편
본토 행정구역도
북한의 6주 중 국경인 요서주를 제외하고 요동주를 2개, 부여주와 연해주는 3개로 나누고 속말주와 영락주는 명칭만 변경하여 10도로 만들었다. 요동주의 서쪽은 요심도, 동쪽은 요동도 부여주의 남쪽은 발해도, 중간은 부여도, 북쪽은 삼강도이다. 연해주는 남쪽의 연해도, 북쪽의 연흑도로 갈라졌고 연해주 관할이던 현토주(사할린) 역시 현토도(玄汢道)로 개편하였다.
-
주산도호부
2부에서 조선이 사실상 지배를 시작한 이래 명목상 명의 마지막 영토였으나 유구 합병 논의와 함께 주산군도 문제도 거론되자 재석이 미리 나서서 대명공부로부터 정식으로 헌납받고 종3품 도호부사가 파견되어 다스린다.
-
요서 확장
후금 내전에 청나라가 지원하는 럭더훈을 함께 지원한 대가로 승리하여 후금을 번국으로 격하시킨 청나라에게서 구 후금령인 대흥안령 산맥과 구하 동쪽 요서 비옥한 평야지대를 할양받아 요서주에 편입했다.
-
초성해 복속
스페인령으로 남아있던 괌과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50만 냥에 구입하였다. 이후 하와국의 노예사냥으로 인해 피해를 본 마셜 제도와 스페인령 캐롤라인 제도가 복속을 요청하자 영유권이 없던 마셜 제도는 복속하고 명목상 스페인령이던 캐롤라인 제도는 스페인에게 추가로 5만 5천 냥을 주어 구매하여 대한령이 된다.
-
탕갈라
계미남변 당시 마다구 토벌과 인도양 무역을 위해 네덜란드가 빌려준 항구였으나 나폴레옹 전쟁 당시 원평제가 대한군을 파병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보호해준 대가로 완전히 할양받아 실론이 영국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항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2.1.4. 인구
1823년 시점에서 본국 인구는 남한(한반도) 2200만 명, 북한(북방영토) 1200만 명으로 나온다. 그외 미주 8백만명, 누손주 등 해외영토까지 합치면 약 5천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한양 인구는 100만 명.4부 256화에서는 남한만 3000만에 근접하고 북한을 포함한 본국 전체는 4500만, 북구주 180만, 대남도 650만, 미주 1200만, 누손주 600만으로 총합 7100만 명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언급된다.
4부 466화에서는 남한 인구가 3천만을 돌파했고, 북한 지역은 2천 3백만, 미주는 1천 6백만, 누손주 8백만, 대남도 7백만, 북구주 2백만으로, 북변까지 포함하면 대략 9천만명에 달한다고 언급되었다.
1850년 시점에선 인구조사로 확정하지만 않았을 뿐 사실상 1억을 돌파하였다.
2.1.5. 소수민족
재석은 빙의한 이후 4번의 삶을 사는 동안 소위 ' 전투민족'을 육성해 왕가의 창과 방패로 거느리는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기병 중심인 오도리와 왜인여진, 보병 중심인 대남병과 하와병으로 이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오도리와 왜인여진은 복무 기간 연장 이전 평시 30만인 대한 상비군의 절반 가까이, 기병 전력의 과반을 차지하는 태황의 사병으로 태황의 윤허 하에 군부에 협력해주는 체제를 유지중이다.-
오도리
1840년대 중반 기준 전사 인구는 약 6만. 대한 유일의 군반 씨족으로 평생 군인으로 복무하며 항산은 관리하는 영지와 태황의 내탕금으로 충당한다. 경조 이후 요동으로 옮겨간 왜인 여진과 달리 계속 함경도에 거주하며 인구가 늘어 영지가 부족해지자 재석은 미주에 아파치족이나 공화주의자들 견제를 위해 믿을 수 있는 상비군 전력을 육성할 겸 해서 3천 호를 미주로 이주시킨다. 국왕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오도리 답게 갑작스러운 이주 지시에도 일절 토를 달지 않았으며 '임금의 활'이란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재석의 언급에 따르면 황실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조차 않는다고.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 떠받들 듯 무조건적으로 지키고 받들어야 할 존재로 대하기에 오도리 자신들과 동격인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
보병 병과로도 제법 진출하는 왜인여진과 달리 기병 편제를 고수하고 있으며 재석은 장래에 가능하다면 기계화부대로 개편할 생각을 하고 있다.[18] 오도리와 왜인여진의 철저한 태황의 친병으로 지휘권은 오직 태황에게 있으며 태황이 군부가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는 형태다. 태황의 지시가 없다면 군부의 명령을 무시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굉장히 마초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사고로 고자가 되는 경우 왜인여진 남성들이 환관이 되기도 하는 것과 달리 오도리는 자결하거나, 고향을 떠나거나, 밧줄 하나 들고 호랑이를 잡아오는 선택지만 존재한다. 앞의 두 가지를 고르거나 호랑이 잡으려다 죽으면 그래도 사내였다고 기억되고 호랑이를 잡아오는 데 성공하면 아무도 남성성 상실을 문제삼지 않는다고.
-
왜인여진
1840년대 중반 기준 전사 인구는 약 7만. 오도리보다 약간 많다. 2부와 3부 사이 청이 입관하고 요동이 조선령이 되었을 때 원 거주지에서 요동으로 이주시켜 심양 일대에 정착시켰다. 핵심 교통로이자 정치적으로도 상징성이 강한 심양을 방어하는 중책을 수행중. 특유의 피진은 여전하다. 군반 씨족인 오도리와 달리 자기 땅에서 생업을 유지하다 소집되는 둔전병 성격을 띄며, 말에 내려 보병으로 싸우기를 싫어했던 옛날과는 다르게 지금은 등선군, 천강군 같은 보병 병과에도 제법 진출해 있다. 재석은 장차 가능하다면 부족 단위 공수부대로 개편할 생각을 하고 있다. 오도리와 마찬가지로 군부는 이들을 지휘할 권한이 없고 오직 태황의 명만 충실히 따른다.
궁중의 환관들 중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시위내관들은 사고로 남성을 잃은 왜인여진 출신들이 주로 임명된다. 남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여성들이 맹수나 도적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해 여성들도 무예를 익히는 문화 때문에 궁중의 여성들을 호위하는 궁녀들로도 왜인여진 여성들이 많이 채용된다. 조선에 시집온 누국공주 아나스타샤나 청으로 시집간 정현공주 이현지를 경호하는 역할로도 왜인여진 출신 궁녀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
모로족
누손주에서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고 대한에 저항하는 원주민 부족을 대한에서 일괄적으로 부르는 명칭. 주요 구성원은 누손주 남부 갈래도를 근거지로 하여 이슬람을 믿는 원 역사의 모로인이지만 대한에서는 이슬람을 안 믿는 원주민 부족도 한꺼번에 '모로족'이라 부르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와 멀리 이격된 지역적 특성 탓에 대한의 지배에 순응한 지 오래인 누손주 북부와 달리 누손주 남부에서는 계속해서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주적은 술루군과 누손 민보군. 원 역사의 스페인과 미국, 필리핀 정부도 애먹은 모로족 토벌 답게 대한은 건흥제가 누손주를 정복한 이래 100년이 넘도록 모로족 토벌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흥선제가 야심차게 추진한 무술남진에서는 사말도(사마르), 래태도 등을 평정하고 갈로도에서도 모로족을 해안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었으나 후금 내전과 태평천국 문제 등 다른 문제들에 집중하기 위해 일단 토벌을 종료했다.
-
대미주 원주민
대한이 굳이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에 터치하지 않아서 200년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인디언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대한 사회에 녹아들려 노력하지도 않아서 지위가 좀 되는 인디언 자제들도 향교에서 기초적인 언문과 산수만 배우고 관직을 노리거나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인 사기꾼들이 원주민들에게 사기를 치거나 이주민들에게 토지를 갈취당하는 문제가 생겨 본국에서는 이를 왕명을 어긴 죄로 엄히 처벌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디언 중에 호전적인 성향의 아파치족은 사포대로 고용되어 약탈물을 받는 조건으로 협력하고 있었고, 이들이 엇나갈 것을 우려한 박규수의 요청으로 본국에서 오도리가 파견된다.
황태자 이창이 미주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토인 여인(그것도 한인 혼혈도 아닌 순수 혈통) 콜레스타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복속 200여년 만에 황실과 통혼을 이루었다.
-
구주 왜인
장조 시기 을미동정으로 북구주를 확보할 때 현지에 거주하던 왜인들 대부분을 추방하였으나 무자호란, 경인왜란, 을미동정을 거치고 별도로 양응룡의 난 진압과 대남도, 미주 진출도 타진하던 조선은 대규모 이민단을 보내 북구주를 조선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 빈틈을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으로 발생한 일본인 피난민들이 채웠고 북구주 왜인이란 소수 민족으로 자리잡는다. 기존 일본인 공동체가 소멸한 자리에,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던 이들이 들어와 조선의 통치를 받고, 유입된 조선인 인구와 섞이면서 조선과도 일본과도 상이한 면이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왜인여진과 유사하게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인 피진을 사용하며 혈통은 왜인이지만 대한에 충성하고 있다.
-
대남도 토인
2부에서 재석이 대남도를 개척한 지 수백 년이 지난 시점에서 평지에 거주하던 토인 부족들은 대남도에 정착한 한인에게 정복, 동화되거나 한인들이 정착하지 않은 산지로 도망쳐 사라졌다. '산번(山藩)'이라고 불리는 산지 토인 부족들은 대한에 충성맹세만 하고 자치를 누리며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1840년대 중반 기준으로 인구는 약 30만. 장조 시기 토인병들을 조선군으로 편입한 이래 대한의 전투민족으로 꾸준히 활약하고 있으며 적의 머리를 베어 전리품으로 삼는 전통 또한 그대로 남아있다.
-
한인(漢人)
사르후 전투 패전 후 대구 대명동에 정착한 군인 출신 한인과 명나라가 망할때 인천 소명동에 정착한 산동 출신 한인, 장기(나가사키)에 정착한 강소 출신 한인 등 명나라 출신 난민들이 유입되었으며 노비로 들어온 묘노들은 양인 노동자로 신분이 바뀐 이후에도 대한 노동력의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외에도 장조 시절부터 실효 지배한 주산진과 광동진남, 홍서당 토벌의 보상으로 획득한 뇌주, 해릉도 거주민, 후금 영토였던 요서를 편입하며 해방된 한족 노예들이 존재한다.
-
안남계 한인
3부에서 안남국 복승(붕타우), 가정부(사이공) 등 메콩강 유역에 대한 해군 기지와 외수사 농장들이 들어서면서, 외수사 농장 관리인으로 파견된 한인들이 현지 여인과 혼인하고 정착하면서 안남계 한인이 생겨난다. 대대로 외수사 농장 일을 하면서 현지인과 통혼하는데, 3~4세대가 지나자 외모는 안남인과 다름없게 되었지만 정체성이나 문화는 대한의 백성임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안남에 한글로 안남어를 적는 표기법도 전파된다. 임자남정이 끝나면 파병장병 중에 현지 정착을 원하는 이들은 가솔 전체를 옮겨와 메콩강 하류에 정착시켜줄 예정이라 수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
몽골인
내전으로 몰락한 후금의 이권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후금 유일의 항구였던 흥만성을 비롯한 요서 일대가 대한의 영역으로 분배된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만주, 왜인, 몽골인 귀족들 앞엔 보상금 수령 후 떠나거나 남아서 대한인이 되는 선택지가 놓였다. 소수의 만주인으로 다수의 한족을 통치해야 하는 약점이 뚜렷한 청측에서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던 만주인 귀족들은 큰 고민 없이 토지 보상금 수령 후 이주를 택했고 농장이나 광산에 주력하던 왜인 귀족들 또한 전에 없던 금전적 부담과 신분 하락을 감수하고 대한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19] 그러나 대대로 농업보단 목축에 주력하던 몽골 귀족들은 사정은 달랐다. 강남 획득에 실패한 반작용으로 국초에 이미 목초지와 숲이 부족해 한족 인구를 대거 학살하고 추방했던 청으로 가봤자 새 목초지를 받을 수가 없을 게 뻔했기 때문. 목축 특성상 강남 출신 한인 노예 의존도도 미미했기에 약 10만 가량의 몽골인들은 세금과 신분 하락을 감수하고 대한에 남는 길을 택한다.
-
백인
서양과 교류한지 200년이 훌쩍 지나며 개개인의 이주 외에 만단위의 백인 이민자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가장 큰 공동체는 장조 시기 유입되어 부안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공동체로 1851년 시점에 2만 규모, 유타주에 정착한 모르몬교 공동체가 1만과 2만 사이로 그 뒤를 잇고, 세번째가 대기근 이후 이주해온 아란인 공동체로 1만 남짓이다. 일부다처제로 아이를 많이 갖는 모르몬교나 카톨릭 영향으로 출산율이 높은 아란계의 특성을 고려하면 향후 네덜란드계를 제치고 가장 큰 백인공동체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있다.
-
흑인
장조 시기 이기빈이 모카, 아덴, 소코트라를 약탈해 데려온 흑인 노예들로 구성한 외금위 흑룡군은 그 후손들이 대대로 복무하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자 혈통이 섞이며 피부색과 체구가 대한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졌다. 아프리카와 접한 인도양 상권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차지였기에 새로 충원할 방법도 없어 흑룡군 아닌 흑룡군이 100년 이상 쭉 내려왔는데 원평제 시기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대한 상선이 인도양까지 곧잘 왕래하게 되면서 기회가 생겼다.
격식을 무척 중시했던 원평제는 과거의 흑룡군을 재현해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픈 마음에 400명의 흑인 노예[20]를 데려와 면천시키고 혼처와 넉넉한 봉록까지 내려주며 친위대로 삼았다. 이들이 퇴역하고 자식 세대가 물려받은 흥선제 시기에 에티오피아의 카사 하일레가 정식으로 사절을 파견하고 근대화를 위한 조력을 요청하면서 대한내에 존재감이 커질 계기가 생겼다.
2.1.6. 군사
-
퍼커션 캡 개발
중종의 3자이자 화학자인 정친왕 이권이 현종 재위기에 뇌홍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그의 차자 웅천공 이헌이 연구를 이어받아 실용적인 퍼커션 캡을 만들어낸다. 영종 시절부터 영국에 뇌홍 특허권을 판매하여 30년동안 80만냥의 특허료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뇌관식 총기가 비싸 1823년 시점에서도 금군과 기병대만 뇌관식 총을 장비하고 있다. 연발총도 시제품이 여럿 개발되었으나 실용화는 아직 안 됐다. 하지만 덕후 기질이 강한 광덕제가 현역 관군의 총을 전부 뇌관식으로 교체하도록 하여 신품 생산 외에도 기존 수석총의 격발부를 뇌관총으로 교체하는 사업을 통해 1835년 경에는 교체가 거의 완료된다.
-
군복과
군장
군복은 디자인은 3부와 큰 차이 없으나 재질이 동복은 면직 솜누비옷에서 모직으로, 하복은 면직에서 면마혼방으로 변경되었다. 입대 시에 동, 하복 각각 2벌을 지급하고 추가로 필요할 경우 개인이 구입해야 한다. 가슴의 휘장과 전립에 꽂은 깃털[21]로 소속 군영을 표시하고, 군관과 기병은 장화를 신고 보병은 단화에 각반을 착용한다. 보병들은 투구, 갑옷, 창, 활 장비가 폐지되어 전립과 전복 차림에 총으로만 무장하고, 기병들은 투구와 활, 편곤, 기병창, 환도는 장비하나 갑옷은 폐지되었으며 친위기병들만이 의장용 금속제 흉갑을 착용한다. 흥선제 재위기에 기병대에 갑식 기총이 배치되면서 기병창과 활도 도태된다.
-
해군력
대한의 주력함은 이미 전열함과 증기 장갑함으로 바뀌었으며, 광덕제 시기 프로펠러 추진기가 도입된다. 해군력은 영국 다음이고 프랑스와 버금가는 세계 2위의 해군력으로 평가된다. 원역사의 HMS 빅토리나 USS 컨스티튜션처럼 기념함 명목으로 12척의 판옥선과 3척의 거북선이 현역으로 남아있다.
-
육혈포 발명
2부 김지 장군의 후손이자 군기시 제조인 김귀훈이 조상 김지의 유지를 이어 발명했다. 황동 탄피가 실용화된 후 황동 탄피를 사용하는 신형 리볼버 권총도 개발되어 모로족 토벌군에 우선 지급되었으며, 흥선제 연간에 나왔다 하여 흥선권총이라고 불린다. 또한 이를 확대한 리볼버 기병총인 갑식 기총도 만들어져 기병대에 지급된다.
-
복합장갑
중량 제한이 있는 증기 장갑트럭, 버스의 장갑판을 강화하려고 실험하다가, 강철판과 참나무 목판을 몇겹씩 적층하면 같은 두께의 그냥 강철판보다 방호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복합장갑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
트랩도어식 소총, 황동
탄피 개발
군기시에서 자모포의 원리를 소총에 응용하는 제안을 재석에게 올렸고 재석이 트랩도어 방식과 황동 탄피를 사용하는 신형 소총의 아이디어를 정리해줘 1839년 개발된다. 재석이 갑식 보총이라는 제식명을 붙였다.[22] 태평천국 토벌을 통해 대한의 갑식 보총을 본 미국 의용군들의 요청으로 미군은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을 원역사보다 일찍 개발 지급하게 되었다. 대한의 우호국인 루스에도 생산권이 팔려 주력 소총으로 운용되는데 생산을 담당한 노벨 가문의 성에서 따와 노벨 소총이라고 부른다.
-
회선연자포 개발
군기시에서 백연자포라는 이름으로 처음에는 총열 100개짜리 제사총으로 개발을 시작했으나, 재석이 개틀링의 아이디어를 주어 군기시에서 수동식 10총열 개틀링을 개발하여 회선연자포라는 이름을 붙이고, 시험에 성공하여 양산하기로 한다. 비용 문제로 아직은 종이탄피를 사용한다. 후금 내전과 태평천국 토벌에 첫 투입되며, 후금 내전에서 굴마훈의 반군을 도륙하는 것으로 첫 실전 전과를 올리고 귀차, 비행선과 함께 태평천국 토벌전에서 대활약하며 각국이 관심을 보인다. 이후 크루프사가 크루프제 철제 대포의 라이센스를 대한에게 파는 조건으로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내 독점 라이센스를 사간다.
-
귀차
대한의 발명가 홍총각이 개발한 무한궤도를 적용하고 회선연자포 3문과 자모포 2문을 탑재한 7인승 증기기관 전차인 신형 귀차[23]가 개발되어 성능 테스트 겸 태평천국 토벌전에 30량이 투입된다. 작중에 나온 기술로는 귀차를 잡을 방법이 거의 없어서[24] 처음 귀차를 상대한 태평천국군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하다시피 했다. 이후 태평천국군이 내놓은 여러 대응책 중 귀차 상대로 유효했던 건 대전차호인데, 그것도 무한궤도 덕분에 어지간한 함정은 자력 탈출이 가능해서 태평천국군은 거의 절벽 수준으로 깊게 호를 파고 나서야 겨우 격파에 성공했다.
태평천국 토벌전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여러 열강들도 귀차에 관심을 보이고 러시아와 영국에서도 라이센스를 사간다.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러시아군이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귀차를 투입하는데 귀차를 처음 본 오스만군은 귀차를 처음 봤을 때의 태평천국군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한편 영국에서는 차체 한가운데에 높게 전망탑을 세운 형태로 귀차를 만드는데, 주마스트에 견시용 장루를 만든 전함과 유사하다고 하여 '육상함(Landship)'이라 명명한다.
-
삼군부
참모본부 창설
대한에 건너온 헬무트 폰 몰트케가 전해준 프로이센식 일반참모 제도를 기존 대한군 참모제도와 통합하여 그동안 위상이 낮았던 삼군부 참모부를 참모본부로 격상하고 참모본부장도 오군대총관, 대한북병사, 대한남병사, 대한수군통제사와 동급인 정2품 상장으로 임명한다.
-
추격진천뢰
세계 최초의 항공 폭탄. 태평천국군 토벌전에 비행선이 시범적으로 투입된 후 재석은 폭격의 아이디어 정도만 제시했지만미운 놈 머리 위에 뭘 떨구고 싶은 욕망은 인지상정에 시대를 초월하는지시대를 뛰어넘는 창의성이 발휘되어서 기존 진천뢰를 공중에서 투하하면 명중률이 떨어지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나무 날개를 단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 명중률을 높였다. 기본형인 건물 폭격용 갑형, 인명 살상을 위해 도화선 길이를 줄여 공중에서 터지도록 한 을형, 소이탄인 병형의 3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임시방편이었던 추격진천뢰가 큰 성과를 올리자 재석은 대신기전 탄두를 사용해 본격적인 항공 폭탄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종전 후 공중 폭격은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고 비인도적이니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한다.
-
응룡군(應龍軍) 창설
태평천국군 토벌전에서 첫 비행선이 큰 전과를 올리자 추가로 비행선 4척을 더 파병하면서 삼군부 직속 비행선 함대인 응룡군을 창설하여 세계 최초의 항공대가 만들어진다.
-
위장도색
비행선 작전이 잦아지며 태평천국군이 비행선이 보이기만 해도 산개하는 일이 많아지자 비행선의 하부를 푸른색으로 칠하여 육안으로 관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야간 작전 시에는 검은 천을 씌운다.
-
천강군(天降軍)
홍천귀복 생포 작전을 위해 사상 최초의 공중강습 작전이 시행되었다. 비행선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것까지는 아니고 등선군 출신 병사들이 무려 60미터 높이를 밧줄을 타고 내려가는 레펠 방식으로 침투했고, 비행선이 적지에 착륙했다 재이륙할 수는 없으므로 퇴출은 미리 침투해있던 대한군 기병대의 도움을 받아 육로로 했다.[25] 이 소식이 각국에 퍼지자 대한에서는 반촌극장에서 이 작전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할 정도로 자랑스러워하며, 대한의 적성국 통치자들은 언제 대한이 비행선을 몰고 와서 자신을 납치해갈지 모른다며 불안에 떨게 된다. 군사기밀이므로 비행선을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작전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기에 비행선 300대에서 9000명이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렸다는 식으로 상상력이 살을 붙여 온갖 헛소문이 퍼진다. 아체 토벌전에서 일본군이 아체 술탄 생포를 위해 비슷한 작전을 시도하는데, 훈련 부족으로 레펠링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애초에 술탄이 그 위치에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다. 태평천국 전쟁 종전 후 훈련도감 산하에 정식으로 1개 대대 규모의 천강군이 편제되고 첫 강습작전 지휘관이었던 사재식이 정령으로 승진하여 초대 대대장이 된다.
재석 개인은 장래에 가능하다면 왜인 여진 전체를 공수부대로 개편할 생각도 하고 있다.
-
군제개편
몰트케의 제안과 태평천국과의 전쟁 경험을 거울삼아, 5군영을 포함한 중앙군은 기존에는 연대가 최상위 편제였으나 사단과 여단을 신설하여 시대의 변화에 발맞췄으며, 각 도의 지방군 병영들을 통합하여 청, 러시아 방면의 북부방면군(현무군), 현토도, 연해주 일대의 동부방면군(청룡군), 삼남, 제주도, 대마도 일대의 남부방면군(주작군). 삼남을 제외한 남한 일대의 중부방면군(백호군)을 설치하고 그동안 지방군을 지휘하던 대한북병사/남병사 대신 지휘관으로 각각 정2품 상장 ○부대총관을 임명했다. 또한 최초의 항공부대로 비승군과 응룡군을 통합해 삼군부 직할 '육군항공대', 공수부대로 훈련도감 직할 천강군, 최초의 전차부대로 귀차를 운용하는 맹서군은 기병 병과로 하되 훈련도감 예하 교도부대로 편성되었다.
-
징집률 감소
인구가 적었던 2부 시절에는 심한 장애가 있지 않은 이상 거의 모든 남자가 징집되었으나 인구가 3배 가까이 늘어나며 징집률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오히려 잘 사는 집 자식들은 비난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빽을 써서 땡보직으로 가는 경우는 있어도 복무 자체는 무조건 하는 반면 가난을 이유로는 면제 판정이 잘 나오기 때문에 주로 하층민들이 면제 판정을 받는다. 하지만 면제를 받아도 속오군에 편제되기 위해 3개월간 기초 군사훈련은 받는다. 복무기간 연장 이후 징집률은 3할 정도로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
복무기간 연장
몰트케의 제안으로 본래 1년이었던 복무 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려고 하나 여론의 반대가 심하자 2년으로만 연장하되 기병, 등선군, 응룡군, 포병, 기관병 등 특수 병과에 한정해서 3년 복무시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군 복무 시 이후 대과를 비롯한 국가시험에 3% 가산점을 주며 3년을 복무하는 특수 병과 출신의 경우 은 20냥 일시금 지급, 국영기업 정원 할당, 해외 이주 시 토지 추가 지급 등의 혜택이 있다.
-
백린탄
탄착한 곳에 불을 지르는 산화신기전의 소이탄두에 기존에 쓰던 기름 먹인 천 조각 대신 엄청 잘 타고 잘 꺼지지도 않는 백린을 채워넣어 발사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백린탄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아는 재석은 철저히 군사목표에만 사용하라는 엄명과 함께 연구 및 생산을 허가한다. 홍서당의 난에서 테스트를 거친 끝에 문제점을 개선, 안남 정벌전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다.
-
장갑열차
철도 방어를 위해 개발했다. 철도 방어가 주 목적이다보니 대구경 화포가 아닌 자모포, 4근포, 8근포, 회선연자포 등 중소구경 화포 위주로 무장한다.
-
열차포
철도 방어용이던 장갑열차의 개념을 응용해 공성용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해안포용 150근짜리 포탄을 발사하는 대완구를 장착한 열차포를 군기시에서 개발해 안남 정벌에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다. 닷새간 겨우 6발을 날렸음에도 압도적인 질량을 앞세운 파괴력으로 가정부에서 농성하던 안남군의 사기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
국립묘지
임자남정에서 발생한 사상자들을 마중할 준비를 하며 국가 차원에서 전몰자들을 안치하고 추모할 장소 설치가 추진된다.[26] 기존에는 무묘에서 전몰 장정들의 위패를 모셨으나 원래 무묘는 자격을 인정 받은 무장들을 안치한 곳이기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할 겸, 무명용사들에게도 확실한 예우를 할 겸해서 조성하기로 한다. 원 역사와 동일한 현충원이란 이름을 쓰고 장소도 국립서울현충원 자리에 그대로 만든다.[27] 한강 건너 화장산 동작봉 일대가 미개발지면서 풍수학적으로 터도 좋고 강 바로 건너에 경희궁이 있어 황실이 순국한 용사들을 누대에 걸쳐 보살피는 그림이 나오기 때문.
전사통지서에 현충원 안치 여부를 묻는 설문을 붙여 동의를 얻은 시신만을 안치하는데 도성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가며 고병(직업군인)으로 복무하는 군인 집안은 대부분 안치에 찬성했고 오도리와 왜인여진은 전원 찬성한 것을 넘어 100년도 더 전에 죽은 조상들까지 이장하고 싶다고 하는 통에 유해는 임자남정 때 발생한 전몰자부터 수용하고 이전 순국 장병들은 제사만 현충원에서 모시는 방안으로 절충한다.
2.1.7. 치안
-
총기 소지의 자유
조선의 원래 전통대로 민간의 총기 소지에 규제가 없으며, 시보에도 총포상 광고가 자유롭게 실린다. 외국산 총기도 자유롭게 수입되어 유통되고 있다. 민간에 유통되는 총기는 무종 시대 수준의 화승총부터 뇌관총까지 다양하다.
-
범죄자
지문 등록
지문이 사람마다 다 다르고 평생 불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원평제가 한번 수감된 범죄자들의 지문을 찍어 등록하여 재범을 방지하도록 조치한다. 하지만 한번 수감된 범죄자들만 대상으로 하고 감식 기술도 부족하기 때문에 범죄 수사에 활용되기는 아직 어려운 상태.
-
압슬형 폐지
압슬을 당하면 다리가 상해 장애인이 되는 점을 딱하게 여긴 영종 원평제가 즉위하자마자 폐지했다. 의금부에서 처음엔 난감해했지만 수십년이 지나니 없이 수사하는 것도 익숙해졌다고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다른 혹형도 폐지될 가능성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
전신선 훼손죄 신설
1839년 유선전신이 실용화되면서 국가 기간 통신망인 전신선을 끊거나 전신주를 쓰러트린 자는 봉화대 파괴나 철도 파괴와 마찬가지로 역모죄로 처벌하기로 한다. 또한 전신선의 보안은 철도경찰 업무까지 담당하는 우포청에서 함께 맡기로 한다.
-
음주운전 금지법
광덕제 시절까지는 처벌 규정이 없다가 재석이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금지 법안을 신설했다. 아직 혈중알콜농도를 측정할 기술이 없어 실제로도 1990년대까지 그랬듯 포졸들이 직접 술 냄새를 맡는 방식을 쓰는데, 정확히 얼마나 마셨는지 알 방법이 없으니 인정으로 넘어가기 쉽고 비과학적이라 사전에 차단하는 건 힘들고 사고가 난 이후 음주 사실이 확실하면 가중처벌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일반 교통사고는 피해자와 합의만 제대로 하면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으나 음주운전은 예외. 조야의 인식은 술 한 잔 마셨다고 운전을 하지 말라는 건 불공평하다며 부정적이었으나 음주 운전 사고로 친모를 잃은 태황 앞에서 술 마시고 운전해도 괜찮다고 고할 간 큰 사람은 없었다.
-
차량
보험 확대
교통사고 피해자가 보험금을 제대로 수령할 수 있도록 음주운전 금지법 제정과 거의 동시에 자동차, 마차 소유주의 보험가입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추진되었다. 복수의 차량을 소유한 자가 한꺼번에 보험을 들려면 비용이 막대하다는 조야의 반발에 강제성은 빠졌으나 보험 미가입 상태로 사고가 나면 개인이 알아서 피해자와 합의해 막대한 비용을 물어주든가 형사 처벌을 받든가 두 가지 선택지만 남다보니 1850년대가 되자 전체 차량 소유주의 7할이 보험에 가입했다. 재석은 가입률 8할에 근접하면 강제 가입으로 법안을 개정할 계획.
2.1.7.1. 마약
-
아편
아편 때문에 후송이 망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의료용 마취제 용도로 외수사가 벵골에서 소량을 직수입해오는 것만 허용하고, 그 외의 유통이나 재배는 반역죄로 취급하여 의금부가 처리한다. 하지만 재석 몰래 외수사가 벵골 칸과 결탁하여 벵골산 아편을 후송 아편 잠상들에게 팔아먹고 있고, 후송의 덕성도 지부 중 아편 잠상으로 타락한 무리들이 덕성도 네트워크를 통해 본국으로 아편을 유통시킬 위험성이 있어서 재석이 주시 중이다.
-
곡가목
3부에서 안돈이가 남미에서 가져온 코카 종자는 본국의 풍토에서 자라지 못해 당시 재석이 한숨 돌렸으나, 목종 시절 의원 양병현이 코카 종자를 대남도에 심은 것이 성공하여 농장이 만들어진다. 아직 코카인 정제까진 못하지만 코카 잎을 섞은 차나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흥겨워진다고 암암리에 퍼지고 있어 재석이 근심 중이다.
-
대마
대한산 대마는 마약 성분이 원래부터 적은데다가 섬유로 쓰기 위해 꽃을 일찍 따버리기 때문에 대체로 안전한 편인데, 누손주의 모로족 반군들이 대마에 취해 총에 맞고도 덤벼들어 싸우는 문제로 누손주의 군사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2.1.8. 경제
-
포목 산업
기계 성능은 영국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좋다. 적당히 좋은 품질과 압도적인 생산량을 앞세워 공장제 수공업으로 유명한 후송과 벵골의 포목업을 쇠퇴하게 만들 정도로 시장을 잠식한다.
-
제철산업
2부에서 잉글랜드에서 이민온 제철공에 의해 조선에서도 근대식 제철산업이 시작된 이래 대한의 제철산업은 계속해서 발전하였고, 작중 대한의 산업 발전에 따른 철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그에 따라 철 생산량도 크게 늘었다. 연철의 경우 3부에서 최석정이 반사로를 개발하는데 성공하면서 연철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선철은 1820년경 무연탄 사용이 가능한 신형 고로가 개발죄면서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강철은 기술자 이철원이 전로를 발명하면서 대량 생산에 성공하였다. 1851년 시점에서 대한은 선철 200만 톤, 연철 80만 톤, 강철 5만 톤을 생산하여 아주 제1의 제철산업 보유국[28]이자 철 생산 세계 1위인 영국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 2부에서 설립된 동래철소를 모태로 한 동래제철, 평양을 기반으로 한 유상 계열의 평양제철, 요동 일대를 기반으로 한 송방 계열의 송현제철이 대한의 제철업계를 3분할하고 있다.
-
한공과 묘노
대한에서 단순 노무직, 3D업종은 대부분 이들이 맡으며, 같은 한족이어도 청에서 온 자유인 노동자는 한공, 후송에서 팔려온 자는 묘노라고 구별하는 전통도 이어지고 있다. 한공은 자유인이라 계약기간이 끝나면 귀국할 수도 있고 대한에 남아 화교로 살 수도 있다.
-
대한중보
금화 발행
기존에는 대한통보 은화와 동화, 재무부에서 발행하는 금 보관증(사실상의 지폐)만 있었으나 장조 때부터 350년간 쌓아온 금을 바탕으로 1840년에 드디어 금화 발행이 결정된다. 금화 1닢이 동화 75 닢에 해당하여 신하들은 당백전으로 부르자고 했으나 원역사 흥선대원군의 실책 중 하나인 당백전이 떠오른 재석이 명칭과 실제 화폐가치가 맞지 않아 혼란을 줄 수 있고 이를 악용해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부하고 1841년 신축년 '대한중보'란 명칭으로 발행한다.
-
중앙은행 설립
대한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재무부가 모든 경제 문제를 다 다룰수가 없는 상황이 되자 재석이 중앙은행 설립을 결정하고, 영란은행 총재를 지낸 존 벤자민 히스를 고문으로 초빙하여 설립 작업을 한다.
-
만물상
백화점. '천하 만방에서 모이는 다양한 상품을 파는 상점'이라 해서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 흔히 아는 형태의 백화점처럼 수백 개의 점포를 거대한 한 건물에 채워놓은 대규모 만물상은 수도 한양에만 단 3곳 존재한다.
2.1.9. 외교
-
대송관계
3부에서 국교를 수립 후 대한에서는 형제국 청을 더 중시하는 것은 여전하며 군부는 청에 기울어져 있지만, 교역 수익과 안정된 외교 환경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관료들은 후송과 사이가 나빠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서나라 패망 후 서나라 공사관인 대서관의 귀속 문제를 두고 청과 후송이 다툴 때 한쪽 편을 못 들고 4년이나 끌 정도로 관계가 호전되었다. 홍서당의 난을 거치며 한인 상인들이 후송의 수도 남경 상권에 대거 진출했으며 후궁이나마 양국간 국혼이 성사되고, 후송 생도들이 대한 무관학교에 유학하는 등 관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교류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
대청관계
여전히 우호국으로 지내고 있지만 자신들을 여전히 오랑캐로 취급하는 풍조에 대해 불만이 쌓인 상태이다. 또한 이전과 달리 전쟁기록 조공도 중단된 상태다. 때문에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재석이 태자의 신분으로 처음 건주 양국의 명목상 공식 수도인 북경에 방문하였다. 이후 재석이 태황 자리에 오른 이래 청나라는 대한의 지지를 얻어 후금 내전에 개입, 건주일통을 이루고 대한이 러시아와의 국혼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청나라 황태자 영록과 재석의 딸인 정현공주의 국혼을 치르는 등 여전히 대한을 가장 중요한 우호국으로 여기고 있다.
-
대일관계
2부 을미동정에서 처음으로 협력관계를 가진 이래 일본을 다스리는 도쿠가와 가문은 대한과의 우호정책을 잘 지켜가며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 프랑스 공사가 영국과 프랑스 관계를 한일관계가 아니라 한국과 후송 관계 같은 사이라고 비유할 정도다. 도쿠가와 가문도 작중 대한의 영향으로 원 역사보다 권위와 힘도 훨씬 강하고 기유진남, 아체 정벌, 임자남정 등 각자의 정복 활동에 경계 사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일본의 팽창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었고, 북구주 수복을 외치는 존황파들은 일본측에서 기회 생길 때마다 해외로 집어 던진 덕분에 대한의 하위 파트너로서 서로 감정 상하는 일 없이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의 경계심도 많이 사라져서 대일 전쟁을 상정하는 계획안만 봐도 대한 해군은 존재의의 때문이라도 과거 전란을 명분으로 연이어 개정하지만, 육군은 120년 동안 단 한번도 개정을 하지 않았을 정도. 갈수록 원 역사의 미국-캐나다 관계에 가까워지고 있다.[29]
-
대유주관계
칭제건원하고 국명을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었음에도 유주에서는 2부에서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교역한 영향으로 3부 시점까지는 여전히 '조선'이라는 국명으로 통용되었고 군주인 태황도 국왕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4부 시점에서는 유주에서도 '대한'이라는 국명이 정착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황제국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대한 태황을 가리킬 때에도 '한국 황제'로 칭하며, 2부에서 등장한 '임금'이라는 고유명사도 대한 태황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가장 밀접한 국가는 유일하게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러시아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 원평제에게 무기 지원을 받았고, 흥선제 시기 대한 황태자와 러시아 공주의 국혼이 성사된다.
-
대영관계
3부에서 적도와 벵골을 경계로 세력권을 분할한 이래 특별한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며 서양 국가 중 몇 안 되는 상주 공사를 파견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영국 역시 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 중 대한과의 외교를 가장 공들이고 있는데 영국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는 상태에서 아시아 최강국이자 북태평양을 지배하고 영국의 권역인 남태평양과 인도양에도 힘을 투사할 수 있는 대한이 누구 편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그레이트 게임의 판세가 달라지기 때문.[30] 러시아가 대한과의 국혼을 추진한다는 징후가 보였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국혼이 성사되었음에도 하나도 대응도 못 한 외교 참사에 로버트 필 내각이 무너지는 등 대한의 행보는 영국 외교정책의 최대 의제 중 하나이다.
-
대미관계
특별한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며 4부 초반 기준 서양 국가 중 몇 안 되는 상주 공사를 파견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경선 기항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다.
-
대상주관계
거리가 멀고 중종 시기 실론을 경계로 삼아 영국과 인도양을 반분하였기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프랑스 혁명전쟁을 계기로 기존 인도양을 누비던 영국과 네덜란드 상선들이 프랑스 사략선들에게 습격당하는 게 빈번해지면서 교역이 엉망진창이 된 사이 대한의 상선들이 틈새를 파고들어 교역에 나서게 되고 인도양 서부와도 교류하게 된다.
-
성 베드로의 집
기존 남평관이 서양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었지만 4부 시점에 들어 한양에 주재하는 외국 공사들이 늘어나고 이들이 제각기 공사관을 마련하고 공사관이 없이 잠시 머무르는 외교관들도 훨씬 시설이 좋은 대명관을 찾기 때뮨에 남평관을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대한 주재 외교관들끼리 어울릴 사교장이 필요해 대한 외무부에게 님평관 부지를 빌리고 각국이 돈을 모아 클럽하우스를 짓고 이름을 성 베드로의 집이라고 붙였다. 다만 기존 역사를 기억하는 뜻에서 남평관 현판은 남겨두었다고. 서양 공사들 외에 중국과 일본 공사들도 이용하고 일반 외국인들도 사교를 위해 찾는 곳이 되었다.
2.1.10. 사회
-
신문궤 제도
현종 때 과거의 신문고 정신을 되살려 궐문 앞에 신문궤라는 큰 뒤주를 두고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상소문을 넣고 갈 수 있게 하여 언로를 보장했다. 원칙적으로는 제출자의 이름을 써야 하지만 감독을 느슨하게 하다보니 간혹 무기명 투서도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
건흥옥 난로 보급
중종 건흥제 때 한양 대화재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을 서양식 3층 벽돌 건물(건흥옥이라 불린다)로 지으면서 2, 3층은 온돌을 설치하지 못해 겨울이 되면 2, 3층 거주자들이 1층으로 내려와 더부살이를 하던 문제가 현종 연간부터 서양식 철제 난로가 보급되면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난로를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바닥을 파내고 일본식 이로리를 임의로 설치하거나 싸구려 옹기 난로가 팔리는 등 화재, 안전사고 문제도 빈발하고 있다.
-
층간소음
난로가 보급되면서 건흥옥 2, 3층 거주자가 1층 거주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자 층간소음이나 오물 투척 등의 문제가 빈발하여 사회 문제가 되고 순검들이 출동할 정도의 싸움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
사설 소방대 국유화
소방도감 외에 별도로 존재하던 사설 소방대들은 출동할 때 돈을 받는다는 것이 논란이 되었으며, 일거리를 늘리기 위해 일부러 방화를 저지른다는 소문이 있었고 일부 실제로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결국 현종 대에 사설 소방대들은 해체되고 그 인력과 장비를 소방도감으로 흡수하게 되어 도성에서는 사설 소방대가 사라졌다. 그러나 지방에는 지역 사정에 따라 남아있는 곳도 있다.
-
노동조합
노동조합이 계(契)라는 이름으로 기능하고 있다. 원래는 동향 사람들끼리 돕는 조직인 동계(洞契)였으나 공업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조직한 행계(行契)가 노동조합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 이념 덕분에 노사관계도 대체로 상호 협조적인 편이다.
-
청소년근로보호법
원평제가 만든 노동법이다. 16세 이하 청소년들은 공장에서 야간 근로를 배제하거나 아니면 저녁식사를 제공해야 노동이 가능하고 임금 체불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으며, 법을 위반 시 장형에 처한다.
-
노비제 폐지
노비에 엄청난 과세를 물린 결과 대부분 사람들이 속량시키다 보니 국내에 존재하는 노비의 숫자가 매우 줄어들었다. 1833년 영국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며 세계의 추세가 노예제 폐지로 흘러가자 대한 역시 노비제 폐지를 결정하였다. 공노비였던 이들은 무기한 계약을 해주거나 종신 고용하는 형식으로 양인 신분이 되어도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었고, 궁녀는 양인 중 지원자를 받기로 했다. 기존에 노비가 맡던 궂은일들은 고액을 주어 사람을 고용하거나, 한공 또는 묘노에게 시키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노비가 되는 형벌을 받았을 범죄자들은 평생 도형수로 삼기로 했다.
역설적으로 노비제 폐지 이후 묘노들의 처우는 더 열악해졌다. 기존에는 외국 노예상에게서 묘노를 구입한 후 그들의 노비 신분을 면천해주는 대신 빚을 지워서 일종의 채무 노예처럼 사용했는데, 이때는 어찌되었건 법적으로 대한 호적을 가진 자유인이었으므로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는 할 수 없었고 이론상으로는 빚을 갚고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다.
노비제 폐지로 면천을 대가로 빚을 씌우기가 불가능해졌으나, 대한인은 노비 소유를 금하지만 외국인은 여전히 소유가 허용된다. 이 점을 이용해 묘노의 소유권은 외국 노예상이 그대로 가진 채로 대한의 사업체에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말뿐이라도 대한 국적의 자유인이었던 묘노들의 신분이 외국인 소유의 노비가 되어버리자 법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언젠가 빚을 갚고 풀려날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이렇게 고통받던 묘노들이 태평천국에 포섭되어 1841년 홍적의 난이 터지는 원인이 되었다. 1842년 재석의 결단으로 묘노에게도 노비제 폐지가 적용되는 것으로 개선된다.
-
대형
시보사
기차를 통해 한양에서 발행된 시보가 늦어도 3일 안에는 본토 전국에 배달 가능해지면서 한양에는 전국지라고 할 정도의 메이저 시보사들이 생겨나 여론에도 큰 힘을 미치게 되었다. 동서남북 4당파별로 하나씩, 중립을 표방하는 곳 2곳 해서 총 6개의 대형 시보사로 정리되었으며, 이들 시보사의 영향력을 통해 여론을 호도하거나 조작하려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
우정청, 철도청, 운하청 설립
1839년 유선전신이 실용화되고 내무부 우정국이 전신 관리 책임을 맡게 되자 법무대신 홍성규의 제안으로 우정국을 승격시켜 우정청으로 개편한다. 이와 함께 철도도감과 운하도감도 철도청, 운하청으로 개편한다.
-
귀성 풍속
원 역사에 비해 산업화가 일찍 진행됨에 따라 고향을 떠나 객지로 이주하는 이들의 수가 늘었다. 철도 개발 이전에는 교통수단의 미비로 명절에도 본가를 찾아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철도망의 확충으로 본국이라면 적어도 사흘 안에는 웬만한 곳에 갈 수 있게 되면서 명절에 기차를 타고 고향집을 방문하는 귀성 풍속이 시작되었다.[31] 아직 전산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시점이기 때문에 역 매표소에서 줄을 서서 기차표를 사는데 부작용으로 암표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2.1.11. 교육
-
초등
의무교육의 확대
중종 건흥제가 처음 한성부에 소학당을 세운 이후 현종 원강제 시대에 차근차근히 소학당을 지방에도 설치하기 시작하어 원강 34년(1774년)에는 전국 각 현 소재지에 소학당이 세워지고, 원평 9년(1791년)에는 '모든 남아는 학당에 다녀야 한다'는 의무교육 칙령이 반포된다.
-
여성 의무교육 시작
원평제 말년부터 여성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작하자는 여론이 지식층 사이에서 높아졌으나 보수적인 성품을 지닌 원평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신념을 지닌 광덕제[32]는 모두 거부했지만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 노비제도 폐지 문제처럼 이미 유럽 각국에서 여성 의무교육을 시작했으니 대한도 늦을수는 없다는 김정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성도 의무교육을 시행하기로 한다. 일반 여학교에서는 기본적인 국문, 산수, 가사, 도덕을 가르쳐 현모양처를 길러내겠다는 것을 취지로 하며, 태황태후와 황태후가 설립하기로 한 이화학당(李花學堂)에서는 사대부 규수들에게 품격있는 신부수업을 시키게 되고, 황후 권나현이 설립한 숙명의숙(肅明義塾)에서는 궁녀 양성 과정, 초등교원 양성 과정, 의학교 입시 예비과정 등 평민 소녀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시키게 된다.
-
한성대학당 창설
재석이 흥선제로 재위하면서 대한에서 연구활동을 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도움 등을 받아 기존의 서학당을 포함하여 법학, 의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 성리학 외의 고급 교육기관을 가르치는 상급학교들을 통합하여 국립 종합대학교로 창설한다.
-
지방 대학당 창설
한성대학당의 학제에 맞추어 각 도에 관립 지방대학당을 세우고, 사립대학당도 이 학제에 맞추도록 하는 등 근대 대학교 체제가 갖추어진다.
2.1.12. 문화
-
무협지
원 역사처럼 김조순이 젊었을 때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를 썼으며, 재석 빙의 직후에는 백산대인[33]이라는 작가가 쓴 '구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가 인기이다. 김조순은 삼국지연의도 한글로 번역했는데 뛰어난 필력 덕분에 4부 시점에서 대한에서는 표준 삼국지연의 판본으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
-
석전
화약 무기의 발달로 더 이상 석전꾼이 전장에서 유효한 시대가 아님에 따라 조정에서도 했다하면 사상자가 생기는 위험한 석전을 금지시키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뿌리 깊은 민속놀이인 석전을 백성들이 그만두지 않아 여전히 계속된다. 그나마 영종 때 보호장비 착용을 의무화하여 사상자라도 줄인 게 고작.
-
홍제궁
장조 때 진왕이 명나라에서 사온 가품 장팔사모와 경조가 진왕을 배려하여 사온 가품 청룡언월도,[34] 중종 건흥제가 젊었을 때 유럽에서 모은 미술품 등등 황실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흥제는 경희궁을 완공하면 보물들을 경희궁에 전시하려 했으나 인현황후가 승하하면서 우울해진 건흥제가 관심을 잃어버렸고 후대 태황들도 굳이 일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아 홍제궁이 그대로 황실 보물 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다. 4부의 재석은 이곳의 건흥제 컬렉션 중 화가 본인에게서 직접 구입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위작이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다.
-
대한축구사
현대의 축구협회 같은 조직으로 14개의 구단이 속해 있다. 과거에는 송상의 후원이 대부분이었기에 개성에서만 열렸으나 현재는 송상의 독점이 깨지며 여러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경기 방식은 리그전으로 각 팀이 다른 팀과 2회씩 대결해서 가장 승수가 높은 4팀이 준결승, 결승전을 벌인다.
-
연극
새로 만들어진 연극으로는 박문수를 배경으로 하는 부마어사(駙馬御史), 부마포적(駙馬浦贼)과 하와갑오정난(夏窪甲午靖難)을 소재로 하는 해도지용(海島之龍) 등이 있다.
반촌극단과 정도극단은 여전히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며 양대 극단으로 남아있으며 그 소속 배우들도 연예인 수준의 인기를 누린다. 이들의 극성팬들은 축구 극성팬과 마찬가지로 후리건이라고 불리며, 1840년에 재석이 한-신불랑 정상회담 및 미주 순행길에 반촌극단을 데리고 가서 공연을 시키고 돌아오면서 누손주에 들렸다가 주연 배우들이 몽땅 말라리아에 걸리는 사태가 생기자 후리건들이 무엄하게도 신문궤에 태황인 재석을 비난하는 투서를 수천통을 보내어 항의하는 사태가 생겼다.
-
시조묘
동명왕과 고왕의 사당은 숭현전(崇賢殿), 온조왕의 사당은 숭렬전(崇烈殿), 박혁거세의 사당은 숭덕전(崇德殿), 고려왕들의 사당은 숭의전(崇義殿), 단군의 사당은 숭령전(崇靈殿), 기자의 사당은 숭인전(崇仁殿)으로 모시고 있다.
-
장례 문화
미주가 개척되면서 본국에서 사망한 미주인, 미주에서 사망한 본국인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송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소금을 잔뜩 쳐서 옮기는 방법은 실패 사례도 있고 시신을 염장고기처럼 취급한다는 거부감으로 사장되었고 일단 현지에 가매장했다가 육탈이 된 후 유골을 고향으로 보내는 것으로 정착된다. 군인의 경우 화장을 해서 유골을 가져오는 것이 상례이나, 분골까지는 하지 않고 육탈될 정도로만 태운 뒤 유족이 정식 장례를 치른다. 그러던 중 잉글국 출신 장의사들이 마포에 개업하고 시신을 엠버밍해주는 사업을 시작하는데, 미주와 본국을 오갈 동안 시신이 멀쩡하여 크게 성업한다. 그러나 이후 묘지를 이장하려던 중 한 번 엠버밍 된 시신은 땅에 묻어도 전혀 썩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자 난리가 났고, 시신에 요술을 부려 귀신을 만들었다고 분노한 군중들이 장의사를 불태워버리고 잉글국인들은 간신히 탈출했다. 이후 다시 예전처럼 가매장을 하고 있으며, 대한 본국이 아닌 미주에는 엠버밍 기술자들이 존재하지만 외국인들 상대로만 영업한다.
-
투후
다트. 재석이 몸이 약한 정현공주를 위해 만들었는데 아직 대궐 밖으로는 별로 퍼지지 않았다. 투후에 대해 잘 모르는 청에서는 대한 공주가 암살 기술을 익힌다는 식으로 알려져 이상한 이미지가 생긴다.
-
메이드복
대한 황태자비가 될 러시아 공주 아나스타샤를 보필하여 대한으로 온 러시아 시녀들이 한복을 입을지 양장을 입을지 러시아 측과 논쟁을 한 끝에 재석은 드레스를 입는 것을 허용하되 가슴노출이 있는 옷은 허용할 수 없으니 아무 옷이나 입지 말고 까만 원피스 치마, 하얀 앞치마, 하얀 모자를 입도록 제복을 지정한다.
-
천손론
대한인 선비 문유립이 주장한 국수주의 환빠 이론. 단공류의 존재가 대한에 알려지자 이를 근거로 고구려 동명성왕, 신라 박혁거세, 가야 김수로 등 난생설화와 엮어 설화에서처럼 알에서 태어난 특별한 사람인 천손족이 과거에 존재했고 그들이 처음엔 바이칼호 일대에 거주했었다가 점차 사방으로 펴져 나갔고 그중 동쪽으로 향한 일부가 한국인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진 천손족을 모두 통합해서 대한이 다스려야 한다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을 책으로 엮은 '천손실기'를 ' 괴력난신으로 치부되던 우리의 옛 기록을 합리적인 자연학 이론에 따라 해석해 진실을 찾아냈다'는 타이틀을 내걸며 출판했으나... 이 세계에서의 대한은 이미 강대국으로 거듭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기에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하지만 첫 출간된 지 40년이 흐르는 동안 이 책을 읽고 문유립의 주장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생겨나 자기들끼리 모여 문파를 이루고 기존 주장을 더 다듬고 보충하며 활동하고 있기에 이 세계에서도 환빠가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35] 재석은 이런 국수주의 역사왜곡 행태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이자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여기며 경계하고 있다.
-
단발
장조 때부터 위생과 투구 착용을 위해 상투를 짧게 치기 시작해 4부 시점에 이르러선 이게 편하니 제대하고 나서도 상투를 짧게 치던지 아예 단발하고 다니는 경우도 많아졌다. 서양인과 많이 만나는 원재신처럼 서양식 단발을 하거나 구영회처럼 연구에 몰두하느라 두발 관리할 틈이 없어 짧게 친 사람들도 있다. 재석은 아예 단발령을 내릴까 생각도 했지만 원래 역사에서 반발했던 모습에 중대가리 같다며 반발하는 사대부들 의견도 있고 어차피 원래 역사처럼 외세 때문에 강제로 도입할 것도 아니고 사람들 스스로 편리함을 찾아 정착되는 풍습이라 자연스럽게 정착되게 두기로 한다.
-
춘향전
원 역사에선 남원을 배경으로 한 연애물이었던 춘향전이 여기서는 미주를 배경으로 한 서부활극물로 창작되었다. 이몽룡은 본국에서 파견된 판관, 성춘향은 미주 토인 할머니와 서반아인 어머니를 둔 혼혈미녀, 변학도는 미주에서 활개치는 악명높은 백정출신 도적으로 등장하며 결말에서는 이몽룡이 변학도를 응징하고 성춘향을 정실로 맞이하여 둘이 맺어지는 권선징악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
심청전
원 역사의 심청전과 전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나 세부적인 설정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작중 심학규와 심청 부녀는 조선이 아닌 후송 출신이며 심학규의 직업이 후송의 가난한 소작농이고 인당수의 위치는 대한령인 주산진 앞바다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원전에서 심청을 받아들인 임금이 여기서는 대한 태황으로 등장하나 심청을 황후로 간택하지 않고 심청은 친왕과 혼인해 친왕비가 되고, 맹인잔치를 열어 심학규를 찾는 전개가 사라지고 심청이 친왕에게 부탁해 후송에 있는 아버지를 직접 찾아 모셔온다는 결말이다.
-
흥부전
원 역사와 다르게 변화한 사회상이 대거 반영되어 못된 형과 착한 아우라는 클리셰와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만 동일할 뿐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다.
옛날에 황해도 봉산의 어느 부잣집에 놀부와 흥부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욕심 많은 형 놀부는 아버지가 죽자 마음씨 좋은 동생 흥부의 몫까지 집안의 유산을 전부 독차지한다. 흥부는 유산 상속에 대한 송사를 제기하려고 했으나 놀부가 집안의 대송인을 매수해 유언장을 날조하고 판결을 맡을 원님까지 뇌물로 구워삶는 바람에 흥부 가족은 빈털터리 신세로 집에서 쫓겨나고 만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천축으로 가는 교역선에서 일하게 된 흥부는 어느날 배에 잡혀와 잡아먹힐 위기에 처해있던 장수거북을 구해주는데, 사흘 후 흥부가 타고 있던 배가 폭풍을 만나 침몰하는 일이 벌어지고,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흥부를 사흘 전 흥부가 구해줬던 그 장수거북이 구해 천축에 위치한 '연소국'이라는 가상의 국가로 데려다준다. 그런데 흥부가 도착한 연소국에는 '거북을 타고 동쪽에서 온 현자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다'는 전설이 있었고, 왕위를 내놓기 싫었던 연소국왕은 흥부랑 거래를 해 막대한 재물에 자신의 딸까지 첩으로 얹어주는 조건으로 흥부를 다시 돌려보내면서 흥부는 부자가 되어 금의환향한다.
흥부가 떼부자가 되자 배가 아팠던 놀부는 자신도 흥부처럼 되기 위해 배를 구매해 바다로 나간다. 놀부는 일부러 장수거북을 잡았다가 풀어주고 보험에 가입한 배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는 보험사기까지 저지르면서 연소국에 도착했지만, 장수거북은 놀부를 연소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라 연소국에 '갖다버린' 것이었고 거지꼴이 된 채 연소국왕이 되기 위해 왔다는 놀부를 연소국왕은 대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추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그런데 놀부보다 먼저 연소국에 표류했던 놀부의 배 선원들의 고발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연소국왕은 분기탱천하여 놀부와 선원들을 골가타의 대한 상관으로 송환해버리고, 거기서 죽도록 두들겨 맞은 놀부는 다시 본국으로 끌려와 곤장 100대와 함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북변으로 쫓겨난다.
30년 후 새 임금이 즉위하면서 특사로 풀려난 놀부는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동안 흥부가 자기 가족들을 보살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쏟으며 반성, 동생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신세로 끝난다.
-
국문의 위상 상승
강대국이 된 대한과 함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상승하면서 세종이 창제한 국문의 위상도 더불어 상승하였다. 1848년 모든 법전의 국문판을 발간을 완료하였으며 중앙 부처에서 작성하는 공문서도 기존의 순 한문으로 작성하던 것에서 국한문혼용으로 나아간다.[36] 또한 국문을 대한만이 쓰는 것이 아닌 대한의 영향을 받은 여러 나라에서도 쓰게 되었는데, 2부에서 누르하치가 국문을 기반으로 만주 문자를 창시하여 청과 실위(후금)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4부 시점에서는 청의 한족들도 쓰기 불편한 한자 대신 국문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3부에서 대한의 번국이 된 하와국도 하와어를 국문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안남국에서도 대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남부 지방에서는 안남어를 쯔놈 대신 국문으로 표기한다.
-
우영만유기
원평제 치세 중엽 천주교도 사대부였던 우영 이종서라는 사람이 약 10여년 동안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쓴 전19권짜리 기행문.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대한인들에게 그동안 잘 몰랐던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을 형성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2.1.13. 식생활
-
딸기
원역사에서는 1712년에 프랑스군 첩보원 프레지에가 칠레에서 첩보 활동을 하다 발견한 현지 야생 딸기를 시초로 약 100년간 품종 개량을 거쳐 1810년대에 나온 것이 현재의 딸기인데, 이 역사의 대한에서는 태황 원평제가 미식 취미를 갖고 있는 덕에 유럽에서 개량한 최신 딸기 모종을 바로 수입하여 토실에서 재배 중이나 아직은 궁중에서만, 그것도 태황 본인이 아니면 생과일이 아닌 딸기잼으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이다.
-
미주병
샌드위치. 3부에서 재석이 빙의한 건흥제가 성친왕 시절 미주관리사로 있을 때 발명한 그것이다. 그 후로 본국에서는 미주병, 미주에서는 처음 발명됐을 때 이름대로 '전하병'이라 부른다. 재료에 딸기잼이 들어간다고 하여 군대리아를 연상케 하며, 4부에서 재석의 부친인 태자 이순은 막노동꾼이나 군졸들이 끼니를 때울 때나 먹는 허접한 음식 취급을 한다. 한편 영국에서도 원 역사처럼 샌드위치 백작이 샌드위치를 별도로 발명했다고 한다.
-
감설병
우유를 얼려서 만든 진짜 아이스크림. 그간 빙과[37]만 있던 대한에 드디어 들어왔다. 미식가인 태황 원평제가 여름에 즐긴다고 하며, 마포 번화가에서 프랑스 망명객이 경영하는 베르사유의 백합이라는 가게가 맛집이라고 한다.
-
석관식
영종 재위 초기에 미주행 배의 요리사이던 김민생이 의사인 아버지의 의학 책에서 본 압력솥 살균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병조림을 발명했고(원역사대로 같은 시기 프랑스의 아페르도 독자적으로 병조림을 만들었다), 제물포의 철공 박춘제가 주석도금 철판으로 통조림을 만들어 석관식이라고 이름지었다. 원역사와 달리 통조림 따개까지 같이 만든 것은 덤. 김민생과 박춘제는 동업자 관계를 맺고 영등포에 춘생식행(椿生食行)이라는 통조림 공장을 세워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영종의 명으로 은 2천 파운드(8천 냥)를 받고 영국에 특허권을 팔았다. 공장에서 압력솥이 폭발하는 산업재해가 종종 일어나는 대신 직원들에게 보수는 후하게 주고 있다.
-
호떡,
마화(꽈배기)
원역사에서 임오군란 이후에 유입되었으나 대한에서는 타국간 교류가 활발하다 보니 중국계 길거리 간식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마화는 지금처럼 설탕이 뿌려진 튀긴 빵이지만, 호떡은 본래처럼 고기소가 들어간 모습이다.
-
까리(천향탕)
장조 때 무굴제국과 바로 국교를 트면서 벵골식 커리가 바로 대한으로 들어왔다. 약재로 쓰는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보양식이라고 알려져 중종 시대에는 대한에서 자리를 잡았고, 군대에서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고기국에 까리 가루를 타서 배급하는데 그 색깔 때문에 군졸들은 똥국이라고 부른다. 열대지역인 술루국, 하와국에도 대한을 통해 까리가 전파되어 많이 먹는다고 한다. -
천향환
현대 일본에서 주로 생산되는 기름으로 굳힌 고형 카레. 태평천국 토벌전에서 군에 납품되었고 원래 커리에 익숙하고 인도계 병사가 많은 영국군이 이를 수입한다. 인도계 병사들을 위해 소고기가 없는 천향환을 주문하자 아예 영국뿐 아니라 인도를 포함해 각국에 팔기 위해 인도에 천향환 공장을 세워서 한국인들이 인도인들에게 카레를 팔아먹는 재밌는 구도가 나왔다.
-
양무관
임꺽정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명륜동에 위치한 고기집. 양무관 고기를 먹으면 임꺽정처럼 출세할 수 있다는 마케팅을 내세운다.
-
복어 조리 면허제
재석 즉위 초 3부 정호찬의 자손들이 집안 잔치에서 야매 숙수가 요리한 복어를 먹고 복어 독에 중독되어 집안 성인들이 떼죽음당하고 아이들만 겨우 살아남는 참사가 일어나자 명문 집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사건의 심각성 때문에 대책 마련의 여론이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높아져, 이미 면허제를 시행하는 일본의 제도를 참고하여 1837년 복어 조리 면허 제도를 만들고 기존 복어 숙수들에게는 3년의 유예기간을 준다.
2.1.14. 의학
-
병원 확충
한양의 광혜원은 병상 1200에 달하는 대형 병원으로 확장되었고, 병원장인 광혜원 제조는 종 2품, 진료부원장인 광혜원 정은 정 3품의 고위직이다. 그 외에도 관립 병원으로 100병상급 병원 6개소를 포함해 한양에 있는 병원들을 합치면 총 3천 병상이 나온다고 한다. 한양에는 삼군부에서 관리하는 '혜군원'이라는 상이군인 전담 병원도 생겼다.
-
치의학
발치를 거부하는 충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신경치료 기법이 있는데, 그 방법이란 충치를 앓는 이에 구멍을 뚫어 고름을 전부 긁어낸 후 묽은 황산을 부어 '이를 갉는 벌레를 박멸한다.'는 방법이다. 물론 아편으로 마취를 하고 시행하지만 마취가 풀린 후의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여 의원들도 그냥 발치하는 쪽을 권하는 편.
-
지문
현종 시대에 우편으로 손금을 봐주는 점집이 늘어나면서 손도장을 찍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문이 사람마다 다르고 평생 불변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원평제가 범죄자는 지문날인을 시키는 등 사회적으로 활용된다.
-
부패 기전 파악
2부와 3부 사이에서 처음으로 현미경을 발명하고 병의 미생물 기원설, 니코틴의 독성 등을 스스로 알아낼 정도로 의학이 발전한 대한 의학계는 부패도 사람의 질병과 같이 미생물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임을 파악해 냈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상하게 하는 곰팡이도 대균이라고 부르며 병균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
양매창 치료법
원역사에서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가 매독 환자에게 말라리아 환자의 피를 주입해서 1917년에 완치를 증명해 192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지만 여기서는 누손주의 의원인 김시형이 양매창 환자가 학질에 걸리자 완치했다는 현상을 보고했다. 태황 광덕제가 이 보고에 관심을 가지고 양매창 환자를 거세하는 조치를 중지한 뒤 양매창 환자들을 누손주로 보내 이 방법을 치료법으로 쓸 수 있을지 인체실험을 하도록 지시한다.
-
마비산 개발과 외과수술 발전
영종 초에 한성의학교 연구진들이 아편 추출물을 적절히 조합하여 마취제인 마비산을 개발한다. 안정제 효과를 내는 환약과 수술 마취제 효과를 내는 탕약이 있고, 이 마비산 덕분에 대한 의사들은 절단수술은 물론이고 개복수술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아 개복수술의 생존률은 그리 높지는 않아서 안 하면 무조건 죽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의 최후의 수단으로만 여겨진다. 제왕절개 수술도 가능한데 마찬가지로 자연분만을 계속 시도했다가는 산모와 태아가 모두 죽게 생긴 상황에서나 쓰는 최후의 수단이다.
-
의학당
각 지역 의학당은 도, 주의 관립 대학당 의학부로 통합되었며 한성에는 관립인 한성의학당 이외에 사립인 보성(補成), 배재(培材), 오덕(五德)의학당이 존재한다.
2.1.15. 과학, 공학
-
철도망 확충
중종 때 처음 만들어진 철도는 지속적으로 부설되어 주요 간선철도로는 한성에서 수원, 천안을 지나 조치원에서 분기하여 청주, 대전, 대구, 부산으로 가는 영남선, 공주, 전주, 나주로 가는 호남선이 있으며 개성에서 평양, 의주, 요양, 심양, 할빈, 북정원으로 가는 서북선, 철원, 원산을 지나 함흥, 경성, 회령, 북평, 삼성으로 가는 동북선이 있다. 그외에도 경인선(한양 <-> 인천), 심양선(심양 <-> 잉구), 경해선(경성 <-> 해삼위), 무산선(회령 <-> 무산), 송림선(황주 <-> 송림) 등 지선을 통해 주요 도시는 철도로 모두 연결되었으며, 심지어 북한산성을 오갈때도 강삭철도를 사용할 정도. 또한 심양을 지나 청의 수도 북경과 실위의 수도 상도까지 가는 국제선 열차까지 생겼다. -
한강철교
3부에서 철도가 도입되고 대한 전국에 철도가 깔리기 시작한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대동강, 낙동강, 압록강 등 본국 내 웬만한 강에는 철교를 놓는데 성공했으나 한강은 다른 강보다 훨씬 넓은 폭으로 인해 다리를 놓지 못 하고 있었는데 1851년 한강을 건너 노량진과 용산을 연결하는 복선철교와 인도교가 착공된다.
-
증기 자동차
3부에서 발명된 증기 자동차가 4부에서는 대중 교통수단으로 실용화되어 한양에서는 승객들을 나르는 증기 버스가 운용되고 있다. 석유 외연기관이 발명된 이후에는 석유 외연기관을 활용한 증기차도 나왔으며 재석이 청나라로 시집간 딸 정현공주의 혼수 선물로 석유 외연기관을 장착한 증기차를 청나라에 주기도 한다.
-
증기기관 수출
무종의 유훈이라 하여 중종 건흥제 치세까지 증기기관을 절대 수출하지 않았고 그 기술도 비밀로 해오다가 형제국인 청이 자체 증기기관을 개발하자 일부 기술지원만 하는 정도였으나, 1755년(원강 15년) 후송이 자체 증기기관을 개발하자 더 이상 기술비밀 유지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증기기관과 증기기관차 수출을 시작한다. 심지어 영국에도 증기기관차를 수출하였다. 단 100우력 미만 출력 기관만 수출 가능하고, 잠재적국인 후송에게는 여전히 수출이 금지되었다.
-
보온병
원역사와 달리 일찍 발명되었다. 묘사된 구조로 내부는 도자기, 중간 사이의 공간은 양털, 외부는 나무로 되어 있고 겉은 모피로 싸였다.
-
육분의,
크로노미터
3부까지만 해도 대한에서는 구식 사분의를 항해에 사용했고, 경도 측정에 필수적인 크로노미터도 3부에서 개발은 하였으나 내구성이 약해 배에 싣지 못한 상태였는데, 1779년(영태 4년) 귀국길에 대한에 들른 잉글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목종을 알현하고 신형 육분의와 크로노미터를 진상하여 그 후 대한에서도 복제 생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한제 크로노미터는 아직 영국제만 못해 어승선인 동진 함에서는 영국제 크로노미터를 사용한다.
-
증기
거중기
실제 역사와 유사하게 수원성과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정약용이 만든 것으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한다. 도성이라면 사복시의 코끼리를 동원했겠지만, 수원은 코끼리를 동원하기엔 멀다 보니 대신하여 만들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코끼리'라는 뜻으로 별칭이 기상(機象)이다.
-
석탄가스 기구
기존의 열기구가 승룡대에서 많은 양의 화목을 때서 뜨거운 공기를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처음에는 수소기구를 연구했으나 폭발성 때문에 실용화되지 않고, 수소보다는 부력이 약하지만 더 취급이 쉬운 석탄가스를 봉입한 가스 기구가 군기시에서 개발, 실용화된다. 적재량 1톤 가까이 되는 초대형 기구도 만들어지지만 아직 동력원을 구하지 못해 비행선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원평제 때 이 기구로 대한해협을 건너 북구주로 가는 실험도 했으나 무동력이라는 한계 상 추락하여 사상자를 내거나, 불시착으로 목숨은 건지거나 무사히 착륙해도 엉뚱한 곳에 닿는 등 목적지 도착에 실패하는 일이 잦자 보다못한 원평제가 실험을 중단시켰다.
-
비행선
4부 표지에 그려져 있다. 4부 201, 202화에서 묘사되기로는 원평제가 친히 비행선이라는 이름을 짓고 석탄가스 기구에 동력원만 달면 충분히 비행선이 될 수 있으니 개발하도록 지시해서 유선형 기낭과 소형 증기기관까지는 완성되었으나, 프로펠러가 배는 추진시키지만 비행체를 추진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장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퍼덕이는 날개를 단다거나 하는 다른 추진 방식만을 연구하다 실패하기를 거듭하여 광덕제 재위기까지도 실용화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다가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후에야 프로펠러를 실제로 장착해보고 작동되는 것을 알게 되어 비행선 개발에 속도가 붙고 있다. 1837년에 길이 48미터, 직경 12미터에 1백 관(375kg) 중량의 2우력 증기기관을 달고 승무원 3명이 탑승하는 시제기가 개발되어 재석과 군기시 제조 김귀훈이 탑승하여 한양 상공에서 첫 비행에 성공한다. 1844년 석유를 연료로 하는 증기기관이 도입되면서 길이 100미터에 탑재량 1톤까지 늘어난 개량형이 성공한다. 태평천국 토벌전에 1기가 투입되어 정찰, 폭격, 삐라 살포 등의 임무를 맡는다.[38] 비행선 격추를 위해 태평천국군이 열기구를 띄우자 탑재된 회선연자포를 사격하여 6기를 격추하면서 세계 최초의 공중전이 열린다. 이 비행선이 기대 이상의 큰 전과를 올리자 재석은 비행선을 5기로 증원하고 대신기전 재고를 활용한 본격적인 항공 폭탄을 생산하도록 한다. 홍천귀복 생포 작전에서는 헬리콥터와 비슷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증기기관을 수세기에 걸쳐 국가기밀로 지켜왔던 것과 달리 시대가 달라졌고 어차피 그 특성상 숨길 수도 없어서 비행선은 참관 및 시승을 허락하고, 각국에 판매까지 하며 가상적국인 후송인들도 특급 기밀인 기관실에 접근만 불허할 뿐 참관을 허용하고 시승도 시켜주며 나중엔 바가지를 좀 씌워서 팔아먹기까지 했다. 태평전쟁 종전식에서는 비행선에서 꽃가루를 뿌리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일본의 아체 토벌전을 지휘하던 중 악천후 중 무리한 출격으로 인해 최초의 비행선 추락사건이 일어나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이후 운용 원칙이 강화된다.
1850년대 시점에선 청, 일본, 러시아, 영국, 후송이 도입했으며 대한은 교관을 파견해 운용 교리와 각종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대공포와 비행기가 발전하지 못 한 과도기라 같은 비행선으로 맞불을 놓지 못 할 경우 소화기와 회선포를 동원한 화망 구성과 은엄폐라는 극히 한정적인 방법 외엔 대응 수단이 없다. 크림전쟁 때는 총탄 정도론 쉽게 격추되지 않도록 속도를 희생한 대신 방어력을 끌어올린 개량형이 등장했으며 비행선과 귀차, 보병을 조합한 제병합동 전술로 오스만군을 손쉽게 녹여버렸다.
-
포낭
3, 4부 사이에 기구가 고장난 경우 비승군 군사가 비상탈출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능이 미흡해 생명을 완전히 보장할 수는 없는 상태.
-
나선장
대한에서는 증기선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지만 외륜선 기술이 너무 발달하다보니 프로펠러 추진에 대해서는 연구만 하고 있다가 19세기 초 영국에서 스크루 프로펠러를 실용화하자 한발 늦게 프로펠러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대한 자체 기술로는 외륜선보다도 성능이 떨어지자 재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덕제는 영국에 특허료를 물고 프로펠러 기술을 사오기로 했다.[39]
-
고마 가황법 발견
원 역사에서는 1839년 찰스 굿이어가 발견하여 고무의 산업적 이용이 가능해졌는데 여기서는 대한 서학당 화학자들이 발견했다. 대한에서는 고무를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처음 접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고마라고 부른다.
-
고무신, 고무장화
고무 가황법이 발견되고 조홀국에서 남미에 보냈던 고무나무 원정대가 돌아오면서 남미 원주민의 고무신을 가져와 진상한 것에 아이디어를 얻은 송방에서 서학당과 협력하여 고무신 공장을 세운다. 원역사처럼 당혜 디자인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간용 고무신은 습기가 통하지 않아 무좀을 유발한다는 단점을 기존 가죽신 업계에서 물고 늘어져 기대만한 매출이 나오지 않았으나, 고무장화는 1844년부터 벌어진 태평천국 토벌전쟁에 투입된 대한군과 그외 다국적군 병사들이 양쯔강 유역 습지대에서 사용하면서 크게 호평을 받아, 고무장화 생산에만 전념해도 공급이 항상 부족할 정도가 되었다.
-
고무
타이어
역시 고무 가황법이 발견된 후 개발되어 마차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직 마차 바퀴에 철테 대신 고무테를 두른 수준의 초기 타이어지만, 재석은 바람을 넣은 타이어를 만들지 고민한다.
-
석유 개발
재석이 신불랑 황제 나폴레옹과 협상을 통해 텍사스에서 석유 채굴 권리를 얻어내고, 청나라로부터 고대부터 소금물을 캐내던 사천 기술자들을 지원받아서 시작된다. 원래는 바로 텍사스로 보낼 예정이었지만 당시 조정 중신들 입장에선 허황된 이야기라 검증하고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평소 국정에 관심 없던 광덕제가 하필 관심을 보여서 만주 일대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했고, 결국 광덕제가 사망한 후 태황이 된 재석이 당대 기술로 캐낼 수 있는 요하 일대를 채굴하도록 명령해서 본격적으로 석유산업이 시작된다.[40] 처음에는 고래기름을 대체할 조명용 등유부터 일반에 판매하기 시작하며, 등유는 일반 등잔을 사용하면 폭발 위험이 있어 내수사에서 등유에 맞는 호롱도 대량으로 만들어 함께 판매한다. 상인들이 '땅의 영험한 기운을 받은 신령한 기름'이라고 선전하여 날개돋힌 듯 팔리지만 석유냄새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
축전지
1835년(을미년)에 서학당 화학부에서 볼타 전지보다 수명이 길고 전압도 높으며 안전한 축전지를 개발해 을미전지로 이름붙였다. 대한에서는 이런 황산식 축전지를 전해액에 담근다고 하여 습전지라고 부른다.
-
전신기,
모스 부호,
절연 전선
재석은 미주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전신기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서학당 물리학부에 개발을 명하였고 시제품도 나왔으나 전기 신호를 중간중간 증폭시키는 부분의 해결이 안되어, 결국 미주합중국에 유학생 6명을 보내 이 부분을 배워오기로 한다. 한글 모스 부호는 재석이 힌트를 주어 이미 개발되었고, 한자 모스 부호는 재석은 굳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으나 서학당에서 자체적으로 4자리 숫자 코드를 이용해 상용한자 1만자를 배당한 코드를 개발한다. 또한 대한이 앞서가는 고무 기술을 이용해 전신선에 고무 피복을 씌운 절연 전선을 개발하여 한강 하저로 전신선을 부설할 수 있었으며, 1839년 경인 전신선이 개통된다. 개통식에서 처음으로 보낸 전문은 '태황 폐하 만세'.
-
면화약
1837년 군기시에서 전지 실험을 하던 중 엎질러진 질산+ 황산 전해액을 닦은 면 걸레로 실험용 주정 화로 불을 끄려고 덮는 순간 폭발사고가 난 것을 계기로 발명. 부상자 6명이 나왔지만, 이 사고를 통해 왕수로 면을 질산화시켜 면화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면화약의 성능을 알게 된 군기시에서 기존의 흑색화약 대신 작렬탄에 채워넣으면서 작렬탄의 성능이 대폭 상승한다.
-
무한궤도
원역사보다 일찍 증기자동차가 실용화되면서 여러 국가에서 무한궤도 발명에 나섰고, 그 중 대한 요양 사람 홍총각이 쇄판이라는 실용적인 무한궤도 발명에 성공하여 증기 귀차에 적용하여 본격적인 전차가 만들어진다.
-
석유 외연기관
대구부 열기창 장인 김기두가 석유 램프도 물을 끓일 열에너지가 있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증기기관의 연료로 석유를 사용하는 석유 외연기관을 발명했으며, 비행선에 도입되어 비행선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성과를 낸다.
-
철조망
재석이 직접 내수사에 명해 유자철선형 철조망을 발명하여, 내수사 소속 목장에 우선적으로 적용하여 맹수를 막는 데 효과적임을 입증한다. 프로이센 크루프사에서도 라이센스를 따갈 정도.
-
기루야
루스국에 수출하는 철괴를 운반하기 쉽게 손잡이를 달아서 주조한 것을 루스인들이 힘자랑하는데 써먹었고 이후 케틀벨을 활용한 운동법이 역으로 대한에 유입되었다. 대한에서는 루스어 기르야(Ги́ря)에서 유래한 '기루야'라고 한다.
-
제빙기
더위로 유명한 대구대학당 기계과에서 발명했다. 그러나 아직 기계가 너무 큰 데다 냉매로 암모니아를 사용하기 때문에 냄새도 심하며 관리가 번거로워서 자연산 얼음보다 가격이 더 싸지도 않으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는 일부 사대부들의 비난과 기존 얼음 상인 카르텔의 견제로 상용화는 잘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상의 투자로 실용화 연구는 진행중이다.
-
전구
재석은 전기의 상용화가 아직 멀었다고 여겨 발전기가 발명되고 송전망이 준비된 뒤에야 전구를 발명하려고 했으나 19세기 초에 이미 탄소 막대를 활용한 홍륜등(아크등)이 도입된 상태였으며 금속 필라멘트를 활용한 전구 연구는 재석이 그 사실을 파악하기 수십 년 전부터 진행중인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재석은 당장 대나무 필라멘트를 활용한 백열전구 아이디어를 제시하려고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한성대학당 화학과 교수 구영회가 대나무 필라멘트를 활용한 백열전구를 발명해버린다. 이후 지속적인 연구 끝에 창이와 아나스타샤의 혼례 잔치 때 첫 선을 보이고, 1851 런던 엑스포 한국관에 설치하여 영국인들에게도 보여줄 정도로 성능은 향상되었으나 발전기가 아직 발명되지 않아서 전원은 전지에 의존하고 있다.
-
타자기
한자를 사용하고 글씨를 쓰는 것 자체를 수양으로 여기던 사대부들은 기계로 글자를 찍어내는 일을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국문을 주로 사용하는 상민들 사이에서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글자을 빠르게 찍어내는 기계에 대한 수요가 있었고 오랜 고민과 연구 끝에 1850년 타자기 개발에 성공, 상용화된다.
2.1.16. 환경, 생물
-
외국 포경선과의 갈등
미국을 비롯한 유럽 포경선들이 대한 영역인 북대동양에 들어와 마구잡이로 포경을 하고, 고래기름만 빼내고 바다에 버리는 행동을 하여 대한 포경업자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원평제가 1811년 북대동양에 외국 포경선의 진입을 금하는 법령을 반포했지만 외국에게는 무시당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원평제에게 '고래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
자연발생설 부정
서양에서는 아직 자연발생설이 정설로 여기나 대한에서는 성리학의 기반인 효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자연의 모든 생물은 부모가 존재해야 발생이 성립한다는 주장을 한다.
-
호랑이 동산
황실 동물원이라 할 수 있는 홍제원에 세워진 호랑이 전용 시설. 19세기판 사파리라 할 수 있는 관람코스로 이런 데에 관심이 없었던 원평제 시절에는 임진강에서 생포한 한국 호랑이[41] 한 마리가 전부였으나 볼거리에 관심이 많은 광덕제 시기부터 대대적으로 호랑이를 수집해 대한과 번국 영역에 서식하는 5종(한국호, 강남호, 안남호, 조홀호, 천축호)과 인접한 동남아에 서식하는 3종( 아체호, 자와호, 발리호)까지 8종을 들여왔다. 유일하게 파사호는 서식지가 너무 멀어서 광덕제 시기에는 구하지 못했는데 재석 즉위 후 쿠웨이트에 상관을 설치하면서 페르시아에 부탁해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
대해우
2부에서 재석이 제례에 바치는 제물용 이외의 사냥을 금지했기에 멸종하지 않고 여전히 해우도 일대 해역에서 번성 중이다. 서양권에서는 원 역사와 달리 최초로 실물을 본 제임스 쿡의 이름을 따 '쿡 해우'라고 부른다. 제임스 쿡은 해우 표본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려 했으나 경비를 맡은 한국군이 막아서 실패하였다. 때문에 서양에는 표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비글호 탐험대에서 태황의 허락을 받고 해우도를 방문하여 표본을 얻어간다.
-
동물 개체군 보호
재석은 1부 무종 시절부터 동물 개체군 보호에 꽤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고래와 바다사자 사냥에 제한을 엄격히 걸었으며 호랑이, 표범, 늑대와 같은 본국의 맹수들도 수나 좀 줄일 뿐 아예 씨를 말리지는 않도록 하였다. 2부에선 담비 사육을 추진해 모피 사냥으로 말살되었을 야생 담비, 비버, 해달의 구세주가 되었고, 제례용 제물 이외의 대해우 사냥을 금지해 대해우를 각별히 관리했으며, 미주 개척을 시작하고서는 아메리카들소와 콘도르, 회색곰 개체군을 보호했다. 3부에서 갈라파고스 제도를 발견한 후에는 하와국에 갈라파고스 제도 관리를 맡겨 갈라파고스땅거북을 비롯한 고유 동물군을 보전케 했고, 4부에선 홍제원에 원 역사에서 멸종한 카스피호랑이, 자바호랑이, 발리호랑이를 포함해 아홉 종의 호랑이 아종 전부를 들여 사육하며 주머니늑대를 들여오기 위해 태즈메이니아로 순해국 조사선을 보내려다 대간의 반발에 부딪치자 황실 직속인 외무사 상선으로 바꿔서 기어이 밀어붙였다. 아쉽게 보호하지 못한 동물도 있는데 도도새는 3부 각성 딱 1년 전에 절멸해 크게 아쉬워 했고, 큰바다쇠오리는 4부 각성 시점에 이미 남획으로 인해 가망이 없는 수준이 되어있었다. 여행비둘기는 4부 각성 시점에 개체군은 꽤 남아있으나 서식지가 미 동부라 손 쓸 도리가 없다고 언급된다.
-
한지후단론
원역사의 알렌의 법칙과 베르그만의 법칙에 해당하는 내용. 대한의 영토가 적도 부근부터 시베리아까지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기후에 사는 동물들을 비교하게 되었고, 추운 곳에 사는 동물들이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말단 부위가 작다는 법칙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직 진화론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으며, 여러 형태로 태어난 동물들이 자신에게 맞는 기후를 찾아 이주하며 흩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
천하어보
자산어보 세계판. 정약전이 원역사와 달리 유배되지 않고 관직을 은퇴한 후 대한의 강역인 북태평양 전역을 자유롭게 직접 답사할 수 있게 되어서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져 총 12권에 달하는 해양생물학 전집이 되었다. 동판화로 찍어낸 다채로운 삽화까지 곁들여져 대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권위있는 학술서로 인정받고 있다. 여담이지만 그중 제 6권은 하와국을 다룬 하와어보이다.
-
애완
앵무새
앵무새가 자주 듣는 사람의 말을 따라한다는 것이 알려지며 사대부들 사이에서 자기과시용 애완동물로 유행하게 된다. 앵무새가 유학 경전의 내용을 외워 읊는다면 그 주인이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증거인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행이 생기자 아예 처음부터 경전을 가르쳐둔 상태로 앵무새를 비싸게 파는 상인들도 생긴다. 반면 김좌근의 앵무새는 '출타한다', '밥 가져오너라', '오늘 침소 시중은 누구냐'같은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데 일부러 그런말만 외우게 한 것이라고 한다.
-
토상
매머드. 북변의 원주민들은 영구동토층에서 얼어붙은 매머드를 햇빛을 보면 죽는 땅 속에 사는 커다란 쥐라고 생각했고 그 상아를 대한에 팔았는데 대한의 박물학자들은 딱 보자마자 코끼리 상아임을 알았다. 그리고 북방에 연구하러 간 박물학자들이 얼어붙은 매머드 사체를 발견하고 그 실체가 확인된다. '땅(土) 속에서 나온 코끼리(象)'라 하여 '토상(土象)'이라고 부르며, 라틴어 학명은 Elephas subterranus이다. 토상의 사체가 너무 생생했고 원주민들 사이에 살아있는 토상에 대한 전설도 존재했기에 대한 동물학계에서는 토상이 멸종하지 않고 어딘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이를 찾기 위한 탐상군을 수 차례 파견했다. 이런 토상 사체에서 채취한 상아는 대한의 인기 교역품이며 재석도 살아있는 코끼리를 잡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서 여기에는 제한을 안 두고 있다.
-
짐새
두건피토휘. 프랑스가 신기니아(뉴기니)를 식민지로 만들겠다 선언하자 현장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재석이 보낸 순해국 탐사선이 신기니아에서 독성을 가진 새를 발견해 '이것이 전설로만 전해지던 독조 짐새'라 보고하며 생포한 새를 본국으로 가져온다. 재석은 현대에서 유독종 조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줏어 들었었기에 두건피토휘의 이름은 몰랐으나 두꺼비나 복어처럼 먹이를 통해 독을 얻는다는 원리는 알기에 위험하니 새를 살처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반려하고 동물학자 출신 학무대신에게 맡긴다.
-
신기니아 고슴도치
가시두더지. 영태제 시기 처음으로 대한에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단공류에 대한 지식이 없어 고슴도치가 알을 낳는다고 학계가 발칵 뒤집혀 난리가 벌어졌다가 실물 표본을 구해 해부하며 분석한 끝에 고슴도치를 포함해 일반적인 포유류와는 다른 동물이라는 게 밝혀지지만 이미 '신기니아 고슴도치'라 붙은 이름은 유지되고 있다. 이를 두고 문유립이란 선비가 고구려 동명성왕과 신라 박혁거세 등의 난생설화와 엮어 '실제로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특별한 종족인 천손족이 있었고 한국인들이 그 후예'라는 환빠 비슷한 주장을 하는 나비 효과를 낳게 된다.
-
코모도왕도마뱀
순해국 선원들이 태자 이창의 혼례 축하 선물로 잡아 진상했다. 위엄찬 모습에 백성들 사이에선 용을 잡아왔다는 소문이 돌아 홍제원이 터져나가도록 관람객들이 몰려들었으나 날지도 않고, 뿔도 없다며 야유를 퍼붓기도 한다. 물론 황실 식구들처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큰 도마뱀이라는 걸 알아본다.
-
유전법칙
원역에선 그레고리 멘델이 규명하는 유전 법칙. 상희의 영향으로 소위 '업적 도둑질'은 자제해온 재석이었으나 동시대에 이미 연구중이던 다윈의 진화론과 달리 수십년 뒤에나 체계가 잡히는 멘델의 유전 법칙은 당대에 피해 볼 사람이 없고 농업과 축산에 혁신을 가져와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개념이라 경연에 생물학을 추가하고 직접 완두콩을 심어 연구에 돌입한다. 어떤 작물로, 어떻게 실험해서, 어떤 결과를 얻는지는 다 알고 있기에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서 논문으로 빚어내는 것만 남은 상황이다.[42]
2.1.17. 종교
2.1.17.1. 불교
대한의 불교 교단은 대승 불교이나 안남처럼 상좌부 불교를 적대하진 않는다. 상좌부 불교 유적인 천축사를 적극적으로 보존하려하고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믿는 섬라와 교류도 활발하다.-
원각사
일본측 국혼사인 미즈노 타다아키라에게 예물로 높이가 다섯 자나 되고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7만냥 가치의 금동탑을 기증받았다.
-
불무도
원래부터 승병들이 익히던 불교 무예에 인도 성지순례 후 배워온 요가 동작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불교의 체조.
-
탑돌이
대다수 사람들이 참가하는 종교행사를 빌미로 연인들간의 은밀한 밀회의 장으로 이용되어 부도덕하고 풍기문란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대간들의 반대상소가 빗발쳐 세조 시기 금지되었던 탑돌이가 숙조시기 한성대화재로 전소되었던 원각사가 중종시기 도성 밖으로 이전해 새로 대탑을 건축하고 봉헌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금지되기 전처럼 탑돌이가 열리는 원각사가 연인들의 만남과 밀회의 장으로 이용되자 대간들로부터 탑돌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가 다시 빗발쳤지만 중종이 대명동 제례까지 언급하며 "제례 자리에서 인연을 맺는 사람도 많은데 그럼 그것도 부도덕한 일이니 전부 금지해야 하는가?"라 반박하며 각하시켰고 이후로도 탑돌이가 계속 유지되면서 원각사 일대는 연인들간의 만남과 사교의 장소 중 하나로 남게 된다.
-
승군
약 4천 가량의 승군이 국가 동원체제 안에서 유지되며 불교 주요 수익 사업인 천축 순례단의 호위를 맡는다. 순례길은 대한 혹은 일본에서 뱃길로 출발해 벵골을 거쳐 무굴 제국령인 비하르까지 이어지는데 무굴 제국의 치안이 불안해 호위 소요가 크다.
-
천축사
앙코르 와트. 진랍과 섬라 접경 지역에 있고 천축과는 상관 없는 유적임에도 누군가 붙인 천축사란 이름이 대한에서 통용되고 있다. 대승 불교가 아닌 상좌부 불교 유적이나 까마득히 오래전 부처를 섬기며 지은 크고 진귀한 사원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져 중요하고, 보존되어야 할 유산으로 보고 있다. 이따금 승려들의 순례도 이뤄진다. 대한 불교계는 천축 순례처럼 천축사 방문을 핵심 수익 사업으로 성장시키려는 욕망을 오래전부터 품어왔으나 명명제 시대부터 상좌부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화된 안남이 진랍에까지 손을 뻗쳐놓아 여의치 않던 차에 임자남정이 발발하자 천축사 보호를 명목으로 천축사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승군과 의용병 5천을 꾸려 참전한다.
2.1.17.2. 예수교
-
천주교
대한 내 천주교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예수회는 원 역사와 동일하게 1773년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해체되었고, 41년 후인 1814년 재건되긴 했으나 대한 내 천주교의 주도권은 이미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갔다. 1852년 임자남정이 발발하자 천주교 탄압을 자행한 안남 조정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고 8천의 의용군을 편성해 참전했다.
-
루스 정교
동소문 밖에 성당이 있으나 대한 본토에선 훨씬 먼저 정착한 천주교가 우위를 점했고, 개신교처럼 해외 영토에서 교세를 넓힐 처지도 아니라서 대한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중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제외하면 존재감이 극히 미약했다. 흥선제 시기 러시아 공주 아나스타샤가 대한의 황태자비가 되는 국혼이 성사되어 이전보다 존재감이 커질 기회를 잡게 된다. 대한은 아나스타샤 개인의 신앙에 대해선 어떤 방해도 하지 않을 것을 보장했으며 태자비가 머무는 함화당에 예배당을 마련해주고 매일마다 개인적으로 갖는 미사와 동소문 밖 성당에서 거행되는 주일 미사 참석을 모두 허용했다.
-
개신교
대한 조정은 선교 금지 기조를 유지했으나 미국 선교사들이 유입되며 대미주에 반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주 최대 유지인 원씨 가문은 집안 전체가 개종한다. 초기에는 탄압이 있었으나 본래 대한의 정책은 '반주교 선교 금지'였지 '반주교를 믿는 자국민 처벌'이 아니었고, 법왕청의 예수회 해체에 대한 항의도 겸해 선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반주교라는 멸칭도 개신교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대체되었지만 아직 미주에만 신자가 있기에 본토에 퍼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대한식 국가 제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관직에 진출할 가능성이 없어 재석도 위험요소로 보지는 않고 있다. 종종 무과 합격자는 나온다. 의료선교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본국에 배재의학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미션스쿨에 대한 반감으로 입학생을 잘 모으지 못해 1기 졸업생이 겨우 3명이었다.
-
후기 성도 교회
창시자 조셉 스미스가 일부다처제를 이유로 미주합중국에서 탄압받자 7000여 명의 신도와 함께 대한령 미주로 이주하여, 원역사처럼 청구호 주변에 거주를 허락받는다. 이후 뒤늦게 탈출한 신도들이 합류하여 최종 1만을 넘기고 부안의 네덜란드인 공동체(2만) 다음가는 대한내 백인 공동체가 되었다. 어느정도 기반이 잡히자 일부다처제 교리를 내세워 적극적인 해외 선교를 시도하고 있다. 골수 가톨릭 국가인 술루국에서는 이단의 범위에서도 벗어난 악마 숭배자들로 보고 있으며 신도든 선교사든 술루국에 오는 순간 모조리 화형에 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2.1.17.3. 회회교
2부에서 이기빈에 의해 구해져 조선에 발을 들인 흑룡군 소속 무슬림들은 음주를 즐기는 나이롱 신자들이었고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과는 여전히 별 교류가 없으며 무슬림이 다수인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아체 지역은 번국과 일본, 네덜란드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대한은 끼어들려 하지 않아서 서로 부딪칠 일이 없고 대한 내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다.재석이 석유 산지 확보를 위해 페르시아 만 진출 및 일대 확보를 계획하고 있어 추후에 접촉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페르시아 만 진출의 사전 작업으로 쿠웨이트에 상관를 설치했으며 불나이를 다섯 번째 번국으로 받아들여 이슬람 번국도 생겼다.
2.1.17.4. 덕성도
3부에서 타락의 조짐을 보여 사이비 종교가 되어 태평천국의 난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독자들의 추정과 달리 덕성도 자체는 정상적인 종교로 발전하여 기성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신 배상제회가 예수교가 아닌 덕성도의 분파로서 등장했다. 규모상 불교, 예수교에 이은 3위 교단이며 원 역사에서 전성기 시절의 천도교와 비슷한 위상이다.천주교에 힌두교 교리가 섞이면서 일견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묘한 차이를 보이는데 가령 천주교의 예수는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고 가르치는데 덕성도의 예수불은 '하지만 원수가 칼을 겨누면 너도 칼을 겨누라'는 구절이 추가로 붙어있다. 다툼을 피하고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는 천주교 교리에 비해 한층 적극적인 자기 방어를 주장하는 것이 특징. 덕성도가 중국과 안남에서 당한 모진 탄압을 생각하면 필요한 교리이기도하다.
초대 대종사 김춘삼의 후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듯하다.
-
교세
덕성도 측에서 주장하는 신도 수는 총 300만이다. 배상제회가 인구 수천만의 태평천국의 국교가 되면서 수적 규모 면에서 이단 분파에게 훨씬 밀리게 되었다.
-
상징
덕성도의 상징은 세 번 나타나는 부처를 상징하는 세 개의 원과 그 셋을 연결하는 광진을 의미하는 작은 원이다. 십자가처럼 덕성도의 상징이 되어 깃발에 사용하거나 귀걸이로 만들어 달고다니곤 한다.
-
천사
덕성도의 교주. 그러나 중앙집권과 거리가 멀고 개인의 수양과 기도를 중시하는 덕성도의 특성상 법왕과 달리 신도들에 대한 통제력은 약한 편이다. 11대 천사는 현도.
-
대종사
덕성도에서 천사 다음가는 2인자. 천주교의 추기경에 해당하며 조정과의 교섭 등 실무는 주로 이쪽이 수행한다.
-
시조대천사
초대 천사였던 창시자 광진은 사후 '시조대천사'라고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생전의 광진이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결말. 그래도 이후의 천사들은 신격화되지 않은 것을 보면 광진의 뜻이 일부나마 지켜지긴 했다.
-
구월산
광진이 덕성도를 창시하고 죽은 뒤 묻힌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가 되었으며 모든 덕성도 신도는 평생에 한 번은 참배하고 싶어 한다. 이슬람의 순례처럼 의무까지는 아닌 듯. -
천산궁
구월산에 지어진 덕성도의 본원.
-
성덕도
불교의 불무도에 육군 도수체조와 태극권이 합쳐져 만들어진 덕성도의 고유 체조.
-
진혼사
논산 전투에서 전사한 왜병들의 혼을 위로하는 사원. 조선군 전사자들을 기리는 사당인 충의사 옆에 지어졌다. 주지가 일본인이다.
-
해외 선교
주변국으로도 많이 전파되었는데 청으로는 대한에서 노동하다 돌아간 한공들을 통해, 후송에는 교역선을 통해 덕성도가 전파되었으며 중원의 신도 수는 대략 100만이 넘는다. 일본에도 약간의 신자가 있다. 후송의 소태제는 외래 종교인 덕성도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학살을 시도하고 이 때문에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무려 5년간 지속된다. 당시 대한의 덕성도인들은 물자와 무기를 모아 후송의 덕성도에 조정 몰래 전달해서 지원했다.
후송 덕성도가 지하조직화되면서 그들 중 상당수가 배상제회처럼 이단이 되거나 아편 밀매에 뛰어든다. 후송 덕성도 교단들의 통제는 이후 임칙서가 아편 잠상 토벌에 덕성도 교단들의 도움을 받기로 하면서 차츰 회복되었다. 그러나 후송에서 배상제회를 토벌하겠다면서 아편 잠상 토벌에 협력하던 정상적인 덕성도인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생기자 분노한 덕성도인들의 대다수가 배상제회 쪽에 붙어버린다.
안남에도 제법 교세가 있으나 유교와 대승불교 외에 모든 종교를 탄압한 명명제 완복교 시대부터 안남인 덕성도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한인 신자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안남인 신자들을 고용하는 우회적 방식으로 탄압을 피해왔으나 완복시의 폭정으로 한인 농장이 대대적으로 습격 받으면서 한인 신자와 안남인 신자가 한꺼 번에 화를 입자 7천의 의용군을 편성해 임자남정에 참전한다.
-
타 종교와의 관계
대한 내 예수교, 불교 교단에선 사이비로 취급한다. 서양 국가들은 예수교가 아니고 예수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의 분파 정도로 보고있다. 예수교 국가들이 덕성도의 분파인 배상제회는 이단이라며 분노하는 반면 덕성도는 소 닭 보듯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덕성도는 강대국 대한의 기성종교인 반면 배상제회는 자신들을 선제공격한 도적들의 종교라는 점과 예수를 수천년 전 죽은 석가모니와 동일시하는 것보다 현재 살아있는 교주를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더 괘씸하다는 점이 모두 작용했을 듯하다. 반면 덕성도 측에서는 예수교와 불교가 모두 옳다는 것이 교리의 핵심인만큼 타 종교에 우호적인 태도로 보인다. 임자남정처럼 각자의 이해득실이 겹치는 사안에선 나란히 뜻을 모으기도 한다.
2.1.18. 연도별 주요 사건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무신지변 - 1788년
원평제의 장남과 차남이 병으로 죽은 틈을 타 목종의 후궁인 귀비 오씨가 원평제를 독살하고 자기 소생인 숙왕 이정을 태황으로 추대하려던 음모. 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관련자들은 처형당하고 오씨는 누손주로, 이정 일가는 북변으로 종신 유배를 당한다.
-
원릉 도굴 미수 사건 - 1809년
원평 27년, 성친왕의 첫 왕비였다 사후 황후로 추존되었던 인선황후 강씨가 묻힌 원릉(元陵)이 도굴당할뻔했던 사건. 생전 남편 성친왕(3부 재석)에게 선물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부장품으로 같이 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도둑들이 이를 노리고 땅굴을 파 도굴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붙잡힌 뒤 주모자들은 모두 거열형을 당하고 일가족은 전원 북변으로 유배, 능을 관리하던 능참봉과 경계를 서던 수릉군 및 해당지역 수령인 양주목사까지 전원에게 책임을 물어 해우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지고 대신들도 여러명 사직해야만 했다. 원 역사의 임진왜란 당시 선릉과 정릉 도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대한이 세계에 많이 알려진 강국이 돼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 작중 대한 사상 최악의 도굴 미수 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
탐보라 화산 대분화 - 1815년
원 역사와 똑같이 탐보라 화산이 분화하여 전 세계적으로 몇 년간 흉년이 이어지고 이를 틈타 종교계 일부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과거에 경신대기근 등 몇 차례 대재앙을 겪으며 기근 대비 노하우가 쌓이고 물류망과 구휼 대책 등 사회적 인프라를 충분히 갖춘 대한은 큰 사회적 혼란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
기묘년의 변 - 1819년
원평 37년 일어난 대한 해군 사상 최악의 사고. 누손주 남부통제영에 배속된 2등 대선 한 척이 관리부실로 화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
대한-신불랑 회담 - 1828년
대한 황태손 이진(재석)과 신불랑 황제 나폴레옹의 정상회담을 통해 신불랑의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이 뉴멕시코 주 일부, 서북부 소노라 주 전체와 치와와 주 ⅔를 900만 달러에 대한에 판매하고, 대한 미주와 신불랑을 잇는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합의한다.[43]
-
제2차 경인조약 - 1830년
대한 태황 광덕제를 대리한 대한 태자 이진(재석)과 일본국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츠구 사이에 맺은 조약. 광덕제의 뜻인 유구의 독립 박탈과 대한 번국 편입에 대해 일본이 허용하는 대신 일본도 아모국을 일본의 번국으로 편입하여 균형을 맞추도록 하고, 유구, 아모국에서의 양측 군사력 현상 유지 및 양측 민간인의 재산, 상업 활동은 그대로 보장하며, 양국의 무역항을 상대국에 추가 개방하고, 유구-아모국 편입 조치 명분으로 대한 태황의 조카딸을 이에츠구의 외조카이자 천황의 친족인 간인노미야 나루히토에게 시집보내고 일본측도 상응한 국혼을 시행한다.
-
유구 제위 선위식 - 1831년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정식으로 유구 황제 상육이 대한 태황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는 선위식을 갖고 유구는 대한의 번국인 왕국으로 격하된다.
-
남응중의 난 - 1832년
광덕제의 이복동생인 소왕 이청이 광덕제와 태자 재석을 동시에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하려는 야망을 품고 문객들과 함께 국구 김조순의 장례식장에 광덕제와 태자가 모이는 틈을 타 폭탄 테러로 암살하려고 소왕저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실수로 폭발하면서 들통이 난다. 수사 책임을 맡은 재석은 소왕의 아들인 종성공이 일본과의 국혼 대상자인 점 때문에 소왕이 역모 주동자임을 공표할 수 없어 폭탄 제조 책임자인 남응중 등 문객들이 벌인 짓이라고 공표하고 소왕 일가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진해서 북변으로 이주하며 종성공은 화재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처리하고 국혼 대상자도 영왕의 아들 명주공으로 바꾼다. 역모 혐의로 체포된 소왕파 300여 명 중 무혐의로 방면된 이들을 제외한 주동자 30여 명은 참수되고 나머지 200여 명은 광덕제의 서양 취향 때문에 판옥선의 노젓는 노예로 20년간 일하는 벌을 받는다.[44]
-
백두산 봉선 의식 - 1835년 음력 5월 5일
흥선 3년에 예부에서 대한도 당당한 천자국이니 예전 중원 천자들처럼 봉선 의식을 치르자고 건의하고, 재석은 시큰둥했지만 의외로 조정 대신들의 호응이 높아 백두산[45]에서 봉선 의식을 치르기로 한다. 수행원만 3천 명[46]에 외교관, 전국에서 모여든 유생들, 각 종교 지도자들, 평민 구경꾼까지 포함하면 약 2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 축제가 열린다. 이 소식을 접한 후금에서는 제물에 보태라고 소 1천 마리를 보내주며, 청나라에서는 태산에서 자기들도 봉선 의식을 치르기로 한다. 후송에서도 진정한 중원 천자의 봉선을 보여주겠다는 경쟁심을 보이나 중원에서 봉선 의식을 올리는 장소인 태산이 청나라 강역이라 형산에서 봉선을 하게 된다.[47] 재석은 봉선을 마친 후 3개월간 속말주, 연해주 지역까지 순행하고 현지 민심을 돌본 후 돌아온다.
-
무술남진 - 1838년 ~ 1841년
3부의 계미남변으로 대한이 누손주를 정복한 지 100년이 넘게 지나도록 아직도 굴복하지 않고 있는 누손주 남부의 모로족을 토벌하기 위해 재석이 추진한 대규모 토벌전. 4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누손주 남부의 섬들을 하나하나 제압하고 모로족의 근거지인 갈래도에서도 모로족을 완전히 내륙으로 쫓아내는 등 성과를 거둔 후 후금 내전과 태평천국 등 다른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일단 토벌을 종료한다.
-
한-신불 정상회담 - 1840년 6월 1일 ~ 7월 1일
북아메리카 대륙횡단철도 개통을 기념하여 신불랑 나폴레옹 1세가 대한령 미주에서 한번 만나자고 요청하고, 나폴레옹을 존경하던 재석이 현직 태황이 미주에 간 전례가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에 응해 1840년 대미주 천사동에서 한-신불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약 한 달 간 진행되었으며, 재석은 이를 기념해 천사동을 두 황제가 만난 곳이라 해서 제회부(帝會府)로 개명한다. 재석은 귀경길에 하와국, 누손주, 대남도, 유구국을 순행하고 12월에 한양으로 귀경한다.
-
홍적의 난(태평천국 묘노 반란 사건) - 1841년 음력 9월 그믐(양력 11월 12일)
1840년 후송의 배상제회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묘노들 속에 배상제회 선교사를 섞어서 대한으로 보내 만들어두었던 태평천국 추종 조직이 대한에서도 묘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포섭 대상이던 한공 왕가가 이를 의금부에 고변하면서 발각된다. 왕가는 포상으로 대한 국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모든 배상제회 조직을 적발한 건 아니라서 결국 반란이 일어나는데 그것도 대한 뿐 아니라 하와국[48], 누손주, 조홀국[49], 대미주 등 술루국[50]을 제외한 대한 전역, 일본, 청, 영국령 홍콩, 신홀란도, 안남, 누벨프랑스[51], 미합중국, 남미 등 묘노들이 있는 곳 전역에서 홍수전이 지령한 날짜에 동시에 반란이 일어난다. 대부분은 얼마 안 가 진압되나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게 되며,[52] 배상제회에 대해 신경 안 쓰던 나라들도 이를 계기로 배상제회 탄압으로 돌아선다. 특히 대한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일본은 막부에서 정식으로 토벌군을 편성했으며 홍적의 난으로 홍콩이 폐허가 된 영국은 의회에서 정규군 3만명 파병을 결의한다.[53] 묘노들 중 정통 덕성도 교인들은 이단인 배상제회에 맞서서 관군을 도와 싸웠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자유를 얻고 포상금을 받는 경우도 나왔다.
-
태평천국 토벌군 파병 - 1843년 ~ 1848년
원 역사의 태평천국보다 더한 어그로를 끌었고 대한을 포함해서 참전국가들도 더 늘어나서 원 역사처럼 홍서당의 패배가 점쳐젔으나, 독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게릴라전을 통한 전과 확대와 원 역사보다 뛰어난 홍수전의 능력[54], 거기다가 후송군의 막장스러운 부정부패와 연합군의 대민작전 실패로 인해 전황은 의외로 팽팽한 상태이다. 이 세계관에서 명나라 멸망의 신호탄이 되었던 양응룡의 난과 유사점이 있으며[55] 무더운 지역에서 인종차별과 문화차이로 대민작전에 실패해 게릴라전에 시달리는 서양 연합군의 모습을 보고 원 역사의 베트남 전쟁이 떠오른다는 의견도 많다.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한 여러 나라에서 철군 여론이 높아지고 하나둘 철군하는 가운데 그와중에 대한은 회선연자포, 귀갑차, 비행선 등 신무기의 활약으로 연합군 중 가장 큰 성과를 내고 있었으나 대한 역시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철군하자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천강군의 공수작전으로 홍수전의 장남인 홍천귀복을 생포한 것을 명분으로 철군을 결정한다.
-
한러국혼 - 1851년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가 대한과의 동맹을 강화하기를 원해 자신의 장녀 아나스타샤를 대한 황태자비로 보내겠다고 흥선제에게 먼저 제의한다. 이를 두고 대한 내에서 찬반의견이 대립하나 태황 흥선제가 국혼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아직 어린 아나스타샤가 대한의 문화와 법도에 적응할 수 있게 미리 약혼을 맺고 민며느리로 일찍 대한에 보내진다. 이 국혼성립이 알려지며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이 긴장하게 되고, 대한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걸 우려한 청이 자국 황태자와 흥선제의 딸 정현공주의 국혼을 제안하고 곧이어 태평천국 토벌군 철수로 초조해진 후송도 자기네 황제의 적녀인 영화공주를 대한 황태자의 후궁으로 보내겠다는 제안을 내밀고 이를 대한이 전부 받아들이면서 대한이 러시아, 청, 후송과 삼중으로 국혼을 맺게 되는 나비효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1851년 태황 흥선제의 아들 황태자 이창과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딸 아나스타샤 공주가 정식으로 혼인하면서 대한은 고려이후 그리고 건국 이래 최초로 외국인 태자비를 황실에 들이게 된다.
-
브루나이, 사라왁 번국화 - 1851년
3부에서 술루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대한의 번국으로 건국된 술루국은 보르네오 북동부의 영유권을 놓고 남쪽의 브루나이 술탄국과 100년이 넘는 전쟁을 벌여왔는데 브루나이 술탄국은 영국인 용병 제임스 브룩에게 사라왁을 봉지로 내려주고 술루국과의 전쟁에 투입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으나 대한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술루국이 브루나이 술탄국의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마침내 승기를 잡고 술탄의 무능에 학을 뗀 영주들도 술탄을 배신, 심지어 용병으로 고용했던 제임스 브룩도 영지인 사라왁을 들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사면초가에 처한 브루나이 술탄국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대한에 입조하여 대한의 번국이 된다. 브루나이 술탄국이 대한의 번국이 되었단 소식을 접한 제임스 브룩 역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로 대한에 입조하면서 사라왁도 대한의 번국이 된다.
-
임자남정(壬子南征) - 1852년
대한 덕분에 나라를 재건했음에도 이중봉신과 외왕내제 고집으로 이전부터 눈에 날 짓을 꾸준히 해온 안남은 안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만드려는 루이 나폴레옹의 분탕질에 속아 넘어가 대한을 적대하기 시작하고 홍서당의 난 때 상국인 대한이 싸우고 있는 태평천국과 밀무역을 벌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한의 거듭된 사죄 요구에도 갖은 핑계를 대며 책임을 회피하던 안남왕 완복시는 유교 국가에서도 도저히 두고볼 수 없는 난행과 상국인 대한인을 강제 동화시키는 민족 말살 정책으로 기어이 대한이 임계점을 넘게 만든다. 결국 재석은 안남 정벌을 지시, 누손에 집결한 대한군 7만은 복승에 있던 선발대 1만과 함께 본군은 안남 남부, 별군은 수도 후에를 목표로 안남 정벌을 개시한다. 한편 대한과 함께 안남의 양다리 상대였던 후송은 태평천국의 밀무역 루트를 차단하고 안남에서의 지분이라도 챙기기 위해 대한의 안남 정벌을 인정하고 월왕부가 군사행동을 맡아 대한군의 진군에 맞춰 안남 북부를 침공한다. 대한 조정은 논의 끝에 안남을 완전 제압하면 안남을 셋으로 분할, 완씨 왕실은 완복시의 이복동생 완복홍항을 괴뢰왕으로 세워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만을 남겨주고 중부는 화산 이씨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북부 통킹 지역은 후송 월왕 조심원의 몫으로 주기로 결정한다. 안남은 그간의 만용을 압도적인 체급의 두 강국에게 찢겨지는 것으로 돌려받게 된다.
안남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흩어진 정규군과 합류하며 원 역사 조선의 왜란, 호란 양상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가정부를 구원하겠다고 달려오다 각개 격파 당하는 남부 의병들은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출하러 제각기 몰려오다 각개 격파 당하거나 피로스의 승리 후 퇴각한 병자호란 근왕군을, 점과 선으로 이어진 대한군 점령지를 게릴라전으로 습격하는 중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연상시킨다.
북부는 정씨 왕조 재건을 외치는 현지 세력의 지지를 받아 순조롭게 해방과 동경을 함락시키면서 무난하게 점령하는 듯 했으나 월왕 조심원이 여씨 왕조의 후손을 찾아 남월왕에 봉하라는 남경 조정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립을 위해 월왕부 영토로 병합을 시도하다 후송군에게 협력했던 현지 세력이 들고 일어나고, 극소수의 완씨 지지세력과 관군 연합까지 저항을 벌여 3파전이 벌어진 가운데 아편 무역로가 막히게 생긴 서나라 군대까지 태평천국의 사주를 받아 개입하며 난장판이 된다.
이미 대한과 안남, 대한의 여섯 번국, 후송, 일본, 섬라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상태에서 태평천국과 서나라까지 더해져 동아시아 전체가 뛰어드는 대전으로 스케일이 커지고 있다.
2.2. 대한의 국외 영토(대한령 미주 제외)
2.2.1. 대남주
외지 출신 대과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라 한다.-
대남병
오도리, 왜인 여진, 하와병과 함께 대한이 자랑하는 전투민족. 오도리가 대한의 카자크라면 이쪽은 대한의 구르카라 할 수 있다. 대남주가 대한의 영토가 된지 20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도 여전히 강인함을 유지해 등선군, 수군, 천강군 등 다양한 병과에 진출해 있으며 후송 조정에서도 그 악명을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르며 대한군 제식 군복을 착용하게 된 대신 전립을 쓰지 않고 깃털을 달고 화려하게 치장한 단검을 패용한다. 대남주는 엄연히 대한의 영토지만 충성 맹세만 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산번 출신인 대남병들은 하와병과 같은 번병 대우를 받는다.
-
대남 정씨 분관
원래 표면상 경주 정씨인 1부 정호찬의 후손이었던 정일한의 후손들은 대남도에 정착한 후에도 계속 경주 정씨의 분파로 살았다. 그러나 대남도 경주 정씨 일가는 대남도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고 심지어 조홀국 국왕이 되는 등 경주 정씨의 어느 누구보다도 출세를 했음에도 본토의 경주 정씨 본가에서는 대남 정씨를 계속 낙도에 사는 놈들이라며 무시했고 가문을 위해 재물이나 바치는 호구 노릇을 하기를 요구했다. 이런 대우가 지속되자 1700년대 말, 대남 정씨는 족보를 재편찬하면서 자신들은 더이상 경주 정씨의 일개 파가 아닌 대남 정씨라며 새로운 본관을 파서 독립해나갔다.
2.2.2. 북구주
여전히 대한령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일본이 관리를 위임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일인들의 성향상 문과보단 무과 합격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북구주 거주 한인들은 경상도로 가서 공부해서 과거 응시 때 경상도 연고로 집계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통계의 함정.2.2.3. 누손주
감영은 남중성이다. 대한이 스페인령 동인도 제도를 구입한 뒤 누손주 관할로 묶었다. 인구는 미주의 절반 정도이나 그 절반은 토인이다. 양반 이주자가 드물며 대과 합격자가 한명도 없는 해가 허다하다고 한다. 교육 시절이 부족해 양반 자제들은 10대 초반에 일찌감치 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일반적이다.[56]수많은 섬과 산으로 이뤄진 험준한 지형에 대한에 적대적인 토인부족과 도적떼가 산재해 있다보니 누손주 도독은 미주대총관과 마찬가지로 현지 순검대와 속오군에 대한 지휘권 행사가 가능하다. 군사 경험 쌓는 게 가능한 몇 안 되는 고위 문관직이라 문관 출신 육군대신들의 이력을 올라가보면 대개 누손주 도독을 역임했다.
2.2.4. 해사도
요충지인 해사도는 대한 직할령으로 병력 8천명과 함선 30여척이 항상 주둔하여 말라카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조홀국을 위협하는 아체 술탄국과 섬라국을 견제하고 있다.2.3. 대한의 번국
4부 초반 시점 술루국, 하와국, 조홀국이 공식적인 대한의 번국이고 안남은 대한과 후송에 이중으로 칭신한 명목상의 번국이었다. 술루국은 동남아 동부 해역 중간에서 토착 이슬람 세력과 해적을 밀어내며 드넓은 산악과 섬으로 이루어져 빠른 정복이 불가능한 누손, 나아가 동남아로의 안정적 세력 투사에 기여했다. 하와국은 본국과 미주를 잇는 징검다리이자 북대동양 해상 패권을 책임지는 기착지로 가동했으며 조홀국은 대한의 목구멍이라고 할 수 있는 말라카 해협의 안정을 유지해 대한의 행정적, 물적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이후 4부가 진행되면서 광덕제 시절에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사실상 대한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유구국이 칭제를 내려놓고 대한의 네번째 번국으로 들어왔고, 이어서 1850년대부터 대한이 본격적인 동남아 서열 정리에 들어가면서 보르네오 북부의 불나이와 사라왁, 대한이 안남을 정벌한 후 안남을 분할하면서 세운 중월국과 남월국이 새로운 번국으로 들어오며 대한은 무려 8개의 번국을 거느리는 대제국이 된다. 불과 20여 년 만에 3개에서 8개로 수가 크게 늘어났다.의전 서열은 초대 국왕이 건흥제의 서장자이며 동남아 지역으로 세력 확장에 큰 공을 세웠고 이후로도 100년간 대한 옆에서 변함없이 싸워온 술루국이 가장 높고 그 다음부턴 들어온 순서대로 하와국, 조홀국, 유구국, 불나이, 사라왁, 중월국&남월국 순이다.
번국의 외교권은 영사 수준으로 제한되며 공식적으로 조공을 면제받은 유구를 제외한 번국들은 1년 2회 조공의 의무와 상국이 요청시 군사를 내어 원호할 의무를 진다. 본국에서 집정 대신 파견 유무는 번국별로 차이가 있으나 남&중월을 제외하면 있어도 총독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57]
원나라의 속국이던 고려시대와 칭제건원 이전 명의 조공국이었던 조선 당시에 상국의 지나친 내정간섭, 과도한 공출과 수탈, 화번공주나 칙사의 갑질과 진상에 시달렸던 경험으로 을의 설움을 너무나도 잘 알던 대한은 중화권 국가들을 반면교사 삼아 휘하 번국들을 대상으로 무력을 앞세운 복속과 억압이 아닌 온건한 회유정책을 고수하며 상호간의 이익을 창출하는 지속적인 신뢰관계를 쌓았다.
지나친 내정간섭이나 공출을 삼가고 자국민이 번국에서 범법행위를 저지르면 처벌하고 피해보상을 해줬으며 군사를 징병할 경우 반드시 물질적 대가를 지불해주고 전공만큼 전리품과 포로를 보장해주었다. 무언가 문제가 되는 행위를 중지시키는 것도 강압적인 명령을 내리는 대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설득하는 등 불만이 생기는 걸 미연에 방지했으며 조공에 있어서도 번국들이 바치는 것 이상의 답례품을 하사하는 등 번국들 입장에서 이상적인 상국이기에 애초에 이중칭신에 반골기질 강한 안남을 제외하고 각 번국들은 대한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며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탄압을 금지한 대한의 번국들답게 종교 지도가 굉장히 다채로운 것도 특징. 왕가가 믿는 종교만 따져도 천주교(술루국), 하와이 전통 신앙(하와), 불교(조홀국), 신토(유구국), 이슬람(불나이), 개신교(사라왁)으로 모두 다르며 피지배층은 전통 신앙 기반으로 종교의 용광로가 된 하와국이나 힌두교와 배화교, 이슬람이 공존하는 조홀국 등 지배층보다 한결 다양하게 얽혀서 살고 있다.
추가적인 번국 후보로는 대한의 안남 정벌 이후 대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안남과 섬라의 완충지대이자 두 나라의 각축장에 시달린 진랍, 남장 등이 꼽힌다. 또한 벵골은 공식적으로 대한의 번국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대한과 밀접해 있어 은연중에 번국으로 여기는 시선이 존재한다.
2.3.1. 술루국
술루국 述壘國 |
||
국호 | 술루국(Reino de Sulú) | |
위치 | 술루 제도, 보르네오섬 북부 | |
수도 | 이사변(伊思邊, la Isabella)[58]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이(李) | |
국가 원수 | 왕 | |
역대 군주 |
이진서(디에고 1세) 이성진(프란치스코 1세) 이정원(후안 1세) 이홍일(펠리페 1세) 이계성(아우구스틴 1세) 이원석(가스파르 1세) |
|
문자 | 한자, 한글, 로마자 | |
종교 | 가톨릭, 이슬람 | |
민족 | 한인, 스페인인, 일본인, 안남인, 말레이인 |
현종 말엽부터 본국에서 파견하던 집정이 폐지되고 술루국왕이 내정을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술루 왕족들은 대한식 이름과 스페인식 이름을 같이 짓는 것과 술루 왕자들이 본국에 일정 기간 건너와 친위군에서 복무하는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1840년대 중반 기준 인구는 약 50만명. 20만은 원주민, 천주교 탄압을 피해 망명해와 정착한 안남계가 5만, 나머지 절반은 한인, 스페인인, 일본인이 3:1:1 정도 비율로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부족하기에 보르네오섬 내륙은 직할령이 아니며 원주민 영주들에게 선물을 주며 교류하여 신속시킨 상태이다. 원주민 영주들은 신앙과 자기 세력권을 유지할 권리를 보장 받는 대신 조공과 병력 지원의 의무를 가진다. 국교는 가톨릭이지만 무슬림 영주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으며 무슬림도 중간 관료나 군인으로 출세가 가능하다.
대한의 번국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로 건국 이래 쭉 보르네오섬의 이슬람 토후국들과의 전쟁을 지속 중이며 대한의 모로족 토벌에도 적극 협력해 항상 병력 일부를 파견해 둔다. 이렇다보니 전쟁 보단 교역으로 방향을 튼 조홀국을 다소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남부 보르네오를 식민 지배하는 네덜란드는 술루국의 확장을 마뜩찮아하나 대한에게 진 빚도 있고, 북부 보르네오와 네달란드령 남부 보르네오 사이에 어느쪽 지배도 받지 않는 토후국들이 산재하고 있어 아직은 관망 중.
군대는 인구에 비해 좀 과한 규모인 3만 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지비와 병기는 대한의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보르네오와 갈로도의 정글에서 매일 같이 교전을 벌인 덕분에 술루국 병사 개개인은 상국 대한 이상으로 실전 경험이 많고, 특히 정글전의 전문가들이다.
4부가 진행될수록 경직된 가톨릭 국가화 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묘노를 쓰지 않아 홍서당의 봉기로 입은 피해가 전혀 없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를 자처했다는 이유로 대군을 파견해 토벌군에 합류했고 사로잡은 태평천국 포로들에게 딱 한 번 개종할 기회를 주고 거부하면 즉시 처형, 대한의 번국에 선교를 시작한 후기 성도 교회에 대해선 잡히면 바로 화형에 처하겠다고 벼르며, 안남 정벌에서는 안남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를 잡는 즉시 문답무용으로 전부 죽여버려 노예 사냥에 열중인 다른 번국들과 갈등을 빚는다.
다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이 상국으로 존재하는 데다 소수의 스페인계, 대한계가 다수의 말레이계 무슬림을 통치해야 하는 국가 특성상 이교도 원주민을 학살하고 개종을 강요하자는 극단적인 의견은 왕실 차원에서 선을 긋는다. 개종은 직간접적인 회유를 통해 이뤄졌고 통치하는 원주민 인구의 절반인 10만 이상을 개종시키는 등 성과도 괜찮은 편이다.
가스파르 1세의 치세 동안 브루나이 술탄의 봉신이 된 사라왁 국왕 제임스 브룩과 수년간 지리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대한이 지원해 준 신무기 화력을 앞세워 승리하고 보르네오 최대 항구도시인 아피아피[59]를 함락시키면서 전쟁 승리의 청신호를 쏘아올렸다. 술탄의 무리한 현지사수 명령 때문에 술탄의 직할군이 궤멸당하고 제임스 브룩을 비롯한 영주들까지 대거 이탈해버리면서 기세를 탄 술루국은 1851년 가을 브루나이 술탄국의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60]까지 함락시킨다. 결국 궁지에 몰린 브루나이 술탄국과 사라왁 왕국은 대한에 귀부하는 선택을 하여 술루국과 동일한 번국이 되었는데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를 비롯해 이미 술루국이 차지한 영토는 술루국의 영토로 확정되면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데 성공한다.
당사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자원의 보고인 사바와 원역 브루나이 지역을 전부 차지하고 있어 영토를 잘 지키기만 해도 후손들은 배 두드리며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초대 국왕인 디에고 1세가 ( 사생아라 황실 족보에 공식적으로 오르지는 못했지만)건흥제의 친아들이었던데다 대한의 세력 확장에 있어서 번국들 중 가장 공적이 크기 때문에 대한의 번국들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다. 조홀은 술루와 마찰 생길 일 자체를 피하고, 자기들이 가장 먼저 칭신했다며 으스대는 하와조차 뒤에서 안주거리 삼아 가볍게 떠들뿐 공식적으로 이 서열에 도전하는 일은 없다.
재밌는 사실은 이토록 대우도 좋고, 충실하게 관계를 이어온 술루가 가장 먼저 대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획책한 번국이라는 점. 4대 술루국왕 이홍일이 대한에 반기를 들고 독립할 내심을 품었으나 원평제가 나폴레옹 프랑스로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보호해주려 파견한 대군을 목도한 뒤 객기임을 깨닫고 접었다. 이 일은 술루 왕가 내에서 은밀한 비밀로 전해내려오는데 이홍일의 손자인 이원석은 스페인계 조모와 모친을 둔 자신도 하지 않은 생각을 조모가 이형준의 자손이고, 모친 역시 조선계인 조부가 했다는 사실을 황당해한다.
이원석 시대에도 스페인계 주민 중에선 이교도 태황 신하 노릇에 불만을 품고 독립을 꾀하는 인사들이 이따금 나오는데 발각되는 족족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추방해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있다.
2.3.2. 조홀국
조홀국 遭淴國 |
||
국호 | 조홀국(遭淴國) | |
위치 | 말레이반도 남부, 리아우 제도 | |
수도 | 제홀(制㳷)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정(鄭)[61] | |
국가 원수 | 왕 | |
역대 군주 |
진무왕 정명완 광현왕 정주신 홍제왕 정재원 ○○왕 정재신 충정왕 정인선 헌제왕 정윤진 정호석 |
|
문자 | 한자, 한글, 범자, 자위 문자 | |
종교 | 불교, 유교, 힌두교, 배화교, 이슬람 | |
민족 | 한인, 일본인, 인도인, 말레이인, 화교 |
정주신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말레이인과 화교를 탄압하고 그 대신 노동자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인을 이민시키는 정책을 펼친다. 이 이민을 바탕으로 대한의 번국 중 가장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있다. 4부 초반인 1823년 기준으로 인도인 30만, 말레이인 15만, 화교 6만, 대한인 14~15만 명, 일본인 14~15만 명 가량으로 80만을 살짝 웃돌았고 1840년대에 100만을 돌파했다. 화교 인구의 상당수는 중국에서 팔려온 묘노. 수도는 제홀(制㳷). 원 역사의 서말레이시아와 태국 남부[62], 리아우 제도를 영토로 점유하고 있다.
정주신이 추진하던 아체 정벌은 반란 진압에 전념하느라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냉전 상태가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다. 말레이 반도의 소국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국경을 마주하게 된 섬라와도 분쟁이 있으나 본국인 대한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아 전쟁으로 영토를 확정짓지 못했다. 결국 정주신의 손자인 충정왕 정인선대부터 전쟁을 피하고 교역과 산업 진흥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술루와 반대로 국초의 상무적 기풍이 많이 희석되었으나 일본이 아체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아체 북부 섬들과 주요 항구 일부를 장악하면서 안보 부담이 줄었다.
주산업은 광업. 대한에서 석관식(통조림) 산업이 발달하면서 깡통의 원료인 주석 수요가 늘어나 주석 광산이 풍부한 조홀국은 큰 이익을 본다. 그러나 정인선의 아들 정윤진은 왕위에 오른 후 어차피 대한이 지켜줄 것이라며 최정예 왜병들을 해고해 3만 명이던 군대를 1만으로 감축하고 남는 돈을 서양식 궁궐인 태서궁을 짓고 주지육림에 빠져 국가 안보와 산업 발전에는 게으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대한령 연해주에서도 주석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조홀국 주석 산업에 타격을 입으면 더이상 주지육림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긴 했어도, 어쨌든 각성하게 되어 1만까지 줄었던 군대를 2만으로 늘리고, 간신들을 몰아낸 자리에 충신들을 재등용하였으며, 세자 정호석이 재석에게서 들은 고무 산업의 유망성에 대해 전하자 즉시 남미에서 고무 묘목을 들여와 고무 플랜테이션을 세우게 하면서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다. 술루, 사라왁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으나 말레이 반도 동북부 해역에 산재한 해상 유전과 가스전 덕분에 미래에 마르지 않는 부가 약속되어 있다.
반란을 일으킨 말레이인과 중국인을 불신해 군 입대를 불허했고,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묘노들을 철저히 감시, 감독해왔기에 홍서당의 난 때 조기 진압으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단, 사회적 차별과 별도로 종교적 차별은 없다. 왕가는 대남도 정씨 시절부터 불교를 믿어왔으나 철저한 가톨릭 국가를 지향하며 통치하는 원주민 인구 절반을 개종시킨 술루와 달리 충성만 바치면 어떤 종교를 믿어도 상관없다는 게 기본 방침. 인도인들과 함께 파르시인들이 넘어와 대한 영역권에서 배화교가 유의미한 숫자로 존재하는 유일한 곳이다.
말라카 해협 안정화라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음에도 전쟁은 않고 교역에 전념하다보니 100년째 전쟁 중인 술루 왕가에선 번국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고깝게 보는 시선이 있다.
2.3.3. 하와국
하와국 夏窪國 |
|||
국호 | 하와국(夏窪國) | ||
위치 | 하와이 제도 | ||
수도 | 홀랄루(惚㻋壘)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63] | ||
국성 | 하(夏) | ||
국가 원수 | 왕 | ||
역대 군주 |
장명왕(莊明王) 하마위(마우이) 현도왕(賢度王) 하가위(카우이) 강정왕(剛精王) 하상운(카이헤코아) 진성왕(眞成王) 하원식(카울라나) 민애왕(閔哀王) 하정일(코아말루) 위강왕(威剛王) 하현생(카메하메하) ○○왕 하원호 하성왕(夏成王) 하민상(칼라니오푸) 하와국왕 하진교(카나이나) |
||
문자 | 한글[64], 한자 | ||
종교 |
전통신앙,
유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덕성도, 후기 성도 교회 |
||
민족 | 폴리네시아인, 한인 |
-
국기
대한의 국기인 태극기를 기반으로 하와이 제도를 이루는 일곱 개의 큰 섬과 남십자성, 왕실의 본관인 하와이섬의 세 화산 마우나케아, 마우나로아, 후알랄라이를 형상화했다.
-
인구
1840년 시점에 약 33만. 3부 종결 시점에 30만이었으니 거의 늘지 않았다. 종두를 놔주고 의학교를 세워주는 정도로는 선천적으로 외래 질병에 취약하다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 인구 증가는 백신 개발 이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
지역
수도는 하와이 섬(빅아일랜드)에 있는 홀랄루(惚㻋壘)로 왕궁은 본래 하와도 여왕 케아케알라니와히네가 살던 궁을 ' 무우궁'이라 하여 사용했으나, 1778년 터진 하와무술지변 때 궁이 불타고 그 후 방어에 용이한 언덕 위에 요새화한 새 궁인 마우카 궁(마가궁)이 세워진다. 한편 오아후 섬 진주만의 대한 해군기지에 있던 유흥업소들이 군기를 문란케 한다고 판단한 원평제가 명령을 내려 유흥업소들이 모두 인근 호노촌(祜瑙村)으로 이전하면서 원역사처럼 번화한 관광지가 된다.
-
종교
전통 종교, 불교, 덕성도, 천주교, 개신교 등 온갖 종교가 퍼져 치열하게 경쟁 중이며 후기 성도 교회까지 유입되었다. 하진교 본인을 선교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타종교와의 갈등이나 우상 파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선교를 허용받는다. 이미 다른 종파 예수교를 믿던 하와인들에게 일부다처제 허용을 미끼로 접근하여 잽싸게 신도를 늘린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 종교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며 여신 폴리아후가 분노한다는 미신 때문에 마우나케아 산에서 얼음 채취가 금지되어있다.
-
대한식 성씨
강녕왕의 후손들은 당연히 전주 이씨를 사용하고, 그 외에도 벼슬아치들이나 대한 본국에 파견된 근위병 등은 대한식 이름을 사용하는데, 용맹함을 숭상하는 기풍 때문에 대한식 성씨로 용(勇), 감(敢), 맹(猛), 호(虎), 상(象), 저(猪), 응(鷹), 교(鮫) 등 무예나 맹수와 관련된 한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
국제적 인식
서방 국가들은 술루, 조홀 국왕은 대공으로 칭하고 유일하게 하와국왕만 왕으로 호칭한다. 술루와 조홀은 건국 단계에서 대한이 적극 관여해 사실상 만들어준 나라인 반면 하와는 어쨌든 독자적인 왕과 나라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복속시킨 뒤 현 왕가를 밀어준 것이기 때문.
-
외국 상선 기항 허용 → 제한
중종 시대에는 외국 상선들을 통해 전염병이 퍼진 경험 때문에 대한 국적 상선의 기항만 허락했으나, 중종 사후 진주만 해군기지 때문에 돈이 궁하지 않은 오아공을 제외한 하와국왕과 나머지 다섯 공들이 돈맛을 알아 외국 상선 기항을 다시 허용한다. 물론 전염병도 다시 퍼지는 바람에, 대한에 복속된 지 80년이 지났고 대한의 선진의료를 받아들였음에도 인구가 30만 정도로 중종 때에 비해 크게 늘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한 본국에서 금하는 미국 포경선들까지 구휼 명목으로 몰래 기항시킨다. 하지만 재석과 함께 지내며 견문이 넓어진 하진교가 국왕으로 즉위한 후 대한 본국의 방침대로 외국 포경선의 기항은 전면 금지시키며, 다섯 공들의 반발은 대한에서 받은 보조금을 풀어 무마한다.
-
산업
대한 본국의 행단들이 하와국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세우고, 하와국 토인이나 묘노들을 임노동자로 삼아 경영한다. 벼농사는 쌀의 장기보존이 가능하지만 품이 많이 든다는 점 때문에 군량미나 구휼 대피 비축 용도로 재배하고, 각 섬에서 국왕에게 바치는 세금도 쌀, 설탕, 고래기름, 어물 등 상품작물로 바뀌었다. 일반 토인들의 주식은 예전처럼 고구마와 토란, 돼지고기, 생선 등이다.
-
경기대회
3부에서 대한에 복속되면서 각 섬 간의 전쟁 대신 대표를 뽑아 각종 스포츠로 겨루는 풍속이 계속 발전하고, 대한 본국에도 알려져 일부러 직관하러 가는 관광객이 생길 정도로 발전했다.
-
군사 파병
총 병력은 3천으로 네 번국 중 가장 적다. 절반은 국왕군, 나머지 절반은 각 섬의 영주격인 여섯 공의 사병으로 구성된다. 멧돼지 사냥대회에서 큰 공을 세운 최정예 전사들을 대한 본국의 금군에 파견하여 친위대 복무 및 술루, 조홀국 전장에 파병하여 큰 전과를 올린다. 압도적인 거구를 자랑하는 용맹한 병사들로 후송에까지 이름이 높다. 재석이 노예 사냥을 금지한 반대급부로 해외 파병을 크게 늘리기로 하면서 규모가 늘어날 전망이다.
-
노예 사냥
하와국 독자적으로 대한에서 받아들인 조선기술로 대형 쌍동선 카누들을 건조하여 남태평양 섬들에 대해 약탈 원정을 간간히 시행하고 매년 천 명 이상의 노예를 잡아온다. 어머니가 노예 출신인 하현생도 본인이 노예 사냥을 다니면서 무리를 모아 반정에 성공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후에도 노예 사냥을 금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폭정과 식인을 일삼는 야만족 추장들에게서 백성들을 구해내어 왕화를 입게 해주는 숭고한 의무라고 포장하기까지 한다. 그나마 잡혀온 노예들 대부분이 하와인들과 같은 폴리네시아인이라 다음 대에는 대부분 속량되어 평민이 되기는 한다고. 이 노예 사냥꾼들 때문에 남태평양 여러 섬들이 방어를 위해 서양 포경선들을 기항시키고 총을 사들이는 등 남태평양 정세가 원역사보다 훨씬 혼란스러워졌다. 결과적으로 하와국의 위협으로 신질란도의 마오리족이 스스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피지, 통가, 사모아 역시 영국의 보호를 요청했다. 또한 타히티와 인근 폴리네시아의 섬들도 프랑스에 보호를 요청하며 보호국이 되었다. -
노예 사냥 금지
결국 하와국의 노예 사냥이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문제로 번지자 재석은 무기력한 노예들이나 잡아들이는 것보다 잘 훈련되고 무장한 적 전사와 싸우는 게 참된 전공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하와국의 노예 사냥을 금지시킨다. 대신 하와인들을 천강군, 등선군, 대붕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배려할 생각이다.
-
하와본궁
강정왕 하상운과 의순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대한 문화에 관심을 더 갖게 된 4대 국왕 하원식이 함흥본궁을 본떠 하와국 왕실의 발상지가 된 와가촌에 지은 별궁으로, 이후 와가촌을 성역화해서 외국 배의 기항을 금했다. 문제는 유교를 어설프게 받아들여서 마우이의 옛 집터를 뒤집어 엎고 카우이의 별궁도 허물어서 오히려 문화파괴가 되었다는 것.
-
역사 편찬
3부에서 현도왕 카우이가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50만 자짜리 구술을 남겼는데, 이를 적은 당시 하와국 학무대신 격인 이종이 1747년 '하와국사'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다만 성친왕을 제일 먼저 만났을 뿐 일개 추장이던 카우이의 부친 마우이가 하와국왕이 되기까지 벌인 각종 음모와 뒷공작의 핵심 인물이 카우이였던지라, 그 전모가 죄다 담겨 있어서 대한은 번국의 명예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금서로 지정했고, 규장각과 집현전에만 몇 권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애초에 트릭스터인 마우이를 조상으로 여기는 하와국에서는 이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신 이종이 괴력난신이라며 제외한 하와이 창세신화가 수록되지 않았음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다시 11년간 작업한 끝에 이 신화를 덧붙이고 마우이가 태초의 영웅 마우이의 후예라고 저술한 '하와본사'가 출간되었다.
-
교주어해가
하원식이 용비어천가를 흉내내어 편찬한 하와국 역사를 담은 서적. 하와이 신화에서 상어가 가장 신성한 동물이기에 군주를 상징하는 신수가 상어이며, 서문에 의하면 하늘은 대한을 의미하는 천룡이, 그 하늘 밑에서 가장 으뜸인 대동양과 하와이는 상어가 변신한 교룡이 다스린다고 한다.
-
하와이안 피자
3부에서 재석이 성친왕 시절 미주에 있을 때 재미 삼아 몇 번 만들어 먹은 것이 전부였는데, 피자를 좋아하던 강녕왕이 하와이에 피자를 전파하고 한자로 '피자(帔姿)'라는 이름까지 붙여 4부에서는 하와이의 대표 아침 해장 음식이 되었다. 남만시와 봉리는 이것저것 넣다보니 잘 어울려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원 역사에서는 이름만 하와이안 피자일 뿐 실제로는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음식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실제로 하와이에서 만들어진 음식이 됐다.
-
하와무술지변
1778년 터진 하와이판 왕자의 난. 하와국에서는 정당한 왕이 돌아왔다고 하여 왕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4대왕 하원식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평소 눈밖에 난 적장자 하정응이 대한에서 호환을 당해 죽자 후계자 자리를 두고 왕자들과 왕비들을 피흘려가며 경쟁시키다가 나중에 모두 상어밥으로 만들고 가장 총애하는 왕비이자 강녕왕의 후손인 13번째 왕비 울라오칼라니의 소생인 어린 하정일을 세자로 삼은 후 노환으로 사망하자 울라오칼라니가 수렴청정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폭정을 하여 민심이 들끓으나 상국인 대한에서는 우유부단한 목종이 울라오칼라니의 폭정을 그대로 방치해둔다. 3년 뒤 하정일도 어린 나이에 병사하자 울라오칼라니가 웬 갓난아기를 하원식의 서자라며 왕위에 올리려한다. 이에 하와이인들이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추방된 하정응의 아들이자 하원식의 적장손 하현생(카메하메하)이 반정을 일으켜 울라오칼라니를 처형하고 보위에 오른 후 관용정책을 펼쳐 하와도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
하와갑오정난(夏窪甲午靖難)
하와국의 제1왕비 칼레이아가 죽은 후 8대 국왕 하민상이 제2왕비 카네카폴레이의 참소에 넘어가 하진교를 폐세자하고 카네카폴레이 소생인 쿠아이와를 세자로 삼는 짓을 벌였으나 하와국으로 귀국한 하진교가 호위무사 40명을 데리고 본궁으로 처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65] 이에 쿠아이와도 직접 나가 하진교와 일 대 일로 붙었으나 하진교가 쿠아이와를 쓰러뜨리고 카네카폴레이가 항복하면서 끝났다.
사태를 정리한 하진교의 보고를 받은 광덕제는 하민상은 하진교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어 남은 여생을 대한 본국에서 보낼 것과 카네카폴레이와 쿠아이와는 현토도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
발리호랑이 유입
하진교가 내세운 정책으로 멧돼지의 개체 수 조절과 호랑이 사냥을 하고 싶다는 하진교의 개인적 욕망[66]으로 발리에서 발리호랑이 15마리를 들여와 하와이에 풀었다. 하진교는 본국의 호랑이보다 왜소한 발리호랑이를 얕보았지만 이내 호환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자기 이복동생 중 한명까지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가 역으로 잡아먹히자 두손들고 다시 잡아들인다. 1년 만에 하와이에 퍼진 호랑이들을 전부 잡는데 성공한 뒤로는 일정 주기마다 호랑이 한 마리만 풀어 엿새동안 놔두다 사냥하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
이후로 호림원과 유사한 호랑이 번식시설을 건설. '돼지 키우듯' 수를 불려 1851년 시점 42마리까지 불어난다. 원 역사처럼 인간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발리에서 절멸되더라도 하와이 동물원에서 명맥을 이어가 멸종을 면할 수 있을 전망이다.
2.3.4. 유구국
<colbgcolor=#695370><colcolor=#fff> 유구국 琉球國 |
||
국호 | 유구국(流球國) | |
위치 | 우치나 | |
수도 | 수이(首里, 수리)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정 | |
국성 | 상(尙) | |
국가원수 | 유구국왕 → 유구황제 → 중산왕 | |
연호 |
영락(永樂) (1710 ~ 1711) 천안(天安) (1712 ~ ?) 영원(永元) (? ~ ?) ○○(○○) (? ~ ?) ○○(○○) (? ~ ?) 대흥(大興) (? ~ ?) 성평(成平) (? ~ 1831) |
|
문자 | 가나, 한자, 한글 | |
종교 | 유구 신토, 불교, 유교, 신토 | |
민족 | 유구인 |
1840년대 기준 인구는 약 40만. 하와처럼 외부 질병에 취약한 건 아니나 협소한 영토의 상당 부분을 플랜테이션으로 할애하다보니 인구 성장이 느리다.
황제국으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역사가 1만 8400년으로 대한, 일본보다 더 길다는 허세는 여전하나, 오히려 대한 주둔군이 8천 명으로 늘어나 유구군 5천 명을 숫자로도 압도하게 되어 사실상 대한의 속국인 상태가 지속된다. 대한이 유구를 번국으로 합병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유지하는 평화를 깨트리기 싫어서이다. 그러나 새로 대한의 태황으로 즉위한 광덕제는 인구가 대구 정도밖에 안되는 초약소국 류큐가 대한과 감히 맞먹으려 한다는 걸 매우 아니꼽게 보고 류큐를 번국으로 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동군연합을 통해 병합하려는 계획을 신하들의 의견을 모조리 물리치고 추진하여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해있다. 여기에 류큐병합계획이 대한 전국에 퍼지는 바람에 광덕제의 유구와의 관계를 완벽한 상하관계로 재정립한다는 정책이 민간 여론을 등에 업고 더욱 탄력을 얻었다. 결국 광덕제가 태자 재석을 일본에 보내 제2차 경인조약으로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합의하여 유구 황제 직위는 대한 태황이 가져가고 유구 황제는 중산왕으로 격하, 대한에서 실질적 총독인 집정대신의 파견, 외교권은 박탈하고 자치권과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병력 유지만이 허용된 대한의 번국으로 삼도록 합의한다. 유구 조정에서는 이를 어떻게는 막으려 하고 있으나 이미 현실을 깨달은 유구 국민들은 나라를 지키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67] 결국 1831년(신묘년) 음력 1월 22일(양력 3월 6일) 유구 조정이 대한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며 독립을 잃었다.
이후 유구 주둔 대한군의 주둔비를 부담하고, 대한군의 대민 행패가 심해지고 대놓고 해우 밀렵을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이를 다스리는데 무관심했던 광덕제와 달리 흥선제는 자체적으로 자국민의 범죄 행위를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유구 왕실에는 누손주산 최고급 가구들을 선물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유구 왕족과 신하들도 대한의 번국이 된 것에 더이상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한편 광덕제는 '내가 유구의 황제이기도 한데 대한에 조공을 바치게 하면 내가 나한테 조공을 바치란 말이냐?'며 유구의 조공을 면제해 주었고, 재석과 신료들도 중종이 인정한 유구의 독립을 박탈했으니 이정도 특권은 줘야 한다고 동의하여 유구는 조공이 계속 면제된다.
대한의 번국이 된 이후 경제적 예속이 심화되고 있으며 대한 내에선 유구 관광이 인기를 얻어 다양한 여행 상품들이 생겨나고 있다.
군사력으론 불나이와 함께 번국들 중 최약체. 레콩키스타와 콩키스타도르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 후 100년 넘게 무슬림 토후들과 전쟁을 벌인 술루, 말레이 반도 무슬림 토후국과 아체 해적, 말레이 반란군들을 모두 도륙내며 성장한 조홀, 대한의 번국이 되기 전부터 내부에서 암투가 치열했고 통일된 이후에도 노예 사냥이나 맹수 사냥, 상국 파병으로 상무적 분위기를 유지 해온 하와, 술루와 악전고투하며 싸워온 사라왁과 달리 이렇다 할 군사적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고 홍서당 토벌 이전에는 대한과 발 맞춰 군사 활동을 한적도 없어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일례로 사라왁이 번국이 된 직후 발발한 안남 정벌에 2천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유구가 번국이 되고 10년 뒤에 발발한 홍서당 토벌에 동원한 병력이 고작 500. 그나마도 제대로 못 싸웠다. 스스로도 한계를 실감했는지 시간이 좀 더 지난 임자남정 때는 대한군 뒤만 따라다녔다. 다른 번국들은 전부 별동대 활동에 나섰는데 아예 포기했다.
2.3.5. 불나이
불나이 弗那而 |
||
국호 | 브루나이 술탄국(كسلطانن بروني) | |
위치 | 사라왁 동부 | |
수도 | 반다르브루나이 → 빈툴루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볼키아 가문 | |
국가 원수 | 술탄 | |
문자 | 자위 문자 | |
종교 | 이슬람 | |
민족 | 말레이인 |
보르네오 북동부를 두고 브루나이와 영토분쟁 중이던 술루 술탄국을 계승했다는 명분으로 보르네오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술루국과 3부 시절부터 100년 넘게 계속 전쟁 중이었는데, 브루나이 술탄 사이푸딘 2세는 술루국을 막기 위해 영국인 용병대장 제임스 브룩에게 사라왁을 봉토로 내리고 술루국과의 전쟁에 투입한다.
그러나 1850년 대한의 지원으로 술루국이 술루국의 서진을 막던 거점인 아피아피를 함락시킨 것이 전쟁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군사에 대해 무지했던 사이푸딘 2세가 '무조건 현지 사수'를 외친 덕분에 탈출하지 못 하고 아피아피에 포위된 술탄의 직할군이 포위섬멸당하고 술탄의 무리한 명령 때문에 자기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포위망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제임스 브룩 역시 술탄의 명령을 무시하고 사라왁에 틀어박힌다.
결국 1851년 가을 술루국은 브루나이 술탄국의 수도인 반다르브루나이까지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사이푸딘 2세는 수도까지 뺏겼음에도 계속해서 결사항전을 외치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술루국 역시 곤란해하고 있던 상황에 마침 안남 정벌을 위해 누손주에 집결하고 있던 대한군을 두고 재석이 힌트를 주자 술루국은 "대한이 술루국을 도와 브루나이 술탄국을 정벌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이 소식에 그나마 사이푸딘 2세 쪽에 남아있던 영주들도 이탈해버리고 사라왁에 틀어박혀있던 제임스 브룩 역시 브루나이 술탄국을 버리고 독립을 선언한다.
결국 궁지에 몰린[68] 사이푸딘 2세는 대한에 입조, 귀부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대한의 첫번째 이슬람 번국이 되었다.
원역 브루나이 영토는 술루에 모두 빼앗겼고 바람강을 경계로 새로 국경을 정했다. 새로 정한 수도는 빈툴루.
군사력으로는 유구와 함께 최약체. 유구가 영토와 백성은 멀쩡한데 수백년간 실전 경험이 없어서 문제였다면 이쪽은 사이푸딘 2세의 현지 사수령 때문에 술루와 맞서온 정예 군조직이 소멸하고, 수도와 요충지들을 전부 상실해 재건에 필요한 인력과 행정력마저 증발한 탓이다. 최후의 정예군이라 할 수 있던 사라왁도 독립해 떨어져 나간터라 군사력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번국이 된 직후에 발발한 안남 정벌에는 6천의 병력을 보내겠다고 장담했으나 정작 2천 밖에 안 보내고 그마저도 중앙군이 아니라 토호들이 2백, 3백씩 어렵싸리 각출한 자투리 병력에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을 더한 군대라 문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대한군이 안남군에게 깨졌다는 소식만 들리면 불나이군이라 재석은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고자질이나 한다며 탐탁차게 여긴다.
2.3.6. 사라왁
사라왁 沙羅籰 |
||
국호 | 사라왁 왕국(Raj of Sarawak) | |
위치 | 사라왁 서부 | |
수도 | 쿠칭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브룩(Brooke) | |
국가 원수 | 왕 | |
문자 | 로마자, 자위 문자 | |
종교 | 개신교, 이슬람, 애니미즘[69] | |
민족 | 다야크인, 말레이인 |
술루국과의 전쟁을 위해 브루나이 술탄에 의해 고용된 영국인 용병대장 제임스 브룩이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라자 칭호와 함께 사라왁을 봉지로 받으면서 원 역사처럼 건국된다.
브루나이 술탄국이 질적으로 압도적인 술루군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전력이었으나 아피아피 공방전에서 술탄의 고집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간신히 탈출한 것에 앙심을 품은 브룩은 전투를 거부하고 봉지인 사라왁에 틀어박혀버린다. 술루국이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브루나이까지 함락시키면서 승기를 잡고 대한군이 '술루국을 도와 브루나이를 정벌할 것이다'라는 소문을 듣자 아예 사라왁을 들고 이탈해 독립을 선언한다. 궁지에 몰린 브루나이 술탄국이 대한의 번국이 되길 택하자 제임스 브룩 본인도 마찬가지로 대한에 입조하여 대한의 번국이 된다.[70]
브룩이 백성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진 않지만 브록 본인이 개신교도고 선교 활동 자체는 이뤄지고 있어 명목상 개신교 번국이다. 당사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으나 자원이 풍부한 사라왁 지역을 점유하고 있어 미래에 먹을 거리는 이미 확보되어 있다.
번국 중 가장 체급이 작으나 불나이가 100년 넘게 전쟁만 해온 술루군에 맞서 버틸 수 있게 해준 히든 카드였던 만큼 군대의 질은 우수하다. 사라왁군의 주축인 원주민 다야크족[71]은 대남도 토인들처럼 머리 사냥을 즐기는 용맹한 병사들로 이름이 높다. 번국이 된 직후 발발한 안남 정벌에는 다야크족 위주로 2천의 병력을 차출한다.[72]
원 역사에선 제임스 브룩이 노동력 유치를 위해 화교 인구를 대거 유입시켰는데 역사 개변으로 동남아에서 화교들이 차지한 파이가 크게 줄어든데다[73] 임자남정에 참전해 안남인 포로를 닥치는대로 잡아들이고 있어 화교 대신 안남계가 새로운 구성원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
2.3.7. 대남국 → 남월국
대남국 → 남월국 大南國 → 南越國 |
||
국호 | 대남국(大南國) → 남월국(南越國) | |
별칭 | 안남, 남월 | |
위치 | 베트남 전역 → 베트남 남부 | |
수도 | 후에(化, 화) → 자딘(嘉定, 가정)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완(阮) | |
국가원수 | 황제(외왕내제) → 왕 | |
연호 |
가륭(嘉隆) (1802 ~ 1820) 명명(明命) (1820 ~ 1841) 소치(紹治) (1841 ~ 1847) 사덕(嗣德) (1847 ~ 1852) |
|
문자 | 한자, 쯔놈, 쯔한, 쯔꾸옥응으 | |
종교 | 유교,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 천주교, 덕성도 | |
민족 |
안남인, 참파인, 진랍인, 대한인, 왜인 기타 소수민족 |
원 역사처럼 떠이선 농민 봉기가 일어나 북쪽의 찐씨 정권과 남쪽의 광남국 응우옌씨 정권을 모두 멸망시키고, 명목상의 황제인 후 레 왕조가 서나라에 청한 원군까지 모두 격파하여 떠이선 왕조를 세우나, 응우옌씨 정권의 후손 완복영이 대한의 지원을 받아[74] 떠이선 왕조를 다시 멸망시키고 응우옌 왕조를 세운다. 응우옌 왕조는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여 국가재건에 도움을 준 대한에 칭신하여 안남국왕 책봉을 받고 매년 조공을 바치며 복승항에 대한 육군 4,000명과 대한 수군 함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한편, 국경을 맞대고있는 후송에게도 칭신하여 남월국왕 책봉을 받는다. 대한에서는 '안남'이라 부르지만 공식 국호는 '대남'이다. 안남에서는 ' 대월'이라는 국호를 회복하는 것을 원하여 옛 조선의 종계변무 처럼 대한에 사신을 보내 대월이라는 국호를 허용하기를 요청했으나, 대한 측에서 매번 거부하여 이 문제로 조정에는 대한에 대한 불만이 있다. 또한 원 역사처럼 주변국인 진랍, 남장을 침략하며 섬라와 갈등을 빚고 있다. 유럽에서는 대한의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원 역사와 달리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피하게 됐다. 하지만 2대 황제 명명제가 천주교를 매국노라고 인식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대한군이 주둔한 복승을 통해 술루국으로 망명하고, 명명제의 호족 탄압 정책 때문에 제대하여 호족이 된 고참 왜병들이 동족 왜병들까지 불러들여 반란을 일으키고 북쪽에는 레 왕조의 후예를 자칭하는 반군이 준동하는 등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이후 3대 황제 소치제는 반란 진압을 위해 프랑스를 끌여들였는데, 대남국을 발판으로 인도차이나를 차지하려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분탕질에 속아 넘어가 대남국 왕실과 프랑스 동인도회사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상국인 대한의 뜻을 거스르고 태평천국에 무기를 공급하고 아편 장사를 하는 등 프랑스를 끌어들여 대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해 대한과 갈등을 벌일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이 사실을 안 재석은 대남국을 무력으로 응징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청나라와의 국혼 직전에 대남국왕 소치제가 저승으로의 회피기동을 달성하면서 일단 3년상을 치르게 해준다는 이유로 안남 침공을 보류했다. 하지만 4대 황제 사덕제도 소치제보다 더한 친 프랑스 반 대한 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있고 재석이 마지막 기회로 아버지인 소치제 당시의 행적에 대한 사죄를 요구했으나 안남에서는 "이 모든게 아버지와 서나라 때문"이라는 사죄 같지도 않은 사죄문을 보내와 도리어 재석의 분노를 샀다.
대신들은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한다 주장하나 분노한 재석은 이미 안남 정벌의 대략적인 밑그림까지 그려놓은 상태로 문책사와 함께 철갑함 함대를 안남에 파견한다. 재석은 같잖은 외왕내제를 끝내주겠다고 공언하여 외왕내제와 이중봉신 체제가 붕괴된 완전한 대한의 번국으로 전락, 기존 4번국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번국의 될 것으로 예상된다.[75]
한황의 분노를 산 것을 알고서도 사덕제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된 이상 대한과 싸워 황제국으로 자립하겠다고 전쟁준비를 명령하고 자신을 말리는 화평파 대신들을 투옥했으나, 종두도 대한이 발명한 것이니 맞지 않겠다고 똥고집을 부린 댓가로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메게 되고, 사덕제의 친어머니인 황태후 범씨가 화평파 대신들을 풀어주고 대한 치죄사 이유원에게 직접 절을 올리는 굴욕을 감수하며 대한에 제대로 된 사죄를 하면서 위기를 일단 수습한다. 하지만 원역사처럼 사덕제가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재집권할 경우를 대비해 재석은 한번만 더 오만한 짓을 하면 그때는 정말 안남을 정복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준비 작업으로 안남국 철도, 전신 부설권과 경비대 명목의 대한 육군 주둔권을 안남에게 강요한다.
사덕제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천연두를 이겨내기는 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고자가 되고 만다. 자기가 고자가 됐다는 현실에 눈이 돌아간 사덕제는 어떻게든 자기 물건을 세우기 위해 그렇게 싫어하던 대한에서 들여온 홍삼으로 만든 탕약 한 그릇을 마시고 지나가던 궁녀를 붙잡아 성관계를 하는 짓거리를 반복한 끝에 천만다행히 죽어버린 물건을 다시 세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걸 증명한답시고 자기 어머니인 태후와 대신들 앞에서 궁녀와 성관계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행각을 벌인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대한 조정도 극악무도한 패륜을 저지른 안남국왕을 징벌하자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고 좋은 껀수가 생긴 재석은 곧바로 안남 정벌을 지시한다.
안남의 양다리 상대이자 대한의 안남 정벌에 내키지 않아했던 후송도 대한의 정벌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알고 지분을 챙기기 위해 대한의 침공에 발맞춰 월왕부가 주도하여 안남 북부를 침공하고 안남군에 고용된 미쓰이 용병을 무력화시켜주는 조건으로[76] 이권을 노리는 일본도 무관단을 파견하여 대한군을 지원하고 남장과 진랍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 섬라도 한입만을 노리고 참전을 검토하면서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다.
완복시의 결사항전 선언이 무색하게 압도적인 강력함의 대한군에게 안남군은 무참하게 패배하고 수도 후에는 대한군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북부의 중심지인 동경은 통킹 해안에 기습적으로 상륙한 상륙한 후송군에게 함락, 남부의 중심지인 가정부도 대한군에 의해 포위당해 무자비한 폭격에 견디다 못해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대한군의 최우선 목표였던 완복시는 수도 후에 함락 직전에 안남이 프랑스와 결탁했다는 증거가 될 각종 외교문서들을 파기하고 대한이 완복시 폐위 후 다음 안남왕으로 옹립할 가능성이 있는 완씨 종친들까지 전부 데리고 도망친다. 이 소식을 들은 재석은 안남 영토를 이루는 5개 기(圻) 중 북부의 북기(北圻)를 당초 계획대로 후송에게 양보하고 중부의 직기(直圻)와 우기(右圻)는 리 왕조의 후손인 화산 이씨의 일원 중 한 명을 중월왕(中越王)으로 책봉해 번국으로 삼으며, 남부의 좌기(左圻)와 남기(南圻)만 남게 된 안남은 완복시를 폐위하고 다른 완씨 왕족 중 한 명을 남월왕(南越王)으로 책봉해 정식으로 번국으로 편입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마침 완복시의 이복동생인 부록군공 완복홍항이 완복시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대한의 포로가 되자 재석은 그를 남월왕으로 책봉하고 이로서 안남은 정식으로 대한의 번국인 남월국이 된다. 이 과정에서 남월국은 영토가 크게 줄어들어 안남 중부와 함께 왕조의 수도이자 300년 가까이 완씨의 근거지였던 후에까지 중월국에게 넘겨주고, 완씨가 정복한 옛 참파와 진랍의 강역인 남기 6성[77]과 좌기 4성[78]만을 영토로 가지게 되었으며 수도도 후에에서 가정부로 옮기게 된다.
국호인 남월은 본래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를 지배했던 고대 왕조의 이름이나 완씨 왕실에서 인정받고 싶어했던 남월은 그런 고대 왕조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니라 안남에서 남을, 참파를 가리키는 중국의 옛말인 월상에서 월을 따와 지은 이름으로 남진을 완수하고 통일을 이룬 업적을 상징하는 국호로 받아들였다. 쪼개지기 이전 완씨 정권은 대남이 안 된다면 남월이라도 허락해 달라며 부단히도 애를 썼는데 몰락하고 나서 소원을 이뤘다.
인구 천만으로 대한에 칭신한 국가들 중 가장 체급이 컸고 대한이 번국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만 지키면 내정간섭 일절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한의 비호 아래 남장과 진랍을 병합하고 인도차이나의 패자가 될 수도 있었으나 외왕내제 컨셉질에 잡아 먹혔는지 자신이 진짜 대국의 황제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과대망상 환자들과 국제적 안목 전혀 없는 기회주의자 암군만 연달아 배출하며 4대만에 처참하게 몰락했다. 국토와 인구가 세 토막나 맞수였던 섬라를 대한의 지원 없이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졌으며 원래 적대적이었고 홀로 후송 영향력에 속하게 된 북기 지역은 영구히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높다.
-
인구
남부로 영토가 쪼그라든 이후 인구 중 순수한 안남인 비율은 절반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참인, 진랍인을 비롯해 안남계 한인[79]과 왜인계 등 비안남계 소수민족이 다수를 차지한지라 졸지에 이민족 왕조가 되었다.
설상가상 대한이 안남정벌군 중 원하는 이들은 미개척지인 메콩강 하류에 가솔들을 이끌고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이민장려책을 내놓았는데 남월 백성이 아니라 남월에 사는 대한 교민이 되는거라 통제 곤란한 상국 백성을 대량으로 떠안게 생겼다.
-
국체
외왕내제하에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던 나라를 대한의 제후국으로 바꾸기 위한 철저한 통제 작업이 이뤄졌다. 황제(皇帝) 칭호와 조칙(詔勅), 연호는 모두 금지되며 관청과 관직의 명칭도 일괄 제후국 예법에 맞게 변경되었다. 조선이 명 몰래 묘호를 썼던 과거를 참작해 묘호 하나만 겨우 허락받는다. 물리력을 앞세운 초강대국이 전에 없던 거대한 압력으로 제후국으로서 정체성을 심어넣는다는 점에서 원 간섭기 고려와 동일하다. 안남계 중신들은 대한에 적극 협력하는 참파, 진랍계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마침 안남에 의료 봉사를 하러 온 정단옹주와의 국혼을 은밀히 추진하는데 이게 성사되면 남월 국왕의 권위는 대한의 부마라는 지위에 속하게 되어 유교 세계관을 깨지 않는 한 대한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해진다.[80]
-
문자
대남 시기에는 공식 문서에는 한자와 쯔놈을 사용하고, 복승, 가정부 등 대한 세력권에 속하는 남부에서는 외수사 농장에서 대를 이어 일하는 안남계 대한인들을 통해 국문이 전파되어 국문으로 안남어를 표기하는 사례가 흔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전파된 쯔꾸옥응으도 사용 인구가 일부 존재한다.
안남어를 국문으로 표기하는 사례가 흔한 남부 일대로 영토가 쪼그라들었고, 재석 본인도 완복시 자리에 있었다면 국문을 접목해 안남어 표기법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라 언급한 바 있어 이후 국문이 안남어를 표기하는 공식 문자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
군사
대남국 시기에는 강도 높은 민족 말살정책과 호족 탄압으로 반란이 잦다보니 육군에 집중하고 해군에 투자를 못해, 1천여 척에 가까운 함대 대부분이 5백 톤 이하의 갤리선이었으며 가장 큰 배도 천 톤을 넘지 못했다. 군대의 총합은 30만으로 개중 정예병은 중앙군 6만과 동호군으로 불리는 1만 규모의 일본인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절반은 수도가 위치하는 중부, 나머지는 북부와 남부에 절반씩 나누어 배치했다. 이외에는 각지에 오합지졸로 흩어져 있어 이들보다는 각 지역 유지들이 이끄는 향촌 방위조직의 역할이 더 컸다. 수도 후에를 흐르는 흐엉강에 프랑스인 기술자들을 고용해 요새를 세워놓았으며, 상류로 올라가는 강변에 포대가 몇 개 더 존재했다. 전반적인 방어력은 제법이었으나 본질적인 체급과 경험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 해 대한군에게 무너졌다.
남월국과 중월국으로 쪼개진 이후 군사력 재편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복안이 나오지 않은 상태. 일단 중월은 원래 안남 조정과 계약했던 일본인 용병 2만을 고용해 기반으로 삼기로 했으며 기틀이 잡히기 전까진 남중 양국에 10만 이상의 한군이 주둔할 예정이다.
2.3.8. 중월국
중월국 中越國 |
||
국호 | 중월국(中越國) | |
위치 | 베트남 중부 | |
수도 | 후에(化, 화)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이(李) | |
국가 원수 | 왕 | |
문자 | 한자, 쯔놈, 쯔한 | |
종교 | 유교, 대승 불교 | |
민족 | 안남인 |
대한의 안남 정벌 이후 안남 분할 계획에 따라 재석은 완씨 왕실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직기 4성[81]과 우기 3성[82] 지역[83]에 중월국을 수립하고 화산 이씨 26대손이자 대한 관료 출신인 이택진을 초대 중월국왕으로 책봉한다.
완씨의 근거지로 수백 년 동안 완씨에게 충성을 바쳐온 중부 지역에 뚝 떨어져 신뢰할 수 있는 관료 집단이나 친위세력도 없고 믿을 구석이라곤 오로지 상국인 대한의 뒷배 뿐인 이민족 왕조다.[84] 민족주의가 대두할 19세기 후반부터는 대체 나라를 어떻게 꾸려갈지 주목되는 상황.
일단 현지에서 구한 협력자들과 저항할 동기가 약한 하급 관료들로 관료층을 꾸리고 대남 정부와 계약했던 왜인 용병들을 재고용해 최소한의 군사력을 확보했다. 현지 사대부들을 지속적으로 회유하며 완복시를 처리하는 일이 남았다.
2.4. 중원
-
남북조 체제의 고착화
서나라는 완전히 몰락했으나 서나라의 영토를 나눠가진 청과 후송은 오히려 이로 인해 심각한 내부 문제를 겪게 되었고, 왕조가 세워진지 2세기가 지나면서 여느 중원 왕조들처럼 각자 국가 체제들에 누수가 생기고 있다. 결국 청과 후송은 오랜 전쟁 끝에 자신들에게 서로를 정복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가끔 국지전만 벌일 뿐 더 이상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
한족의 분화
남북조 체제가 고착화된 것과 별개로 후송 한족과 청 한족은 더이상 같은 민족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후송 한족은 여전히 상투를 틀고 전족을 하며 강남 방언과 한자를 쓰는 반면, 청 한족은 변발을 하고 전족을 철폐했고 하북 방언을 쓰며 평민들을 중심으로 중국어를 한자가 아닌 한글로 표기하기 시작하여 의복에 이어 언어와 문자조차 달라져가고 있다. 이 때문에 청과 후송의 황실이 혁명이나 전쟁 등으로 붕괴하고 공화국이 들어서더라도 중원의 재통일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4.1. 후송
대송국 大宋國 |
||
국호 | 대송국(大宋國) | |
별칭 | 후송(後宋) | |
위치 | 직예, 절강, 강서, 양광, 복건, 호남, 호북 | |
번국 | 남월국 | |
수도 | 남경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85] | |
국성 | 조(趙) | |
국가원수 | 황제 | |
연호 |
천개(天開) (1633 ~ 1668) 홍광(弘光) (1669 ~ 1680) 융무(隆武) (1681 ~ 1684) 소무(紹武) (1685 ~ 1736) 태안(太安) (1737 ~ ?) 태녕(○○) (? ~ ?) 소태(紹泰) (? ~ 1804) 영강(○○) (1805 ~ 1834) 함화(咸和) (1835 ~ ) |
|
언어 | 중국어(오어) | |
문자 | 한자 | |
종교 | 유교, 대승 불교, 도교, 덕성도 | |
민족 | 한족 |
3부와 4부 사이에 황제였던 혜종 태녕제 조경소는 19세에 즉위해서 12년 동안 재위하면서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하다 31세에 복상사로 사망한 암군으로, 작중에선 연산군을 대신해서 '흥청망청'이란 표현을 만들어냈다.
조경소 사후 제위에 오른 소태제 조승번은 부황의 막장짓 잔재를 수습하고,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안남 내란에 개입했다가 20만 대군을 날려먹은 틈을 타 1777년 정주도통사 홍사옥의 지휘 하에 양광을 침공한다. 서나라 양광총독 임호관이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자 홍사옥의 주선으로 황제 조승번이 임호관을 그대로 양광총독에 유임시키고, 이에 분노한 서나라 함녕제가 40만 대군을 보냈으나 양광군과 합동으로 이를 격파하고 양광 지역 정복에 성공하여 국력을 크게 끌어올리나, 이 여세를 몰아 북벌까지 감행하려던 조승번이 괜히 덕성도를 반역도당이라 의심하여 우환을 없애야한다는 이유로 탄압과 학살을 벌이다가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5년간 혼란에 빠진 데다, 운남산 아편의 창궐로 기껏 끌어올린 국력을 다시 소모한다. 여기에 소태제가 자신의 장남이 요절한 충격까지 겹쳐 마음고생을 하다 1804년 화병으로 쓰러져 사망, 초반 4부 시점의 황제인 영강제 조형윤 대에 와서는 도통사들은 완전히 지방 군벌화되어 자식에게 직책을 세습하고 조정에는 사후에 표문만 올리는 데가 황궁에서도 환관의 힘이 커지는 등 완전히 당나라 말기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영강제는 황제 직할령의 경제력을 끌어올려 간신히 도통사들에 대한 힘의 우위를 유지했으나, 후계자 문제로 인해 황후 송씨와 환관들에게 독살당한다. 뒤를 이은 태자 조심원은 함화제로 즉위한 이후 후궁에 틀어박혀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한 사이 태후가 된 송씨가 국정을 농단하며 아편 잠상들을 단속하기 위해 덕성도 탄압을 중단하고 덕성도에게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 것도 덕성도 내에 홍수전의 배상제회가 세력을 키우고 있어 큰 위험요소로 작용 중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무시당하고 있는 처지인데 서구권에서는 태평양을 재패한 한국은 물론이고, 용병업으로 영향력이 큰 일본, 천주교를 우대하는 건주 양국에게 인지도가 밀리는 처지이다. 동방 국가들과 수교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프로이센도 후송은 인구수만 많을뿐인 비문명국이라고 무시할 정도. 서양에서는 시니카로 부른다.
결국 형산 봉선을 위해 백성을 착취했다가 민심이 흉흉해진 것을 계기로 배상제회가 반란을 일으켜 태평천국을 건국해 태평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천국의 건국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후송은 멸망 위기에 몰린다. 그러다 홍서당의 묘노 봉기에 자극받은 외국 연합군이 후송 편으로 참전해 태평전쟁에 개입하면서 멸망 위기에서 벗어나고 영토를 상당부분 수복하지만 태평전쟁의 전장이 되면서 큰 피해를 입는다. 관군이라는 작자들은 외국군에게 애먼 민간인들을 태평천국파라고 모함해 공격시킨 다음, 죽은 민간인들의 수급을 베어 전공을 조작하거나 살아있는 포로들을 묘노로 팔아넘기는 막장 짓거리를 하고 있어[86] 설령 난을 진압한다 해도 다른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망조가 든다. 3부에서 언더독 이미지로 인기를 끈 후송이 4부에선 원 역사의 중국 역사가 그랬듯이 순탄치 않을 거라 생각한 팬들은 많았으나, 이렇게까지 추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은 없어서 적잖은 팬들을 당황케하고 있다.
결국 수년 간의 전쟁에 지친 외국군도 철군을 결정하면서 태평천국과의 전쟁은 휴전이라는 애매한 상태로 끝난다. 그러나 태평천국에게 영토의 절반을 상실했음에도 영토를 태평천국에게 빼앗기거나 주 전장이 된 도통부들이 큰 타격을 입고 중앙정부가 태평천국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정예군까지 손에 쥐면서 역설적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은 전쟁 전보다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양 무기와 기술을 도입하면서 대한보다 한참 느리긴 하지만 근대화의 길도 밟기 시작했으며 원 역사의 서태후와 달리 최소한의 개념은 있는 송태후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무능한 아들을 대신해 임칙서 등 유능한 신하들을 전적으로 기용하고 손녀를 대한 황태자의 후궁으로나마 보내어 대한과 국혼을 맺고 일전에 자신이 죽이려 했던 한왕 조심창을 복권시켜 월왕에 봉하고 무능한 아들을 폐위하고 조심창을 황제 자리에 앉힐까 진지하게 고심하는 등 어떻게든 나라를 건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살아남고자 노력하던 와중 대한이 말 안 듣는 번국인 안남국 정벌을 결의하자 처음에는 대한과 후송의 이중봉신인 안남을 대한이 치는 것에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으나 대한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이득이라도 챙기기 위해 대한의 안남 정벌에 동의, 안남 북부를 침공한다. 하지만 침공을 담당한 월왕 조심창이 북월을 자기 영토로 만들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안남인들의 거센 저항, 게다가 태평천국의 뒷공작으로 서나라가 안남을 도와 참전하면서 곤경에 빠진다.
개방도 일찍 되었고 200년간 대한, 청의 칼끝을 직시하며 생존에 매달리다보니 대한이 새로 병기를 개발하면 후송에서 유사한 열화판을 내놓는 모습이 3부의 인력 철갑선부터 4부의 귀갑차까지 꾸준히 묘사된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나라가 뒤집어진 와중에도 서양식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조병창을 대거 신설했고 비행선도 어떻게든 자체 개발해 보려다 여의치 않자 마침 국혼으로 사이가 개선된 대한에게 매달려 기어이 수입해 오는 데 성공한다.
-
증기기관 자체개발
후송의 저력을 두려워한 대한, 청, 일본 등이 후송에게는 절대 넘기지 않았으나, 프랑스에서 수입한 백과전서에 실린 증기기관 자료를 기반으로 1755년(대한 원강 15년) 자체 개발에 성공한다.
-
증기선
기존의 인력 철갑선 대신 증기기관을 탑재한 철갑선을 실전 배치에 성공하고 양광 원정에 투입한다.
-
아편
덕성도의 난과 탐보라 화산 폭발을 겪고 사회가 혼란해진 후송에 운남산 아편이 퍼지면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후송 조정은 아편을 단속하지만 많은 농장주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딴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아편을 외려 장려한다. 이 때문에 아편중독 치료제로 대한제 인삼이 각광받고, 품질이 떨어진다는 미국산도 수요층이 있다. 황실에서는 당연히 아편을 단속하려 하지만 황실 직할지 바깥에 있어서 번왕이나 다름없는 양광, 형주, 복건, 한양 도통부에서 황실을 무시하고 아편의 유통을 묵인해버렸다. 이를 통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고 아편 거래로 황실 직할지의 부를 빨아들이면서 황실 직할지를 발전시켜서 군사력을 확충하고 다른 도통사들을 제압하려고 한 후송 조정의 계획도 망쳤는데 아마 여기까지도 의도하고 한 것으로 보인다. 나름 명군인 영강제가 임칙서의 계획을 받아들여 덕성도를 합법화해주는 대신 덕성도에게 아편 단속을 맡기면서 아편 밀매가 약간 줄어들긴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는 상황. 또한 서나라산 아편의 유통이 임칙서와 덕성도의 단속으로 줄어들면서 아편 가격이 오르자, 벵골산 아편이 대한 벵골 상관의 중개로 서양 무역상들을 통해 유입되면서 원역사 아편전쟁 직전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간다.
-
덕성도의 난(1796~1801)
후송 소태제가 양광 정복 후 백련교의 난으로 혼란해진 청나라를 치려다가 대한을 뒷배로 둔 종교인 덕성도가 사회 불안요소라고 의심하여 반란 따위는 생각지도 않던 덕성도를 탄압한다. 소태제가 1796년 덕성도 신도 10만명을 학살하자 전국의 덕성도 신도들이 봉기하여 5년 동안 후송 전국을 뒤흔들고, 간신히 난을 진압하긴 했지만 북벌도 무산되고 마침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기근까지 덮치자 운남산 아편이 퍼진다.
-
덕성도 합법화
덕성도가 그동안 탄압을 받아왔지만 아편을 엄금하는 교리를 가진데다 대한의 총본산에서 어느정도 통제력이 있다는 점에 착안한 임칙서의 건의를 영강제가 받아들여 덕성도를 합법화하고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다. -
묘노
후송 조정에서는 엄히 금지하고 있으나 금령이 미치지 않고, 지역에서 한번씩 계투가 터졌을 때 패배해 사로잡힌 포로들이 광동, 복건, 홍콩을 통해 대한, 일본, 영국 상인들에게 묘노로 팔려나간다. 태평천국의 난이 터진 후에는 관군이 나서서 태평천국 포로들은 물론 무고한 양민들까지 외국에 묘노로 팔아버리기 시작한다.
-
도통사의
군벌화
태조 조승복 때만 해도 황제에게 꼼짝도 못했던 도통사들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상 군벌에 가깝게 변했고, 태녕제 시기에는 사치와 향락으로 중앙 재정을 낭비하면서 중앙군의 전력이 약화되어서 통제도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양주, 회주, 요주, 항주, 명주, 한양, 형주, 정주 총 8개의 도통부와 양광총독부를 두고있다. 암군 태녕제조차도 도통사들이 거두는 세금은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에 도통사의 군사력은 유지되어서 정주도통사의 병력으로 양광을 함락할 수 있었지만, 그 때문에 원래 귀순한 임호관이 아닌 황제의 측근을 양광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홍사옥의 청을 거부하지 못했다. 영강제 시기에 황제가 직접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직례, 절강, 강서 단 3개 성 뿐이며 통제할 수 있는 도통사는 양주도통부, 회주도통부 둘 뿐이고 심지어 그 직할지에 있는 요주도통부, 항주도통부, 명주도통부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나마 몇 년이 지나면서 황제 직할지는 중원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라 그 경제력과 영강제의 노력에 힘입어 금군과 직할 2개 도통부는 가장 정예 전력으로 육성하여 직할지의 3개 도통부도 다시 황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황제 직속 병력을 동원하면 다른 도통부도 제압할 순 있지만 그러면 청나라와 대치하는 북쪽 전선에 구멍이 뚫리니 감행하진 못한다.
그러나 태평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고 황실 직할지가 아닌 도통부들이 최전선이 되면서 이 문제는 거의 해소되었다. 형주도통부는 아예 소멸했고, 한양도통부는 최전선에서 소모되어서 황실이 장악하였으며, 정주도통부와 양광총독부는 보급을 맡아서 경제력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기 때문.[87] 걔다가 청도 내부 문제로 쉽사리 남침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전쟁 전에도 군사적으로 도통부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임칙서가 사실상 국정을 총괄하고 있는데다가 태평천국과의 전쟁에서 단련된 정예군까지 쥐게 됐기 때문에 직할지의 도통부의 운명도 풍전등화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
추밀원의 권력기관화
후송은 옛 남송의 계승을 표방하여 남송의 관제를 사용하는데, 추밀원은 본래 군정을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청과의 전쟁이 반복되고 도통사들의 군벌화가 심해지면서 실제 역사에서 조선의 비변사처럼 모든 국정을 사실상 관장하게 되었다. 좌 ·우 지추밀원사도 종 1품이지만 정1품인 상서령보다 실권이 강하여 좌 ·우 승상이라고 불린다.
-
봉선으로 인한 국론 분열
태후 송씨가 대한과 청나라의 봉선의식을 보고 질투심에 불타 자국령인 형산에서 아들 함화제의 봉선의식을 올리게 하면서 호화찬란한 봉선의식 준비를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게 되어 민심이 동요하고 배상제회의 세력이 퍼지는데다, 태산이 아닌 형산에서 봉선을 한다는 것은 북벌의 의지를 버리고 강남 왕조로써의 현상을 유지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되어 화북에서 내려온 귀족 가문들인 북인들은 반발이 심하고, 토착 강남 귀족 가문들인 남인들은 북벌 포기를 적극 찬성하는 등 국론이 크게 분열되었다. 그리고 봉선을 위해 형산이 위치한 형주도통부 일대를 쥐어짠 것이 화근이 되어 배상제회가 태평천국을 건국해 반란을 일으키고 봉선에 쓰일 돈을 대드라 반군을 진압할 여력이 사라진 형주도통부를 우선적으로 공격해 근거지로 확보하면서 봉선을 한 형산마저 뺏기게 되었다.
-
강용군
임칙서가 아편 잠상들과 배상제회를 토벌하기 위해 오합지졸인 관군 대신 서양, 일본 용병과 중국인 지원병으로 조직한 멸독군(滅毒軍)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큰 성과를 냈으며 이후 태평천국이 정식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강용군(強勇軍)으로 명칭을 바꾼다.
-
귀갑차
좌종당이 대한군의 증기 귀차를 모방해서 만든 기갑차량. 증기기관을 탑재하는 대신 평상시에는 소가 끌고 전장에서는 안의 병사들이 인력으로 움직인다.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느리지만 탄약 적재량은 많은 편이며 태평천국군의 강선 없는 구식 대포로는 귀갑차를 격파하기 어렵기에 태평천국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대한 귀차와 달리 무한궤도가 없어서 함정에 매우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증기 귀차 개발도 시도하는데 그냥 증기 기관차 겉에 철판을 붙이는 식으로 제작했다가 실용성 없는 물건이 나왔다.
-
월왕부
양광총독부는 남경의 후송 조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도 하고 서나라의 양광총독이 그대로 후송에 귀부해서 후송의 영토가 된 곳이라 후송 조정과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하던 지역이었는데, 홍서당의 난으로 인해 양광총독부를 견제해야 할 다른 도통부들이 몰락하고 홍서당과의 전쟁수행에 큰 기여를 한 양광총독부의 대상단인 13공행의 영향력이 커져 이들 13공행이 양광총독부의 실권을 잡게 된다. 이윽고 조정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우산이 필요한 13공행과 어떻게든 양광의 독립을 막아야 하는 송태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홍서당의 난으로 귀국한 조심창을 월왕에 봉한 월왕부가 세워진다. 명목상 월왕의 봉지로서 월왕이 통치자이기는 하지만 실권은 없는 허수아비 신세고 13공행의 협의회인 자의국이 다스리는 상인 공화국 화된다.
-
안남 북부 정벌
대한이 안남을 응징하는 전쟁을 벌이면서 안남을 3등분하여 중부, 남부에는 괴뢰국을 세우지만 북부는 안남이 그동안 후송에도 봉신이었던 점을 고려하여 후송 몫으로 주기로 하자 월왕 조심원이 북부 정벌을 맡는다. 처음에 북부인들은 자신들의 찐씨 정권을 멸망시킨 응우옌 왕조에 대한 미움 때문에 후송군을 도왔으나, 13공행의 부추김을 받은 조심창이 야심을 부려 북부을 월왕부에 합병하겠다고 하자 북부인들이 이에 거세게 저항하는데다, 자신들의 유일한 무역항인 통킹이 후송에 넘어가 고사당할 것을 우려한 태평천국이 서나라 군대를 용병삼아 안남에 파병하면서 수렁에 빠지게 된다.
2.4.1.1. 월남국
대한과 후송이 안남 정벌 이후 안남을 분할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함에 따라 후송 조정은 후 월왕 조심원에게 안남 북부를 정벌하고 후 레 왕조의 왕실인 여씨의 후손을 찾아 번왕으로 삼을 것을 명한다. 조심원은 월왕부와 안남 북부를 들고 자립하고자 하는 욕심에 안남 북부를 월왕부로 편입하려 성급하게 나섰다가 북부인들의 반발과 서나라를 앞세운 태평천국의 개입으로 통킹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그제야 조정의 지시대로 후송의 번국인 월남국을 세우는 절차에 돌입한다.조심원이 고전하는 사이 대한이 먼저 남월이라는 이름을 낚아채 남월국을 세우고, 중부에는 중월국을 세웠으니 북부는 북월국이라 명명하는 것이 궤에 맞을 것 같지만 한황의 장단에 맞춰주기는 싫고 그렇다고 중국에서 안남 북부를 가리키던 명칭인 교지는 안남인들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남월을 뒤집어 월남으로 명명,[88] 수소문 끝에 떠이썬 왕조에 밀려 서나라로 달아난 여씨 왕실의 마지막 군주 여유조의 차남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여유기를 찾아 월남국왕으로 봉한다.
현지 발음으로 비엣남(Việt Nam)이 되는 한자어가 월남(越南)이니 원래 역사와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베트남이 탄생하긴 했다.
2.4.2. 배상제회 → 태평천국
태평천국 太平天國 |
||
국호 | 태평천국(太平天國) | |
별칭 | 홍서당(紅書黨), 홍적(紅賊) | |
위치 | 호남, 호북, 광서, 귀주, 사천 | |
수도 | 천경( 장사 → 상덕) | |
정치 체제 | 제정일치 신정체제 | |
국성 | 홍(洪) | |
국가원수 | 천왕 | |
언어 | 중국어 | |
문자 | 한자 | |
종교 | 배상제회(국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 |
민족 | 한족, 그 외 소수민족 |
원 역사와 다르게 홍수전이 덕성도 접주 출신이었기에 기독교가 아닌 덕성도의 분파로 출범했으며, 교리가 많이 변질되고 구월산의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사실상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었다. 후송이 쇠한 틈을 타 거병해 태평천국을 건국, 중원의 일각을 장악하고 거의 전세계를 상대로 한 기나긴 전쟁 끝에도 버텨내면서 몰락한 서를 대신해 중원의 세 솥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
명칭
공식 명칭은 국호는 태평천국, 국교는 배상제회지만 여러 멸칭으로 불린다. 태평천국이 믿는 종교라서 태평도, 붉은색 책인 홍서를 숭상한다고 홍서당(紅書黨), 홍서를 따르는 도적이라서 홍적 등. 변종 기독교라는 점이 유사하기 때문인지 서양에는 배상제회가 중국 부두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
천왕(天王)
배상제회의 교주 홍수전의 칭호. 천왕 홍수전은 자신이 전생에 수많은 공덕을 쌓아 예수불의 동생으로 환생했으며, 신도들도 배상제회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내세에 자신처럼 상제의 자식으로 환생할 수 있을 것이라 가르친다. 장사 함락 후 칭호를 천황으로 올리고 칭제하라는 제안을 들었으나 천황은 예수불뿐이라며 거절했다. 홍수전이 천왕을 자칭하기에 그 후계자인 홍천귀복도 천왕세자로 부른다.
-
신벌(神罰)
배상제회가 덕성도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 자발적 기부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중시하는 덕성도와 달리, 배상제회는 예수불의 말씀에 '천하가 너희 것이라' 했다 하여 부자들을 약탈하고 죽여서라도 재산을 빼앗아 분배하라고 가르치며, 이러한 약탈 행위를 신벌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배상제회의 공격을 당하는 부자들은 이들을 도적 떼로 취급한다. 이렇게 신벌을 통해 빼앗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으로 배상제회는 빠르게 교세를 확장한다.
-
교세
홍수전의 말빨 덕에 배상제회의 신도 수는 4년만에 10만명으로 불어났다. 또한 노예가 되어 각국으로 팔려나가는 쿨리(묘노)들 사이에 신도들을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해외 선교도 노리고 있다. 대미주에서는 비슷한 처지인 흑인 노예들 중 일부가 배상제회로 개종하기도 했다.
-
수도
형주도통부의 치소였던 장사를 점령한 후 장사를 천경(天京)으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후 대한군이 장사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상덕으로 파천, 홍콩조약으로 종전한 후 상덕을 천경으로 개칭하고 정식 수도로 삼고 새 궁궐 천조궁(天朝宮)을 짓는다.
-
천조궁
천경에 지어진 천왕의 궁궐. 궁궐인 동시에 상제를 모시는 예배당이며 그에 걸맞게 사치스럽게 꾸며졌다.
-
홍서
천왕 홍수전의 말을 기록한 어록으로 배상제회의 경전. 붉은색[89] 표지를 입히기 때문에 홍서라고 불린다.[90]
-
정치제도
홍수전은 황(皇)이나 제(帝) 칭호는 예수불만이 쓸 수 있으며 자신은 천왕(天王)이면 족하다고 천왕을 칭하고 있고, 육부 제도를 쓰되 각 부의 명칭을 마치 발해처럼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으로 붙이고 각 부의 장은 상서/시랑 대신 정/부/참 승상을 두었다. 그 중 이부에 해당하는 천부의 장인 천정승상이 최선임 관료가 된다.
-
군사제도
원수가 지휘하는 12개 군으로 나뉘어 있고 그중 좌신위대원수와 우신위대원수가 지휘하는 2개 군이 천왕 홍수전이 직접 이끄는 본대다. 항복하는 후송군은 배상제회로 개종시켜 받아들이고 항복을 거부하다 포로가 된 후송군은 묘노로 팔아버린다. 각지의 도적이나 아편 잠상 조직 중 태평천국을 따르기로 맹세한 무리는 소천병(小天兵)이라 부르며 후송 후방의 게릴라전을 맡기고 있다. 체격이 좋은 경우에 한해 여군도 모집한다. 또한 작중에서 동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과학적 사고도 유입된 영향인지 외국인 혐오 성향과 별개로 서나라를 통해 유입된 전투력이 좋은 서양인, 일본인 용병들도 일부 동원하고 있으며, 대한의 전차와 비행선 같은 신무기에도 미신이 아니라 대전차호를 파고 열기구를 띄워서 요격하려고 시도하는 등 창의적인 모습도 보이고 있다. -
홍의군
홍수전의 직속 정예 친위대. 붉은 옷을 입었다. 여군도 존재하는데 키가 크고 미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면 홍수전의 개인적 욕망이 반영된 듯하다. -
자체 조병창 건설
본래 태평천국군의 무기는 조악한 구식 활강총이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며 태평천국 각인이 찍혀있는 비교적 좋은 품질의 전장식 강선총을 든 병력이 나타난다. 안남 주재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이끄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자신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서나라를 통해 태평천국에 유주산 공작기계를 팔아먹으면서 규격화된 소총 자체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
등화관제
비행선 폭격이 반복되자 야간에 성 전체에 등불 하나 켜지 않고 경비 병력들조차 자기 발 아래나 간신히 비추는 약한 횃불을 드는 등화관제를 실시한다. -
대공포
비행선 폭격을 막기 위해 도입한 무기로 비행선을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린 적은 없으나 접근을 방해하는 효과는 내고있다.
-
멸만흥한
원 역사의 태평천국처럼 멸만흥한을 구호로 사용하는데, 만(滿)이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뜻했던 원 역사와 달리 작중의 태평천국은 후송의 배상제회를 믿는 한족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만(蠻)으로 규정하며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한족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는 바로 예수불의 아우인 홍수전이 한족의 몸으로 강림한 것이라고 한다.
-
대외정책
본래는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는 정도였으나, 외국인 용병 위주로 구성된 임칙서의 강용군에 의해 태평천국의 공세가 돈좌되자 외국인은 전투원 뿐 아니라 상인이나 선교사까지 외국인은 죄다 처형하는 식으로 극단화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인 용병도 소수 동원하고 샤를 루이 나폴레옹과 손잡고 프랑스에서 공작기계를 밀수하는 등 이중적인 면을 보여준다. 태평전쟁이 홍콩조약으로 종전한 후에도 불랑국과의 교역으로 무기와 공작기계를 들여와 이득을 봤던 경험을 살려 외국인 혐오 성향을 줄이고 서양과의 교류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양광총독부가 필사적으로 해안가를 사수한 바람에 항구를 확보하지 못하고 교역이 중립지역인 홍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면서 교역에 어려움이 크다. 예수교 측에서는 배상제회를 이단으로 보고 있지만 배상제회는 천주교를 포함한 예수교를 같은 예수불을 섬기는 종교라며 형제라고 칭한다.
-
전족 철폐
상류층 문화인 전족을 악습으로 규정하고 금지한다. 청처럼 전족을 했다고 죽이지는 않지만 재산을 몰수한다.
2.4.2.1. 역사
-
태평전쟁 - 1839년 ~ 1848년
1839년 가을 배상제회가 후송 타도를 목표로 태평천국을 건국하면서 시작된 후송과 태평천국 간의 전쟁. 태평천국이 선동하여 일으킨 전 세계 묘노들의 반란과 이에 분노한 세계 각국의 파병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수년간 지리한 공방전 끝에 어느 한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1848년 홍콩조약을 끝으로 휴전 형식으로 종전되었다. 종전 시점까지 양측을 합쳐 2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
태평천국 거병
1839년 1월에 후송 조정에서 배상제회 토벌령을 내리자 부패한 요주도통부 병력이 정상적인 덕성도 교인들까지 배상제회로 몰아 학살 약탈을 자행한다. 후송 조정을 도와 아편 잠상 토벌을 도우던 덕성도 교인들은 이 배신행위에 분노하여 70% 이상이 배상제회에 가담하고,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배상제회는 1839년 가을 거병하여, 태평천국을 건국한다. 홍수전과 12원수가 군사적인 재능을 크게 발휘하여 작년 봉선 의식 비용 부담으로 재정난이 심한 형주도통부 지역부터 거의 장악한다. 이후 귀주와 호북, 광서 대부분을 장악하고 강서 방면으로도 진출해 후송을 멸망 위기에 몰아놓는다. 포로가 된 관병과 단련병은 개종하면 태평군에 편입, 개종을 거부하면 묘노로 팔아버리면서 그 속에 접주들을 침투시키는 작전도 그대로 진행한다. -
홍적의 난
1841년 음력 9월 그믐(양력 1841년 11월 12일) 대한, 일본, 청, 대미주, 대삼주 등 전세계의 배상제회를 믿는 묘노들이 일시에 집단 봉기를 일으킨 사건. 무려 2년에 걸친 준비 기간 동안 완벽에 가깝게 비밀을 유지하는 철저함을 보였다. 봉기 날짜를 그믐달로 정한 것은 묘노들은 시계도 달력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지만 하늘을 보고 그믐달은 언제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약 반 년에 걸쳐 묘노가 없는 대유주를 제외한 전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산업시설을 파괴하며 여러 국가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성과는 거뒀지만 해방구를 만들지는 못 한 채 모두 진압되었고 여러 열강들이 태평천국을 적대하게 되어 태평천국 토벌을 위해 파병을 결정하여 외교적으로는 악수가 되었다. 홍수전은 예상 외의 사태에 당황했지만 이를 기회로 삼아 반대파들을 숙청한다. -
다국적군 개입(임인교난)
홍적의 난을 계기로 분노한 세계 각국이 후송의 편을 들어 의용군을 파병, 태평전쟁에 개입한다. 다국적군의 개입으로 후송은 멸망 위기에서 벗어나고 태평천국에게 빼앗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수복한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각국의 피로감이 쌓이던 중 홍수전은 대한을 포함한 각국에 친서를 보내 홍적의 난에 대한 사과 및 피해보상을 약속하며 철군할 것을 요청한다. 결국 일본이 먼저 철군을 결정하고 뒤이어 대부분의 국가가 철군을 시작한다. - 대한 - 약 45000, 번국인 하와, 술루, 유구, 조홀, 그리고 조심원 휘하 병력 도합 5000. 홍적의 난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여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다. 재석이 수백 년간 민사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통을 확립해 왔기에 가장 훌륭한 민사작전을 보여주며 전력도 가장 강하며 귀차, 회선연자포, 비행선 등 신무기를 적극 활용하여 태평천국군과의 전쟁을 신무기 실험 및 판촉의 무대로 삼는다. 번국 중 술루군은 태평천국을 이단으로 보아 포로를 잡으면 단 한 번 가톨릭으로 개종할 기회를 주고 거부하면 바로 총살한다. 태평천국의 수도인 장사 코앞까지 진격하여 태평천국이 수도를 상덕으로 옮기게 만드는 등 다국적군 중 가장 큰 성과를 내고 있었으나 계속되는 전쟁에 대한 역시 전쟁 피로를 호소하여 홍천귀복을 생포한 것을 계기로 철군을 시작한다.
- 일본 - 약 40000. 번국인 에조에서도 형식적으로 500명을 보냈다. 대한 다음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주 무장은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을 수입해서 사용한다. 체제에 위협이 되는 도막파를 숙청하기 위해 그들을 의용군으로 내보내서 태평천국의 손을 빌려 숙청하려는 것인데 역으로 그들에게 실전 경험을 주는 부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에조군 500명은 절반은 더위에 적응하지 못해 알아누웠고 나머지 절반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막대한 전리품을 받아가는 등 에조 지도층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형식적인 파병이다. 아체에서 인도로 가던 일본 귀족 성지순례단이 해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생기자 이를 징벌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철군을 시작한다.
- 잉글국 - 약 30000. 전력만은 대한 못지않은 강군이지만 민사작전이 개판이라 제대로 활약을 못 하고 있다. 작전 초기 반 태평천국 촌락에서 이들을 환영하여 연회를 열어줬는데 병사 몇 명이 촌장의 딸을 윤간하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았고, 강간범들을 처형하게 해달라는 요구까지 거절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대포까지 끌고와서 태평천국 지지도 아니었던 양민들에게 포위되어 섬멸당할 뻔하는 망신을 당한다. 전쟁이 장기화되던 중 태평천국이 강화를 제안하자 협상을 통해 적당히 보상받고 발을 뺄 계획을 하고있다.
- 미주합중국 - 약 3000. 개신교 근본주의 목사들의 영향으로 이 전쟁을 십자군으로 여기고 배상제회 신자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기에 후송 관군과 붙어먹으며 전쟁범죄를 많이 저지르고 있다. 그나마 한양에 있는 선교사들이 버지니아 연대에 대한 기사 때문에 한국에서 미국 선교회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진다는 급전을 여러 통 보낸 후에는 자중해서 백성 구휼과 치료를 통한 선교로 선회했다. 2년이 지나자 많은 병력이 슬슬 집에 가고 싶다며 귀국하지만 그만한 수의 보충병이 오지 않아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다.
- 신불랑국 - 약 2000. 신불랑 정규군이 간판만 의용군으로 바꿔달고 온 것이라 기강이 잘 잡혀있어 약탈이나 학살을 하지 않는다.
- 기타 아메리카 국가 회의 국가들 - 약 1000.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려고 억지로 파병한 터라 나폴레옹이 사망하자 원래부터 타국 대비 30% 정도 주던 의용군에 대한 급료 지급을 아예 중단해버렸다. 지구 반대편까지 왔다가 갑자기 돈 한 푼 못 받게 생겼으니 손해를 메꾸기 위해 열심히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있어 골치거리가 된다. 전사자보다도 탈영병이 많아서 귀국 시점에는 400명 규모로 줄어들었으며 귀국 비용도 안 대줘서 대한에서 귀국시켜준 대신 이들의 몫으로 나온 배상금을 대한이 가져가버린다.
- 내달국, 불랑국, 벌기국, 포도아국, 외수터국 - 이권을 노리고 소규모 병력을 파병한 국가들. 그나마 마카오 출신 병력을 투입한 포도아군을 제외하면 유의미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 포뢰선 - 전쟁 2년차에 뒤늦게 파병했다.
-
청 침공
봉기 초기에 태평천국은 청 조정의 통제가 제대로 닿지 않는 사천과 귀주까지 세력을 뻗친다. 이후 다국적군의 공격으로 후송 방면 진격이 돈좌되자 대신 황하 대홍수와 후금 내전 개입으로 전력이 약화된 청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허창과 중경 근교까지 점령한다. -
홍콩조약
일본을 시작으로 다국적군이 하나둘 철수를 준비하던 중 토벌군의 주력이었던 대한조차 홍수전의 의도대로 홍천귀복을 생포하면서 철군으로 마음을 굳히자 정전 협정이 시작된다. 태평천국과 후송이 서로의 영토에서 협정을 여는 것을 거부하여 협정은 영국령 홍콩에서 열리게 된다. 정전 협정에서 태평천국과 후송의 영토는 정전 협정 시점의 전선을 경계로 하는 것으로 정해진다. 평화조약의 기간은 5년이며 양측은 경계선 내 300리 안에는 1000명 미만의 소부대만 둘 수 있다. 그리고 홍적의 난으로 피해를 입은 다국적군 참전국들에게 약 5천만 냥의 배상금을 물며, 태평천국 영토 내에서 생산되는 은, 비단, 구리, 아편[91]으로 대신하도록 했다. 이자까지 쳐서 20년간 분할 배상하기로 했는데 이는 받을 빚이 남아있는 잉글국과 불랑국 등이 최소 20년 이상은 태평천국의 존속을 보장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평천국 측 영토 내에서 아직도 저항 중인 후송 병력들을 안전하게 후송 영토로 탈출하도록 보장해주는데, 얼핏 후송 측에 유리해 보이지만 태평천국 입장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 내부의 저항세력을 내보낼 수 있으니 자신들도 이득을 본 것이다. 태평천국과 후송은 서로의 명칭에 대해 끝까지 합의를 못 보다가 결국 조약문 정본을 영어로 작성하고 각자가 자신들의 입장에서 한문판 번역본을 만드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
서나라 정벌 계획
태평전쟁 종전 이후 군대를 놀리지 말고 전쟁을 재개하길 원하는 강경파 장수들과 기반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통공주를 후궁으로 내주면서까지 대한과 줄을 만든 후송을 바로 치기는 부담스러웠던 온건파 대신들이 향후 행보를 두고 갑론을박하던 과정에서 대원수 양수청이 내놓은 절충안. 완전히 몰락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데다 운남은 일국의 거점이 되기엔 척박하나, 일개 지방으로선 물산이 풍부하고 남쪽으로 뻗어나가 동남아에 세력을 뻗치고 태평천국의 숙원인 해양 확보의 교두보가 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을 갖추고 있기에 강온 양측을 모두 만족시켰다. 엇갈리던 견해들이 양수청이 이 의견을 내놓자 마자 하나로 모아졌다.
-
임자남정 개입
대한이 안남을 정벌한 임자남정을 처음에는 관망했으나, 북월 지방을 후송이 차지하기로 하여 그동안 태평천국이 안남을 통해 무역항으로 사용하던 통킹이 후송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자신들이 직접 후송과 싸우면 홍콩조약을 깨는 것이 되기 때문에 홍수전은 원래 정벌하려던 서나라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서나라 군대를 북월에 파병해 북월 저항세력을 도와 후송과 싸우게 한다.
2.4.3. 서
<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대서국
大西國 |
||
국호 | 대서국(大西國) | |
위치 | 운남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정[92], 귀족공화정[93] | |
국성 | 장(張) | |
연호 |
대순(大順) (1635 ~ 1656) 영창(永昌) (1657 ~ 1715) 승평(承平) (1716 ~ 1728) 흥시(興始) (1729 ~ ?) 광안(廣安) (? ~ 1759) 함녕(○○) (1760 ~ 1787) 복흥(復興) (1788 ~ 1820) 영무(○○) (1821 ~ ) |
|
문자 | 한자 | |
민족 |
한족, 회족, 묘족, 장족, 객가 기타 소수민족 |
원래도 다른 두 중원 국가에 비해 국력이 딸리는 형편이었는데, 희대의 암군 함녕제 장시원의 만행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놀고먹던 장시원은 무리한 안남 원정으로 주력군을 죄다 날려먹는다. 이 빈틈을 타서 양광 지방에 후송이 쳐들어왔고, 그러자 배후의 청은 생각하지 않고 사천의 병력을 다 뺐다가 청까지 빈집을 노리고 쳐들어온다. 결국 후송과 청이 영토 대부분을 갈라먹었으며, 함녕제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죽고, 서는 운남 지방만 남은 내륙국이 되어 더이상 다른 두 국가와 대등한 경쟁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내륙국이 되면서 대한과의 외교도 단절되어 한양에 있던 서나라 주재관들은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였다.
원래부터 서 황제에게 별 충성심이 없던 운남인들이지만 과거 청이 화북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기억 때문에 청에 귀부하기는 싫고, 서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고 했다가는 자신들 사이에서 황제 자리를 놓고 내전이 나서 망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합의를 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유지 중인 것이다. 황제와 황제를 따라 피난온 소수의 사천계 관료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며 실제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각 지역 호족들 수장 회의인 천산연(天山聯)이다.
청에서는 함녕제의 항복으로 서가 멸망했다고 간주하며 운남에 남은 서는 그냥 변방을 장악한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서왕(西王)'으로 대하고 있다. 운남이 워낙 지형도 험하고 인구도 산업도 별볼일 없는 땅이라 놔두고 있을 뿐 청이든 후송이든 서를 정복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무너질 수준. 그 후 탐보라 화산 분화로 인한 흉년과 벵골에서 들어온 콜레라까지 겹쳐 큰 피해를 입자 어떻게든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 아편을 대량 재배해 의화당의 주도로 후송과 청으로 밀수출하여 특히 후송에 큰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호족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도 아편팔이로 마련한 것이어서 황제 영무제가 자괴감에 괴로워할 정도. 벵골산 아편과 경쟁이 붙자 호족들이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벵골 칸국에 항의 서한까지 보내게 할 정도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면서 아편 수출길이 막히자[94] 안남의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접촉하여 새로운 아편 무역 루트를 개척한다.
이렇게 지방 마약상 수준으로 추락하며 거의 잊혀진 국가가 되었으나 한송 연합군이 안남을 공격하고 후송이 북월을 장악하려 하자 국가 기간산업인 아편 밀매가 막힐 것을 우려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해 후송군과 맞서며 다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는 유일한 무역항인 통킹을 상실할 것을 우려한 태평천국이 과거 서를 통해 밀수한 무기를 '빌린 무기를 반납한다'는 명목으로 쥐어주며 파병을 부추긴 영향도 있었다.
-
의화당
서나라 일대에 널리 퍼진 종교로 백련교의 분파이다. 본래 서 조정의 후원을 받아 널리 퍼졌고, 청이 사천 지방을 정복한 후 서 조정에서 후원하던 도교와 백련교를 싸잡아 탄압하려 하자 1793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후 지하로 숨어든 의화당은 아편 밀매에 손을 댄다.
2.4.4. 영국령 홍콩
홍적의 난으로 대한, 일본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어 사망자 2천명, 재산 피해 6백만 파운드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미 임칙서와 엘리엇의 협의로 의회 비준을 받아 홍서당 토벌군을 준비 중이던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도 찬성에 기울 수밖에 없게 되어 3만 명이란 대병력을 파병한다. 토벌의 대가로 구룡반도를 추가로 할양받고 그 북쪽에 공동조계인 소유주(小遺州)가 설치되었다.2.5. 건주
여전히 대한과 우호관계지만, 대한에서 건주 양국을 자신들보다 아래인 오랑캐 취급하는 풍조가 있다는 걸 알기에 내심 대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건주 양국은 여전히 북경을 공동수도로 여기는 등 겉으로는 가까운 사이지만 후금 대칸 후계자 문제를 놓고 점차 서로 상대방을 쳐 없애고 건주를 일통할 계획을 세우는 등 대한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들 위험이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 두 나라를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본가와 분가로 보고 있으며, 후송과 구분하여 건주 양국을 카타이라고 부른다.후금 내전의 결과로 1844년 후금이 청의 번국으로 격하되면서 드디어 건주일통이 이뤄진다.
2.5.1. 청
대청국 大淸國 |
||
국호 | 대청국(大淸國) | |
위치 | 직예, 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귀주, 감숙 | |
수도 | 북경 > 동경 개봉부 > 북경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정 | |
국성 |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 |
국가원수 | 황제 | |
연호 |
천명(天命) (? ~ ?) 숭덕(崇德) (? ~ 1663) 만방(滿邦) (1664 ~ 1671) 순치(順治) (1672 ~ 1695) 중통(○○) (1696 ~ 1728) 홍화(○○) (1729 ~ ?) 건강(建康) (? ~ ?) 강희(康熙) (? ~ ?) 계정(契正) (? ~ ?) 도광(道光) (? ~ 1838) 가정(嘉正) (1839 ~ ?) |
|
언어 | 중국어(관화), 만주어 | |
문자 | 한자, 만주 문자[95] | |
민족 | 만주족, 한족 |
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계정제가 황위에 올라, 서나라가 후송과 양광을 놓고 싸우느라 전 병력을 양광으로 보낸 틈을 타 서나라의 중심지인 사천 지역을 기습 공격, 33일 만에 서나라 황제 함녕제를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사천과 귀주 지역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후 백련교의 난과 기근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운남산 아편이 들어온다. 여기에 입관한 지 2백 년이 지나서인지 새로 영토로 편입한 사천과 귀주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 도광제와 뒤를 이은 가경제는 후금의 황위 계승 분쟁을 물밑에서 조장했고 이후 벌어진 후금 내전에 개입하여 1844년 후금을 청나라의 번국으로 만들고 후금군을 흡수하며 건주일통을 이룬다. 그러나 후금 내전에 집중하는 동안 황하 대범람으로 수도 개봉을 비롯한 하남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조정과 황실은 나몰라라한 채 북경으로 떠나면서 민심이 이반하고 기회를 노린 태평천국의 공격으로 허창 근교까지 밀려나고 사천 일대는 아예 통제력을 잃었으며 여기에 후송에서 태평천국 토벌을 위해 고용한 부상군이 반란를 일으킨 후 청나라 영토인 관중을 점거하여 왜진국을 세우는 등 건주일통을 이뤘음에도 오히려 국력은 흔들리고 있다.
-
인구
현재 청나라 인구는 약 1억이다. 그 중 한족이 대략 9천 4백만이고 지배층인 기인(旗人)은 만주인에다 몽골인, 왜인, 한인까지 다 합쳐도 6백만이 되지 않는다.
-
증기기관 전파
3부에서 어렵게 자체 개발한 증기기관을 대한의 물밑지원을 통해 개량해서 후금, 유구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
백련교의 난(1793~1797)
사천을 정복한 청나라 계정제가 서나라에서 흥하던 도교와 백련교를 위험요소로 보고 탄압하자, 백련교도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한다. 백련교 결사대가 개봉부 황궁을 습격해 계정제가 직접 총을 들고 싸워야 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으며, 살아남은 백련교 잔당인 의화당이 서나라에서 아편을 밀수해다가 팔고 있어 사회불안요소가 되고 있다.
-
종교
원역사와 달리 티베트를 차지하지 못했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준가르와 대립하고 있기에 티베트 불교가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때문에 원역사에서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 가득했던 열하에는 티베트 불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96]
-
황하 대범람과 북경 환도
1841년 6월 호우로 인해 황하가 대범람을 일으켜 수도 개봉부는 물론이고 황하 주변 지역이 큰 홍수 피해를 입는다. 후금 내전에 군사 개입 중인 상황에서 수도 개봉부에서만 8만명의 인명피해를 내자 청 가정제는 개봉부 복구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환도한다. 피해를 입은 하남과 산동 일대에서는 우리들은 홍수로 굶어죽어 가는데 황제와 건주 귀족들만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갔다며 민심이 흉흉해지고, 배상제회가 이 틈을 노리고 스며들어 1841년 전 세계 배상제회 대봉기 때 동참하는 등 청나라의 내부 사정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마침 다국적군 개입으로 후송 방면 진출이 어려워진 태평천국군이 북진을 하면서 허창 근교까지 태평천국군에게 장악당하고 허창이 함락 위기에 처한다. 역설적으로 태평천국군의 진격으로 오히려 반 독립 상태였던 사천 지역의 통제력은 회복되었는데 사실상 독립 상태였던 사천 지역 토호들이 태평천국의 신벌에 당하지 않기 위해 다시 청 조정에 붙었기 때문이다.
-
만어대사전(滿語大辭典)
3부에서 후송 소무제가 만든 소무자전에 자극받아 신종 홍화제가 만들기 시작해 20년 후 명종 강희제가 완성한 만주어 사전.
-
한글 전파
2부에서 누르하치가 재석의 도움을 받아 원역사의 만주 문자 대신 한글을 만주 문자로 채택하면서 4부 현재까지 한글을 만주 문자로 사용하고 있는데, 청나라의 지배를 받는 한족들도 마치 안남인들이 그러듯이 점차 어려운 한자 대신 이 만주 문자를 중국어 표기에 사용하는 일이 늘어나게 된다.
2.5.1.1. 후금 → 실위
대금국 大金國 |
||
국호 | 대금국(大金國) → 실위국(室韋國) | |
위치 | 몽골 | |
수도 | 상도, 카라코룸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정[97] | |
국성 |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 |
국가원수 | 대칸(大汗)→ 가한(可汗) | |
연호 |
천총(天聰) (? ~ ?) 명창(明昌) (? ~ ?) 천권(天券) (? ~ ?) 대덕(大德) (? ~ ?) 태화(○○) (? ~ 1722) 천정(天正) (1723 ~ 1760) 장락(長樂) (1761 ~ ?) 함녕(咸寧) (? ~ ?) 승광(承光) (? ~ ?) 덕창(德昌) (? ~ 1840) |
|
언어 | 만주어, 몽골어 | |
민족 | 만주족, 몽골족, 한족 | |
종교 | 천주교 |
가장 숭무적인 성향이 강했고 유목민족의 습속을 최대한 보존한 나라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부 들어서는 준가르 원정이나 청나라의 후송 공격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 외에는 천주교를 보호하고 교역을 하며 가장 안정적으로 평화를 누린다.[98] 게다가 청과 후송이 장서 잔당이 퍼트린 아편으로 큰 사회 문제를 겪고 있는 것과 달리 국교인 천주교가 아편을 엄금하는 데다, 국민 대부분이 유목민인 몽골족과 수렵민인 만주족인지라 아편에 취해 있다가는 굶어죽는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한족 노예들 일부를 제외하면 아편도 퍼지지 않아 내정도 안정되어 있다. 주변국 중 대한과 청은 형제국이고, 준가르는 신장 지역만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약화되었고, 러시아와도 부수의 난 이후는 우호 관계인데다가 향후 남진과 서진에 더 주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후계 문제를 제외하면 4부에서도 큰 문제가 있진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그 후계 문제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99]
후금의 유일한 문제는 대칸 계승 문제로, 몽골족과 만주족의 옛 습속을 간직하여 선대 대칸들도 형제들과 서로 암살 음모를 꾸며가며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싸움을 벌이고 패배한 황자들은 눈을 뽑히거나 수도원에 유폐되는 등 동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현임 대칸인 박락이 서자만 셋 있고 청 공주인 대복진 소생 적자가 없어 박락의 서자들과 야심 많은 박락의 동생들 사이에 서로 자객을 보내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고 청 황실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락의 동생들은 대한의 개입도 요청하고 있어, 박락이 후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죽을 경우 후금 판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고 이에 청과 대한이 말려들 위험성이 높다. 게다가 청 도광제는 이 기회에 후금을 아예 삼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어 4부 전반부에 일어날 대전쟁은 후금 황위 계승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덕창제가 죽으면서 다섯 왕자들의 내전이 터지고 만다.
1844년 1월 청나라와 대한의 도움을 받은 럭더훈의 승리로 내전은 끝나지만, 청나라의 도움을 받은 댓가로 후금은 독립 황제국에서 청나라의 번국인 실위국으로 격하되고 군주도 황제와 동급인 대칸에서 심왕보다도 격이 낮은 청나라 친왕과 동급인 가한으로 격하, 외교권과 군사권도 박탈당하고 후금군은 청군으로 흡수되어 독립을 잃게 되었다.
-
증기기관 도입, 철도망 확충
중종 건흥제의 장례식에 후금 성종 부수가 대칸임에도 직접 조문하러 온 것에 대한 태황 현종이 감동하여, 증기기관 수출 금지를 해제하자마자 후금에 증기기관차를 수출하고 대한 서북선, 심왕부 노선과 연결한 국제 철도망이 확충되었다. 대한과 후금 사이 교역의 70%가 철도를 통해 운송될 정도,
-
데우스 불트
후금 근위 팔기병들의 경례구호로 사용된다. 청의 속국이 된 후에도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고 청 팔기로 편입된 후금 팔기 출신들은 그대로 십자가 군기를 쓴다.
-
가무사
일본계 용병들을 통해 유입된 일본어 카게무샤가 변형된 말. 귀족들간의 암투가 일상인 후금에서는 가무사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으며 두도 또한 가무사를 내세운 덕에 굴마훈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
제2차 후금 내전과 청의 속국화
1840년 겨울 덕창제 보로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갖은 암살과 모략으로 경쟁자들을 몰아내고 보로에게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보로의 서2남 굴마훈이 국내에 남아있던 경쟁자인 보로의 동생 두도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면서 후금 내전이 터지는데, 약 1년이 지나는 동안 굴마훈의 후금 중앙군 12만, 두도의 귀족군 6만, 청나라가 밀어주는 굴마훈의 서형 럭더훈의 청군+자기 파벌 군 3만, 두도의 조카 얀신의 게릴라병 2천, 두도의 동생 찰니가 중앙아시아에서 고용한 용병 5만 등 다섯 왕자들의 군대가 서로 맞붙는 내전이 벌어진다. 게다가 찰니는 후금의 철천지 원수인 준가르 병사들까지 고용해 데려온 바람에 후금 서부지역 백성들은 준가르의 보복약탈로 도탄에 빠진다. 그리고 찰니가 외세인 준가르군을 데려오면서 청나라의 군사 개입이 가능해져, 재석은 결국 청나라가 미는 럭더훈이 대칸에 오르고 후금은 청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예상하고 럭더훈과 청을 지원한다.
결국 청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후금 내전은 청과 대한의 후원을 받은 럭더훈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 후 럭더훈은 보로의 후계자로 대칸위를 상속받는 게 아닌, 청 황제의 봉신인 실위가한이라는 형태로 책봉되었으며 그 격은 청의 친왕들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호도 감히 여진족의 조상인 금이라는 국호를 쓸수 없다 하여 실위로 변경되었다. 독립국에서 번국으로 격하되면서 외교권도 잃게 되었고 대한에게 요서 평야를 뜯기며 몽골 지역만 영토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외왕내제하며 내부적으로는 금국 대칸이라는 칭호를 쓴다. 후금 팔기도 전부 해체되어 청 팔기의 예비대로 편입되면서 군사력조차 거세당한다. 재석은 사실 심양회맹 위반이긴 하지만 후금 상황이 워낙 개판이라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대한 몫인 대흥안령 산맥과 구하(狗河) 동쪽 요서 평야와 남은 실위국 영토 내 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제대로 뜯어낸다.
유일한 항구인 흥만성이 대한에 넘어가면서 내륙국이 되었고 후술한 어마어마한 인구 유출에 농토 상실로 식량 자급도 현실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국가의 성장 잠재력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
인구 감소와 민족 구성 변화
내란 이전 후금의 인구는 600만으로 왜인팔기까지 합쳐서 만주인이 200만. 몽골인이 150만, 후송에서 잡혀온 한족 노예와 그 후손들이 250만이었다. 그러나 내전으로 속국이 되고 요서 지역이 대한에 넘어가자 150만에 달하는 만주인, 왜인들이 청으로 이주를 택한다. 이주하는 이들이 남겨두고 간 요서의 한족 노예들도 자유를 얻고 대한 백성이 된 반면 북서부에서 유목에 종사하던 몽골인 인구는 대한에 남은 10만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유출이 없었기에 내전 후 민족구성이 완전히 뒤집혀 만주인(왜인 포함) 30만, 몽골인 130만, 한족 40만. 도합 200만이 남았다.
인구가 3분의 1로 준 상황에서 몽골인 인구가 만주인의 4배에 달하니 몽골인 국가로의 정체성이 훨씬 커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실위가한 럭더훈은 두 딸을 청 황태자 영록의 후궁으로 보내고, 대한 흥선제의 조카를 세자빈으로 들여 만주인 왕실의 고립을 피하고자 발버둥친다.
-
왕위 계승 법률 제정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나라 망한 다음에야 왕위 계승에 관한 체계적인 법률을 만들었다. 가한이 대복진이 낳은 아들 중에 세자를 정하지 않고 승하할 경우 최연장자가 후사를 잇고, 대복진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가한이 생전에 들인 양자가 뒤를 잇는다. 양자도 들이지 않았다면 가한의 형제 중 최연장자가 보위를 이으며 그래도 혼란이 수습되지 않을 경우 청 황제가 직접 개입해 후사를 정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청이 실위 왕위 계승에 수시로 개입하는 걸 막고자 미리 개입 가능한 범위를 정해두었으며 내전 이전까지 명문화 된 적 없는 양자 입적 규정을 법안에 확실히 박아넣었다. 대복진의 거부로 양자 입적에 실패해 내전을 부른 덕창제의 선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입적에 관한 권한은 전적으로 실위가한에게 존재한다.
2.5.1.2. 대진국 → 진왕부
후송이 태평천국과의 정전협정 후 일본 용병대인 10만 부상군을 토사구팽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부상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부상군의 주력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 타도파(도막파)가 본국에서 고모와 근친상간죄를 짓고 도막파의 도움으로 부상군으로 망명한 아키라 친왕을 황제로 세웠으며 일본계 외에도 부상군에서 일하던 후송 한족 문관들까지 대거 합세했다. 전설에 따르면 서복의 탐사단에 동행한 진시황의 황자가 일본 천황가에 피를 섞었으므로 아키라 친왕도 진시황의 후손이고 그래서 중국에 영유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국호도 그래서 진나라를 따라 대진국이라고 지었다. 대진국 건국에 반대한 부상군 다치바나 사다마츠 부대가 후송 조정에 고변하여 후송군이 한양도통부 방면을 차단하자, 태평천국 영역인 강릉성 근처까지 진격한다. 정전협정 때문에 소규모 부대만 남겨뒀던 태평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으나 마침 강릉에 있던 홍수전이 즉석 회담을 열고 대진국의 목표가 서안이라는 것을 듣고 길을 열어줄테니 임시 동맹을 맺자며 담판을 짓는다. 이렇게 태평천국의 후방지원에 힘입어 겨우 수천명이 지키던 서안을 가볍게 점령하고 영토를 확보한다. 게다가 청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옛 후금의 왜인팔기들이 같은 왜인의 후예라고 대진국에 합류하면서 군사력도 강화하게 된다. 대진국의 존재로 후송은 부상군에게 보상금을 안 줘도 되고 청나라가 후송 공략에 신경 못쓰게까지 해주니 결과적으론 이득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진나라 부활과 막부 타도라는 망상에 빠진 줄 알았던 아키라는 그저 자신과 황후가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도막파를 이용했을 뿐, 전장에서 솔선수범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부상군과 왜인팔기들의 군심을 잡은 후 도막파를 전부 숙청하고[100] 청나라에 칭신해 실위와 같은 청나라의 번국이 된다.[101] 번국이 된 후에는 군대를 절반으로 줄이고 제대한 군인들은 농상공업에 투입하여 경제 발전 노력을 하며 출신 불문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등 상당히 양호한 정치를 한다.-
국호
공식 국호는 대진국(大秦國)이었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들과 동맹인 태평천국 뿐이다. 대한에서는 근본도 없는 나라에 '대( 大)'자를 붙여줄 필요도 없고, 도리도 모르는 왜놈들이 세운 나라이니 왜진국(倭秦國)이라는 멸칭으로 부른다.[102] 그나마 대한에서는 나라 취급은 해주는 반면 청에서는 왜인 도적이라며 왜비(倭匪), 후송에서는 그냥 반란군이라며 반도(叛徒)라고 부른다. 청나라에 칭신한 후에는 '진왕부'로 격하되었고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아키라의 성격 상 왕실 용어도 전부 왕에 맞춰 낮췄다.
-
수도
장안을 교토 서쪽 수도라는 의미로 서경으로 개칭 후 도읍으로 삼았다. 궁궐은 아키라가 사실 망상 환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군주였기 때문에 새로 짓지 않고 장안 대자은사를 환일궁으로 개칭해 궁궐로 삼았다. 그 후 현지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호족들의 딸 10여명을 후궁으로 들였는데 그들이 살 장소가 없어 호족의 저택을 사서 태일궁이라 이름짓고 후궁들의 거처로 삼았다.
-
시호,
묘호 미지정
신하들은 황제에 즉위했으니 연호를 정해야 한다고 했으나, 정작 황제인 아키라 본인은 진나라 시절에는 원래 연호가 없었다며 연호를 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본인을 사세황제라고 칭한다. 시황제와 이세황제에 이어 진왕 자영이 삼세황제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들의 후손인 자신은 사세황제라는 것이다. 그래도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인 것인지 영토를 확보한 후에는 진나라를 회복했다는 의미로 복광이라는 연호를 지정하지만 사세황제를 자칭하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청나라에 칭신한 후로는 황제 칭호는 깨끗이 포기하고 진왕이라 칭한다.
-
왜인팔기 귀부
대한령으로 넘어간 요서 지역에 거주하던 옛 후금의 왜인팔기들은 대부분 청나라로 귀부하는 것을 선택했으나, 청 황제 덕명이 이들에게 서부지역 미개간지의 개간과 광산개발을 시키자 이들은 당당한 팔기 영주였던 우리가 천한 한족들처럼 일을 해야 한단 말이냐고 분노하고 있었는데 마침 같은 왜인들이 대진국을 세우자 대부분 대진국으로 귀부해버리게 된다.
-
청에 귀부
왜인팔기와 도적들을 받아들여 40만의 병력을 가지고 전장에서 솔선수범하여 군심을 모아 어느정도 기반을 다진 영황(아키라)는 도막파들을 숙청하고 청의 번국으로 귀순하겠다고 선언한다. 애초에 막부 타도 따위 관심도 없었으며 사랑하는 고모와 함께 잘 먹고 살기 위한 기반만을 원했을 뿐이고 사세황제 자칭 등 또라이 행세를 한 것도 다 연기였다.
-
정치, 군사
건국 초의 주도 세력은 일본에서 온 도막파들이었지만 아키라가 이들을 좌천시키고, 실제 행정능력이 있는 후송 출신 관료들과 진나라가 장악한 관중, 사천 출신 향신들을 대거 등용하여 행정의 실권을 준다. 군대는 원래의 부상군 세력, 옛 후금의 왜인팔기 세력, 청나라와 맞서던 녹림 세력으로 약 40만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진나라가 청나라에 귀부하자 청나라에 적대하던 녹림 세력은 상당수 이탈하기도 했고, 군 병력을 제대시켜 농업과 상공업에 투입하기 위한 군축도 시행되어 20만으로 줄었다.
2000년 전 사람인 진시황의 후계를 주장하는 중원 최초의 일본계 왕조이자 초대 황제와 황후가 조카-고모 근친 관계인 중원 역사상 최악의 무근본 국가. 사이비 종교 신정국가인 태평천국이 존속된 것도 모자라 그 태평천국보다도 더 근본 없는 괴악한 국가가 등장하면서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현관국, 현관합체국, 근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아키라가 의외로 멀쩡한 임금다운 모습을 보이면서 앞으로 나라가 오래 존속할 가망이 섰다는 평을 받고 있다.
2.6. 일본
일본국 日本國 |
||
국호 | 일본국(日本國) | |
위치 | 혼슈, 시고쿠, 남규슈 | |
수도 | 경도(京都, 쿄토)[103]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104] | |
국성 | 일본 황실 | |
국가 원수 | 천황[105] | |
문자 |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 |
종교 | 신토, 정토진종, 유교 | |
민족 | 일본인 |
인구는 4천만 명 미만. 일본 용병들은 3부에 이어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이 북태평양을 사실상 호수로 만들며 본국 주변 바다는 전부 대한의 바다가 됐지만 동서양의 교류와 해양활동이 활발해진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않은 덕분에 일본인들의 활동 영역은 원 역사보다 훨씬 넓어졌으며,[106] 벵골 칸국이 국교를 정토진종으로 개종하게 만드는 성과도 거두었다. 아체 토벌전에서는 아체 술탄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경인왜란 이후 350여 년 만에 해외원정에 성공한다. 쇼군의 권위 역시 쇼군가의 혈통이 6대인 이에노부 이후로는 끊어지지 않았고 계속 범군 이상은 되는 자들이 즉위한 덕분에 원 역사보다 훨씬 강하다. 원 역사와 똑같이 존황을 명분으로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트리려는 존황토막파가 준동하여 막부의 골치를 썩이고는 있지만 원 역사보다 막부의 권위와 힘이 훨씬 강하며 용병 명분으로 존황토막파를 적극적으로 해외로 쫓아낸 덕분에 막부가 무너질 정도로 심각한 위협인건 아니다.
1852년 쇼군 이에츠구의 계획에 따라 공무합체를 실시, 에도 막부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지 249년 만에 문을 닫고 교토의 조정에 통합, 막부의 최고지도자였던 정이대장군은 조정의 내대신이 되어 정식으로 천황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실권을 휘두른다. 여담으로 원 역사의 일본이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이후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로 옮긴 것과 달리 작중 일본은 공무합체 이후 조정이 교토에 남고 참예회의도 교토에 설치되면서 수도가 교토로 확정된다.
-
강화된 막부 직할군
막부 직할군은 원 역사를 압도하는 규모로 무려 8만에 근접한다. 이는 전부 합쳐도 3만에 불과한 다이묘들의 군대를 압도한다.[107] 또한 해외 군사고문단에게 훈련을 맡기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해외 파병도 하기에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
증기기관 도입
대한, 청에게서 증기기관 도입이나 기술제공을 받지 못했는지,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도입했다고 한다.
-
텐메이 대기근
원 역사처럼 7년을 끌면서 최소 10만 명 이상 아사자를 내고, 대한의 식량 원조로 겨우 극복한다. 이 과정에서 대한의 식량 원조와 해외 교역을 독점한 에도 막부와 미쓰이 상회의 힘이 커지고, 각 번들의 힘은 더 약해지게 된다.
-
존황파
3부에서 미토 번 국학파의 태동을 묘사했는데 4부 시점에서도 원 역사처럼 막부의 탄압 하에서도 천황이 있는 교토를 중심으로 서서히 세를 불려가고 있는 모습이다. 작중의 일본은 외국과의 교류가 원 역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활발하기 때문에 '양이'가 아닌 '존황'만을 이념으로 삼는다. 재석은 2부에서 강항을 일본에 보내 성리학을 전한 결과가 이렇게 되어가는 것에 대해 쓴웃음을 짓는다. 다만 원 역사랑 달리 존황파 사이에서도 친한 성향인 자들이 상당히 있는 등 존황파 간 노선 차이가 커 보인다.[108]
-
성(城)
원 역사와 동일하게 막부는 일국일성령을 반포하여 각 번마다 성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성들은 모조리 허물 것을 명령하면서 수많은 성들이 사라졌다.[109] 오사카 성은 을미동정 때 화재로 소실된 혼마루를 재건했으나 또 화재로 인해 천수각이 소실되었다. 나고야 성은 원역사보단 소규모로 건설되었다.[110] 아즈치 성은 처음 세워진 그대로 보존된 상태이다. 화재로 소실되었던 에도 성의 천수각이 9대 쇼군 이에나리에 의해 재건되었다.
-
일본 황통 보완계획
일본 황실의 피가 흐르는 쇼군의 조카와 대한 태황의 조카딸을 결혼시키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황실의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천황으로 만들자는 계획. 대한 황실의 혈통을 아시아 전체에 흩뿌려 종주 노릇을 하고 싶은 광덕제, 미토파를 위시한 일본의 존황파 국수주의자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집결해 친한파인 막부를 몰아내고 대한을 적대하는 것을 우려한 재석, 그리고 쇼군가의 피가 흐르는 자를 천황 자리에 앉혀서 존황파의 명분을 무너트리고 막부의 통제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쇼군 이에츠구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탄생한 계획이다. 이에 따라 광덕제의 이복동생 전왕의 딸인 황양공주를 외가가 쇼군가인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혼인시킨 후, 나루히토 친왕과 황양공주의 딸을 닌코 덴노의 외동아들인 오사히토 황태자와 혼인시켜 그 아들을 다음 천황이 될 오사히토의 후계자으로 옹립, 천황가에 대한과 도쿠가와가의 핏줄을 넣을 예정이다.[111] 워낙 민감한 사안인 만큼 재석과 광덕제, 일부 최측근을 제외한 그밖의 대신들은 계획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며 막부 측도 입안자인 쇼군 이에츠구와 일부 중신 외에는 비밀로 하고 있다. 계획이 세워진 지 20년 가까이 흘러 주요 입안자였던 광덕제와 이에츠구가 세상을 떠났지만 계획대로 일본에 시집간 황양공주가 딸을 낳는 데 성공했고 이후 오사히토와 결혼시키는 데까지 성공하여 계획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
고산케
원 역사의 고산케는 오와리 번, 기슈 번, 미토 번이였지만 여기서는 히로시마 번이 고산케로 추가되었다. 3부에서 후사 없이 사망한 6대 쇼군 이에노부 후임으로 히로시마 번 계열의 요시무네가 7대 쇼군 자리에 오른 이래 히로시마 번 계열이 쇼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쇼군을 보좌해야 할 미토 번과 오와리 번이 존황파에 기울어져 있어 막부의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
-
와카슈도 금지
강항에 의해 성리학이 퍼진 영향으로 금지되었다. 다이묘와 고위 사무라이에게만 해당되며, 민간에는 아직 암암리에 존속되고 있다.
-
통선산
대한에서 자국산 마취제인 마비산에 특허를 걸자 일본에서 개발한 마취제. 아편 농도가 높아 마비산보다 마취효과가 높은 대신 조금만 잘못 써도 환자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거나 실명하는 등 의료사고 위험성도 높다고 한다.
-
명란젓 유행[112]
간인노미야 친왕에게 시집온 대한 황양공주가 친정에서 즐겨먹던 명란젓을 계속 친정에서 갖다 먹자 일본 상류층 사이에서 대한의 공주가 드시는 귀한 반찬이라면서 먹기 시작하고, 괜찮은 가성비 덕분에 서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아져, 명란젓의 주산지인 연해주는 대박이 난다.
-
신센구미
존황파 중에서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탈취하자는 토막파가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까지 암살 등 테러를 일으키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가 대 토막파 특수부대로 창설했다. 오랜 평화에 찌든 무사 계급 대신 쇼군 직할령에서 신분 상승 욕구에 목말라 있는 평민 계급에서 대원을 모집하여 180명을 정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평민들의 출세욕구를 막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모으기 위해 여러 미디어를 통해 신센구미를 영웅시하고 있다. 체포된 토막파들 중 단순 가담자는 후송에서 모집한 강용군에 용병으로 내보내버리기도 한다.
-
공무합체
존황파의 명분을 무너트리기 위해 쇼군 이에츠구가 일본 황통 보완계획과 함께 추진 중인 계획. 1850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이에츠구의 급사로 2년 미뤄져 1852년 3월 13일(양력 5월 1일) 실시된다. 에도의 막부를 폐하고 그 기능을 교토의 조정에 통합, 조정의 최고위직인 태정대신은 은퇴한 정이대장군의 명예직으로, 좌대신과 우대신은 황실과 공가의 대표가 받는 명예직으로 설정하고, 기존 막부의 정이대장군은 내대신을 겸해 사실상의 최고위직으로서 실권을 휘두른다. 정이대장군/내대신 직책은 세습한다고 규정하지는 않으나 전임자가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사실상 세습이 가능하다. 그밖의 막부 관료와 다이묘들도 실제 위치와 직무에 상응하는 조정 관직을 받는다. 막부가 보유한 육해군은 조정의 관군으로 편입되며 각 번의 군대는 번군으로서 평소에는 각 번의 치안을 담당하되 유사시 관군에 편입되어 관군의 지휘를 받는다. 또한 '참예회의'라는 각 번에서 파견한 대표들이 참석하는 봉건의회를 창설하여 각 번이 힘을 합쳐 정이대장군/내대신에게 대항하지 못 하고 자기네들끼리 다투게 만드는데, 참예회의에 보낼 수 있는 대표의 수는 각 번의 고쿠다카에 비례하며 고쿠다카 10만 석 당 1명의 대표를 내보낼 수 있는 구조이다.[113] 그러나 정이대장군/내대신 직할령만 해도 일본 전체 석고의 4분의 1인 900만 석에 달하고[114], 정이대장군/내대신의 말에 거의 대부분 복종하는 신판, 후다이 다이묘의 석고가 1500만 석으로 둘을 합치면 전체 의석 수의 2/3에 달하므로 사실상 내대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용의회이다.
-
낭인
본래 주인 없는 하급 무사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일본을 나가서 각국을 전전하는 일본계 떠돌이 용병을 칭하는 말로 의미가 변했다. 돈만 주면 누구에게든 고용되기에 태평천국 쪽에 붙어서 활동하는 낭인들도 있다.
-
을사사변
인도의 불교 성지로 향하던 일본 성지순례단이 아체 해적들에게 잡혀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순례객들이 도쿄의 공가들과 유력 다이묘 가문들의 은퇴한 노인들과 부녀자들이었기에 일본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 안 그래도 태평천국 토벌전에서 발을 뺄 명분을 찾던 일본은 이걸 명분으로 후송에 있던 토벌군을 그대로 아체로 보낸다. 4만 대군을 보내 2년에 걸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주요 항구 다수를 점령했고 수세에 몰린 아체 술탄은 오스만과 페르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둘 다 제코가 석자라 도와주지 않았다.[115] 결국 술탄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도망쳐 강화를 요청하는데, 강화 결과 일본은 아체 북쪽 끝의 섬 3개(브레우에 섬, 나시 섬, 웨 섬)와 항구 4개(쿠타라자 동안, 시글리, 록세우마웨, 이디라육)를 얻어 인도양으로 나가는 거점을 확보했고 네덜란드 역시 중재의 댓가로 항구 2개를 뜯어갔다.
2.6.1. 아모국
아모국 我母國 |
||
국호 | 아모국 | |
위치 | 홋카이도 | |
수도 | 오타올내 | |
정치 체제 | 선거군주제 → 귀족공화제 | |
국가 원수 | 왕 → 폐지[116] | |
언어 | 아모어, 일본어 | |
문자 | 가나, 한글 | |
종교 | 토속종교 | |
민족 | 아모인, 일본인[117] |
3부에서처럼 여전히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았고 미주로 가는 도중에 들러 아모국의 실상을 확인한 재석도 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태황 광덕제도 아모국이 사실상 일본에게 종속되었다 여겨 유구를 병합하는 대가로 아모국을 일본에게 넘기기로 일본 막부와 합의한다. 유구국처럼 아모국 국왕의 직위를 쇼군의 신하로 낮추는 대신 자치권과 기존 추장들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자 아모국 추장들도 압도적인 찬성을 보여 일본의 번국으로 확정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막부는 본색을 드러내서, 아모국을 막부의 직할령으로 삼고, 기근을 빌미로 수많은 일본인 난민들이 아모국에 몰려들면서 아모국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데도 이를 제지하려는 시도를 무력 시위를 동원해서 막으면서 손놓고 바라보는 처지에 놓이면서, 수세기 동안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
인구
30만 명 정도. 일본인이 벌써 반을 차지한 상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아모국을 영향력 하에 넣기 위해 이주시킨 일본인들이[118] 원주민 영주들이 훨씬 적은 세금을 걷자[119] 일본인보다는 아모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화되어서, 막부에서는 아모국은 천황의 내린 영지가 아니니 존황양이파와 맞설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는 기뻐하면서도 일본계 아모인들의 동향은 향후 통치의 불안요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
정치
여전히 600여명의 추장들 중에서 국왕을 뽑으나 명목상 자리일 뿐이다. 수도 오타올내에는 2부에 나온 초대 국왕 석탈왜가 지은 한국식 궁전과 그 후 일본 미쓰이 상회에서 지어준 일본식 성채가 있으나, 국왕도 평소에는 자기 부족 마을에서 살기 때문에 텅텅 비어있다. 1년에 한 번 '깨어난 곰들의 모임'(추장 회의) 때나 사람이 모이는 정도. 특히 최대 도시인 토카부치 지역에서는 추장이 용병을 고용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추장직을 세습 영주 직으로 바꿔버렸다. 일본의 번국이 된다는 소식에도 추장회의에서 기존 추장들의 권력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을 듣자 오히려 대한에 조공을 안내도 되는 것이 더 좋다며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다.
-
경제
여전히 과거처럼 소규모의 수렵, 어업, 채집, 텃밭 농업으로 자급자족하고 있다. 일본인 거주자가 바치는 세금으로 사치품을 구입하며 편하게 지내는 상황에 맛들려 마치 원 역사의 나우루인들 같은 상황이다. 일본인들은 대규모 농장, 어장, 광산, 항만 경영을 하고 있으나 아모인들은 그런 험한 일은 하기 싫어해서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들이 험한 일을 도맡고 있다.
-
도시
최대의 도시는 토카부치 항구로, 대한이나 일본에서 미주로 가는 배들이 꼭 들려 보급품을 싣고 가는 요충지가 되었고 인구는 8천여명인데 대부분 일본인이나 묘노들이고 아모인은 10%도 되지 않는다. 수도 오타올내에는 3천여명이 살고 있다.
-
태평천국의 난 파병
막부에서 아모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약 500명의 아모인 부대를 태평천국의 난 토벌군으로 파병된 일본군에 끼워준다. 전투력은 사실상 없고 후방에서 풍토병에 걸려 드러눕거나 놀다가 귀국하지만 아모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막부에서 많은 전리품과 묘노를 분배해 주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아모인들은 대한 태황보다 일본 쇼군이 더 우리를 잘 챙겨주어 우리 전사들이 용맹을 떨칠 기회도 주니 일본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회유당하고 있다.
2.7. 섬라국
원 역사와 동일하게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짜끄리 왕조가 다스리는 중이다. 대한과는 미수교 상태. 동쪽으로 남장과 진랍을 두고 대남국과 대치 중이며, 남쪽으로 말레이 반도의 말레이계 소왕국들을 두고 조홀국과 대치 중이고, 서쪽으로 면전과 적대 관계에 있다. 섬라가 유독 외교를 이상하게 했다기 보다는 동남아 자체가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 상태로 대한의 번국들 제외하면 서로 원만히 지내는 국가가 없다. 봉건제로, 수도 방콕과 핵심 요충지는 왕과 왕실에 충성하는 최고위 귀족들이 다스리나 외곽 지역은 반독립적인 영주들이 다스리는데 이들은 중앙의 통제를 잘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분쟁을 일으켜 적대 관계를 심화시켰다.남장과 진랍을 두고 다투던 라이벌인 대남국이 대한군과 후송군의 침공을 받자 한입만을 해볼 생각에 '남장과 진랍에서 대남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대한과 후송 편을 들어 참전하겠다'는 협박문을 보낸다. 다만 협박문만 보낸 채 실질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끼어든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힐문사가 대한에서 파견되자 회답으로 최고위 귀족이자 외교 경험이 풍부한 해군 제독을 사절로 임명해 파견한다.
회담 자리에서 대한에게 무례를 범하지도, 자국을 과하게 낮추지도 않는 절묘한 외교적 수사로 포문을 열고, 표면상 남장과 진랍이 모두 섬라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세련된 외교를 구사했다. 대한 역시 사절의 흠잡을데 없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섬라의 의중을 파악하고 일단 크게 부르면서 차차 차이를 좁혀나가기로 한다.
외왕내제 황제 놀음에 잡아먹혀 진심으로 자신들이 열강 대국들에 맞설 수 있는 천자국이라 여기며 막나간 안남과 달리 자신들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 얻을 건 얻어내려는 모습이 원 역사에서 이웃들이 다 서구 열강에 집어삼켜지는 가운데서 홀로 살아남을 때 보여준 모습 그대로이다. 협상 결과에 따라 세 토막난 안남 대신 대한의 인가를 받은 인도차이나의 패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2.8. 준가르 칸국
원 역사에서 건륭제에 의해 진작에 학살당해서 세상에서 사라진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본국에서 쫓겨난 로브 샨쇼노의 무리가 인도에서 벵골을 정복하고 잘 사는 데 반해, 준가르 본국은 러시아와 후금 사이에 끼어 거의 망하고 간신히 신강지역만을 지키고 있다. 결국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한 대칸 타마치가 러시아 차르에게 복속을 택하면서 러시아의 속국이 되고, 5년에 한번씩 칸이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조해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런 현실에 절망해서 동족의 나라인 남쪽 벵골로 떠나는 전사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1840년 후금 내전이 터지고 후금 사패륵 찰니가 준가르에서 용병을 고용하자 이 기회에 원수 후금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용병들이 후금 서부지역을 크게 약탈하게 된다.수도는 '굴자'라는 도시이지만 성벽은 따로 없다.
2.9. 아라칸 왕국
원 역사에서는 1784년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에게 멸망했지만 준가르가 벵골로 들어와 벵골 칸국을 세울때 벵골술탄국 세력 일부를 흡수하여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과 영국의 공장제 면포로 인해 손해를 본 벵골 칸국이 면포를 대체할 수출 상품인 쌀과 차를 재배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아라칸을 침공, 아삼을 비롯해 인도-미얀마 국경 서쪽의 모든 땅을 빼앗고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여기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해안지역을 잃어버린 꼰바웅 왕조 또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아라칸 남부를 공격한다.마지막으로 대한이 함대를 파견해 벵골군을 돕기로 하면서 사실상 멸망이 확정되었다. 대한 흥선제는 벵골을 거들어 우호국으로 단단히 묶어두는 한편 치타공 중심으로 남쪽으로 길게 뻗어 방어하기 난감한 아라칸 남부는 항구가 필요한 면전국에 넘기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결국 1852년 벵골과 면전에 의해 멸망한다.
2.10. 면전국
원역사에서는 1784년 아라칸을 멸망시컸으나 준가르 칸국의 등장으로 불가능했으며 달라진 영국-버마 전쟁으로 인해 원역사보다 더 빠르게 해안가 지역을 모조리 상실한다. 졸지에 내륙국이 된 꼰바웅 왕조는 벵골에 의해 망하기 직전인 아라칸을 공격해 해안을 얻으려 한다. 1852년 아라칸을 멸망시키고 얻은 전리품에 자국 사찰의 금박까지 전부 다 벗겨내 배상금을 완납. 영국군을 철수시키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2.11. 아체국
인도로 성지순례를 가던 일본 귀족 성지순례단이 아체 해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아체에게 전쟁을 선포, 이를 명분으로 태평천국 토벌군을 후송에서 빼내 아체로 파견한다. 대한에서도 비행선과 귀차로 편성된 지원군과 자원한 승병들을 파병하여 일본을 도우며, 2년에 걸친 전쟁으로 주요 항구와 지역을 빼앗기며 술탄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도주하여 강화를 요청했고, 결국 일본에게는 항구 4곳과 아체 북쪽 섬 3개, 중재를 맡은 네덜란드에게도 항구 2곳을 넘겨준다.2.12. 천축국
시크 왕국과 벵골 칸국을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원역사처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게 되었다. 굴람 카디르의 난을 계기로 무굴 황제는 완전히 동인도 회사의 허수아비가 되고 무굴 제국의 재상을 겸임하는 동인도회사 총재가 통치를 대리하면서 원래 회사의 설립 목적이었던 인도 무역 대신 무굴 제국의 행정을 대리하면서 거둬들이는 세수입이 주 수익원이 되었다. 그 때문에 수익을 늘리기 위헤 중간 몫을 차지하는 토후국을 없애고 명목상 '황제가 다스리는 직할지'를 확대하는 중이다.1833년에는 시크 왕국도 영국에게 굴복하여 대한이 지원하는 벵골 칸국만이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벵골 칸국은 대한의 지원에 힘입어 아라칸 왕국 정벌에 나선다.
여담으로 원 역사보다 일찍 황동 탄피가 개발되어 영국이 황동 탄피 소총을 세포이에게 보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페이퍼 카트리지의 기름 문제로 촉발된 세포이 항쟁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13. 벵골 칸국
나디르 샤의 무굴 정벌에 용병으로 따라왔던 준가르 왕자 '로브 산쇼노'가 벵골 태수와 관계가 틀어진 대한의 골가타 상관의 지원을 받아 벵골 태수를 죽이고 벵골을 정복, 명목상 나디르 샤의 봉신국인 벵골 칸국을 세우고 본인을 구르칸으로 선포한다. 나디르 샤가 죽은 후 구르칸은 공식적으로 독립국을 칭하고, 마라타 동맹 등 다른 인도 국가들과 싸우면서 대한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어 지원을 받는다. 티베트가 네팔과의 전쟁에 자신들을 계속 끌어들이려 하자 티베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교 또한 준가르 시절 믿던 티베트 불교에서 일본 승려들이 포교한 정토진종으로 바꾸고, 무력으로 벵골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한다.[120] 그래서 새로운 카스트 제도가 생겼는데 최상위는 준가르인[121], 2위는 일본 용병, 3위는 인도인 관료나 군인[122], 4위는 인도인 평민, 5위는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 그리고 불가촉천민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랑민이 있다.벵골을 제외한 인도 전역이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대한의 지원이 더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현재 영국 정부는 대한의 국력과 거리의 차이, 그리고 대한과의 우호관계의 중요성 때문에 벵골을 무력으로 병탄할 생각은 없다.[123]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영국과 달리 정당한 값을 치르고 교역을 하는 대한의 보호에 만족하고 있으며, 주변국들도 고만고만하여 준가르의 가장 큰 적은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라고 할 정도로 안정적 구도를 확립한다.
영국이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지원하여 정식으로 후송에서 이권을 얻는 대신 벵골산 아편의 수출을 중단하기로 하고, 남은 후송의 아편 수요도 안남국에 자리잡은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가로채는 바람에 벵골의 주산업 중 하나인 아편 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와중에 대칸 토를로시가 말라리아로 사망하자 후계자 암투가 벌어져 3남 소남자르갈이 형 담바수렌을 죽이고 대칸이 되며, 취약한 정통성과 경제적 침체, 영국령 동인도 회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더욱 더 대한과 밀착하는 선택을 한다.
소남자르갈은 앞서 타격을 입은 아편 산업, 대한과 영국의 공장제 면포로 인해 손해를 본 면포 산업을 대체할 수출 상품인 쌀과 차를 재배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 실패했던 아라칸 침공을 재개, 아삼을 비롯해 인도-미얀마 국경 서쪽의 모든 땅을 빼앗고 결국 아라칸을 멸망시킨다. 대한은 괜히 방관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고 벵골내에 친영파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고 벵골을 계속 우호국으로 붙들어 두기 위해 함대를 파견해 벵골군을 지원하며, 종심이 얇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 지키기 힘든 아라칸 남부 지역은 항구가 필요한 면전국에 넘기고 기름진 북부 지역은 벵골이 갖는 방향으로 매조지 짓기로 한다.
7세기 이후 쇠퇴 일변도를 격다 13세기에 불교가 완전히 소멸한 인도에서 수백년의 시차를 두고 부활한 불교 왕조로 건국 과정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를 향한 강도 높은 강제개종과 학살을 자행했고 국경 분쟁도 잦아 영국령 인도 밑으로 들어간 주변 힌두교, 이슬람 토후국들과의 사이는 무척 험악하다. 언제 전면전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각각 뒷배로 있는 대한과 영국 때문에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는 영국에게 군수품을 대면서 토후국들 위에 있는 영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으나, 그뿐이었고 불교로 개종한 척만 한 힌두교도들이 벵골에서 금지된 사티 풍습을 암암리에 유지한 것을 적발하자 사티를 저지른 시댁&친정 식구들 전부와 적극적으로 동참한 이웃 주민들을 똑같이 불태워 죽이고 나머지 주민들은 조홀에 노예로 팔아버린 일로 힌두교도 토후국들과의 사이는 더 안 좋아졌다.
안남이 대한과 후송 양국에 칭신한 채 따로 노는 애매한 번국이라면 벵골은 대한의 번국은 아닌데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밀착되어 있어 애매한 국가다. 일단 재석이나 조정 대신들의 주류 인식은 벵골의 실질적 종주국은 대한이란 것이며 이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2.14. 파수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쪽으로 남진을 개시하자 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영국이 침공하면서 1848년 영국과 전쟁을 시작한다. 원 역사처럼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지면서 전비를 부담하는 동인도회사는 부담을 호소하고 인도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일자 영국은 전쟁을 시작한 존 러셀 내각의 후임 내각인 더비 백작 내각에서는 발을 뺄 궁리를 하다 1852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전쟁을 시작하자 영국은 파수둔 칸의 왕위를 인정하고, 파수둔 측은 무굴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간략한 조건으로 평화협정이 성사되었다.원래 역사보다 더 오랜기간, 더 많은 전비를 들여 싸웠으나 별로 많은 걸 얻지도 못하고 3만의 사상자와 허술한 협정만 남긴 채 끝난다.
3. 대유주
세부적인 진행은 다르지만 이 세계선에서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한편 유럽에도 증기기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철도망이 깔리기 시작하고, 7년 전쟁 중 도버 해협에서 프랑스 해군의 증기선 전투함과 영국 해군의 장갑함이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대한보다는 기술이 딸려 전함이라기보다는 모니터함 수준이라고 한다. 열기구도 전쟁 중에 널리 사용된다. 특히 나폴레옹이 최초로 철도망을 이용한 병력 이동, 야포 견인용 증기자동차 도입 등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한 황실의 유별난 태자 교육과 건국 후 400년간 암군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은[124] 유럽에도 널리 알려져 플라톤이 이상향으로 내세운 철인 정치를 현실에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럽 왕실들에서도 대한을 본받아 자식들을 혹독하게 교육시키는 가문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처럼 대한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나올 정도.
-
아시아에 대한 인식
아시아와의 교역이 늘어나고 접할 수 있는 정보량도 많아지면서 아시아 국가들을 일방적인 침략과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아닌 나름 대등한 교역상대로 보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속으로는 여전히 제국주의와 백인우월주의적 사고를 근간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저평가하고 얕잡아보는 시각이 남아있다. 일단 동아시아의 3대 문명국을 '대한, 일본, 키타이'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대한은 북태평양을 내해로 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이자 어지간한 유럽 열강을 능가하는 강대국이며 일본은 교역과 용병업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고 건주 양국을 일괄적으로 묶어 부르는 키타이는 동아시아 유일의 기독교 독립국이기 때문. 그러나 같은 문명국이라도 백인이 아니고 유럽 기준에서 이교도란 이유로 일본과 키타이는 내심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국력 자체를 무시할 수 없는 대한 하나만 자신들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125] 후송의 경우 '시니카'라고 부르는데, 별다른 교류가 없기에 인구수가 많아서 덩치만 큰 비문명국으로 여기고 있다. 그 외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은 미개한 이교도 국가로 여긴다. 그러다가 태평천국 전쟁에서 유럽군이 고전하고 태평천국이 의외로 선전하고 난 뒤에는 후송과 태평천국 두 나라의 잠재력을 깨달은 사람이 많아져서 문명국의 말석으로는 쳐주고 있다.
-
한국인 백인설
장조 시기 견서사로 유럽을 방문한 조선인들과 세스페데스가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 중종이 성친왕 시절 빈 공방전에 참전한 일화랑 올렝카와의 사랑을 소재로 비발디가 창작한 오페라의 영향으로 4부 시점에서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이란 오해가 퍼져[A] 3부에 이어 한국인들이 사실은 백인이란 주장이 더 만연해지고 있다. 훔볼트처럼 직접 대한을 방문한 학자들이 한국인은 백인이 아니라는 걸 알려도 어지간한 유럽 열강을 능가하는 강대국 대한이 백인국가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과 인종주의 때문인지 한국인이 백인이란 근거랍시고 온갖 허무맹랑한 낭설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며 심지어 러시아 황태후처럼 한국인 백인설을 진지하게 믿는 높으신 분들도 나올 정도다.
3.1. 외수터국
3부 시점까지는 '황제령'이라고 불렸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외스터라이히를 음차한 외수터국으로 불리고 있다.요제프 1세가 종두를 맞아 원 역사보다는 오래 살긴 했지만 대신 매독에 걸려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죽었다. 그래서 원 역사와 똑같이 동생 카를 6세가 즉위하였고, 국사조칙이 반포되는 것만 늦춰졌을 뿐 카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부부가 즉위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맹의 역전, 7년 전쟁을 치른 것도 원 역사와 똑같다. 7년 전쟁 후 요제프 2세는 동맹이던 폴란드 왕국의 뒤통수를 치고 제2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의 거래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양시칠리아 왕위를 가져갔으며 원역사처럼 재상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국력을 상당히 회복하였다.
마리아 카롤리나가 마리 앙투아네트 대신 프랑스 왕비가 되며 원 역사와 달라진 영향으로 프란츠 2세의 부인이 바뀌어 프란츠 2세 사망 후 즉위한 페르디난트 1세부터는 가상인물이다. 그럼에도 원 역사와 똑같이 1848년 혁명이 터지고 그 결과 페르디난트 1세가 물러나고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한 후 러시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혁명을 진압한다. 그러나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승리할 경우 러시아와 접한 동부 국경 뿐만 아니라 남부 국경과 접한 발칸빈도까지 러시아 세력권으로 편입되어 포위당하게 되고 나아가 자국내 슬라브계 신민들까지 영향을 받을 것이란 우려에 오스만의 편을 들어 개입을 주장한다.
3.2. 포뢰선
프리드리히 대왕이 원역사처럼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다. 원 역사와 달리 폴란드 왕국도 대 프로이센 동맹에 가담하여 '네 여인 동맹'과 싸웠지만 홀슈타인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가 스웨덴 국왕이 되면서 초장부터 스웨덴과 동맹한 데다, 러시아도 루시아 태후 사망과 함께 동맹에서 이탈하여 원역사처럼 승리를 거두고 폴란드를 분할하며 동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다.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원역사처럼 나폴레옹에게 털렸지만 나폴레옹이 신대륙으로 도망친 후로는 멸망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 국가들이 재통합된 독일 연방에서 2인자격 위치에 올랐으며 의장국인 오스트리아를 재치고 독일어권을 통합하려 한다.3.3. 불랑국
-
미국 독립전쟁
증조부 루이 14세를 본받으려던 루이 16세가 7년 전쟁 패전에 충격을 받고 사망하고, 그 아들 루이 17세는 영국에 보복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원역사처럼 미국을 도와 참전한다. 루이 17세가 1780년 사망한 후에도 그 아들 샤를 10세가 아예 프랑스 육군을 파병까지 하며 미국을 지원한다.
-
철도 부설
샤를 10세가 국영 철도회사를 통해 프랑스 전역을 철도망으로 연결하겠다는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엄청난 재정 적자를 낳는다. 하지만 이 철도망은 곧 나폴레옹이 군사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공화파 반군을 진압하고 체제를 굳히는데도 유용하게 쓰였으니 장기적으로는 좋은 투자였던 셈.
-
프랑스 대혁명
샤를 10세와 마리아 카롤리나 부부가 원역사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보다 훨씬 강압적인 대처를 하여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에 대해 바로 무력진압으로 대응하면서 프랑스 전역이 내전 상태에 빠져든다. 결국 혁명군 총사령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국왕 부부를 생포했으며,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다.
-
부르봉 왕정 복고
샤를 10세의 왕세자 루이 18세가 귀국해 왕정 복고를 이루고,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 하에 반동정치를 편다. 원 역사와 달리 알제리 원정을 미루고 본국을 지켰기 때문에 프랑스령 알제리는 원역사보다 좀 늦게 정복되고, 철도망을 잘 활용해서 7월 혁명과 뒤따른 반란도 철저히 진압했다.
-
1830년 7월 봉기와
1832년 6월 봉기 진압
원역사와 달리 루이 19세가 알제리 원정 등을 하지 않고 혁명에 대비하여 병력을 파리 주변에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 철도망을 통해 추가 병력 증원도 원활했고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지원까지 받아 두 봉기를 진압했다.[127]
-
프랑스 외인부대
원역사와 비슷하게 루이 19세가 알제리 침공 주력부대로 창설한다. 외인부대이므로 프랑스인 부대와 달리 루이 19세에게만 충성할 것이라는 점을 노려 알제리 침공에 성공하면 신불랑 침공에도 투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
-
1842년 2월 혁명과 공화국 부활
수에즈 운하 건설과 알제리 전쟁, 이집트 독립전쟁 개입으로 재정이 파탄나는데도 루이 19세와 귀족들은 호화생활을 즐기는 데 분노한 국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루이 19세를 폐위시키고 프랑스 제2공화국을 수립하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대한 황태후 박씨에게 자금을 받아간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봉기에 큰 역할을 하여 정계의 거물로 떠오른다.
-
아시아에서의 만행
원 역사의 혐성국이었던 영국은 3부에서 이미 홍콩을 아시아 거점으로 확보했고, 대한의 존재로 인해 동서교류가 활발해져서 후송도 유럽 국가들에 딱히 적대적인 모습을 안 보이는데다가 태평천국과 전쟁으로 인해 훨씬 모양 좋게 아시아에 영향력을 넓히게 되고 임칙서와 거래로 아편 밀수도 중단하게 된 반면 이 포지션을 작중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차지하게 되어서, 아편 밀수에 태평천국에 공작기계를 거래하고 안남국에게 대한에게서 독립하라고 부추기는 등의 혐성짓을 벌이고 있다.
-
샤를 루이 나폴레옹 친위쿠데타
정치에 지친 데다 병들어 쇠약해진 대통령 루이 필리프를 말빨로 속여 후임 대통령이 된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공화국 수비대를 동원해 1849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 44주년 기념일을 디데이로 삼아 친위쿠데타를 일으킨다.
-
폴리네시아 복속
하와국이 태평천국 파병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던 노예사냥을 재개하면서 대한에 복속한 마셜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대신 폴리네시아 쪽으로 눈을 돌린다. 이에 프랑스가 타히티를 포함한 폴리네시아의 소왕국들에게 자신의 보호국이 되면 하와국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이들도 받아들여 일대가 프랑스령이 된다.
-
제정 복고
친위쿠데타로 정국을 장악한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인의 황제 나폴레옹 2세로 즉위한다.
3.4. 루스국
원역에서는 표트르 1세의 남계 핏줄이 끊기고 정통성 약한 여제들이 귀족들에게 대폭 양보하면서 농노제가 강화되었는데 재석 덕분에 알렉세이의 혈통이 문제 없이 쭉 이어지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져 원 역사보다 더 강한 황권에 농노제의 퇴행성도 덜하다. 대한을 롤모델로 삼아 근대화 개혁을 추진한 표트르 1세 이래 꾸준한 교류로 관제, 도량형, 병기 등 다방면에서 대한을 많이 참고했다.알렉세이 2세가 사망한 후 아들 표트르 2세가 즉위했지만, 루시아 태후가 아들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섭정을 거두지 않아 표트르 2세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루시아 태후는 딸 카타지나를 도와 7년 전쟁에서 대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했지만 표트르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친근감이 있던 데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 폴란드를 차지하려는 여동생 카타지나에 대한 미움 때문에 어머니가 죽고 친정을 선포하자마자 동맹을 이탈하고 프로이센 편으로 편을 바꿔 이 세계에서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난다. 표트르 2세의 배신으로 카타지나가 충격을 받고 사망하자 거리낄 것 없이 폴란드를 분할하여 동폴란드를 점령한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표트르 3세가 모두 짧게 재위하고 죽고, 어린 알렉산드르 2세의 섭정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우유부단한 대처로 국력에 큰 손실을 입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가 모후를 끌어내리고 친정하면서 국력 회복에 시동을 걸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대한 원평제의 무기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극동 방면으로의 진출은 대한의 존재로 인해 진작에 막혔고, 재석은 3부 중종 시절 표트르 1세와 의형제 관계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동로마 제국의 후예를 명분삼아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렸으나, 후대 차르들은 오스만 제국과 그 뒷배인 영국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난관 때문에 원 역사처럼 중앙아시아를 통해 남진을 신도한다. 무굴 제국이 원 역사보다 빨리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중앙아시아 칸국들의 수입원이던 무굴 제국에 대한 군마 수출도 끊기게 되어 중앙아시아 칸국들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대한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수입해 원 역사보다 군사력이 강해진 러시아군을 당해낼 여력이 없었기에, 카자흐 칸국은 아예 멸망, 히바 칸국과 부하라 에미르국은 원 역사처럼 러시아의 속국이 되면서 원 역사보다 빨리 중앙아시아 정복에 성공한다.[128]
역사 개변으로 기술 발전이 빨라지고 배후에 있는 대한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원 역사 크림전쟁의 주요 패인이었던 부실한 산업화와 낙후된 병기, 교통망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었다. 여기에 대한이 개발한 회선포, 귀차, 비행선에 영국은 구매하지 않은 대한제 철조망도 도입해서[129] 원 역사보다 훨씬 강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 대신 해군은 대한의 존재로 인해 태평양함대는 아예 없고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는 산업화와 철도망 부설, 육군용 신무기 도입에 우선순위를 두다보니 연안해군 수준에 머물러서 원 역사보다 약하다. 사실상 발트해와 흑해에 갇힌 신세다 보니 해군은 해안포와 기뢰를 활용한 접근거부에 최대한 집중하고 정부는 대한를 통해 대동양을 이용할 수 있는 대륙횡단철도 완공에 집중한다.
러시아 공주를 황태자비로 들여 황실에 로마노프 황실의 피가 섞이게 된 대한은 명시적인 군사동맹이나 조약으로 양국을 묶진 않았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제1의 우호국으로서 할 수 있는 편의는 최대한 다 들어주고 있다.[130] 이미 병기와 생산 설비를 지원해줬고 전시에 물주 노릇 정도는 해줄 생각이며 영프와 부딪칠 시 영국 해군이 방비가 부족한 크림 반도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으니 대비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며 해안 방어용으로 사용할 최신 기뢰 2백발에 현지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도까지 넘겨주었다.
이후 영국이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 프랑스가 베트남과 쿠바 문제에 집중하는 틈을 타 오스만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마침내 1852년 오스만의 선제공격을 명분으로 오스만을 침공하면서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나름대로 자신감에 차 있었고 해군에서는 확실히 자신들이 우위라며 선공을 걸어온 오스만을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갈아버리며 승승장구한다.[131] 보급과 장병 처우에 면밀히 신경 씀은 물론 점령지 민사작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군납비리를 칼같이 잡아내 척결하는 등 다방면에서 대한을 참고한 영향이 묻어나며 독자들에게 익숙한 나사 빠진 러시아군과는 일억 광년 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애들이 툭하면 숨 쉬는 법 까먹더니 드디어 늘상 숨을 쉰다는 평가.
3.5. 폴수국
암군인 루드비크 2세 대신 국정을 맡은 카타지나 왕비가 주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참전하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거듭 패전하고 만다. 7년 전쟁의 결과 친오빠 표트르 2세에게 배신을 당한 데다, 패전으로 국왕 친위군을 날려버리자 그동안 카타지나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감을 품었던 폴란드 귀족들도 배신을 때려 카타지나 왕비는 충격으로 1765년 사망하고, 후임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최후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폴란드 분할을 당해 독립을 잃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 중 나폴레옹 1세가 원역사처럼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나 이 역시 나폴레옹이 유럽전선에서 패배하고 루이지애나로 파천하면서 멸망하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과거 카타지나 왕비가 비발디를 시켜 만든 오페라의 영향으로 지금도 상당수 폴란드인들이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인 줄 안다.[A]러시아령 폴란드는 명목상의 폴란드 왕국이 남아있는 동군연합으로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며, 실권은 없지만 세임 의회도 남아있다.
3.6. 수배국
원 역사에서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133] 가 되었던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와 예카테리나 2세였던 조피 프리데리케 부부가 이 역사에서는 스웨덴 국왕 '칼 13세' 부부가 되었다. 칼 13세는 원 역사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7년 전쟁에서 처음부터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참전했으나, 승전했음에도 순수한 덕질이 목표였기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자 이에 반발한 귀족들과 아내 조피에 의해 강제로 퇴위, 연금된다. 조피 왕비는 원역사와는 달리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고 어린 아들 파울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다음 스스로 섭정태후가 되어 의회를 억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스웨덴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파울 1세의 아들 구스타브 3세 시절에는 나폴레옹 전쟁 때 끝까지 나폴레옹과 맞서 싸워, 전후 빈 회의에서 그 보상으로 독일 내 영토를 잃는 대신 본가인 덴마크에게서 노르웨이를 얻어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까지 이어지는 통일 스칸디나비아를 완성했다.발트해 패권 유지가 최우선 국책이라 표트르 1세 시절 부딪쳤고 러시아가 발트해로 뻗어나오는 상황을 경계해 러시아의 행보에 늘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표트르 1세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양국의 국력차가 벌어졌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면서 언제든 맞서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지만 직접적인 적대행위는 하지 않는 등 미묘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 역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코앞에 위치해 불편한 핀란드를 차지하는걸 은근히 원하긴 하지만 스웨덴과 전면전을 치루는 것이 부담되어 스웨덴과 굳이 싸우려 들지는 않는다. 한편 만국박람회 참가 겸 해서 러시아를 방문한 대한 대표단에 군함을 파견해 감시하는 등 러시아와 우호적인 대한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다.
3.7. 잉글국
7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원 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북미 식민지가 미주합중국으로 독립해버린 데다 인도에서도 경제적 가치가 높은 벵골 영유에 실패하여 원 역사보다는 손해를 봤다. 미영전쟁도 원역사처럼 치렀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신불랑 건국을 방조했다고 한다.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고 함대를 인수할 때 기습해서 몰살시키고,[134] 누벨프랑스 건국 후 바다로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시시피강 하구를 점령하는 등 원 역사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활약하고 있어서 대한 조정에서도 앞으로 대한의 세력권인 벵골과 말레이 지역으로 잉글국이 손을 뻗칠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원 역사처럼 1833년 노예제 완전 폐지 선언을 하여 대한, 미국 등 다른 열강에도 영향을 준다.
몰락한 서나라에서 아편을 제조해서 후송에 퍼지면서 원 역사의 악행을 저지를 일이 없어진 줄 알았지만, 후송 내에서 아편 수요가 계속 늘어나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충당이 안 되자 이 틈을 비집고 동인도회사가 벵골산 아편을 밀수해 후송에 팔아넘기면서 이득을 취한다. 이를 보다못한 임칙서가 영국제 무기와 공작기계를 수입하는 조건으로 아편 밀매를 그만둘 것을 요구하자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도 태평천국 토벌에 동참하고 자국 상선들이 남경까지 입항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역제안을 해서 전개만 달라졌을 뿐 원 역사보다 악명도 덜 얻고 중국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게다가 원 역사와 달리 명분도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원 역사 아편전쟁을 반대했던 글래드스턴 의원이 '아편 판매를 중단하는 계기일 뿐 아니라 사교도를 토벌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며 참전을 적극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 이 소식을 들은 재석이 쓴웃음을 짓는다.
후송 파병은 왜 남의 나라 반란 진압에 나서야 하냐는 부정적 여론도 많아 의회에서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그 후 홍서당의 난으로 홍콩이 초토화 되었기에 이 시점에 다시 투표한다면 250표 정도 차이가 날 거라 할 정도로 여론도 파병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태평천국 토벌전이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지면서 염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다른 열강과 함께 발을 뺀다. 그리고 휴전협상에서는 태평천국에게는 배상금을 받고 후송에게는 구룡반도와 각종 이권을 뜯어내는 선에서 마무리 한다.
이후 다시 러시아 견제에 집중,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복에 성공하면서 러시아 견제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그러나 원 역사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지고 오히려 원 역사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더 많은 전비를 썼으면서 더 많은 전사자를 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영국도 전쟁을 시작한 존 러셀 내각의 후임 내각인 더비 백작 내각에서 아프가니스탄에게 인도를 침공하지 않겠단 약속만 받고 발을 뺀다.
원 역사처럼 앨버트 공의 주도 하에 1851 런던 엑스포를 개최하며, 대한에서도 흥선제의 동복아우인 순친왕을 대표단장으로 대규모 대표단을 보낸다.
러시아 견제를 위해 프랑스랑 같이 오스만에게 유사시 지원 약속을 했는데 제1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이 러시아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자 급하게 병력 나올 구멍을 찾다 인도쪽 병력을 차출한다.[135]
-
육상함
대한에서 도입한 귀차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육상함(landship)이 되었다. 왜 육상 병기에 배라는 명칭을 붙이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철판을 덮은 목재로 제작하고 기관으로 움직이며 전망탑이 달린 장비'라는 점이 배 그 자체라서 이러한 명칭이 유지되었다. -
Mk.Ⅰ '철코끼리\'
전망탑이 없는 기본형 육상함. 코끼리처럼 적들을 짓밟으며 전진하고, 증기엔진의 기적소리가 코끼리 울음소리 같다는 이유로 철코끼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
Mk.Ⅱ '마젤라 힐\'
18피트 높이의 전망용 탑을 추가한 변형 육상함. 시야 확보에 유리하고 저격수나 기관총을 배치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채택되었으나 방어력이 약하고 무게중심이 올라 전복되기 쉽다는 약점이 있다. 별명은 한 장교가 좁아터진 전망탑을 보며 자기 아내 마젤라와 함께 살던 언덕 위 셋방처럼 좁다고 발언한 데에서 유래했다.
형태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기동전사 건담에 나오는 지온 공국군의 주력 전차인 마젤라 어택의 패러디이다.
3.8. 내달국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에게 본국을 점령당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는 나폴레옹에 반감을 가진 대한 원평제가 본국 해군, 조홀국과 술루국 육군을 파병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프랑스를 막아내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고, 독립을 회복한 후에도 대한에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벌기국이 원역사대로 독립한 후 국력이 약화되었지만 홍서당의 난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에 소수 병력이지만 참전을 표명한다.원 역사 빌럼 2세의 부인 파벨 1세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 태어나지 못했기에 빌럼 3세부터 왕실 가계도가 달라졌다.
3.9. 서반아
3부에서 성립된 바비에라 왕조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6세가 젊은 혈기에 프랑스 혁명전쟁에 반혁명군을 도와 마르세유를 침공하려다가 나폴레옹에게 박살나고, 1804년 나폴레옹이 친히 13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페르난도 6세는 과달라하라 조약을 맺고 폐위,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원역사처럼 괴뢰 군주가 되고 페르난도 6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에 유폐되었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그 아들 호세 페르난도 2세가 나폴레옹 패배로 16세에 복위했지만 스페인 본국도 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데다 아메리카 식민지도 모조리 독립해버려 2류 국가로 전락한다.필리핀의 상실로 가치가 없어진 태평양의 괌과 팔라우, 북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를 대한의 제안으로 50만 냥을 받고 대한에 매각하였고 매각 대금을 쿠바의 방위 강화에 투입한다.
3.10. 벌기국
원역사대로 1831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약소국이지만 태평천국 토벌 다국적 연합군 파병 때 중국에 거점 마련을 노리고 참전을 선언한다.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개입으로 원역사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 아닌 신불랑국 집정관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가 오귀스트 1세로 즉위하면서 보아르네 가문이 왕위를 가져갔다.[136]3.11. 포도아국
원역사대로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리고 브라질이 독립해 국력이 약화되었다. 홍서당의 난으로 마카오에서도 피해를 입어 태평천국 토벌 연합군에 참가를 선언한다.마리아 카롤리나가 프랑스 왕비가 된 영향으로 페드루 4세의 부인이 바뀌어 마리아 2세부터는 원역사와 다른 가상인물이 왕이 된다.
3.12. 양시칠리아 왕국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양시칠리아의 보르보네 왕조의 후계가 끊기자 합스부르크 가문이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을 지원하는 대가로 계승권을 얻어 원역사와 다른 아스부르고 왕조가 되었다.3.13. 그리스 왕국
원 역사처럼 오스만에게 독립에 성공했으나 비텔스바흐의 오톤이 아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레오폴드[137]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한다.3.14. 법왕국
원역사대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강력한 반동주의 정책을 펼쳐 심지어 철도도 악마의 산물이라며 거부할 정도이다. 피우스 9세 즉위 이후 철도 등 신기술 도입은 시작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반동적이다.-
성 베드로의 로마를 지키는 카타이 근위대
후금 내전에서 패해 러시아로 망명한 굴마훈과 부하 3천명, 그 식솔들은 청과의 관계 악화가 부담되는 러시아와 병력이 필요한 교황령의 이해관계가 맞아 교황령으로 보내지게 된다. 교황은 본래 이들을 기사단으로 하려 했으나 굴마훈을 포함한 대부분이 기혼자라는 것을 알고 근위대로 만든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주둔하며 교대로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다. 여기서 약 300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강제 개종[138]시킨 아랍인 200명이 자원입대했다. 몬테카시노에 주둔한 본대는 주변 도적들을 토벌하여 재물과 여자를 뺏아오고, 밀가루 위주의 유주식 식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폴리에서 가축을 훔쳐오거나 산에서 맹수를 사냥하는데 덕분에 주변 도적도 소탕되고 맹수가 전멸해서 지역 주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다. 교황령 로마 시내에서 벌어진 자유주의 폭동 진압에 투입되었는데 정치적 고려 없이 늘 하던대로 시위대에게 기병돌격을 했다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해서 시위 진압에서 배제된다.
-
지혜당
2부 당시 천주교에 귀의한 이혼 스테파노스 추기경이 세운 도서관.
-
로마 자유주의자 봉기
원역사처럼 1849년 주세페 마치니, 주세페 가리발디 등 자유주의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교황 비오 9세는 카타이 근위대가 지키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파천하고 로마 시는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했다. 카타이 근위대를 지휘하는 굴마훈은 자유주의자들을 토벌하고 교황을 다시 로마로 모시면 그 포상으로 영지를 받아 자신의 나라를 세울 예정으로 자유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으며, 실위가한 럭더훈이 형제의 정으로 굴마훈에게 신형 총기를 공급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원역사에서처럼 프랑스의 나폴레옹 2세가 4만명의 대군을 파병하여 로마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교황이 로마로 복귀한다.
3.15. 돌궐국
원 역사처럼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불러 연합군이 그리스를 지원한 덕분에 패배하여 그리스를 잃고, 이집트도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해 명목상의 봉신국으로만 남은 등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러시아의 위협으로 흔들리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는데 오스만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2세가 오스만에 접근, 무기와 군사고문을 지원하는 대신 그 대가로 오스만 내 기독교 성지 관리권을 가져간다.1852년 오스만과의 전쟁을 위해 국경에 집결중인 러시아군의 움직임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 약속을 믿고선 먼저 선전포고하고 선제공격을 했다가 러시아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보고 저쪽에서 침공 명분을 퍼주길 기다리던 러시아에게 침공 명분까지 퍼주는 우를 범한다.
3.15.1. 몰다비아 공국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자치권을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몰다비아를 완전히 독립시키고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다시 오스만과 전쟁을 준비하고있다.3.15.2. 왈라키아 공국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자치권을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왈라키아를 완전히 독립시키고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다시 오스만과 전쟁을 준비하고있다.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대한령 미주 행정구역도-
인구
원평제 즉위 초에는 6백만 명, 탐보라 화산 폭발로 본국이 기근을 겪은 후인 1826년에는 8백만명으로 늘었다. 1840년대에는 천만 명을 넘겼다. 이후로 꾸준히 증가해 1850년 기준으로 1850만을 돌파했다.
-
철도 부설
현종 때인 원강 24년(1764년)에 지선성과 태호성을 잇는 간선철도가 개통되고 원강 30년(1770년)에 지선성과 유타성을 잇는 간선철도도 개통된다. 재정이 좋은 남미주는 지선성, 제회부, 산대고를 연결한 간선철도와 여러 지선을 부설한다. 그 후 재석과 나폴레옹 1세의 협정에 의해 산대고에서 누벨오를레앙을 연결한 대륙횡단철도가 1833년 착공되며 대부분의 노동력은 묘노와 한공들이 맡는다.
-
반강제 머슴제 폐지
미주의 인구와 납세가 충분히 늘어나, 장조 시절부터 있었던 새로 건너온 이주민을 관에서 원 거주자들에게 반강제로 수년간 머슴으로 일하게 만들던 제도가 원평제 재위 중 폐지되었다.
-
개신교 전파
미주합중국에서 무역상을 따라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개신교를 전파하여 초기에는 탄압을 받았으나 원평제가 개신교 금지령을 해제한다. 아직 대한 조정에서 미주까지는 초등 의무교육이나 의료 시설 개설이 부족한 틈을 노려 미국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워 미주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북미주 최고의 명가인 미주 원씨 가문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등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후송에서 미주로 팔려온 묘노들이 개신교에 귀의하는 수가 늘어났으며, 재석이 미주 순행에 나선 시점에서는 미주 개신교도의 숫자가 5만 명 정도이다. 그후 재석이 흥선제로 즉위한 지 2년째인 1837년이 되면 미주에 있는 교육기관의 30%가 개신교 미션스쿨일 정도로 미주에서 무섭게 세를 불려가고 있다.
-
백정
수백년이 흐르면서 원래의 백정들은 본국에서도 동화되거나 변경으로 흩어져 도적이 되었는데, 미주에서도 변경으로 흩어지면서 그 후예들은 3부 장길산 패거리처럼 갖가지 통혼으로 온갖 피가 다 섞인 다민족 도적단으로 변화하여 4부 시점에서는 백정은 변경의 도적단을 가리키는 멸칭이 되었다. 미주대령을 넘나드는 잠상이 본업이고 종종 밀입국 중개도 한다.
-
미주순검대 편성과 미주 속오군 해체
신불랑에게서 구입한 멕시코 2개 주 지역에 신설되는 동미주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편성되는 부대. 신불랑과의 조약 상 대한 정규군을 국경에 배치할 수 없게 되어 별도의 부대를 편성하게 되었으며, 본국에서 전역했다 재입대한 베테랑 3천명이 기간요원으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기존 속오군 중 정예병을 전속시켜 총 3만명으로 편성할 예정이며, 순검대 완편과 동시에 미주 속오군은 소집훈련도 중단하고 명목만 남겨두기로 한다.
-
천부공화론
미주 개척 200년이 넘도록 미주인이 본국 관직을 얻는데 차별이 있고 미주대총관 등 미주의 요직은 전부 본국인이 차지하는 현실에 미주 청년들이 점차 불만을 가지며, 신불랑의 자유주의자들,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 전해진 천부공화론 사상에 빠져드는 청년들이 많다. 대부분은 대한 태황은 군주로 모시되 모든 관직과 법률은 미주에서 자체적으로 정하는 동군연합 체제로의 전환을 바라지만 완전 독립과 공화정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어 4부에서 미주 독립전쟁이 터질 복선이 되고 있다. 심지어 태황의 미주 봉선을 청원하는 상소문에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동빈 김씨의 아버지 김재정에게 대놓고 공화정을 주장하다가 김재정의 신고로 잡혀가 곤장을 맞은 인물도 있었다고 할 정도. 일명 '공화당'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산속에서 비밀리에 모여 회합을 열 정도로 세력이 형성됐다. 대부분은 입헌군주제 도입 및 미주의 자치를 주장하는 정도지만 미주가 본국에서 완전히 독립해 새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거나[139] 심지어는 아예 본국에서도 임금을 없애버리고 공화국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하는 과격파도 소수 존재한다. 당연히 의금부와 금위사에서는 공화당을 반체제세력으로 간주하여 예의주시 중이다. 이런 공화파들 중 일부가 대한은 군주제가 너무 깊게 뿌리박혀서 공화국이 될 리가 없다며 신불랑으로 이주해버리기도 하는데, 재석은 대한에 남아서 분탕을 치느니 나가도록 놔두는 게 낫다 보고 대충 넘기나 백성이 허락 없이 나라를 떠나는 것 자체를 실정의 증거로 보는 유교식 사고에 익숙한 대신들 사이에선 공화주의에 빠졌다면 잡아놓고 교화를 시켜야 하는 게 당연하니 이주를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세다.
-
아란도계 유입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미주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아일랜드인중 중 약 3000여 명이 누벨프랑스가 이미 아일랜드인으로 포화 상태인 것을 보고 대한령 미주까지 흘러들어온다. 대부분은 대한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지도 몰랐지만 대기근 때 대한에서 보내준 쌀로 목숨을 건진 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일부 있어 이주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일단 잡역부로 배치된다. 이후 1851년 시점에서는 아란도계 이주민이 1만여 명까지 늘었다. 원역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가난과 텃세 속에 생계를 위해 군과 경찰에 많이 진출했던 것처럼 대한의 안남 원정에 상당한 수가 자원병으로 지원했다.
4.1.1. 북미주
감영은 덕진성에 있다.-
인구
인구는 200만이고 그 중 토인이 16만이다.
4.1.2. 남미주
감영은 지선성(至善城)에 있고 이곳은 사실상 미주의 주도(州都) 노릇을 한다. 매년 연말에 다섯 주지사가 모여 한해를 결산하는 자리를 갖는 것도 이곳. 천사동을 1840년 6월 한-신불랑 황제 회담 이후 제회부(帝會府)로 개칭한다.-
인구
인구는 420만이고 그 중 토인이 24만이다.
-
철도
지선성에서 산대고까지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이후 서미주까지 연장할 계획이다.
4.1.3. 빙주
-
인구
정주민이 거의 없어 인구 통계가 아예 없다.
4.1.4. 중미주
감영은 위주(威州)에 있다.-
인구
인구는 140만이고 그 중 토인이 8만이다.
4.1.5. 서미주
-
인구
인구는 23만이고 그 중 한인은 14만 명, 토인은 1만 명 미만, 그외에는 대부분 멕시코인, 극소수 스페인 크리올이 있다.
4.1.6. 동미주
신불랑국, 멕고국과의 협상을 통해 구입한 멕고국 북서부 영토, 처음에는 안정화를 위해 미주안핵사가 다스렸으나 9년 후 충분히 안정화되자 미주안핵사를 상설직인 동미주지사로 변경한다. 치소는 축손(逐損)이었으나 안정화된 후 에르모시요로 옮기기로 한다.-
인구
인구는 약 30만이다.
-
영토
원역사의 누에보 멕시코(뉴 맥시코)와 치와와는 각각 리오그란데 강과 콘초스 강을 기준으로 분할했으며 소노라는 전 지역을 넘겨받았다.
-
아파치 사포대
안핵사 이용태가 조직한 아파치족 민병대. 대한의 통치에 저항하는 산적들과 토호들을 토벌하고 전리품의 2/3를 갖는 조건으로 복무하나 대한에 복종하는 토호까지 털어서 향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토벌로 인해 털 상대의 숫자가 줄어들자 아예 순검대로 채용되는 방식으로 소속을 바꿨다. 해산하자니 산적으로 탈바꿈할까봐 그럴 수도 없었다. 대신 대한 본국에서 오도리 일족[140]을 보내 이들을 견제하게 된다.
4.1.7. 동변
-
인구
인구는 17만이고 한인과 토인이 반반이다. 흥선제 때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교인들이 망명해 와 청구호 인근에 정착하면서 백인 인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
지역
지선성과 태호성을 오가던 동변관리사 치소는 유타성으로 이동하였고, 150년 전 3부에서 중종이 동변관리사일 때 원주민 유트족에게 유타성 토지 사용료로 매년 말 50마리를 주기로 한 계약이 150년 동안 그대로 이행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대한의 은혜를 입은 셈이 된 유트족도 덕분에 대한에 충성한다.
-
산업
주된 산업은 목축, 3부에서 중종이 처음 개발하기 시작한 광산업, 청구호 연안의 염전업 등이다.
4.2. 대미주 북부
대미주 북부(원역사 캐나다)의 서부는 서쪽 태평양 연안지대에는 대한령 북미주, 빙주가 위치하며 내륙인 동쪽은 신불랑 제국의 영토가 되어 대한령 북미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캐나다 중부는 원역사처럼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가 지배하는 '루퍼츠랜드'가 있고, 캐나다 동부는 영국령 캐나다 총독부가 있다.1830년대 들어서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영국 총독의 영국 풍습 강요에 반발하여 잦은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4.3. 서반아령 신서반아 → 멕시코(맥고국)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운동이 일어나 멕시코 제1제국을 선포하지만 아직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다. 대한 태황 원평제는 스페인으로부터 반란한 반적들이라면서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데다 아구스틴 1세의 독재정으로 민심이 혼란한 틈을 타, 1823년 텍사스를 노리던 신불랑국의 침공을 당하여 2년 만에 수도 멕시코시티가 신불랑군에게 함락되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제1제국은 붕괴되고 신불랑의 보호령 신세로 전락한다. 물론 신불랑군도 병력이 적어 멕시코시티와 동부 해안지역만을 확고히 장악한 상태였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과 도적들이 날뛰는 무법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텍사스는 신불랑에 완전 병합하고 나머지 멕시코 지역은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을 세웠으나 오랫동안 명목상의 정부였다.
이 같은 정국은 시간이 지나고 누벨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산타 안나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변화한다. 외젠이 파견한 누벨 프랑스군이 정부가 있는 멕시코 시티를 단단히 방어해주어서 산타 안나는 후방 걱정 없이 공세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공화국 수립 20여년만에 군벌들을 대부분 제압하여 내전을 마무리짓는다.
3부에서 대한에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를 빼앗긴데 이어 4부에서 텍사스를 누벨 프랑스에 빼앗기고 뉴 멕시코 주 일부, 소노라 주 전체와 치와와 주 ⅔를 대한에 판매했다. 영토가 원 역사보다도 훨씬 크게 쫄아들어 막대한 손해를 봤으며 국제적으로 누벨 프랑스의 위성국에 가까운 신세다.
내전이 일찌감치 평정되었고 현대 멕시코를 카르텔 소굴로 만든 미국과 국경 마주할 일이 없어져 보다 평화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점은 위안.
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
3부에서 묘사된 것처럼 많은 한인들이 루이지애나로 넘어와 농사와 교역이 발달하면서 원 역사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한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7년 전쟁에서도 캐나다는 원역사와 똑같이 영국에게 할양했지만 루이지애나는 원역사와 달리 스페인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원역사에서 나폴레옹이 미국에게 루이지애나를 판 루이지애나 구입 역시 일어나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인 사략선장 클로드 홍( 홍경래)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로 탈출해[141] 그곳에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우며 원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독립국이 탄생했다.3부의 재석은 대한령 미주가 루이지애나를 장악하면 너무 커져서 독립할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이 가지게 두면 미국이 너무 커져서 대한령 미주를 노릴 것 같아 완충국으로 두기 위해 미주 토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건국의 주체는 달라도 원하던 지역이 별개의 나라로 떨어져나가면서 완충국 역할을 할 세번째 국가가 생겨난 셈이니 미주는 이렇게 3강 구도를 유지할 듯하다.
1845년 건국황제 나폴레옹이 노환으로 사망한 후 황제라는 명칭이 영구결번이 되어 국가원수는 집정관이라는 직함을 받게 된다. 사실상 선거군주제 국가가 되어, 나폴레옹의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의회의 만장일치 추대에 의해 집정관 자리에 올랐고 외젠도 몇 년 후 자신과 혈연관계가 아닌 드 뤼옹 중장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1852년 외젠이 노환으로 사망한 후 드 뤼옹이 2대 집정관이 된다.
-
명칭
공식적으로 누벨프랑스 제국이며 대한에서는 신불랑국으로 불리고 있다. 나폴레옹 프랑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나폴레옹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있어 국력에 비해 국제적 위상이 높다.
-
영토
프랑스 식민지였던 누벨프랑스 지역에 건국되었으며 1823년 멕시코 원정에 성공하면서 텍사스를 준주로 편입했다. 본래 신불랑 지역 유일한 대도시였던 누벨 오를레앙을 수도로 삼고 생 루이를 부도로 삼는다. 그 외에도 포트 샤를 등을 거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국토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미주합중국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이유로 신도시를 건설해서 수도를 이전하기로 한다. 새로운 수도는 현실의 휴스턴의 위치이며 이름은 여러 논의 끝에 나폴레옹의 고향 아작시오의 이름을 따서 '누벨 아작시오'로 결정된다. 대한에서는 '신불패'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아작이라고 하면 어감이 좋지 않으니 대신 나폴레옹의 고향 아작시오를 유방의 고향 패현에 비유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142] 천도 이후로도 누벨 오를레앙은 경제적 수도 역할을 한다.
-
정치
작중 언급에 따르면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고 하지만 나폴레옹 1세의 개인적 카리스마로 건국된 국가이므로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에 대한 의존도가 크지만 그의 카리스마에 끌려서 유럽의 혁명가들, 계몽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이주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사후 정국 불안정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주민들 중에 관료는 적어서 행정에 문제가 있던 것도 미국인들이 대거 이민와서 해결되고 있다. 의회는 기존 루이지애나의 토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하원과, 나폴레옹을 따라 이주한 유럽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으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고 있다.
나폴레옹은 본래 자신의 친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선포했으나 오스트리아에 감금당한 나폴레옹 2세가 자살하면서 후계자는 공석이 되었다. 이후 좌절한 나폴레옹은 다른 친족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대신 마타모로스 공작 외젠이 황제가 아닌 집정관 직위를 가지고 통치하게 한다. 집정관직은 종신제이며 전 집정관이 후계자를 직접 지명하고 상원에서 승인해야 한다.
이후 노환으로 죽을 날이 다가온 외젠은 자신의 작위인 마타모로스 공작을 드 뤼옹에게 물려주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나폴레옹의 혈통이 아닌 이가 국가의 통치자가 됨에 따라 명목상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지만 실제로는 집정관이 다스리는 공화국화되었다. 혈통에 따라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2세를 황제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렬 보나파르티스트들의 반발도 있으나 너무 오래 누벨 프랑스를 떠나있었던데다 부르봉과 오를레앙 왕가를 섬긴 루이 나폴레옹을 부역자로 보는 시선이 의회, 특히 상원에 팽배해 씨알도 먹히지 않고 있다. 결정적으로 1852년 노예주들이 쿠바의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시도하다 사전에 적발되어 처리되면서 루이 나폴레옹 지지는 예비 반역자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다.
-
외교
원 역사에선 군사적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되었던 나폴레옹의 외교적 능력이 절정으로 발휘되어서, 건국 직후 국경을 접하는 대한, 미국, 스페인과의 국경을 확정해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비록 공포스러운 대적이 세운 국가이나 아메리카 대륙 중앙에 낀채 변변한 해군도 없어 더는 위협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유럽 국가들도 크게 날을 세우진 않았다. -
대미관계
나폴레옹이 프랑스 통령이던 때부터 미시시피 강의 자유통항권을 허용하고 제퍼슨 총통이 대한령 미주로 가는 길을 찾으라고 보낸 탐험대의 통과도 허락하는 등 진즉부터 우호적인 관계가 수립되어 있었다. 신불랑 건국 이후엔 공동으로 ' 나폴레옹-먼로 공동선언'을 1823년 겨울 발표해 함께 아메리카의 질서를 이끌어나갈 파트너로 인정한다. 앤드루 잭슨을 수장으로 하는 남부 노예주들은 서부로의 확장을 막아 버린 신불랑을 눈엣가시로 여겨 침공, 정복할 음모도 꾸몄으나 다음은 자기차례라고 생각한 대한이 지원할 게 뻔한데다 같은 백인국가에 그 나폴레옹이 세운 국가라는데 대한 동경까지 더해져 잭슨 사후 흐지부지 된다. 1850년대 시점에서는 함께 아메리카 국가 회의를 이끌어가는 맹주국이란 인식이 지배적이다. -
대한관계
전통주의자인 원평제는 불랑국의 번국으로 간주하며 표면적으로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아 실질적인 대우는 독립국의 그것이었다. 신불랑이 점차 기틀을 잡아가고, 미주에 완충국의 존재할 필요성은 조야가 이해하고 있었기에 원평제 말년 정식으로 제국으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선황의 방침을 거진 계승한 광덕제는 특유의 유럽 문화 애호가 더해져 호의적인 편이었고 뒤를 이은 흥선제 시기엔 태황이 개인적으로 품은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과 오랜 염원이었던 완충국의 필요성 때문에 루스와 함께 가장 친밀한 서방 국가로 자리잡는다. 공개적으로 논의된 사안은 아니나 한인 인구를 대거 이주시켜 신불랑 정계에 친한파의 비중을 늘리는 계획도 논의된 바 있다.
부족한 인구로 드넓은 국토를 감당하며 미주합중국, 불랑국의 침략에도 대비해야 하는 신불랑 역시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대한과의 외교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워털루에서 패하고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될 처지였던 나폴레옹을 구해준 공신이자 최측근이 대한인 클로드 홍이기에 여전히 온갖 뜬소문이 나도는 유럽 국가들보다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대부분의 유주 국가들이 여전히 대한을 조선이라고 표기하는 반면 신불랑은 처음부터 대한이라고 제대로 불러준다. 대륙횡단철도, 텍사스 유전 개발 등 양국이 협력해 진행한 사업도 많고 멕시코에게서 북부 지역 영토를 구매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파나마 운하 개발을 감안하면 앞으로 경제적으로 더 밀착할 전망이다. -
대불관계
불랑국은 신불랑을 자국 영토를 불법 강점한 반역자 취급하며 신불랑은 불랑국을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긴다. 토착 한인, 인디언이나 아일랜드계 같이 한참 나중에 유입된 이들은 비교적 덜 하나 상원의 건국 1세대들은 브르봉과 그 뒤를 이은 오를레앙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하며 그들에게 부역한 루이 나폴레옹이 세운 제2제정 역시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 루이 나폴레옹은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스페인령 쿠바에 3만 병력을 파견했고 외젠은 누벨 아작시오와 누벨 오를레앙에 정예 병력 6만을 배치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1852년 쿠바의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오를레앙과 아작시오에서 내응하려는 노예주들의 쿠데타 시도가 적발되면서 프랑스를 향한 경계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
아메리카 국가 회의(Congrès de tous les États américains, CEA)
나폴레옹이 설립한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회의 기구로 신불랑국을 맹주로 미국, 멕시코,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이 가입했으며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정도를 제외하면 아메리카 주요 국가들은 대부분 가입했다. 신불랑의 괴뢰국인 멕시코를 제외하면 가맹국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되 외부의 침략에는 공동 대응하는, 작중 나폴레옹-먼로 선언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구로 보인다.
-
군사
나폴레옹이 도주에 성공한 후 프랑스 왕 루이 18세는 장드디외 술트 원수에게 5만 병력을 주어 토벌군으로 보내지만 누벨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술트가 나폴레옹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5만 정예병만 거저 준 꼴이 되고 말았다.건국 선물이를 기반으로 루이지애나 전역을 안정시켰으며, 이후 나폴레옹을 따라 망명한 옛 부하들, 루이 19세가 보냈다가 투항한 병력 1만에 원래부터 거주한 프랑스계 이주민, 유럽계 이민자들, 미주 한인들, 인디언들, 심지어 흑인들까지 징집해 병력을 12만까지 불리고 나폴레옹과 함께 멕시코 원정을 성공시켰다. 외젠 시대에는 20만까지 증강되었으며 이중 6만을 누벨 아작시오와 누벨 오를레앙에 배치해 쿠바 주둔 프랑스군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다. 치안유지용 순검대만 존재하는 대한령 미주, 잡다한 군벌과 마적떼 모임인 멕시코군, 물량은 방대하지만 어설픈 신생국 군대인 미군을 압도하는 북미 최강의 정예군이나 부족한 인구와 물량 때문에 방어는 가능해도 공세에는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해군은 영세하다. 건국 직후에는 홍경래 총사령관이 포섭한 미국 사략선들로 구성된 사략함대가 전부였고 1840년 시점에도 기함인 2천톤급 기범선 오리앙 함을 제외하면 500톤급 증기선, 범선 10여척만이 정규 신불랑 해군이고, 유사시에는 미국 해군의 지원에 기대고 있다.
-
인구
미 동부 혹은 서부 해안에 상륙해 한참을 내륙으로 들어와야 하는 특성상 본래라면 19세기에 국가 형성에 필요한 인구를 채울 수 없었으나 대한이 미주 개척으로 바뀐 역사의 수혜를 입었다. 세금이나 형벌을 피해 넘어온 한인들과 대한과 교역하며 유입된 프랑스인이 최소한의 인구수를 채워줬고 나폴레옹이 가진 후광이 추가적인 유럽계 인구 유입을 불러왔다. 건국 당시 100만 가량이었으며 건국 후 이주민이 급격하게 유입되어 순식간에 약 200만으로 2배 가까이 급증한다. 홍서당 토벌 직전에는 300만으로 증가했고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발생한 대량의 이주민 중 절반 가량이 종교가 같은 누벨 프랑스 행을 택하면서 수십만의 백인 인구를 확보했다. 1850년대 초반에는 500만을 목전에 둔 상태. 흑인 인구는 노예 수급이 중단된 이후 답보 상태고 질병에 취약한 인디언 인구도 제자리걸음인 가운데 아일랜드인을 필두로 유럽계 이민자가 늘면서 백인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
한인
3부에서 언급된 한인 도망자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서 제국 인구의 10%를 차지할 정도이다. 인디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내륙에 사는 인디언들과 달리 논을 만들 수 있는 강가에 주로 살아서 충돌은 많지는 않은 편. 1세대는 여전히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아서 재석이 방문하니 어쩔 줄 몰라하며 꿇어 엎드리지만, 이후 세대는 언어도 프랑스어, 인디언 말, 한국어가 섞인 크레올어를 구사하며 한인의 정체성이 없을 정도로 동화되었다. 기존에는 생계형 불법이주나 죄짓고 달아난 범죄자들이 이주민의 전부였으나 대한령 미주에 공화론이 퍼지면서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대한 왕실의 위상에 좌절한 일부 공화론자들이 정치적 망명을 해오기 시작했다.[143] 재석의 장인인 태원백 김재정은 공화론자들의 망명을 방치해 미주를 깨끗이 하는 것은 물론 한인 인구를 인구가 부족한 누벨 프랑스로 대거 이주시켜 아예 주요 구성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은밀히 제시한다. 재석과 측근들은 썩 괜찮은 의견이라 여기면서도 의도를 숨긴채 진행시킬 수단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중. -
인디언
원 역사의 미국인들과 달리 인디언을 제국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인디언들을 병사로 쓰고 수우족, 샤이엔족 등 주요 부족의 추장들에게는 작위를 뿌리고 수우족 추장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기도 한다. 대부분은 충성 서약서에 서명만 하고 원래 살던 대로 살고 있다. 재석이 나폴레옹에게 장차 이주민들이 늘어나서 인디언들의 생활 공간을 잠식하게 되면서 생길 갈등에 대해서 묻자 국법으로 공정하게 결정될 것이라고 원론적인 말만 남겼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어 외젠 시대까지는 큰 마찰 없이 공존이 이뤄졌다. 군의 위관급 장교들까진 인디언에게 개방되었고 부족 원로들이 명예직이나마 상원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
아일랜드인
원역사에서처럼 아일랜드 대기근이 일어나자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미주로 이주한다. 가장 많은 수는 같은 천주교 국가인 신불랑국으로 가지만 처음 도착한 미합중국에 정착하는 인원도 상당해서 누벨프랑스로 오는 아일랜드인은 전체 아일랜드인의 절반 가량이다.
인구가 적은 탓에 19세기 백인 국가치고는 인종간 평등이 잘 실현된 편으로 노예제가 잔존해 있긴 하나 미국처럼 극한 대립까지 갈 움직임은 없다. 군대를 기준으로 한인과 인디언은 장교, 흑인들은 부사관까지 문이 열려있다. 대한령 미주에서 이주한 한인계, 미합중국에서 이주한 미주계는 물론 유럽에서도 폴수국계 등이 유입되고 있으며,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는 신불랑국으로 오거나 경제적 목적으로 오거나 옛 주군인 나폴레옹을 따라 오거나 모험을 찾아 오는 등 이유는 다양하다.
-
경제
아직 미주합중국도 스페인 은화를 쓰고 있는 시점이라서 건국 이전부터 루이지애나 일대에 유통 중이던 스페인 주화를 그대로 사용한다. 단위는 달러. 대신 누벨 프랑스라는 뜻으로 NF라는 글자를 덧씌워 사용한다. 세간에서는 나폴레옹 달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국가 규모에 비해 비대한 군대를 갖고 있어서 부채가 4천만 달러에 달하고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악명을 모르는 미국 은행들에서 텍사스 유전을 미끼로 대출을 받아서 대륙횡단철도 건설비의 상당 부분을 충당한지라 대한에서 사업을 하루 빨리 개시하라고 독촉하고 있다. -
텍사스 유전
대한에서 보내준 청나라 사천성 염정 기술자들이 1836년 텍사스 유전 개발에 성공한다.
-
노예제
나폴레옹의 건국 이념상 노예제를 인정할 수는 없으나 건국 이전부터 이미 루이지애나 지역에 노예와 대농장을 소유한 토호들이 많았기에 국법으로는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고 국법으로 제정하는 시도도 차단하고 있지만 각 주의 자율에 맡긴다는 식으로 하여 노예제는 사실상 아래에 나오는 노예계약제로 바뀌어 존속하고 있으며 존 칼훈이 미국에서 대사로 오는 등 노예주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미주합중국 남부 노예주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노예제가 남아있는 주에서도 노예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가족들을 따로따로 팔아버리는 일은 국법으로 엄금하고, 해방된 노예는 정식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노예의 처우가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144] 미국 흑인 노예들이 부러워할 정도라고 한다. 대륙횡단철도가 순항하고 텍사스 유전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외젠 집권기부터 노예제 완전 폐지가 주요 안건으로 논의되다 1852년 마침내 동부 3주(루이지애나, 아칸소, 미주리)의 반대를 뿌리치고 노예제 완전 폐지를 선언한다. 노예주들에겐 1852년 1월 1일 시가를 기준으로 해방된 노예들의 수효에 맞춰 보상금이 지불되었고 노예들에게는 임금노동자로서 법이 보장한 권리를 부여할 뿐 별도의 자산까지 지급하지는 않았다. 노예들을 온건하게 대한 노예주들은 전직 노예들에게 지급할 임금보다 훨씬 많은 보상금으로 지갑을 불려 만족했으나 노예를 가혹하게 대한 탓에 돈이 있어도 고용이 불가능한 노예주들과 노예상인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와 내응한 쿠데타를 기도하다 사전에 적발된다. -
쿨리
그러나 신불랑 정부와 나폴레옹도 말로만 노예제에 반대할 뿐, 실제로는 채무 관계에 얽혀 노예나 다름없는 자유민 노동자들을 동원해 플랜테이션을 운영 중이며, 이들은 원 역사대로 쿨리라고 불린다.[145] 중국계가 다수이긴 하나 중국계만 쿨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며, 흑인이나 백인도 채무관계에 얽혀 강제노역을 한다면 역시 쿨리라고 불린다. 중국계 쿨리들은 100% 남성이며, 현지인 여성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물론 같이 팔려온 중국계 여성들도 다른 인종에게 창녀나 매매혼으로 팔려가기에 이들은 여자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다. 때문에 쿨리들 사이에서는 동성 강간이 흔하게 발생하며 미국인들과 신불랑인들은 이를 보고 중국인들은 동성애를 즐기는 남색의 민족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홍서당의 난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신불랑의 하층 노동인구로 자리잡았고 흑인 노예 완전 폐지의 기반이 된다.
-
신불랑-맥고국 전쟁(1823년~1825년)
1823년(원평 41년), 나폴레옹은 텍사스를 빼앗고 아직 취약한 신불랑국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멕시코 제1제국이 혁명의 이상을 더럽힌 것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멕시코를 침공한다. 마침 멕시코는 아구스틴 1세의 실정과 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의 준동으로 혼란 상태였으며, 프랑스 왕 루이 19세가 나폴레옹을 치려고 한 것도 개전의 원인이 되었다. 바다에서는 사략 면허를 발급해서 통상 파괴전을 펼친 덕분에 1825년 멕시코시티가 신불랑군에게 함락되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 멕시코는 신불랑의 보호령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병력이 적어 맥고국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하여 한동안 맥고국 잔당, 스페인 왕당파, 도적패 등이 날뛰며 혼란스러웠다. 외젠 시대에는 세력을 정비한 산타 안나가 누벨 프랑스군이 수도 멕시코 시티를 방어해주는 사이 원정을 개시, 대부분의 지방을 복속시켜 내전을 마무리짓고 안정을 되찾았다.
4.5. 미주합중국
원 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7년 전쟁 후 전쟁 비용 감당 문제로 영국 본국에서 세금을 늘리자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일어나 보스턴 차 사건을 시발점으로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조지 워싱턴을 초대 총통으로 미주합중국이 독립했다.[146] 프랑스는 원 역사처럼 미국을 지원했고, 영국은 대한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한은 개입을 원하던 목종을 신료들이 영국 견제를 위해 방관하자고 말렸고 곧 목종이 죽는 바람에 방관만 했다고 한다. 이 역사에서는 북쪽은 영국령 캐나다가 있고, 서쪽은 그 나폴레옹이 다스리는 신불랑국이 있어 확장할 방향이 마땅치 않다. 여기에 원 역사와 다르게 인종주의 성향인 앤드루 잭슨이 당선되지 못하고 외교와 교역을 중시하는 헨리 클레이가 당선되어 연임에 성공하고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 후에도 후임인 마틴 밴 뷰런 역시 확장을 지양하고 온건한 대외정책을 추구해 한동안 주변국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남부의 지지를 받는 제임스 포크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확장주의 노선을 추구하려 한다.다만 같은 백인 국가면서 대한이란 배후를 두고 있는 누벨 프랑스나 누벨 프랑스와 로키산맥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대한을 적대하기 보단 스페인령인 남쪽의 쿠바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
인구
홍서당 토벌이 시작되던 1840년대 초반기준으로 2천만 명. 오대호의 수운, 오대호 일대의 철광석, 애팔래치아의 석탄, 중서부와 남부의 대평야 등 천혜의 조건이 몰려있는 미 동부를 점유한지라 원 역사의 3분의 1로 토막난 국토로도 막대한 부양력을 과시하고 있다.[147][148]
-
인종관
원 역사처럼 백인 우월주의 국가로 백인이 가장 우월한 인종[149]이며, 흑인은 인간이긴 한데 열등한 노예, 인디언은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으나 문명을 모르는 짐승 취급한다. 동양인은 어느 국가 출신이냐에 따라 다른데 유럽 열강들도 함부로 취급 못 하는 강국인 대한의 한인은 백인에 준하는 취급이며, 일본인은 한인보다는 낮으나 흑인보다는 높고, 중국인은 거의 대부분 '쿨리'라고 부르는 묘노 출신이라 흑인 노예와 동급으로 취급하다 홍서당의 난 이후에는 인디언 수준으로 내려갔다.
-
인재 유출
원 역사의 미국이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수많은 이민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확장할 곳이 없다"는 따위 정도로 여겨질 큰 피해다.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폴란드인들을 포함해서 유럽에서 오는 이민자들은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혁명 정신을 따라 신불랑으로 이민하고, 심지어 모험을 찾거나 미국 내의 경쟁에서 밀려서 관료들이 신불랑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150]
-
미영전쟁
원 역사와 비슷한 양상으로 치러졌다고 하는데, 뉴올리언스 전투는 미국의 대승이긴 했지만 원 역사보다 미군의 피해가 더 컸다. 그래도 앤드루 잭슨이 전쟁 영웅이 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
나폴레옹-먼로 공동선언
1823년 겨울 미국의 제임스 먼로 총통과 신불랑국의 나폴레옹 황제가 공동발표한 선언, 원 역사의 먼로 선언과 골자는 같지만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의 초강대국, 즉 대한도 대상에 포함된다.
-
합중국 산삼
북아메리카 동부가 인삼의 주요 산지인 만큼 상인들이 인삼을 채취해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대한산 인삼의 품질과 명성을 따라가지 못해서 후송 등에다 저렴하게 팔고 있다.
-
한미관계
북미 중부에 신불랑국이 건국되어 대한과 직접 영토를 접하고 있지는 않으나 상인들이 1786년 무역선을 타고 대한을 방문하면서 민간 교역부터 시작하고 이후 국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지시로 본격적인 교역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토마스 제퍼슨 정부 때 루이스 & 클라크 사절단이 루이지애나를 거쳐 대한령 미주를 방문하여 교섭 끝에 육로를 통한 교역이 주를 이루게 된다. 고래잡이 문제로 갈등 요소가 있다.[151]
-
노예주 VS 자유주
신불랑국의 존재로 인해 대륙횡단철도가 미국 남부를 거쳐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는 선로로 부설되게 되었고, 재석은 이 경우 남부에서 먼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남북전쟁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게 되었지만... 이는 원 역사에서 노예제가 경제적 문제 이상으로 이념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누벨 프랑스 건국으로 미시시피 서쪽으로 확장이 막히는 바람에 노예주는 플로리다를 마지막으로 확장이 멈춰 11개 주[152]에 그친 반면 자유주는 미시간과 위스콘신의 주 승격으로 최종 13개 주[153]를 확보해 노예주의 수를 앞서게 되어 추가적인 영토 확장 없이는 영구히 발언권에서 밀리게 된 노예주 측 정치 세력은 노예제 기반 농업 경영이 가능한 지역으로의 확장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민주당의 앤드루 잭슨을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북부 캐나다 지역 영토 확보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인디언의 땅을 뺏는 것을 막고 인디언들에게 작위를 뿌려서 이들에게 고개 숙여야 하는 누벨 프랑스의 상황을 굴욕으로 받아들이며, 노예세를 신설해서 잭슨의 지지기반을 꺾으면서 누벨 프랑스와 대륙횡단철도를 놓으려고 하는 헨리 클레이의 휘그당 행정부와도 첨예하게 대립한다. 다만, 함께 중앙 아메리카 연맹을 이끌어 가는 백인 국가이자 그 나폴레옹의 위상을 두르고 있는, 마찰 시 대한을 끌고 들어올 게 뻔한 누벨 프랑스, 누벨 프랑스와 로키 산맥을 모두 넘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대한을 적대하는 건 역시 부담스러운 일인지라 잭슨 사후에는 쇠락한 스페인령 쿠바로 시선을 돌린다.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병합하고 쿠바는 2개 주로 분할해 13대 14로 노예주 우위를 유지하려는 것.
-
인디언 독립국 계획과 인디언들의 시민권 운동
역사가 달라져 앤드루 잭슨이 총통에 당선되지 못하고 체로키족 추방을 중단시킨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연방정부와 조약을 맺은 부족을 국외로 추방할 수 없게 되자 후에 정권교체를 이룬 제임스 포크 정부와 민주당이 이를 우회하기 위한 꼼수로 문명화된 다섯 부족( 체로키족, 크리크족, 세미놀족, 치카소족, 촉토족)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다음 이들을 상대로 '국제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빼앗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음모의 내막을 알지 못한 미국 대중은 당장 그 땅을 뺏어도 모자란데 왜 독립을 시켜주냐며 난리가 났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어서 결국 철회된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땅을 뺏을 욕심으로 가득한지 알게 된 인디언들은 조약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되고 정식으로 연방에 가입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어야겠다며 미국 시민권을 인정해달라는 운동을 시작하지만 인디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미국 사회의 여론은 차갑기만 하며 과거 스페인군 부역과 도망노예 문제로 가장 사이가 나빴던 플로리다의 세미놀족은 쿠바를 침공하기 전 사전 작업으로 미국이 전쟁을 걸어와 세미놀족의 땅을 초토화시키며 절멸 직전에 몰린다. 쿠바를 침공할 군대를 모을 명분이 필요했던 미국은 세미놀 전사가 겨우 수십명 남은 시점에서조차 전시 상태를 해제하지 않고 세미놀족이 여력을 갖추고 저항중이라는 허위 선전을 퍼뜨린다.
-
미국-스페인 전쟁
신불랑국의 존재로 인해 서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자 타개책으로 제임스 포크 정부와 민주당의 주도로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쿠바를 노리기 시작한다. 플로리다의 세미놀족과 전쟁이 벌어진 것을 계기로 전력을 남부에 집결시키는 한편 쿠바 방면으론 직접적인 도발을 삼가고 해군 전력 증강도 일시적으로 멈춘 채 스페인의 경계가 누그뜨리길 기다린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쿠바에 배치된 프랑스 외인부대 3만 중 2만과 함대 전력 다수가 빠져나가고, 노예주들의 쿠데타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이 미치는 쿠바를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는 데 이해가 일치한 누벨 프랑스의 동의까지 얻어 개전만 남은 상태에서 쿠바 마탄사스에서 미국인 밀수꾼들이 강도에게 습격당해 사망한 사건에 대한 항의를 목적으로 아바나 항에 접근하던 미해군 슬루프함 플리머스가 1852년 10월 18일 '의문의 탄약고 폭발'로 침몰한 것을 명분삼아 원 역사보다 46년 일찍 미서전쟁이 개전한다.
개전에 이르는 과정이 원 역사 미서전쟁의 메인호 침몰사건과 유사한데, 몹시 수상하긴 하나 원인 불명인 메인호 사건과 달리 통킹만 사건 수준으로 지저분한 냄새를 풀풀 풍긴다. 마치 침몰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수병들에게 '하선해서 항구에서 쉬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려 사망자가 겨우 7명이었고 제대로 된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기뢰 탓으로 반확정지은 다음, 본국까지 배 타고 한달 걸리는 쿠바 총독부에 당장 입장문 내놓으라 강짜를 부리다 사건 발발 닷새만에, 대통령 선거를 고작 열흘 앞두고 전쟁을 선포했다.[154]
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중앙아메리카 연맹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립했으나 멕시코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멕시코의 산타 안나는 중앙아메리카를 정벌해 멕시코에 편입시킬 속셈이다. 그러나 1839년 12월 31일 연방공화국은 해산되고 니카라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로스알토스가 독립하며 중앙아메리카 연맹으로 재편된다.4.7. 아이티 공화국
원역사처럼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을 틈타 흑인 노예들의 봉기로 독립했고 나폴레옹 1세의 군대와 싸워 독립을 지켜냈다. 그때문에 신불랑과는 공식적인 적대관계이며 아메리카 국가회의에도 가입을 거부했다.5. 대삼주
5.1.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 → 그란 콜롬비아 연맹
원 역사처럼 시몬 볼리바르가 지도한 독립운동으로 건국되었으나, 대한 태황 원평제는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볼리바르 사후 해체되어서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그란 콜롬비아 연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이 만든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회원국이 되었다.5.1.1.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5.1.2. 에콰도르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나 아메리카 국가연합의 맹주인 나폴레옹부터 대한을 지지하고, 이주민을 보냈더니 하와국 순찰사들에게 두들겨맞고 쫒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5.2. 브라질 제국
남아메리카의 맹주를 자처해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아메리카 국가연합과는 비우호적인 상태이다.5.3. 영귀(英龜)제도
3부에서 중종 건흥제가 안용복을 보내 갈라파고스땅거북들을 데려오면서 대한에 알려졌다. 이후 해적 소굴이 되었는데 해적이 대한 본국과 미주를 오가는 대한 상선을 습격하는 일이 생기자 목종 영태제가 결단을 내려 함대를 보내 해적을 전부 쓸어버리고 하와국에게 관리를 맡긴다.[155] 하와국왕이 매년 한 차례 전사들을 보내 그 해 잡을 분량의 땅거북을 잡아와 등딱지로 잔치용 솥 등 사치품을 만든다.1835년 원역사처럼 영국 탐험선 비글 호가 도착하여 연구 도중 하와국에서 온 거북 사냥대와 접촉하게 된다.6. 대상주
6.1. 알제리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가 국내의 자유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벌인 1830년 7월 봉기와 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느라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겨를이 없어 일단은 프랑스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 공사의 걸림돌인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위해 알제리 침공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당시 알제리에 진 식량값 상환 문제로 프랑스 대사와 싸우던 알제리 태수가 프랑스 대사를 파리채로 때린 일이 구실이 되어 루이 19세가 전면침공하면서 시간차만 있을 뿐 원역사대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6.2. 애집투
원역사처럼 오스만이 임명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하여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대한에서는 역사가 길긴 하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두고 군주가 백성들을 혹사시키며 자기 무덤을 지었다고 보아 이집트의 역대 파라오들을 진시황과 수양제와 같은 암군이라고 보고 혹평하며 애집투가 그러고도 망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는 오직 주변에 다른 강대국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결국 돌궐의 속방으로 전락했다고 본다.
-
수에즈 운하 조기 개통
원 역사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교역이 훨씬 늘어남에 따라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이동거리를 단축하는 수에즈 운하의 필요성이 훨씬 커지게 되었고 원 역사보다 일찍 착공에 들어가 원 역사보다 20여 년 빨리 개통하였다.
6.3. 모로코
프랑스의 위협 때문에 알제리를 지원하였으나 프랑스가 모로코까지 공격해 전쟁에 패배하며 알제리에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6.4. 애토피아
대한에서는 접점이 별로 없는 생소한 국가지만 우영만유기를 통해 현왕(賢王) 솔로몬의 아들이 세운 3천년 역사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어 인식은 좋은 편이다.원 역사처럼 황제와 여러 부족 대공들 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내전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는 카사 하일레[156]가 크림 전쟁을 목격한 후 유럽 열강에 대한 신뢰를 잃고 대신 신의를 지키는 것으로 알려진 대한에 사신을 보내 근대화를 위한 조력을 요청하며 접점이 생긴다. 재석은 카사 하일레를 도와주는 댓가로 지부티를 대한이 조차하여 수에즈 운하 홍해 쪽 입구를 제압할 거점 항구로 삼으려 한다.
7. 오세아니아
7.1. 신홀란도
3부에서 영국이 개척을 시작한 이래 4부 시점에서는 호주 해안 지역은 전부 영국 식민지가 들어섰고 아직 내륙 진출은 안한 듯. 원역사와 달리 죄수보다는 자코바이트 같은 정치적 추방자나 일반인 개척민의 인구가 더 많다. 개척을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와 가까운 북서부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총독부 소재지는 여전히 북서부 조지타운이다.7.2. 신질란도[157]
원역사와 달리 하와국 노예사냥부대가 남태평양을 들쑤시고 다닌데다 대한이 북태평양에서 유럽, 미국의 포경을 금지하면서 포경선들이 남태평양으로 몰린 나비효과로 남태평양 여러 섬들의 정세가 불안해졌고, 이에 마오리족 추장들이 스스로 영국과 조약을 맺고 영국 영토가 된다. 마오리족들이 영국군에 복무하는 대신 부족 자치와 토지 소유가 허락되는 등 원역사보다는 더 나은 조건으로 조약을 맺었다.7.3. 나오에로 → 대한령 나오도
하와국 노예사냥부대가 남태평양 전역을 들쑤신 덕분에 유럽 교역상에게서 구식 수석총을 사들여 무장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1841년 1월 대한 순해국 탐사선을 타고 온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제자들이 이 섬을 조사하다가 인광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돌아와 재석에게 보고하고, 재석은 3부에서부터 그렇게 찾았던 나우루가 사실 나오에로였다는 것에 허탈해하면서 남부통제영 함대를 보내 나오에로를 복속시켜 나오에로는 대한령 나오도가 되었다. 나오에로가 대한에 복속하는 것을 보고 인근 부아나바 역시 대한에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재석은 나우루 성인 남녀가 매년 일정한 양의 인광석을 바치면 보상해주는 조치를 취하되 원 역사처럼 나우루인들이 생활력을 상실할 정도로 흥청망청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인당 1년에 600kg으로 채굴 수량을 철저히 제한했다. 이후 인광석의 비료로서의 가치가 확인되고 비료의 수요가 늘자 중국인 노동자들을 파견해 연공으로 바치는 물량 이상의 인광석을 캐는 중이다.
7.4. 부아나바 → 대한령 부아도
원역사의 키리바시 바나바섬. 나오에로가 대한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인근 부아나바도 대한에 복속하여 대한령 부아도가 되었다.7.5. 초성해
대한에서는 섬(礁)들이 별(星)처럼 흩어져 있는 바다(海)라고 하여 '초성해(礁星海)'라고 부르며, 나오도와 부아도가 대한에 복속하여 인광석을 바쳐 하와국의 노예사냥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의 추장들이 단체로 대한을 찾아와 흥선제에게 스스로 복속을 청하여 대한령이 된다. 주인이 없던 마셜 제도는 그대로 대한령이 되고, 명목상 스페인령이던 캐롤라인 제도는 대한이 스페인에게 5만 5천 냥을 주고 매입한다.
[1]
요동주 → 2도(요심도, 요동도), 부여주 → 3도(발해도, 부여도, 삼강도), 연해주 → 3도(연해도, 연흑도,
현토도), 속말주 → 1도, 영락주 → 1도
[2]
흑룡강 이북 외만
[3]
레나 강 이동
이르쿠츠크 주
극동 연방관구
[4]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
[5]
네바다,
유타 주
[6]
남변(累蓀) → 누손주
[7]
본래 작가가 흥녕(興寧)으로 설정했으나 4부 364화에서 설정을 변경하여 흥선으로 수정했다.
[8]
그런데 3부 외전에서, 원역사의
단종이 복권될 때 신덕왕후 또한 복권됐다는 언급이 이미 나왔다. 즉 이는 설정오류다.
# 정황상 작가가 이미 신덕왕후가 복권됐었다고 언급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저지른 실수인 것으로 보인다.
[9]
즉, 대명공은 대명동 안에서는 폐하라고 불릴 것이다.
[10]
여기서도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다.
[11]
다만 한 독자가 문의한 것에 대해 작가가 대답한 바에 따르면, 과거 급제자의 출신지 집계는 응시 지역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출신지가 외지였어도 내지에서 응시했으면 내지 출신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출생지를 기준으로 하면 북구주인들은 대부분 영남에 유학하여 영남에서 응시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므로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
[12]
사실 이는 5회차 인생인 재석의 지식수준이 너무 대단해서 경연관들이 부담스러울 지경인 것도 한몫했다.
[13]
다만 복식 관련 선례는 올렝카가 최초로 만든 것은 아니고, 2부 장조의 손자였던 선조 건원제의 네덜란드인 후궁 원빈 때 처음 만든 선례긴 했다. 하지만 시녀들까지 서구식 복식이 허용된 것은 올렝카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올렝카가 유럽에서 정말 유명해져서 이게 제일 대표적인 사례처럼 여겨지는 것도 있어 보인다.
[14]
대한 관리들을 구워삶기 위한 기타 비용까지 포함하면 소모한 비용은 은 1000만 냥(!)에 달했다.
[15]
둘레 10리(약 4km)의 팔각형 요새이다.
[16]
폭 60m의 해자 축만제가 성을 둘러싸고 있다.
[17]
실제 역사의
그랜드 워커힐 서울 부지.
[18]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가 보다 뚜렷하던 2부 시절 오도리는 철갑으로 전신을 두르고 전면에서 타격하는 중기병, 왜인여진은 각자 알아서 맞춘 무장에 한결 다양한 임무를 소화하는 경기병이었다. 현대전에서 기갑부대의 역할을 감안하면 그 역할을 계승시키겠다는 뜻이다.
[19]
상세한 역사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양반을 귀족으로 설명하나 대한은 원역 조선과 마찬가지로 귀족이 없는 국가다. 여기에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농장과 광산에서 부리던 한족 노예들을 전부 해방하고 임노동자로 재고용해야 했다. 대한에서 출세하려면 과거를 봐야 한다는데 갑자기 준비한다고 경쟁이 될리도 없고, 합격해도 갓 굴러들어온 돌이 출세한다는 보장도 없으며 막대한 금전적 부담까지 생겼으니 남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왜인 귀족들은 관중에 일본 용병대에 의해 대진국이 세워지자 다시 그쪽으로 대거 합류한다.
[20]
용맹으로 이름난 마사이족은 노예가 되느니 자살해버리는지라 데려오지 못하고 잡다한 부족 출신들이 섞였다.
[21]
군관은 공작 깃털, 사졸은 꿩 깃털.
[22]
이름만 같을 뿐 K-2를 모티브로 제작했고 12.7mm 탄환을 쓰는
한제국건국사의 갑식 보총과는 작동 원리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도 이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 작가가 친구인
윤민혁 작가에게 허락은 받았다고 한다.
[23]
슈작가가 밝힌 바에 의하면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나
A7V와 유사한 외형이라고 한다.
[24]
무연화약과 주퇴복좌기가 개발되기 이전, 흑색화약과 원형탄을 쓰는 전장식 대포의 관통력, 명중률, 연사력으로는 움직이는 귀차를 잡는 건 고사하고 명중시키는 것부터가 일이다. 대포의 획기적인 발전 없이 작중에 나온 수단만 활용해 귀차를 잡으려면 같은 귀차로 잡던가, 대전차호를 파던가, 대포 여러 문을 동원한 일점사로 럭키 샷을 노리던가,
자돌폭뢰를 활용해 자폭공격하는 방법이 있다. 작중
활대기뢰는 러시아와 대한 해군도 채용했을 만큼 상당히 대중적인 무기 체계로 이걸 소형화하면 자돌폭뢰가 된다.
[25]
개념적으로는 1993년에 있었던
모가디슈 전투와 완전히 같다! 심지어 성공한다!
[26]
재석은 원 역사 대한민국 국군에서
원치 않게 끌려와 군복무하다가 죽거나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을 못 받고 버려지는 국군장병들의 비참한 사례들을 수도없이 보고 들으면서 그 자신도 군복무를 했었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한탄과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왕으로서 살게 된 이후 적어도 국가를 위해 헌신한 병사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다쳐서 입원을 하면 퇴원할 때까지 전투수당과 동일한 입원수당을 주고, 영구 장애를 얻게 되면 정도에 따라 토지나 현금 보상을 주는 제도를 정착시키는 등.(사기나 절도 피해의 우려가 있어 현금은 일시금이 아닌 연금 형식이다.)
[27]
무종 시절부터 국립묘지를 구상했던 재석이 처음에 염두에 둔 이름은 충렬사였으나 다른 일로 자꾸 밀리는 와중에 전국에 충렬사란 이름 단 사당이 10개가 넘게 세워져 쓸 수 없게 되었다.
[28]
작중 청은 건주 내전에 황하 대홍수, 홍서당의 난, 왜진국 등 여러 사건사고 때문에 산업화에 집중할 수 없는 형편이고, 실위는 후금 시절부터 산업화에 관심이 없고, 후송은 영국으로부터 기술을 수입해 제철소를 세우긴 했으나 이 제철소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철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생산량이 많지 않아 일반 수요는 재래식 고로를 이용해 생산한 철로 충당하고, 일본은 제대로 된 철광석 산지가 없어서 대한에서 산업용 철재를 수입하는 실이며, 다른 국가들은 이마저도 시도조차 하지 못 하는 여건이다.
[29]
이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작중 일본을 두고 '아시아의 캐나다', '대한 2중대'로 부르는 밈이 있다.
[30]
지정학상 영국이 무력으로 해결 보기는 어렵다는 것도 한몫했다. 해군력 자체는 영국이 앞서나 캐나다, 호주, 지중해, 인도양까지 사방으로 분산된 로열 네이비와 달리 대한은 북대동양을 독차지하고 있어 유사시 함대 전력 집결이 무척 편한 해군력 2위 국가다. 필리핀-팔라우-괌-북마리아나 제도-마셜 제도 -하와이 순으로 북대동양에 들어가는 입구는 전부 잠궈 놓아 내부에 타국 거점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도 방면에서 진입할 경우 해사도의 대한 함대와 조홀국을 뚫고
말라카 해협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그 전에 누손과 대남도, 뇌주에 배치된 함대가 집결하고 본국 함대가 뒤를 잇는다.
[31]
원 역사에서 귀성 풍속은 이촌향도가 본격화되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민족 대이동 급으로 확대되었다.
[32]
개방적인 성향인 광덕제가 유독 여성 의무교육에는 반대했던 걸 두고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광덕제 미래인 빙의자설' 떡밥과 엮어 미래에 벌어진
젠더 갈등들을 겪고 학을 떼 그런 거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다.
[33]
김조순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필명이다.
[34]
김좌근이 청나라 사기꾼에게 속아서 구입한 가품
쌍고검도 이 컬렉션에 추가될 예정이다.
[35]
현실의 환빠와는 조금 다른데 현실에서는 암울했던 근현대사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부정하고 민족의 영광스러운 과거에서 자긍심을 얻고 싶어하는 자위질이라면, 이쪽 세상에서는 지금 자신들이 강대국에 살면서 누리는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과 이론을 찾는 쪽에 가깝다.
[36]
다만 한문으로 작성하던 공문서를 국문으로 완전히 바꾸는데 아직도 손 볼 부분이 많고 또 '무식한 사람이 못 알아보면 어쩌냐'는 배운 사람 특유의 자존심에 기반한 반발도 있어서 일단
국문전용 대신 조사 빼고 한문으로 작성하는 국한문혼용이 채택되었다.
[37]
곱게 간 얼음이나 눈에 꿀을 뿌린 간식.
[38]
과거 열기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일본인들이 이를 요괴로 여기며 공포에 질린 것과 달리 열기구 자체는 후송 관군은 물론 태평천국에서도 많이 쓰고 있기에 '자력추진이 가능한 열기구라니 대단하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
[39]
어차피 현실에서도 기술 발전이라는 건 균일하지 않지만 이 에피소드가 나갔을 때 문피아 댓글과 대역갤에서 많은 독자들이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을 만든 대한이 아직도 프로펠러를 못만들어서 영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기술 발전이 정체되었느냐, 재석 없으면 곧 퇴보해서 망할 나라냐고 분노하는 의견을 달아서 작가가 기계공학은 영국보다 좀 뒤쳐지는 대신 화학은 대등하고 생물학은 영국보다 오히려 앞선다는 내용을 후속 연재분에 넣어서 겨우 수습했다.
[40]
재석이 광덕제가 미래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된 또다른 근거로,
다칭유전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깊이 파묻혀 있어서 1960년대가 돼서야 캐낼 수 있었다는 것을 모른게 아닐까라고 추정한다.
[41]
역사 개변으로 대한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시베리아 호랑이의 공식 학명도 한국 호랑이로 바뀌었다. 하와국 등 번국에서는 본국호라고 칭한다.
[42]
작품 외적으로 따지면 생물학 분야에서 영국보다 앞서있다는 설정에 3부에서 4부 사이에 적응 개념까지 도입해 놓고도 진화론을 다윈에게 내준 전개나, 의학대국이라면서 백신에 대해선 감도 못 잡아 파스퇴를 찾는 등 슈타인호프의 고질적인 '위인 덕질'에 진절머리치는 독자들이 상당히 많았던지라 그들을 달래고 '뽕'을 채워주기 위한 전개로 보인다.
[43]
원 역사와 달리 신불랑 수도인 뉴올리언스를 잇고 미국 남부를 통해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 작중 역사가 또 대격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44]
3부에서 후금 내전에 대해 신하들과 논하던 재석은 "내가 작정하면 단 하루 만에 도성 안에서 역적 300명은 찾아낼 수 있다"고 공언해 신하들을 얼어붙게 했는데 4부에서 진짜로 역적 300명을 찾았다.
[45]
명분상으로도 가장 최적인 곳. 다른 후보로는
서울 남산,
구월산,
금강산도 꼽혔지만 남산은 수도와 너무 가까워서,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여서, 금강산은 선대 태황이 사고를 당한 장소이므로 기각되어 결국 백두산으로 결정되었다.
[46]
환웅이 하늘에서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온 것을 유래로 하여
고조선,
삼한,
발해,
고려를 계승하는 대한 역시 수행원을 3천으로 해야 한다는 대신 및 관료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정되었다.
[47]
이는 곧 태산이 있는 화북을 수복하겠다는 국가 목표를 포기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추후 후송의 정세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48]
하와인들은 묘노를 안 쓰지만 한인 농장주들이 부렸다. 하와인들의 피지컬이 피지컬인지라 가장 쉽게 진압되었다.
[49]
조홀국은 내부 반란 진압 경험이 많아 하와국 다음으로 쉽게 진압했다.
[50]
묘노를 쓰지 않아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설령 반란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가톨릭 이외의 이단을 용납 못 하는 술루국 성격상 잔혹하게 진압했을 것이다.
[51]
이쪽은 흑인 노예들 일부는 주인들을 돕고 일부는 배상제회에 포섭되어 흑인들끼리도 싸웠다. 주인들을 도운 흑인들은 자유인으로 해방되고 상금도 받는다.
[52]
대한 본국에서는 묘노들의 12%인 2만 4천명이 반란을 일으켜 대한 군경 전사자 300여 명, 대한 민간인 사망자 1400여 명, 재산피해 5백만 냥의 피해를 입었고 그 외 속령들까지 합치면 약 20만의 묘노가 반란을 일으켜 10만 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일본도 7000여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53]
단, 영국군 파병 자체는 홍적의 난 이전에 통과한 것이다. 그 때는 왜 먼 나라 반란에 군대를 보내야 하냐는 반발이 많아 55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했으나, 홍적의 난 이후에 투표했으면 여론이 뒤바뀌어 250표 정도 차이로 통과했을 거란다.
[54]
재석이나 광덕제와 같은
회귀자라는 떡밥이 뿌려져있는 상태다.
[55]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명나라 관군보다 후송 관군이 더 썩어있다는 점. 양응룡의 난 당시 명군도 조선 의병들이 실망했을 정도로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후송군은 더 심해서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무고한 양민을 습격해 포로로 둔갑시켜 팔아먹고 자기네 지역이 아니라고 타 지역민들에게 무고로 누명을 씌우는 등 단단히 맛이 간 상태이다.
[56]
이런 경우 합격자의 출신지는 본국으로 집계된다. 그래서 실제 누손주 출신 대과급제자의 수는 집계보다 많을 수 있다.
[57]
하와는 왕사 역할로 꾸준히 파견된 본국 대신에게 왕자 교육과 자문만 시키지 않고 자기들이 하기 귀찮은 국정 업무를 죄다 떠넘기는 악폐습(?)이 있고, 조홀은 처음부터 군국사무를 스스로 처리하도록 허락받았다. 술루는 건국 직후 한동안은 국왕은 군무만 수행하고 내정은 대한에서 파견된 집정 대신이 수행하다가(그래서 한동안 술루국왕의 중요한 책무가 현지에서 등용된 하급 관료와 본국 출신 대신 사이에서 중재와 화합유지였다.) 현종 말엽 집정이 페지되고 내정도 양도받았다. 유구는 번국이 된 것 자체가 광덕제 1인의 고집이었고, 큰 문제 없이 돌아가던 나라인지라 자문 역할에 머무른다.
[58]
술루제도 홀로섬
홀로
[59]
이후 술루국이 '산타크루스 데 보르네오'로 개칭한다.
[60]
이후 술루국이 '산티아고 데 보르네오'로 개칭한다.
[61]
실제로는 무종 직계이므로 전주 이씨이다.
[62]
원역사에서 나라티왓, 얄라, 빠따니 3개주 전체와 송크라주 절반.
[63]
제도내 각 섬을 다스리는 국왕과 여섯 공의
연합 왕국 성격을 띄고 있다.
[64]
하와국 학무대신을 역임한 이종이 하와어해를 집필해 한글을 바탕으로한 하와어 표기법을 정립했다.
[65]
하진교의 외숙부 카마우아와와 국사 윤호원은 하와첨사진으로 피해 태황의 도움을 받자고 제안했으나, 하진교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 틈을 타 카네카폴레이가 어떤 암투를 벌일지 모르고, 대한에서 배운
무인정사와
계유정난의 사례를 들어 최대한 빨리 본궁으로 들이쳐 사태를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66]
호랑이를 들여오기 위해 하진교는 '대한의 번국 중 조홀국에는 조홀호, 안남국에는 안남호, 술루국에는 발리에서 잡아온 발리호가 있는데 하와국에만 호랑이가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유구는 작은 섬나라라서 논외라나 뭐라나. 대신들도 하진교의 무리수를 뜯어말리기는커녕 호랑이를 잡아 용맹한 전사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부 쌍수를 들고 환호한다. 이 기가 막힌 광경에 하와국 조정 중 유일한 한인이었던 왕사 이동연은 컬처쇼크를 받는다.
[67]
황제국을 칭해봤자 주변의 황제국들에게서 조롱을 받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번국이 아니라 차라리 대한의 직할령이 되면 대한에서 과거시험도 볼 수 있고 관세를 안 무니까 더 좋지 않냐는 여론도 상당히 있다.
[68]
제임스 브룩이 외국으로 탈출하는 술탄을 잡아다 대한에 넘길 생각이어서 섣불리 탈출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69]
Kaharingan이라 불리는 정령 숭배.
[70]
대한의 신하가 된 브루나이 술탄은 기운을 차리고 나면 상국인 대한군과 함께 '반역자'인 제임스 브룩을 토벌하려 할 것이고, 제임스 브룩의 조국인 영국은 3부에서 적도를 경계로 세력권을 분할하기로 신사협정을 맺은 상태라 대한과 갈등을 벌이기 싫어서 브룩의 보호 요청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브룩 입장에서 남은 선택지는 대한에 귀부하는 수밖에 없는 것.
[71]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브루나이인들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보르네오 내륙 원주민들을 싸잡아 일컫던 말이다. 세세하게 분류하면 수백개의 부족과 백수십개의 언어로 나뉜다. 제임스 브룩의 모국인 영국은 독일과 네덜란드 학자들이 만든 세세한 분류를 적용하는 대신 사라왁 일대의 비다유족(Bidayuh, 육지 다야크)과 이반족(Iban, 바다 다야크)만 다야크족이라 부르길 선호했다.
[72]
원 역사에서 브룩은 종교는 강요하지 않아도 머리사냥 풍습만은 어떻게든 없애려고 강도 높은 금지정책을 밀어붙였는데 다야크 병사들이 여전히 머리사냥을 즐긴다는 언급을 보면 역사 개변으로 술루와 장기간 전쟁하느라 틈이 안나서 + 상국이 된 대한이 대남병들의 머리사냥 풍속을 막지 않으니 명분 세우기 애매해져서 놔둔 듯 하다.
[73]
3부 계미남변 당시 스페인 총독부의 중국인 학살로 필리핀 화교 소멸, 싱가포르가 대한에게 진상되어 대한령 해사도로 개발되며 화교국가 소멸, 중국인 노동력 아에 안 쓰는 술루와 반란을 빌미로 중국인 인구를 대거 학살하고 광산에서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써먹는 조홀이 등장해 말레이시아 화교 소멸.
[74]
원 역사에선 시암과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았다.
[75]
술루국, 조홀국, 하와국은 건국부터 대한이 깊게 관여하여 세워진 나라들로 하와국을 제외한 두 나라의 초대 국왕은 아예 대한인 핏줄이라 전형적인 번국보다는 (원래 의미의) 식민 개척에 가까웠다. 대한이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번국이라기 보단 체급 작은 동맹국을 대하는 우두머리의 그것이다. 유구는 명목상 황제국일 뿐 세 번국보다 더 심하게 대한에 예속되어 있던 독립국이 광덕제 1명의 변덕으로 독립국 지위를 내려놓은 거라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황실과 조정에서 쓰이는 용어 뿐. 강제로 국권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조공이 철폐되고, 유구에서 범죄를 저지른 대한군 병사에 대해 엄벌 및 피해배상을 약속하여 민심을 잘 달래 물질적 부담은 오히려 독립국 시절에 비해 줄었다. 안남의 외왕내제와 이중봉신 구조가 청산된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번국을 거느리는 최초의 사례가 된다.
[76]
용병 계약을 체결할 때 '일본 관군과 전쟁 상태에 들어가면 즉시 계약을 파기하고 이탈한다'는 특약을 넣어놨다.
[77]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빈롱, 안장, 하띠엔.
[78]
빈딘, 푸옌, 카인호아, 빈투언.
[79]
편의상 안남계 한인으로 불러왔으나 남부 지역에 순수 안남계 비율이 낮다보니 혈통상으로는 참인, 진랍인 혼혈이 대부분이다.
[80]
흥선제 시기가 선황 광덕제가 수많은 자식들을 남긴 덕에 황자녀들을 둘러싼 혼맥 경쟁이 덜해 국제결혼이 용이한 특별한 시기고 이후 태황들은 경화사족을 제쳐두고 남월 왕실 따위에게 시집보낼 딸이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 태황의 친딸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완복승이 유일하다. 만약 완복승이 정단옹주와 혼인하고 이후 왕들은 조카나 수양딸과 혼인한다면 원 간섭기와 정말 비슷해진다. 이렇게 되면 고려가 그러했듯 기억의 변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 도망쳐 숨어있다 붙잡힌 완복승이 스스로 귀부했다는 식으로.
[81]
꽝빈, 꽝찌, 트어티엔, 꽝남, 꽝응아이.
[82]
타인호아, 응에안, 하띤.
[83]
막 왕조가
후 레 왕조에게서 제위를 탈취한 후
완감이 타인호아에서 재건한 후 레 왕조의 강역과 유사하다.
[84]
일단 과거 왕조의 후손을 왕위에 앉히긴 했는데, 핏줄만 그렇지 그간 교류도 없었다. 과거 조상님 무덤을 참배하려고 방문한 사람이 하나 있는 정도고, 그 역시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는 경고를 받고 바로 한국으로 도망쳤다고...
[85]
다만 각 성을 점유한 도통사들의 권한이 봉건군주수준이라 봉건제도도 혼재되어 있다.
[86]
대한군은 재석이가 민사작전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교육시켜서 넘어가지 않았으나, 지원병으로 구성된 미군은 인종차별과 종교적 열망과 약탈 욕심 때문에 알면서도 넘어가 아예 학살과 강간을 즐기는 지경이고, 유구군은 전공과 포로 욕심에 혈안이 된 후송관군이 제대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무고한 민간인 마을
토루에 보병만으로 진압하다가 초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영국군은 자기들을 환영하는 마을 촌장의 딸을 병사들이 윤간하고, 이에 촌장이 처벌을 요구하자 영국군은 형식적으로나마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에게 태형을 집행하려는데 오히려 후송군에서 더 막나가 감히 천병과 그 천병을 지원하러 온 군대에게 대들었으니 괘씸하단 이유로 대놓고 촌장을 매질하여 모욕을 주자 눈이 뒤집힌 촌장이 이웃 마을들까지 불러모아 영국군과 후송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87]
다만 이들 역시 실전으로 단련된 군사력이 생기긴 했다.
[88]
원 역사에선 완씨를 책봉한
청나라가 남월 국호는 허락해주기 꺼림칙해 대신 제안한 국호가 월남이었다.
[89]
예수불이 흘린 피와 예수불이 말세에 세상을 심판할 불을 상징한다고 한다.
[90]
홍수전이 마오쩌둥 어록과 유사한 홍서를 만들었다는 점은 이 세계의 홍수전이 원 역사의
중국공산당 출신 빙의자였다는 떡밥의 근거이기도 하다.
[91]
대한은 아편을 받는 것을 거절했으나 잉글국과 불랑국은 받아들인다.
[92]
명목상
[93]
실제
[94]
후송 관군과 태평천국군 모두 서나라의 아편상인을 보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아편을 빼앗아가버렸기 때문. 이 때문에 청나라에게 같이 태평천국과 후송을 정벌하자는 제안까지하지만 서나라를 같잖게 여기는 청나라에게 씹힌다.
[95]
원역사와 달리 한글의 파생문자.
[96]
대신 그 자리는 청황실에 신자가 많은 일반 불교 사원과 후금의 국교이자 청에서도 우대받는 천주교 성당이 차지하였다.
[97]
청나라와는 달리 몽골 귀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각지에 영지까지 가진 대영주들이 존재하여 봉건제도 섞여있다.
[98]
대한은 나폴레옹이 완충지대였던 루이지애나 지역에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새로운 안보 환경에 접어들었고, 청은 귀주와 사천을 획득하면서 국력을 신장했지만 주적인 후송 역시 양광 지역을 획득해서 여전히 국운을 걸고 대치 중이다.
[99]
사실 전제군주국에서 국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군주의 후계 문제는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문제인데 이걸 방치했으니 상술한 안정적인 면모들은 사상누각에 불과했던 셈이다.
[100]
그래도 일본에서 계속 새로운 인적자원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숙청을 해도 죽이지는 않고 전부 명예직을 주어 달랬다고 한다.
[101]
자국의 일부를 점거한 반란군임에도 의외로 청나라는 대진국의 칭신을 순순히 인정했는데 청나라 황태자 영록에게 시집간 재석의 딸 정현공주의 제안이었다는 암시가 있다.
[102]
여기에 정철의 '로마제도 낙성기' 이래
로마 제국을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대한에서 그 무근본 국가를 동양에서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대진국'이라고 불러주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
[103]
공무합체 이전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실질적인 수도는
강호(江戸, 에도)
[104]
실제로는 어용의회를 내세운 정의대장군이 내대신을 겸하여 통치
[105]
실질적인 국가원수는
도쿠가와 가문의 정의대장군/내대신
[106]
대한의 기유진남에 동참해 해남도에 조차지를 얻어 농장과 항구를 건설했고 대한의 번국인 조홀과 술루에는 1820년대에 각각 15만, 5만 가량이 일본인이 주요 구성원으로 존재했다. 안남에도 왜인 용병들이 대규모로 흘러들어가 토착 호족화하면서 원역 동남아에서 화교들이 가졌던 지분을 대거 가져왔다. 건주 양국의 왜인팔기도 200년 넘게 건재했고 왜인 용병의 명성은 동남아와 인도를 넘어 누벨 프랑스에서도 고용하려 할 정도였다.
[107]
심지어 이중 1만은 막부 2중대나 다름없는 군마 마츠다이라번의 병력이니 실질적으로는 2만에 불과하다.
[108]
특히나 원역사에서 존왕운동과 확장주의의 필두였던 조슈 번은 북구주와의 밀무역으로 얻는 수익 덕분에 친한파 번이 되었다고 한다.
[109]
단 대한령 북구주와 접한 타치바나의 치쿠고와 사나다의 분고는 대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일국일성령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10]
원 역사에서는 나고야 성이 도요토미 잔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지어졌기에 오사카 성에 밀리지 않는 규모로 만들었지만 본작에서는 도요토미가 일찍 몰락하였기 때문.
[111]
원 역사를 알고있는 재석은 오사히토의 부인을 바꾸어서 껄끄러운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지 못 하기를 원했고 황양공주의 딸이 황후가 되며 일단은 성공 한 것으로 보이나 메이지 덴노는 원래 서자이기에 출생은 불명이다.
[112]
현실에서도 명란젓은 전세계 소비량 90%를 일본이 차지할 정도로 일본에서 더 인기있는 한국음식으로 유명한데, 원역사의 일본 명란젓 유행은 해방 이후에나 시작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113]
24만 석, 26만 석 같은 경우는 반올림하여 각각 2명, 3명으로 처리된다. 또한 5만 석 이하의 작은 번들을 배려하기 위해 영지가 아무리 작아도 다이묘면 무조건 1명은 대표를 보낼 수 있다. 영지 쪼개기 같은 꼼수는 인정되지 않는다.
[114]
즉 정이대장군/내대신은 단독으로 무려 90명의 대표를 보낼 수 있다.
[115]
그래도 명목상 아체의 상국인 오스만은 대한에게 일본을 제지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오스만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고 이미 비행선과 승병을 파견해 일본을 도와주고 있던 대한은 그대로 무시했다.
[116]
원래도 선거로 뽑힌 왕은 큰 실권은 없었기에 일본의 번국이 된 이후 선거군주제는 폐지 되고 쇼군의 대리인 막부 대관과 부족장 의회가 통치한다.
[117]
일본에서는 아이누를 에조로 부르면 아모인은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인을 뜻한다.
[118]
'아모인'이라고 하면 대한에서는 원주민들을 지칭하지만 일본에서는 원주민은
에조라고 부르고 아모인은
일본에서 이주해서 아모국 호적으로 옮긴 일본인들을 지칭한다.
[119]
일본에서는 기본세율 70%에 잡세도 있지만 아모국에서는 기본세율 50%만 내고 잡세도 없다.
[120]
마을과 도시를 포위한 다음 힌두교도에겐 쇠고기, 무슬림에겐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이고 거부하면 즉시 몰살시켰다. 일부 눈치 빠른 자들은 불교 교리에 따라 채식만 하며 살겠다고 선언한 뒤 뒤에서 신앙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칼날을 피했으나 그럴 눈치가 없었던 이들은 어육이 되었다.
[121]
카자흐 등의 타민족 출신이여도 북방계면 일단 준가르인으로 취급한다.
[122]
고위직에 오른 인물은 일본인 급으로 취급된다.
[123]
다만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왕자 한 명을 친영파로 포섭하려 했으나 그 왕자가 콜레라로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24]
사실 암군이 전혀 없었다고 하기는 뭐한게 사후세계를 다룬 외전에서 권력욕심 때문에 혈육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죄로 역대 임금들 중 유일하게 지옥으로 떨어진 세조가 있다. 그러나 작품 세계관 내의 세조조차도 어디까지나 대한의 다른 역대 임금들에 비교되서 암군일 뿐
세계관 속의 다른 나라의 암군들과 비교하면 정말 멀쩡한 군주인 데다가, 이 세계에서는 재석이 1부에서부터 세조 때부터 쌓여온 적폐들을 본격적인 문제가 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청산해왔고 대한이 강대국으로 거듭났기에 세조가 벌인 악행들이 후대에 부각될 일이 줄어 암군으로 지탄받을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125]
그럼에도 여전히 백인들의 기준에서 생각해 그 강대한 힘으로 어째서 주변국들을 정복하거나 열강의 의무, 선지자의 짐을 지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A]
하지만 4부에서 올렝카의 딸인 루시아의 후손이 재석의 아들인 황태자의 황태자비가 되면서 재석의 맏며느리가 된지라 결과적으로는 이 오해가 어쩌다 보니
사실이 될 가능성도 생겼다.
[127]
오스트리아의 빠른 지원이 가능했던것은 철도망 이외에도 프랑스 혁명 시기 대가 끊어진 양시칠리아 왕위를 합스부르크 방계가 가져가는 것을 대가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128]
부하라 에미르국이 러시아의 속국이 된게 1868년, 히바 칸국이 러시아의 속국이 된건 1873년으로 원 역사보다 20년 정도 빠르다.
[129]
대한에서 넘겨준 교범에는 보병 저지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농노 출신 보병들한테 한번 철조망을 넘어가보라고 시켜봤더니 보병들이 어떻게든 철조망을 잡아뜯고 넘어가는 바람에 '기병 저지에는 효과가 좋지만 보병 저지용으로는 효과가 별로다'라는 러시아스러운 결론을 내린다.
[130]
대한은 일단 전쟁에 돌입하면 끝을 보는 대신, 상대가 명백히 적의를 내비치고 적대 행동을 하고, 최종적인 협상까지 거절하여 확실한 명분을 주지 않는 이상 전쟁이란 선택지를 고르지 않는다. 확장 욕구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쟁하는 유주 국가들 행보에 발맞추기도 싫고 앞마당인 동남아의 이전투구를 정리하고 남중국해를 북대동양에 이은 대한의 호수로 만드는 계획이 한창 진행중이라 이역만리 유주에 돈과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131]
수상함 전력 우위를 믿고 오데사로 밀고 들어갔다가
기뢰밭에 들어가는 바람에 코르벳 1척 남기고 궤멸했다. 이 한국산 최신 기뢰를 러시아군이 보급한 회사가 대한에서 유학중인
알프레드 노벨의 가족 회사. 스웨덴 출신이나 러시아에 정착한지 오래되어 러시아인 대우를 받으며 군수사업에서 약진 중이다.
[A]
[133]
원역사에서는 스웨덴 의회에 의해 스웨덴 상속자로 지명되었으나 표트르 1세의 남계 후손이 끊어진 러시아에서 먼저 후계자로 지명되어 러시아 차르가 되었다. 그러나 본작에서 표트르 1세 남계가 그대로 이어지며 러시아 차르가 되는 일 없이 스웨덴 왕으로 즉위한다.
[134]
작중에선
트라팔가 해전을 대체하게 된다.
[135]
당연히 전쟁이 날 건 알았지만 프랑스의 고문관과 장비 지원을 받았고, 수상함 전력은 더 앞서니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한인 고문들을 고용해 태평전쟁의 전훈을 녹여내고 대한제 신무기를 대거 양산한 러시아군에게 너무 빨리 무너져서 당장 동원할 병력이 없었다.
[136]
작가의 댓글에 따르면 원역사 벨기에 왕국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는 그리스 왕국으로 갔다.
[137]
원 역사 벨기에 왕국 초대 국왕. 원 역사에서는 1830년 그리스 왕국 왕위를 제안 받았으나 그리스가 너무 위태로워 보인다고 거절하고 1831년 벨기에 왕위를 받아들인다.
[138]
수레바퀴형을 당할지 돼지고기와 독주를 먹고 배교한 후 자원입대할지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딱히 유주로 와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후금 시절부터 회교도 포로들에게 하던 일이다.
[139]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없다. 오대호라는 거대한 내륙 수운 바로 주변에 철광이 풍부하고 애팔래치아에 탄광이 몰려있는 미 동부, 미시시피강이라도 존재하는 미 중부와 달리 서부는 국가의 혈맥이 되어줄 수운이 존재하지 않고 철과 석탄도 나지 않는다. 서부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대한이라는 거대한 모국이 뒷배로 존재하기 때문이지 미주가 독립을 시도할 경우 당장 바로 옆의 누벨프랑스군의 침공을 막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140]
기병만 3천, 딸린 가족과 하인까지 합하면 5만.
[141]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영국 해군이 뉴올리언스를 점령했으나 프랑스 사략함대의 사략활동을 막기 위한 것이었기에 루이지애나에서 영국은 뉴올리언스를 점령한 후 미영전쟁에서 미국 서부를 침공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한 것 외에는 별다른 사건을 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루이로 철수한 나폴레옹의 루이지애나 총독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나서 영국은 뉴올리언스를 프랑스에 반환했는데, 그 직후 프랑스 왕이 된 루이 18세는 루이지애나에 보낼 새 총독 인선을 정하기도 전에
백일천하로 나폴레옹에 의해 다시 쫓겨나는 등 정신없는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루이지애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워털루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바다를 통해 도주할 배를 찾다가 라로셸에서 클로드 홍을 만나 루이지애나에 영국군이 없는 절호의 타이밍에 아직 자신의 세력이 남아있는 루이지애나로 도주했다. 어찌나 잘 도망쳤는지 유럽 국가들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로 도주한 지 1년이 지나서야 나폴레옹이 그리로 도망쳤다는 걸 알았을 정도였다.
[142]
달리 말하면 나폴레옹은 대한에서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고평가받는 외국 군주라는 뜻이다.
[143]
자기 관할에 태황의 통치를 부정하는 흉참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좋을 게 없으니 무단 이주를 방관하는 관행이 미주 지방관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재석은 누벨 프랑스에 한인 비중을 조금이라도 늘려 볼 생각에 이런 관행을 양성화 할 방안을 고심한다.
[144]
이건 나폴레옹이 개선한 게 아니고, 본래 부르봉 왕조 시절부터 있었던 법이라고 한다.
[145]
플랜테이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실에서 노예제가 없어진 후의 플랜테이션도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은 편이다. 오히려 국가가 감독하니 작중 시대에서는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긴 하다.
[146]
여기서는 합중국 국가원수인 'president'를 '대통령'이 아닌 '총통'으로 번역하는데 원 역사에서 대통령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거지만 여기선 대한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먼저 합중국의 존재를 인지하였기에 차이가 생긴 것. 재석은 총통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원 역사의
그 인물이 떠오르는지 속으로 움찔거린다.
[147]
실제로 서부의 개발이 이루어진 원 역사의 미국도 인구의 약 2/3은 여전히 미시시피강 동쪽에 거주하고 있다.
[148]
미 서부는 금, 은, 구리는 풍부하지만 그것을 개발하고 독립국가로 자립하는 데 필수적인 수운, 철광석, 석탄이 전무하다시피하다. 미 동부에서 시작해 서부로 확장하면 원활한 개발이 가능하나, 미 서부에서 독립국가로 시작해 동부로 뻗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대한령 미주가 절대 독립할 수 없는 이유로 꼽힌다.
[149]
그러면서 백인이라도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등 비주류를 '하얀 껌둥이'라 부르며 차별하는 것도 원 역사와 똑같다. 이 때문에 작중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해야했던 아일랜드계의 절반이 종교가 다르고 자신들을 핍박한 영국인들과 같은 앵글로색슨계가 주류인 합중국 대신 종교가 같고 인종차별이 없는 누벨프랑스행을 택했고, 비용과 거리 문제로 처음에는 합중국행을 택했다가 극심한 차별에 질려 누벨프랑스로의 재이주를 선택한 아일랜드계도 나올 지경.
[150]
유능하더라도 정치가 체질이 아니라서, 정치하는 능력만 떨어져서, 운이 안 좋아서 경쟁에서 밀려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151]
개변된 역사로 인해 기술발전은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석탄•석유로의 연료 전환이 늦어 고래 기름을 얻으려는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자 고래잡이가 기존 역사보다 크게 증가하면서 동양 바다까지 침범하는 것이다.
[152]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켄터키,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플로리다. 원 역사의 노예주였던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 미주리는 누벨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153]
버몬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뉴욕, 코네티컷,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미시간, 인디애나, 위스콘신, 일리노이.
[154]
일부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전쟁을 하더라도 사건 조사와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난 뒤 개전을 해야 한다며 제동을 걸려했으나 의회 다수당은 민주당이고 이들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병합해 노예주 3개를 신설하려는 속셈이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155]
하와국에선 영토를 하사한 것으로 여긴다. 하와국이 대한의 충실한 번국인 때는 실질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으니 문제될 일도 없지만, 만약 훗날 하와국이 독립한다면 영토 분쟁이 생길수도 있다.
[156]
원 역사에서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테워드로스 2세로 즉위해 에티오피아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지만 영국과의 외교 분쟁으로 인해 발발한 영국-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하여 자살한다.
[157]
新秩欄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