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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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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건국 이전 아라칸족의 역사 및 창건2.2. 전성기2.3. 쇠퇴기와 멸망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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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근세 미얀마 라카인주 아라칸족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2. 역사

2.1. 건국 이전 아라칸족의 역사 및 창건

라카인 주 일대에는 토착 아라칸족[1]들이 단야와디, 라웅옛, 와이탈리 등 여러 소왕국을 이루고 살았는데, 9세기부터 중국 윈난 지역에서 남하한 버마인[2]이 1406년 11월에 아라칸 지방을 침공하며 혼란에 빠졌다. 중과부적의 상황을 맞은 아라칸 지역의 라웅옛 왕국의 국왕 민 사우 몬은 서쪽의 벵골 술탄국[3]으로 망명하였는데, 벵골 술탄 자랄 웃 딘과 친밀해졌고 술탄은 그의 복위를 돕기로 하였다.

1406년에 아라칸을 정복한 버마의 잉와 왕국은 곧 바간의 버고/페구(Pegu) 왕국[4]과 싸우게 되었고, 6년간의 싸움 끝에 탄드웨[5] 등 아라칸 남부는 페구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1429년 민 사우 몬은 버고와 잉와 세력을 몰아내고 아라칸 왕국을 창업했다. 1430년 므락우로 수도를 옮겼으며 벵골 술탄국의 문화 역시 받아들여 페르시아식 칭호인 [6] 칭호를 받아들였고 이는 왕조가 꼰바웅 왕조에 정복될 때까지 이어진다.[7] 그리고 하렘(...) 제도 역시 받아들여 벵골인은 물론이거니와 왕국 내 소수민족 차크마족, 카미족, 쿠키족, 친족으로부터 여자를 바치게 하여 왕을 위한 하렘을 만들기도 했다.

2.2. 전성기

이후 아라칸 왕국은 벵골 술탄국이 약해지자 포르투갈 해적, 콩키스타도르와 연합해 치타공[8], 콕스 바자르[9], 라무[10][11] , 마웅도[12], 치타공 구릉지대[13], 트리푸라[14], 다카 동반부[15]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후 많은 농토와 어장을 확보한 뒤 벵골인들을 포로삼아 노동력으로 이용했다.
이어서 16~17세기 초에는 민 바지 왕과 민 티카[16]이 왕국의 전성기를 이끄는데 특히 경제 수도 치타공과 정치 수도 므락우 유럽 아랍, 페르시아, 명나라 상인들은 물론 일본에서도 상인들은 물론이고 센고쿠 시대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등 전란에 휩쓸려 모시던 다이묘를 잃은 사무라이 로닌들 일부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벵골인 용병[17]과 더불어 왕의 근위병으로 취직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하는 등 국제도시로 변모한다.

2.3. 쇠퇴기와 멸망

17세기 전성기가 끝나고 치타공 역시 포르투갈인 출신의 용병 필리페 데 브리투에게 뺏긴 뒤 서서히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다가 벵골 총독 샤이스타 칸의 항구 봉쇄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려 벵골인에게 치타공을 재헌납 하다시피 했고 기득권층의 권력다툼과 더불어 유럽이나 말레이계 해적들이 해안가를 약탈함과 더불어 사이클론 지진 연달아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까지 닥치면서 나라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1784년에는 꼰바웅 왕조의 제 6대왕 보도파야의 침략으로 마지막 왕 마하 탐마다[18]가 끝내 항복하면서 아라칸족의 수천년 독립 역사는 끝을 맺고 수도인 므락우 역시 점령된 후 주민들 대다수가 학살 능욕당하고 왕족과 귀족들은 짐승처럼 당시 꼰바웅 왕조의 수도인 아마라푸라로 끌려갔으며 재화를 약탈당하고 약탈이 불가능한 사원이나 탑, 궁전은 금박을 벗기고 보석을 빼낸 뒤 파괴한 다음 전소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므락우 유적을 가보면 불타거나 못으로 그은 흔적이 있는데 이때의 영향이다.[19][20]

이후 아라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꼰바웅 왕조가 이를 진압하려 하자 나프 강 너머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 도망갔는데 진압군도 따라 넘어가서 계속 전투를 벌였고 이것이 영국을 자극하는 바람에 미얀마 식민지화의 계기가 되는 영국-버마 전쟁의 시발점이 된다. 동귀어진?

3. 기타


아라칸 왕국에 대한 라카인족의 그리움을 담은 노래이다.[21]

아라칸족이 높이 평가하는 역사로써 미얀마 국가와 버마족에 대항하여 아라칸 지역주의와 분리주의를 제창하는 아라칸 민족주의의 역사적 연원이기도 하다.

[1] 라카인족으로도 불리며 미얀마에서 버마족, 샨족, 카렌족 다음으로 미얀마 인구서열 4위인 나름 메이저한 소수민족이다. [2] 아바 왕국 등의 연합군. [3] 방글라데시의 조상격 국가로 전근대 벵골인의 유일하다시피한 독립국가였기 때문에 세속주의와 벵골 민족주의를 밀고 있는 현 총리 셰이크 하시나 아와미 연맹역시 최근 벵골 술탄국을 띄워주면서 역사 관광 상품화도 계획중이라 한다. [4] 한따와디 왕국이라고도 불린다. [5] 산도웨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얀마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응아빨리(영어로는 나팔리라고도 한다.)해변[22]이 있는 곳이다. [6] 굳이 이슬람 국가가 아니어도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나라는 이란의 칭호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최근 폐지된 네팔 왕국 고르카 왕조가 있다. ex) 트리부반 샤, 갸넨드라 샤. [7] 참고로 민 사우 몬 자신의 칭호는 술레이만 샤이다. [8] 지금도 다카에 이어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 역할을 하는 명실상부한 국제 주요 무역항 중 하나이며 인구는 1000만명을 웃도는 수준으로 900만 정도의 서울특별시보다 조금 더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9] 세계에서 가장 긴 125km 천연 백사장으로 알려져 있는 방글라데시의 관광 명소 중 하나다. [10] 콕스 바자르 남쪽 끝자락에 있는 중소도시로 로힝야 난민촌이 있으며 난민 수용을 놓고 말이 많은 섬 바샨차르가 이 도시 앞바다에 있다. [11] 도시 자체가 인지도가 없어 항목이 개설되지 않아 링크를 누르면 만화 시끌별 녀석들 여주인공이 나온다(...). [12] 현재는 로힝야의 주 거주지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동파키스탄[23] [13] 방글라데시의 소수민족인 줌머족의 다수 거주지이다. [14] 현재 인도의 트리푸라 주이며 한때는 독립 트리푸라 왕국이기도 했다. [15] 서반부도 점령만 안 했지 약탈과 노동력 확보를 위한 주민 납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6] 이 둘은 부자관계로 아버지인 민 바지가 싯따웅 사원을 짓자 아들 민 티카는 이에 질세라 꼬따웅 사원을 더 크고 아름답게 지으려고 하였는데 부처를 위시한 정령들이 감히 아버지를 이겨먹으려 하다니 불경한 자라고 욕하며 벼락을 내려 꼬따웅을 파괴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17] 이 벵골 용병 후손들을 캄만(Kaman)족이라고 부르며 같은 이슬람 무슬림에 벵골인 혈통인 로힝야와 달리 미얀마 국민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아라칸족과의 통혼 혼혈도 꽤 이루어져 아라칸 사회에 상당히 동화되었는데다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의 로힝야와는 다르게 세속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어 당연히 로힝야와는 사이가 영 좋지 않다. 그와 별개로 불교 극단주의자들의 이슬라모포비아에 시달리는 건 매한가지다. [18] 본명은 타도 아웅(Thado Aung). [19] 물론 이쪽으로 침략하고 전쟁을 치른 영국군이나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것도 있다. [20] 이때 마하무니 불상도 전리품으로 같이 옮겨졌다. [21] 영상을 보면 아라칸 왕국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왕조인 단야와디 왕국, 라웅옛 왕국, 와이탈리 왕국 등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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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별명이 미얀마의 나폴리이다. [23] 현재의 방글라데시 영토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으나 1947년 아웅 산의 주도로 맺어진 팡롱협정에 근거하여 미얀마 라카인주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