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8:27:17

호머 헐버트

흘법에서 넘어옴
파일:독립장 약장.png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독립장 부장.png
강경선 강기덕 강기운 강명규 강무경
강상모 강순필 강영소 강원형 강윤희
강이봉 강익록 강인수 강제하 강진원
강진해 강창제 강철구 계봉우 계화
고광순 고두환 고운기 고이허 고인덕
고제량 고지형 고창일 고평 곽재기
곽종석 구연영 권기옥 권오설
권인규 권준 기산도 기삼연 기우만
길선주 김단야 김대지 김덕제 김도원
김도현 김동식 김법린 김병로
김복한 김상덕 김상옥 김석 김석진
김석황 김성숙 김수민 김순애 김승학
김약연 김원국 김원범 김인전 김정익
김중건 김진묵 김철 김철수 김학규
김한종 김혁 김홍일 김희선 나병삼
나시운 나월환 나정구 나중소 나창헌
나철 나태섭 남공선 남궁억 남석인
남정각 노기용 노병대 노복선 노원섭
노을룡 노응규 노임수 노종균 노태준
다이리 류인식 마수례 마진
명제세 문상익 문석봉
문양목 문일민 문일평 문창숙 문창학
민강 민양기 민영구 민용호 민필호
민효식 박건병 박건웅 박경순 박기성
박기제 박기한 박도경 박문용 박민항
박봉석 박사화 박상진 박시창 박인호
박장호 박재혁 박차정 박찬익 박희광
반하경 방순희 백기환 백남규 백일규
백정기 사도덕 서병희 서상교 서상렬
서상용 서상한 서영석 서원준 서의배
서일 서종채 석호필 선우혁 성익현
손기업 손기혁 손덕오 손승억 손양윤
손영각 손정도 송계백 송병선 송병조
송종익 송진우 송학선 송헌주 쉐웨
신숙 신언준 신팔균 신현구 심남일
안경근 안경신 안공근 안광조
안국형 안규홍 안명근 안무 안병무
안병찬 안상익 안세환 안승우 안원규
안재환 안정근 안지호 안춘생 안태국
안현경 안희제 양경학 양근환 양기하
양세봉 양우조 양진여 엄항섭 여준
연병호 염온동 오강표 오광심 오면직
오성술 오영선 오의선 우덕순 우재룡
원세훈 원심창 유관순 유근 유동하
유림 유석현 유일한 윤동주 윤병구
윤세복 윤세주 윤자영 이갑 이강
이강훈 이광민 이규갑 이남규 이만도
이명하 이상룡 이상정 이석용 이설
이성구 이수흥 이애라 이윤재 이원대
이의준 이인 이장녕 이재유 이재현
이종건 이종희 이준 이준식 이중언
이진룡 이진무 이춘숙 이탁 이현섭
이회영 이희승 임병찬 임치정 장관주
장기천 장기초 장덕준 장덕진 장도빈
장두량 장두환 장명도 장봉한 장석영
장소진 장윤덕 장인초 장쥐 장진홍
장췬 장태수 장형 전덕기 정용기
정이형 정인보 정인승 정태진 정현섭
조경한 조동호 조명하 조병옥 조병준
조시원 조지 쇼 주기철 차도선 차병수
차병제 차병혁 차이석 차천리 차천모
차희식 채광묵 채기중 채세윤
채영 채원개 채응언 채찬 천병림
최규동 최동오 최양옥 최용덕 최재형
최중호 최진동 최팔용 최현배 태양욱
표영준
한봉수 한상렬 한성수 한시대 한징
한훈 함석은 함태영 현익철 현정건
홍언 홍원식 홍진 홍학순
황병길 황병학 황상규 황현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

파일:금관문화훈장 약장.png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1974
조택원
무용가
1975
안수길
소설가
1976
홍종인
언론인
1977
최석채
언론인
1978
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1979
고유섭
미술사학자
1980
전봉초
음악가
1981
김소월
시인
1982
이효석
소설가
1982
조지훈
시인
1983
홍승연
언론인
1983
천관우
언론인
1983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1984
이원수
아동문학가
1984
장발
미술가
1985
강소천
아동문학가
1986
홍진기
언론인
1987
김남중
언론인
1990
모윤숙
시인
1990
주시경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1994
김상만
언론인
1994
나운영
음악가
1994
이숭녕
국어학자
1995
공병우
한글연구가
1995
김소희
국악인
1995
문신
미술가
1995
정명훈
음악가
1995
이대원
미술가
1995
류경채
미술가
1996
송석하
민속학자
1996
신용호
기업인
1996
조병화
시인
1997
신순남
미술가
1997
홍두표
언론인
1997
최창봉
언론인
1997
정진숙
출판인
1997
고병익
역사학자
1998
방우영
언론인
1998
김연준
작곡가
1999
방일영
언론인
1999
방종현
국어학자
1999
김세형
음악가
1999
이유태
미술가
1999
김흥수
미술가
1999
장준하
독립운동가, 언론인
1999
송건호
언론인
2000
황순원
소설가
2000
백남준
미술가
2000
서정주
시인
2001
김기창
미술가
2001
김천흥
국악인
2001
장우성
미술가
2001
김수영
시인
2001
최영희
역사학자
2002
임권택
영화감독
2002
오지호
미술가
2003
박동진
국악인
2003
윤석중
아동문학가
2004
구상
시인
2004
이혜구
음악사학자
2005
박성용
기업인
2005
정세영
기업인
2006
신상옥
영화감독
2006
김동원
연극인
2006
차범석
극작가
2006
조남철
바둑기사
2007
송도균
언론인
2007
노성대
언론인
2007
송범
무용가
2008
박경리
소설가
2008
이청준
소설가
2008
김영랑
시인
2009
유현목
영화감독
2010
전숙희
수필가
2010
앙드레 김
패션 디자이너
2010
김영환
군인, 6.25전쟁기 해인사 폭격명령 거부
2011
박완서
소설가
2012
지관
해인사 주지
2012
이건희
기업인
2012
허동수
기업인
2012
김형규
국어학자
2013
이우환
미술가
2014
호머 헐버트
선교사, 한글 체계화 공헌 및 한글 보급·한글 홍보 공로
2014
전형필
문화재수집가
2014
이은관
국악인
2016
백성희
연극인
2016
임영웅
연극인
2017
박맹호
출판인
2018
최인훈
소설가
2018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2018
정지용
시인
2018
황병기
국악인
2020
서세옥
미술가
2019
김성환
시사만화가, 대표작《 고바우 영감
2020
손창근
미술품소장가
2021
윤여정
영화배우
2021
이어령
문화부장관, 작가, 정치인 겸 문학평론가
2021
박서보
화가
2022
송기숙
작가
2022
송해
희극인
2022
김우창
문학평론가
2022
김지하
시인
2022
이정재
배우
2022
황동혁
감독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2023
조수미
성악가
2023
이미경
기업인
2024
이문열
소설가
}}}}}}}}}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
호머 베절릴 헐버트
訖法 | Homer Bezaleel Hulbert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100720165805250.jpg
한국명 헐벗, 흘법(訖法), 할보(轄甫)
출생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븐
사망 1949년 8월 5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 위생병원
(現 삼육서울병원)[1]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선교사, 독립운동가, 교사
부모 아버지 캘빈 헐버트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헐버트
배우자 메이 헐버트
자녀 슬하 3남 2녀
학력 다트머스 대학교 대학원 (졸업)
종교 개신교 ( 감리교회)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금관문화훈장
약력 육영공원 교수
대한제국 학부 자문관
연희대학교 특임초빙교수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조선으로의 여정2.2. 조선의 외교관으로서2.3. 한글 연구에 기여2.4. 이후
3. 어록4. 기타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wiki style="text-align: left"
호머 헐버트의 유언.[2]}}}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고종의 독립운동을 보좌한 대한민국의 외국인 출신 독립운동가.

2. 생애

2.1. 출생과 조선으로의 여정

1863년 미국 버몬트[3]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버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고종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4]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사역하다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

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헐버트는 평소에도 역사, 문화, 언어, 예술분야에 해박했으며, 특히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다 한다. 그의 학술서적들도 그러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재입국 후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을 보호한 3인의 외국인 중 한명이였다.[5] 이후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는데 지원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조선 최초의 사범대학인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2.2.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조선 주재 미국공사까지 역임했던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고 있던 1905년에 일찌감치 조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지만,[6] 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7]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2.3. 한글 연구에 기여

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8]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수여 받았다. 한글 학회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또한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시작으로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해외 학술지에 활발히 기고하였으며,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재미있게도 헐버트는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이러한 한글연구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파일:사민필지1.png
사민필지의 세계전도와 아메리가 부분

2.4. 이후

파일:Dr. Homer B. Hubert, Dr. Paul F. Douglas, Syngman Rhee at the Korean Liberty Conference.jpg
1942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인 자유 대회에서. 왼쪽부터 호머 헐버트 박사,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폴 더글라스(Paul F. Douglas) 박사, 구미위원부 의장 이승만.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 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이후 2차대전에서 일본이 편을 든 추축국이 패전하면서 한국의 광복을 살아서 보게 되었고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어 40여년만에 해방된 한국 땅을 밟게 되지만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면서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말은 지켜졌다.
파일:Syngman Rhee gave wreath to Homer Hulbert's grave.jpg 파일:Homer_hulbert_grave_with_mr_and_mrs_Rhee.png
1957년 12월 25일, 이승만의 평생의 동지이자 스승인 헐버트 박사가 잠든 양화진을 방문할 당시 영정전 비석에 올린 자필 예문과 헌화.[9]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대신 작은 추모 비석을 헌정하였다. 이후 여전히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다. 1999년 8월 4일 동아일보 13면 기사

당시 《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의 취재기 《인간 이은》에 따르면, 제물포(인천) 항으로 배를 타고 방한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여기가 제물포, 인천이라는 지명을 똑똑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자신이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며 연신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헐버트는 고종황제 내탕금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왔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내탕금을 되찾아 독립 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그것을 찾아오도록 부탁하였다. 독일은 러시아를 비롯해 대한제국을 지지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이에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내탕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내탕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내탕금을 털어간 후였다. 설사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독일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겪은 초인플레이션 문제 등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그의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다.

헐버트는 천명을 다하기 전 이승만에게 내탕금을 되찾아서 황실에 돌려달라고 부탁한 후에 눈을 감았지만 조선 황실을 안 좋게 보던 이승만은 도리어 황실 재산을 모두 몰수해 국고로 환수했다. [11]

3. 어록

비방이 극에 달하고 정의가 빛을 잃은 이 때에
나의 큰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 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의 헌사, 1906년[12]}}}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자 조선인들이 노래하면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
Koreans become poets like William Wordsworth when they sing, and they are master of the improvisation.
호머 헐버트의 논문, 《조선의 성악(Korean Vocal Music)》中.
오래지 않아 한국은 세계에 우뚝 설 것이다.
Before long, Korea will stand tall in the world.
호머 헐버트, 《한국사(History of Korea)》, 1905년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1] 기관지염으로 인해 병사했다. [2]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에 쓰여 있다. 지금이나 당시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미권에서는 구국영웅, 손꼽히는 큰 업적을 세운 위인들이나 묻힐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로운 장소로 꼽힌다. 이 곳의 무덤들은 왕족들조차 함부로 묻힐 수 없는 곳으로 헐버트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3] 같은 버몬트 출신인 타일러 라쉬의 인터뷰에 따르면, 버몬트 지역은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유독 강하다고 한다. # [4] 당시 육영공원의 학생중 대부분이 고급 양반 가문의 자제들인 걸 생각하면, 부모로부터 내려온 보수성과 성리학적 이념과 충돌되는 서구식 교육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듯 하다. 유일하게 열의를 보였던 학생 이완용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배운 바를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사용하였다. [5] 당시 고종은 거듭된 암살 위협으로 조선 주재 외교관들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었는데, 이때 자원한것이 헐버트였다. 이들은 3인 1조로 활동했으며, 독살을 막기 위해 음식은 정동의 언더우드의 사가에서 조리했다 한다. [6]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협조하거나 한 건 아니고, 고종의 풍경궁 건설이나 캐딜락 자동차 구입 등의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을 보면서 정이 떨어져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 것에 가깝다. 다만 정이 있는 대로 떨어지긴 했는지 금광 채굴권 등을 챙겨서 미국에 넘긴 것은 사실이다. [7] 독일, 러시아, 미국, 벨기에, 영국,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탈리아, 청나라, 프랑스 [8] 이런 서구 언어식 표기 요소가 도입된 덕분에, 한국인은 한글이라는 단일 문자만 사용함에도 가독성을 위한 장치가 마련이 되어 상당히 빠른 독서 속도가 가능해졌으며, 2010년대 이후 한류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상황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한국어 교육이 비교적 수월해지는 이점이 생겼다. [9] 오른쪽에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가 살짝 보인다 [10] 고종 황제가 예치한 내탕금 액수는 52만 마르크였는데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우표 1장 값도 안 될 정도로 가치가 폭락했다. 하지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증명에 걸렸던 상금 10만 마르크가 1996년에 4만 달러쯤 했으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현재 고종 황제의 내탕금은 디노미네이션을 거쳤더라도 2억 원 정도 될 것이다. [11] 이승만은 1954년 8월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여, 영구보존재산과(1조) 단,묘,궁,릉과 기타 왕실 미술품과 역사적 기념품 등 황실재산을 전부 몰수했으며(2조), 황실 소유의 1억5천만평 토지나 금전도 모두 매각시켰다. 급하게 매각을 시키다 보니, 궁역과 왕릉 권역, 사직단, 환구단 등 복원기록을 미처 남기지 못하고 실행된 경우도 있어 후대 복원에 애로사항이 있기도 했다. 황실에 대한 이승만과 국민감정은 뒤로하더라도 당시 법으로 명시된 국유화로 인한 보상과 재산권을 보장하지 않은 점은 이후에도 법적인 쟁점으로 남았다. [12] Dedicated/To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As a token of high esteem and a pledge of unwavering allegiance,/at a time when calumny has done its worst and justice has suffered an eclipse/and/To the Korean People/who are now witnessing the passing of old Korea to give place to a new,/when the spirit of the nation, quickened by the touch of fire,/shall have proved that though "sleep is the image of death" it is not death itself [13] 다만 크롬웰은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반면 태종은 사냥이며 여색이며 놀고 싶은 건 칼같이 챙겨서 놀았다는 것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