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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1:36:19

기삼연

파일:기삼연.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경로(景魯) / 성재(省齋)
본관 행주 기씨[1]
출생 1851년 1월 18일
전라도 장성도호부 서이면 소곡리 탁곡
(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2] #
사망 1908년 1월 2일 (향년 56세)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 서외리 서천교 아래
(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경력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대장
묘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상훈과 추모5.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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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시기 의병장,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기산도는 그의 종손자(從孫子)[3]이며, 성리학자 기정진은 7촌 재당숙(再堂叔), 독립유공자 기우만은 9촌 삼종질(三從姪)이다.

2. 생애

1851년 1월 18일 전라도 장성도호부 서이면 소곡리 탁곡(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기봉진(奇鳳鎭, 1809 ~ ?)과 어머니 제주 고씨 장흥백파 고영진(高永鎭, 1787 ~ 1831. 10. 25)의 장녀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전통적인 유교 가풍을 계승해왔는데, 특히 증조부로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3대가 생원시에 입격한 것이 특징이다. 아버지 기봉진은 1837년( 헌종 3) 식년시 생원시에 3등 60위로 입격하였고, 조부 기재선(奇在善, 1792 ~ 1837) 또한 1822년( 순조 22) 식년시 생원시에 3등 13위로 입격하였다. 증조부 기태검(奇泰儉, 1759 ~ 1824) 또한 1795년( 정조 19) 식년시 생원시에 3등 12위로 입격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7촌 재당숙(再堂叔)이자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러한 학풍에서 교육을 받은 행주 기씨 가문에선 기삼연을 비롯해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 기삼연의 종손자(從孫子) 기산도 등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스승 기정진의 손자이자 그의 9촌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그는 스스로 군사 부문을 담당하여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렸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할 즈음에 학부대신을 지낸 신기선 등이 내려와 왕명을 전하여 설득했고, 이에 의병 거병이 무산되었다.

기삼연은 고종황제의 본뜻이 아닐 것이라며 다시 의병 운동을 도모했으나,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이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전주부 진위대에 의해 딸이 혼례를 치르는 날에 체포되어 한성부 평리원으로 압송되었다가, 당시 평리원 원장인 이용태의 배려로 탈옥한 뒤 숨어지냈다.[4]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때 기삼연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수련산(秀蓮山)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이름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대장에 올랐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해 돌리면서 일본인과 일진회원을 처단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그는 전라남도 장성군, 고창군, 영광군 법성포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법성포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겨울철 추위로 세력이 위축되었고, 담양군으로 피신했다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기삼연은 담양군에서는 피신에 성공했으나 곧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에서 체포되어 1908년 2월 3일 광주군 부동방 서외리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순절했다.

3. 가족관계

4. 상훈과 추모

5. 작품

체포된 뒤 사형당하기 전에 지은 다음과 같은 한시가 남아 있다.
군대를 출병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呑日曾年夢亦虛)

[1] 정무공-장성문중/참판공-고흥군-금강공 25세 연(衍) 항렬. [2] 행주 기씨 집성촌이다. 가까운 진원면 진원리에는 기정진이 세운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다. 의병장 기우만, 기산도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기삼연의 맏형 기진연(奇晉衍)의 손자이다. [4] 정작 이용태는 나중에 친일파가 된다. 을사오적에 이름 올리는 이근택과 박제순도 그렇거니와 거물급 친일파들 중에는 처음부터 친일이었던 게 아니라 을사조약 전후 혹은 한일신협약쯤까진 고종 측근에서 반일에 가까웠다 변절한 이들이 많다. [5] 족보에도 전해지지 않는다. [6]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