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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00:12:43

나주 오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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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 羅州 吳氏
나주 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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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 전라남도 나주시
시조 오언(吳偃)[1]
집성촌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구
울산광역시 울주군
부산광역시 기장군
전라북도 고창군· 김제시· 정읍시· 부안군
전라남도 나주시· 담양군· 무안군· 영광군· 장성군· 신안군
경상북도 구미시
경상남도 양산시
인구 32,610명 (2015년)[2]
링크 나주오씨대종회

1. 개요2. 역사3. 계파 및 분파4. 항렬5. 인물
5.1. 후삼국시대5.2. 고려5.3. 조선5.4. 근대5.5. 현대
6. 같이보기

1. 개요

나주 오씨(羅州 吳氏) 전라남도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나주의 옛이름인 금성에서 본관을 따서 금성 오씨(錦城 吳氏)라고도 한다.

2. 역사

나주 오씨의 시조 오언(吳偃)의 선대는 서기 500년[3]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오첨(吳詹)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태조의 제2비인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조부는 오부돈(吳富伅)이고, 아버지는 오다련(吳多憐)이며, 그녀의 아들은 고려 제2대 왕에 오른 혜종이다.

이후 고려 중엽 진사를 지낸 관조(貫祖) 오숙규(吳淑珪)가 분적하여 집안을 처음 이루었으나, 이후 4대에 대한 기록이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려 때 중량장(中郞將)을 지낸 오언(吳偃)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오숙규(吳淑珪)의 5세손인 오자치(吳自治)는 조선 세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으로 녹훈되고 나성군(羅城君)으로 봉해졌다.

3. 계파 및 분파

4. 항렬

본 항렬자는 성씨의 계파 및 분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3세 시(時) 32세 길(吉) / 지(志)
14세 원(源) 33세 금(金)
15세 상(相) 34세 청(淸)
16세 환(煥) 35세 수(秀)
17세 규(圭) / 재(在) 36세 광(光)
18세 선(善) 37세 행(幸)
19세 수(洙) 38세 록(錄)
20세 근(根) 39세 호(浩)
21세 열(烈) / 섭(燮) 40세 권(權)
22세 교(敎) / 균(均) 41세 희(熹)
23세 종(鍾) / 진(鎭) 42세 희(喜) / 충(忠)
24세 영(泳) 43세 철(鐵)
25세 병(秉) 44세 태(泰)
26세 희(熙) 45세 리(利)
27세 재(載) 46세 묵(默)
28세 호(鎬) 47세 효(孝)
29세 순(淳) 48세 진(鎭)
30세 식(植) 49세 온(溫)
31세 영(榮) 50세 화(和)

5. 인물

5.1. 후삼국시대

5.2. 고려

5.3. 조선

5.4. 근대

5.5. 현대

6. 같이보기


[1] 고려조에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했다. [2] 나주 오씨 18,152명 + 금성 오씨 14,458명 [3] 신라 지증왕 원년 [4] 일명 장탄파(長灘派)라고도 불린다. [5] 후삼국시대 오늘날 전라남도 나주시 일대의 호족. [6] 고려 태조 왕건의 제2비. 앞서 언급한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이다. 왕건이 궁예 휘하( 후고구려)의 장군으로 있던 903년, 서남해 일대를 정벌할 당시 유화책으로 결혼했으며 훗날 고려 제2대 국왕에 오르는 혜종을 낳았다. [7] 나주 오씨의 관조(貫祖)로 도시조(都始祖) 오첨(吳詹)의 24세손 오현보(吳賢輔)[35]의 다섯째 아들, 고려 중엽에 진사를 지냈다. [8] 나주 오씨의 기세조(起世祖)로 고려조에 중량장(中郞將)을 역임했다. [9]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었다. [10] 호는 송은(松隱)으로 송은당공파(松隱堂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고려 때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1] 자(字)는 가원(可遠), 호(號)는 남강(南江).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보문각(寶文閣) 및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으나,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12] 나주 오씨의 시조 오언(吳偃)의 현손으로, 1467년(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정충출기 적개공신(精忠出氣 敵愾功臣)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을 지냈다. 이후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가 노부(老父)의 봉양을 이유로 은퇴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1476년( 성종 7년)에 제작된 공신도상 초상(功臣圖像 肖像)은 보물 제1190호로 지정되었다. [13] 자(字)는 청신(淸臣), 호(號)는 석천(石川)으로, 1491년( 성종 22년)에 벼슬길에 올라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사후 이조판서 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추증되었다. [14] 오자치(吳自治)의 손자로, 자는 경부(敬夫), 시호는 정간(貞簡)이며, 금양군파(錦陽君派)의 파조(派祖)이다. 1532년( 중종 27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1546년( 명종 원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550년( 명종 5년)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지고, 호조참판, 예조판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1571년( 선조 4년) 좌찬성(左贊成)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15] 오겸의 아들로, 1553년( 명종 8년) 벼슬길에 올라 이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 장인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6]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鞱庵)으로 도암공파(韜菴公派)의 파조(派祖)이다. 하서 김인후의 제자인 금강 기효간(奇孝諫)의 제자이자 정여립의 제자이기도 했다. 1589년( 선조 22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정여립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비방한 것에 대해 반박하는 편지가 발견됨에 따라 천거되어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이후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 경기전 참봉으로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되어있던 실록 내장산으로 봉안, 보존하여 다른 사고의 실록들은 모두 소실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실록만큼은 지킨 공로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폐정의 쇄신과 인심 수습책을 상소했으며, 벼슬은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사후 고창 월계정사(月溪精舍)에 제향되었다. [17] 자(字)는 필방(弼邦), 호는 구암(龜岩),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 휘하 무관으로서 옥포 해전, 당포 해전, 노량 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전후 벼슬길에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으며, 자신의 고향인 나주에 정착하면서 심은 호랑가시나무는 2009년에 천연기념물 제516호로 지정되었다. [18] 자는 득원(得原). 오희길(吳希吉)과는 사촌지간이며, 명곡공파(明谷公派)의 파조(派祖)이다. 1623년( 인조 원년)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해 관직이 검열(檢閱)에 이르렀으나, 같은 해 두창(痘瘡)으로 객사했다. 사후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19] 명곡공파(明谷公派)의 파조(派祖) 오희도(吳希道)의 둘째 아들로, 자(字)는 빈중(贇中), 호(號)는 지천(支川)이다. 1644년( 인조 22년)에 일어난 심기원의 역모를 진압하여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1650년( 효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정랑과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20] 명곡공파(明谷公派)의 파조(派祖) 오희도(吳希道)의 셋째 아들로, 자는 자서(子敍)이며, 석문공파(石門公派)의 파조(派祖)이다. 1652년( 효종 3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함평현감(咸平縣監)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이때 형을 내렸던 자의 무고함이 밝혀진 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평안도 초산으로 유배를 갔다온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21] 명곡공파(明谷公派)의 파조(派祖) 오희도(吳希道)의 넷째 아들로,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장계(藏溪)이다.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 정홍명(鄭弘溟)의 제자이다. 1650년( 효종 원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익히는 데 전념하였으며, 거문고를 특히 좋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 도림공파(道林公派)의 파조(派祖) 오이구(吳以久)의 아들이다. 자(字)는 선이(善詒), 호(號)는 생로당(生老堂)과 대명동인(大明洞人)이 있다. 1644년( 인조 22년) 명나라 망국을 비관하여 벼슬길에서 떠나 나주에 은거했다. 학행이 뛰어났다고 알려졌으며, 송시열과 교제하였다. [23] 자(字)는 공보(公甫, 公輔)로, 1766년( 영조 4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 경주부윤,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24] 자(字)는 공예(公藝), 호(号)는 산운관(山雲館)으로, 1775년( 영조 5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 개성유수,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25]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자(字)는 중함(重函), 호(号)는 난와(難窩)로,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였으며, 처음부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집중하다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일으킨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난 이후는 두문불출하였으며,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하였다는 죄목으로, 장성의 일본군 헌병부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며, 해당 일을 겪은 그 이후로도 계속 학문 탐구에만 집중하였다. [26] 21대손.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오인섭(吳寅燮)이라는 이명도 있다. 전라도 나주목 적량면 명도리(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도동) 출생. [27] 19대손.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오인수(吳仁洙). 전라도 나주목 삼가면 죽산리(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죽산마을) 출생. [28] 18대손. 대한민국 제1공화국 법조인. 이승만 정권 당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 광주고등법원 법원장, 서울고등법원 법원장 자리를 거쳐 대법관을 역임하였으며, 대법관 재임 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과 헌법위원회 예비위원을 겸임했다. 전라도 전주부 장성군 삼계면 덕산리(現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덕산마을) 출생. [29] 대한민국 제3공화국 민주공화당 소속 제8대 국회의원. 박정희 정권 당시 민주공화당 광산지구당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1971년에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생활을 마친 이후로는 전라남도 광산교육감과 나주교육감을 역임하였다. 전라남도 광주군 삼도면 죽산리(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죽산마을) 출생. [30] 국회의원 한국철도공사 사장. [31] 대한민국 양궁 남자부 국가대표팀 출신 양궁 지도자. [32] 여행작가. 여행 에세이 『나의 첫 차박캠핑 이야기』의 저자. [33] 아나운서. [34] 시인.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