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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창섭(金昌燮) |
호 | 석포(元局) |
출생 | 1873년 |
전라남도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1] | |
사망 | 1909년 12월 5일 |
묘소 | 대전 국립묘지 |
서훈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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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의병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원국의 본명은 김창섭이며, 1873년 전남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광산군 송정리 광산에서 모종의 이유로 일본군 병사를 살해한 후 피신했고, 1906년 3월 동생 김원범과 함께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생은 선봉이 되었다. 이후 1907년 9월에 광주 출신의 유생 의병장 조경환의 의병과 합세하여 선봉장이 되었고, 이어 12월에는 김준과 합진하여 4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세웠다.김원국은 1908년 1월 1일 창평 무등촌에서 일본군과 교전했고, 같은 해 3월 7일에는 영광 토산, 25일에는 광산 어등산, 그리고 11월에는 장성 남월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또한 그는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하여 목포에서 무기 구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기도 했고, 김성수 집안의 소작료를 징발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08년 음력 12월 하순, 설을 보내기 위해 대부분의 부하를 귀향시키고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광주 어등산에 주둔하고 있던 조경환이 일본군 헌병대의 급습을 받았다. 이때 조경환을 비롯한 20여 명이 전사했는데, 그 중엔 김원국의 동생 김원범도 있었다. 김원국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복수심을 불태우며 잔여 의병을 수습한 뒤 의병대장을 맡았다. 김원국은 곽진일을 선봉장, 황덕신을 중군장, 김재연을 후군장, 이교학을 도포장, 조찬성을 호군장으로 삼았고, 그밖에도 김용조, 김인호, 김인조, 김자선, 신제국, 이음집, 이원신 등이 의병으로 활동했다. 김원국은 나주 향교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뜻을 알렸다.
오오! 비록 이 나라는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만 예악과 문물이 찬란하여 중국에 비길만하여 소중화라 칭찬 받았으니 그것은 문명 때문이었다. 지난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역사이며 그때 받은 원한은 절대 잊을 수도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바다건너 외딴 섬에 살고 있는 왜놈들은 짐승과 같은 종자들이라 비록 우리나라와 이웃하여 살고 있으면서도 몇 번이나 침략해 오니 역사란 결코 돌고 도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감히 서로 통상하여 시장을 열자고 유인하더니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하고 국권을 침탈하고 우리 재산과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어 가니 그 변괴가 끝이 없는 것이다. 그 죄를 생각하면 천만 번 죽여도 무거운 형벌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 하늘이 우리나라를 구원하니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그 군율도 늠름하다. 이에 불민하지만 김원국 등이 분에 못 이겨 동지 장사들과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우리는 오로지 창궐하는 왜놈들을 토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놈이 들어와서 우리 백성을 괴롭히고 도성을 점거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 바라건대 뜻있는 선비들께서는 한 마음이 되어 외치고 일어나자! 그리하면 기어이 전쟁에 이기고 성공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라의 원한을 풀어 보자. 그리고 국토를 회복하자. 살아서는 이 나라의 신하요 죽어서는 이 나라의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어찌 태연히 앉아서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우리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만은 여기에 몇 자 적어서 나주향교 유림들에게 삼가 통고하는 바이다.
기유(1909) 2월 모일 호남의소 김원국
다행히 하늘이 우리나라를 구원하니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그 군율도 늠름하다. 이에 불민하지만 김원국 등이 분에 못 이겨 동지 장사들과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우리는 오로지 창궐하는 왜놈들을 토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놈이 들어와서 우리 백성을 괴롭히고 도성을 점거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 바라건대 뜻있는 선비들께서는 한 마음이 되어 외치고 일어나자! 그리하면 기어이 전쟁에 이기고 성공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라의 원한을 풀어 보자. 그리고 국토를 회복하자. 살아서는 이 나라의 신하요 죽어서는 이 나라의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어찌 태연히 앉아서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우리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만은 여기에 몇 자 적어서 나주향교 유림들에게 삼가 통고하는 바이다.
기유(1909) 2월 모일 호남의소 김원국
또한 그는 '호남의소(湖南義所)'의 이름으로 광주 세무서에 편지를 보내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경고했고, 나주 및 광주 향교에 의병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아부하는 친일파, 일진회원, 밀정 등을 처단한다고 경고했다.
1909년 1월 10일, 김원국은 장성 남면에서 부하 150명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교전했다. 또한 3월 18일엔 부하 80명과 함께 나주시장에서, 4월 2일에는 함평군 오산면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했다. 그리고 5월 19일에는 불갑산에서 적과 교전했으나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선봉장 곽진일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광주군 우산면 목촌에 은신하여 요양했다.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때 생포된 호남 의병장들. 붉은 원으로 표시된 인물이 김원국이다.
그러다가 6월 10일 밤 일본군이 급습하는 바람에 체포된 그는 목포로 압송되었다. 이때 호송하던 일 헌병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결박당한 손을 몰래 풀고 돌을 집어서 헌병을 타살한 후 함평 먹굴산에 잠시 피신했다. 그러나 하루만에 다시 체포되었고, 경찰의 신문조서에서 "동생 김원범과 조카 임인조의 전사로 인해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항일투쟁을 선도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후 대구로 이송되었다가 12월 5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3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원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현 광주광역시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