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5 22:49:06

민용호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민진호(閔瑨鎬)
이명 민진호(閔晋鎬/閔晉鎬)·민구호(閔毬鎬)
자 / 호 문현(文見/文賢) / 복재(復齋)
본관 여흥 민씨[1]
출생 1869년
경상도 산청현 금석면 특동
(현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특리)
사망 1922년
전라북도 무주군
묘소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병정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인적사항과 주요 활동2. 학문과 저술

[clearfix]

1. 인적사항과 주요 활동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인 민용호(閔龍鎬)는 아버지 현와공(弦窩公) 민치겸(閔致謙)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족숙 민치우(閔致禹)에게는 양자로 입적되었다.

민용호는 1895년 조선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후에 강원도 강릉의 관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하여 관동 지방의 의병 세력을 모았다. 그 뒤로 함경남도의 원산을 공격하기로 계획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실패하였다. 그로 인해 자결을 결심했던 민용호는 주변 이들의 만류로 마음을 다잡고 강릉으로 귀환했다. 백봉령(白鳳嶺)과 대관령에서 대공산성 전투를 치른 그는 비령(扉嶺)과 백복령, 그리고 북평을 거쳐 4월 중순 삼척에 도착하였다.

1896년 4월 19일, 경북 영양의 의병장인 김도현(金道鉉)과 합세한 민용호는 삼척에서 전투를 치렀으나 패퇴한 이후 제2차 원산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은 정황으로 인해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북상했으며 원산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방해로 삼수를 거쳐 8월 하순 경 백두산에 도착하였다. 한 달 뒤의 9월, 의병 해산 칙령이 내려지면서 의진을 해산한 민용호는 만주로 들어갔다. 이어 만주의 지방관과 청나라의 위안스카이, 원세개(袁世凱)와 송경(宋慶) 등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시도했던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민용호는 1898년 황국협회에 참가하여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한 뒤 1899년에는 평안북도 도공사원(都公事員)에 임명되었다. 호적 정리 등의 위민 업무를 성공시킨 그는 중추원의관과 의주군수에도 임명되었으나 군부협판인 이한영(李漢英)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 후 1902년에 귀국한 민용호는 명성황후 천릉도감(遷陵都監) 감조관(監造官)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1903년에는 중추원 의관, 평안북도 위원(渭原) 군수와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임명되었다.

1922년 사망한 민용호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이 추서되었다.

참고출처1:디지털삼척문화대전
참고출처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학문과 저술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서정일기(西征日記)」, 「강북일기(江北日記)」 등이 포함된 『복재집(復齋集)』 등을 저술했다.


[1] 우후공파 27세 호(鎬) 용(鏞)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