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07:21:37

강경선(독립운동가)

파일:독립장 약장.png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독립장 부장.png
강경선 강기덕 강기운 강명규 강무경
강상모 강순필 강영소 강원형 강윤희
강이봉 강익록 강인수 강제하 강진원
강진해 강창제 강철구 계봉우 계화
고광순 고두환 고운기 고이허 고인덕
고제량 고지형 고창일 고평 곽재기
곽종석 구연영 권기옥 권오설
권인규 권준 기산도 기삼연 기우만
길선주 김단야 김대지 김덕제 김도원
김도현 김동식 김법린 김병로
김복한 김상덕 김상옥 김석 김석진
김석황 김성숙 김수민 김순애 김승학
김약연 김원국 김원범 김인전 김정익
김중건 김진묵 김철 김철수 김학규
김한종 김혁 김홍일 김희선 나병삼
나시운 나월환 나정구 나중소 나창헌
나철 나태섭 남공선 남궁억 남석인
남정각 노기용 노병대 노복선 노원섭
노을룡 노응규 노임수 노종균 노태준
다이리 류인식 마수례 마진
명제세 문상익 문석봉
문양목 문일민 문일평 문창숙 문창학
민강 민양기 민영구 민용호 민필호
민효식 박건병 박건웅 박경순 박기성
박기제 박기한 박도경 박문용 박민항
박봉석 박사화 박상진 박시창 박인호
박장호 박재혁 박차정 박찬익 박희광
반하경 방순희 백기환 백남규 백일규
백정기 사도덕 서병희 서상교 서상렬
서상용 서상한 서영석 서원준 서의배
서일 서종채 석호필 선우혁 성익현
손기업 손기혁 손덕오 손승억 손양윤
손영각 손정도 송계백 송병선 송병조
송종익 송진우 송학선 송헌주 쉐웨
신숙 신언준 신팔균 신현구 심남일
안경근 안경신 안공근 안광조
안국형 안규홍 안명근 안무 안병무
안병찬 안상익 안세환 안승우 안원규
안재환 안정근 안지호 안춘생 안태국
안현경 안희제 양경학 양근환 양기하
양세봉 양우조 양진여 엄항섭 여준
연병호 염온동 오강표 오광심 오면직
오성술 오영선 오의선 우덕순 우재룡
원세훈 원심창 유관순 유근 유동하
유림 유석현 유일한 윤동주 윤병구
윤세복 윤세주 윤자영 이갑 이강
이강훈 이광민 이규갑 이남규 이만도
이명하 이상룡 이상정 이석용 이설
이성구 이수흥 이애라 이윤재 이원대
이의준 이인 이장녕 이재유 이재현
이종건 이종희 이준 이준식 이중언
이진룡 이진무 이춘숙 이탁 이현섭
이회영 이희승 임병찬 임치정 장관주
장기천 장기초 장덕준 장덕진 장도빈
장두량 장두환 장명도 장봉한 장석영
장소진 장윤덕 장인초 장쥐 장진홍
장췬 장태수 장형 전덕기 정용기
정이형 정인보 정인승 정태진 정현섭
조경한 조동호 조명하 조병옥 조병준
조시원 조지 쇼 주기철 차도선 차병수
차병제 차병혁 차이석 차천리 차천모
차희식 채광묵 채기중 채세윤
채영 채원개 채응언 채찬 천병림
최규동 최동오 최양옥 최용덕 최재형
최중호 최진동 최팔용 최현배 태양욱
표영준
한봉수 한상렬 한성수 한시대 한징
한훈 함석은 함태영 현익철 현정건
홍언 홍원식 홍진 홍학순
황병길 황병학 황상규 황현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1년 8월 15일
평안도 정주목 운전통 운전리
(현 평안북도 운전군 운전리)
사망 1930년 9월
중국 난징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경선은 1891년 8월 15일 평안도 정주목 운전통 운전리(현 평안북도 운전군 운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7월 중국으로 망명했고 그해 12월에 상하이에서 여운형 등이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간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1921년까지 1년간 상하이 일대 한인들의 자치 활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1921년 11월 25일, 강경선은 대한적십자회에서 양헌(梁憲), 김구(金九) 등 12명과 함께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민족해방을 모색한 공산주의자로, 국내의 화요파(火曜派)와 연계해 사회주의 운동을 꾀했으며, 고려공산당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자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했다.

1923년 2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강경선은 임시정부의 조직 개편을 놓고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를 독립운동단체의 최고 기관으로 세우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존속시키되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조하자는 개조파가 대립하자 태극단(太極團)의 대표로서 개조파를 지지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교민단(僑民團) 의원으로서 교민단과 인성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교민들로부터 부과금을 징수했다.

강경선은 1924년 8월에는 교민단 총무를 맡았으며, 1925년에는 의정원 평안도 대의사(代議士)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특히 임시대통령 이승만 국제연맹에 한국을 위임통치해달라는 청원을 한 것에 반발해 최석순 등과 함께 대통령 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해 이승만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1926년 3월 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노북문 민국로 침예당에서 거행된 3.1 운동 기념식에 교민단장 대리로 참석해 식사(式辭)를 낭독했으며, 그해 10월에 인성학교 교감으로 동포 자제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1927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한국유일당 조직 촉성회에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한인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9월경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일제 밀정에게 피살되었다는 설과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피살되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경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