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5:05:23

강원형

파일:독립장 약장.png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독립장 부장.png
강경선 강기덕 강기운 강명규 강무경
강상모 강순필 강영소 강원형 강윤희
강이봉 강익록 강인수 강제하 강진원
강진해 강창제 강철구 계봉우 계화
고광순 고두환 고운기 고이허 고인덕
고제량 고지형 고창일 고평 곽재기
곽종석 구연영 권기옥 권오설
권인규 권준 기산도 기삼연 기우만
길선주 김단야 김대지 김덕제 김도원
김도현 김동식 김법린 김병로
김복한 김상덕 김상옥 김석 김석진
김석황 김성숙 김수민 김순애 김승학
김약연 김원국 김원범 김인전 김정익
김중건 김진묵 김철 김철수 김학규
김한종 김혁 김홍일 김희선 나병삼
나시운 나월환 나정구 나중소 나창헌
나철 나태섭 남공선 남궁억 남석인
남정각 노기용 노병대 노복선 노원섭
노을룡 노응규 노임수 노종균 노태준
다이리 류인식 마수례 마진
명제세 문상익 문석봉
문양목 문일민 문일평 문창숙 문창학
민강 민양기 민영구 민용호 민필호
민효식 박건병 박건웅 박경순 박기성
박기제 박기한 박도경 박문용 박민항
박봉석 박사화 박상진 박시창 박인호
박장호 박재혁 박차정 박찬익 박희광
반하경 방순희 백기환 백남규 백일규
백정기 사도덕 서병희 서상교 서상렬
서상용 서상한 서영석 서원준 서의배
서일 서종채 석호필 선우혁 성익현
손기업 손기혁 손덕오 손승억 손양윤
손영각 손정도 송계백 송병선 송병조
송종익 송진우 송학선 송헌주 쉐웨
신숙 신언준 신팔균 신현구 심남일
안경근 안경신 안공근 안광조
안국형 안규홍 안명근 안무 안병무
안병찬 안상익 안세환 안승우 안원규
안재환 안정근 안지호 안춘생 안태국
안현경 안희제 양경학 양근환 양기하
양세봉 양우조 양진여 엄항섭 여준
연병호 염온동 오강표 오광심 오면직
오성술 오영선 오의선 우덕순 우재룡
원세훈 원심창 유관순 유근 유동하
유림 유석현 유일한 윤동주 윤병구
윤세복 윤세주 윤자영 이갑 이강
이강훈 이광민 이규갑 이남규 이만도
이명하 이상룡 이상정 이석용 이설
이성구 이수흥 이애라 이윤재 이원대
이의준 이인 이장녕 이재유 이재현
이종건 이종희 이준 이준식 이중언
이진룡 이진무 이춘숙 이탁 이현섭
이회영 이희승 임병찬 임치정 장관주
장기천 장기초 장덕준 장덕진 장도빈
장두량 장두환 장명도 장봉한 장석영
장소진 장윤덕 장인초 장쥐 장진홍
장췬 장태수 장형 전덕기 정용기
정이형 정인보 정인승 정태진 정현섭
조경한 조동호 조명하 조병옥 조병준
조시원 조지 쇼 주기철 차도선 차병수
차병제 차병혁 차이석 차천리 차천모
차희식 채광묵 채기중 채세윤
채영 채원개 채응언 채찬 천병림
최규동 최동오 최양옥 최용덕 최재형
최중호 최진동 최팔용 최현배 태양욱
표영준
한봉수 한상렬 한성수 한시대 한징
한훈 함석은 함태영 현익철 현정건
홍언 홍원식 홍진 홍학순
황병길 황병학 황상규 황현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
성명 강원형(姜遠馨)
성윤(聖允)
혜사(蕙社)
생몰 1862년 2월 19일 ~ 1914년 9월 25일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군 기천면 신동리
본관 진주 강씨
사망지 경성부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원형은 1862년 2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 기천면 신동리에서 백하(白下) 강의영(姜宜英)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주강씨 연보>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부터 충효와 자질이 뛰어났으며 학문에 밝았다고 한다. 7살 때 종숙부 백하공(白下公)에게 글을 배웠고 10살 때 소학을 익혔는데, 단순히 배우기만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몸소 행하기로 작정하여 응답하는 절차와 청소하는 절차를 법도대로 따랐으며, 글짓기에 능통했다. 한 번은 집안 사람들이 그에게 글을 지어보게 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큰 들 풍광은 연기 세계요,
높은 산 구름 기세는 빗 정신이로다.

11살 때, 종숙부 백하공이 붓과 먹을 가지고 물었다.
"네가 만약 내 아들로 된다면 마땅히 이것을 주겠노라."

강원형이 대답했다.
"천륜을 어찌 가히 물건으로서 거래하겠습니까?"

백하공은 그런 그를 매우 기특해했고 성심껏 그의 교육 훈도를 맡았다. 이후 강원형은 16살 때 광주 이씨와 결혼했고 20살 때 딸을 낳았으며 25살 때 아들을 낳았다. 27살 때인 1888년 과거를 보러 성균관에 들어갔고, 1890년 2월 과거를 봐서 명경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제수받았다. 이후 순조롭게 출세하던 그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내정이 부패하였기 때문이니 제반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또한 그는 노비를 해방하고 그들 중 인재가 있으면 과감히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그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후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자 그해 5월에 서울에 올라가 환궁을 간청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환궁하여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시고 충직하고 어진 사람을 택하여 민국(民國)을 안정시키며 토지를 측량하여 백성들에게 이익되게 하며 절약을 숭상하여 재용(財用)을 하며 새 제도는 옛 제도를 가감하여 쓰소서."

고종이 이에 다음과 같이 비답했다.
"제기한 여러 조항 가운데 더러 뽑아서 쓸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환궁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잇달아 환궁을 청하면서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후 1904년 2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단행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히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 내정을 간섬하자, 그는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 항의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해올 경우엔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드러냈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 참판 최익현, 전 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위를 일제를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는 이유로 구속하자, 그는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 3인의 석방을 요구했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했다. 그 결과 세 사람은 석방되었지만,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자, 강원형은 이에 분노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대체로 양국 사이에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반드시 임금이 윤허하여 재가하고 대신이 인준하며 만민이 승복해야만 협의가 일치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청한 다섯 가지 조목은 온 나라를 빼앗는 권한을 쥐는 것으로서 삼척동자도 부끄럽고 증오스럽다는 것을 아는데 여러 대신(大臣)들이 조인에 ‘가(可)’라고 쓴 것은 오직 일본인들이 위협해서 강제로 시행한 것입니다. 본래 그 심보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부모도 임금도 안중에 없는데 기인되는 것입니다. 삼천리 강토와 500년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도리어 일신의 영화나 고생보다 가엾게 보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회유와 공갈을 도리어 폐하의 굳은 결심보다 중하게 여겨서 굽신굽신하며 아부굴종하면서 제멋대로 농간질을 하였으니 그들이 아무리 자신이 옳았다고 설명을 하더라도 이길 길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폐하가 의리에 의거하여 굳이 거절하면서 마음속으로 맹세하며 사직을 위해 한목숨 바치고 거듭 구속을 받는 치욕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기를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조인에 ‘가(可)’ 라고 쓴 것은 애초에 정부의 공적인 결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니 바로 이것이야말로 명분 없는 위조문서이며 빈 종이장입니다. 형세가 장차 일본 조정에 퍼지게 되고 각 나라들에 전달되면 위조문서로 임금을 기만한 데 대한 죄는 그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또한 꾸며대지도 못하고 살길을 찾아도 방도가 없으므로 말미에는 간사한 계교를 써서 온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자갈을 물리는 것만 못하겠기 때문에 폐하를 뵐 때에 제멋대로 백성들이 빗나가는 의논들을 한다고 핑계대고 무력으로 짓눌렀던 것입니다.

대체로 상소하는 데 간여하여 신문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서 설사 저들이 온 나라 사람들을 다 죽인다 해도 천지의 귀신들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천하의 이목이 환히 밝힐 것이니 사기와 폭력으로 속여 넘길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아! 안으로는 나라의 법이 밝게 있어 삼척의 법이 지엄하고 밖으로는 여러 공사관들이 모여서 한창 공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분연히 결단하여 속히 명령을 내려 협박을 받았건 그렇지 않았건 따질 것 없이 조인하는 것을 옳다고 쓴 역적들은 법부(法部)에 넘겨 그 목을 베어 거리에 매다십시오. 특별히 각국 공사관 공사(公使館公使)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모임을 열고 역적들에게서 조인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을 강제로 받아낸 데 대하여 하나하나 천하에다 그 죄를 성토하며 법에 비추어 그 죄를 바로잡음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떨게 할 것입니다."

고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그대들의 말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니 거듭 번거롭게 굴 것은 없다."

이후 그는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국내외에 공표해 국민들의 궐기와 국제 사회의 관심을 호소했고, 이로 인해 1905년 11월 28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가 1906년 3월 20일에 풀려났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한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서울로 가서 동지들을 모아 망국의 한을 토로했으며 국권을 회복할 방안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자 병석에 누웠다. 이후 4년간 앓아지내던 그는 1914년 9월 25일 경성부에서 병사했다. 그가 죽기 전에 막내 아들이 울면서 집의 일을 걱정하자, 그는 태연하고 추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집의 일은 네 형이 있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으나 국가의 존망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생존하느니 보다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돌아가 선왕을 배알할 뿐이로다."

이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리에 그를 기리는 의사비(義士碑)가 세워졌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