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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42:08

천병림

성명 천병림(千炳林)
이명 한일래(韓一來), 한위송(韓韋松), 한영일(韓英日), 천병일(千炳日), 방자원(方子遠), 위사원(韋思源)
생몰 1896년 8월 6일 ~ 1943년
출생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 가증리
사망지 중국 충칭시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천병림은 1896년 8월 6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 가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담했고, 1932년 10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 정당단체 대표 9명이 한 자리에 모여 전선통일 문제를 협의할 때 박건웅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각 단체의 전선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협의기구를 세우자는 합의가 이뤄졌고, 같은 해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었다. 그는 이때 9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32년 10월 김원봉이 난징에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에 가담해 정치조(政治組)의 교관을 맡고 학생들을 모집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1935년 7월 5일, 천병림은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중앙검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35년 9월 25일~26일 지청천 등과 함께 군자금의 원조를 받기 위하여 장학량과 민족혁명당의 매입 건에 대해 협의했다. 이후 1936년 3월에는 민족혁명당 군사부(軍事部) 산술대수(算術代數)의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전당대표회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부터는 민족혁명당 화남(華南) 지부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38년 4월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을 발행했다. 또한 1940년에는 <조선의용대통신>의 중국어판 주편위원회(主編委員會)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지도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충칭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나 1943년경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천병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