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06:34:52

고이허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최용성(崔容成, 또는 崔龍成)
출생 1902년 9월 5일
황해북도 수안군
사망 1937년 2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선양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서훈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몽치단 사건2.3. 민족운동2.4. 최후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최용성(崔容成, 또는 崔龍成)이며, 황해북도 수안군 태생이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고이허는 1902년 9월 5일 황해도 수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단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졸업 후 서울에서 학생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 그는 만주로 건너갔다가 학생 시절 접했던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려 했다. 그러던 중 창춘에서 김영석(金永錫)의 소개로 김진호(金鎭浩), 변창근(邊昌根)을 만나 길림성 회덕현의 회덕농우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고이허는 회덕농우회에서 최일천 등과 함께 농민계몽 잡지 <농우(農友)>를 발간했고, 김진호의 알선으로 남만주의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에 간부의 자격으로 가입했다. 또한 2세 교육을 위해 오가자 마을에 삼성학교를 세워 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며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족교육에 진력했다. 이후 1929년 4월, 고이허는 삼부통일회[1]에서 국민부 조직 선언을 할 때 가담하여 23인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2. 몽치단 사건

그러던 중 동경대학 유학생 출신인 차광수, 김혁 등 'ML파' 공산주의자들이 오가자 마을에 들어서면서 이념 갈등이 불거졌다. 차광수는 고이허가 국민부 조직에 참여하고자 멀리 간 틈을 타 농우회를 농민동맹으로 개명했고, 고이허가 임명한 오가자 반제청년동맹 위원장을 제명하고 그 자리에 자신에게 감화된 최일천을 선출했으며, 소년학우회를 소년탐험대로 바꿨다. 여기에 남만여자교육연합회 오가자 지부가 결성되었고, 자치조직인 요하농촌공소도 공산주의 성향의 자치위원회로 바뀌었다. 뒤늦게 오가자 마을로 돌아온 고이허는 이런 상황을 보고 제자들이 공산주의에 매몰되어 민족의식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했다.

급기야 1929년 여름, 중국 길림성 반석현에서 ML파 공산주의자들이 '몽치단'이라는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따르지 않는 민족주의계 인사들을 습격했고 국민당 군벌의 경찰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반란을 기도한다는 허위신고를 했다. 그 바람에 정의부 및 국민부 계열의 민족운동가들은 큰 타격을 받았고, 고이허는 그때부터 공산주의에 반감을 품고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이와 관련된 대목이 실려 있다.
(공산주의 성향의 남만청총 대표들을 체포한 것에 김일성이 항의하자) 고이허는 코웃음을 치면서 국민부는 남만청총을 내던지면 내던졌지 공산당의 손에 넘겨줄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그는 반석현에서 엠엘계의 종파분자들이 몽치단이라는 테러단을 만들어가지고 민족주의자들을 습격한 사실을 실례로 들면서 이런 자들과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겠느냐고 빈정거렸다.
(중략) 나는 고이허에게 우리는 그런 종파쟁이들과는 전혀 다른 청년들이라고 다시 설복하였다. 그들은 민족주의자들과 싸울 뿐 아니라 우리와도 싸우고 자기들 호상간에도 파벌을 형성해가지고 끊임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추물들인데 그런 자들과 우리를 한 저울에 올려놓으면 안된다고 력설하였다. 그러나 고이허는 나의 성의있는 설복을 끝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2.3. 민족운동

1929년 9월 20일, 고이허는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에 참석했다. 이 대회에선 조선혁명군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속하게 했고 중앙집행위원을 23명에서 15명으로 줄이기로 결의했다. 이때 고이허는 현익철, 이진탁, 심용준 등과 함께 집행위원 15명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7일에 열린 국민부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외무부 집행위원 겸 중앙검리부 검리 및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 고이허는 1929년 11월 4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일명 남만청총) 중앙간부가 되었고, 같은 달 18일에 열린 남만청총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고이허는 곧 남만청총이 국민부를 공산당에 잠식시킬 것을 우려해 대회를 중단시키고 가장 강경한 공산주의적 발언을 한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로 인해 김일성과 차광수 등 공산계 인사들이 국민부를 이탈했다.

1929년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으로 개편되었다.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이 조선혁명당 위원장을 겸임했고, 고이허 역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고이허는 국민부 헌장 입안에 적극 참여했고, 1930년에는 국민부 교양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1932년 1월 18일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이 신빈현 하북에 있는 서세명의 집에 모여 중앙간부회의를 열었다가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이 급습하는 바람에 관계자 80여 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고이허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체포를 모면한 인사들을 모아서 조선혁명당을 재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는 양세봉, 국민부 집행위원장으로는 김동산,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는 김학규, 재정부장으로는 이상관, 외교부 및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홍심원 등이 선출되었다. 그가 기초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혁명당의 당의는 다음과 같다.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 일본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4천년을 독립하여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며,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국민 전체 생활의 평등을 확보하며, 나아가 세계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

또한 고이허가 제정하거나 수정한 조선혁명당의 주요 당강은 다음과 같다.
원수(仇敵) 일본 침탈세력을 박멸하고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함,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을 숙정함으로써 민주집권제의 정권을 수립함,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삭멸(削滅)하고 국민생활의 일군을 단위로 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함, 국민은 일체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짐, 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민에 분급함, 대규모 생산기관과 독점적 기업은 국영으로 함.

고이허는 조선혁명의 진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노동자·농민·도시직업자·지식자 등 혁명의 전위분자를 강고히 단결시켜 조선혁명의 중심세력을 확립하고, 전체대중을 이 중심세력에 긴급히 영도·연결시킴과 동시에 전세계 피압박민족 및 무산계급의 혁명전선과 굳게 결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함과 함께, 내부의 일체 압박 및 착취세력을 파괴하고 조선의 절대독립을 완성하여 노농(勞農) 민주정권을 확립하며, 대기업 기관을 몰수하여 국유로 하고 대소유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주며, 모든 노동자 대중생활의 평형발달을 꾀함에 있다. 이것이 조선 피압박 대중의 유일한 살길로써 조선혁명의 전체 노정이다.

1933년, 고이허는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교민들의 자치와 조선혁명군 후원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1934년 1월에 신빈현 왕청문 남쪽 의목수에서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간부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로 펴네되었던 조선혁명군의 칭호를 원래되로 회복하고 총사령 양세봉 등 주요 간부 진용을 재편했으며,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역시 조직을 재편성했다.

1934년 11월 11일, 고이허는 일제의 '동변도 대토벌작전'으로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자 군민대표회의를 열어 유명무실해진 국민부를 해산하고 일종의 군정부인 조선혁명군정부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정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고 군사부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엔 김활석을 선출했다. 이 무렵 조선혁명군정부는 군사위원회 산하에 10개의 군구와 4개의 특별 군구를 두었고, 3개 방면군에 300여 명의 조선혁명군 대원을 두었다. 그러나 고이허는 1935년 9월 폐결핵에 걸려 사표를 제출했고, 이에 따라 군정부의 최고 지도자는 고이허에서 김동산으로 변경되었다.

1936년 1월 17일,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는 군민대표회를 폐지하고 새로운 입법기관인 의사원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고이허는 의사원을 구성할 12명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중앙집행위원회는 폐지되었고, 대신 영도자인 총령과 각 부장으로 구성된 중앙행정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군정부·민사부·재정부·법무부·외교부·교육부를 폐지하고, 대신 총령의 지도아래 군사부(총사령부)·정치부·참모부만을 두기로 했다. 고이허는 이중 정치부장을 맡았다.

2.4. 최후

1936년 가을, 일제는 만주 일대의 독립 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혁명군이 활동하고 있떤 동변도 일대 지역에 대한 탄압이 거셌다. 이에 조선혁명군정부의 주요기관과 간부들은 관전현 보달원으로 옮겨 투쟁을 지속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이허는 1936년 12월 경 호위대원 6명과 함께 보달원으로 갔다가 보달원 서건구자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전향을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1937년 2월 17일 선양시의 봉천성 밖 동릉에서 총살되었다. 향년 35세.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이허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1920년대 중반 남만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참의부와 정의부, 북민부에서 활동하던 신민부를 통합하여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자 조직된 단체. 그러나 3부 통일 운동은 각 단체간 이해관계 문제로 인해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