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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2년 5월 19일 |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 (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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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4년 7월 2일 |
중화민국 봉천성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2] | |
본관 | 평산 신씨[3] |
호 | 동천(東天, 東川) |
학력 | 육군무관학교 (졸업)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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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2. 생애
1882년 5월 19일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서 한성부판윤을 지낸 신석희(申奭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지낸 명문가로서 방어사(防禦使)를 지낸 5대조 신대준(申大儁)를 시작으로 고조부 신홍주(申鴻周) 훈련대장, 증조부 신의직(申義直) 부사, 부친 신석희를 비롯하여 특히 조부인 신헌은 병조판서를 지내고 강화도조약 때 조선 측 협상대표로 나오기도 하였다.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2기로 졸업하고 1903에 육군 참위(오늘날의 소위)로 임관한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복무가 더 이상 의미없어진 신팔균은 그해 8월 부친의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군 이곡면(현 이월면) 노원리[4]로 내려가 이월청년학교(梨月靑年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고 항일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또 이때부터 각지에 있는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하며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전환하였으며, 1909년에 대동청년당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1910년에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에는 만주로 이동한다.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 및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1922년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한단 등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가 설립되고 신팔균은 직할부대 '대한통의부 의용군'의 사령관과 군사위원장을 맡는다.
대한통의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여 면사무소와 경찰대를 습격하는 작전을 수차례 수행했다. 당시 일제는 중국을 압박하여 독립군들을 대신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중국은 독립군을 잡는데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잡는 시늉을 일부러 내서 독립군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만주의 마적단을 매수하여 독립군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신팔균도 1924년 7월 2일 독립군의 훈련지인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興京縣 旺淸門 二道溝) 밀림 속에서 무관학교 생도와 독립군의 합동군사훈련 중, 중국인 마적단의 기습 공격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일본과 끝까지 싸우지 못한 것을 분통해했다고 한다.
3. 기타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독립에 투신하자는 결의를 맺었고, 이들은 남만삼천으로 불린다. 신팔균은 여기서 '동천'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부인 임수명(任壽命)은 남편을 도와 군자금 조달 등의 역살을 했으나 신팔균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자결한다. 사후 신팔균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임수명에게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4. 비극적인 가족사
신팔균이 전사할 당시 부인 임수명은 만삭의 몸으로 베이징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사소식을 알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염려한 주변 동료들에 의해 경성 친정으로 귀국해 셋방살이를 하게 된다.이때 유복녀 계영 출생.
부부 사이엔 장남 현충, 차남 현택, 삼남 현길을 슬하에 두었으며
뒤늦게 전사소식을 들은 임수명은 그 슬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차남인
현택을 병으로 잃고 만다.
결국, 삶의 희망을 잃은 그녀는 갓난아기인 딸 계영과 함께 음독자살로
남편의 뒤를 따른다. 향년 30세.
임수명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남 현충도 세상을 떠나
남아있는 후손은 삼남 현길의 자녀가 유일하다.
신헌 - 익희 - 팔균 - 현길 - 지영
5.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76~7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