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강릉 함씨[1] |
출생 | 1890년 8월 19일[2] |
평안도
용천도호부 미라면 원성동[3] (현 평안북도 염주군 다사노동자구) |
|
사망 | 1929년 9월 3일[4] (향년 39세) |
중화민국 | |
경력 | 대한청년단연합회 편집부장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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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함덕용 전 상공부 차관의 작은아버지이며, 사상가 함석헌의 10촌 형이기도 하다.2. 생애
1890년 8월 19일 평안도 용천도호부 미라면 원성동(현 평안북도 염주군 다사노동자구)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함일형[5]과 어머니 남평 문씨(1859. 8. 11 ~ ?)[6]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일본에서 유학한 뒤 귀국하여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평안도 지방 학생운동의 총책임자가 되어 평양 각 학교 교사 및 학생을 규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1 운동이 진압되자, 곧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관전현(寬甸縣)[7] 노학구(溝)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애국사상의 고취, 독립운동의 선전, 청년단결에 주력하였다.
1920년 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燦星)·김승만(金承萬) 등이 주동이 되어 각지에 산재한 청년단체를 규합,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여 편집부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발간에 진력하는 한편, 동지들과 함께 밀정 노릇을 하는 자들을 숙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해 5월 3일 만주 주둔 일본군 헌병대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의 근거지인 관전현 홍통구(弘通溝)[8]를 습격했고, 함석은은 이때 피습을 받아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 뒤 5월 16일 총살형이 집행되어 야산에 버려졌으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인근에 살던 중국인이 그를 발견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숨어살면서 치료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 뒤 관전현 홍통구 장학승의 집에 기거하다가 봉천성 안동현[9]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무기 구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시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강제송환되었고, 1921년 5월 9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금고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3년 10월 20일 가출옥한 후에는 다시 만주로 돌아가 활동하려고 했으나, 이전에 입은 총상 및 옥중에서 얻은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929년 9월 3일 별세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3.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독립유공자공훈록』4(국가보훈처, 198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동원군파 53세 석(錫) 항렬.(
족보)
[2]
1921년 판결문과 함씨대동보 권4 1015쪽 참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8월 29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강릉 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함석헌·
함일형도 이 마을 출신이다.
[4]
함씨대동보 권4 1015쪽에는 1928년 3월 27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5]
족보명 함익상(咸杙祥).
[6]
문종상(文宗祥)의 딸이다.
[7]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8]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 훙퉁거우(紅桶溝).
[9]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