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학자에 대한 내용은 조동호(1956)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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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유정(榴亭) |
본관 | 풍양 조씨[1] |
출생 | 1892년 9월 24일 (음력 8월 4일) |
충청도 청산현 현내면 백운리 (현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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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4년 9월 11일 (향년 61세) |
경기도 수원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
학력 |
한학 수학 경성측량학교 (졸업) 금릉대학(金陵大學)[2]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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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5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공식 홈페이지로는 유정 조동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있다.
조동우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에서 '복 호(祜)'자를 글자로 사용하지 않고 고어(古語)로 취급하고 祐(우)를 사용했기 때문. 이에 더해 독립운동사 연구를 일본 문헌에 의존하다 보니 근래까지 이름을 "조동우"라고 표기했다고 한다. 사실은 조동호가 맞다.[3]
2. 생애 및 활동
189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1908년 측량학교에 입학하고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여운형과 연을 맺고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 이만규의 집에서 여운형, 이만규와 함께 우애를 다짐하였다.[4] 1914년 조동호는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난징의 금릉대학 중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1912년 신규식이 결성한 동제사에 참여하여 여운형, 신석우 등과 함께 이사를 맡아 활동하였다. 1918년 8월에는 상하이에서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한진교, 김철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형과 함께 작성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임시사료조사편찬부에서 위원으로 활동해 이광수, 이원익, 김병조 등과 '한일관계사료집' 4권을 편찬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출처]
1921년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한중협력과 협조, 경제·산업·교육 방면에 대한 원조를 목적으로 한중호조사가 조직되자 한국측 대표로 참석해 조중구, 오희원 등과 교제과의 간사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의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회계검사를 맡았고 1923년 말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 기자 겸 논설위원괴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가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당의 강령과 규약의 작성에 기여하였다. 코민테른으로부터 당에 대한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에 대표로 파견되었고,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4년간 수감되었다.[출처]
1933년 출소 후 조선중앙일보에서 무기명으로 항일독립을 고취하는 논설을 집필하고 개제하며 민족독립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1944년 여운형 등과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내무부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1945년에는 이석구 등과 함께 무장투쟁을 위해 군사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 해 7월 24일 부민관 폭탄의거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광복되면서 출옥하게 되었다.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선전부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이어서 여운형이 창당한 근로인민당에도 참여하였다.[출처]
여운형 암살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하여[8] 큰누나의 집에 살면서 종종 신문에 사설을 기고 하였으며 [9],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54년 9월 11일,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63세. 여담으로, 그는 여운형처럼 사회주의자였으나 독실한 기독교(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3. 기타
- 키가 6척(200cm)으로 지금 기준으로도 거인 수준인 거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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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후에 독립신문에 이런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요새 매일 아침마다 집 앞의 전봇대에 태극기와 독립만세 4글자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 두 길이나 높이 붙여서 그것을 올라가 떼느라고 고생이 막심한 순사가 혼자 말로 “제길할 놈들 만세나 부를 것이지. 이것은 왜 붙여 사람을 고생시키는 거야...” 둘러서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파출소에 잡혀가서는 하는 말이 “순사가 부르라고 하기에 불렀오.” 라고 했다더라.
- 독립신문 1919년 10월 11일 19호 <哭中笑(곡중소)>에서.
- 선생의 장남 조윤구 선생이 블로그 활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 현재는 작고하신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