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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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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1절까지
D[dday(2025-03-01)]
3·1절
三一節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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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사진
파일:attachment/31-2.jpg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하는 모습
<colbgcolor=#0047a0><colcolor=#fff> 날짜 <colcolor=#000,#ddd> 3월 1일 ([dday(1919-03-01)]일, [age(1919-03-01)]주년)
지위 국경일, 법정 공휴일
근거 법령 「국경일에 관한 법률」제2조 제1항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제2조 제2항

1. 개요2. 의의3. 요일4. 연휴5. 역사
5.1. 20세기5.2. 21세기, 100주년 기념식
6. 북한에서7. 일본에서8. 관련 어록9. 노래10. 역대 경축식장11. 기타
11.1. 대통령 기념사11.2. 폭주족11.3. 신조어11.4. 학교에서11.5. 삼일절과 눈(雪)11.6. 스포츠 관련
11.6.1. 축구 관련11.6.2. 야구 관련11.6.3. 배구·농구 관련
11.7. 그 외
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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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일절(,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은 대한민국 국경일[2],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 음력 1월 29일 토요일) 당시 한반도의 민중들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 항거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다.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매년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지정하여 국경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3] 당시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 제1호를 통해 3월 1일을 '대한민국이 부활한 성스러운 날(성일, 聖日)'로 규정하고 축하할 것을 주창했다. # 해방 이후인 1946년에는 미군정 군정 법률 제2호를 통해 '국가경축일'로 지정되었으며[4],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통해 계승되었다.

2. 의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 中
이 사건 친일재산조항은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제에 저항한 3·1 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친일반민족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친일재산으로 규정하여 국가에 귀속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서, 입법목적의 정당성 및 수단의 적합성이 인정된다.
2017헌바88,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2호 등 위헌소원 中

1948년 제헌 이래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에서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친일재산귀속법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리면서 그 사유로 3.1 운동의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함이라고 판시한 데서 알 수 있듯, 3.1 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건국 정신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

특히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민주공화국의 체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됐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의 헌장과 강령, 헌법 등이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통해 계승되어 오늘날 헌정의 뿌리가 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출발일로서 국가가 축하하는 것이다.[5]

광복절 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삼일절과도 관련이 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민주주의 제도의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과거 독립운동가들의 인식을 문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기뻐하세 오늘 우리 민국기원절 / 이천만 동포들이여 경축하세
우리들의 새 생명을 되찾은 날 /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경축하세
경축하세 경축하세 / 우리 개국기원절 경축하세
경축하세 경축하세 / 우리 대한민국 기원절이라네[6]
1920년 삼일절 제1주년 기념 노래 〈기원절 경축가〉[7] #
3월 1일! 배달족에게 새 생명, 새 활력을 부어준 이날은 우리의 피와 같이 영원히 살아 있으리로다. 2천만 민중이 개선의 노래를 부르기까지 피싸움이 끊일 줄이 있으랴!
대한의 남녀야! 이날을 기뻐하여 만세를 부르라. 날뛰며 노래하여 기리라![8]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배달공론〉 1924년 3.1절 특집호 中 #
오늘 3월 1일은 즉 우리 민족적 역사의 영광스러운 날이라. 우리 민족이 저 원수 일본에게 합병의 수치를 당한 이후 근 10년만에 그 기반을 벗어나려고 저 33현들이 우리 전체 민족을 대표하여 거금 5년 전, 즉 건국 4252년, 1919년 3월 1일에 독립 선언하였도다.

그러면 이날은 곧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이라. 미국의 7월 4일 프랑스 7월 14일과 같은 역사적 국경일이라. 우리가 비록 독립선언 이후 만 4주년에 아직 척촌의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지만은 이 독립선언으로 인하여 우리 독립의 기초를 세운 즉, 우리의 성공할 날은 오직 시기 문제였을 뿐이다.

7월 4일이 있은 뒤에 8년의 혈전이 있었고, 8년의 혈전이 있은 뒤에 미국의 독립이 있었음, 7월 14일이 있은 다음에 제1, 제2, 제3차의 혁명이 있은 다음에 프랑스의 민주국이 성립되었도다. 이러한 역사들이 자재한 즉, 우리의 3월 1일이 있는 이상에는 우리도 저들과 같이 혈전을 계속하며, 혁명을 주장하여 저 원수인 일본을 대항하면 우리의 독립 성공도 결코 멀지 않을 지로다.
1923년 3월 1일 미주 한인신문 신한민보 삼일절의 감상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정신은 어디서나 한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건설하는 민주국은 탄생한 지 아직 1년이 못되었으나 사실은 30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1949년 삼일절 제30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연설
친애하는 의원님, 올해 3월 1일, 전 세계의 우리 한국인들은 한국 독립 선언 대한민국 수립, 임시정부 창립 24주년 기념일을 축하했습니다.[9]
1943년 삼일절 24주년에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에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 #

이처럼 삼일절은 독립운동가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날이면서 대한민국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공공기관에서마저 삼일절을 "순국선열을 추도,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는 날"이라며 잘못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해당 문장은 두산백과의 구 삼일절 문서에 기술되어 있었으나, 2021년을 기점으로 정정됐다. 두산백과 삼일절 문서 다만 개정 이전의 잘못 소개된 문장이 여전히 널리 알려져 있다.

3. 요일

400년 동안 삼일절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각각 58번씩 오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57번, 월요일 수요일에는 56번이 온다. 삼일절이 주말인 경우는 400년 동안 115번, 연휴가 되는 경우는 400년 동안 113번이다.

4. 연휴

연도별 삼일절 연휴는 다음과 같다.

5. 역사

5.1. 20세기

삼일절 며칠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빈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고 잡혀갈 예정이었으므로, 백업 요원으로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다만 여기에는 14인설과 16인설도 있으며 정노식을 제외하느냐, 김세환을 추가하느냐에 따라서 나뉜다. 결과적으로 실제 시위를 이끈 15인을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이 중 서너 명은 훗날 친일로 변절하게 되지만, 나머지 인원은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구체적으로 33인 중 3인인 박희도, 정춘수, 최린이 변절한 사람들이고, 48인 중에서는 최남선이 포함되어 4인이 된다. 이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서다.

삼일절의 역사는 독립 선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다.

1920년 2월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령 1호를 통해 3.1 독립 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발족하고 성대한 식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3월 1일 당일 상하이시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태극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정부 차원의 경축식은 오전 10시에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파일:최초의 삼일절 경축식.jpg
당일 오후 2시에는 대한교민단이 주최하는 삼일절 축하회가 성대히 열려 여운형 교민단장의 연설과 이동휘, 안창호의 축사, 중국 남녀 학생들의 축하무를 아우르며 오후 4시 반 기념 행사가 끝이 났다. 이와 동시에 한인들은 상하이 시가지에서 일본총영사관 앞까지 태극기를 들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대한민국 2년(1920) 당시 발행된 임시정부의 관보인 독립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삼월 일일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한 삼월 일일,
이천만 대한인은 간 곳마다 있는 곳마다,
천년 후 만년 후까지 자자손손히 열성과 환희로써 지켜 축하할 삼월 일일
대한의 자녀들은 어떻게 이날을 지켰는가.
삼월일일 오전 육시경부터 상해시내의 한인의 주가에는 부활한 태극국기가 날기 시작하엿다. 바로 밤새기를 기다리기가 어려웠던 것 갓다 명덕리 보강리 급로비로 일대에는 여긔져긔 태극기가 날닌다. 혹 개인으로 한인의 이층을 빌어잇는 이들도 다 국기를 달아 이날을 경축하엿다. 아마 법계 일대만 하여도 사오십은 된 것이니 상해시내에 이러케 대한의 국기가 날닌 것은 금차가 처음이다.

이날에 비로소 세계 각국인이 모혀 사는 상해 한복판에서 우리는 대한인이다 하는 표를 보엿다. 매일요와 경절에 영법미의 국기가 호호에 날닐 때에 우리는 얼마나 그를 부러워하엿던고. 동포들은 아해들까지도 수일전부터 이 신성한 국경일의 준비를 하야 작일에 지하야 아조 명절기분이 되엿섯다. 날은 흐럿스나 중춘일기에 그러치 아나도 심신이 자못 상쾌하거늘 문전가두에 빗나는 태극기가 경풍에 편편함을 볼 때에 대한인의 감격이야 얼마나 하엿스랴.

아직 촌척도 회복치못한 고강, 차금 옥중에 게신 형제와 자매 모다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듯 하지마는 천만대에 기념할 우리 민족의 부활일인 오늘 하로를 무한히 깃부게 축하하자, 놀자.
파일:1920년 3.1절 경축 다뉴바 시 시가행진.jpg

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와 국내 주요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쿠바, 심지어는 일본 등 각국의 도시에서도 치러졌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시에서 300인의 한인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단 차량과 간호복을 입은 여성,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부대가 시가행진을 벌였다. 해외에서의 삼일절 행사는 강당이나 운동장, 교회 등을 빌려 여는 경축대회와 태극기와 깃발, 전단을 휘날리는 기습 시위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중국과 미주, 연해주에서, 후자는 주로 일본 유학생들이 자주 행하던 방식이었다.

상해에서 치러졌던 삼일절 경축식의 경우, 올림픽대극장이나 침례교당 등지를 빌려 만국기와 태극기로 장식을 하고 군악대를 초청하여 독립군가와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서 치러졌다. 식전이 끝난 뒤에는 차량을 빌려 태극기와 독립기[10]를 달고 악대를 앞세워 일본 영사관까지 가두행진을 하거나 축하연회, 기념연극 등을 베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대만, 필리핀, 인도, 베트남, 몽골 등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족 독립운동 대표단이 식전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반제국주의 연대를 확인하기도 했다.[11]

상해 이외의 지역의 경우, 쿠바에서는 대포를 빌려 삼일절 식전 전에 21발의 예포를 쏘기도 했고, 1942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한인들의 군사 조직인 한인경비대가 이 날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파일:대한민국 24년 3월 1일 미국 가주 한인예비군 열병식.jpg
한인경비대의 삼일절 경축 열병식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1920년부터 사용되었으나,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명칭은 독립선언기념일이었으며, 때때로 독립기념일, 국경일로 불리었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Fourth of July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1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20년부터 공휴일로 삼았다. #

한편 임시정부 시기 독립운동가들과 해외 교포들은 삼일절대한민국 건국기념일로 인식하였는데, 1920년 포암 장병준 선생이 국내에 잠입해서 살포한 전단 〈대한독립1주년축하경고문〉에 3월 1일이 건국의 기념일로 언급되어 있었으며 이 날을 대한의 자유독립을 선언한 이래 1주년 되는 첫 생일로 민족이 영원히 기념할 축일로 명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

이외에도 미주 지역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The New Korea)〉의 경우 삼일절을 Korean Independence Day로, 기념의 대상을 3.1 운동 대한민국 수립으로 언급한 바 있으며[13], 1943년 주미외교위원부가 미국 상원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3월 1일에 세계의 한국인들이 한국 독립선언 대한민국 수립, 임시정부 창립을 기념했다는 내용이 담겨 삼일절이 당대 한인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간주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

윤봉길 의사의 천장절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피난을 함에 따라 성대한 식전은 치르기 어려워졌으나 간소하게나마 경축식을 이어나갔고, 중국 측 언론에서도 삼일절을 한국 혁명기념일로 표현하는 등 명실상부한 한인의 국경일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14]
파일:해방 이후 최초의 3.1국경 기념시.jpg
1946년 3·1절 경축식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주의원에서 3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하였으며,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1946년 3월 1일은 전국 각 지역에서도 3.1 운동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기념하는 삼일절로서 성대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가령 부산부에서는 시가지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 있는 구덕운동장에서[15] 수천명의 인원이 태극기를 들고 완전한 독립을 외치며 부산역까지 걸어서 시가행진하였다.

다만 광복 직후 삼일절은 좌우익 대립의 장으로 대두되고는 했는데, 국가 건설의 정통성을 3.1 운동에 두려는 좌파 우파가 서로 대결함에 따라 경축식이 개별적으로 열리는 것은 물론 상호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체로 1946년 삼일절은 모두가 같이 기념했지만 1947년 삼일절은 좌익과 우익이 따로 준비해 개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만큼 삼일절 행사장은 좌우익 대결의 장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1947년 제주도에 있었던 삼일절 기념행사 때 있었던 발포사건은 제주 4.3 사건이라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제주처럼 크게 번지진 않았지만 부산에서도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좌익세력 주도의 기념행사에서 분위기 격화 끝에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때문에 1940년대 당시 3월 1일이 다가오면 전국의 경찰들은 신경을 곤두섰다고. 다만 삼일절 경축 공연이 곳곳에서 열리는 등 축하 행사도 함께 이루어져 문화 생활에 갈증을 느끼던 당시 민초들의 욕구를 충족해 주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된 후 삼일절은 4대절에 포함되었으며, 대한민국 건립의 시원이 된 최대의 국경일로 간주되었다.
오늘은 3월 1일! 우리 겨레 삼천만의 최대 국경일인 삼일절이다. … 이날에는 명실상부하게 거족적인 국경일로 남북의 삼천만이 다같이 한마음 한뜻으로써 즐겁게 노래하고 힘껏 뛰놀며 이날을 경축하자. 이것이 최대 국경일인 오늘을 맞이하여 최대의 축원(祝願)이며 최고의 이상이다.
1949년 3월 1일 동아일보 사설 中 #
은빛 나래를 번뜩이며 저공비행을 하는 편대기와 부딪힐 것만 같은 기념탑, 빌딩 문 앞에는 화려한 기념장식 독립문을 본떠 만든 모형이며, 그 밖에 오색 조화로 장식된 꽃전차가 네거리를 휘돌아간 후 기념식전에 참석하였던 군중들의 장쾌한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우렁찬 행진곡을 연주하는 브라스 밴드가 지나가면 가장 행렬과 어울린 농악대가 멋들어진 날라리 소리로 길 양 옆의 군중들의 어깨춤을 유발시킨다. 인파 인파 인파… 온 장안은 경축일색으로 물들고 시민들은 오는 해의 이 날에는 반드시 남북의 동포가 서로 손을 맞잡고 정말 즐거운 축제를 지내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가슴마다 간직하는 것이었다.
1950년 3월 3일 동아일보, 〈휘날리는 감격의 태극기〉 #
오늘은 역사적 항쟁의 민족적 기념일이며 국가적으로 최대의 경절일(慶節日)입니다. 역사적 전통과 민족적 긍지와 강인한 독립운동 정신으로 독자 여러분과 같이 이날을 기념하고 또 경축하고자, 연중무휴인 본사에서도 하루를 쉬기로 하였읍니다.
1950년 3월 1일 동아일보 사고(社告) #
파일:3.1절 시가행진 (1958).jpg
1958년 3월 1일 열린 제39주년 삼일절 경축 가장행렬

1950년대까지 삼일절에는 명절처럼 상점들이 일제 철시하고 국기를 내걸었으며, 음악회, 학예회, 시열식, 시가행진, 봉화제 등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삼일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사실상 남게 되었으며, 최대 국경일의 위치도 광복절에 내주게 되었다.[16]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동안에는 국무총리가 축하연설을 대독할 정도로 천시당했으며, 이 때부터 삼일절 경축사가 사실상 정부 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1999년 삼일절 80주년 이후로는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여 만세행진 재현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사학계에서 이를 두고 삼일절을 잘못 기리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 SBS 뉴스) 3.1 운동의 본질은 민족공동체의 본질적 주권(real sovereignty)를 바탕으로 자주독립을 선포한 것이고, 만세시위는 그러한 독립선언식을 축하하기 위한 요식 행위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세 운동을 한 것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5.2. 21세기, 100주년 기념식

파일: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로고.svg
파일: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엠블럼.svg
위원회 상징 이미지 브랜드 상징 이미지
2019년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민간에서는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설립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서울시에서도 자체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중앙 정부 차원의 위원회는 2018년 7월 3일 발족되었으며, 현재 중앙경축식을 비롯하여 문화축제, 아리랑대축제, 독립의 횃불 봉송 등 다채로운 기념 행사를 준비 중에 있다. 대통령 직속 3.1절 100주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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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국 각지에서 행사가 개최됐다. 그 중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인근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으며 문재인 대통령과 각부 장관, 각계 인사와 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하였다. 국민대표 33인의 행진과 독립선언문 낭독, 독립유공자 포상이 진행되었고, 독립유공자 334명에 대한 포상에서는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정오에는 전국에서 동시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종과 만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타종 행사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씨와 유관순 열사의 조카 유장부 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 12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광장 일대에서는 만세 행진과 공연이 이어졌고, 시민 3,000명이 참여한 대합창 행사도 열렸다.

6. 북한에서

북한에서는 남한의 경축일과 같은 의미인 명절이 아니며 공휴일도 아니다. 북한에서도 3.1 운동을 기념하지만, 다른 국경일에 밀려 공휴일은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론의 단순도식적 해석은 차치하더라도, 민족대표 33인이 중상계급 이상의 부르주아지이자 종교인이라는 점, 그리고 김일성이 지나치리 만큼 게릴라 항일무장투쟁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들의 인공기가 아닌 절대적으로 금역으로 지정한 태극기를 들고 일어났다는 점도 있어서 남한과는 달리 특별히 기념하지 않는다.

7. 일본에서

도쿄에 있는 재일민단 등 단체에서는 매년 3월 1일이 되면 3.1절 기념식을 개최하며 도쿄에 있는 주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도 3.1절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의외로 매년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3.1절 기념사 등을 통해서 일본 본국에 대해서 언급을 하기에 일본 언론들은 이날만큼은 한국 상황을 주시하면서 기사를 써낸다. 3.1 운동 때 일제가 독립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조선 양민과 만세 참가자들을 학살하였던 전적이 있고 한국 대통령들이 일본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등의 언급을 하기에 이 대목을 중심으로 기사화 한다.

하지만 2023년 3.1절은 윤석열 대통령이 기념사를 통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강조하는 대신 역대 대통령들이 해왔던 일본의 반성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서 일본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8. 관련 어록

아! 경사로다! 건국의 기념일이여!
반도강산 이천만 민족의 생명은 이 날부터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날이 다시 돌아오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지 않을 수 없다.
굽히지 않는 열성과 꺾이지 않는 충정으로 원수의 엄혹한 단속에도 굴하지 않고 찬란하고 위대한 활동을 위하여 축하해야 할 것이다.
아는가? 3월 1일이 무슨 날인지?[17]
1920년 2월 27일 혈성단(血誠團) 3.1절 축하 공고문 #
삼일절! 이 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니 진실로 상제가 허하신 날이오.
이 날은 한두 개인이 작정한 것이 아니오. 2천만이 하였고 다만 소리로만 한 것이 아니오. 순결한 남녀의 혈로 작정한 신성한 날이오.
안창호, 1920년 삼일절 제1주년 축사에서 #
3.1 운동은 3천 년간 이어진 봉건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국가 건립의 개시를 알리는 운동이었다. 3.1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식민통치를 뒤엎고 대한민국의 건립을 알리는 운동이었다.
독립운동가 조소앙, 1942년 3.1절 제23주년 기념식에서 #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18]
기미독립선언서

9. 노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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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경일 및 추념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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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aaa
삼일절 노래 (작사 정인보 작곡 박태현)
현충일 노래 (작사 조지훈 작곡 임원식)
제헌절 노래 (작사 정인보 작곡 박태준)
광복절 노래 (작사 정인보 작곡 윤용하)
개천절 노래 (작사 정인보 작곡 김성태)
한글날 노래 (작사 최현배 작곡 박태현) }}}}}}}}}}}}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19]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20]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삼일절 노래'

10. 역대 경축식장

11. 기타

11.1. 대통령 기념사

11.2. 폭주족

11.3. 신조어

11.4. 학교에서

11.5. 삼일절과 눈(雪)

11.6. 스포츠 관련

11.6.1. 축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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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 야구 관련

11.6.3. 배구·농구 관련

11.7. 그 외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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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삼일절
독립선언서 }}}}}}}}}


[1] 현행 대한민국의 삼일절 공식 영문 표기는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이다. 단, 임시정부 시기 3·1절은 영어로 Korean Independence Day로 표기되었다.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 해외에서도 독립 선언일을 독립 기념일(Independence Day)이라고 칭하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 독립기념일. 멕시코와 브라질, 필리핀, 베트남 등도 우리와 비슷하다. 주한미국대사관에서는 Independence Movement Day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은 "독립"보다는 "해방"에 가깝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에 큰 영향을 끼친 삼일절을 보다 진정한 의미의 독립기념일로 볼 수 있다. [2] 따라서 태극기를 게양할 때, 광복절과 마찬가지로 깃봉 사이를 떼지 않고 달아야 한다. [3] 3.1절이라는 명칭도 독립선언일과 함께 혼용됐다. [4] 경축일 공포의 관한 건 [5] 정부 수립 이후 삼일절의 국경일 제정 의도는 대한민국의 기원(紀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광복 이후 통일국가수립운동과 국가상징의 제정과정 — 김혜수) [6] 한국어 원문은 전해지지 않으나 일본 외무성의 〈불령단관계잡건〉에서 일역문으로 기록되었으며, 본 문서에서는 정숭교 교수가 현대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버전을 인용하였다. 일역문: 喜フヘシ今日我民國紀元節 / 二千萬ノ同胞等ヨ慶祝スヘシ / 我等ノ新生命ヲ回得セシ日 / 一心合力シ慶祝スヘシ / 慶祝スヘシ慶祝スヘシ / 我開國紀元節慶祝スヘシ / 慶祝スヘシ慶祝スヘシ / 我大韓民國紀元節ナリ [7] 개국기원절은 대한제국 시기 조선왕조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었다. 삼일절을 기원절로 명칭한 것은 삼일절을 건국기념일로 바라본 당대 독립운동가들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다. [8] 원문: '3월(三月) 1일(一日)'! 배달족(倍達族)의게 신생명(新生命) 신활력(新活力)을 부워준 이날은 우리의 '피'와 갓히 영원(永遠)히 사라이스리로다. 2천만(二千萬) 대중(大衆)이여 개가(凱歌)를 부르기ᄭᅡ지 '피' 싸홈이 ᄭᅳᆺ닐 줄이 잇스랴! 대한(大韓)의 남녀(男女)야! 이날을 깁버하야 만세(萬歲)를 부르라. 날ᄯᅱ며 노래하야 기르라. [9] 원문: My dear Hon. or Senator, On March 1st this year we, the Koreans every where are commemorating the 24th anniversary of the declaration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forma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which has been functioning in exile and now in Chungking, China. [10] 대한 독립 만세 따위의 글귀를 새긴 흰 깃발을 말한다. [11]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3·1절 기념과 3·1운동 인식 — 윤대원 [12] 근데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 수립 이후 별칭으로 사용됐던 삼일절이란 명칭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광복 직후 1947년 기사에 삼일절을 독립기념일로 부른 적이 있으며, 삼일절 40주년인 1959년에도 이 날을 독립기념일이라 부른 기록이 남아 있다. [1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4]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3.1 운동은 3.1 혁명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3.1 운동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띈 것은 사실이나, 단순 독립운동을 넘어 민주자유를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기원절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은 제헌 헌법 전문에도 반영될 예정이었으나 한국민주당에서 딴지를 거는 바람에 3.1 운동으로 명칭이 바뀌어 헌법에 실리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3.1 운동 문서 참조. [15] 같은 장소에서 6월 10일에는 6.10 만세 운동 기념 대회가, 8월 15일에는 광복 기념 대회가 거행되었다. 1946년은 광복 이후, 모든 독립 관련 기념일을 제대로 챙길 수 있는 첫 해였으므로 행사 참여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16] 다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축 예술제나 불꽃놀이 등 일부 경축행사는 간간히 이어졌다. 삼일절이 사실상 천시된 것은 10월 유신 이후의 일이다. [17] 한국어 원문은 전해지지 않으나 일본 외무성의 〈불령단관계잡건〉에서 일역문으로 기록되었으며, 본 문서에서는 정숭교 교수가 현대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버전을 인용하였다. 일역문: 嗚呼御目出度フ…建國ノ記念日ヨ…半島江山二千萬民族ノ生命ハ此ノ日ヨリ復活シタリ。待チニ待チタル此ノ日復タ廻リ來レルヲ以テ舞踏ニテモ爲ササルヘカラス。强努不屈ノ熱誠ト百折不撓ノ衷情ヲ以テ仇讐ノ嚴酷ナル取締ニモ屈セス大光明大活動ヲ爲シ祝賀セラルヘシ。知ルヤ三月一日ハ何日カ。 [18] 원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19] 사실 이 구절은 재현 오류에 해당한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당시의 한반도 인구는 2천만 명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 '선열아'의 오타가 아니다. '하'는 '~이시여'라는 뜻의 옛말이다. 용비어천가의 '님금하 아ᄅᆞ쇼셔(임금이시여 알아주소서)'나 정읍사의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달님이시여, 높이 돋으시어)'를 생각해보면 될 듯하다. 다만 현대에는 안 쓰는 표현이라 '선열아'라고 가사를 표기한 경우도 많이 보이는데, 이렇게 부르면 안 된다. [21]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근처로, 본디 서대문구의회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도로명주소상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79-24(현저동). 임정 기념관 홈페이지 서대문구의회는 2017년 임정기념관 건축이 결정됨에 따라, 서대문구청 근처의 서대문구 평생학습관 건물로 이전했다. 새 서대문구의회 건물은 도로명주소상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36길 49(연희동). [22] 제헌절 국회의장이 기념사를 하고 다른 국경일보다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개천절 한글날 국무총리가 기념사를 한다. 국경일은 아니지만 국가추도일인 현충일은 대통령이 추념사를 한다. [23] 2월 25일 취임 후 4일 뒤가 삼일절이었다. [24] 제19대 대통령 선거 궐위에 의한 선거라서 당선 직후 취임하였기 때문에 5월 9일에 치러졌고 이후 선거는 취임 2개월 전인 3월 초에 치러서 5월 초에 취임식을 하게 된다. 정확히는 선거일이 공휴일을 피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3월 3~9일이 선거일이 된다. 첫 번째 사례인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2022년 3월 9일에 치러졌다. [25] 새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연단에 등장하는 정부 주관 국가기념일 행사는 5.18 민주화운동기념일 또는 현충일이 됐다. [26] 대부분은 일제의 고문과 수사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고 3.1운동 당시 왕성하게 활동했던 애국지사들도 대부분 1990년대에 세상을 떠났다. [27] 4일일 경우는 삼일절이 금요일일 경우이다. 주5일제 이전에는 3월 2일이 개교기념일인 경우에만 3월 4일까지 밀렸다. [28] 대체 휴일 제도가 확대되어, 2025년을 시작으로 삼일절이 토요일이어도 3월 4일로 첫 등교일이 밀릴 예정이다. [29] 이 때문에 이 날은 3.1절도 3.1절이지만 학생들에게 방학이 거의 끝나가는 날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30] 단, 2020학년도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인해 4월 9일 중3과 고3을 시작으로 온라인 개학을 했으며 5월 20일부터 고3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등교하기 시작했다. [31] 이 글은 사용자 지정으로 대한민국 지역에 사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글. 즉, 외국에서는 못 보는 글이다. [32] 재밌게도 이 날 울산 HD FC 일본인 용병 에사카 아타루가 개막전 골을 터트렸다. [33] 독립선언문에서는 '조선의 독립'으로 표기하고 있다. [34] 3·1절 광화문에 성조기 물결, "文대통령 퇴진" 요구 [35] [발칙한 뉴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 삼일절에 일장기까지 들었다? [36] 가장 최근에 삼일절과 정월대보름이 겹친 해는 1991년이었고 앞으로는 2037년에 찾아온다. 이런 경우는 평년인 경우 설날이 2월 15일, 윤년인 경우 설날이 2월 16일인 해이다. [37] 2020년의 경우 시작 요일은 2014년과 같았으나 3.1절 이후 달력이 2015년과 일치한다. 따라서 2020년 달력을 보면 2015년이랑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8] 본인들을 "한국 태생의 일본 국적인"이라고 주장했으나, 입주민 카드에는 한국인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