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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8 12:11:59

근로인민당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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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근로인민당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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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
조선로동당
(개별 합류)
남조선로동당
(개별 합류)

1. 개요2. 구성과 활동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勤勞人民黨

약칭으로 근민당이라고도 한다.

2. 구성과 활동

여운형이 1946년 12월에 정계은퇴선언과 동시에 남로당을 탈당하고 난 이후 2차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여운형은 남부지방을 순회하면서 연설을 하였고 정치동향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과거 조선인민당의 절반 정도가 남로당에 들어갔지만 아직 10만여 명의 지지자가 있다고 보고 이를 기반으로 1947년 4월 26일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1]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으로는 장건상[2], 백남운, 이영이었으며, 사무국장은 문갑송이었다. 총 중앙위원 61명과 후보중앙위원 11명, 중앙감찰위원 12명, 이들 중 상임위원 31명을 두었다.
김일성은 백남운에게 사로당에서 탈당한 뒤 남로당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재집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백남운과 공산당 대회파 출신의 이영, 나아가 장건상같은 중도세력까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에게 사회노동당을 완전히 해체한 바탕 위에서 몽양이 나서서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북로당은 여운형에게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 가운데 종파분자들을 새 당의 중앙간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당 강령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민당•신민당 강령의 수준이면 될 것 같다는 의견교환도 있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특히 몽양에게 사로당의 공식 해체과정을 밟는데 힘써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몽양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였다.
여운형은 사로당 출신들 가운데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2월 26일에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인민당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북로당이 개입하게 됐던 것이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26~236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대구부 달성공원에서 여운형의 연설이 있었을 때 달성공원이 꽉 찼고, 연설을 듣고 감흥을 받아 근민당에 가입한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직접 겪은 사람의 증언

그러다가 당수 여운형이 7월 19일, 창당 세 달도 안 되어 암살당했다. 게다가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에서 가장 구심점과도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라 좌우합작운동은 여운형 암살 이후 진전이 없어지게 되어 결국 12월 말에 해체된다.

여운형 암살 이후에는 수석부위원장 직위를 두는 등 조직 정비를 거쳐 장건상이 당수(수석부위원장)가 됐다.

장건상이 남북협상에서 근민당 당수 자격으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할 때 당원 일부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예 북한에 잔류하면서 몰락하였다.[3] 서울의 당조직은 장건상이 이끌었으며, 5.10 총선거에 반대하여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노선을 유지했다. 북한에 잔류한 이들은 1948년 10월 17일 비상대표회의를 열어 독자적인 17개 강령초안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이영, 부위원장에 백남운을 선출하며 서울과는 별도의 당조직을 구성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활동 기반을 상실하여 1949년 10월 19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유관 사회단체 및 정당들이 법령 제55호 2조에 의거 해산될 때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3. 여담

김두한의 자서전에 따르면, 1947년에는 당사를 우익 청년단에게 빼앗긴 적도 있다. 김두한이 2천명의 대한민청 청년단원을 동원해 근로인민당 본부를 습격해, 간판과 서류를 불사르고 당사를 '전국학련'에 넘겨 주었다고 한다.[4]

1957년 11월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했던 장건상, 김성숙(金星淑)[5] 등이 간첩 박정호의 지령을 받아 근로인민당의 재건을 도모하였다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 투옥되었다. 이는 이후 진보당 사건등 이승만 정권의 혁신세력 탄압으로 이어졌다.

4. 참고문헌



[1]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통해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당시 여운형은 정계은퇴를 했다고 해도 좌우합작운동을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노선은 분명하게 고집하였다. [2] 참고로 장건상은 장택상의 먼 친척 뻘로(같은 항렬, 정확하게는 12촌이다.), 서로 형님-아우 하며 지냈다고 한다. 48년 정부수립 당시 장택상을 통해 입각 제의도 받는다. [3] 장건상도 말실수로 감금됐다가 겨우 풀려났다. [4] 출처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 1』(메트로신문사, 2002), p191.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p248에서 재인용. [5]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협동조합운동을 하다 진보당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혁신계 정치인 회을 김성숙(金成淑) 선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