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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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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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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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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청 제12대 황제
선통제 | 宣統帝
만주국 초대 황제
강덕제 | 康德帝
파일:선통제 푸이.jpg
출생 1906년 2월 7일
직예성 북경
(현 베이징시)
사망 1967년 10월 17일 (향년 61세)[1]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능묘 청서릉(清西陵)
재위기간 제12대 황제
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2] (3년 72일)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11일, 장훈복벽)
만주국 집정
1932년 3월 9일 ~ 1934년 2월 28일 (1년 356일)
만주국 황제
1934년 3월 1일 ~ 1945년 8월 15일 (11년 17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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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중국식 : 아이신줴러(愛新覺羅, 애신각라)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영문 : Aisin-Gioro
중국식 : 푸이(溥儀)
만주어 : 푸이(ᡦᡠ ᡳ)
한국식 독음 : 부의
영문 : Puyi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부모 부친 순친왕 재풍
모친 구왈기야 여우란
형제자매 2남 7녀 중 장남
배우자 정후 - 효각민황후 곽포라씨
계후 - 효예민황후 이씨
후궁 숙비 악이덕특씨, 명헌황귀비 타타랍씨
돈숙복귀비 이씨
신장 168cm[3]
요지(耀之)
호연(浩然)
한호 거훙어 요소 한[4]
Gehungge yoso han
/ke.xuŋ.ŋə|jo.so|χɑn/
ᡤᡝᡥᡠᠩᡤᡝ ᠶᠣᠰᠣ ᡥᠠᠨ᠌
칸호 허브투 요수 하안[5]
Kebtü Yosu Qaγan
/xəb.tu|jɔ.sʊ|xa.ɣan/
ᠬᠡᠪᠲᠦ ᠶᠣᠰᠣ ᠬᠠᠭᠠᠨ
헤우트 요스 항[6]
Khevt Yos Khaan
/xewtʰ|jɔs|xaːŋ/
Хэвт ёс хаан
묘호 없음
< 헌종(憲宗) / 공종(恭宗)>[7]
시호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8]
제호 손제(遜帝) / 말제(末帝)
연호 청나라 연호
만주어: 거훙어 요소
한자: 선통(宣統)
만주국 연호
집정 시기: 대동(大同)
황제 시기: 강덕(康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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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생애
3.1. 즉위와 퇴위3.2. 복벽과 추방3.3. 일본의 꼭두각시3.4. 소련의 포로3.5.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3.6. 문화대혁명과 사망
4. 여담5. 가계6. 대중매체에서
6.1. 영화6.2. 사극6.3. 게임6.4. 소설6.5. 만화6.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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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며, 만주국의 유일한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9] 복드 칸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중국의 내몽골인들과 대만의 외성인들에게는 몽골 역사의 마지막 대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영향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자 시대의 폭풍에 휘말린 비운의 군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파시즘 부역자이자 한간(매국노)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자주 받는 인물이다.

2. 명칭

정식 칭호보다 푸이(溥儀, 부의)라는 본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라 하여 말제()라고도 일컬어진다.

중국에서는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황제는 다음 왕조가 묘호 등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폐제로 인정되어 공식적으로는 황제 취급을 하지 않는다. 선통제는 역대 청 황제 중 공식적인 묘호가 없는 유일한 황제인데, 신해혁명으로 공화제를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이 세워지면서 선통제의 묘호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10] 비공식 묘호는 두 가지가 있는데,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2004년에는 공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시호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공산당 정부에서는 묘호와 시호 모두 인정하지 않고 손제()[11]라는 칭호로 부르거나 그냥 푸이라는 이름 그대로 부른다.

한호(汗號, 만주식 군주 칭호)는 거훙거 요소 한. 연호는 만주식으로 거훙거 요소, 중국식으로 선통(宣統). 만주국의 연호는 강덕(康德)이다.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 만주어 발음으로도 푸이고 중국어 발음으로도 푸이이다.[12] 일본어 발음은 한자 '부의'를 그대로 읽은 후기(ふぎ)다. Henry라는 영어 이름도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거나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3. 생애

3.1. 즉위와 퇴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0px-PuYi_1909.jpg
아버지 순친왕과 선통제(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어린이)

청나라의 11대 황제였던 광서제의 이복 동생인 순친왕(醇親王, 1883년 ~ 1951년) 아이신기오로 짜이펑(愛新覺羅 載豊)과 적복진 구왈기야 여우란(瓜爾佳 幼蘭)[13]의 아들로 태어났다.

큰아버지이자 진외당고모부인 광서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자 서태후에 의해 1908년 3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아버지 순친왕이 아닌 어린 푸이가 즉위한 이유는, 당시 계승법상 황제는 하나의 항렬에 1명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 순친왕은 형인 광서제와 같은 항렬이라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당장 전대의 광서제부터가 본래는 동치제의 사촌동생이라서 황제가 될 수는 없었으나 광서제의 모친이 서태후의 여동생이라 혈연으로 가까웠기에 서태후가 억지로 옹립한 형태였다.[14]

정작 큰할머니인 서태후는 광서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사망했기 때문에, 광서제의 황후인 효정경황후 예허나라씨(孝定景皇后 葉赫那拉氏)가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로서 선통제의 아버지인 순친왕과 함께 섭정을 맡았다. 어린 선통제가 긴 즉위식을 지루해하며 칭얼거리자 그를 품에 안고 있던 순친왕이 "울지 마십시오, 울지 마십시오,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別哭別哭、快完了、快完了)!"라고 달랬다고 한다.[15] 그런데 이건 " 청나라가 곧 망한다(快亡)"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는데[16], 그 말대로 그의 재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위안스카이가 푸이의 퇴위를 압박하자, 1912년 2월 12일 융유황태후가 선통제의 퇴위 조서를 반포하면서 폐위되고 만다. 이후 민국과의 협정 내용대로 외국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궁전인 자금성 안에서 청나라 소조정의 황제로서 지냈다.

3.2. 복벽과 추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7px-Puyi_%281922%29.jpg 파일:attachment/Xuantong.jpg
중화민국 시절의 푸이 장훈복벽 당시[17]

이후 위안스카이 1914년 11월 23일 복벽 정치 징치령을 통해 복벽파를 탄압하다가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에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급사했다. 이후 남방에는 탕지야오,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할거하고 북방에서는 직계와 환계가 위안스카이의 빈자리를 놓고 물어뜯고 싸우면서 푸이의 운명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1916년부터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 격화되자 장강순열사 장쉰, 전 국무총리 쉬스창 등은 선통제를 복위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1917년 5월, 돤치루이 탄핵으로 내전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인 급박한 상황이 되자 장쉰이 정치를 중재한다는 목적으로 베이징으로 상경, 국회와 약법을 해산한 다음에 장훈복벽을 단행하여 1917년 7월 1일 선통제를 복위시켰으나 국무총리 겸 토역군 총사령관 돤치루이의 반격으로 얼마되지 않아 일수로 단 12일 만인 7월 12일에 도로 퇴위했다.

1924년 9월,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직예군벌 소속이었던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 북경정변을 일으켜 국민군 1군 사령관에 취임, 베이징을 점령하고 핍궁사건을 일으켜 <수정청실우대조례>를 체결하고 청황제의 존호를 폐지하여 푸이와 청황실을 자금성에서 내쫓아버렸다. 이 결정으로 중국은 돤치루이, 장쭤린 류의 푸이 복위파와 폐위 찬성파가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 그러나 베이징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도 푸이를 자금성에 돌아오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푸이는 순왕부로 돌아가 기거하다가 1925년 2월 25일 텐진의 일본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겼다.

1928년 6월 8일, 국민당의 2차 북벌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어 1928년 7월 3일부터 7월 11일까지 장쭝창의 부하 출신인 군벌 쑨뎬잉은 국민혁명군에게 투항한 직후 베이징 동쪽에 위치한 동릉을 대대적으로 도굴했다. 국민당이 역대 조상을 욕보인 이 사건으로 푸이는 격노했고 이후 일본과 손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1931년 11월까지 일본령 톈진 조계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한 이후 일본에서 푸이를 옹립하여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장제스는 1931년 11월 2일 톈진에 거주하던 푸이에게 과거 북양정부와 청나라 황실이 맺었던 협약을 다시 이행하겠다고 제안했다. 다시 자금성에 살게 해주고 품위 유지 비용을 대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푸이는 이를 거절하고는[18] 11월 8일 톈진사변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틈을 타서 일본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의 도움으로 11월 10일, 천진사변을 틈타 톈진을 떠나 일본에 합류했다.

베이징 시민들은 폭죽을 쏘며 푸이의 추방을 기뻐했다고 하는데, 청실 복고론자였던 레지날드 존스턴은 중국 내부에서 군주정의 인기가 드높았다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당시 중국 남방과 북방의 분위기도 다르고 시각도 워낙 치열하게 대립해서 상충되는 기록이 남아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남방의 공화주의자들은 푸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둥 과격한 주장을 펼쳤고, 레지널드 존스턴은 만주국 건설조차 동방의 여명 운운하며 찬양할 정도로 좀 과도하게 군주정을 지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uyi_and_Wanrong.jpg

톈진 망명 시절의 푸이와 효각민황후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사진. 왼쪽의 여인은 완룽의 이종사촌 뻘인 완안동기 왕민동이다. 한때 푸이의 동생인 푸제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고 푸이가 석방된 뒤에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3.3. 일본의 꼭두각시

파일:external/images.china.cn/00016c8b41770d0bcc2859.jpg
1934년 3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푸이
[navertv(43993751)]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06부 - 아시아.자유를 향한 투쟁中[19]

만주국 선포 과정에서 장징후이 등은 짱스이 만주국의 수령으로 내세워 공화국을 세우자고 주장했고 황족인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반면에 산동성의 쿵더청을 데려와서 황제로 옹립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선통제의 덕성을 시험하기 위해 먼저 집정에 취임시키자고 결정됨에 따라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집정(執政, 최고 통치자)이 되었다가 1934년부터 군주가 되었다. 물론 철저한 일본 제국 꼭두각시였다.

한 예로 선통제 개인은 전통적인 청나라 황실 출신답게 티베트 불교 신자였음에도[20] 일본의 강압으로 신토가 만주국의 공식 국교가 되었다. 다른 예로 도쿄에 가서 쇼와 덴노를 만났을 때는 날씨가 맑은 것도 천황 덕분이라는 식의 찬양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의전상으로는 만주국은 일본의 가장 친한 우방으로서 의전 역시 일본 천황 다음이었다. 일부 묘사처럼 일제에게 대놓고 핍박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푸이는 꼭두각시였고, 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실제로 푸이는 전범 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 사실을 그대로 밝힌 바 있다.

3.4. 소련의 포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소련-일본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실행해 만주국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푸이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퉁화시 부근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을 해산했다.[21] 하지만 이것도 푸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만주국의 잔존 내각에서 장제스와 협상하기 위해서 걸리적거리는 만주국 따위는 빨리 없애 버리기 위해 시급히 결정한 일로 푸이는 붓으로 죽죽 그은 임시 조서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얼렁뚱땅 퇴위해야 했다.[22]

장징후이 등이 소련군과 협상할 수 있으리라 여겨 신경으로 갔다가 줄줄이 체포되는 동안 푸이는 일본으로 피란가라는 통보를 받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좁아서 복귀인조차도 쫓겨나는 지경이었고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복귀인에게 푸이는 기차를 타고 일본에 가라고 헛소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공항이 소련군에게 점거당하면서 1945년 8월 17일에는 소련군에게 붙잡혀서 전범 대우를 받았다.

소련군에 체포되었을 당시만 해도 푸이는 공포에 떨었지만, 소련은 한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타국의 군주포로[23]에 대해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그가 수감된 모르카프카 수용소의 소장은 그를 위해서 작은 파티를 열어주고, 그에게 어떤 요구 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으며 이후의 생활도 푸이와 그의 일행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소련 측은 그들을 요양자처럼 대했다. 음식도 매일 4끼[24]를 배급했다. 음식 뿐만 아니라 거처에 있어서도 푸이는 라디오가 있는 독방을 받았고, 소련 측은 그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피아노도 거처에 가져다 주었다. 다른 수감자들이 노동을 할 때 그는 산책을 하거나 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엔 수용소 밖을 나가 등산을 하거나, 강가나 숲으로 산책을 했다. 오히려 이 시기 활동범위는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할 때 보다 넓었으며, 하고 싶은 일도 자유롭게 했다. 푸이는 하루 종일 불경을 읽거나 좌선수행을 하고, 점도 치면서 놀았다. 그리고 함께 수감된 시종들에게 황제로서 문안 인사를 받았다. 이때 몸에 좋은 광천수를 대접받아 건강도 상당히 좋아졌으며, 같이 끌려온 장징후이나 시치아 등 만주국 내각 포로들은 푸이가 소련에 영향력이 있는 줄로만 알고 푸이에게 아부하면서 자신들을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스탈린에게 부탁해달라고 푸이에게 간청했다. 푸이는 자신도 포로 신세에 불과하다면서도 마지못해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지만 자신이 소련에 살고 싶다고 보낸 편지와 마찬가지로 묵살당했다.

이후 하바롭스크의 수용소로 보내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여기서 푸이 일행은 2층 건물을 따로 받아 사용했는데 1층은 시종들이, 2층은 푸이가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수용소는 철거되고 휴양지로 바뀌었다. 일행도 청소와 식품 수령 등의 노동에 참가했지만, 푸이는 여기서도 일은 하지 않았다. 다만 수용소장이 정원에 농사를 짓도록 허용해 시종들이 풋 고추 토마토, 가지, 강낭콩 등을 심어 길렀는데 이들 채소들이 쑥쑥 자라는 게 신기했던 푸이가 직접 물을 주고 관리했다고 한다. 이후에 45특수전범수용소로 이송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우대 조치는 계속 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호의에 대해 푸이는 몹시 의외로 여기고 고마워했다. 나중에는 중국으로 송환 되는 것을 걱정해서[25] 소련군 관계자에게 자기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금품이나 시계 등을 뇌물로 주고 중국 송환을 막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고, 러시아어를 아는 동생 푸제를 시켜 스탈린에게 4차례나 감사와 함께 소련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국민정부가 집권하던 시절에 스탈린은 푸이의 편지를 프라우다에 게재하는 등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냈으나 국공내전이 시작된 1947년부터는 푸이의 편지를 무시했으며, 1950년에 온 마지막 편지는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고 푸이를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으로 돌려보낸다.

3.5.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

이렇게 지내다가 1946년 8월 16일,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석, 만주국 황제 때의 일을 증언한 뒤( 영상) 1950년 중국으로 끌려갔다. 처음 중국에 송환되자 푸이와 그의 일행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바로 처형당할 거라 예상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체제 선전 겸 내부 안정을 위해 반대 세력이라 해도 더 이상 정치적 기반이 남지 않은 자들과 한간으로 분류하기엔 애매한 자들에게는[26]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비단 선통제뿐만 아니라 거물급들인 데므치그돈로브, 장징후이와 같은 만주국과 몽강국의 거물 정치인들, 정동국, 두위밍 등 국공내전 중 포로로 잡힌 국민혁명군의 고급 장령들은 이런 반동들까지도 사회주의 일꾼으로 성공적으로 개조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과시하기 위해 살려두어 전범수용소에 수감하고 사회주의 재교육을 실시하였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한때나마 중국 공산당 지도부 전원을 신민으로 거느렸었던 푸이는 더할 나위 없는 선전감이기도 했고, 신정권의 포용력을 과시한다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중국에서 수감되는 동안 위해는 없었지만, 소련에서 누리던 특혜는 없었고, 영화 마지막 황제에 나온 것처럼 모든 일을 시종들의 도움 없이 자신이 해야 했다. 이때 푸이는 수감자들 사이에서 생활력이 없다고 맨날 까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은 평생 모든 일상 생활과 뒷바라지를 시종들이 다 해 준 덕에 맘 편하게 살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하는데 그것에 익숙하지 못하니 생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일부러 그렇게 대한 건 아니고 구 왕족과 만주 귀족 출신들에게 적용된 사회적응과정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이 때 나온 유명한 일화가 푸이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가 스스로 구두끈을 맬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는 독백이다. 2대 교도소장인 조선족 출신 김원이 그의 교화를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푸이 역시 석방 후 그를 좋게 평했다.

1956년, 복귀인이라 불리던 이옥금과 공식적으로 이혼하였고 푸순 전범 교도소에서 10년 동안 지내다 마오쩌둥의 특별 사면령으로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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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찍은 사진[27]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시민이 되어 중국과학원 식물연구소 베이징 식물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좀 과장해서 정원사로 일했다고 널리 알려졌다.

중국 정부의 소개로 항저우 출신 간호사 리수셴 1962년 4월 30일 결혼했다.[28] 1964년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 자료 연구 위원회로 전출되어 자료 전문 위원을 역임하였고, 인민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위원'이 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국회도서관 서기관 및 국회의원을 역임한 셈이니 고위급 인사로 대접받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새로이 중국의 지배 세력이 된 중국공산당이 구 세력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신체제의 안정성과 대범함을 과시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측면도 크다. 어쨌든 인생 후반기를 새 아내와 함께 다정하고 평온하게 지냈으며 일족도 무사했으니, 가히 한나라 헌제 후주 공제와 버금가는 편안한 말년이다.

3.6. 문화대혁명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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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푸이.

하지만 푸이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할 무렵에 중국 전역이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싸이며 혼란에 휩싸였었고, 푸이 본인도 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목격해야 했다. 그가 수감되었던 시절 교도소장이었던 김원이 나중에 풀려난 푸이 앞에서 홍위병한테 끌려가서 반동분자, 수정주의자라며 린치를 당할 정도였다.[29] 실제 김원은 이 시절 숙청되었다가 문혁 광풍 이후 대학 교수로 복권된 뒤 중국인민경찰대학 부교장, 당위원회 서기등을 역임하였고 # 1990년에는 대한민국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는 푸이에 대해 "순박한 사람이고 인간적으로 동정하지만, 그가 저지른 역사적인 죄과는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푸이의 집에 웬 여자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는 네놈이 만주국 허수아비 황제 시절에 궁녀였는데, 그때 너에게 강간 당했다!" 하면서 보상하라고 날뛰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홍위병 표식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그걸 본 진짜 홍위병이 오더니만 욕을 퍼부으면서 끌고가더니 그가 보는 앞에서 패 죽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가짜 홍위병도 판쳤기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대놓고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진짜 홍위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홍위병이라는 게 정부에서 정식 인가받은 조직도 아니고 그냥 붉은기 들고 붉은 완장 찬 무리 혹은 개인들이 스스로 칭하고 다니던 거라 진짜, 가짜 따지는 것에 의미는 없었다. 나중에 다른 여자들이 찾아와 만주국 궁녀였다며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보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여자들이 몰려와서 우리도 만주국 궁녀였다며 난리를 부렸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푸이는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그 와중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제대로 치료도 못 받을 뻔하다가[30] 저우언라이 수상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치료시기를 놓쳤던지 혼수상태에 빠진 뒤 제대로 된 유언도 못 남기고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그나마 병상에 있었을 때는 저우언라이 수상의 배려로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나름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31]

시신은 화장되어 베이징의 인민 납골당, 베이징 팔보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등을 전전하다가 1995년 1월 26일 사후 28년 만에 청 왕조의 두 능구 중 허베이성 이셴(易縣)의 청서릉(清西陵)[32]으로 이장됐다.

4. 여담

5. 가계

푸이의 아버지 애신각라 재풍은 2명의 아내에서 4남 7녀를 보았다. 푸이는 장남인데 형제 자매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장수했고 요절한 아이를 제외하면 중국사의 그 험악한 세월에도 천수를 누렸다. 이들은 상당수가 진(金) 씨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청나라 황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씨는 너무나 눈에 띠어 조용히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뿌리찾기 작업으로 아이신기오로( 표준 중국어:아이신줴뤄) 성을 회복해 쓰는 경우가 많다. 푸이는 평생 5번 결혼하고 까지 포함해 6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39] 아내들이 대부분 정략결혼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마지막 아내인 리수셴(李淑賢)을 제외한 모든 아내들과 이혼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친동생 푸제, 이복동생 푸런(溥任, 1918~2015)[40]이 차기 가문 수장이 되었다.

아래는 아버지 애신각라 재풍의 배우자들과 그 자식들, 즉 푸이의 형제자매들이다. 상술한 것처럼 푸이 본인에게 자식이 없었고 그 이전에 푸이 본인 및 전임자인 광서제부터가 청나라 황실의 직계가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황제였기 때문에, 정통성 측면에서 청나라 황실의 계보는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래는 푸이의 배우자들이다.

6. 대중매체에서

6.1. 영화

영화 < 마지막 황제(L'ultimo imperatore, 1987년)>는 그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에 저술된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문판 제목은 <황제에서 시민으로(From Emperor to Citizen)>. 이 자서전은 중국공산당 밑에서 교화 생활을 하던 중에 썼던 <나의 죄악의 전반생>이라는 후덜덜한 제목의 자아비판서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영화는 배경이 중국이고 대부분의 등장 인물이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우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기하는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9개상을 석권했고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여기서 푸이 역을 열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존 론은 나중에 괴작 영화들에만 주연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다크 히어로 영화인 "섀도우"에서 칭기즈 칸의 마지막 후예인 쉬안 칸 역을, 러시아워 2에서 최종 보스로 나온다. 사실 이건 아시안 배우에게 악역, 조연만 시키는 헐리우드의 차별과 한계 탓이 컸다. < M. 버터플라이>에선 여장남자로 나와 제레미 아이언스와 연기하는 등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했지만 별 빛을 보지 못하고 이후로는 중국 쪽으로 아예 노선을 돌려 중국 사극 드라마에 주로 출연했다. 중국에서도 '마지막 황제' 이미지가 강한 탓에 주로 왕으로 출연했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실제 푸이는 하인들을 학대하고[51] 배우자를 물건 취급하며 사치를 즐기는 등 원래 군주시절에 성격이 좋지 않았으며, 그나마 꼭두각시 군주 생활을 강제 청산한 뒤에 감옥에서 자립교육도 받는 과정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갈굼을 당하는 역지사지격의 경험을 하고 나서야 그나마 정신차린 것이다.

언론인인 Edward Samuel Behr의 기록에 따르면 푸이는 하인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것이 취미였는데, 이는 황제 자리를 잃은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완룽은 남편을 혐오하여, 남편이 없을 때는 검은 안경을 쓰고 하인들 앞에서 남편 흉내를 내며 남편을 조롱했다. 참고로 완룽은 아편 중독으로 망가지기 전까지는 하인들을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잘 반영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선량하게 묘사되어[52] 그냥 역사의 수레바퀴에 휩쓸린 비운의 황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196,70년대 쇼브라더스의 전성기를 이끈 이한상 감독이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3부작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인 '화룡(火龍)'를 연출하여 1986년 홍콩에서 개봉된다. 위에서 언급한 '마지막 황제'와 주인공은 같지만 '마지막 황제'는 푸이의 인생 전반부가 주 내용이라면 '화룡'은 푸이의 인생 후반부가 주 내용이며 문화대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서민으로 돌아간 푸이의 초라한 말년을 그렸다. 이한상이 연출한 '화소원명원'과 '수렴청정'에서 함풍제를 연기한 양가휘가 푸이의 말년을 사실감있게 연기하여 1987년 제6회 홍콩금상장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53] 아내 이숙현 역할은 중국의 국민배우 판홍이 연기했다.

6.2. 사극

영화 < 마지막 황제>가 유행할 때, <말대 황제>라는 28부작 사극을 KBS가 수입을 하여서 방영을 하였는데[54], 이 중국 드라마는 전반적으로 선통제를 찌질한 양반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본 다음에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은 꽤 충격을 받았는데, 성인 푸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강희제국>에서 열연한 진도명이다. ((정확히 말하면 진도명은 청년 시절의 푸이 역을 맡아 드라마 7회 후반부부터 22회까지 출연했다. 이후 나이 든 노년의 푸이는 주욱(朱旭)이라는 다른 배우가 연기했으며, 그는 2018년에 작고한 한족 배우로 실제 노년의 푸이와 외모 싱크로율이 상당히 높다.)) 이 드라마 후반부에 영국인으로 분장해서 한국 전쟁을 참회하는 연극 장면이 거의 그대로 나왔다. 진도명은 강희제, 장제스, 진시황[55], 월왕 구천, 한고제 등의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성군 연기를 주로 하는데 이 작품에서 <강산풍우정>의 천계제와 함께 찌질한 암군 역으로 활약한 작품이고 둘 다 잘 어울린다. 성군과 암군을 모두 소화할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다.

말대황제는 2015년 리메이크되어 국내에서도 CHING을 통해 소개되었다. 전작보다는 푸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푸이는 자신의 평생을 회고하며 '나를 진정으로 받아준 건 공산당 뿐이었다'는 선전영화스러운 멘트를 날린다.

1986년에 중국에서 개봉한 말대황후에서는 여성을 학대하는 찌질한 남자로 그려진다. 효각민황후 완룽이 주인공인 영화로, 첫 장면은 아무 것도 모르는 완룽이 결혼식을 치르는 장면이고, 마지막 장면은 교복을 입은 소녀 리위칭(李玉琴)이 영문도 모른 채 푸이의 후궁이 되기 위해 궁궐로 들어서는 수미쌍관식 연출이다.

홍콩 ATV에서 청나라 전체를 소재로 제작한 드라마 만청십삼황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황성쟁패(皇城爭霸, 해외판은 위성쟁패)에 마지막 황제로 등장. 여기서 아버지인 광서제가 서태후에게 독살되었다는 설정[56]이 붙어있다. 재위 기간은 3년밖에 안되지만 극중에서는 1924년 북경정변 때 자금성을 나가는 장면까지 다룬다.

한국에서는 채널A 천일야사에서 청나라 황제로 즉위할 당시의 어린 선통제가 잠깐 등장했다. 10분 23초부터 10분 41초까지 이후에는 성인 선통제의 삶도 다루었다. # 사실 천일야사는 최초로 선통제가 등장한 한국 사극(정확히는 재연이 나오는 교양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신해혁명에 예관 신규식, 범재 김규흥, 춘교 유동열 등 몇몇 조선인들이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한국 사극에서 다뤄지지 않았으며, 만주국의 주요 민족으로 조선인( 조선족의 직계 기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국 내 조선인들의 삶 또한 만주 웨스턴을 제외한 한국 사극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에[57], 선통제 또한 천일야사를 제외한 한국 사극에서 등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6.3. 게임

6.4. 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신해혁명 당시에 황족들이 입씨름 하는 동안 옥좌에서 7살 어린아이답게 놀고 있었다고 나온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사실상 상징으로 있을 뿐이고 실제 정치는 섭정인 순친왕 재풍과 청국 총리 숙친왕 아이신기오로 산치가 대신한다. 성장해서는 서양문물을 좋아하며 주인공의 딸이자 한국-폴란드 혼혈 미녀인 예성공주 이라를 짝사랑하지만 황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결국 황실의 압력에 역사대로 효각민황후와 약혼했는데, 동생 부걸이 한국으로 유학을 가자 이라와 맺어지는 일이 없기를 속으로 빌 정도로 잊지 못하고 있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순친왕 자이펑의 첫째 아들로, 중국어밖에 하지 못했던 원 역사와 달리 동삼성에서 나고 자라 만주어밖에 할 줄 모른다고 한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만주국 총리가 된 왕징웨이와 경쟁하며 권력을 잡은 왕징웨이에 의해서 꼭두각시인 신세. 그러나 오히려 왕징웨이가 만주와 중국을 통일한답시고 너무 설쳤고 그 반대로 선통제는 아무 것도 못하다 보니 오히려 만주국 국민들이 아무 것도 못하는 선통제를 동정[61]하게 되어서 국민투표에서 왕징웨이에게 승리하고 처음으로 국민들이 소중한 이유를 알겠다며 미친 듯이 좋아한다.

6.5. 만화

북두의 권의 저자 하라 테츠오가 쓴 창천의 권에서도 등장. 여기선 나이가 먹은 모습으로 등장했으며 시도때도 없이 암살의 공포에 반쯤 정신이 나간 찌질이로 등장한다. 상하이에서 범죄조직을 박살낸 '염왕'이라는 자를 찾아 자신의 보디가드로 삼기 위해 그 염왕이 잠시 몸을 담은 청방이란 조직에 소속됐었던 어느 노인을 독 검시관으로 삼고 이를 이용해 염왕을 찾아내려 했으나 정작 그 밀명을 받은 부하들은 염왕 목에 걸린 상금에 눈이 멀어 검시관을 죽이려 들었다가 끔살당했고 이로 인해 염왕의 진노를 사게 되며 이후 자신을 두들겨 패러 찾아온 염왕에게 그깟 하찮은 독 검시관을 위해 자길 죽이려드냐고 찌질거리지만 '황제든 독 검시관이든 난 단지 의리를 위해 움직인다. 그게 친구야.'라는 염왕의 말에 자신도 그런 친구를 갖고 싶었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이후 갑자기 작화가 업그레이드 되어 자신은 이제 중원의 허수아비 황제지만 자신도 남자인만큼 죽을거라면 싸우다가 죽고 싶다며 보검을 들고 덤벼들었다가 한큐에 비공을 찔려 쓰러지고 그대로 죽나 싶었지만 의외로 목숨을 건지고 이후로는 별 등장이 없다.

지팡구에서는 역사대로 만주국의 황제로 등장하는데 번역자가 푸이가 누군지 몰랐는지 일본식으로 읽어 후기라는 괴이한 이름으로 번역했다. 심약하고 나약해보이는 인상인데 암살당한다.

아바타 아앙의 전설에 나오는 흙의 왕국 제52대 왕인 쿠이의 모티브다. 실제 역사보다는 마지막 황제에서 나온 모습을 더 반영했다. 애완곰 보스코를 데리고 다니며 꼭두각시인것은 동일하나 나름 의지와 노력은 있는것으로 나온다. 물론 너무 온실의 화초로 살아서 그런지 아줄라에게 속아넘어가지만[62] 무사히 도망쳐서 농민들의 삶을 살펴보겟다면서 신분을 숨기고 방랑, 이후 왕으로 다시 복귀하고 나름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등의 지도자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마지막 황제가 되는 일은 피했다.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왕들이 오셨다에선 21세기에 모인 조선국왕들 앞에 등장하는데 고종은 망국의 군주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지만 자신의 대청의 황제였는데 조선의 왕 따위랑 급이 같냐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근데 허수아비 내지는 꼭두각시 노릇이라고 해도 현 역사에서 한일병합 후 명목상 군주도 아닌 그보다 급이 낮은 왕공족 신분이였던 고종에 비해 푸이는 적어도 황제 신분으로 지냈던 걸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은 아닐지도. 단 실질적 권한은 왕공족도 만만치 않았다. 고종을 견제한 것도 고종의 왕공족 지위를 탐탁찮게 본 것에 가깝다.
이후 세종에 의해 세뇌가 풀리자 감사를 표하며 정원사였을 때가 행복했다는 심정을 털어놓는다.

6.6. 기타

일본의 동인 음악가인 BITPLANE[63]의 다른 뮤지션 명의 중 하나가 선통제의 만주어 이름 한자가차를 딴 愛新覚羅溥儀(애신각라부의)였다. 딱히 연관성은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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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 호이간 맹가포록 대산 오이고대, · 청길노 · 양길노 , 납림포록 금태석 포한 포양고 포이항고, 포점태 · 배음달리
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장황언 , 나륜 장명진 왕익, · 정성공 ,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 삭해 왜흑, · 하화례 ,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색액도등전(索額圖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색액도 · 명주 ,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273권 「이솔태등전(李率泰等傳)」
이솔태 · 조정신 · 낭정좌 · 동봉채 · 마륵길 · 시유한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영보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7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8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 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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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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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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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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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선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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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1년 8개월 10일 [2] 신해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폐위 됐는데 어린 푸이는 정작 몰라 황제직을 계속했다. 실제로 1924년 베이징을 장악한 직예군벌 자금성으로 오기전까지 계속 자금성에서 나름 황제 대접 받으며 생활했다. 청나라 소조정 참고. [3] 168cm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4] 뜻은 '빛나는 길/도리'. [5] 차하르 몽골어 기준 [6] 할하 몽골어 기준 [7] 비공식 묘호. 중국 정부는 묘호를 만들지 않고 손제(遜帝)라고만 부르고, 대개는 그냥 부의라고 이름으로 표기한다.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憲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2004년에 구 청나라 황실에서 공종(恭宗)이란 묘호를 올렸지만 모두 비공식적인 묘호라 거의 쓰지 않는다. [8] 1967년에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양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襄皇帝)였던 것을 2004년에 고쳤다. 즉, 딱 한 글자(도울 양襄 ->근심할 민愍)가 바뀌었는데, 시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9] 위안스카이 중화제국을 인정하여도, 1917년 장훈복벽에 따라 복위한 바 있기에 만주국을 제외하여도 명백한 마지막 황제이다. 위안스카이는 어디까지나 한족 황제로서 마지막일 뿐이다. [10] 묘호나 시호는 본래 사후에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사시의 형태로라도 묘호나 시호를 올리는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었기에 불가능했다. [11] 참고로 이 遜이라는 한자는 겸손하다, 사양하다, 양위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못하다, 뒤지다, 뒤떨어지다, 달아나다 등의 부정적인 의미도 같이 담고 있는 한자이기도 하다. 본래 선양한 황제로서 묘호나 시호를 받지 못한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12] 표준 중국어의 모태가 된 북경어는 만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3] 청나라 팔대성 구왈기야, 팔기군 정백기 기인 출신이며, 서태후의 심복인 영록(펄벅의 소설《서태후》에서 서태후의 숨겨진 연인으로 묘사됨)의 딸이다. [14] 정확히는 동치제의 아랫항렬에 해당하는 황족들이 혈연상으로 동치제와 9촌 이상 되는 먼 황족이라 차선책으로 동치제의 사촌형제 중에서 고르게 되었는데, 동치제의 사촌형제 중에서는 서열상으로나 나이로나 서태후의 라이벌이었던 공친왕 혁흔의 자녀들이 가장 적합했으나 공친왕의 세력 강화를 용인할 수 없던 서태후가 이들을 제치고 어린 광서제를 지목하였다. [15] 마지막 황제에서도 이 일화가 재현되는데, It will soon be over로 번역되었다. [16] 전자는 '콰이완(kuài wán)', 후자는 '콰이왕(kuài wáng)'으로 들린다. 두 번째 글자의 성조도 2성으로 같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행사가) 곧 끝난다'와 '(청나라가) 곧 끝난다'라는 식으로 마침 한국어 번역으로도 얼추 비슷한 표현이 가능하다. [17] 위의 사진은 1917년 장쉰의 복벽 사건 때 찍은 사진이며, 게임 Victoria에서 게임을 종료하면 나오는 국가별 점수 및 지도자의 초상화가 나오는 화면에서 중국계 국가 지도자는 이 사진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 [18]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서 중 선통제 문단으로. [19] 2017년 8월 19일 방영. 영상의 시작과 후반 44분 15초쯤에 푸이의 도쿄 재판 모습이 따로 나온다. [20] 유교를 국교로 삼은 한족 왕조들과는 달리 유목민 왕조의 특징이었다. 청 황제들은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를 스승으로 모셨다. 다만 푸이는 특히나 독실하게 불교를 믿어 명상을 자주 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시종들에게도 채식을 하기를 요구했다. 역설적이게도 음식에 벌레가 들어가면 시종에게 태형을 내렸다고 하며, 평소 미신을 신봉해서 점괘가 불길하게 나오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중얼거리며 예배를 보곤 했다. 이를 보면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보다는 그냥 자기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불교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소련이 참전해서 만주국에 폭격을 가할 때도 푸이는 불상에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하필 불당 바로 옆의 관동군 병영에 폭탄이 떨어졌다고 한다. [21] 흔히 이곳이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곳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와는 다른 곳이다. 후금이 세워질 때 수도인 허투알라는 랴오닝성이고 퉁화시는 지린성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가 누르하치의 조상인 건주위 여진족의 땅에 속할 뿐. 또 재밌는 점은, 바로 퉁화시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부근이라는 점이다. [22] 이는 푸이가 마지막까지 일본의 꼭두각시였음을 말해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히로히토 천황이 취급하는 조서는 한 자 한 자 개행까지 신경써가며 편집증적으로 격식을 따졌다. 자세한 것은 옥음방송 문서로. 일본 스스로도 푸이는 황제 취급조차도 안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도 만주국 주요 인사들이 한간으로 취급되어 재판을 받고 엄벌에 처해질 때 정작 푸이 본인은 무사했던 것은 이런 대우를 받은 덕분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 [23] 알려진 대로 소련은 러시아 혁명으로 황제를 비롯해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일족들을 총살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 공산권이었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같은 여타 동구권 국가들의 경우 2차 대전 이후에 왕정을 없애고 공산정권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구 왕가 일족들에 대해 처형 대신 국외추방, 입국금지 정도에 그치는 등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처분이 이루어졌다. 나중에 이들은 모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붕괴/해체되고 민주화된 직후에 와서야 귀국이 실현됐다. [24] 아침, 과자, 커피, 등을, 점심은 요리 2개와 탕 1개, 오후 3~4시 경에는 간단한 간식을 주고, 저녁은 서양식으로 풍성하게 나왔고 와인이나 사이다 등도 나왔다. [25] 사실 푸이 일행이 국민당이 아니라 소련에 잡힌 것은 일단 행운이었다. 국민당은 왕징웨이 정권 관계자 등 중일전쟁기 일본에 협력한 중국인, 소위 한간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26] 당시 중국에서 분류한 한간 왕징웨이 같은 자들을 의미한다. 거물급 한간은 국민당에서 알아서 다 처리해줬고 나머지는 단순 부역자, 협조자 정도로 죄질이 상대적으로 가벼웠기 때문에 굳이 엄벌이 필요하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27]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오쩌둥이 식당에서 푸이에게 팔을 내밀면서 접견하는 어색한 합성사진 버전도 꽤 있다. 양손으로 서류를 쥐고 접견하는 이 사진이 진본이다. [28] 이때 푸이의 나이는 56세이고, 리수셴은 38세(1924년 생)로, 나이차가 18년이나 되었다. 결혼한지 5년 후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하고 평범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리수셴은 35년 후인 1997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리수셴은 푸이가 사망한 후 병원을 퇴직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지만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리수셴은 생전 청나라 황후였던 적이 없지만, 1997년 사망 이후 구 청나라 황실에 의해 효예민황후(孝睿愍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효의순황후와 함께 명목상, 역대 청나라 황후 중 둘뿐인 한족 출신인 셈. [29]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교도소장이 화장실에서 자살하려던 푸이를 구출할 뿐만 아니라 푸이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새 삶을 찾기를 바라며, 푸이를 무조건적으로 몰아붙이는 다른 교원들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좋은 인물로 나오며 푸이도 홍위병 앞에서 그를 진심으로 변호한다. 홍위병들이 교도소장을 고발하는 죄목은 제국주의자, 반동분자, 배신자인데 이는 사실 푸이가 과거 고발당한 죄목이다. 푸이를 옹호하는 교도소장의 성향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거나 아니면 당시 문혁의 광풍에 의해 홍위병들의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된듯 하다. 자고로 이 시기는 툭하면 제국주의자니 배반자니 반동이니 해서 조리돌림 당하거나 살해되던 시기였다. [30] 고위급 인사였기 때문에 돈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고귀한 신분이 문제였다. 푸이가 홍위병들이 싫어하는 청나라와 만주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홍위병들에게 공격받을까 두려워 병원들이 입원을 거부한다.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푸이를 홍위병들의 폭력이 심하지 않은 베이징의 병원에 입원시켰다. [31] 단순히 홍위병 폭력이나 푸이의 과거 신분, 문혁으로 인한 의료체계의 붕괴 이런 걸 다 차치해서 사회주의 국가 의료인들은 자본주의 국가 의료인들과 달리 일단 엘리트란 인식 자체가 별로 없고(한때 북한에선 대놓고 여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돈벌이나 하려고 하는 일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현재는 북한이 워낙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니 의사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고 인기도 많아졌지만 친절 서비스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 딱히 자본주의 병원처럼 환자 유치를 하기 위한 서비스 정신을 보일 필요도 없기 때문에 환자 대접이 꽤 박한 걸로 유명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중국으로 여행을 간 사람들 수기를 보면 병원에서 얼마나 환자를 험하게 다루는지 기겁했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중국내에서도 이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아서 그나마 서비스가 좋은 대형병원으로 몰려들어와 대형병원이 과부하 되는 것이 협소한 의료보장범위와 비교적 낮은 지방병원의 질과 더불어 문제점으로 지적될 정도였다. [32]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의 푸이묘. 별칭은 헌릉(獻陵). [33] 조선에서는 정조가 공식 석상에서 먼저 안경을 썼고, 일본의 경우 쇼와 덴노가 공식 석상에서 먼저 안경을 썼다. [34]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의 사촌형으로 김용 소설에서 사촌오빠들이 찌질하게 나오는 모티브가 되었다. 실제로 쉬즈모의 필명을 바탕으로 한 변태 악역이 등장하기도 한다. [35] 환관이 되기 위해 거세했는데 깨어나 보니 청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푸이를 보좌했다. 그나마 푸이는 말년에 일자리도 얻고 편안하게 살았으나, 쑨야오팅은 만주국 멸망 후 일자리를 잃고 떠돌면서 온갖 조리돌림을 당하며 기구하게 살기도 했고, 만주국 시절에도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되돌려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한 후에는 사찰에서 근무하며 살았다. 1996년 12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36]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자신의 말을 안듣는 동생에게 자신이 황제라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옆에 있던 환관에게 먹을 마시게 하는 것으로 단편적으로나마 푸이가 환관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줬고 드라마 마지막 황제에서는 분량 상 더욱더 자세하게 묘사했다.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보좌한 환관이 개를 잡지 못하자 총으로 엉덩이를 쏘았고 그 상태에서 곤장 40대를 때리게 했으며 추가로 때리려고 했으나 유모의 만류로 그만두고 대신 바닥에 다식을 던져 먹게 했다. 그후로도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등극하자 도주하려던 그 환관을 붙잡아 때리려고 했고, 그후 그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복직하자 뺨을 때렸다. [37] 청나라는 초대 천명제부터 10대 동치제까지 모두 완벽한 부자 세습으로 제위가 승계되었다. 이 법칙이 깨진 게 광서제와 선통제다. 다만 선통제도 명목상으로는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제위를 승계했다. [38] 청나라 말기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된 것과는 무관하다. [39] 자식을 두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제수가 되는 사가 히로는 푸이가 게이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했는데 1962년 재혼한 부인 리수셴은 게이설을 부정하고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40] 이름을 한족식 이름인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41] < 유전의 왕비, 최후의 황제>에서는 사가 히로와의 결혼으로 인해 푸이와 푸제가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화해하고 사가 히로 또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 푸이는 일본 여자와 결혼한 동생을 평생 일본 스파이로 의심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42] 만주국 황실과는 별개로 청나라 황실 수장은 다른 인물이 맡으며 현재 청나라 황실 수장은 아이신기오로 헝전(爱新觉罗 恒镇)이다. 그는 선통제의 7촌 조카이자 양자 유얀(毓喦)의 장남이다. 사실 선통제의 전임자인 광서제부터가 직계가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황제였으므로 정통성 측면에서 청나라 황실의 계보는 사실상 단절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43] 놀랍게도 완룽의 친오빠가 일본군에게 이권을 얻는 대가로 여동생이자 황후인 완룽이 황제인 푸이 몰래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당하는것을 묵인했다고 한다. [44] < 마지막 황제>에서는 이 이야기가 실제 사실과 다르게 각색되어 나온다. 아이는 완룽이 푸이의 일본인 운전사와 사통해 생겼고 그 사실을 일본군도 알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선 완룽이 "당신을 위해서 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만주족이에요!"라고 하자 푸이는 일을 덮기 위해 "황후가 수태를 했소. 만주국의 후사가 생겼소."라고 둘러댔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만주영화협회 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푸이에게 "네, 폐하. 여기에 아이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운전사의 이름을 보여주어 푸이를 조롱한다. 그리고 푸이는 표정이 하얗게 질려서 완룽의 손을 뿌리치고 식당을 나가버리고 아마카스는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며 온 아시아는 일본의 영토다!"라고 의기양양해한다. 그 결과로 황실의 명예를 위해 운전사는 총으로 즉결처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의사가 독극물이 든 주사를 놓아 죽이는 걸로 묘사된다. [45] 무엇보다 아기를 태워죽여버린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지나치게 잔인한 행위로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이기 때문이다. [46] 푸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인 아기는 딸이었기에 설령 죽이지 않고 아기가 오래 살았더라도 딸은 청나라 황제위(아이신기오로 가문 수장)를 물려받을 수 없기에 계승서열에 변화를 줄수 없는건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푸이는 그걸 떠나서 자신과 피 한방울 안 섞였다고 확신하는 아이가 황제가 되든 못 되든 황족 노릇 하는게 정말 치욕스럽고 싫다는 것. [47] 이때 유일하게 완룽을 돌봤던 사람이 일본인이자 손아랫 동서인 사가 히로다. [48] 다만 이때 완룽은 정신질환이 워낙 심해서 일상생활도 못할 정도가 되었기에 공산군 병사들과 교도관들도 그녀를 학대하지 않고 무시했다. [49] 완룽 사후 사가 히로 저우언라이가 만났을 때 이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가 히로가 이 일을 따지게 되었는데 저우언라이는 이 일에 놀라며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고 당시 공산군 수뇌부에서 만주국 황족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하기는 했으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선 장병들이 일본인들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학대가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50] < 마지막 황제> 노래들 중 가장 유명한 노래인 Rain이 바로 원슈와 푸이의 이혼에 관한 노래이며 작중 원슈가 저택을 나갈때 나온 노래다. [51] 더 가디언은 그러한 이유로 푸이의 실제 인성이 추악했다고 비난했다. 링크 심지어 하인이 구타 후유증으로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52] 실제 푸이는 효각민황후에게 냉담했으나, 영화에서는 황후의 불륜을 알면서도 나름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아편 중독으로 폐인이 된 황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연기한 푸이 역 배우 존 론의 눈빛 연기는 실제 역사를 떠나서 인상적인 명연기였다. [53] 양가휘는 늙어버린 푸이를 연기하기 위해 직접 앞머리를 밀고 이마를 튀어나와 보이게 특수물질을 삽입하고 틀니를 끼웠다. 이 영화는 1984년 개봉예정이었으나 양안관계가 심한 당시 상황에서 청나라 말기 3부작을 중국대륙에서 촬영했다는 이유로 이한상 감독과 양가휘가 한동안 홍콩영화계에서 퇴출되어 개봉되지 못하다가 1986년 3월경에 개봉했다. [54] 마지막 황제를 의식해서 국내 방영시 <마지막 황제 부의>란 제목을 붙였다. [55]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과 중국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를 모두 맡아봤으니 중국에서 약 2000년 동안 이어진 황제 중심 중앙 집권 체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담당한 셈이다. [56] 제작 당시에는 독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서(밝혀진 건 2008년이며, 황성쟁패의 제작년도는 1990년) 독살설이었다. [57] 아이러니하게도 만주 웨스턴 또한 선통제를 포함한 만주국 황실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단 1편도 없었다. [58] 중화제국 선포 시 선통제로 이름이 바뀌고 옷도 양복에서 중국 황제의 옷으로 바뀐다. [59] 4편 버전 카라는 '양쯔 강에 흐르는 피' 패치 이전까지 중국 남부는 독일제국 산하인 동아시아 회사가 장악했으나 설정이 바뀌었다. [60] OTL의 만주국 장쭤린 봉천 정부가 대체하고 중국 국민당 세력은 철저히 패배하여 장제스가 죽으면서 우파는 리쭝런처럼 군벌화 되었고, 좌파는 왕징웨이처럼 생디칼리즘 국가들로 도망치거나 쑹칭링을 중심으로 푸젠성 남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다. [61] 왕징웨이가 너무나도 견제해서 오히려 사치도 못 부려서 검소하게 살았고 하인들에게 행패도 못 부렸다고 한다. [62] 이 와중에 개그씬이 있는데 아줄라가 자신의 신하로 위장하자 아줄라에게 자기 애완곰의 을 치우게 했다.(...) [63] 예전에 주로 process 2.3.1이라는 명의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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