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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 | |
<colbgcolor=#bc002d,#11102d><colcolor=#FFFFFF> 일시 | 2009년 5월 23일 오전 6시 15분경 |
장소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화산 부엉이바위 |
사건 유형 | 투신자살 |
당사자 |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 당시 전직 대통령 신분) |
원인 | 자신의 검찰 수사로 인해 고통받은 주변인들에 대한 죄책감,[1] 부정적 인식 예감,[2] 정신건강 악화[3] ( 유서 참조) |
결과 | 오전 9시 30분경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 사망 판정 |
사인 | 두부 외상 ( 두개골 골절)[4] |
영향 |
공소권 없음으로 검찰 수사 종결 이명박 정부 및 검찰,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 악화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 및 친노 세력 부활[5] 민주당 지지층 결집[6] |
[clearfix]
1. 개요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한 사건.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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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30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7][8] |
대통령직 퇴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재임 시절 측근들이 연이어 구속되면서 검찰의 수사를 앞둔 상황에 놓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는 몇 개월에 걸쳐서 장기간 진행되었다. 먼저 박연차에게 받은 15억은 이자율 7%, 차용기간 2008년 3월 ~ 2009년 3월로 명시되어 있는 차용증을 써 주고 받은 것이라 사안간의 거래로 판단돼 죄를 묻기 어렵다며 무혐의 처리되었고 강금원이 노무현에게 전달한 70억은 창신섬유 이사회에서 회의 후 후원격으로 건넨 것이며 건넨 시점도 퇴임 이후이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불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강금원의 횡령 및 탈세 사건을 수사하던 대전지검은 이 돈을 회사에서 횡령한 것으로 판단해 사법처리하였다. 당시 강금원은 뇌종양을 앓고 있었으나 구속되었고 병보석마저 불허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글로 남겼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밝히면서 더 이상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며 스스로 칩거에 들어갔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9] 강금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병보석이 허락되었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버렸고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노무현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작성하였고 부인 권양숙 여사가 자신 모르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0] 권양숙도 박 회장한테서 받은 10억과 현금 3억원을 모두 자신이 전달받았다고 인정했으며 이후에도 박연차가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전달한 1억원어치의 백화점 상품권이 권 여사에게 돌아간 정황이 드러나 다시 수사를 진행했다.
이 상황에서 박연차는 4월 검찰의 수사에서 “500만 달러를 연철호[11]에게 송금하기 이전에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전에 협의를 했었다”고 진술하여 # 당초 퇴임 이후에 이 사실을 알았다는 노무현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곧바로 해명과 방어가 필요하다는 제목의 글에서 검찰 수사를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박연차는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아내가 돈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 구차하고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몰랐던 일은 몰랐다고 말하기로 했다며 “나는 아내가 받은 줄 몰랐다는 사실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 진술이 나온 후 검찰은 다음주 내로 노무현 내외를 불러 수사하기로 했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두환 다음으로 세 번째로 검찰에 소환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1시 20분경부터 11시 20분경까지 2008년 12월 연철호를 통해 박연차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500만 달러, 2007년 6월 정상문을 통해 권양숙이 받은 100만 달러, 그리고 정상문이 횡령한 12억 5,000만원의 특수 활동비[12]에 관련한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노무현에게 이런 돈의 흐름을 재임 기간에 알고 있었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체로 '모른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2007년 6월 말 박연차가 권양숙에 전달한 100만 달러 중 일부로 의심되는 30만 달러가 금융정보분석원의 외화송금 거래내역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건호와 딸 노정연에게 송금되었는데 이 사실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알고 있었느냐고 추궁했으나 이 사실도 '전혀 몰랐다'며 부인했다. 11시경 검찰이 박연차의 대질을 추진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후 검찰은 30만 달러의 출처가 박연차의 돈 100만 달러의 일부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권양숙을 비공개로 다시 소환 조사하기로 했다.
언론들은 참여정부가 내건 최대 무기였던 도덕적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며 주변 참모들의 연이은 비리 소식과 구속, 노건평의 이권 개입, 정치자금 주선과 노무현도 시인한 아내의 뇌물 수수로 인해 청렴과 깨끗한 정치를 내걸던 참여정부의 이미지가 추락했다고 보도했으며 많은 국민들도 무능해도 도덕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 참여정부 인사들의 연이은 비리 의혹으로 인해 큰 실망감을 표했다.
여담으로 박연차는 당시 검찰에서 박검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품을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하던 정치권 인사와 관료에게 '다 끝났으니 사실대로 털어놓으라'면서 당사자를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상대방이 박연차 회장과의 금품 수수를 시인하든지, 부인하든지 관계없이 박연차가 대질 조사에서 기존 진술을 그대로 유지한 점은 법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검찰의 공소 유지에 청신호가 된다"고 전했으며 "이 진술이 법정에서도 일관되면 노무현에게 유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5월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질 때 이인규 중수부장 주도로 홍만표, 우병우 등이 합류하였다.[13]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14]
이후 고가의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논두렁 발언은 사실이 아니었다.[15]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홍만표와 우병우는 비리 및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갔고 이인규는 모 기업의 채용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국정원 관련 수사가 시작되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를 노무현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이인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며 모든 게 끝나면 제대로 된 당시의 사실을 밝히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인규는 세월이 흘러 2019년 8월에 미국에서 돌아온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고 귀국 후에는 서울 자택에 머물고 있다.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진술은 2009년 5월 13일에 SBS가 단독 리포트로 내보낸 기사가 출처다. 이 기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준 명품 시계를 받아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유시민은 이후에 "노무현이 시계의 존재를 알게 되어 권양숙에게 화를 내며 망치로 깼다고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한 방송에서 발언했다. 결론적으로는 논두렁에 버린 것이 아니라 망치로 깨 버렸다는 것이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박연차로부터 시계를 받은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2015년에는 검찰에 따르면 2009년 이인규 전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이끌던 ‘노무현 수사팀’은 노무현 전 대통령 소환 전부터 국정원 측과 정면 충돌했다고 하는데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기소 및 명품시계 여론전 등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2017년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 직원 4명이 ‘논두렁 보도’ 직전인 2009년 4월 하금열 당시 SBS 사장과 접촉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보도를 적극 요청하고 주장했다고 발표했고 그 결과물이 2009년 5월 13일 단독으로 내보낸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라고 한다. 해당 과정에서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 등 신병 처리에 치중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수사팀이 노무현 전 대통령 소환 후 임채진 전 검찰총장에게 구속 기소를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의 분위기도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구속된 형사범들과 다르게 불구속으로 처리할 이유가 없다"였다. 한 관계자는 "600만 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구속 수사한다면 앞으로 남은 수사에서 1억 ~ 2억 원 씩 받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어떻게 구속하자고 할 것이냐"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임채진 총장과 검찰 원로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불구속 기소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밝히면서 '말 바꾸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7년 12월 연철호가 박연차에게 500만 달러 투자를 부탁했고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버진아일랜드에 다음 해 1월에 타나도인베스트먼트라는 창투사를 설립해 다음 달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직전 홍콩 계좌로 돈을 송금받았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은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실을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가면서 알게 됐다"며 "투자이고 하니까 그냥 정상적 거래로 봐서 별 문제가 안되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2017년에는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한 프로그램에 나와 당시 담당 검사(중수1과장)였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 수사를 강하게 주장했다고 밝혔다. 정두언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어차피 재판으로 가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실형을 받을 텐데 구속되면 본인이 한 걸로 여론몰이가 될까 부담을 느꼈다."며 "구속시키지 말라고 검찰 수뇌부에 전달했는데 우병우가 버텼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병우 전 수석이 버티는 바람에 안타까운 죽음이 일어났다.", "이 죽음이 엄청난 촛불집회로 이어졌으니 MB 입장에서는 우병우가 얼마나 밉겠냐?"며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검사장으로 승진되지 못하고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된 이유를 설명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선데이저널이 보도한 윤석열 대통령의 녹취록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노무현을 잡으려고 박연차를 잡겠다고 한 것인데 박연차가 그것을 알고 구속돼 가지고 송치돼 오자마자, 구속되자마자 (대검) 중수부에 영장이 딱 떨어지니까 ‘나 노무현에게 돈 줬다’고 했잖아"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검에서 수사 초기에) ‘야 이거 어렵다’고 미적대니까 중수부장, 수사기획관 싹 바꿔버린 것 아니냐”며 “이명박 정부 최대 패착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수사 초기인 2009년 1월 중수부장은 박용석 중수부장에서 이인규 기조부장으로, 수사기획관도 최재경에서 홍만표로 교체되었다. 윤석열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2009년 8월까지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지냈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
다만 2011년에 노정연의 위법 혐의를 조사한 대검찰청 중수부 검사가 바로 윤석열이었으며 노무현의 사위 곽상언을 조사한 검사도 윤석열이었다. #, #, #
당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0.6%의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하였고 찬성한 국민들은 27%에 그쳤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0%,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2%,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5%에 달한 것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여론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수사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 여론은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나라당은 검찰수사와 발맞추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으나 노 전 대통령의 검찰소환을 하루 앞둔 2009년 4월 29일 2009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5곳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곳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제서야 부정적인 국민 여론을 인식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늦추면서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한나라당 핵심 당직자의 전언에 의하면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도 재보궐선거 참패 뒤에 악화된 국민 여론을 인식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구속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심지어 청와대조차도 국민 여론을 의식하여 불구속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도 불구속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조차 불구속을 주장하였으며 대부분의 검사장들도 불구속을 주장하였으나[16] 수사를 전담하던 이인규, 우병우, 홍만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수사를 강력히 주장하고 버티면서 사태는 더욱 난항으로 빠져들었다.[17]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한 지 3주쯤 지난 날...
3. 사망: 2009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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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공식 영정[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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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프로그램 공감! 특별한 세상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뉴스 속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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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특집 MBC 뉴스데스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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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일,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19] |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은 자택의 컴퓨터에 아래아 한글 파일[20]로 유서를 미리 작성해 두고 사저 뒷산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 이후 경호 차량(은색 현대 그랜저 TG)에 실려 진영읍에 있는 당시 세영병원(현 진영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자그마한 시골 병원 특성상 수술이 불가능하여 다시 경호원들의 그랜저 차량으로 인근의 대형병원인 양산시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도착 후 사망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원래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화장하여 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수원시연화장 8번 화장로에서 화장된 후 봉하마을 내 묘역에 안장되었다. 향년 62세.
자살 직후 김경한 법무부장관은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을 것으로 안다( 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의 수사 종결)고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이 자진 사표를 냈고 법무부장관 사표는 반려되었지만[21] 검찰총장은 받아들여졌다.[22] 사건은 추가적인 심문 및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피의자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으로 발표되고 내사 종결로 마무리되었다.
노무현의 죽음이 알려지자 각계각층에서 검찰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23]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은 노무현에 대한 수사를 지켜본 뒤 검찰동우회 소식지에 '수사십결'[24]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당시 노무현에 대한 수사팀의 수사 행태를 비판하였다. 실명으로만 작성 가능한 대검찰청의 '국민의 소리' 게시판조차 검찰에 대한 비판으로 도배될 정도였다. #, #2, #3, #4 '검사님의 속사정'이란 책에 나온 내용에 의하면 어느 검찰 간부는 당시 수사팀이 검사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으며 무리한 수사를 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전직 대통령은 다 허물이 있는데도 손도 못 대면서 봉하마을에 내려간 힘없는 노무현만 잡아 족치는 건 비겁한 짓이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주었다"라고 검찰을 질타했다.[25] 홍준표의 이 발언은 검찰의 수사 절차에 대한 비판이며 홍준표는 "노무현, 뇌물 먹고 자살했다는 것은 막말 아닌 팩트"라고 발언했다. # 홍준표는 노무현 사망 10주기 하루 전날인 2019년 5월 22일에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한 노무현 회고 영상에서도 그때 검찰의 행동은 모욕이었다고 말했다.
6월 12일, 검찰은 6개월에 걸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최종적으로 발표하였다. 노무현 사후 급격히 불타오른 여론을 의식해 검찰은 처음에는 중수부장실에서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을 고려했으나 언론의 반발을 의식해 공개 진행으로 선회하며 여론을 정면 돌파할 의지를 보였다. # 박연차 수사 결과 발표에서 검찰은 이 수사는 '뇌물수수 의혹'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증거관계 설명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공개될 참고인들의 사생활과 명예가 훼손될 우려가 높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증거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박연차의 640만 달러 공여혐의 부분도 추가 기소하지 않고 내사종결(입건유예)했다. 검찰은 “수사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해 안타깝고 애통하게 생각한다”면서도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며 수사 기록은 영구히 보존되고 추후 역사적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노무현 변호인단은 어이없다는 입장과 함께 검찰이 자기변명과 책임 회피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변호인단의 문재인 전 변호사는 자신을 방어하고자 고인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훗날 문재인 측에서 이인규를 비판하며 몇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 검찰 측에서는 그러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곧이어 검찰은 전직 대통령 구속 여부에 대해서 검찰은 이미 불구속으로 내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당시 박연차에게서 금품을 받은 사람은 모두 참고인으로서 다 불구속이 확정된 상태였음에도 유독 금품을 받지 않은 노무현에게만 피의자로서 구속 여부를 심의하였으며 시간을 질질 끌며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러한 검찰의 혼란스러운 행태로 인해 검찰은 또 다시 비난받았다.
검찰은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다. 2015년 2월 당시 중수부장이었던 이인규는 당시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그 진실의 일부분을 밝혔는데 국정원에서 망신주기 여론 플레이를 제안하였으며 검찰의 권한을 무시하고 국정원이 주도하려고 하여 다툼이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국정원이 여론플레이의 주역이었으며 검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했다. 국정원 검찰에도 노무현 시계 언론플레이 요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같이 수사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는 이인규의 발언에 긍정하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은 특검을 요구하였으나 국회에서 여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참고로 노무현에 대한 구속 수사를 밀어붙이던 검사 3인방의 운명도 주목받았다. 홍만표 전 수사기획관은 법조사상 최대비리인 정운호 게이트에 연루되어 2018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고, 공명심에 눈이 멀어 불구속을 요구한 국민 여론도 무시하며 구속을 밀어붙이던 우병우 전 중수1과장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어 한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우병우 문서 참고. 이인규 당시 수사팀장은 모기업의 인사청탁 의혹 등에 연루되었고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가 발족하기에 앞서 문재인 당선과 함께 재직 중이던 법무법인에서 해고되었고[26][27] 미국으로 날아가 장기간 체류했다가 2019년 8월에 귀국한 후 서울특별시의 자택에 머물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노무현의 저주'란 말이 떠돌기도 하였다.
노무현이 뇌물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진보 진영 측은 2017년에 국가정보원 비리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가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으로 간첩 잡으라고 국민들이 혈세로 제공한 대북공작금까지 유용하며 노무현에 대한 뒷조사를 벌였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뇌물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세간에 내놓지 못했던 것을 보면 노무현은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만약 노무현이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왜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법으로 다투지 않고 자살을 선택했는가?"라는 반문이 존재하기도 한다. 또 이에 대해 반박하는 측은 이명박 전 대통령 등 다른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봐도 소환 후 일주일 안에 영장을 청구하고 이후 기소한 반면 노무현에 대해서는 소환 후 3주가 지나도 영장을 청구하지도, 기소하지도, 무혐의 처분하지도 못한 채 국정원과 손잡고 보도자료나 돌리는 등 당시의 수사 행태가 도저히 법으로 다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변호인으로 검찰 수사에 전해철과 같이 들어갔던 문재인 전 변호사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 검찰이 제시한 근거는 박연차의 진술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영장을 청구하지는 못할 것이고, 불구속 기소를 해도 도저히 유죄 판결이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병우의 친구라는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해 우병우가 자신한테 "정황상 의심이 가는 거지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라고 주장했다. #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력이 강한 국정원,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비롯하여 공직자윤리실과 경찰청 등의 기관이 노무현의 주변 인물들을 불법으로 사찰하는 등 모두가 노무현 하나를 위해 총동원되었다. 국정원 불법 사찰 사건 문서 참조.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노무현이 자주 가던 삼계탕집인 토속촌마저 세무조사에 들어갔을 정도였으며 주변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와 피의사실공표 등은 너무 잦았다. 실례로 노무현이 정계 입문은 커녕 사법 시험을 치르기 전부터 다녔던 성당의 송기인 신부는 당시 식당에 가서 밥을 사먹은 영수증까지 털릴 정도였으며 그의 좌장인 안희정은 집에 계좌를 추적했다는 검찰의 통지서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면서 어떻게 소나기가 노무현 주변에만 내릴 수 있냐고 말할 정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즉, 대체로 몰리는 결론을 요약하자면 가족이나 측근들은 떳떳하지는 못했지만 노무현 본인이 직접 범죄를 주도했는지의 여부가 맞냐에는 의문이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내와 측근들의 도덕적 문제는 확실하지만 노무현이 이들의 문제에 관여해 범죄의 선을 넘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고, 당시 권력 기관들의 표적 세무조사나 사찰, 수사 과정에서의 피의사실공표 등의 모욕주기 행태는 너무 심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이것 때문에 이명박과 검찰은 노무현의 곁을 따르던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진들과 노무현의 옛 동지, 추종자들에게 단단히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이는 당시 한나라당 소속 사람들에게도 좀 너무하다고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홍준표와[28] 박희태는 대놓고 비판했으며 진영을 막론하고 이건 사람 하나 잡으려고 전 국가 기관이 나서 노무현을 난도질한 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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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에서 진행된 노무현의 발인식[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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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식에서 영구차에 쌓인 종이비행기를 바라보는 명계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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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 진행된 국민장 영결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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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 후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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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연화장으로 들어서는 영구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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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터로 들어가는 노무현의 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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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식에서 허토의식을 하는 권양숙 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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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묘비 앞에서 추모하는 참배객들 |
3.1. 사망 당일 행적
전직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례 없는 사건이었던지라 서거 직후부터 사망 당일 행적에 대한 기사와 논란이 많았고 일각에서는 타살당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2009년 6월 2일 봉하마을에서 진행된 현장 검증을 통해 결론지어진 서거 당일 행적은 다음과 같다.- 05:21: 사저 안에 있는 컴퓨터로 유서 작성, 저장
- 05:35: 사저 인터폰으로 "산책 나가겠다" 고 경호원에게 연락
- 05:38: 경호원 이모씨, 사저 정문에 도착
- 05:47: 사저 출발(경호원 이모씨 1명만 대동)[31]
- 06:10: 봉하산 부엉이 바위 도착
- 06:14: 경호원 이모씨에게 "정토원에 가서 선진규 법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오라" 며 부탁[32]
- 06:15 ~ 06:16: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추정)
- 06:17: 경호원 이모씨, 노무현이 사라졌다는 사실 확인
- 06:18 ~ 06:51: 경호원 이모씨, 등산로와 사자바위, 정토원 등을 수색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찾지 못함
- 06:51: 경호원 이모씨, 부엉이바위 아래에서 쓰러져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발견
- 06:52 ~ 06:58: 경호원 이모씨, 경호동으로 연락해 차량 대기시키라고 전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업고 하산한 뒤 두차례 인공 호흡 실시.
- 06:59: 경호원 이모씨, 뒷좌석에 노무현 전 대통령 태우고 김해시 세영병원으로 출발
- 07:20: 김해시 세영병원 도착, 응급조치 실시
- 07:40: 상태 위중하여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이동조치
- 08:13: 양산부산대병원 도착, 10층 VIP 특실병동에서 심폐소생술 실시했으나 회생불능
- 09:30: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판정, 서거
4.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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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 동안 지자체 운영 102곳과 민간 운영 233곳 총 335곳의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2009년 5월 29일까지 장의위원회 추산으로 도합 500만 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몰렸다. 지방 분향소 설치현황 #[33]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0%대의 낮은 지지율로 허덕이던 민주당은 순식간에 지지율이 28%로 급등하여 정당 지지율 1위를 기록하였고 한나라당은 24%를 기록하여 1위에서 2위로 내려앉았다. 시사in의 분석에 의하면 노무현의 사망으로 인해 일부 한나라당 지지층과 부동층, 진보 진영이 민주당 지지로 결집하였다고 한다. 여론조사 결과 60%의 국민들이 노무현의 사망이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며 이명박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도 56%에 달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대선후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성구 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대선후보 대열에도 끼지 못하던 유시민이 정동영을 꺾고 야권 대통령 선거 후보 지지율 1위의 대권 주자로 떠오르기도 하였으며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민주당 서울특별시장 예비 후보 적합도에서 친노 인사 3명(유시민, 한명숙, 강금실)이 1위~3위까지를 독차지했고 이들 모두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을 가상 대결에서 꺾는 것으로 나타났다.[34] 노무현이 사망하기 이전까지 언급조차 되지도 않던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유력한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등장하게 된 것은 '노무현 사망 후폭풍'의 영향력이 그만큼 엄청났다는 것의 방증이다.
민주당의 역학구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노무현과 가까웠거나 친노 진영의 지지를 받은 인사들의 위상이 급상승하고 비노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특히 비노 인사들로부터 맹공격을 받던 참여정부 산자부 장관 출신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의 위상이 강화되었으며 노무현이 기용했던 이광재, 안희정, 김두관 등의 정치적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추모 기간 동안 네이버와 다음 등에는 고(故)노무현 前대통령 추모웹툰( 링크)이 올라왔으며 현재도 만화 전문을 볼 수 있다. 사건 직후 각 지역에서 시국선언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얼마 후에 2009년 6.10 범국민대회 등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2010년 치러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우연찮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1주기 추모식이 겹치는 바람에 친노 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운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지방선거 직전에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명칭만 들어가면 여론조사 지지율이 5%~15%가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해 노무현재단에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노무현 재단 관련 타이틀을 달고 싶다는 후보자들의 민원이 쏟아졌다고 한다.
특히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노무현의 최측근들이었던 안희정과 이광재, 김두관 등이 각각 충청남도지사와 강원도지사, 경상남도지사 등에 각각 당선되어 화제를 모았고 참여정부 행정관, 비서관 출신들이 대거 기초자치단체장에 당선되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여론조사 경선에선 후보의 경력에 '노무현' 문구만 들어가도 지지율이 20% 상승하여 비노계 후보들이 여론조사 문항에서 '노무현' 이름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노무현의 추도사를 낭독한 한명숙 전 총리는 큰 인기를 얻어 민주통합당의 당대표 자리까지 차지한 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진두지휘하기도 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은 비록 김용민 막말 파문의 직격탄을 맞아 패하긴 했지만 127석의 의석수를 확보하였는데 이 중 참여정부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훗날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를 형성했다. 정두언 전 의원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이은 참패를 거듭하던 민주당을 되살아나게 한 원동력이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분석하였다.
노무현의 죽음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에도 영향을 미쳐 2013년 10월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노무현이 박정희를 호감도에서 앞섰고 2016년에는 역대 호감도에서 박정희를 완전히 꺾었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발 직후에는 박정희의 호감도가 빠지면서 노무현의 호감도가 처음으로 50%로 상승했다. 2017년 5월 여론조사에서는 54.2%의 호감도를 기록하여 20.6%의 호감도를 기록한 박정희를 누르고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10월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 2019년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박정희를 4위로 제치고 3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 2023년 갤럽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긍정평가 1위를 기록하였다. #
이 사건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큰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며 사실상 201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정치 판도를 완전히 결정지은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 노무현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호주국립대학교 김형아 교수가 기고한 논문에 의하면 기존의 ' 김대중 vs 박정희' 구도로 돌아가던 한국의 현대사가 노무현의 죽음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노무현 vs 박정희'의 구도로 변환되었다고 한다.
-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현대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시대정신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꼽았고 그 상징이 박정희와 노무현이라고 정의하였다.
- 오마이뉴스 기자 손병관[35]은 저서 '노무현 트라우마'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1950년 한국 전쟁,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이 정도까지 사람들의 의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 없었다고 평가하면서 노무현의 죽음 이후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한국 사회는 그의 죽음이 남긴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 이데일리의 김성곤 기자는 노무현은 사후에 한국정치의 중심이 되어 정치구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수 많은 유력한 정치인들이 노무현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한국 정치에 노무현은 없지만 노무현이 강력하게 존재하는 역설적인 정치구도가 형성되었다며 여당, 야당 모두 이러한 노무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
-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노무현은 죽음을 통해 비극적 영웅이 되었고 그의 자살로 인해 죄의식을 갖게 된 대중들은 노무현에 대한 우상화를 통해 자신들의 죄의식을 해소하고자 했으며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 극단적인 대립이 생겨났다고 분석했다. #
- 조선일보 논설위원 선우정[36]은 노무현이 죽은 후 386 운동권이 그의 묘소가 있는 고향 마을을 민주성지이자 제단으로 탈바꿈시키고 매년 성대한 추모식을 통해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며 비판하였다. 선우정은 좌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무현을 가짜 신이자 우상으로 둔갑시켰다고 분석하며 노무현에 대한 우상화를 타파해야 후세대에 대한 악영향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 노무현을 수사했던 이인규 전 검사는 노무현의 죽음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하며 당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수사 기록을 책으로 냈다고 밝혔다. #
- 매일경제신문 기자 노원명은 노무현의 자살이 시민사회와 정치의 생태계를 바꿔버렸고 그로 인해 진보 정치에 국가는 사라지고 진영논리와 이익 비즈니스만이 남았다고 주장하였다. #
- 시사저널 편집인 전영기[37]는 폐족에 몰린 친노 세력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슬픔을 검찰에 대한 분노로 전환시켜 마침내 재집권에 성공하였다고 분석했으며, 노무현에게는 신화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의 죽음을 신화에서 사실로 되돌려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
- 언론인 조갑제는 노무현 사망 사건을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이라고 평가하며 그로 인해 종북 좌파 세력이 되살아나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 5년간 대한민국을 체제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
- TV CHOSUN의 시사제작국장이자 앵커인 박정훈은 노무현 14주기에 TV조선의 방송을 통해 노무현의 죽음이 사후 15년이 지나도록 논란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노무현이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성역으로 남겨져선 안 된다며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 이장규 중앙일보 고문은 노무현의 충격적인 죽음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단숨에 바꾸어놓았다면서 노무현이 망신과 수치를 견딜수 없어 던진 목숨이 폐족으로 전락한 친노세력을 부활시키고 노무현 자신을 영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문재인은 노무현의 사망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고 본인도 정치에 나설 생각이 없었지만 노무현의 국민장 이후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순식간에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였으며 2012년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를 거쳐 2017년에 결국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시민은 썰전에서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으로 노무현의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고 표현했다.
노무현의 죽음은 민주개혁세력을 결집시키고 친노란 멍에 때문에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인재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함량 미달 정치인들이 노무현의 이름을 팔아 정계에 데뷔하거나 대중영합주의에만 혈안이 된 일부 정치인들이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수시로 노무현 및 친노의 이름을 팔아대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일례로 별다른 경력 없이 노무현재단 관련 타이틀만 가지고 선거에 나선다든지,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인 시절 잠깐 맡았던 명예직이나 한직 등을 크게 부풀려 말하거나 고인과 과거 인연이 있었음을 강조하며 관직, 국회의원직 등을 얻으려 하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지지자들의 애정을 악용하여 자기들의 자리를 보전하는 데 써먹는 등 고인의 이름에 먹칠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친노 - 친문 진영의 특유의 배타성, 방어성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참여정부 후반기부터 이어진 친노의 몰락과 이 사건으로 인해 친노 - 친문 진영은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큰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노무현을 비판하며 이른바 '내부 총질'을 한 인사 및 단체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노무현의 사망은 이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장 노무현의 적통이라고 불리는 문재인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친노를 잇는 친문은 대한민국 정치에서 주류 중의 주류 계파가 되었다. 노무현이 귀향 연설에서 극찬했던 친노 핵심 인사로 분류되는 유시민도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작가, 평론가, 방송인으로 두루 활약하고 있으며 '2017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 시사저널 조사) 3위에 선정되었다. 참여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해찬 전 의원은 무려 7선에 성공하는 등 많은 나비 효과를 일으켰다.
문재인은 한때 80%를 찍을 정도로 굉장히 높은 지지율을 선보였으며 더불어민주당도 중도 좌파 성향의 정당치고는 엄청난 지지를 받은 것에는 노무현을 이은 정권이라는 명분이 어느 정도는 존재할 것이다. 문재인 다음 대선 후보로 분류된 실질적으로 유력한 후보들 중에는 노무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많았다.
게다가 노무현을 소재로 한 변호인, 노무현입니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등의 작품들이 화제가 되었다. 노무현에 대한 오마주가 영화 곳곳에 담긴[38] 광해, 왕이 된 남자도 문재인의 관람 후 모습[39]으로 인해 노무현과 함께 오르내렸고 더 킹도 노무현의 당선 및 죽음이 영화의 터닝포인트로 작용하였다. 더 킹의 감독은 이 영화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심지어 '노무현의 남자들이 여의도를 접수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참여정부에서 정책실장 등을 역임했던 김병준이 임명되었고, 여당 대표로는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해찬이 당선되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희상은 국회의장으로, 정무수석을 지냈던 유인태는 국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동아일보는 '여의도를 넘어 한국정치 전반을 친노가 점령하는 모양새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그로 인한 여러 법조비리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련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적어도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난 과반의 여론이 적폐청산의 동력원이 된 이유가 이명박 정부 시절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것도 이명박에게 거의 불리하게 해석되는데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이명박이 저지른 범죄를 수사하는 것이다'와 동시에 '당신도 노무현을 무리하게 수사해서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인과응보다'라는 주장이 병존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당시 구속 찬성 지지율이 70%를 가볍게 넘겨 포토라인에 서기 직전에는 80%를 넘겼다는 것과 유죄 판결 이후 박근혜와 달리 사면 반대 여론이 60%를 넘겼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서 적어도 같은 대통령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노무현의 죽음이 적어도 대통령 후임인 이명박을 수사하는 데 이 정도까지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여론이 과반을 훨씬 넘는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에서의 대검 중수부 폐지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20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 2022년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등 문재인 정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한 검찰개혁 법안들도 그 원류를 따라가 보면 결국 노무현의 죽음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의 사후 회고록인 '운명이다'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제도 개혁 없이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하려 한 것은 나의 큰 잘못이었다. 퇴임 후 나와 내 동지들이 겪은 모욕은 이러한 잘못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그 동지 중 최일선에 섰던 노무현의 검찰 조사 당시에도 같이 조사실에 들어갔던 사람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었으며 그 밖의 당시 동지들은 국회의원과 장관 등이 되었다.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었고, 검수완박에 대한 논란은 계속 이어졌지만 윤석열, 김건희도 2022년 봉하마을 추모행사에 직접 방문했다.
방문객 수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딴지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정국 기간 관련 취재 및 특집보도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몰려들면서[40]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김어준은 당시 딴지일보에 쇄도하는 네티즌들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으로 돌려 말하며 자신에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였으나 결국 딴지일보가 부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를 런칭하여 진보진영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41] '나는 꼼수다'의 대성공으로 정치 관련 팟캐스트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보수 우위의 종편방송과 맞서는 민주진보측 여론시장이 팟캐스트계에 형성되었다. 이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으로 계승되기까지 했다.
노무현 사후 설립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은 무려 6만명이 넘는 후원회원과 전국 곳곳에 지역위원회를 가지고 있으며 전현직 유력 정치인들이 재단 이사장, 이사, 자문위원, 기획위원들을 맡는 막강한 정치재단이 되었으며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를 통해 현실 정치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노무현재단은 전직 대통령 재단 중 기부금 수익이 압도적인 1위로 모든 전직 대통령들의 재단, 기념사업회의 수익을 합한것보다 2배 이상 많다. # 사업 및 인력규모, 지출 역시 가장 크며 이는 현재까지도 노무현의 사후 영향력이 크다는 증거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생을 마감한 장소인 봉하마을은 김해시 최고의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 잔디공원과 생태문화공원이 들어서면서 정치색이 없는 일반 관광객들도 종종 찾는 명소가 되었고 민주당계 정당 소속 정치인이라면 필수적으로 들르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42] 보수 정당 정치인도 다양한 이유로 간간히 찾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태어나고 삶을 마친 지역인 김해는 지지정당마저 바뀌었다. 노무현이 귀향한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 최철국이 김해에서 당선될 만큼 이미 생전에 귀향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노무현이 사망한 이후엔 김경수, 민홍철, 김정호 등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보수색이 짙었던 김해에서 당선되었다. #
한편 개인적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매우 아꼈던 김대중 전 대통령[43]은 이 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2009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
5. 유서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유서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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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에 남긴 유서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하여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고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된 상태였다. 이 유서를 통해 당시 그가 겪고 있던 힘든 심정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측근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감옥에 들어갔다는 자책감이 담겨 있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대한민국 대통령답게 유서는 아래아 한글 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유서를 가리켜 자필로 기재한 이름, 날짜, 주소와 도장이 찍혀 있어야 효력이 인정되므로 법적 효력은 없다는 주장이 나온 적도 있으나 이는 사람이 임종에 대비하여 자기 유산의 처리나 기타 사항에 대하여 자기의 뜻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법적 구속력 있게 남기는 '유언장'에 관해서 유효한 것이지 이 사건의 경우처럼 자살하는 사람이 마지막 메시지로서 남기는 것은 유언장이 아니라 유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비슷한 맥락으로 잠시 타살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잠정적으로 노무현이 직접 쓴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유서가 공개되었을 때 네티즌이 봉하마을 주민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한 유서의 앞부분에 대한 음모론이 퍼졌다. 유서에 대해 음모론자들이 퍼뜨려주세요 식으로 주장했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는 것이 힘들고 감옥 같다.
나름대로 국정을 위해 열정을 다했는데 국정이 잘못됐다고 비판받아 정말 괴로웠다.
지금 마치 나를 국정을 잘못 운영한 것처럼 비판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부정부패를 한 것처럼 비춰지고,
가족, 동료, 지인들까지 감옥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게 하고 있어 외롭고 답답하다.
아들 딸과 지지자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
퇴임 후 농촌 마을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아 참으로 유감이다.
돈 문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깨끗했다.
나름대로 깨끗한 대통령이라고 자부했는데
나에 대한 평가는 먼 훗날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가짜 유서의 시작 내용이다.
나름대로 국정을 위해 열정을 다했는데 국정이 잘못됐다고 비판받아 정말 괴로웠다.
지금 마치 나를 국정을 잘못 운영한 것처럼 비판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부정부패를 한 것처럼 비춰지고,
가족, 동료, 지인들까지 감옥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게 하고 있어 외롭고 답답하다.
아들 딸과 지지자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
퇴임 후 농촌 마을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아 참으로 유감이다.
돈 문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깨끗했다.
나름대로 깨끗한 대통령이라고 자부했는데
나에 대한 평가는 먼 훗날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가짜 유서의 시작 내용이다.
6. 타살설
- [노무현 타살설을 주장하는 글(접기/펼치기)]
2009년 5월 23일 사망 이후 공식 사인은 자살로 판정되었지만 수십 미터에서 투신했는데도 즉사하지 않았다는 점[44], 두개골이 파열되었음에도 목뼈는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 다른 신체부위의 타박상이 적고 출혈이 적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아직도 노무현 타살설이 돌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age(2009-05-23)]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노무현 타살설이 언급되고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인(死因)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던 지지자들이 노무현의 사인을 제대로 밝히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은 부검도 없이 화장했기 때문에 정확히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본래 자살 및 타살이라면 부검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인을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유가족 측에서 고인의 유서에 쓰여 있는 '화장해라.'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 화장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타살설이 사실이었을 경우 영원히 미제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타살설을 부정하는 이들은 당시 이명박 정부나 노무현의 정적들(보수진영: 친이계(상도동계 후신), 친박계/ 민주진영: 동교동계, 비노계)한테는 노무현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노무현이 타살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하며 노무현은 실족사한 것인데 외부에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둔갑시켰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노무현이 딱히 자살할 이유도 없었고 타살당할 만한 이유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친노한테만 이득이다. 나머지 계파한테는 오히려 불리하다.
반대로 폐족될 위기에 몰려 있었던 민주당계 정당의 친노 진영에서 노무현을 마지막까지 도와주고 보호해 주기는커녕 '배후 세력으로 노무현을 위협하거나 가스라이팅 등을 동원해 노무현을 심리적으로 내몰리게 만들어 스스로 투신하게 만들었다'는 음모론도 있다.[45] 노무현의 죽음으로 결국 가장 큰 이득을 본 쪽은 친노 세력이라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비하 발언이 '어어 밀지마라' 같은 것이며 노무현 타살설은 대부분 이런 식의 고인드립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어어 밀지마라' 는 2010년대 후반부터 노무현 합성물에서는 사실상 필수요소 중 하나가 되었는데 2023년을 기점으로 이 발언을 파생으로 한 "어어+(명령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주로 부정명령어를 사용하거나 무언가를 만류할 때 사용되지만 대부분 이 말의 어원조차 모르는 편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반대로 범용성이 너무 높은 유행어가 되어서 그런지, '밀지마라' 가 아닌 다른 유행어를 쓰면 굳이 고인드립까지 연상시키기 어려워진 것도 있다.
그런데 변호사까지 했던 사람이 유서에 자필 서명을 쓰지 않았으며 컴퓨터로 쓸 경우에도 본인 서명은 필수인데 그것도 저장도 안 된 상태로 모니터에 띄우기만 했고 유서의 내용도 주변 사람에 대한 인삿말, 안부, 신변잡기, 비관 같은 것이 아니라 선문답 같은 내용으로 점철된 만큼 유서만으로는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몬 배후를 알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6.1. 반박
- 톨게이트 CCTV를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실려 있던 그랜저 경호차가 통과하는 순간 경광봉이 튀어나온다고 주장한다. 최초 원본에서 보였던 피흘리는 손을 조작한 것으로 보이는 의견이 있다. 이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저화질 캡처가 아닌 '원조' 동영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근거라고 볼 수 없다. 경광봉은 화면에 매우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만약 원본이 피 흘리는 손이었고 그 부분을 경광봉으로 덮어씌운 거라면 손의 움직임과 같아야 할 텐데 죽어가는 사람이 저렇게 날렵하게 손을 내밀 수 없다.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면 그 전까지 차체 밖으로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조작해야 하는데 이건 더 어렵다. 결정적으로, 손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을 보면 차창 테두리에 기댄 게 아니라 들고 있는 것으로 명확히 확인되는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기절 혹은 사망한 사람의 팔이 저 각도로 튀어나오게 차 안에 눕히거나 앉히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공사장의 바람구멍. 이 의혹은 사진의 각도에 문제가 있다. 사진 3의 노란 점선은 위 사진 1, 2의 시선을 표현하고자 한 듯하지만 바람구멍이 있는 사진은 노란 점선의 위치가 아니라 대로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8을 보면 알 수 있듯 철재판넬이 같이 찍히기 위해서는 노란 점선의 위치보다 상당히 내려와야 한다. 사진 1, 2를 봐도 바람구멍이 모든 칸마다 뚫려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고, 길목 막판에 해당하는 사진7에 나오는 구멍들이 사진 1, 2에 나오는 바람구멍일 가능성이 높다.
- 파일명을 가지고 악랄한 트집을 잡고 있다. 날짜를 착각했거나 전날 파일을 덮어서 계속 사용한 등의 일상적인 변수를 모두 제하더라도 이 의혹은 '내일 노무현 암살'이라는 초S급 기밀이 일개 신문사 디자이너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하루 전날 로고를 미리 제작해 둬야만 할 이유가 아예 없다.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뉴스이므로 시차 발생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국의 23일은 LA에서는 아직 22일인 것이다. 의혹 제기자는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군소언론의 특수성 혹은 실수를 마치 거대한 음모의 완벽한 증거인 양 억지를 부리고 있다.
- 병원 의혹에서 말하는 '1차진술'의 출처도 불분명하다. 2009년 5월 23일 당일 오전에 작성된 기사를 봐도 공식 브리핑에서 처음부터 의식불명이었다고 명시되었다.
- 11cm 상처는 각목에 의해서만 생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시 의료진은 두개골 골절 등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했다. 뒤통수, 이마, 옆머리도 아니고 정수리에 11cm 상처를 내려면 각목을 쓰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 타살설 주장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경호원을 의심하는데, 경호원을 의심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희대의 넌센스지만, 애초에 경호원을 1명만 데리고 산에 오른 사람은 노무현 본인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염습(殮襲)했던 유재철[46]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의 마지막 모습은 눈을 감고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이었으며 타살된 시신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겁먹거나 놀란 표정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47]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만 손이나 발뒤꿈치를 꿰멘 것을 제외하면 외관상으로 훼손된 부위도 없었다고. #
- 이미 수사가 종결되었음에도 정치 탄압이라며 역공한 사례가 있다 보니 만약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타살했다면 친노 진영이 의심받게 된다.
7. 기타
- 국가원수의 자살은 선진국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사례이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6년 이후에도 자살한 국가원수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48] 자살한 국가원수들은 거의 모두가 비교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국가 아니면 개발도상국의 국가원수들이다. 선진국의 국가 지도자 중 자살한 인물은 노무현 전에는 존 매큐언 전 호주 총리[49]가 유일했으며 매큐언이 사실상 권한대행 수준[50]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노무현은 선진국의 정규 국가원수 중에서는 사실상 거의 최초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물인 셈이다.[51] 지역강국급 국가원수까지 따지면 제툴리우 바르가스 브라질 대통령도 군인들의 반대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1954년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써) 권총으로 자살했던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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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2]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3]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4]
그 밖에 열상(裂傷; 찢어진 상처), 뇌좌상(신체 외부의 힘에 의한
뇌출혈 또는 뇌손상),
척추·
늑골 골절 등 다발성 골절이 감지되었다.
[5]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노가
민주당계 정당의 주류가 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
이 사건으로부터 1년 후에 치러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천안함 피격 사건에 따른
북풍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여당
한나라당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7]
사진 맨 왼쪽부터
문재인
변호사(맨 뒷쪽 안경에 흰 머리.),
주영훈 전
봉하마을 경호팀장, 문용욱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전해철
변호사,
노무현
전 대통령,
김경수
비서관. 이 중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 문용욱 전 실장과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훗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권 최일선에 다시 등장했다. 수석 변호인 역할을 한
문재인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됐고 경호 책임자였던
주영훈은
문재인 정부의 초대 청와대 경호처장이 됐으며 측근 변호인
전해철은
친문계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해 3선
대한민국 국회의원과
행정안전부장관을 지냈으며 마지막 비서관인
김경수는 초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경상남도지사에
당선되었으나
여론조작 혐의로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경상남도지사직 상실과 함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8]
상술한 문용욱은 대통령 수행비서였으며 정치일선에 나서지는 않았고 이후 삼양식품에 스카웃되어 상임고문과 이사회 의장을 지내고 있다. 친노 진영에 동명이인 문용욱(1967년생)이 있었으나 이 사람은 안희정계로 세종특별자치시교육감 비서실장직을 수행하던 중인 2018년 1월에 사망했다.
[9]
2008년 12월 5일 만남이 방문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날 노무현은 끝인사로 "날씨 좀 따뜻해지면 인사 드리러 나오겠다"고 했는데 그가 서거할 때까지 방문객들을 일절 만나지 않아 이것이 방문객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10]
문재인은 당시 노무현이 엄청나게 화를 낸 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11]
노무현 전 대통령 조카사위.
노건평의 장녀의 남편이다.
[12]
청와대 예산에 포함된 특수활동비와 국정원 예산의 대통령 통치자금
[13]
이인규는 이명박과 오래전부터 인맥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 돌았는데 소위 워싱턴 라인으로 이는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을 사퇴하고 야인으로 워싱턴에 있을 당시의 라인을 말한다. 다만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이인규 중수부장은 회고록을 통해 실제로 만난 적은 2번에 불과하다고 해명했고 사적인 인연은 없다고 해명했다.
[14]
당시 대검찰청 중수2과장은 박정식 검사(연수원 20기/후일 부산고검장)로 이인규 중수부장은 박정식 과장의 보고 내용을 보고 박연차의 진술에서 의구심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15]
이 언론보도는
원세훈 국정원의 소행이었다.
[16]
이인규의 회고록에 의하면 임채진 전 검찰총장이 전국의 검사장들에게 노무현의 신병에 관한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 검사장들이 불구속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17]
다만 이인규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당시 노무현에 대한 불구속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18]
대통령 당선인 시절 촬영한 공식 사진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명암과 색채를 조절하고 임기 중 안검하수 수술로 생긴 쌍꺼풀을 합성해 넣은 사진이다.
[19]
13시간동안 검찰조사를 받고 사저로 돌아가는 버스에 탑승하는 모습이다. 봉하마을에 도착한 뒤에는 사저에 있는 전용 출입구를 통해 집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언론에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결국 이 사진이 노무현의 생전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20]
윈도우 XP 컴퓨터에 한글 2007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21]
반 년 후 정기 개각에서 차관인
이귀남을 승진시켜 장관으로 임명시키며 교체되었다.
[22]
임기 2년 중 이미 1년 반을 재임한 상황이기도 했다.
[23]
당시에는
국가정보원 개입 부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24]
‘칼은, 찌르되 비틀지 마라’, ‘수사의 목적은 달성하되, 공연히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 ‘언론과는 불가근 불가원하라'는 등 수사를 할 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10개의 원칙을 설명한 것이다.
[25]
다만 사건 당시 600만 달러 사나이 발언을 한 것 때문에
친노 지지자들 사이에선 더 까였다.
[26]
이인규 변호사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해고'되었다고 기록했다. 대표변호사가 "문재인 캠프 핵심인사가 당신은 꼭 손을 보겠다고 했으니 같이 죽자는 말이냐."라면서 퇴사를 종용했다는 후문이다.
[27]
결국 이인규는 중소기업중앙회 고문, 홈앤쇼핑 사외이사도 물러나야 했다. 당시 홈앤쇼핑 대표인 강남훈은 그의 경동고 동기로 누명을 쓰고 해임되어 검찰조사를 받았으나 무죄로 밝혀졌다.
[28]
물론 홍준표는 개인적으로는 노무현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명박과 같은 진영 출신이라 사이가 가까운데도 이런 소리를 한 걸 보면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이게 맞나?"라는 의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29]
영정은 사위인
곽상언 변호사가 모셨다. 통상 장례 절차에서 영정은
손자가 모시지만 노무현의 친손자는 2008년생으로 갓 돌을 넘긴 시점이었던지라 사위가 대신 모신 것이다. 정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들은 아버지의 영정을 직접 모시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30]
김대중은 노무현의 사망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3달 뒤인 8월 18일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31]
부엉이 바위까지 가는 길에 마을 주민을 만나 마늘 작황에 대한 주제로 담소를 나눈 사실도 밝혀졌다.
[32]
경호원은 해당 시각 노무현에게 "담배 있나?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가 번복했다. 투신 당시 곁에 없었기 때문에 문책을 피하려고 거짓 진술을 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하지만 이 날 노무현이 경호원에게 "담배 있나?"라고 물어본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33]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문객은 내무부 자체 보고에 의하면
1769만 명이다.
[34]
그러나 실제로는
강남3구의 전폭적인 지지로 다른 지역에서의 표 손실을 대거 상쇄하고 오세훈 후보가 당선되었다. 물론 시의회는 민주당이 다수였기 때문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민주당과 끝없이 대립하다가 그 갈등이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한 번에 터져나왔다.
[35]
나중에
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반박하는 서적 '비극의 탄생'을 쓰기도 했다.
[36]
소설가 겸 언론인인
선우휘의 아들이다.
[37]
중앙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출신으로, 이때부터 이미 확고한 보수 성향으로 말이 많았다.
[38]
사실 더 많은 오마주가 있었으나 정치적 후폭풍을 고려하여 편집되었다고 한다.
[39]
당시 영화를 관람한 후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한다.
[40]
딴지일보의 말에 의하면 매우 많은 독자들이 다양하게 몰려들었다고 전해졌다.
[41]
다만 노무현이 죽기 전까지 딴지일보나 나꼼수 멤버들이 보였던 행적은 참여정부 내지는 노무현을 물어뜯던 당시의 진보층과 다를 게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주진우는 당시 시민사회수석이었던
문재인을 민경찬 사설펀드 건으로 집요하게 물고늘어져 전과를 만들어내고 사퇴시켰지만 결국 문재인은 무관한 일이 되어 직접 사과해야 했고 김어준과 김용민은 각자 사설로 노무현을 비난했던 전력이 있다. 딴지일보도 창간 때부터 B급의 명랑한 정치 풍자를 명목으로
조롱을 일삼기도 했다. 의문의 서버 해킹 및 폭파로 인해 딴지의 과거로 접근할 길이 사라진 점은 이들의 이미지 세탁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2]
봉하마을 외에는
국립서울현충원 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소,
광주광역시 국립
5.18 민주묘지 등이 필수 방문지로 꼽힌다.
[43]
분향소에 가서 통곡할 정도였으며 추도사까지 준비했다고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인해 추도사는 읽혀지지 못했다.
[44]
나무에 걸려 즉사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45]
즉, 검찰의 탄압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지켜주긴커녕 친노 측근들이 "노무현께서 반드시 희생을 해야지만 이 상황을 해결하고 우리가 엄청난 지지를 얻어 노무현 정신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빨리 뛰어내려라. 안 그러면 내가 뛰어내릴까?"라는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46]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등 21세기에 사망한 전직 대통령 대부분을 염습한 장례지도사로, 2024년 개봉한 영화
파묘에서
유해진이 맡은 배역의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47]
발견된 후 사망하기까지의 시간이 꽤 되고 도중에 들쳐업히거나 인공 호흡, 응급 조치도 받았으니 입을 비롯한 표정이 타의로 바뀌었을 수도 있기는 하다.
[48]
심지어 현직 국가원수 신분으로 자살한 국가원수들도 더러 있는데
쿠데타로 인해 자살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과
네팔 왕실 학살의 범인인
디펜드라
네팔 국왕(혼수상태에서 명목상 왕이 된 거라 왕으로써 일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취소선 처리)이 대표적인 사례다.
[49]
심각한 피부염 때문에 1980년에 스스로
음식을 거부하고 죽는 길을 택했다.
[50]
매큐언은 1967년
해럴드 홀트 총리의 실종으로 약 3주 동안만 총리직을 역임했다.
[51]
선진국의 2인자격 인물까지 범위를 넓히면
피에르 베레고부아 전
프랑스 총리도 1993년 부패 혐의로 사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권총 자살했다. 먼 훗날인 2024년
네덜란드의 전 총리인
드리스 판 아흐트 부부도
안락사를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