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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칠레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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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칠레 쿠데타
El golpe de Estado en Chile del 11 septiembre de 1973
1973 Chilean Military Coup d'état
파일:Chile-coup.jpg
일시
1973년 9월 11일
장소
칠레 산티아고 데 칠레
원인
CIA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세력의 권력 찬탈 의도
교전군
파일:칠레 국기.svg 칠레 정부
파일:칠레 국기.svg 칠레군 (정부군)
파일:1280px-Flag_of_the_Chilean_Army.png 칠레군 (반란군)
지휘관
살바도르 아옌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결과
쿠데타 성공 및 아옌데 정부 전복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사망
영향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 수립
칠레에서 미국의 영향력 증대
1. 개요2. 배경3.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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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3년 칠레 쿠데타는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발생한 쿠데타다. 이 쿠데타로 피노체트는 1990년까지 칠레의 정권을 잡았다.

2. 배경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당선되어 11월 3일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탄생한 칠레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였던 아옌데 정부는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경제위기만 일으키고 전국민적인 분열을 낳았다. 미국은 칠레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사회주의의 확산을 우려했는데 칠레가 제2의 쿠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CIA를 통해 비장의 카드를 쓰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쿠데타였다. 당시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하였다.

3.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파일:쿠데타 직후의 피노체트.png 파일:칠레 쿠데타 당시의 대통령궁.jpg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의 피노체트 쿠데타군에게 공격받는 라모네다(칠레 대통령궁)
"민주주의란 때론 피로 목욕을 해야하는 것이다."
(Muchas veces la democracia ha de ser bañada en sangre.)
- 피노체트가 쿠데타에 성공 직후에 한 발언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야사에 불과하며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미국에 포섭된 피노체트는, 1973년 9월 11일 육해공군 및 헌병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군사평의회를 결성하여 미국 CIA와 기득권층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군사 쿠데타[1]를 일으켰다. CIA가 작성한 쿠데타 계획에 따라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을 호커 헌터 전투기[2] 공습, 폭격하고 전차 보병들로 둘러싼 뒤 사격을 가해 모네다궁에 남아서 저항하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경호원들과 측근들을 살해했다. 이 쿠데타 동안 피노체트 측 인물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지만 아옌데측 인물은 무려 46명이 죽었다.

쿠데타 소식을 들은 아옌데는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부하'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보좌관들에게 "그들이 불쌍한 피노체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말을 남겼지만 피노체트의 투항 권고에 결국 같이 싸웠던 동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투항하라고 한 후 자결했다. 물론 피노체트는 약속 따윈 지키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본인은 죽일 의사는 없다고 주장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부 인사들은 아옌데의 곁으로 보내졌다. 다만 피노체트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인지 또는 국제사회의 시선 때문인지 아옌데의 가족이 망명하는 걸 막진 않았다.

쿠데타 당시 아옌데의 최후를 끝까지 죽음으로 함께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민연합 정부의 미온적 스탠스를 비판하던 혁명좌파운동(MIR)의 청년 당원들과 칠레 공산당원들, 그리고 좌파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때 아옌데는 라디오 마가야네스를 통해 나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Tengo fe en Chile y su destino)로 유명한 최후의 연설을 남기고[3]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금장 AK-47로 스스로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이때 아옌데가 쓰러지면서 깨진 그의 안경은 모네다 궁에 보존되어 있다.

사실 해당 쿠데타의 계획을 짠 것은 피노체트가 아니었고, 오히려 아옌데 대통령의 축출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한 것은 칠레 해군 장교들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육군 내 장성들마저 피노체트가 아옌데에 대한 불만을 잘 표시하지 않아서 피노체트의 야심을 알아채지 못했고 따라서 피노체트는 CIA로부터 쿠데타가 일어나기 불과 3일 전인 9월 8일 저녁에야 이러한 계획을 통보받았다. 보통 쿠데타는 육군이 주체가 되거나 아예 육군만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칠레 쿠데타는 해공군이 적극 개입을 넘어 주도하다시피 했다. 이 덕분에, 피노체트 정권 이후 지금도 칠레군에서 해군과 공군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높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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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아메리카에 대한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본 미국이 지원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물증이 하나둘씩 나오고 거의 사실로 밝혀졌다. 자세한 사항은 살바도르 아옌데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2] 자업자득격으로 이때 사용된 호커 헌터 전투기들은 얼마 안 있어 죄다 고물 신세가 되었다. 1974년 전투기에 탑재된 Avon 엔진의 오버홀을 위해 스코틀랜드 이스트 킬브라이드의 롤스로이스 plc 공장으로 엔진을 선적했는데 이 엔진이 칠레 공군용인 것을 알아챈 공장 노조원 4명(발 풀튼(Bob Fulton), 존 키난(John Keenan), 로버트 소버밀(Robert Somerville), 스튜어트 바리(Stuart Barrie))이 살인마에게 엔진을 공급하지 않겠다며 엔진 수리를 거부했고 대충 나무 상자에 쑤셔박은 다음 공장 마당에 비닐 덮개도 없이 방치해 둔 것. 그렇게 칠레로 배송되었어야 할 엔진들은 구질구질한 스코틀랜드의 기후 아래에서 장장 4년간 방치되는 신세가 되었고 이후 영국 정부가 몰래 빼돌려 가져다 줬지만 사실상 수리 불가 판정이 나왔다. 결국 피노체트는 1982년 마가렛 대처 정부 시절 포클랜드 전쟁을 지원한 대가로 중고 헌터를 몇 대 넘겨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당시 수리 거부를 주도한 노조원들에게는 칠레 정부가 2015년에 훈장을 수여했다. [3] 연설 전문은 살바도르 아옌데 문서에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