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등장인물 ]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000><width=20%><-3><bgcolor=#EDD68F> 주요 인물||그 외 등장인물 및 특별출연은 등장인물 문서 참고.
1. 개요
MBC 드라마 기황후의 오류에 관한 문서이다.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의 고증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부분도 틀리거나 창작한 부분이 굉장히 많다.2. 1화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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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타르카이'로 한자로 표기할 경우 '탑자해(塔刺海)가 아니라 '탑랄해(塔剌海)'다. 비슷한 글자인
剌(발랄할 랄)과
刺(찌를 자)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질병인
콜레라의 일본식 명칭이 '호열랄(虎列剌, 코레라)'이었는데 한국에서는 한자를 헷갈려 '호열자(虎列刺)'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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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들을 채찍질 하는
탑랄해(탑자해)를 고려의 세자
왕유가 말리자
당기세가 세자를 보고 자신들의 '볼모 신세'라고 하며 하찮게 여기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려의 왕은 원나라 내 황족 서열에서 제법 서열이 높은 존재였다.[1] 따라서 아무리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있다고 해도 황실의 친인척이었기 때문에 당기세라 하더라도 고려의 세자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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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화에 당기세가 쏜 석궁으로 기양(후일의 기황후)의 어머니[2]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기황후의 어머니는 이 시기에 죽은 적이 없다. 기황후의 어머니는 고려의 문신이자 청주목사(淸州牧使)였던 이행검(李行儉)의 딸로서 딸 기씨가 원나라의 황후가 된 후 황제를 졸라 죽은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으로 추숭해 준 덕에 생전에도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이라고 불리며 부귀영화를 누렸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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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의 집무실에 큰 지도가 있는데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之圖)'다. 이미 유명한 사실이지만
조선의
태종(太宗) 2년인 1402년에 만들어진 세계 지도다. 조선은 고려가 멸망하고 난 후에 등장한 국가이니 당연히 집무실에 강리도가 등장하는 것은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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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숙부이자
심왕(瀋王)인
왕고(王暠)가 등장하는데 직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고려의 왕과 동일한 왕작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매번 등장할 때마다 고려의
조복을 입고 고려 왕에게 세자의 행위를 일러바치는 등 마치 고려의 신하인 것처럼 묘사된다. 심왕 자리 자체가 명예직에 가깝고 왕고가 고려의 왕위를 탐낸 건 분명 사실이지만 딱히 작중에서의 묘사처럼 마치 고려 왕의 신하인 것처럼 머리를 숙여야 하는 위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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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왕(太平王)
연철(엘테무르)이 황태제
타환이 고려 땅에서 죽으면 그 책임을 물어
고려의 사직을 없애고 원나라에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실제 역사 속 연철은 고려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직
정동행성의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이었던 '장백상(將伯祥)'과 우문군(佑文君)이었던 '양재(梁載)'의 주청으로 발생했던
입성책동 당시 고려의
충혜왕이 원나라의 우승상 겸 태사였던 연철에게 상소를 보냈고 이에 연철은 입성책동 계획 자체를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5] 물론 연철이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고 당시 원나라의 현 황제인
문종(투그테무르)이 형인
쿠살라에게 반강제로 양위하려고 시끄럽던 시기였다. 당장에 연철은 막북 지역에서 쿠살라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었으니[6] 고려의 입성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연철 쪽에서 고려의 입성에 대해 의논한 게 없었던 만큼 연철은 아예 고려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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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제를 호송하는 인원으로
백안(바얀)이 등장하는데 상당히 젊은 외향을 띄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인물인
메르키트 바얀은 드라마 속에서 카리스마 있는 노인으로 등장하는 연철보다도 나이도 많고 관직 생활도 더 오래했다. 연철은
원나라 무종(카이산)이 황자일 시절에 그를 10년 간 보필했고, 무종이 즉위했을 때 정봉대부(正奉大夫) 겸 동지선휘원사(同知宣徽院事)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에 반해 백안은 원나라의 2대 황제인
성종(테무르)을 모시고
카이두를 정벌하러 간 적이 있으며 차파르 칸(察八兒汗)의 반란을 토벌한 공로로 바가투르(용사)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아무래도 연철 다음으로 등장한 권력자가 백안이다보니 젊은 나이겠거니 해서 설정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연철이 더 젊게, 그리고 백안이 더 늙게 묘사되어야 맞다.[7] 그리고 타환이 대청도에 있을 시기에 백안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임명된데다 부얀디긴(卜顏的斤)[8]과의 혼인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타환을 따라 대청도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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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토크토아)이 백안을 '
숙부님(叔父)'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백안은 탈탈의 백부(伯父), 즉
큰아버지였다. 탈탈의 아버지인 마자르타이(馬札兒台)는 백안의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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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도로 유배를 오게 된
타환(토곤)의 나이는 외관상으론 배우
지창욱의 외모에 따라 거의 20대-30대에 가까워 보이는데 실제 대청도로 왔을 당시의 타환은 딱 '11살'이었다. 타환이 태어난 게 1320년 4월 병인일인데, 대청도로 유배를 온 것은 1330년 4월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증을 맞춘다면 타환이나 비슷한 나이의 승냥이나 모두
아역배우들이 맡아야 하고, 왕유는 16살[9]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역배우가 맡아야 한다. MBC 사극들에서 아역배우가 초반부를 맡다가 성인배우들이 중-후반부를 맡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왜 기황후에서는 처음부터 성인배우들이 맡았는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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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가 어린
영종(이린지발) 황제를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역사적 사실을 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명종(쿠살라)의 두 번째 아내이자[10], 영종의 어머니였던 바부샤(八不沙) 황후는 남편이 죽은 후 다시 복위한 문종(투그테무르) 황제에게 남편의 명복을 빌게 해달라는 간청을 했고, 문종은 바부샤의 부탁을 받아들여 제사(帝師)[11]로 하여금 여러 명산과 신궁에서 제례를 행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별도로 바부샤 황후에게 비단 200필을 내렸으나 문종의 아내인
부다시리(드라마 속 황태후) 황후는 환관인 바이주(拜住)와 짜고 바부샤 황후를 살해했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당 장면을 보면 어린 황제의 친어미를 죽인 악독한 여자가 어린 황제를 극진히 간호하는 괴상한 장면임을 알 수 있다.
- 작중에서 승냥이의 부친인 기자오는 고려에서 황태제를 죽이려는 음모를 대충 눈치채곤 황태제를 목숨 걸고 지켰으나 결국 증거 인멸을 위해 눈과 혀가 뽑힌 뒤, 고려군을 이끌고 황제를 시역(弑逆)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다.[12] 물론 실존인물인 기자오는 무관으로서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 공을 세운 뒤 정6품 총부산랑(摠部散郞)[13]이 되었다가 선주(宣州)[14]의 수령(守令)으로 지냈고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드라마를 위한 각색이라고는 하나, 관직운만 좀 없을 뿐, 멀쩡히 잘 살다가 죽은 인물을 비참하게 죽인 셈.
3. 6화 - 10화
- 타환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일은 연철이 사망한 이후다. 문종의 편을 들었던 연철은 (자기가 죽인 걸로 세상에 알려진) 명종의 아들인 타환이 황제가 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였고,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태사(太史)들 또한 '타환이 즉위하면 천하가 크게 혼란해질 것'이라며 즉위 진행을 말렸다. 게다가 황태후 부다시리는 다음 황제는 타환이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연철은 타환의 즉위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본인이 죽은 뒤에야 타환이 황제가 되었다. 따라서 해당 작품 전반기에 연철이 최종보스로 등장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서 활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연철과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는 전부 허구라고 할 수 있다.
- 작중에선 연철과 황태후가 마치 경쟁자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문종(투그테무르)이 연철을 아꼈으며 연철 본인도 문종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문종의 비(妃)였던 부다시리와도 잘 지냈다. 문종 사후 국정은 실권을 쥔 연철이 주청을 올리면 대리로 청정(聽政)을 하고 있던 황태후가 재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둘은 경쟁사이라기보단 오히려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고 할 수 있다.
- 타환 살해에 실패한 백안과 탈탈, 그리고 왕유가 돌궐과의 전쟁터로 보내지는데 당연히 당시엔 돌궐이 존재하지 않았다. 돌궐이 제국을 세워 중원을 위협한 시기는 6세기에서 8세기 사이의 일이고, 원나라 말기인 14세기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원나라와 근접한 부족 형태의 세력으로는 오이라트(瓦剌)가 있는데 오이라트는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의 후계 전쟁, 이른바 '톨루이 내전' 시기에 코로스(綽羅斯), 토르구트(土爾扈), 되르베트(杜尔伯), 코이드(辉特) 부족이 뭉쳐 '되르벤 오이라트(四衛拉特)'라는 연합체를 형성한 뒤 아리크부카를 지지했으나 결국 아리크부카가 패배하면서 원나라에 항복하였고 이후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래저래 원나라와 서쪽 변방에 있는 모종의 세력과의 전쟁은 나올 수 없는 전개다.[15]
드라마 기황후에서 연출된 복탁(좌)과 실제 복탁의 모습(우)[17] |
드라마 기황후 1화에 등장한 엑스트라들이 착용한 복탁 |
복탁은 기본적으로 머리 위에 얹는
모자(帽子)이며 모자를 고정 해주는 원통형의 관체(冠体), 관체 아래에 달려 뒷머리를 가리는 천 조각인 피복(披幅), 관을 고정하는 끈인 유대(紐帶), 귀를 가려주는 주렴에 해당하는 엄이수주(掩耳垂珠), 관 자체를 꾸미는 관모장식(冠帽装饰), 관 꼭대기를 장식하는 관정장식(冠顶装饰)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8] 복탁은 몽골의 여성들이 꾸밀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19][20] 주로 대례식이나 큰 연회가 있을 때 주로 착용했다. 즉, 드라마 속 황태후가 착용한 복탁은 제대로 요소를 갖춘 것도 아닐뿐더러 저렇게 착용하면 고개를 숙일 때, 무게 때문에 모자가 앞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오히려 1화에 등장했던 기황후의 책봉식 장면이나 해당 화(8화)에 등장하는 만세를 외치는 현지인
엑스트라들이 착용한 복탁이 훨씬 고증에 맞다.
* 왕유가 이끄는 별동대와 돌궐군과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돌궐인들을 무슨 야만인처럼 묘사해 놨다. 6세기에서 8세기에 있었던 돌궐 제국의 군사들은 찰갑으로 중무장한 중기병대를 이끌고 다나며 중원을 위협할 만큼 문명화 되어 있었으며 군사력이 강력했고, 오이라트 연합과 위구르족 역시 칭기즈 칸에게 복속한 이후 쭉 몽골 제국에 협력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장에 있어서는 원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돌궐인들을 이끌고 있는 연비수의 아버지 이름이 '바토루'로 나오는데, 실제 발음은 '바가투르'에 가깝다. 바가투르는 튀르크와 몽골에서 붙여지던 꽤나 역사적인 칭호로서 주로 엄청난 전공(戰功)을 세운 인물에게 주어졌고, 일 칸국이나 티무르 제국에서는 군주의 집무 상 칭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가투르는 말 그대로 호칭에 가깝기 때문에 해당 드라마처럼 이름 같이 부르진 않았다.
4. 11화 -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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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실리가 궁녀가 된 기양을 시켜
궁녀 박씨가 가진 용종(龍種)을
낙태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데
팥꽃나무 꽃을 말려 빻은 가루를 음식을 통해 꾸준히 박씨에게 먹이려고 하였다. 이 때
서상궁이 미리 황후에게 "임산부가 아니면 아무런 독성이 없다" 라고 하는데 틀린 설명이다.
한의학에서 원화(芫花)라고 부르는 팥꽃나무 꽃은 주로 축수(逐水)[21]나 척담(滌痰)[22], 담음벽적(痰飮癖積)[23]의 효능이 있고 협통(脇痛)[24], 옹종(癰腫)[25], 학모(瘧母)[26] 등을 치료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팥꽃나무 꽃에는 다프닌(Daphnin)[27]과 메제레인(Mezerein)[28] 성분이 있어서 생으로 섭취할 시 독소가 입이나 식도, 위 등에 궤양을 일으키거나 피부에 수포를 일으킨다. 한의학에서도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헛구역질과 구토, 복통 및 설사와 발진이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29] 때문에 타나실리가 박씨와 함께 장기간 팥꽃나무 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장기적으로 먹었을 경우, 서상궁의 장담처럼 그저 소피(오줌)만 자주 볼 정도가 아니라 피부는 발진으로 뒤덮이고 설사로 인한 복통에 시달리다가 둘 다 나란히 함께 저승에 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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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실리가 일을 마무리 한 기양을 황궁 밖으로 보내준다는 문서를 작성하면서 인장(印章)을 찍어주는 장면과 나중에 타환이 그 인장이 찍힌 문서를 빼앗아 불태우는 장면이 있다.
그 중 타환이 빼앗은 문서를 자세히 보면 대원제국황후지보(大元帝國皇后之寶) 라고 전서체 인영(印影)[30]이 찍혀 있는데 방향이 거꾸로 되어 있다. 옥새의 경우 보통 인뉴(印鈕)[31]의 짐승 머리가 보는 방향이 보통 위쪽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기양의 회상씬을 보면 황후가 인장을 찍어줄 때 바른 방향으로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문서 소품을 만들 때 반대로 찍힌 것으로 보인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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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양이
무수리임에도 타환에게 불려가 차를 따르는 일을 하는데 사서에 따르면 기씨는 원래 휘정원사(徽政院使)였던
투만데르(禿滿迭兒)가 눈여겨 봤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공차음(主供茗飲)', 즉 황제가 차를 마실 때 수발을 드는 궁녀로 발탁되었다. 때문에 사실 무수리로서의 에피소드는 허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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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의 회상 장면에서
명종 황제가 드라마 속 타환만큼이나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되는데 매우 잘못된 오류다. 명종 쿠살라는
인종 시기에 재상 테무데르(鐵木迭), 황태후 라드나시리(阿納失失里), 간신 쉬라문(失列門)의 모함으로 주왕(周王)이라는 사실상의 명예직을 받고
운남성 일대로 쫓겨났을 때도 오히려
무종(원)의 옛 신하들을 규합해 힘을 길렀고 본인 진영의 내분으로 인해 서쪽
알타이 산맥 너머의
차가타이 칸국으로 이동했을 때도 오히려 차가타이(察阿台) 등 서북쪽의 제왕(諸王)들이 주왕 쿠살라를 따랐다.
진종(이순테무르)이 사망한 후 권신 다블랏샤(倒剌沙)와 양왕(梁王) 반친(王禪), 요왕(遼王) 토크토아(脫脫) 등이 어린
천순제를 추대했지만 1개월 만에 사망했다. 결국 무종의 아들 중 하나를 다음 황제를 추대해야 함에도 권신 다블랏샤가 옥새를 안 넘기고 버티자 결국 연철이 군사를 일으킨 뒤 "무종 황제의 두 아들(쿠살라, 투그테무르)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회왕(懷王)이었던 투그테무르를 옹립하고
상도(上道)에 머무르고 있던 다블랏샤를 물리친 뒤
옥새를 되찾았고 연철이 옹립했던 투그테무르가 황제(무종)가 되었다. 하지만 그 때 쿠살라가 군을 이끌며 대도를 향해 이동했고 이에 연철은 쿠살라를 모시러 북으로 갔고 투그테무르는 황제 자리를 쿠살라에게 넘긴다는 발표를 한 후 새로 옥보(玉寶)를 파고 황태자가 되었다.[33] 그러나 황제가 된 지 몇 개월도 안 돼서 쿠살라는 갑자기 숨을 거뒀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던 투그테무르가 다시 황제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명종(쿠살라)은 확실한 자신의 세력이 있었고 인망도 높았으며 막강한 군사력까지 가지고 있어서 천순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던 투그테무르가 얼른 다시 황제 자리를 내놓고 자신은 황태자 신분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따라서 드라마 속의 명종 황제는 대단히 왜곡된 모습인 것이다. 또한 명종 황제는 사망했을 때 나이가 고작 30살에 불과했다.[34] 따라서 작중에서처럼 늙어 보이는 건 오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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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환이 기양을 돌려보내 달라는 왕유의 말에 "고려에서는 공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계집을
화냥년이라 부른다고 들었다" 라는 말을 하는데
환향녀(還鄕女)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조선시대에서 벌어진 전란 속에서 적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뜻하는 말이며, 당시에는 단순히 돌아온다는 의미의 환향(還鄕)이 아닌, 돈을 주고 데려온다는 속환(贖還)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했다. 즉 드라마 기황후에서 화냥년 얘기가 나온 건 시기적으로 전혀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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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가 식사자리에서 왕유에게 차를 따라주는데, 놀랍게도 황태후가 든 찻주전자나 왕유가 든 잔이나 모두
19세기인
빅토리아 풍의 유럽 도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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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제대로 연출하지 못해 시청자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넘긴 부분도 존재한다. 타환이 왕유를 견제하려고 기양이 읽어준
두보(杜甫)의 시를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애왕손(哀王孫)'이란 시다.
{{{#!folding [ 애왕손 전문 펼치기 · 접기 ]
長安城頭頭白烏
장안성 머리의 머리 흰 까마귀
夜飛延秋門上呼
밤에 날아와 연추문[35] 위에서 울고
又向人家啄大屋
또 인가를 향해 날아가 큰 집을 쪼아대니
屋底達官走避胡
집 안의 관리들은 오랑캐를 피해 달아나네
金鞭斷折九馬死
금채찍은 끊어지고 많은 말들은 죽었고
骨肉不待同馳驅
피붙이들은 함께 달아나지 못했구나
腰下寶玦青珊瑚
허리 아래에 옥패와 푸른 산호를 찬
可憐王孫泣路隅
가련한 왕손은 길가에서 울고 있네
問之不肯道姓名
누구인지 물어도 이름을 말하려 하지 않고
但道困苦乞為奴
그저 곤하고 괴로우니 노비로 삼아달라 하네
已經百日竄荊棘
백일이 넘게 가시밭길로 도망치고
身上無有完肌膚
몸은 피부가 성한 곳이 없구나
高帝子孫盡隆準
고제의 자손은 코가 우뚝하다던데
龍種自與常人殊
왕의 씨는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다르구나[36]
豺狼在邑龍在野
이리들은 도읍에, 용은 들판에 있으니
王孫善保千金軀
왕손은 천금같은 몸을 잘 보전하라
不敢長語臨交衢
사거리에서 감히 길게 말하지 못하니
且為王孫立斯須
왕손을 위해 잠시 서 있으리라
昨夜東風吹血腥
어젯밤 동풍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東來橐駝滿舊都
동족에서 온 낙타가 옛 도읍에 가득하다
朔方健兒好身手
북쪽 변방의 남자들은 신수가 좋다던데
昔何勇銳今何愚
지금은 어찌 그리 우둔한가[37]
竊聞天子已傳位
훔쳐 들으니 천자께서 양위[38]하여
聖德北服南單于
거룩한 덕으로 북쪽의 남선우를 복종시켰으나
花門剺面請雪恥
화문이 얼굴을 그어[39] 설욕해 주길 청한다고 하니
慎勿出口他人狙
다른 이가 엿듣지 않게 말을 조심하라
哀哉王孫慎勿疏
애처로운 왕손은 삼가 소홀이 하지 말라
五陵佳氣無時無
오릉[40]의 상서로운 기운은 없던 때가 없었노라 }}}
장안성 머리의 머리 흰 까마귀
夜飛延秋門上呼
밤에 날아와 연추문[35] 위에서 울고
又向人家啄大屋
또 인가를 향해 날아가 큰 집을 쪼아대니
屋底達官走避胡
집 안의 관리들은 오랑캐를 피해 달아나네
金鞭斷折九馬死
금채찍은 끊어지고 많은 말들은 죽었고
骨肉不待同馳驅
피붙이들은 함께 달아나지 못했구나
腰下寶玦青珊瑚
허리 아래에 옥패와 푸른 산호를 찬
可憐王孫泣路隅
가련한 왕손은 길가에서 울고 있네
問之不肯道姓名
누구인지 물어도 이름을 말하려 하지 않고
但道困苦乞為奴
그저 곤하고 괴로우니 노비로 삼아달라 하네
已經百日竄荊棘
백일이 넘게 가시밭길로 도망치고
身上無有完肌膚
몸은 피부가 성한 곳이 없구나
高帝子孫盡隆準
고제의 자손은 코가 우뚝하다던데
龍種自與常人殊
왕의 씨는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다르구나[36]
豺狼在邑龍在野
이리들은 도읍에, 용은 들판에 있으니
王孫善保千金軀
왕손은 천금같은 몸을 잘 보전하라
不敢長語臨交衢
사거리에서 감히 길게 말하지 못하니
且為王孫立斯須
왕손을 위해 잠시 서 있으리라
昨夜東風吹血腥
어젯밤 동풍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東來橐駝滿舊都
동족에서 온 낙타가 옛 도읍에 가득하다
朔方健兒好身手
북쪽 변방의 남자들은 신수가 좋다던데
昔何勇銳今何愚
지금은 어찌 그리 우둔한가[37]
竊聞天子已傳位
훔쳐 들으니 천자께서 양위[38]하여
聖德北服南單于
거룩한 덕으로 북쪽의 남선우를 복종시켰으나
花門剺面請雪恥
화문이 얼굴을 그어[39] 설욕해 주길 청한다고 하니
慎勿出口他人狙
다른 이가 엿듣지 않게 말을 조심하라
哀哉王孫慎勿疏
애처로운 왕손은 삼가 소홀이 하지 말라
五陵佳氣無時無
오릉[40]의 상서로운 기운은 없던 때가 없었노라 }}}
이 시는 안록산의 난 당시 장안성을 탈출한 현종 내지는 살아남은 황족 중 하나를 보고 슬퍼하며 쓴 시다. 즉, 반역을 한 이로 인해 황족이 고통 받는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드라마 속 타환의 상황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시인데 해당 드라마에서는 그저 기양이 밤에 읽어주는 장면, 그리고 타환이 잘난 척 하려다가 버벅거리다가 망신만 당하는 장면으로 소비되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의미가 담긴 시를 굳이 넣었던 건지 알 수 없을 지경.[41]
* 방내관이 기양과 상소문을 끼워넣는 작전을 세우면서 비밀스럽게 작성된 문서를 '북정(北征)'이라는 책에 끼워둘 거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북정은 위에서 언급된 두보의 시로써 꽤 내용이 많은 장문시에 속한다. 그러나 별도의 북정이라는 서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두시(杜詩)'라는 두보의 시를 모은 서책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북정이라는 별도의 책이 묘사된 건 오류로 볼 수 있다.[42]
* 기양이 방내관의 요청으로 혈서에 대한 내용이 담긴 상소문을 바꿔치기 해 연철에게 보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때 문서를 담당하는 관청 이름이 비서성(秘書省)으로 나오는데 비서성은 수나라와 당나라, 송나라 시기에만 사용된 명칭이고[43] 위진남북조 시기와 원나라 시기에는 비서감(秘書監)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 왕유와 타환이 축국 시합을 벌이는데 심판을 맡은 독만 태감이 들고 있는 깃발은 무려 오프사이드 깃발이다. 일단 오프사이드 자체가 1883년 잉글랜드 축구협회(FA)에서 선수들이 골문 주변에서 죽치고 있는 걸 막기 위해 만든 규율이다. 깃발 또한 그 이후에 만들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나라 시대에는 등장할 수 없는 물건이다.
5. 16화 -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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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가 서역의 요령술사(妖靈術師)[44]들의 기술을 빌려 붉은 먹물로 진짜 글자를 숨기고 나머지 글자는 비밀 먹물로 작성해 다른 사건에 대한 투서로 위장한 뒤[45] 비가 올 걸로 예상되는 날에 게시했는데 투서가 비를 맞자 거짓말처럼 검은 먹은 사라지고 붉은 먹으로 쓴 '명종 황제의 혈서가 나타나면 연철의 3대가 몰락한다(明宗皇帝血書出燕鐵三代沒落)'라는 문자가 드러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일단 물에 젖으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먹물 자체가 존재하질 않으며[46], 종이에 묻은 먹은 물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번지기 때문에 글씨가 적힌 종이가 비를 맞으면 검은 먹물이고 붉은 먹물이고 죄다 번져서 식별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따라서 먹물의 존재는 물론이고 물에 젖었는데도 새 종이에 붉은 글씨만 쓴 것 같은 CG 티가 팍팍 나는 해당 장면은 절대 나오기가 힘들다. 차라리 붉은 글씨를 쓴 뒤 그 글씨 위에 초칠을 하고[47] 다른 글자는 그대로 써 흘러내리게 해서 드러내던가, 혹은 붉은 먹물로 글을 쓰고 오징어 먹물로 위장 글자를 쓴 뒤 장기간 게시해 서서히 붉은 글자가 드러나게 하는[48] 등의 방법을 쓰는 게 빗물 맞았다고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술 먹물보단 훨씬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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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괴문서 사건에 대한 반격으로 타환을 옥죄고, 용상에 앉아 자신의 아들인 당기세에게 자신이 한 일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그 말은 동양이 아닌
함무라비 법전과
모세오경의
출애굽기에서 먼저 등장한 말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49][50] 차라리
공자가 했다는 '이직보원(以直報怨, 원한은 공정하게 갚으라)'[51]이라는 말이 시대상으로도 맞고 연철이 말하는 '공정한 보답'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도 잘 드러내줬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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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가 왕유에게
서하 공주와의 혼례를 주선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서하는 이미
칭기스 칸 시기에 멸망했고, 칭기스 칸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서하인들을 공격하던 중 낙마로 부상을 입고는 분노해 "내 죽음을 알리지 말고, 서하인을 한 사람도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는 바람에 철저하게 몰살 당했다. 그나마 칭기스 칸 사후 임시 대칸에 오른
톨루이가 교역로 유지를 위해 카라호토 성(黑水城)을 남겨두었고 거기에 살던 서하인들만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이들은
색목인으로 살거나 몽골인으로 흡수되었고 서하 황실의 경우,
양종의 딸인 이씨(李氏)가 칭기스 칸의 부인인 '차카 카툰(察合 皇后)'이 되었기 때문에 몽골 황실과 혈통이 일부 섞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원나라는 고대 중국의 탕목읍(湯沐邑)[52] 제도를 받아들였고 공주들의 칭호에도 창국(昌國), 조국(趙國), 노국(魯國), 운국(鄆國) 등 봉토의 이름이 붙었으며 황제의 누이는 장공주(長公主), 딸은 공주(公主)로 구별해 불렀고, 만약 봉토가 없는 공주들은 그냥 자신의 이름으로 불렸다.[53] 그리고 서하 지역은 과거에 서하중흥행성(西夏中興行省)이 존재했으나 세조 28년인 1287년에 감숙행성에 병합되었다. 따라서 황태후가 왕유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서하 공주와의 혼례를 주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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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가 명종 황제의 혈서로 연철을 궁지에 모는 계획에 열심히 참여 중인데 이미 한 번 언급되었지만, 명종이 죽은 후 다시 황제에 올랐던 것이 바로 황태후의 남편인 문종 황제였다. 그로 인해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문종의 복위에는 연철의 공이 가장 컸다. 때문에 황태후가 계속해서 연철을 적대시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타환을 고무시키기 위해 "명종 황제께서 굽어 살피시어" 라는 표현을 쓰고 명종 황제의 저주를 운운하며 연철에게 트집을 잡는 건 상당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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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의 부하들이 황궁에 잡입하면서
최무송이 환관 복장을 입고 있는데 수염(...)난 모습 그대로 등장한다. 환관은 어린 시절부터
거세를 하기 때문에 수염이 나질 않으며 이는 환관을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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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바둑을 두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원나라에서는 이미 바둑의 묘수풀이 기술을 집대성한 '현현기경(玄玄棋經)'이라는 책이 집필될 정도로 바둑이 유행한 사실이다. 다만, 드라마에서 나오는 바둑알은 무슨 자연석을 대충 깎은 것처럼 생겼다.
하지만 이미 원나라의 영토인 운남행성에서 당나라 시기부터 운자(雲子)라고 불리는 고급 바둑알을 생산하고 있었다. 운자는 마노와 호박, 붕사, 홍단분(紅丹粉)[54] 등을 빻아 배합한 뒤 한 알씩 제작했으며 백색돌은 옥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투명하지 않으며 약간 황색 또는 청록색을 띠는 특징이 있고 흑색돌은 칠흑처럼 윤기가 나며, 빛에 대고 보면 반투명하고 바둑알 주변에 일종의 벽록색 또는 청색의 광채가 난다. 현대에도 운자는 운남성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며 바둑계에서도 고급 바둑알에 속한다. 당연히 바둑이 유행했던 원나라 황실에서도 바둑돌을 쓰려면 운남행성의 특산품인 '운자'로 뒀지 저런 조약한 바둑돌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5세기 말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쪽샘지구 44호분에서 발견된 바둑알도 자갈이지만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미 원나라보다 훨씬 오래된 국가에서도 일정한 형태의 돌을 바둑돌로 사용했는데 세공 기술이 발전한 원나라에서 굳이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가까운 바둑돌을 쓸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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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과 바둑을 두던 왕유가 "대승상의 지금의 권력은 황제의 할아버지인
무종 황제를 배신해서 얻은 것이라 들었다. 대승상께서는 무종 황제와 같은 실수는 하지 마십시오"라는 발언을 하는데 당연히 틀렸다. 무종의 계승에 대한 순서를 보면 아래와 같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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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은 자신이 죽으면 제위를 동생인 아유르바르바다에게 물려주는 대신 동생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쿠살라와 투그테무르)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약속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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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된 인종(아유르바르바다)은 당연히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고, 형의 장남인 쿠살라(훗날의 명종)를 명분에 지나지 않는 주왕(周王) 자리를 내리고 후계에서 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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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살라는 분노해 군대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실패해 차가타이 칸국으로 달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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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 인종이 사망하자 "황제 자리는 마땅히 무종 황제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며 원나라 내에 있던 회왕(懷王) 투그테무르를 받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뒤 투그테무르를 제위에 앉힘. ( 문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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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타이 칸국으로 망명했던 쿠살라가 군을 이끌며 귀환했고 문종과 연철은 황제 자리를 쿠살라에게 넘겼고 ( 명종 황제) 문종은 스스로 태자로 내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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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황제가 몇 개월 안 가서 급사하자[55] 태자였던 문종이 다시 복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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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은 죽기 전에 형의 아들 중 하나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유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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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은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명종의 둘째 아들인 린칠반(훗날의 영종)을 황제로 추대하고 했으나 장남인 타환은 귀양을 보냈으나 영종은 몇 개월 후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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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은 황태후의 아들인 엘테구스(燕帖古思)를 황제로 삼으려 했지만 황태후가 문종의 유지를 이유로 거절한 뒤 명종의 또 다른 아들인 타환을 황제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예전에 명종 황제가 타환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를 들며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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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사망한 후 타환이 돌아와 황제가 됨}}}
즉, 타환의 할아버지인 무종 황제를 배신한 것은 무종의 동생인 인종 황제였고, 연철이 무종의 손자인 타환을 귀양 보낸 일은 있으나 연철은 무종의 다른 손자인 린칠반을 황제로 옹립했기 때문에 딱히 배신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왕유가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적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아 "황제의 할아버지인 무종 황제는 동생을 너무 믿어서 배신을 당했고 그 아들인 명종 황제와 문종 황제가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다" 라고 언급했으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면서도 말하려는 목적에도 부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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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과 협상해 기양을 데려간 왕유가 부하들을 시켜 은밀히 서역에서 들여온 홍주(紅酒), 즉
적포도주를 구매하는 장면이 묘사되며 본인 입으로도 연철에게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술"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원나라 황실 입장에서 포도주는 그리 귀한 게 아니었다. 원나라 시기에 포도주는
마유주와 함께 궁정에서 쓰는 중요한 술이었다. 왕원량(汪元量)이 지은 호주가구십팔수(湖州歌九十八首)와 증정호산류고(增订湖山类稿) 2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세조 시기에 장수인 차칸(察罕)이
남송의 영토인 형주 강릉의 남동쪽과 양라보(陽邏堡)[56]를 공격하면서 큰 공을 세우자 포도주 2병을 하사했고 좌승상이었던
사천택이 남송을 공격하던 중에 병으로 몸져 눕자 위로의 의미로 포도주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남송의
소제 일행이 대도에 왔을 때, 연이은 잔치를 베풀었는데 제 4차 연회를 광한전(广寒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 포도주가 나왔는데 '포도주의 붉은색이 짙었다(葡萄酒酽色如丹)'라는 기록도 있고 "소제 일행이 수라간(御厨)에 포도주를 달라고 요청하자 얼마 안 가서 일행은
중양절을 맞이할 때 포도주를 국화잔에 잔뜩 부어 마실 수 있었다" 라는 기록도 있다.
즉 포도주는 이미 원나라에서는 인기가 있는 술이었고, 굳이 수입산이 아니라더라도 (소제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원나라 내에서 비축이 가능할 정도로 '자체생산' 중이었으며 심지어 진상품이기도 했다.[57] 따라서 왕유가 적포도주를 사려고 했으면 굳이 서역 상인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시장에서 구매하거나 황실에 머물렀으니 수라간에 달라고 요청하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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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가 연철에게 죽음을 가장한 계책을 일러줄 때
혼수모어(混水摸魚)라는 말을 쓰고 자막에는 그 말이
손자병법에 나와있는 것처럼 써놨는데, 혼수모어는 손자병법이 아니라
삼십육계(三十六計)에 나오는 말이고 삽십육계라는 서적 자체는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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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이 연철이 마실 술을 독주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당기세가 떨어뜨린 열쇠를 발로 밟아 본을 뜬 장면이 있었고 나중에 그것을 백안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밑창이 그냥 생고무판(...)이다. 당연히 원나라 시대에는 고무라는 게 없었고 몽골인들이 신고 다닌 신발은 구탈(鞋)이라고 불렸는데 당연히 아래 밑창엔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천과 가죽을 덧대었다. 비싼 돈 들여 해외에서 촬영하는 드라마인 주제에 소품 준비가 형편없다는 게 드러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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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황궁 내에
게르를 설치하는 걸 두고 백안이 비상시국을 선포하는 거냐며 놀라는 장면과 황태후가 명종 황제도 게르가 세워진 날 다음에 승하했다고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당연히 허구에 가까운 얘기다. 게르는 몽골의 전통 가옥으로서 말 그대로 거주지라는 의미만 있을 뿐이지 황궁 안에 게르를 짓는다고 해서 그게 비상시국을 선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마르코 폴로는 원 세조가 제너두(Xanadu)[58]에 있는 대리석 궁전(Marble Palace)[59]과 깊은 숲속에 위치한 대나무 궁전(Cane Palace)을 오가면서 지냈는데 여름이 지나고 대도로 돌아가면 대나무 궁전은 즉시 해체했다고 기록했다. 이 나무 궁전은 사천 등 대나무가 풍부하게 나는 곳에서 공수했으며 돔 형태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바로 게르의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게르는 목재가 희귀한 초원에서 만들었던거라 기둥에 걸치지 않는 등의 관습으로 목재를 아꼈지만 세조는 여름이 시작되면 지었다가 여름이 끝나고 대도로 복귀하면 즉시 부쉈던 것으로 보아 몽골인의 시각에서는 나름 사치로운 생활을 향유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드라마 기황후 식의 논리라면 원 세조는 여름마다 비상시국을 선언한 셈이 된다(...). 그리고 명종 황제 건의 경우는 연철이 군을 이끌고 오는 명종을 맞이하기 위해 이동했기 때문에 이동식 게르라고 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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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먹는 수라상에 삶은 새우가 놓여져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몽골인들은 초원에 살았던 탓에 수산물을 보거나 맛볼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기근이 들거나 사냥하기 어려운 겨울철이 되면 가끔 강가나 호수에서 낚시를 해 생선을 먹기도 했으나 흔치 않은 일이었다.[60] 황제국인 대원제국이 성립되고 황제를 위한 온갖 산해진미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해산물 또한 준비되었으나[61] 강황이 들어간 반죽을 생선에 발라 전에 가깝게 구운 강황어(薑黃魚)나 잉어탕(鯉魚湯),
어묵에 가까운 어탄아(魚彈兒) 등이 나왔던 걸로 보면 최대한 생선의 맛을 가린 채 섭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새우 또한 기황후에서 묘사된 것처럼 삶은 새우만 덜렁 올라오는 게 아니라 그냥 새우가 들어간 요리로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원나라의 만찬을 묘사하려면 차라리 몽골인들의 식사에 자주 올라왔던 양고기와 말고기 등의 고기 요리 위주로 등장하는 게 훨씬 정확하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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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자신의 부족을 옹기라트(弘吉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연철은 킵차크(欽察) 출신이다.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의 열전에 뻔히 나오는 내용임에도 오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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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자신의 집으로 옮겨간 뒤 감두탕(甘豆湯)을 마시며 바꿔치기 된 독을 치유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감두탕이 해독 작용이 뛰어나 오랜 세월 사용된 것은 사실이나 연철만이 감두탕을 마신다는 독만 태감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감두탕은 검은콩과 감초, 그리고 제니(薺苨)[63]를 혼합해 차로 우린 것인데 현대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해독제 = 감두탕>으로 여겨질 정도로 애용되었다.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도 사용법이 나와 있을 정도로 오래 사용되었고 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濟衆新編) 등 한반도의 의학서에서도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해독법이었다. 따라서 나라의 중요한 인물인 연철이 독을 먹고 쓰러졌다면 가장 먼저 황궁 내 태의원(太醫院)[64] 소속의 태의들이 감두탕부터 먹였을 가능성이 높다.[65][66]
- 연철이 죽은 척을 하기 위해 관을 준비하고 위패까지 써놨는데 위패에 적힌 글은 아래와 같다.
元答克罕右丞相燕鐵之柩
원답극한우승상연철지구
원답극한우승상연철지구
6. 21화 -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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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자신을 도운 왕유[68]가 고려의 왕으로 복위시켜 달라는 요청을 하자 연철은 불쾌해 하며 고려는 30년이나 원나라를 애먹인 나라는 고려 뿐이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있는데 물론 사실이 아니다. 우선 고려의
여몽전쟁은 총 7차로
1231년에 발발해
1259년에 끝났다. 즉 도합 '28년'이며 고려가 사실상 강화 요청을 하면서 끝났다 하지만 원나라의 또 다른 원정인
남월 원정의 경우 고려 침공과는 달리 겨우 3차에 걸쳐 이뤄졌지만
1257년에서
1288년까지 도합 '31년'을 버텼고 원정에 실패까지 했다.
남송의 경우는
1235년부터 전쟁을 시작해
1279년에
애산전투를 끝으로 점령하는데 도합 '44년'이 걸렸다. 따라서 연철이 말하는 원나라를 애먹인 나라는 고려만 있었던 게 아니었고, 더 오래 독하게 버틴 건 남송 쪽이었으며, 원나라에 저항한 기한이 30년이라는 발언에 근접한 건 고려보다는
남월(베트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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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실리가 자신이 임신이 아닌 것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태의가
상상임신을 한 것이라는 언급을 하는데, 상상임신의 사례는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69] 그게 상상임신(Pseudocyesis)'이라는 정식 용어로 표기된 건
1890년판 센추리 사전(Century Dictionary)일 정도로 후대의 일이다. 따라서 원나라 시기에 상상임신이라는 단어는 나올 수가 없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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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실리가
불임 치료를 받는 장면에서
뜸치료를 받으며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71] 뜸봉[72]을 살에 직접 올려놓고 태우는 '직접구'나[73] 일부러 화상을 유도하는 '타농구(打濃灸)'[74]가 아닌 이상은 적절하게 데운 후 제거하기 때문에 따듯할 정도만 느껴질 뿐이다. 더군다나 타농구는
화농(化膿)[75]을 유도하는 방식이라 당연한 얘기지만 산모나 불임치료를 받는 여성에게 처방하기엔 부적절하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는다.
또 타나실리가 뜸을 뜨는 장면을 보면 납작한 나무 위에 뜸봉을 올려두고 있는데 이는 '무흔구(無痕灸)'라고 해서 피부에 뜸을 뜬 흔적을 안 남길 정도로 약하게 뜸을 뜨는 것이다. 때문에 드라마 연출 오류가 아니라면 타나실리가 너무 곱게 자란 탓에(...) 미적지근한 정도의 열기조차도 전혀 인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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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환이 기양이 박재인을 호송하는 인원으로 참여했다가 죽었다는 소문에
실어증에 걸리는 묘사가 등장하는데, 이 때 황제의 용태를 묻는 연철에게 태의가 대놓고 "실어증이다"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어증은 서양에서 온 용어다.[76] 중국에서도
황제내경 등의 의학서적을 통해 환자가 말을 못하는 증세를 기록해 놓았으나 의학서답게 "말을 못 하는 것 자체" 보다는 "말을 못하게 하는 병변"에 집중해 기록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喉瘖(후음) - 성대 부위의 이상으로 소리가 나오지 아니하여 말을 못 하는 증상.
失音(실음) - 목이 쉰 것
吃舌(흘설), 語澁(어삽) - 말을 더듬거나 어눌해지는 것
喑痱(음비) - 중풍으로 인해 말을 못하게 되는 것
呼言不出(호언불출) - 말을 하지만 소리를 내지 못함
失音不語(실음불어) - 소리를 못 내고 말을 못함
風懿(풍의) - 뇌병변으로 인해 혀와 목구멍이 마비되어 말을 못하는 것
風喑(풍음) - 한기로 인해 입이 굳어져 말을 못하고 침이 막혀 폐를 누르는 것
風癔(풍억) - 바람을 맞아 오장에 병이 생겨 사람을 못 알아보고 목구멍에서 쌕쌕 소리가 나며 혀가 굳어서 말을 못하는 것
때문에 '실어증'이라는 말보다는 확실히 충격으로 인한 게 명확히 판명될 때는 '풍의', 순수하게 증세만 봤을 땐 '실음불어'나 '후음'[77]으로 쓰는 게 맞다. 물론 시청자들이 이해가 가기 쉽게 실어증이라고 대사를 넣은 것으로 보이나, 사실 풍의나 실음불어를 쓰고 아래에 자막을 넣어도 무방한 부분이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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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박 상단'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며 마치 거대한 상인 집단처럼 묘사해 놨는데 매박(買撲)이라는 것은
송나라 시절부터 있었던 '
조세 징수 제도'로써
술,
식초,
저수지,
시장,
나루터 등에 매길 세금을 관청에서 미리 계산한 뒤
입찰을 하고 낙찰 받은 인원과 계약을 하면 계약자는 관청 대신 세금을 징수하면서 보증금을 납부하는 방식이었다.[79] 다만 이런 식의 세금 징수는 계약자가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폐해 또한 심각했다.
몽골 제국과 원나라 시기의 매박제 계약자는 주로 무역로에 자리를 잡은 지방 영주와 상인의 연합체인 오르톡(斡脫)이었던 것이지, 매박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단체가 있었던 게 아니다. 만약 '원나라 매박의 △할을 전담하는 A 상단' 이라는 식으로 등장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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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양이
노상궁에게서 받은 거울에서 명종 황제의 혈서를 발견하는데 퀄리티가 대단히 조잡하다(...).
혈액은 응고가 되는 과정에서 새까맣게 변하는데 해당 장면에 등장하는 혈서는 마치 방금 쓴 것처럼 빨갛고 촉촉해 보인다. 나름 중요한 소재인데도 개판 고증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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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는 원나라의 행정 구역인 '행중서성(行中書省)'을 관리하는 이들을 백안을 빼고는 싸잡아서 '행성주(行省主)'라는 가상의 칭호로 부르는데 실제 원나라에서 행성을 관리했던 이들의 직위는 '평장정사(平章政事)'[80] 혹은 좌우(左右)
승상(丞相)들이었다. 사례를 살펴보자면 1334년 1월에 '아릭카야(阿里海牙)'를 하남행성(河南行省)의 좌승상(左丞相)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고, 1335년에는 호광행성(湖廣行省) 우승상(右丞相)이던 '올제이(完者)'를 시켜 민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336년 11월에 '나카이(那海)'를 호광행성(湖廣行省)의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임명해 민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행성주라는 희한한 칭호는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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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행성주 오광이 연철에게 "황제께서는 황후마마를 비롯해 4명의 비(妃), 9명의 빈(嬪), 27명의 세부(世婦)를 거느리게 되어 있다"고 발언하며 후궁을 뽑자고 건의를 하는데, 오광이 말한 저 기준은
당나라의 기준이다.[81] 정확히는 당나라의 법전인 '대당육전(大唐六典)'에 기재된 황제가 거느려야 하는 후궁의 수이다. 물론 당나라 몰락 이후 왕조들에선 제각각의 기준을 내세웠고 원나라의 경우는 초원 시절의 제도를 들여왔기 때문에 중국의 처첩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아래는 원나라의 후궁제다.
* 카툰(皇后) - 황후[82]
* 탓바르(妃子/嬪) - 비,빈
* 압야슬라그 압카이(才人) - 재인
원나라 말기에 해당하는 타환의 통치 시기에는 처첩 직위 중 '재인'이 부활했다는 게 특이한 정도였으며 처첩의 수는 딱히 정해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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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을
간택(揀擇)하는 에피소드가 시작되는데 간택은
조선 시대에 혼인을 치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혼인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의 왕족 및 궁인들이 나아가 직접 보고 적격자를 뽑던 제도를 의미한다. 옛 중국에서는 황후 책봉이 아닌 후궁의 선출에 있어서는 굳이 간택 같은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궁녀와 동침 후 품계와 작호를 내리면 그만이었다.[83] 따라서 후궁 선출을 위해 반역죄 혐의로 출궁 중인 황태후를 모셔와야 한다는 드라마 속 설정 또한 허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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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가 거주하는 궁의 이름이 '융복궁(隆福宮)'으로 나오는데 실제 융복궁은
대도 내에 있던 거대한 연못인 태액지(太液池)를 사이에 두고 대내(大內)[84]와 마주보고 있던 궁의 이름이다.[85] 융복궁은 바로 '태자부(太子府)'가 위치해 있었으며 원 세조의 아들인
칭김 태자가 머물던 곳이다. 즉 융복궁은 원래 태자궁(동궁)이었던 것.
그러다가 칭김 태자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태자비였던 코코진(闊闊真)은 칭김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계속해서 융복궁에 머물렀다. 이후 칭김의 차남인 다르마발라[86]가 후계자로 유력해지자 그의 아내인 '다기(答己)'가 코코진을 따라 태자부인 융복궁에 거처했으나 다르마발라 또한 일찍 죽음으로서 본의 아니게 코코진의 운명을 따를 뻔 했다. 하지만 다기의 아들인 무종이 즉위하고 어머니를 위해 융복궁 북쪽에 흥성궁(興聖宮)을 지었고 흥성궁이 완성되자 다기는 거처를 흥성궁으로 옮기면서 중요한 부서들을 끌어들이고[87] 융복궁을 흥성궁에 편입(!)시키면서 태액지 서쪽은 사실상 황태후 다기의 세력권이 되어 버렸다.[88]
물론 원나라의 황태후들이 어디에 거쳐했는지, 또 융복궁에 누가 거주했는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작중 황태후의 거처는 이미 흡수된 융복궁보다는 선대의 황태후 다기가 기반을 다져놓은 흥성궁일 확률이 훨씬 높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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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경합에서
관상을 보기 위해 태사국(太史局)의 관리들은 왜 아직 안 온 거냐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일단 태사국은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다. 원 세조가
1271년에 '사천태(司天台)' 라고 하는
천문학 관련 기구를 만들었고 이후
금나라 시기에 만들어졌다가 없어진 과거의 사천태를 원나라의 사천태와 합쳐 '남북사천대(南北司天台)'로 개명했고, 이후 원 인종 시기인
1312년에는 이슬람 지역의 과학 기술까지 도입해 '회회사천감(回回司天監)'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태사국이라는 명칭 자체가 틀렸다.
또한 태사국이든 회회사천감이든 간에 진짜 목적은 천문 관측이나 기후 예측 등이지, 일개 관상 따위를 보는 게 아니었다. 드라마 기황후의 경우 충렬왕 시기에 고려의 관제명을 대부분 원나라 관제로 바꾼 것 때문인지 몰라도 고려의 기관이나 관직 등을 원나라 명칭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당시 고려에서 점사를 보던 기구의 이름은 태사국이 아니라 '태복감(太卜監)'이었다.[90] 그리고 원나라 황제들은 전부 티베트 불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제국 내 티베트 불교 및 소수 불교들은 전부 '선정원(宣政院)'에서 관리했기 때문에[91] 원나라 황실에서 관상으로 후궁을 판단하는 건 전혀 맞지 않은 장면이다.[92]
실제 사천감에서 일할 사천생(司天生)들을 뽑는 시험에는 책력 수준을 보는 역과(曆科), 천문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점후천문과(占候天文科), 3개의 식반(式盤)[93]으로 길흉을 점치는 점후삼식과(占候三式科),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계산하는 추보력산과(推步曆算科), 물시계 관리를 맡을 천문관을 뽑는 사진누각과(司辰漏刻科)가 있었고 이런 시험에 필요한 서적이나 연구 말고도 혼례식 날을 정해주는 혼가택일(婚嫁擇日)이나 합혼(合婚), 풍수(風水), 주역서(周易筮)[94], 육임술(六壬術)[95] 삼명술(三命術)[96], 오성술[97] 등이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대체로 천문학과 뒤섞인 점술이지, 관상학이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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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실리가 불임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이 태의감(太醫監)쪽에서 흘러 나왔다고 하는데 당시 고려의 의학 관련 기관은 사의서(司醫署)였고 원나라의 의학 관련 기관은 태의원(太醫院)이었다. 마찬가지로 어설프게 고려의 관제를 원나라에 끼워 붙인 결과로 생긴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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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북행성주의 딸인 '
부우희'[98]가 제일 귀한 요리로 팔진고(八珍槁)[99]를 만든 장면이 있는데 팔진고는 훨씬 후대의 인물인
청나라 말기의 권력자였던
서태후와 관련 있는 요리다.
서태후가 입맛이 없고 울렁증과 설사로 고생하자, 처방을 해야 하는데 서태후의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 결국 묵은쌀과 찹쌀에 백복령(白茯苓)[100], 산약(山藥)[101], 율무, 백편두(白藊豆)[102], 연육(蓮肉)[103], 감인(芡仁)[104]을 함께 간 가루를 넣고 설탕을 쳐서 버무린 후 쪄낸 떡을 만들어 냈고 서태후가 그 떡을 맛있게 먹으면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105] 서태후(西太后)와 팔진고(八珍糕) 등 고(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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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행성주의 딸 기해가
상어 지느러미로 만든 요리를 올리는데
새우도 그렇지만, 상어 지느러미 역시 몽골인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며,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부터
남월의 해안가 지역에서 요리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 만큼 원나라 황실에서 상어 지느러미를 요리 재료로 썼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더군다나 상어 고기는
암모니아 함유가 높아[106] 후각이나 미각이 예민한 사람은 아예 먹지도 못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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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행성주 오광의 딸 오설화가 30여가지 산해진미에 술을 끓인 음식과 적당한
스토리텔링으로 높은 점수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107] 정작 점수를 주는 종이에는 사천행성으로 기재가 되어 있고 설씨(薛氏)라고 써져 있다. 참고로 해당 장면에서 진짜 사천행성주의 딸인 '설모란'[108]은 오리 고기를 내놓았다. 근데 이 쪽도 사천행성주의 딸인데 어째 채점 장면에서는 섬서행성 적씨(狄氏)라고 써 있으며 이 후보의 용지에 채점하는 장면이 2번이나 중복되었다.[109] 이래저래 한자가 나오는 장면은 엉망으로 나왔다.
운남행성 오씨 → 사천행성 설씨(오기) 사천행성 설씨 → 섬서행성 적씨(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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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경합에서 세상에서 제일 귀한 요리를 만들어 오는 과제에서 재료와 부엌을 몽땅 뺏겨[110]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기양이
소금이라고 답변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일화는 바로
조선의 21대왕인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에 대한 야사에서 나온 것이다. 즉, 후대의 야사를 가져와 기양에게 붙인 것이다.
- 3차 경합에서 그림을 보고 어떤 내용인지 맞추는 내용이 나오는데 불상을 제외하면 그림에 등장하는 건물이나 인물의 의복 등이 영락없는 조선의 시골 모습 그 자체다. 아래에 있는 그림은 원나라 시대의 화가인 임인발(任仁發)이 그린「오왕취귀도권(五王醉歸圖卷)」[111]인데 비교해 보면 화풍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드라마 기황후에 등장한 그림 / (아래) 임인발이 그린 오왕취귀도권 |
* 아예 장면을 위해 자료에 조작을 가한 것도 발견된다. 후궁 3차 경연에 나온 위 그림의 답은 소동파가 지은 시구에서 나온 건 분명 맞다. 그러나 하나의 시에서 발췌된 문구가 아니라 각각 다른 시에서 발췌된 문구다.
매우납세탁옥취(賣牛納稅拆屋炊) - 소를 팔고 집을 헐어 밥을 지으니
여천불급명년기(慮淺不及明年饑) - 내년에 굶는 건 생각도 안하네
- 오중전부탄(吳中田婦歎)의 11, 12번째 줄
여천불급명년기(慮淺不及明年饑) - 내년에 굶는 건 생각도 안하네
- 오중전부탄(吳中田婦歎)의 11, 12번째 줄
백의선인재고당(白衣仙人在高堂) - 흰 옷의 선인(
관세음보살)은 높은 집에 있네
- 우중유천축령감관음원(雨中遊天竺靈感觀音院)의 4번째 줄
- 우중유천축령감관음원(雨中遊天竺靈感觀音院)의 4번째 줄
그런데 기양이 회상하는 장면을 보면 두 시의 문구가 한 페이지에 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중전부탄」 사이에 「우중유천축령감관음원」 1줄이 섞여 있다 |
아마도 읽어주면서 잠깐 본 것을 기억하고 있는 기양의 지혜로움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자료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런 연출이라면 그냥 읽는 장면만 넣어도 충분한데 불필요한 자료 조작 부분까지 덤으로 넣는 바람에 생긴 사달이다.
7. 26화 -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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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양이 재인(才人)으로 간택된 후
신검(身檢)을 받으러 간다는 언급이 있는데 신체검사(身體檢査)는 한국이든 중국이든 후대에 쓰인 용어고 당시에는 그냥 태의들이 맥진(脈診)[112], 망진(望診)[113], 문진(問診)[114], 촉진(觸診)[115] 등으로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진찰(診察)'이라는 용어를 쓰면 될 일이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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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실리의 지시로 연화가
박새[117][118] 우린 물을 자신이 심어 놓은 궁녀들을 통해 기재인의 처소로 보냈다가 그 향으로 인해 간파되는 장면이 있는데 박새풀은 그냥 풀냄새만 날 뿐이지 특유의 좋은 향은 없다. 흔히 박새와 햇갈리는 산마늘의 경우는 잎을 뜯거나 씹었을 경우 알싸한
마늘과 비슷한 향이 난다. 게다가 창포(菖蒲)[119]의 맑은 향은 꽤 독특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재인이 창포물이라고 가져온 물에서 향이 나지 않아 간계임을 알아채는 것으로 묘사했다면 알맞은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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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이 후궁 경선에 나서기 전의 기양에게 궁중 암투에 대비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동의나물, 박새(뿌리),
털머위의 향을 맡게 하는데 일단 동의나물은
곰취와 주로 햇갈리는데 곰취는 특유의 향[120]이 나는 반면에 동의나물은 향이 없다. 박새 또한 위에 언급되었지만 비슷하게 생긴 산마늘이나 작중에서 언급된 창포와 햇갈리거나 구별될 만한 특별한 향이 없다. 마지막으로 털머위의 경우는 그 특유의 화려하고 귀여운 노란 꽃에서 강한 향이 나지만 그 잎사귀나 뿌리에서는 별 다른 향이 나지 않는다. 즉 탈탈이 언급한 세 독초 모두 무취(無臭)이기 때문에 창포물이나 다른 것과 섞어서 제공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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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옥좌 근처에서 타환에게 "신은 그간 9분의 황제 폐하를 뫼셨습니다" 라고 발언을 하는데 실제로 연철이 모신 황제는 9명이 아니라 10명이다. 왜냐하면 원나라
성종 3년인 1299년에 영원왕(寧遠王) 코코추(闊闊出)가 삭방(朔方) 일대의 방비를 소홀히 했을 때 성종은 19살의 황자인
카이샨(훗날의 무종)을 보내 대신 지키게 했고 연철은 그 때 10년이나 숙위(宿衞)[121][122]로써 카이샨을 지켰다. 때문에 카이샨은 연철을 총애했고 황제에 오르자마자 연철을 '정봉대부(正奉大夫)[123]' 겸 '동지선휘원사(同知宣徽院事)[124]'에 임명했다. 따라서 성종 시절에 숙위 생활 10년을 포함하면 사실상 도합 10명의 황제를 모신 것이다. 작중에서도 연철이 자기 입으로 "그런데 고작 30년 밖에 안 흘렀다"고 하는데 타환이 즉위한 1333년과 무종이 북방을 지키던 시기인 1299년을 빼면 대략 34년 정도가 된다. 만약 성종 황제 시절의 숙위군 시기를 빼고 무종 황제 시기인 지대(至大) 원년, 즉 1307년부터 넣으면 타환 즉위 시기까지 26년 밖에 안 흐른게 되는 거라서 해당 대사는 빼박 오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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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의 선위 협박에 의기소침해진 타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자 사부인 탈탈에게 조언을 요청했고 답은 기재인에게 있다는 탈탈의 말에 뭔가를 깨달으며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갈이천정(渴而穿井)'은 안자춘추(晏子春秋)'의 '내편 잡상(內篇 雜上)'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소공(魯昭公)이 제나라로 망명을 했을 때 제경공이 소공과 이야기 하면서 "권좌에 있을 때는 누가 충신인지 몰랐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됐다"는 소공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잘못을 뉘우쳤다고 생각했고 이 일을 안자에게 이야기 하며 소공의 귀환을 돕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자 안자는 반대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제경공: 如果幫助魯昭公回去魯國, 他會成為賢明的國君嗎?
(노소공을 도와 노나라로 돌아가게 한다면 현명한 군주가 될 수 있겠는가?)
안자: 不會. 溺水後才探水路,迷路後才向人問路,就像是面臨災難才趕緊鑄造兵器,被噎著了才趕緊挖井取水 雖然緊急採取行動但是已經來不及了.
(그럴 수 없을 겁니다. 물에 빠진 후에야 물길을 찾고, 길을 잃은 후에야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것은 재난이 닥치면 서둘러 병기를 만들고, 목이 메면 서둘러 우물을 파서 물을 길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급하게 조치를 취한다지만 이미 늦었습니다.)[125]
즉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라는 말은 "목이 마르면 알아서 우물을 판다"라는 의미가 아닌 "목이 마르면 그제서야 우물을 판다"는 내용이다. 즉 뒤늦게 허겁지겁 대책 세우려고 발악하는 사람을 까는 내용이다. 사실 이 부분은 드라마의 오류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고사성어의 뜻이 왜곡되어 잘못 퍼진 경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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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에 늦은 것을 타나실리가 트집 잡으면서[126] 배운 적도 없는 내훈(內訓)의 강령을 읊어보라고 하고 기재인이 유창하게 읊자 "그걸 알면서 늦었으니 더욱 죄질이 나쁘다"(...)면서 내훈을 100권 쓰게 만드는 벌을 내린다.
그런데 내훈을 만든 이는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세워진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의 정비인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이다. 서황후가 당시 궁중 여성들을 교육하기 위해 고대의 성인과 현인들이 정리한 여성 봉건 윤리에 관한 가르침을 모아 1404년에 편찬했다. 따라서 드라마 기황후 배경시기에 내훈이 등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만약 등장한다면 후한(後漢)의 여류시인인 '반소(班昭)'가 썼다고 하는 『여계(女誡)』나 당나라의 여성학자인 '송약소(宋若昭)'가 지은 『여논어(女論語)』가 등장하는 게 맞다.[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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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인이 타나실리 앞에서 멋드러지게 읊는 내훈의 구절은 어처구니없게도 위에서 언급된 송약소의 『여논어(女論語)』의 구절이다.[128] 하지만 기재인이 읊는 부분은 「수절장제십이(守節章第十二)」에 속하며 따라서 타나실리가 내훈을 읊으라고 했을 때 기재인은 여논어의 처음부터가 아닌 끝부분을(...) 읊은 것이다. 만약 여논어를 처음부터 읊었다면 제일 먼저 나와야 하는 건 「입신장제일(立身章第一)」이고 명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내훈을 읊는다면 「덕성장제일(徳性章第一)」이 나와야 한다. 기재인이 읊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전략) 第一守節, 第二清貞, 有女在室, 莫出閨庭, 有客在戶, 莫露聲音,
제일수절, 제이청정, 유녀재실, 막출규정, 유객재호, 막로성음
(첫째는 절개를 지킴이고 둘째는 깨끗한 지조이며 여자가 집 안에 있을 때는 규정(집마당)으로 나가서는 안 되고 손님이 집에 있을 때는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129]
不談私語, 不聽淫音, 黃昏來往, 秉燭掌燈, 暗中出入, 非女之經... (후략)
불담사어, 불청음음, 황혼내왕, 병촉장등, 암중출입, 비녀지경[130]
(사적인 말을 하지 않으며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해질녘이 되면 촛불을 들고 등불을 켜며 어두운 가운데 출입하는 것은 여자의 도리가 아니며...)
즉 기재인이 읽은 건 내훈이 아니라 여논어이며, 처음부터 읊은 것도 아닌 끝부분만 읽은 것이다. 물론 타나실리를 골려주기 위해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131] 작중에서 그런 의도로 했다는 뉘앙스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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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인이 자신을 벌준 타나실리 황후를 함정에 끌어들이려고 할 때, 백안과 탈탈 앞에서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타위과(以他爲過)', 즉 잘못을 유도해 그것을 빌미로 공격하는 술수를 쓸거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132] 일단 손자병법에는 저런 말이 없다. 이타위과라는 말은
후한 시대의 사상가인
왕충(王充)[133]이 지은 『논형(論衡)』의 82권인 '서해(書解/글풀이)' 부분에 등장한다.
呂不韋·淮南王以他爲過, 不以書有非 ; 使客作書, 不身自爲, 如不作書, 猶蒙此章章之禍.
여불위(呂不韋)와 회남왕(淮南王)은 다른 일로써 화를 입었지만[134][135], 그들의 저서에 잘못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이들은) 손님에게 글을 쓰게 했지만 스스로 쓰지 않았고 그것은 쓰지 않은 것과 같았기에 오히려 문장으로 인한 화를 받았다.
사실 '이타위과'라는 것도 자신이 주로 하던 게 아니라 다른 경우로 화를 입은 것을 의미하지, 잘못을 유도한다는 식의 내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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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인과 오재인이 후궁에서 서로 뺨을 치며 싸우자[136] 타나실리가 나타나 말리고 저녁에 조례를 열 것이라고 하는데 조례(朝禮)는 말 그대로 '
아침에 모여서 하례를 하거나 하루 일을 의논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녁에 긴급하게 모일 거면 창작을 하더라도 석례(
夕
禮)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좀 더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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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실리의 탕약을 먹고 오재인이 쓰러지자 기재인이 "내의원을 불러달라"고 얘기하는데 내의원이라는 직분은 없다.[137] 그냥 의원(醫員)이나 태의(太醫)[138]를 불러달라고 했으면 안 생겼을 오류다. 이후에 언급되는 내의국(內醫局), 탕재국(湯材局) 역시 확인되지 않는 용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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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燕京)을 원나라의 수도인 것처럼 묘사되고 표기하는데 연경은
금나라 시기에 중도(中都)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다가 몽골 제국에 함락되었고
1264년에 원 세조가 연경 북쪽에 새로 도시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칸발리크(汗八里)였다. 이 새로운 도시 이름은 '중도로대흥부(中都路大興府)'로써 금나라 시기의 명칭인 '중도'로 가는가 싶었지만 이후
1272년에 대도로(大都路), 이른바
대도(大都)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서 원나라의 수도를 말할 때는 대도라고 부르는 게 맞다. 다만 고려의 사서의 경우 주로 '연경'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139] 이는 고려 입장에서는 상국인 원나라가 고깝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 남송이 불렸던 명칭인 연산부(燕山府)와 유사한 옛 지명인 연경으로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140] 다만 원나라 그 자체가 배경인 드라마에서조차 대도라는 공식 명칭을 두고 연경이라 부르는 건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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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들에게 독살 책임을 돌리려 했다는 죄목으로 타나실리가 냉궁(冷宮)으로 가는 장면이 있는데
냉궁 항목에 설명되어 있듯 황궁에는 냉궁이라고 하는 별도의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황후나 후궁을 지정한 전각에 유폐하고 생필품 등을 끊으면 그것이 바로 냉궁이었다.[141] 보통 행동에 제약이 많던 당시의 여성이 직접 죄를 짓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는 가족들이 지은 죄에 얽혀서 처벌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냉궁이라는 처벌 내지는 감금용 공간을 따로 궁에 만들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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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양위 조서를 작성한 뒤 타환에게
옥새를 찍게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대원제국황제인(大元帝國皇帝印)'이라고 적혀있다[142]. 당연히 잘못 고증된 것이다.
원나라에서 사용한 어새(御璽)는 무려 몽골 제국 시절부터 사용되었던 것이다. 칭기스 칸이 카칸이 된 후 하늘로부터 '하스보 탐가(哈斯寶)'라는 옥으로 만든 도장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영원한 하늘의 힘 아래, 예케 몽골 올로스의 천지의 카간의 명령이 백성에 내려와 도달하니, 두려워하라, 찬양하라⟫ 라는 문구가 위구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143] 때문에 황제의 선위와 같은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당연히 어새를 찍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황제가 사용하는 도장은 일반 도장이 아니라 옥새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안에 새겨진 글씨도 인( 印)이 아니라 새( 璽)나 보( 寶)라는 글자가 사용되었다.[144] 당장에 같은 드라마의 11화에 타나실리의 인장이 등장했는데 거기에는 황후지보(皇后之寶)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는데 타환이 쓰는 옥새에만 인(印)으로 새겨져 있었다. 명백한 오류인 셈.
8. 31화 - 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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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릴타이 날짜에 맞춰 탈탈이 각 행성에 심겨진 매박의 첩자들을 붙잡는다는 언급이 있는데, 첩자를 체포한다는 것은 단순히 명단만 확보했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통 첩보 대상 주위 인물로 위장한
첩자들이 보고하는 방식은 자신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첩보지에 계속 머물고 소식을 전하는 건 전달을 전담한 다른 인원들이 첩자와 긴밀히 접선해 그 간의 첩보 내용을 받은 뒤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때문에 대도에 와 있는 인물들을 잡아봐야 연락책이기 때문에 그들이 입을 다물어 벌이면 증명할 방법이 없다.[145]
그렇다고 탈탈이 각 행성을 순회하듯 돌며 숨어 있는 첩자들을 색출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원나라의 영토는 오늘날의 중국 그 이상으로 넓기 때문에 각 행성의 협조를 받아 모든 행성에서 별도로 수색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체포하는 게 아닌 이상, 탈탈 혼자의 힘으로 행성 내에 있는 첩자를 체포하는 건 무리수다. 드라마에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너무나도 현실성이 없는 전개를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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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의 북문을 지키는 장수의 머리띠에 있는 장식이
삼족오(...)다. 아마도 같은
MBC 드라마
주몽의 소품을 돌려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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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을 구하기 위해 왕유가 그 일행이 맹화유(猛火油)[146]로 불을 붙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북문을 지키던 원나라 병사들이 허둥지둥 하는 모습이 연출되는데 이 맹화유라는 것은 놀랍게도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부터 언급되었으며
5대 10국부터 무기로 사용되었다. 원나라도 남송을 점령한 이후 그들이 사용했던 맹화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147], 심지어
점성국(占城國)으로부터 공물로 받기도 했다. 때문에 원나라 장수가 맹화유를 알아보지 못하는 부분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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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릴타이가 개최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냥 대도의 정전(正殿)에서 황제와 연철, 행성주들 간에 간단히 이뤄지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쿠릴타이는 원나라에서는 몇 없는 거대한 행사였기 때문에 참여한 인원들도 많았으며 원나라 뿐만이 아닌 직접적으로 관련된 국가들의 군주들 또한 참여했으며[148] 개최 3일 전부터 연회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때문에 대도에서 열린 쿠릴타이[149]를 제대로 묘사하려면 1화의 기황후의 즉위식 장면처럼 장엄하게 연출되었어야 한다.
그리고 연철 사망 이후 타환을 즉위시키기 위해 대도의 대명전(大明殿)에 모였던 게 원 제국의 마지막 쿠릴타이였다. 타환 즉위 이후 각지의 농민 반란이 홍건적의 난으로 확대되면서 쿠릴타이를 개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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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세가 옥새가 찍힌 선위 조서를 철회하기 위해선 쿠릴타이의 만장일치가 있어야 한다는 법령이 있다는 발언을 하고 이후에도 쿠릴타이의 만장일치를 자주 언급한다. 물론 쿠릴타이의 기본이 만장일치인 것은 맞으나 이미 그 규칙은
원 세조 시기에 깨진지 오래였다.
뭉케 칸 사망 이후 열린 쿠릴타이에서 만장일치로 카칸(大汗)에 추대된 건 쿠빌라이가 아닌 그 동생
아리크부카(阿里不哥)였다.[150] 하지만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한 쿠빌라이는 개평부(開平府), 훗날 상도(上都)가 되는 곳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을 모아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열어 카칸의 자리에 올랐다. 즉, 원나라 개창부터 쿠릴타이의 만장일치 원칙은 이미 무너졌고 황제 즉위에 관련된 쿠릴타이를 제외한 다른 쿠릴타이의 경우는 만장일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151] (만약에) 타환 통치 시기에 쿠릴타이가 열렸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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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은 타환을 변하게 함으로써 쿠릴타이에서 자신을 물먹인 기재인과 기재인을 추천하고 쿠릴타이 때 황제를 지지한 백안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기재인의 지략에 결국 그 제거 대상을 섬서행성주 적공과 그 딸 적미랑으로 바꿨는데 정작 끌려가는 것은 사천행성주 설도관의 딸인 설모란이 끌려 나간다(...). 분명 후궁 경선 1차 경합(관상)과 2차 경합(요리) 당시 사천행성주의 딸 모란으로 나왔던 배우가 32화에서 적공의 딸 미랑이 되어 끌려나간다.[152]
왼쪽이 25화의 설모란이고 오른쪽이 32화의 적미랑이다. 동일한 배우(김연수)가 연기했다.
후궁 경선 이후 어부지리로 책봉을 받는 장면[153]이 등장하는 26화에서 위 배우가 섬서행성주의 딸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한 화만에 배우의 캐스팅이 서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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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안, 탈탈, 왕유가 연철의 세력에 대해 논의하고 백안이 왕유에게 도성 수비대를 장악하라고 권하는 와중에 탈탈이 "그나마도 도성 수비대가 공성전으로 버틴다면 말짱 헛것이 된다" 라는 말을 하는데 일단
공성전은 말 그대로 '성을 공격하기 위해(攻城) 벌이는 전투'를 의미한다. 만약 도성 수비대가 지키는 입장이라면 공성전이 아니라 '수성전(守城戰)' 내지는 '농성전(籠城)'[154]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 황태후가 휘정원(徽政院)의 재정에 대해 우려하고, 기재인이 비용 절감을 언급하며, 특히 타나실리가 행하는 불사(佛事)를 줄이자고 이야기하는데 이 불사에 대한 비용 절감의 부분은 실제 역사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나, 당연하게도 기재인이 아니라 당시 원나라 행정의 중심을 맡고 있던 중서성에서 나온 말이었다.
甲辰,中書省臣言:「興和路起建佛事,一路所費,為鈔萬三千五百三十餘錠。請依上都、大都例,給饍僧錢,節其冗費。」從之。
(3월) 갑진일, 중서성의 대신이 "흥화로[155]에서 불사를 시작하는데 소요된 비용은 (교초) 1만 3,530여 정입니다. 상도와 대도의 방식을 따라 승려들에게 식비를 지급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라고 했고 그에 따랐다.
(3월) 갑진일, 중서성의 대신이 "흥화로[155]에서 불사를 시작하는데 소요된 비용은 (교초) 1만 3,530여 정입니다. 상도와 대도의 방식을 따라 승려들에게 식비를 지급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라고 했고 그에 따랐다.
乙酉,中書省臣言:「佛事布施,費用太廣,以世祖時較之,歲增金三十八錠、銀二百三錠四十兩、繒帛六萬一千六百餘匹、鈔二萬九千二百五十餘錠。請除累朝期年忌日之外,餘皆罷。」從之。
(12월) 을유일, 중서성의 대신이 "불사를 베푸는 비용이 너무 광범위하여, 세조 시기에 비해 매년 금 38정, 은 203정 40냥, 비단 6만 1천 600여 필, 교초 2만 9천 250여 정이 증가하였습니다. 모든 연례 기일과 기념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단할 것을 요청합니다." 라고 했고 그에 따랐다.
(12월) 을유일, 중서성의 대신이 "불사를 베푸는 비용이 너무 광범위하여, 세조 시기에 비해 매년 금 38정, 은 203정 40냥, 비단 6만 1천 600여 필, 교초 2만 9천 250여 정이 증가하였습니다. 모든 연례 기일과 기념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단할 것을 요청합니다." 라고 했고 그에 따랐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기재인이 황후가 100만냥에 가까운 돈을 쓴다, 찬불 행사에만 10만냥이 든다고 한 것은 너무 부풀려진 부분이다.
* 타나실리가 마하 황자를 위해 찬불(讚佛) 행사를 연다고 하는데, 찬불은 말 그대로 부처, 즉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마하 황자의 수명이 길어지는 것을 빈다면 '축수재(祝壽齋)'라고 부르는 게 맞고[156] 공교롭게도 부처님에게 복을 비는 것과 가장 유사한 행사는 고려에서 연례적으로 치렀던 연등회(燃燈會)가 가장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찬불 행사를 왜 뺐냐는 타나실리의 질책에 기재인이 "황실 재정이 바닥이 난 것은 황후가 휘정원을 맡아 방만하게 돈을 써댔기 때문이다" 라고 날카롭게 일침하는 부분이 있는데 틀린 말이다. 휘정원(徽政院)이 원나라 황실의 재정적인 부분에 관여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157] 그것을 총괄하는 것은 대대로 '황태후'의 소임이었다. 당장에 타환이 즉위한 해(1333년) 12월에 휘정원을 만들고 관속(官屬)을 366명이나 배치해 준 것도 황태후 부다시리에 대한 예우였다. 따라서 황후가 휘정원의 인장을 가지고 돈을 방만하게 쓰는 행동은 당시엔 불가능 했다.
* 기재인이 회임을 하자 첩여(婕妤)에 봉하는데 타환 시기에 재인이 부활한 건 사실이나 기씨가 첩여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은 허구다.
* 타나실리가 회임한 기첩여를 증오해 술사[158]로 하여금 견고술(犬蠱術)[159]을 이용해 기첩여를 공격하게 하고 나중에 황제에게 들켰음에도 궁녀들만 끌려가 취조를 받았을 뿐, 황후에 대한 뭔가 조치 없이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사실 원나라에서 저주를 행한다는 건 정말로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몽골인들의 최초의 문자 법전이었던『 칭기스칸 법전(成吉思汗法典)』의 50번째 항목에는 '사악한 방법(邪道)으로 남을 해친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 세조가 재상이었던 아흐마드 파나카티(阿合馬)를 죽인 후 그의 집을 압수수색 했는데, 첩이었던 인주(引柱)가 있던 곳에서 바싹 말린 사람의 가죽(人皮) 2구가 발견되었고 그 용도를 추궁하자 "사람을 저주하는데 쓰며 신좌(神座)에 올린 뒤 주문을 외우면 사람 가죽이 그 주문에 응하는 듯한 소리를 내고 그러면 저주가 더 빨리 스며든다" 고 답했다. 분노한 세조는 인주와 여타 2사람을 붙잡은 뒤 산채로 껍질을 벗기는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160] 즉 칭기스칸 법전과 사람 가죽 일화로 짐작했을 때, 원나라에서 저주술을 시행하는 것은 걸렸을 시 무조건 죽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고로 타나실리가 술사에게 저주를 의뢰하고 그 저주로 기첩여를 해치려 한 것 자체가 대죄(大罪)였으며 걸리는 즉시 산채로 껍질을 벗겨댔기 때문에 드라마 속 묘사처럼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 기첩여가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하는 장면이 묘사했는데 시적으로 너무나도 빠르다. 아유시리다라의 탄생일은 1340년 1월 23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드라마 기황후의 48화에 부근에 해당한다. 타임라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즉, 실제 아유시리다라가 태어날 시기엔 타나실리, 당기세 등이 전부 죽고 백안과 황태후까지 실각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는 타나실리 황후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아유시리다라가 태어나는 장면이 등장하는 35화의 드라마 속 년도를 계산하면 대략 1334년 후반에서 1335년 초에 해당한다.[162] 즉, 아유시리다라는 실제보다 드라마 속에서 5-6년 일찍 태어난 것이다.[163]
9. 36화 -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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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환이 연철에 대한 토벌령을 내리면서 명종 황제의
신주에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런데 신주에 있는
지방(紙榜)에 <원황제휘화세랄[164] 신위(元皇帝諱和世剌 神位)>라고 되어 있는데 당연히 맞지 않다.
일단 원나라의 공식 명칭은 그냥 원(元)이 아니라 대원(大元)이며 국왕의 제사는 그 나라에서 지내기 때문에 굳이 신주에 별도의 국명을 넣지는 않았다. 또한 명종 황제가 1329년 7월 경인일에 사망했을 때 기련곡(起輦谷)[165]에 장사를 지냈고 12월 을사일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였던 예부룬(也不倫) 등이 의논해 중국식 시호는 '익헌경효황제(翼獻景孝皇帝)'로[166], 묘호는 '명종(明宗)'으로 정했다. 따라서 유교식으로 신주의 지방을 작성했으면 본명을 쓰는 게 아니라 '익헌경효황제'라는 공식 시호를 쓰는 게 법도에 맞다.
또 다른 문제로, 신주가 모셔져 있는 곳이 사찰이라는 점인데 유교식 신주가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유교와 불교에서는 신주의 지방을 기재하는 방식이 달랐다. 만약 타환이 아버지에 대한 신주를 만들 경우, 아래와 같은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유교식: 顯考翼聖景孝皇帝神位(현고익헌경효황제신위)[167]
따라서 절에 봉안된 신주일 경우 다른 건 몰라도 뒤에 영가(靈駕)를 붙이는 게 맞다. 만약 드라마 속 사찰이 타환이 직접 만든 게 아닌 문종 황제나 연철이 만들었거나 단순히 명종 황제를 기리기 위한 사찰이라면 신주에 '익헌경효황제 영가(翼獻景孝皇帝 靈駕)'라고 적혀 있는 게 좀 더 정확했을 것이다.[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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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안이 요양행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명분거리로 명종 황제의 혈서를 언급하자 연철이 자신이 조작한 혈서를 꺼내며 "명종 황제의 옥새가 찍혔다"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해당 혈서에 찍힌 옥새의 인영은 타환이 사용하는 옥새의 인영과 똑같다(...). 즉 드라마 설정 속에서 연철이 섭정으로서 황제의 옥새를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옥새가 찍했다고 해서 그게 명종 황제의 진짜 혈서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171]
또한 타환이 진짜 혈서에는 아버지인 명종 황제와 자신만이 아는 나비 문양이 있다는 걸 행성주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또한 행성주들이 황제의 말을 신뢰할 증거가 못된다는 단점이 있다. 왜냐하면 명종 황제와 나비의 어떤 연관성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데다 타환과 명종 사이의 비밀이면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행성주들로써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드라마 제작진의 연출 실력이 형편 없어서 납득이 되지 않는 요소들을 가지고 시청자들을 억지로 납득 시키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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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이 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설명하는데 실제 대도의 모습과 전혀 닮지도 않았다.
(위) 드라마 속 지도에 표기된 대도의 모습 / (아래) 실제 대도의 조감도
대도는 유목민족이었던 몽골인들의 습성에 따라 물이 흐르고 있었고 대내(황궁) 역시 물 근처에 지어졌다. 특히 황궁 안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연못인 태액지(太液池)가 존재했으며 각 궁마다 전용 후원이 존재할 정도로 숲이 가득했다.[172] 그리고 금나라의 수도였던 중도 북쪽에 만든 계획도시였기 때문에 드라마 속 지도처럼 제멋대로 생기지 않았다.[173]
그리고 탈탈이 대도에는 8개의 문이 있다고 했는데 이 설명도 틀렸다. 대도를 둘러싼 성벽에는 총 11개의 성문이 있었다. 남쪽에 순승문(順承門), 여정문(麗正門)[174][175], 문명문(文明門)이 있었고 동쪽에는 광희문(光熙門), 숭인문(崇仁門), 제화문(齊化門)이 서쪽에는 숙청문(肅清門), 화의문(和義門), 평칙문(平則門)이 있었으며 북쪽에는 건덕문(健德門)과 안정문(安貞門)[176]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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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의 아들 탑랄해(탑자해)가 황제가 숨어있던 액정궁을 공격했다가 백안의 칼에 죽고, 당기세는 외곽에 있다가 달아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당기세가 먼저 죽었고 탑랄해는 달아나 황후 타나실리에게로 가서 숨었고 타나실리가 옷으로 가려 숨겨주었으나 결국은 들통나 살해되었다.
그리고 드라마 상에서는 군을 일으킨 인물이 당기세와 탑랄해 정도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우선 연철과 백안으로 인해 존재 자체가 사라진 연철의 동생 사둔의 동생인 '다리크(答里)', 타환의 친척으로 짐작되는 황족 '콩코테무르(晃火帖木兒)', 장수인 당쿠샨(黨和尚)과 랄랄(剌剌), 그리고 겁설(怯薛)을 담당하던 '아차치(阿察赤)' 등이 있었고 당기세와 탑랄해는 궁을 친 경우라 금방 살해됐지만 다리크를 중심으로 뭉친 나머지 세력들은 북으로 도망가 한 동안 버텼다. 그러나 다리크와 당투샨, 랄랄 등은 원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사로잡혀 상도로 끌려간 뒤 처참하게 처형됐고 콩코테무르는 겁에 질려 자살하였으며 내부 호응을 하려고 했던 겁설관 아차치는 백안을 암살하려다가 발각돼 마찬가지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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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시역을 벌였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기 할 말을 다 한 후에
불명예스럽지 않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177]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실제 연철은 너무나도 방탕하게 살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연철은
태정제(이순테무르)의 황후인 옹기라트씨 바부얀(八不罕)과 첩들이었던 옐렌진발라(亦憐真八剌), 훌루그(忽剌), 예쉬(也速), 사단발라(撒答八剌), 보귀네귀리미시(卜顏怯里迷失), 실레그테무르(失烈帖木兒), 튀니(鐵你), 빌게(必罕), 쉬귀데리(速哥答里) 전부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종실의 여인을 40여 명이나 부인으로 얻었으며 이중에는 부인으로 삼은 뒤 3일 만에 내쫓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원나라의 원로대신인 조세연(趙世延)[178]의 집에서 연회가 열렸을 때, 어떤 한 여인을 보고 연철이 데려가려고 했는데 좌우 사람들이 " 저 여자는 태사(연철)의 안사람입니다" 라고 말렸다. 즉 귀부인 대부분이 연철이 건드린 여자였고 처첩 수가 너무 많아서 다 기억도 못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몸이 파리해지고 피오줌을 싸면서(體羸溺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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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이 사망한 직후 기첩여에게 많은 뇌물이 오는 와중에 고려에서도 질 좋은 인삼과 함께 고려 국왕의 도장이 찍힌 서신이 오는데, 인영을 잘 살펴보면
전서체로 '고려국예왕지보(高麗國濊王之寶)'라고 적혀 있다.[179]
고려는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이자 부마국이었기 때문에 원나라로부터 금인(金印)[180]을 받아서 사용했다. 그렇기에 원나라로 보내지는 문서에 찍은 도장에 황제를 의미하는 보(寶)나 새(璽)가 있는 건 불가능했고 대신 격이 낮은 글자인 인( 印)이 사용되는 게 맞다.[181] 물론 밀서이기 때문에 고려에서 만든 옥새를 찍지 않았겠냐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으나 보내는 상대가 원나라 황제의 후궁이기 때문에 제후국의 왕이 보(寶)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건 똑같이 무례한 행동이 된다. 따라서 인영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 정도로 찍혀 있는 게 맞다.
다른 문제점으로 고려의 왕이 찍은 인장에 '예왕(濊王)'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예왕은 옛 부여의 왕으로써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어새를 쓴 인물로 알려져 있다.[182] 하지만 고려는 딱히 부여와는 관련이 없었고[183], 문종의 아들이었던 왕수(王㸂)가 부여공(扶餘公)에 임명된 적은 있으나 예( 濊)라는 글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나라나 그 이전의 금나라나 요나라, 송나라에서 별도로 고려의 왕에게 예왕이라는 칭호를 내린 적도 없다. 따라서 고려국왕이라고만 쓰면 되기 때문에, 고려국예왕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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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철 일가의 몰락 이후
논공행상 직전, 기첩여가 타환을 도와 대승상 자리는 백안에게 넘기고 행성주들을 대표하는 오광(운남), 부사귀(영북), 설도관(사천)에게는 부활시킨
삼공직을 제수해 대승상 자리가 지니는 명예를 분할하는 식으로 불만을 잠재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사실과는 다르다.
삼공직은 오랜 세월 중국 왕조들에서 주로 명예직으로 존재해 왔고, 원나라에서도 존재했다. 우선 태사(太師)는 바로 타환의 즉위를 틀어막았던 연철이 가지고 있던 직위였다.[185] 그리고 태보(太保)는 바로 백안이 가지고 있던 직위 중 하나였다. 연철이 태사 직위를 명종 황제에게서 받았듯이, 백안 역시 태보 직을 명종 황제로부터 제수받았다. 마지막으로 태부(太傅)는 타환 제위 초기의 재상 중 하나이자 연철의 동생이었던 사둔(撒敦)이 타환에게 받았던 직위였다. 즉 드라마 상에서는 기첩여가 논공행상에서의 갈등을 막기 위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다 있던 거였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대승상(大丞相)이라는 직위를 가장 처음 받은 것은 '백안'이었다. 당기세 일파의 반란을 제압한 뒤 백안이 짐짓 사직의 뜻을 밝히자 황태후 부다시리와 타환이 만류하면서 그를 달래기 위해 제수한 것이 바로 대승상이었다. 연철을 대표하는 직위는 의외로 태사와 태평왕이었고, 중서우승상 직위는 별로 거론되지 않았다.[186] 따라서 작품 초기부터 연철이 대승상이라고 불린 것 자체가 사실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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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타나실리가 사약 마시기를 거부하자, 기첩여의 요구로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교형에 쳐해지는데 실제로 타나실리는 반역자인 오라비를 숨겨준 죄로 폐위된 후
개평(開平)의 민가에 유폐되었고, 백안에 의해
짐독으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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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안이 황후는 대대로 옹기라트 가문에서 나와야 정통성을 인정을 받는다고 발언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직전의 황후였던 타나실리 역시 킵차크(欽察) 가문 출신으로 옹기라트 출신이 아니다. 역대 원나라의 황후들 중 옹기라트(쿵그라트) 출신이 아닌 인물은 아래와 같다.
성종의 아내 브루칸(卜魯罕) 황후 = 바야후트(伯岳吾) 출신
명종의 어머니 인헌장성황후(仁獻章聖皇后) = 이키레스(亦乞烈) 출신
문종의 어머니 문헌소성황후(文獻昭聖皇后) = 탕구트(唐兀) 출신
혜종(타환)의 어머니 마알라이다이(邁來迪) 황후 = 카를루크 출신
혜종의 아내 타나실리(答纳失里) 황후 = 킵차크(바야후트)[187] 출신
혜종의 아내 올제이후투그(完者忽都) 황후 = 고려 출신
물론 우구데이 칸이 "옹기라트 부족은 딸을 낳으면 대대로 황후로 세우고, 아들을 낳으면 공주에게 장가들게 하라. 4계절 첫 번째 달마다 황제의 명을 읽고 받들어 세세토록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弘吉剌氏生女世以為后, 生男世尚公主, 每歲四時孟月, 聽讀所賜旨, 世世不絕.)"라는 유지를 남기긴 했으나[188] 일단 자기 아내부터가 나이만 출신이라 시작부터 의미가 퇴색한데다 이후에도 다른 부족 출신의 황후들이 많이 세워졌기 때문에 절대적인 규율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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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
바얀 후투그)이 백안의 조카로 나오는데 실제로 둘은 친족 사이가 아니었다. 바얀은 문종 황제의 정실 황후였던 진케(真哥)의 조카인
베이르 테무르(孛羅帖木兒)의 딸이었고,[189] 혈통으로만 따지면 몽골 제국의 초대 카툰(황후)이자
칭기스 칸의 아내로 유명한
보르테의 친정 집안의 직계였다. 반면에 백안은
메르키트(蔑兒乞)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혈통으로만 보면 황금씨족의 원수라고 할 수 있었다.[190] 만약 드라마 속 설정처럼 바얀이 백안의 '조카'로 등장하려면 바얀이 백안의 형제 자매의 자녀로 나와야 하는데 그건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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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이 원나라 황실의 계보를 공부하면서 아래와 같은 대사를 한다.
7대 황제이신 무종 황제께서는 성종 황제 폐하의 조카이시고 8대 인종 황제는 무종 황제의 아우가 되십니다. 9대 영종 황제께선 무종 황제의 아드님이시며 인종 황제의 사촌이신 진종 황제께서 10대 황제가 되십니다. 11대 황제께선 진종 황제의 아드님이신 문종 황제이십니다.
위의 대사를 하나 하나 분석해보면 아래와 같다.
7대 황제이신 무종 황제께서는 성종 황제 폐하의 조카이시고 - (O)
8대 인종 황제는 무종 황제의 아우가 되십니다. - (X)
= 인종 황제는 4대 황제다.
9대 영종 황제께선 무종 황제의 아드님이시며 - (X)
= 9대 황제는 명종이다.
인종 황제의 사촌이신 진종 황제께서 10대 황제가 되십니다. - (X)
= 진종(태정제)은 6대 황제다.
11대 황제께선 진종 황제의 아드님이신 문종 황제이십니다. - (X)
= 진종의 아들은 천순제이며 문종의 아버지는 무종이다.
다음 장면이 황태후가 바얀의 학식을 칭찬하는 장면인데 거진 다 틀린 걸 알고 보면 기가 찬 장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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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첩여를 귀비(貴妃)로 올리고 흥덕전을 내린다는 언급이 등장하는데 사실 기황후는 귀비가 아닌 제 2황후가 된 것이었다. 대승상이라는 명칭처럼 '황후'라는 칭호를 정실부인에게만 쓰는 설정이다보니 발생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몽골 황실의 풍속에서는 여성들의 품계가 세세하지 않고 정실이든 첩실이든 전부 '카툰(황후)'으로 불렀는데 그 점이 드라마에 전혀 반영되지 않아 그냥 중국 사극과 비슷해졌다. 그리고 기씨가 제 2황후 자리에 오른 건 대승상 백안이 실각하고 아유시리다라가 태어난 이후의 일이다. 드라마 속의 아유시리다라 탄생 장면처럼 너무 이른 전개인 셈이다.
또한 기씨가 귀비가 되면서 받은 처소를 흥덕전(興德殿)이라고 언급하는데 실제 기황후가 제 2황후에 오르면서 받은 궁은 '흥성궁(興聖宮)'이다.[191] 무종 황제가 태자궁인 융복궁(隆福宮)에 살던 어머니 다기(答己) 태후를 위해 지었고, 다기 태후가 자신의 재력과 권력 기반을 모았던 바로 그 궁이었다. 이는 기씨가 본격적으로 원나라의 권력을 쥐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부분이지만 표기 오류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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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 황후가
겉으로는 조용하고 선량한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잔인하고 음흉한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행해진 왜곡 중 가장 악질적이고 심각한 것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바얀 후투그는 사서에서도 황제가 제 2황후인 기씨에게만 빠져 있을 때도 질투 한 번 하지 않았고 검소해서 새 옷이 거의 없었고 황제가 중정원(中政院)[192]의 모든 관리를 맡기려고 했으나 "제가 쓰는 것은 제가 관리하겠지만 그 이외의 것은 사람을 뽑아 맡겨야지, 신첩이 어찌 맡겠습니까?" 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이 아닌 아이들에게도 친절했는지, 원나라 내란 때 태원(太原)으로 피신했었던 아유시리다라가 바얀 황후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통곡을 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 백안이 타환에게 정복전쟁을 충돌질 하며 자신의 소원은 "황제를 위해 일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키고 고려까지 흡수하는 것" 이라고 밝히는 장면이 있는데 일 칸국은 계속되는 내분으로 인해 타환이 즉위한 지 2-3년 후에 멸망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차가타이 칸국의 경우는 국가의 종교 지형이 빠르게 이슬람화 되었으나 타환과 동시대의 통치자였던 창시(敞失)가 하필이면 기독교도였던 탓에 결국 분란 끝에 살해당했고 창시의 동생인 에센테무르(也孫帖木兒)는 알콜중독자였던 탓에 '알리 술탄'에게 살해당했으나 알리는 1년도 못해보고 바라크 칸의 후예인 '무함마드 풀라드'에게 찬탈당했을 만큼 혼란기였다. 하지만 이 두 칸국의 몰락을 기뻐할 원나라 또한 끝없는 자연 재해와 흑사병, 내부에서의 봉기 등으로 상당히 혼란했다. 따라서 당시의 원나라는 드라마 속 백안의 바람처럼 대규모 군사 원정을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도저히 안됐다.
10. 41화 -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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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궁(홍단)이 기귀비의 명에 따라 나인들이 먹을 탕국에 상한 소젖을 넣어 식중독을 유발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우유는 상하면 신맛이 강해지는데다 특유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음식에 섞일 경우 맛과 향이 변질되어 상했나 싶어서 그대로 내버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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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귀비가 연철의 비밀자금을 빼내는 시간을 벌기 위해 황실 인원들로 하여금
마작을 하게 하는데, 마작은 청나라
광서제 시기 명주(明州)[193][194]에서 시작돼서 청나라 때 크게 유행한 꽤 근대에 만들어진 놀이였다.
마작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는 여럿 있는데[195] '엽자희(葉子戲)'의 경우는 송나라 시기부터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주사위(骰子)를 굴려서 하는 일종의 승경도 내지는 오늘날의 콘트랙트 브리지와 비슷한 형태였고, 명나라 시기에 유행했던 마조(馬弔)는 흔히 노름의 대명사로 불리는 투전이나[196] 오늘날의 트릭 테이킹에 가까웠다. 오늘날 마작패에 가까운 형태는 1875년에 처음 언급되었다.[197]
따라서 원나라 시대에 어떤 실내 놀이를 했다면 후대의 산물인 마작보다는 엽자희나 좀 늦은 시기에 나왔다고는 해도 어찌됐든 시기적으로 가까웠던 마조가 등장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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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환이 왕유를 견제하기 위해 연거푸
고려의 원나라 편입을 언급하는데 원 세조(쿠빌라이)가 약속했던 세조구제(世祖舊制), 즉 국가로서의 고려를 유지하고 그 풍습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4차례[198]나 고려를 원에 편입하자는 주장이 나왔음에도 무시되었고 원나라도 이미 복속된 지 50여년이나 지난[199] 고려를 구태여 흡수할 까닭도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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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은 첫 등장 이후 계속 '군사' 라고 하는 희한한 직책으로 불리는데 타나실리가 처형된 이후의 탈탈은 태희종인원사(太禧宗禋院使)[200], 어사중승(御史中丞)[201]을 겸했고 군사 징발을 할 수 있는 호부(虎符)를 가진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좌아수드(左阿速衞)[202]를 거느렸다. 이 모든 직책이 탈탈의 이전 직책인 지추밀원지사(知樞密院事)에 겸직되었다. 즉 수도방위군과 황실 근위군, 관리감찰권, 국방장관으로써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시기 탈탈은 못해도 지추밀원사 내지는 어사중승이라고 불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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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의 사람인
장순용이 타환에게 "백안 장군이
일 칸국의 여섯 개 성을 함락했다" 는 소식을 전해오는 장면이 있는데 아래 지도만 봐도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백안이 대승상에 임명된 시기인 '1339년 10월'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미 일 칸국은 멸망하고 그 땅은 속국이 독립하거나 혹은 새로운 분국이 생기는 등 이미 나뉘어진지 오래였다. 또한 몽골 제국의 또 다른 후신인 킵차크 칸국이나 백장 칸국, 그리고 원나라와 일 칸국 사이에 위치해 있던 차가타이 칸국이 아직 생존한 상태였다. 특히 차가타이 칸국은 아무리 나라가 혼란했다 하더라도 원나라의 복속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 칸국을 치러 간다는 원나라 군대를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었다. 만약 바얀이 황후가 된 1337년으로 설정해도 변하는 건 없다.
게다가 드라마 속 백안의 정복 대상은 차카타이 칸국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백안이 드라마처럼 원정을 갔다면 가장 먼저 차가타이 칸국과 대판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장순용이 "백안이 일 칸국의 여섯 개의 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전하려면 일단 일 칸국이 안 망한 상태에서 백안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에 의해 차가타이 칸국이 정복됐다는 얘긴데 이러면 완전한 역사왜곡이 되어 버린다.[203] 왜냐하면 차가타이 칸국은 '원나라보다도 더 오래 국가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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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기근과 재해가 발생하고 타환이나 백안 등의 위정자들은 손을 놓고 있고, 기귀비가 빼돌린 연철의 비밀 자금으로 백성들을 구휼했다는 식으로 묘사가 되어 있는데 실제로 기황후가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나선 적은 있었다. 1358년(지정 18년)에 대도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기황후는 부처에 지시해 죽을 끓인 뒤 백성들을 먹였고 금은과 식량, 폐백을 내놓은 뒤 환관인
박부카를 시켜 대도의 11개 대문에 쌓아놓은 뒤 구휼을 하였다.[204] 그리고 박부카가 노부교(盧溝橋) 인근의 땅을 산 뒤 구덩이를 파 백성들로 하여금 기근으로 죽은 시신을 묻게 했고 시신을 묻으러 온 사람들에게 교초를 나누어 주었으며 굶주린 망자들을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까지 지내주었다.[205]
하지만 원나라 내의 기근과 자연재해는 지정 18년 이전부터 엄청 발생하고 있었고[206][207] 황실에서도 그에 맞춰 끊임없이 구휼을 했고 그 부분은 역사서인 원사를 보면 구휼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드라마 속의 묘사처럼 황제와 재상은 놀고 있고 기귀비만 바쁘게 움직인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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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황자가 고려로 와서 왕유를 원나라로 소환하는 조서를 발표하는데 문서 끝에 지원 3년(至元三年) 이라고 적혀 있다. 지원 3년은 오늘날의 연도로 환산하면
1337년에 해당한다.
타환 즉위 이후의 주요한 사건을 년도에 맞춰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원통 원년(1333년) - 연철 사망, 타환 즉위, 타나실리 황후 책봉
원통 2년 (1334년) - 재해로 인한 구휼 및 불사(佛事) 비용 감면
원통 3년 / 지원 원년 (1335년) - 당기세와 탑랄해의 반역 및 타나실리 폐위
지원 2년 (1336년) - 모친 마알라이다이 황후를 정유휘성황후(貞裕徽聖皇后)로 추증
지원 3년 (1337년) - 바얀 후투그 황후 책봉, 대도에 대규모의 지진 발생
지원 4년 (1338년) - 중서평장정사 아길라(阿吉剌)에게 지정조격(至正條格) 감수 지시
지원 5년 (1339년) - 기근 구휼, 도적 퇴치 등
지원 6년 (1340년) - 대승상 백안과 태황태후 부다시리 축출
잘 보면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백안이 출정 준비를 한 뒤 5년 후, 황자들은 성장하고 백안은 처참히 패배해 돌아왔다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지원 3년에서 5년 전이면 1332년, 즉 지순(至順) 3년으로 타환이 즉위하기 전 즉위했던 이복형제인 영종 황제의 통치 시기다. 참고로 지순 3년이면 드라마에서 타환이 기양과 함께 대청도에서 말 달리고 있던(...) 그 시기다. 그리고 기황후 드라마에서 타환은 그 이전에도 황제였고 연철 및 타나실리, 그리고 무수리와 궁녀, 재인이 된 기양과의 에피소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즉위 년도와 활동 시기는 더더욱 더 당겨지게 된다. 드라마 기황후 속 타임라인은 그야말로 개판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11. 46화 - 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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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사주를 받은
염병수가 독화살로 마하 황자를 암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타나실리와 타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양자도 없었다.[208] 따라서 작중에 등장하는 마하 황자는 가상의 인물이다.[209] 모티브는
부다시리 황태후의 두 아들로 보인다. 황태후가 황태자를 자신의 세력을 키울 명분으로 양육하는 것은 부다시리의 둘째 아들인 엘 테구시(燕帖古思),[210]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에서는 황태후의 첫째 아들인 '아락테나다라(阿剌忒納答剌)'가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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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황자의 암살 배후에 바얀 황후가 있다는 게 드러나자 곧바로 폐서인 된 후 유폐되었다가 사약을 마시고 죽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실제 인물인 바얀 후투그는 폐후된 적도 없고 처형된 적도 없다. 바얀 후투그는 축출된 백안 대신에 승상이 된 탈탈이 죽은 이후 벌어진
베이르테무르(孛羅帖木兒)와
코케테무르(擴廓帖木兒)[212] 사이의 내전 시기까지 생존해 있었다. 아마도 타나실리가 맞이한 최후의 모습을 바얀에게 덧씌운 것으로 보이는데 멀쩡히 잘 살다가 떠난 사람에게 온갖 모욕을 뒤집어 씌웠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할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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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가 매박 상단의 수령에 대한 진술이 제각각인 것을 두고
"그림자 무사"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림자 무사라는 말 자체가 일본어 '카케무샤'의 번역어이며 특정 인물을 대체하는 역할 자체는
헤이안 시대부터 존재했고
전국시대에 '카케보시(陰法師, 그림자 법사)'나 '카에타마(替え玉, 구슬 바꿔치기)'라는 명칭이 존재하긴 했으나 일본에서나 통용되던 단어를 원나라나 고려에서 사용됐을 리 만무하다. 만약 왕유가 쓴다면 '대신(代身)'[213]이라는 말이 적절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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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가 궁을 떠난 후 타환이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라고 선포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공교롭게도 실제로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된 시기는
1353년(지정 13년) 7월의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드라마 속 시간은 1337년(지원 3년)에서 순식간에 16년이 흘러 1353년이 된 것이고 아유시리다라는 그에 맞춰 14살 아이의 모습으로 등장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여전히 꼬꼬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214] 덤으로
1340년(지원 6년)에 사망했어야 할 백안은 여전히 쌩쌩히 돌아다니고 있다. 드라마가 막판에 급전개를 위해 후대의 사건 요소들을 마구 가지고 오면서 생긴 오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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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7화부터 타환이 쓰러진 뒤, 원나라가 기귀비와 백안의 세력으로 나뉘어서 대립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오류다. 우선 백안과 기황후는 딱히 대립한 적이 없었다. 백안은 황제가 기씨를 정실 황후(예케 카툰)로 책봉하려 했을 때 반대하긴 했으나 대승상에 임명된 이후 스스로 권력에 취해 근 1년 만에 자멸했기 때문에[215] 기씨와 대립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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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귀비의 심복이 된
박불화가 어사대(御史臺)의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활동하는데 사실 박불화는 시어사가 된 일이 없다. 또한 어사대는 '감찰' 목적의 부처일 뿐 군사기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시어사가 군사들을 대동하는 건 맞지 않는 장면이다. 다만 해당 장면에 등장한 인물이 박불화가 아닌 '탈탈'이라면 의외로 생기지 않는 오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백안이 대승상으로 활동할 당시에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써 관리들을 감찰한 권위를 가졌던 인물이 탈탈이었고 탈탈은 아수드 근위대 통솔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어사중승'의 모습 연출이 충분히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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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귀비가 타환을 흥덕전으로 데려가 몰래 타환의 증세를 치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눈물나게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당연히 실제는 전혀 달랐다. 타환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간신인 카마(哈麻)가 전수한 운기술(運氣術), 즉
방중술의 쾌락에 빠져 있었다.[216][217] 이로 인해 황제가 공무를 보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고 바얀 후투그 황후가 건재한 탓에 여전히 제 2황후 신세였던 기황후는 이걸 기회로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아예 황제에 올리기 위해 타환에게서 선위를 받을 계획을 꾸몄다.
기황후는 카마의 참언에 넘어가 반란군을 진압하며 원나라가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던 탈탈을 숙청해 버렸고 승상이었던 토바타이핀(拓跋太平)[218]에게 같이 황태자를 황제로 추대하자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기황후는 카마와 손을 잡고 황제에게 양위를 요구했지만 순제는 의외로 완전히 정줄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어서 되려 카마를 속여 유배 보내는 길에 죽여버렸고 이 때부터 기황후를 싫어하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너무 심하게 미화가 된 것이고 실제로는 추잡한 권력 다툼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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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안이 결국 귀비의 손을 잡은 탈탈 손에 제거되고 타환이 기귀비에게 독단적으로 백안을 죽인 것을 힐난하는 장면이 등장했는데 실제 백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340년(지원 6년) 2월에 백안은 타환에게 겨울 사냥을 요청하였으나 타환은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고, 백안이 끈질기게 그럼 황태자 엘 테구시라도 보내달라고 황제에게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 꼴을 보다 못한 탈탈과 타환의 측근이었던 쉬지르반(世傑班)과 아로(阿魯)가 백안을 몰아낼 계획을 타환에게 올렸고 밤이 되자 이들은 엘 테구시를 몰래 데려온 뒤 대도의 모든 성문을 닫아 걸고 타환이 보낸 조서를 읽음으로써 백안을 대승상에서 하남행성 좌승상으로 좌천시켰다. 결국 백안은 그 뜻을 받들어 남은주(南恩州)의 양춘현(陽春縣)으로 향하던 중 용흥로(龍興路)의 역참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즉 백안의 실각과 그로 인한 사망은 타환 자신이 탈탈 및 측근들과 모의한 것이지 기씨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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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환이 기씨에게
석고대죄를 요구했다가 결국은 출궁 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타환이 카마를 통해 선위를 요구한 기씨에게 분노해 2개월 간 안 본 적은 있으나 폐출하거나 한 적은 없다. 사실 스토리가 이렇게 꼬인 건 기황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베이르테무르(孛羅帖木兒)와
코케테무르(擴廓帖木兒) 사이의 내전[219]이 묘사되지 않았는데도 그 때 벌어졌던 일을 끼워넣는 바람에 생긴 오류다.
탈탈의 사망으로 다 이겨놨던 홍건적 토벌이 무위로 돌아갔고 베이르테무르는 홍건적을 토벌하던 장수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어사대부였던 로디샤(老的沙)와 지추밀원지사 투겐테무르(禿堅帖木兒)가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비위를 거스르고 베이르테무르에게로 달아나면서 황태자는 그들을 소환해 죽이려 했으나 황제인 타환이 몰래 서신을 보내 외삼촌인 로디샤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베이르테무르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220] 이런 와중에 베이르테무르는 원나라 조정의 혼란을 이용해 자신이 높아지고자 작은아버지이자 좌승(左丞)이었던 익자르부카(只兒不花)를 살해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조문까지 한 일을 벌였다.
베이르테무르에게 벼르고 있던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즉각 황제에게 베이르테무르가 죄인들을 비호하고 패륜을 저질렀다고 고발했고 난처해진 타환은 결국 베이르테무르의 작위와 군 지휘권을 박탈하고 사천행성의 승상인 '차간부카(察罕不花)' 휘하로 보낸다는 조서를 발표했으나 이에 분노한 베이르테무르는 "나라를 좀먹는 중서우승상 초스긴(搠思監)과 박부카를 토벌한다" 면서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대도를 공격했고 아유시리다라는 북쪽으로 달아났다. 대도를 점령한 베이르테무르는 자신을 반대한 초스긴과 황태자의 측근이었던 박부카를 즉시 죽였다.[221]
한편 북쪽으로 달아난 아유시리다라 황태자가 영북, 감숙, 섬서, 요양에 도움을 요청하고 코케테무르에게까지 지원을 요청하자 분노해 황태자의 모후인 기황후를 궁 밖에 있던 '제색인장총관부(諸色人匠總管府)'[222]에 유폐시켰고, 기황후는 베이르테무르에게 미녀들을 바쳐 100일 만에 궁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베이르테무르가 타환을 윽박질러 태보 겸 중서우승상에 올라 권세를 부릴 시기에 바얀 후투그 황후가 숨을 거두었다.
즉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위와 같은 원나라 후반의 위기를 싹 지우고 기황후가 궁을 나갔다가 복귀한 사실만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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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가 매박상단 수령 노릇을 하며 모든 재산을 교초로 바꾸고 기귀비가 타환을 설득해 탈탈로 하여금 교초를 바꾸게 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매박상단을 보기좋게 물 먹이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일단 교초 개혁 자체는 실제로 있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다르다.
1350년(지정 10년)에 이부상서(吏部尚書)였던 설철독(偰哲篤)[223]이 지정교초(至正交鈔)를 다시 고쳐서 발행하자는 건의를 냈고 탈탈은 그 말에 동의해 추밀원, 어사대, 한림, 집현전의 관리들을 모아 회의를 했는데 다들 그저 탈탈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224] 그 때, 좨주(祭酒)였던 여사성(呂思誠)[225]이 홀로 반대를 했다. 이 논의의 내용은 아래를 참조.
설철독: 교초법을 고쳐 종이돈(楮幣) 1관문(貫文)[226]을 동전 1,000문에 상당하게 가치를 높여 모전(母錢, 큰 단위의 화폐), 동전은 자전(子錢, 모전보다 아래 단위의 화폐)으로 하자.
여사성: 중통과 지원은 각각 모자 관계가 있다. 상등품은 어머니(母), 하등품은 아들(子)로 비유할 수 있다. 몽골인이 한인의 아들을 후손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인류이지만 결국 한인의 아들이 된다. 어찌하여 옛 지폐가 아버지가 되고 동전이 아들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사성: 동전과 교초의 사용법이 일관되게 보이나, 이는 허상을 실체로 바꾸는 것이다. 지금 계속 사용됐던 동전과 지정교초, 중통교초, 지원교초, 이번의 교초까지 다섯 가지로 나뉘는데 백성들에게 이를 알게 해서 실체는 간직하게 하고 허상은 버리게 하려는 것은 이는 국가에 이롭지 않을까 우려된다.
설철독: 지원교초는 위폐가 많기 때문에 고치려는 것이다.
여사성: 지원교초는 가짜가 아니며 사람에 의해 가짜가 될 뿐이다. 새로운 교초가 나온다 해도 마찬가지로 가짜가 된다. 더구나 지원교초는 마치 옛 친척과 같아서 집안의 어린 노비조차도 그것을 알고 있으나, 새로운 교초는 마치 새로운 친척과 같아서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조종조의 성헌(成憲)[227]은 가벼이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설철독: 조종조의 성헌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한다.
여사성: 너희들이 법을 바꾼다면서 세조 황제를 모함하려 하니 이는 세조 황제의 높고 낮음을 다투는 것이다. 세조 황제 이후 모든 황제는 효(孝)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그 성헌을 바꾸면 그게 효라고 할 수 있는가?
설철독: 동전과 교초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어떤가?
여사성: 동전과 교초가 함께 사용되면 그 경중이 불분명해진다. 무엇이 어머니이고 무엇이 자식인지 너는 고금의 이치도 모른 채 길에서 들은 말로 헛소리를 하는데 어찌 행할 수 있겠는가?
설철독: 우리의 계책을 실행할 수 없다면 공에겐 무슨 계책이라도 있는가?
여사성: 나에게는 3글자의 방책이 있다. "행불득(行不得)! 행불득!"[228]
이 대화를 듣던 탈탈은 여사성의 디스질에 심히 불쾌한 중에도 여사성 말 또한 옳다고 생각해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동생이자 어사대부였던 '예순테무르(也先帖木兒)'가 탈탈에게 "여사성의 말이 맞지만 도당에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 것은 잘못이다" 라고 말했고 이 대화를 듣고 있던 감찰어사 하나가 아부하기 위해 즉각 여사성이 무례했다고 탄핵을 해버렸고 결국 탈탈은 여사성을 저 멀리 남중국에 있는 호광행성의 좌승상으로 임명하는 좌천을 행했다. 그리고 설철독이 주장했던 새로운 교초를 발행하는 화폐 개혁은 여사성이 우려했던 대로 백성들이 새로운 교초를 잘 쓰려하지 않았고 그나마 풀린 새로운 교초들도 금방 위폐가 만들어진데다 백성들이 위폐과 진폐를 구별하지 못한 탓에 피해가 발생해 실패하였다.
실제로 있었던 일화를 응용해 넣은 것은 획기적이었으나 탈탈의 실책을 마치 잘한 일처럼 왜곡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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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의 화폐 개혁 발표 이후, 타환이 마치 바랐던 것처럼 기귀비의 황후 책봉을 발표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기씨가 아유시리다라에게 양위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하고 마침내 카마와 모의까지 꾸몄던 탓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상태라 중서성의 대신들이 기씨를 제1황후에 책봉하라고 주청해도 듣지 않았으나 기씨가 자정원(資正院)[229]의 이름을 숭정원(崇政院)으로 바꾸고 정실 황후의 업무와 황후 소유의 토지 및 세금을 관리하는 중정원(中政院)까지 주관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기씨를 정실 황후로 임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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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세가 황제와 기귀비를 죽이기 위해 기습했다가 결국은 패한 뒤 숨을 거두고 그 이후 기귀비가 마침내 정실 황후가 되자 황태후가 분에 못 이겨 날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일단 당기세는 1335년(지원 원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230] 죽임을 당했고, 황태후는 실각해 동안주(東安州)[231]에 구금되었다가 숨을 거둔 게 1340년(지정 6년)의 일이었으며 기씨가 정실 황후로 책봉된 건 1365년(지정 25년) 12월의 일이다. 즉 황태후는 죽은 후 '25년'이상 활동 중이며 당기세는 죽은 후 '30년'이나 활동한 것이다.
원나라 판 좀비물
12.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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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환을 충실하게 섬기던 환관이자 매박 상단의 숨겨진 우두머리였던
골타(骨朵)가 탈탈의 화폐개혁으로 상단 자체가 폭망해 버리자 아예 황제를 자신이 조종할 요량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황태후와 작당해 태공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황족
발라첩목아(孛羅帖木兒)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당연히 맞지 않은 설정이다.
우선 타환 시절에 유명한 베이르테무르(발라첩목아)는 세 명으로 기황후 이전의 정실 황후였던 바얀 후투그의 아버지인 육덕왕(毓德王) 베이르테무르가 있고, 고려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이자, 홍건적을 막던 중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결국 살해 당한 위왕(魏王) 베이르테무르, 마지막으로 모함을 당하자 아예 군을 끌고 대도를 함락하여 황태자를 몰아내고 기황후를 유폐한 장수 베이르테무르가 있다. 하지만 왕이었던 둘은 원나라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반역자인 하나는 왕이 아니었다. 즉 발라첩목아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에 걸맞은 인물이 없는 셈이다.
차라리 드라마 속 당기세가 살아있던 시기부터 언급히는 걸 토대로 '병왕(並王)'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던 콩코테무르(晃火帖木兒, 황화첩목아)[232]를 옹립하려 했다고 했으면 왕의 직책을 가진 자가 타환에게 반역을 했던 경우에 해당하니 그나마 납득이 가는 설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기세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콩코테무르를 끌어들여 새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결국 자신은 죽었고 북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군을 이끌던 연철의 또 다른 동생 다리크(答里)가 패배함으로써 결국 반란군의 수괴 처지가 된 콩코테무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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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첩목아가 '태공왕' 이라는 이상한 칭호를 달고 나오는데 이 부분도 오류다. 원나라는 탕목읍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의 작명은 대체로 봉토에 맞춰졌다. 가령 연철의 작위였던 태평왕(太平王) 또한 자신의 봉토가 된 태평로(太平路)[233]에서 따온 것이다. 봉토가 없던 황족들은 그냥 '예순게 대왕(移相哥大王)'이나 '토쿠 대왕(脫忽大王)' 식으로 자기 이름에 왕호가 붙은 형태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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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타가 황제가 마시는 탕약에 흰 가루를 타는데 독만 태감이 확인한 결과 '짐독(鴆毒)'이라는 게 확인된다. 하지만 이는 어처구니가 없는 설정이다. 일단 짐독은 동양 역사 속에서 자주 언급된 독극물인데 일반적으로 유독한
짐새의 깃털을 술에 담궈 술 자체를 독극물로 만들어 상대를 죽이는 식으로 암살에 사용되어 왔다.
독특하게도 주례(周禮)에는 이 짐독과 비슷한 오독(五毒)을 만드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초벌용 항아리에 오독(五毒), 즉 웅황(雄黄)[234]과 여석(礜石)[235], 석담(石膽)[236]과 단사(丹砂)[237], 그리고 자석(慈石)을 넣고 3일을 밤낮으로 구우면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이 연기에 닭의 깃털을 올려 모은 뒤 상처에 올리면 살이 상한 부위와 부러진 뼈가 다 낫게 된다.
설명은 그럴싸하지만 불로장생을 이뤄준다는 도교의 단약(丹藥)처럼 설명만 그럴싸할 뿐이지 전부 비소, 수은 등 몸에 치명적인 것들만 들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맹독성 + 중금속 물질이 잔뜩 함유된 닭 깃털을 상처에 문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예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의 몸에서 생겨나는 짐독이든 광물을 구워서 증기로 모으는 오독이든 간에 가루 형태로 정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루약 항목에 나와 있듯이 가루약은 '약의 효용을 빠르게 한다'는 장점이 존재하는데 이는 독약인 경우에도 유효하다. 따라서 치료약이 없다는 짐독을 주입하면서 (불가능하지만) 가루로 된 짐독을 약에 타서 먹인다? 치명적인 짐독을 흡수하기 좋게 가루약으로 먹인다는 건 바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상대방이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을 노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따라서 치명적인 짐독을 가루 형태로 넣어서 서서히 죽이는 방식의 암살은 현실에서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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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파가 전부 죽고 몇년 후, 박불화가 기황후에게
강릉대군을 감시하기 위해 기철을 이용하라고 하는 장면이나, 공민왕에 의해 고려에 있는 오라버니들이 다 죽은 사실에 분노하는 장면이 있는데 총 드라마 회수 51회 중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奇轍)이나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 등이 등장하거나 언급된 회는 단 하나도 없다. 이렇듯 전혀 등장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마지막화에서 그들이 언급되며 분노하는 장면이 뜬금포로 튀어 나온 것이다. 아마도 드라마 기황후의
역사왜곡 및
기황후에 대한 지나친 미화 문제로 인해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일환으로 역사적 사실의 일부분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드라마 설정 상 기황후의 친어머니는 당기세가 쏜 화살에 죽었고 별도로 오라버니들이 있다는 설정 자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오류가 된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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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군(王塔思帖木兒, 왕타스테무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등장하는데 일단 덕흥군이 심양왕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데 이는 오류다. 일단 심양왕이라는 칭호는 초창기의 칭호고 이후 격상하면서 '심왕'으로 불렸다. 그리고 왕고가 죽은 후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덕흥군이 아니라 왕고의 손자였던 왕토크토아부카(王脫脫不花)였다.
왕토크토아부카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시기에 원나라가 내린 금인(金印)을 분실한 뒤 새 인장을 파서 사용 중이라는 참소를 받았을 때[239], 폐출될 공민왕을 대신해 고려의 왕이 될 인물로 낙점되었으나 "숙부의 자리를 빼앗으면 고려는 어찌되겠냐"면서 거부했고[240] 이후에 고려와도 잘 지냈으나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북으로 쫓겨나자 사실상 심왕의 작위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고 공민왕이 시해 당하자 결국 북원의 힘을 빌려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국경지대로 진격, 고려의 왕위를 요구했다. 하지만 토크토아부카가 국경 지역에서 1년 만에 사망하고 북원도 더는 고려 일에 개입할 입장이 되지 않아서[241] 이 문제는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토크토아부카의 사망을 기점으로 심왕은 폐지되었다.
-
탈탈이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던 중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기황후가 충격을 받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왜곡이 심각한 장면이다.
탈탈은 중서우승상에 임명되자, 수해가 잦은 황하의 치수를 위해 대규모 공사를 하면서 한족들을 대거 투입했는데 이 때문에 백련교의 교주였던 유복통(劉福通)과 한산동(韓山童)이 사람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킨 게 바로 홍건적의 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탈탈은 홍건적이 점령한 서주(徐州)로 직접 군을 이끌고 진격해 철저하게 분쇄했고 이후 고려를 포함한 온 사방에서 끌어온 병력을 동원해 남쪽에 자리를 잡은 장사성(張士誠)의 군대를 쳐부수며 내려갔고 마침내 고우(高郵)[242]에서 장사성을 포위했으나, 간신 카마가 탈탈에 대한 앙갚음을 하려고 기황후를 충동질 했고 결국 거기에 넘어간 기황후가 황제에게 탈탈을 참소함으로써 원정은 즉시 중단되었고 탈탈은 회안로(淮安路)[243]에 안치되었다가 이후 운남행성(雲南行省)의 대리(大理) 지역으로 유배를 갔다.[244] 탈탈이 아주 먼 지역으로 가버렸으나 행여나 돌아올까봐[245] 안심할 수 없었던 카마는 음모를 꾸며 거짓 조서로 탈탈에게 죽음을 강요했고 결국 탈탈은 짐독을 마시고 사망했다. 즉 기황후 자신이 탈탈을 죽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상에서는 원나라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기황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 기황후는 원나라를 그나마 지탱하던 기둥 중 하나인 탈탈을 죽여 놓고도 명나라 군이 대도를 함락할 때까지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제로 만드는 것 조차도 실패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정치력을 보여주었다.[246] 그리고 탈탈의 죽음으로 인해 남부 원정군이 소멸하면서 다시 세력을 회복한 홍건적의 진격으로 원나라가 멸망하는 결과를 낳았다.[247]
- 기황후가 북방의 초원을 보고 싶다면서 넌지시 북으로 갈 것을 권유하자 대략 상황을 짐작한 타환이 황후의 무릎을 베고 사랑한다고 말한 후 사망하는 눈물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혜종은 1368년(지정 28년)에 명나라 군을 피해 대도를 탈출해 황제들이 여름마다 지냈던 상도(上都)로 피했고, 1년 뒤 사정이 나빠지자 결국 내몽골 일대에 위치한 응창부(應昌府)로 옮겼고 그 다음해인 1370년(지정 30년)[248]에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 즉 드라마에서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바로 죽은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 타환은 2년 정도 더 살았다.
[1]
원 세조가 죽고
원 성종이 즉위했을 때 고려
충렬왕의 입지를 보자면 서열은 7위, 연회 내에서의 서열은 4위, 그 밖에도
다루가치들이 충렬왕에게 술 한잔을 받을 때는 일단 공손히 절을 한 뒤 두 손으로 받아야 했다. 그리고 엄연히 황실 일원이었기 때문에
쿠릴타이의 참여도 가능했다.
[2]
'옥분'이라는 가명을 가지고 있으며 기자오의 첩실로 등장한다.
[3]
고려에서 행해진 기씨들의 만행에 영안왕대부인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같은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아예 영안왕대부인의 생신 연회를 핑계 삼아 원나라가
공민왕을 모욕하는 에피소드까지 존재한다.
[5]
이 기록은 고려사에만 있고 원나라의 기록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6]
물론 쿠살라는 이후 갑자기 사망했고, 원나라 내에서는 문종과 연철이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7]
사족으로 연철이 죽었을 때 나이가 '48세'였다. 물론 평균 수명이 짧았던 전근대 기준으로는 연철 정도만 돼도 그다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천수를 누린 것도 아니었다.
[8]
쿠빌라이의 막내 서자인 쿠르투(闊出) 태자의 손녀다.
[9]
1315년(충숙왕 2년) 2월 생이다.
[10]
첫 번째 아내는 마알라이다이(邁來迪)로써 타환을 낳던 중 사망했다.
[11]
황제의 스승이라는 의미이며 보통은 황실 내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지체 높은 고승이나 도사를 이르는 말이다.
[12]
타환이 연철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시역의 원인을 고려인들에게 전가했다.
[13]
군사업을 담당하는 총부의 관리를 의미한다.
조선의 병조좌랑(兵曹佐郞)과 동급.
[14]
오늘날의
북한의
선천군이다.
[15]
타환 통치 시기에
광서성 등에서 요구(徭寇)들이 변방을 침략하고 관원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요구는 바로
노역을 하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탈주한 뒤 도적이 된 이들을 말한다. 즉 외적이 아니라 내적(內敵)인 셈. 차라리 연철 일가의 폭정의 부작용을 표현하려고 했으면 외적인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16]
러시아어로는 보카, 중국어로는 고고관(罟罟冠)이라고 불린다.
[17]
인종의 황후였던 라드나시리 카툰이다.
[18]
오른쪽 사진에 해당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19]
한국에서도
가체가 금지되자
족두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20]
복탁을 쓴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복탁을 꾸미는 가장 비중이 큰 광물은 바로
진주다. 몽골 초원에서는 바다가 없어 진주 자체를 구할 수 없는데다가 좋은 진주는
발해만 일대에서 생산되었고, 크기가 일정한 진주를 구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게다가 진주는 구성 성분이 탄산 칼슘이라 유분, 땀, 습기 등에 매우 취약해 자주 착용하거나 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당시에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가 있었던 게 바로 진주였다.
[21]
물이 찬
종기에서 물을 빼는 것.
[22]
가래를 뱉어내게 하는 것.
[23]
몸 속에 뭉친 진액을 풀어주는 것
[24]
옆구리의 통증으로서 주로
간이나
담낭,
신장 등에 문제가 생길 때 발생한다.
[25]
피부나 근육에 생기는 화농성 종창
[26]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비장이 붓고 뱃속에 덩어리가 생기는 증상이다.
[27]
서양닥나무 껍질에 많이 들어있는 식물 독소 성분이다. 피부에 닿으면 수포가 생기고 섭취 시 궤양을 일으킨다.
[28]
주로 식물의 수액에서 발견되는 독성 디테르펜 에스테르이다. 섭취 시 궤양과 복통, 설사 등을 일으킨다.
[29]
특히 항이뇨작용이 있는
감초와 혼합해 복용할 경우, 메제레인 성분으로 인한 이뇨와 설사가 몸 밖으로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는 수가 있어서 자칫 중독으로 인해 다른 내장, 특히 신장의 기능이 망가질 수도 있다. 작중에서도 낙태를 유도하기 위해 궁녀 박씨에게 팥꽃나무 꽃이 들어간 음식을 먹이면서 감초탕을 함께 올리는 것으로 나온다.
[30]
도장을 찍은 흔적을 의미한다.
[31]
도장의 손잡이 역할을 하는 장식물
[32]
타나실리가 인장을 찍는 장면을 보면 아주 살짝 찍어서 인영이 아주 흐릿하지만 나중에 타환이 빼앗은 문서를 보면 선명한 것을 알 수 있다.
[33]
이 시기 황태자의 인장은 분실된 상태였다.
[34]
원사 본기에 사망 나이가 30살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35]
장안성의 서문이다.
[36]
당나라 황실은 혈통 상
한나라와는 관련이 없었으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나라 황손들의 특징을 자신들에게 비유하기도 하였다.
[37]
당나라에 충성하던 가서한(哥舒翰)이 동관(潼關)에서 안록산의 군대에 패배한 걸 의미한다.
[38]
당나라의
현종이
숙종에게 양위한 걸 의미한다.
[39]
유목민족들이 복수를 다짐하거나 애도할 때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을 의미한다.
[40]
당나라의 선황제들이 묻힌 무덤을 의미한다.
[41]
답시로 왕유가 읊은 시 역시 두보가 쓴 '춘망(春望)'으로 애왕손과 동일하게 두보 자신이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성에 억류된 와중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오는 걸 보고 감회에 젖어 쓴 시다. '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강은 그대로고(國破山河在)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네(城春草木深)'라는 첫 구절이 유명하다. 이 시 또한 고려의 왕위를 잃고 볼모가 된 왕유의 신세를 잘 나타내기 때문에 적절한 선정이었고 잘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42]
물론 두보의 시 중에서 북정을 따로 뽑아서 풀이나 해석을 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되면 서적의 이름은 두시북정주해(杜詩北征註解)나 북정시주(北征詩注) 등이 되어야 맞다.
[43]
정확히는 비서성감(秘書省監)이라 불렸다.
[44]
물론 이 표현도 맞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술사(術士) 내지는 요술사(妖術師)로 우리가 익히 아는 표현으로 불렀다.
[45]
한 남자 아이가 실종되자 그 아비가 울고불며 찾았는데 아들을 납치한 범인이 협박문을 보내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아비가 집 밖에 못 나오게 막았다. 아비는 그 말을 지켰으나 결국 아들은 살해됐고 범인은 체포되어 연경으로 끌려오던 중 아들의 아비가 내려친 철퇴에 머리를 세 번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한 일이 발생했고 이 아비의 가문은 이미 몰락했으나 범인을 살해한 죄에 대한 형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니 시시비비를 가려달란 얘기가 담겨 있었다.
[46]
현대 시대에 개발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물이 닿는다고 사라지는 먹물은 효용성이 없다. 오히려 물이 묻어도 번지지 않고 남아 있는 먹물이 훨씬 유용하다.
[47]
종이에 초를 칠하면 글자가 물이나 접촉으로 인한 손상에서 좀 더 오래 견디는 효과가 있다.
[48]
오징어 먹물은 약간 붉은 빛이 돌며 일반 먹물과는 달리 글자를 쓰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글자의 색이 점점 옅어지면서 나중에는 글씨가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희미해지거나 없어진다.
[4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장 24-25절)
[50]
함무라비 법전의 해당 부분은
해당 문서 참조.
[51]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노자가 했다는 "이덕보원(以德報怨, 원한은 은덕으로 갚으라)"이라는 말에 대해 어찌 생각하냐고 묻자 공자는 "그럼 은덕은 뭘로 갚으려고? 원한은 공정하게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는 것이다(以直報怨, 以德報德)" 라고 답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52]
원래는 말 그대로 탕을 갖춰 목욕을 하고 자신의 몸을 가꿀 수 있는 작은 개인 땅 정도를 의미했으나 나중에는 제후들이나 공주들에게 내려 조세를 거둘 수 있게 하는 봉토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53]
대표적으로 영녕왕(永寧王)이었던 뭉케(卯澤)에게 시집간 쿤지타이(完者台) 공주가 있다.
[54]
사산화삼납(Red Lead)이라고도 불리는 물질로 불꽃놀이용 산화제 및 촉매로 사용되고 과거엔 옹기에 바르는 유약으로도 사용되었으나, 가열하면
납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요샌 유약으로는 잘 사용되진 않는다.
[55]
이 때문에 원나라 내에서는 문종과 연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56]
오늘날의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신저우구 양뤄 거리다.
[57]
이 때 생산된 포도주가 얼마나 많았는지 산거신화(山居新话)에는 지원(至元, 원 세조 시기)과 대덕(大德, 원 성종 시기)에 진상된 포도주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 때가 원나라가 쫓겨나고 명나라로 교체된 시기였다.
[58]
황제가 여름 동안에 머물렀던 상도(上都)를 의미한다.
[59]
수많은 홀과 방에 모두 금박을 입히고 새와 짐승, 꽃과 초목을 새겨넣었다는 것으로 보아 매우 화려한 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60]
금나라 몰락 후 몽골 제국에서 일한 장덕휘(張德輝)가 쓴『영북기행(嶺北紀行)』에 나오는 내용이다.
[61]
흘사혜(忽思慧)가 지은 원나라 시대의 요리책인 『음선정요(飮膳正要)』에는 문종 황제의 내선(內膳, 왕이 먹은 반찬 재료) 목록으로 수산물과 갑각류도 기록되어 있다. 사족으로 음선정요에는 '호나복(胡蘿蔔)', 즉
당근이 처음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62]
드라마
신돈에서는 영안왕대부인의 생일 자리에서
부원배들이 공민왕을 비웃으며 마유주를 마시고 대충 토막내서 삶은 말고기를 뜯는 장면이 나온다. 이쪽이 훨씬 사실에 근접하다.
[63]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모싯대의 뿌리를 말한다. 주로 해독제와 거담제로 사용되었다.
[64]
세조(쿠빌라이)는 의학 쪽에도 관심이 컸기 때문에 원나라가 건립되자 인구조사를 통해 의호(醫戶), 즉 의료계에 종사할 인원들을 확보한 뒤 특혜를 주기도 했고 기존의 의료담당 부서였던 상의감(尙醫監)의 기능을 확대하고 태의원으로 명칭까지 바꿨으며 의술만을 배우는 전문 학교인 의학(醫學)까지 만들었다.
[65]
물론 제중신편에서 만독을 해독하려면 감초와 검은콩을 각각 5돈(약 20g)씩 물에 달여먹으라고 되어 있다. 암살에 대한 조심성이 많던 기황후 속 연철은 하루에 감두탕을 5번 씩 마셨으니 독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좀 더 강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방법을 연철만 알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66]
감두탕은 그 이름처럼 감초(甘)와 검은콩(豆)만 들어갔지만 작중에서는
쥐똥나무 열매를 넣는다고 설명한다. 만약 고증이랍시고 넣은 거면 틀린 것이 되지만 연철의 나이가 많아서 강장제의 의미로 넣었다고 하면 사실 문제가 없기도 하다. 쥐똥나무 열매는
당뇨나
고혈압, 지혈이나 식은땀을 멈추게 하는(지한) 효능과 함께 강장제로 알려져 있다.
[67]
아마도
위키백과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철이 다르칸의 작위를 받았다고 언급한 건 한국어 위키백과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사에는 문종을 즉위하게 한 후 연철이 받은 작위는 태평왕이었다.
[68]
연철이 독살 당하지 않았다는 걸 기양을 통해 확인하면서 연철 일가를 돕는 쪽으로 작전을 바꿨다.
[69]
히포크라테스는 12건의 상상임신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70]
후대의 조선에서도
효의왕후나
화빈 윤씨 등이 상상임신을 한 일이 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産事無實)" 정도의 표현만 나오지, 상상임신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적은 전혀 없다.
[71]
참고로 타나실리가 뜸을 뜨고 있는 부위는 팔료혈(八髎穴)이라는 부위인데 엉치뼈 위쪽의 8개 혈자리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여성질환 치료에 있어 중요한 부위라고 한다.
[72]
흔히 뜸 뜨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피부에 올려놓고 태워서 열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물체를 말한다.
[73]
물론 이쪽도 고통스럽다기보단 따끈따끈 하다가 슬슬 따끔하다고 생각할 때 쯤 되면 치료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74]
엄지손가락만 한 뜸봉을 같은 부위에 3번 정도 뜸을 떠서 화상을 일으킨 뒤 그 위에 수지고약 같은 것을 붙여 고름을 배출하는 방식이다. 약 한달에서 한달 반 정도 고름이 빠진다고 하며 이 방법을 통해 몸의 방위 기능을 강하게 한다고 한다.
[75]
외상을 입은 피부나 각종 장기에 고름이 생기는 걸 의미하는데,
포도상구균,
연쇄상구균,
폐렴쌍구균,
임균,
결핵균,
장티푸스균,
녹농균 등 화농균이 일으키는 염증도 포함된다.
[76]
실어증은 영어로 '어페이지어(Aphasia)'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부정접두사인 '아-(A-)' 와 말을 뜻하는 '파시스(phásis)'가 합쳐진 말이다.
[77]
후음은 범위가 좀 넓어서 아예 말이 안 나오는 경우에 쓰기도 한다. 사실 고대 시기 중국이나 한국의 의학에서는 증상을 이르는 말의 범위가 좀 넓은 편이다.
[78]
해당 장면에서 실어증 장면에 설명 자막이 붙어 있다.
[79]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리(세금징수인)와 똑같은 일을 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그로 인한 폐해까지 동일하다는 게 함정.
[80]
고려의
정동행성을 관리하는 직책이 바로 평장정사였다.
[81]
그보다 더 예전에 만들어진
예기(禮記)의 혼의(婚義) 편을 보면 "천자는 황후를 세우고 6명의 궁, 3명의 부인, 9명의 빈, 27명의 세부, 81명의 어녀(后立六宮, 三夫人, 九嬪, 二十七世婦, 八十一御女)를 두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82]
따로 품계가 없던 시기엔 황후를 여럿 두기도 했는데 보통 제1황후는 '예케카툰(大皇后)', 그 이하의 황후들은'솔카툰(弱皇后)'이라 부르거나 '허여르더가르 카툰(제2황후)', '거라브더가르 카툰(제3황후)' 식으로 순번을 붙여 불렀다.
[83]
이런 방식으로 후궁이 된 게 바로 기황후였다. 기황후는 원래
공녀 출신에 황제에게 다과를 올리던 궁녀였다.
[84]
황제가 거처하는 궁을 부르는 명칭이다.
[85]
대내를 한 가운데에 뒀던 기존 중국 왕조들의 궁과는 달리 거대한 연못을 끼고 그 흐름에 따르듯이 주변가에 궁을 만든 것은 물 가까이에 거주지를 만들던 유목민들의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86]
후에 순종으로 추숭된다.
[87]
학문을 익히고 서화나 서책을 모으는 규장각(奎章閣)이 흥성궁 내에 있었다.
[88]
일본의 사학자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흥성궁과 융복궁 모두를 장악한 다기의 시기를 그녀의 씨족명을 따서 '쿵그라트(옹기라트) 시대'라고 평하기도 했다.
[89]
드라마 기황후에 등장하는 황태후는 코코진이나 다기와는 달리 문종 황제의 정실이자 황후 출신이었다. 때문에 굳이 두 추존 황후들처럼 융복궁에 머물 까닭이 없다.
[90]
고려는 천문 관련 기구가 천문 관측과 역산을 담당하는 태사국과 천문을 읽고 점사를 보는 태복감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민왕 시기에 두 기구를 합쳐 서운관(書雲觀)을 만들었다.
[91]
선정원은 티베트 불교 뿐만 아니라 티베트 지역의 군정(軍政) 사무 역시 통괄하고 있었다. 선정원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티베트 지역을 통제하고 티베트 불교를 관할하는 '폰첸(本欽)'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선정원이 폰첸을 선정하면 대도의 황제가 임명장과 인장을 내려 정식으로 임명했다.
[92]
관상학이 크게 유행한 시기는 오히려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 시기다. 당장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역시 관상학에 얽힌 일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
[93]
태을식(太乙式)、둔갑식(遁甲式)、육임식(六壬式)을 말한다.
[94]
주역을 읽고 점을 치는 것을 말한다.
[95]
갑골 문자와 관련이 있기도 한 뼈를 보고 점치는 것을 의미한다.
[96]
인간의 운명을
천명,
숙명, 음명(阴命)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인간의 성품이 천명과 합쳐지면 바르고 도덕적이 되며, 성품이 숙명과 합쳐지면 지식, 재물, 능력에 집중하게 되고 성품이 음명과 합쳐지면 분노나 증오, 괴로움 등으로 변한다고 한다.
[97]
중국의 점술 중
태양과
달 그리고 오성(금목수화토), 28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는 자기(紫氣), 달이 가깝고 먼 것을 살피는 월패(月孛), 중국의 하늘에선 관측되지 않는다는 별인 나후(羅喉)와 계도(計都)를 연구하는 걸 칠정사여(七政四余)라고 불렀는데 칠정 중 5개의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걸 오성술이라고 한다.
[98]
채점하는 종이를 보면 부씨(夫氏)라고 적혀 있다.
[99]
그 와중에 자막에 쓸데없는 칙(勅)자가 같이 있다(...).
[100]
복령은 주로 소나무 뿌리에서 자라는
버섯을 의미한다.
[101]
말린
참마를 의미한다.
[102]
흰색의 제비콩을 말한다.
[103]
잘 익은 연꽃 열매
[104]
가시연밥의 열매
[105]
MBC 대하드라마
대장금에서
각기병에 걸리고도 음식 투정이 심해 식이요법을 못하는
자순대비를 위해 장금이가 마늘을 사용한 달콤한 환약(丸藥)을 만들어 복용하게 한 일화와 흡사하다.
[106]
상어나
홍어같은
연골어류는
요산 배출량이 적어 살에 누적되기 때문에 조금만 숙성되면 암모니아 냄새가 심각해진다.
[107]
타환도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4점을 주었다.
[108]
사천행성주 설도관의 딸로 나온다.
[109]
황태후가 모란이 설명하는 장면에서 채점하는 장면으로 1번, 섬서행성주의 딸 '적미랑'이 자기 음식(송이와 쇠고기를 곁들인 송이우육)을 설명할 때 타환이 채점하는 장면으로 1번 나왔다.
[110]
타나실리의 수족이 된 상궁
연화가 손을 쓴 탓이었다.
[111]
다섯 명의 왕이
술에 취해 말을 타고 귀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경매에서 '3억 700만 홍콩 달러(한화 약 454억 7,898만 원)'에 낙찰되었다.
[112]
맥박수나 강약으로 병세를 판단하는 것
[113]
환자의 낯빛이나 눈,코,입,혀 등을 눈으로 살펴보고 병세를 판단하는 것
[114]
환자 자신이나 가족의 병력이나 병의 경과 등을 묻는 것
[115]
손으로 부위들을 만져 병세를 판단
[116]
드라마 방영 당시에도 흔히
입대할 때 받는 신체검사의 줄임말인 '신검'으로 들려서 웃겼다는 의견이 있었다.
[117]
백합목 여로과 여로속 여러해살이풀 식물로써 7월에서 8월 사이에 흰색의 꽃을 피우는데, 잎은 물론이고 뿌리에도 '프로토베라트린(Protoveratrin)' 성분이 잔뜩 함유된 독초이다.
산마늘과 비슷하게 생겨서 잘못 먹는 경우도 있는데 섭취 시 주로 오심과 구토를 일으키며 그 외에 저린감, 두통, 발한, 침분비, 근쇠약 등이 발생하며 자칫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한방에서도 억지로 토하게 할 때(催吐)나
살충제로만 사용되지 섭취용으로 사용되는 일은 드물다.
[118]
드라마에서는 박새를 보여줄 때 분명 뿌리를 보여줬음에도 계속 박새풀이라고 언급한다.
[119]
우리가 흔히 창포로 알고 있는 아름다운 꽃은 '꽃창포'라고 해서 관상용이며 그 외에는 별 효용성이 없다.
[120]
작자 미상의 시인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에 "어젯밤 좋은 비로 산채가 살졌으니 광주리 옆에 끼고 산중을 들어가니 주먹 같은 고사리오 향기로운 곰취로다 (중략) 낱낱이 캐어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취쌈 입에 넣고 국 한 번 마시나니 입 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 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121]
궁에서 숙식을 하며 지키는 병사를 의미한다.
[122]
몽골 제국에서 숙위군은 진수군(鎮戍軍)과 함께 정규군으로 취급되었고 원 세조 이후에 숙위군은 금군(禁軍)이 되어 황제를 지켰다. 따라서 연철이 숙위군으로 10년을 보냈다는 것은 성종 시절에 군인으로써 복무했다는 걸 의미한다.
[123]
실제 직무는 없는 사실상의 명예직이다. 정봉대부의 경우는 2품(二品)에 해당했다.
[124]
황실의 의례를 담당하는 선휘원의 보좌관이다.
[125]
그리고 노소공은 제나라를 떠나 진(晉)나라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가 실패한 뒤 타국에서 객사하고 말았고 그의 동생이 즉위해
노정공(魯定公)이 되었다.
[126]
이 또한 일부러 궁녀들을 윽박질러 전달하지 않은 것이다.
[127]
여계, 여논어, 내훈, 여범제록(女範捷錄)을 이른바 여사서(女四書)라 부르는데 내훈과 여범제록은 명나라 시기에 집필되었다.
[128]
재밌게도 먼 훗날
조선에서는
영조 13년(
1737년)에
홍문관 제학이었던 '이덕수(李德壽)'가 영조의 명으로 여사서를 풀어서 쓴 『여사서언해(女四書諺解)』를 간행하기도 했다.
[129]
기재인이 해석한 부분은 여기까지다.
[130]
비녀지경 부분은 타나실리가 가로막아서 읊지 못했다.
[131]
드라마 기황후 7화에서 타나실리가 동일한 구절을 읊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래도 버벅거리던 과거의 타나실리와 술술 읊는 기재인을 비교하려고 의도한 거 같은데 어찌됐든 인용이 잘못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32]
자막을 보면 언고시(言古詩)라고 하는 쓸데없는 글씨가 붙어 있다. 편집 중 발생한 오류로 보인다.
[133]
인간은 선과 악이 혼재한 존재로, 주변 환경과 교육 방식 등에 따라 선하게 혹은 악하게 자랄 수 있다고 주장한
성선악혼설로 유명하다.
[134]
여불위는
노애와
진시황제의 생모인
황태후 조씨를 이어줬으나 노애가 역심을 품은 바람에 같이 엮여서 몰락하였다.
[135]
회남왕 유안(劉安)의 경우는 자신의 아들의 일로 고발을 당했고, 결국 그걸 기화로
한무제에 대한 반역을 획책했다가 손자의 고발로 몰락한 케이스인데 사실 유안 자신도 처신을 잘못한 게 있었다.
[136]
물론 나중에 언급되지만 둘이 짜고 친 것이었다.
[137]
내의원(內醫院)은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에 궁중의 의약을 맡아보던 관아를 의미한다.
[138]
고려 역시 황실의 의사를 태의라고 불렀다.
[139]
연경(燕京), 연도(燕都), 경(京) 등의 표현으로 불린다. 물론 대도라는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다.
[140]
원 간섭기를 배경으로 한 MBC 사극
신돈에서도 대도라는 표현보단 연경으로 불린다.
[141]
물론
한나라 시기에는 여성 범죄자들을 가두던 액정조옥(掖廷詔獄)이라는 감옥이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냉궁과는 의미가 달랐다.
[142]
상당히 조잡하게 만들어졌는데 어새에 흔히 사용되는
전서체가 사용되지도 않았다.
[143]
어새에 어떤 문구가 새겨졌는지 알 수 있는 까닭은 몽골 제국의 3대 카칸이었던
귀위크 칸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내는 칙서에 찍힌 인장의 모양이 남았기 때문이다.
[144]
인(印)이라는 글자는 일반 관리들이 쓰는 업무용 도장이나 즉위를 인정받은 제후국 왕들이 상국으로부터 받은 금인(金印) 등에 사용되었다.
[145]
기황후 속 매박의 첩자들은 행성주들의 신임을 얻으며 몰래 정보를 빼내고 수작을 부렸기 때문에 그들이 행성주들이 다 모인 대도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146]
석유의 정제물인
나프타를 의미한다.
[147]
강예지(康與之)가 쓴 『작몽록(昨夢錄)』에는 "서북쪽 지역에 모두 땅을 파서 큰 연못을 만들고, 종횡으로 남은 땅을 파서 맹화유를 저장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북송 시기 부터 맹화유를 방어용으로 썼다는 얘기다. 그리고 금나라 군대는 이 맹화유에 여러 번 피해를 입어야 했다.
[148]
부마국이었던 고려의 왕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나름 상석에 좌석이 있었다.
[149]
쿠릴타이는 주로 목초지 일대에서 이뤄졌다가 카라코룸, 그리고 원 세조 이후에 상도에서 이뤄졌고 문종 황제 시기부터는 대도의 대명전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150]
물론 이 쿠릴타이 또한 형제들이 원정을 간 틈에 기습적으로 카라코룸에서 개최한 것이라 명분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151]
겨울이나 여름 사냥을 위한 쿠릴타이가 열리기도 하였다.
[152]
정작 동일한 화에서 적공의 딸로 나왔던 배우는 주황색 복장을 입고 당황한 듯이 쳐다보는 역할로 나온다.
[153]
황제가 기양만 고르는 바람에 나머지가 전부 탈락했고 행성주들이 이 사태에 불쾌해하자 운남, 영북, 섬서, 사천행성의 딸들을 재인으로 뽑았다.
[154]
이 쪽은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단 포위된 상테에서 버티기에 가깝다.
[155]
오늘날의
허베이성 장베이현(張北縣)에 위치해 있었다.
만리장성 북쪽과
내몽골 남동쪽 사이에 있었다고 보면 된다.
[156]
물론 축수재는 엄밀히 따지면 왕의 '생일잔치'에 가까웠다. 즉, 왕의 탄신일에 왕이 오래오래 살 것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157]
동궁전의 사무를 맡은 극조원(極組源), 불교 사원을 세우거나 수리를 맡은 연경사(延慶司), 음악을 담당하는 수화서(壽和署), 호적 등을 담당하는 장의서(掌儀署), 직조와
염색, 잡다한 장인들을 담당하는 직염잡조인장총관부(織染雜造人匠都總管府) 등이 전부 휘정원에 속해 있었다.
[158]
뮤지컬 배우
박해미가 연기했는데 '불 바차 아부카' 라고 하는 기묘한 주문을 읊는다. 참고로 불 바차 아부카(बुल् वाचा आवूक)는
산스크리트로 '아버지의 말씀이 가라앉았다가 떠오른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59]
개를 이용한
무고술을 의미한다.
[160]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고문은 원나라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그것과 관련된 일화가 바로 위의 일화이다.
[161]
참고로 이 때 타환의 나이가 20살이었다.
[162]
타나실리가 사사된 게 1335년 7월이었다.
[163]
사실 드라마 기황후는 역사를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구성이 시간보다는 사건 위주로 흘러가는데다 편의에 따라 바꿔대다보니 정확한 시간을 파악할 길이 없다.
[164]
몽골어 발음은 쿠살라.
[165]
의외로 원나라 사서에 자주 언급되는 지명인데
칭기스 칸이 장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원나라 황제들이 사망하면 기련곡 일대에서 장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이나 오늘날에는 그 위치가 전해져 오고 있지 않다.
[166]
몽골식 시호는 '쿠툭투황제(忽都篤皇帝).
[167]
현고(顯考)는 예전에는 고조를 의미했으나 원나라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168]
망엄부 역시 아버지를 잃었다는 의미다. 엄부(嚴父)는 아버지를 높이는 말이다.
[169]
불교식으로 지방을 작성할 경우 본관(后人)과 성씨(公)를 작성한다. 박지제길특은 씨족인
보르지긴, 기약온씨는 칭기스 칸의 성씨로 알려진 키야트 씨를 의미한다.
[170]
실제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능침사찰(陵寢寺刹)인
용주사(龍珠寺)에 가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유교식 시호에 끝에 영가(靈駕)를 붙인 형태를 하고 있다.
[171]
만약 혈서에 찍힌 인영이 다르거나, 타환의 옥새가 아닌 다른 형태의 옥새로 인영을 찍는 장면이 나왔다면 당위성이 생겼을 것이다.
[172]
칭기스 칸의 법전에는 초원을 소중히 하고 풀이 돋았을 때 구덩이를 파서 훼손하거나 불을 지르면 전 가족을 사형에 처하도록 엄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원나라가 성립한 이후 황제들이 상도와 대도만을 순행할 뿐, 진짜 초원으로는 가기 어려웠던 만큼 궁 안에 초원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173]
드라마 기황후 속 대도 지도는 오히려 고려나 조선의 읍성(邑城)의 조감도와 비슷하다.
[174]
고려에서는 태자궁 남문을 여정문이라고 불렀다.
[175]
황제의 거처인 대내, 그리고 중서성으로 이어지는 문이 바로 여정문이었다.
[176]
탈탈이 지목하며 백안이 직접 뚫을 거라고 한 북문이 안정문 방향이었다.
[177]
초원에서는 피를 흘리는 죽음 자체가 불명예였다.
[178]
몽골인으로써 진국공(秦國公)이었던 안쿨(按竺邇)의 손자였고,
인종 시기에 다기 태후의 측근으로써 권세를 부리던 테무데르(帖木迭兒)를 탄핵해 쫓아낸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인종이 죽고 테무테르가 보복하려고 하자 동생인 '쇼예르(胥益兒)'에게 자신을 무고해 죽여달라고 간청했지만 당연히 만류되었고 다음 황제였던
영종 역시 조세연의 죽음을 바라지 않아
금릉(金陵)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중서우승 및 동지추밀원사로 임명되었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문종 황제를 받드는데 일조한 덕에 입조할 때 수레를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타환이 즉위한 뒤 1년 후에
성도(成都)로 갔으나 노환으로 인해 6개월 만에 사망했다.
[179]
왕(
王) 글자는 어째서인지 잘려 있다.
[180]
제후국들은 책봉을 받은 이후 상국으로부터 금으로 만들어진 도장을 받았다. 당시 금보다 귀했던 옥은 황제나 황후의 인장을 만들 때만 사용되었다.
[181]
이것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했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2]
도장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183]
고려가 계승을 강조한 국가는
고구려였다.
[184]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한자를 인용하면서 불필요한 첨자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185]
명종 황제가 군을 이끌고 왔을 때 연철이 맞이하였고 이에 명종이 내린 게 바로 태사직이었다.
[186]
고려에서도
입성책동을 막기 위해 '태사' 연철에게 사신을 보냈다.
[187]
원사에서는 킵차크, 신원사에서는 바야후트 가문으로 되어 있다.
[188]
원사 118권 열전 제 5권에 나오는 말이다.
[189]
딸이 황후가 된 후 육덕왕(毓德王)에 봉해졌다.
[190]
메르키트 부족 중
토크토아 베키가 이끄는 우드이트(兀都亦惕) 일파가 보르테를 납치했고, 귀환한 후 장남
주치를 낳은 탓에 주치는 지속적으로 메르키트 핏줄이 아니냐는 의심에 시달렸고 결국 차남
차가타이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간단히 말해 몽골의 화목을 해친 원흉인 셈. 물론 메르키트 출신인 백안이 원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칭기스 칸이 고원을 통일한 후 메르키트 역시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1]
흥덕전은
덕수궁에 있었던 전각의 이름이다. 현재는 터만 남은 상태이며 복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92]
원나라의 기구 중 하나로 황후의 업무 및 황후 소유의 토지와 그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관리했다.
[193]
오늘날의
저장성의
닝보시다.
[194]
물론 푸젠(복건), 광둥(광동)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195]
놀이 문화는 여러 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는 특징이 있다.
[196]
실제로 마조의 규칙을 간소화해서 나온 게 투전이다.
[197]
위에서 언급된 청나라 광서제가 즉위한 해다.
[198]
충선왕,
충숙왕 시기에 각각 1번,
충혜왕 시기에 2번 있었다. 충혜왕 시기에 있었던 입성책동의 경우 1번은 충혜왕 자신이 원에 주청해 막았으나 나머지 1번은 자신이 너무 막장으로 통치를 한 탓에 자기만 폐위되는 결말로 끝맺음 되었다.
[199]
고려가 원과 강화를 한 건 1259년의 일이고 1차 입성책동은 1309년에
무종 시기에 있었다.
[200]
제사를 주관하던 기관인 태희종인원(太禧宗禋院)을 관장하는 직책.
[201]
관리들을 감찰하는 직책으로써 원나라에서는 상당히 권한이 강했다.
[202]
근위대인 아수드군의 좌군을 맡았다는 의미다.
[203]
일 칸국이 살아 있을 때 전쟁을 하려면 타나실리가 사사되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이래저래 성립할 수 없다.
[204]
이전에 언급됐듯이 대도의 대문은 11개였다. 즉 대도의 모든 문 앞에 식량과 재물을 뿌린 것이다.
[205]
박부카가 기근으로 죽은 백성들을 묻어준 일화는 원사 204권 환자(宦者, 환관)편에 기록되어 있다.
[206]
타환의 통치 2년 만에 재해가 발생한 곳만도 30-40 곳이 넘는다. 그야말로 매 달마다 재해와 기근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207]
연철이 타환의 즉위를 망설였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일관들이 타환이 즉위하면 재해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인 양, 타환이 즉위한 이후 가뭄과 홍수, 냉해와 질병 등 자연 재해와 기근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다.
[208]
타나실리의 아버지 연철은 타환의 즉위를 막았던 인물이고 연철의 아들 당기세와 탑랄해는 반역을 일으켰으며 타나실리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애가 생길래야 생길 수 없었다.
[209]
같은 방송사에서 만든 드라마
신돈에서도
쿤란태자라고 하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마하와 마찬가지로 타나실리의 소생으로 등장한다.
[210]
황태후의 권력욕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부다시리는 타환의 즉위를 찬성하는 댓가로 자신의 아들 엘 테구시를 타환의 후계자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이로 인해 엘 테구시는 기황후에게서 태어난 아유시리다라 이전에 존재한 황태자였다. 엘 테구시는 황태후가 실각했을 때 고려로의 유배가 결정됐으나 타환은 결코 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고, 결국 이동 중에 평장정사였던 사르구차르(月闊察兒)에게 살해되었다.
[211]
문종과 부다시리는 처음에는 명종의 아들들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인 아락테나다라가 태자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요절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저주를 두려워 한 문종과 부다시리는 명종의 아들 중 하나에게 황제 자리를 넘길 것을 결정하였다.
[212]
이 인물은 코케테무르라는 이름보다는 본명인 왕보보(王保保)로 더 유명하다.
[213]
고려사를 보면
인종(仁宗) 13년인
1135년에 노비를 대신승(代身僧)으로 삼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신승은 타인을 대신해 불공을 드리는 승려를 말한다.
[214]
아유시리다라는 보통 1339년 1월 23일(음력 1338년 12월 24일)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5]
백안은 권력에 취해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벼슬을 갈아버리는 짓을 즐겨했다. 그러던 중 황실 일원인 담왕(郯王) 체체투(徹徹篤)를 모함해 죽여버리고 선양왕(宣讓王) 테무르부카(帖木兒不花)와 위순왕(威順王) 칸체부카(寬徹普化)의 작위를 자기 맘대로 박탈하는 일을 저질러 타환의 눈 밖에 나버렸다.
[216]
티베트 불교의 밀교 분파 중 '얀셰르파(演揲兒法)'가 존재했다. 얀셰르(演揲兒)라는 말은 한자어로 쓰면 대희락(大喜樂), 즉 '아주 큰 즐거움'이라는 뜻이었는데 이는 다른 게 아닌
성적인 교합을 통한 쾌락에서 도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카마는 얀셰르파에서 가르치는 방중술을 황제에게 가르쳐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217]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카마가 아니라 기황후가 한 짓으로 나오지만 어찌됐든 묘사가 되긴 했다.
[218]
한국어로 발음하면 '탁발태평'이다. 원래 이름은 하유일(賀惟一)이었으나 황제에게 인정을 받아 탁발씨라는 성씨와 새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기황후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아 결국 참소 당해
티베트로 유배 보내진 뒤 독살되었다. 타이핀의 아들 '에센후투그(也先忽都)' 또한 영특해 지추밀원사에 올랐으나 아버지와 함께 쫓겨났고 귀양가던 길에 행선정원사(行宣政院使)가 쉬었다 가라고 해서 잠깐 머물렀다가 그게 빌미가 되어 결국 타살(打殺)당했다.
[219]
탈탈이 기황후의 참소로 사망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220]
로디샤는 타환의 어머니 마알라이다이와 남매 사이였다.
[221]
고려
공민왕 시기에 기황후의 명으로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삼기 위해 원나라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진격했다가 탈탈 털렸던
최유가 결국 고려로 송환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베이르테무르가 황제에게 압력을 가해 기황후와 박부카에게 아부를 떨던 최유를 고려왕 손에 죽게 한 것이다.
[222]
금이나 은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223]
위구르인 출신이다.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탈탈이
요나라의 역사서인
요사(遼史)를 집필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224]
탈탈은 드라마 속 모습처럼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바른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열전을 보면 「그는 소인배들에게 미혹되고 사적인 원수를 갚는데 급급해서 군자들이 비웃었다(惟其惑於羣小,急復私讎,君子譏焉)」라는 평이 있다. 간신 카마가 기황후를 꼬드겨 탈탈을 모함했던 것도 그가 탈탈과 탈탈의 동생인 예순테무르(也先帖木兒)에게 온갖 아부는 다 했지만 정작 탈탈이 아끼던 중서성 참의(參議)이자
예스맨 기질을 가지고 있던 여중백(汝中柏)이 카마와 충돌하자 탈탈은 여중백의 말만 믿고는 카마를 선정원사(宣政院使) 중에서 3번째 서열로 강등해서 내쫓는 바람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225]
한족 출신으로 설철독과 마찬가지로 탈탈이
송사(宋史), 요사,
금사(金史)를 집필할 때 참여했다.
[226]
지폐를 세는 단위다.
[227]
성문 헌법, 즉 문자로 남겨 전하는 법을 의미한다.
[228]
해봐야 득될 게 없다는 소리다.
[229]
흥성궁을 관리하던 황태후 소유의 재정 기구인 휘정원의 소유권을 얻은 뒤 이름을 고쳤고 투멘데르(禿滿迭兒, 독만질아)가 초대 자정원사가 되었다가 투멘데르가 고려로 간 뒤에는 박불화가 자정원사가 되었다.
[230]
드라마에서는 탑랄해(탑자해)가 사망했던 그 시점이다.
[231]
오늘날의
허베이성
랑팡시 구안현(固安县)이다.
[232]
병왕의 봉토는 오늘날의
산시성 일대였고 금인수뉴(金印獸紐), 즉 짐승 모양의 인뉴가 올라간 금 도장을 사용했다. 이전에는 가왕(嘉王)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왕이 되면서 가왕직과 금인을 동생 쿠르쿠(火兒忽)에게 넘겼다. 병왕과는 달리 가왕의 봉토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233]
오늘날의
안후이성 당투현(當塗縣) 일대다.
[234]
천연 비소 화합물로서 밝은 주황색인 등황색(橙黃色)을 내기 위한 염료로도 사용되었다.
[235]
비소의 삼이산화물로 주로 방부제나 쥐약 제조에 사용되었다.
[236]
황산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콩팥을 닮았다고 담(
膽)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이다. 반투명한 푸른빛을 띄며 광택이 나기 때문에 얼굴에 바르는 안료로도 사용되었고 살충제로도 사용되었다.
[237]
도장을 찍는
인주와
부적을 그리는 물감의 재료로 알려져 있다.
수은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238]
해당 드라마의 원작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살해 당한 것까지는 동일하나 기자오의 정실 부인이 따로 존재한다. 때문에 소설에서는 기황후가 기철과 오라버니들의 죽음을 이부남매로써 분노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은 되지만 드라마에서는 아예 그런 설정 자체가 없어서 설명할 길이 없다.
[239]
사실 금인 분실은 핑계고 공민왕이 기철과 부원배들을 척살한 일로 죄를 주려고 한 것이다.
[240]
왕토크토아부카가 거절하면서 다음 대상으로 물망에 오른 게 바로 덕흥군이었다.
[241]
1년 전에 그나마 명나라를 상대로 버티고 있던
코케테무르가 사망한 상태였다. 북원은 4년 후에 수도
카라코룸을 명나라에게 빼앗겼고 카라코룸은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다.
[242]
오늘날의
장쑤성
양저우시의 가오유시(高邮市).
[243]
오늘날의 장쑤성 화이안시(淮安市).
[244]
위치를 보면 오늘날의
미얀마와의 접경지이다. 이전에 기씨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백안보다도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245]
탈탈의 아버지 마자르타이(馬札兒台)가 우승상(右丞相) 베르케부카(別兒怯不花)에게 모함을 받아 감숙성으로 귀양을 떠났을 때, 탈탈은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함께 갔고 아버지가 귀양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가 사망하자, 장례 후 대도로 올라와 업무에 복귀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족으로 탈탈의 아버지 마자르타이를 모함한 베르케부카는 공교롭게도 마자르타이가 유배된 그 해에 "우승상으로서 다스리는 게 부적절하다" 하다는 이유로 어사에게 탄핵을 당해 발해현(渤海縣)으로 유배를 갔다가 울화증으로 2년 만에 죽었다.
[246]
물론 이전에 기황후가 카마 등과 짜고 양위를 요구했던 일의 여파가 컸기 때문에 타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양위는 안 하려고 버틴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247]
탈탈이 사사된 후 장사성은 세력을 더욱 키웠고 나중에
주원장과 자웅을 겨루는 세력이 되고 말았다.
[248]
새로 건립된 명나라에서는 홍무 3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