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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4:20:31

기황후(드라마)/오류



파일:기황후 로고.png
[ 등장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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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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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등장인물 및 특별출연은 등장인물 문서 참고.
[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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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기황후 OST Part 1.jpg
||<width=33.3%>
파일:기황후 OST Part 2.jpg
||<width=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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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가시사랑
포맨
2013.10.28
Part 2
사랑 바람
왁스
201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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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A(준수)
201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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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한번만
소유
2014.01.07
Part 5
바람결
박완규
2014.01.27
Part 6
The Day
지아
2014.02.24
[ 관련 문서 ]
||<tablebgcolor=#EDD68F><table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00> 등장인물 ||<width=20%> 방영 전 논란 ||<width=20%> 방영 후 논란 ||<width=20%> 원작과의 차이점 ||<width=20%> 오류 ||


1. 개요2. 1화 - 5화3. 6화 - 10화4. 11화 - 15화5. 16화 - 20화6. 21화 - 25화7. 26화 - 30화8. 31화 - 35화9. 36화 - 40화10. 41화 - 45화11. 46화 - 50화12. 51화

1. 개요

MBC 드라마 기황후의 오류에 관한 문서이다.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의 고증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부분도 틀리거나 창작한 부분이 굉장히 많다.

2. 1화 - 5화

3. 6화 - 10화

파일:복탁_비교.png
드라마 기황후에서 연출된 복탁(좌)과 실제 복탁의 모습(우)[17]
파일:기황후_1화_복탁.png
드라마 기황후 1화에 등장한 엑스트라들이 착용한 복탁
복탁은 기본적으로 머리 위에 얹는 모자(帽子)이며 모자를 고정 해주는 원통형의 관체(冠体), 관체 아래에 달려 뒷머리를 가리는 천 조각인 피복(披幅), 관을 고정하는 끈인 유대(紐帶), 귀를 가려주는 주렴에 해당하는 엄이수주(掩耳垂珠), 관 자체를 꾸미는 관모장식(冠帽装饰), 관 꼭대기를 장식하는 관정장식(冠顶装饰)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8] 복탁은 몽골의 여성들이 꾸밀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19][20] 주로 대례식이나 큰 연회가 있을 때 주로 착용했다. 즉, 드라마 속 황태후가 착용한 복탁은 제대로 요소를 갖춘 것도 아닐뿐더러 저렇게 착용하면 고개를 숙일 때, 무게 때문에 모자가 앞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오히려 1화에 등장했던 기황후의 책봉식 장면이나 해당 화(8화)에 등장하는 만세를 외치는 현지인 엑스트라들이 착용한 복탁이 훨씬 고증에 맞다.

* 왕유가 이끄는 별동대와 돌궐군과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돌궐인들을 무슨 야만인처럼 묘사해 놨다. 6세기에서 8세기에 있었던 돌궐 제국의 군사들은 찰갑으로 중무장한 중기병대를 이끌고 다나며 중원을 위협할 만큼 문명화 되어 있었으며 군사력이 강력했고, 오이라트 연합과 위구르족 역시 칭기즈 칸에게 복속한 이후 쭉 몽골 제국에 협력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장에 있어서는 원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 11화 - 15화

長安城頭頭白烏
장안성 머리의 머리 흰 까마귀

夜飛延秋門上呼
밤에 날아와 연추문[35] 위에서 울고

又向人家啄大屋
또 인가를 향해 날아가 큰 집을 쪼아대니

屋底達官走避胡
집 안의 관리들은 오랑캐를 피해 달아나네

金鞭斷折九馬死
금채찍은 끊어지고 많은 말들은 죽었고

骨肉不待同馳驅
피붙이들은 함께 달아나지 못했구나

腰下寶玦青珊瑚
허리 아래에 옥패와 푸른 산호를 찬

可憐王孫泣路隅
가련한 왕손은 길가에서 울고 있네

問之不肯道姓名
누구인지 물어도 이름을 말하려 하지 않고

但道困苦乞為奴
그저 곤하고 괴로우니 노비로 삼아달라 하네

已經百日竄荊棘
백일이 넘게 가시밭길로 도망치고

身上無有完肌膚
몸은 피부가 성한 곳이 없구나

高帝子孫盡隆準
고제의 자손은 코가 우뚝하다던데

龍種自與常人殊
왕의 씨는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다르구나[36]

豺狼在邑龍在野
이리들은 도읍에, 용은 들판에 있으니

王孫善保千金軀
왕손은 천금같은 몸을 잘 보전하라

不敢長語臨交衢
사거리에서 감히 길게 말하지 못하니

且為王孫立斯須
왕손을 위해 잠시 서 있으리라

昨夜東風吹血腥
어젯밤 동풍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東來橐駝滿舊都
동족에서 온 낙타가 옛 도읍에 가득하다

朔方健兒好身手
북쪽 변방의 남자들은 신수가 좋다던데

昔何勇銳今何愚
지금은 어찌 그리 우둔한가[37]

竊聞天子已傳位
훔쳐 들으니 천자께서 양위[38]하여

聖德北服南單于
거룩한 덕으로 북쪽의 남선우를 복종시켰으나

花門剺面請雪恥
화문이 얼굴을 그어[39] 설욕해 주길 청한다고 하니

慎勿出口他人狙
다른 이가 엿듣지 않게 말을 조심하라

哀哉王孫慎勿疏
애처로운 왕손은 삼가 소홀이 하지 말라

五陵佳氣無時無
오릉[40]의 상서로운 기운은 없던 때가 없었노라 }}}

이 시는 안록산의 난 당시 장안성을 탈출한 현종 내지는 살아남은 황족 중 하나를 보고 슬퍼하며 쓴 시다. 즉, 반역을 한 이로 인해 황족이 고통 받는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드라마 속 타환의 상황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시인데 해당 드라마에서는 그저 기양이 밤에 읽어주는 장면, 그리고 타환이 잘난 척 하려다가 버벅거리다가 망신만 당하는 장면으로 소비되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의미가 담긴 시를 굳이 넣었던 건지 알 수 없을 지경.[41]


* 방내관이 기양과 상소문을 끼워넣는 작전을 세우면서 비밀스럽게 작성된 문서를 '북정(北征)'이라는 책에 끼워둘 거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북정은 위에서 언급된 두보의 시로써 꽤 내용이 많은 장문시에 속한다. 그러나 별도의 북정이라는 서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두시(杜詩)'라는 두보의 시를 모은 서책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북정이라는 별도의 책이 묘사된 건 오류로 볼 수 있다.[42]


* 기양이 방내관의 요청으로 혈서에 대한 내용이 담긴 상소문을 바꿔치기 해 연철에게 보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때 문서를 담당하는 관청 이름이 비서성(秘書省)으로 나오는데 비서성은 수나라와 당나라, 송나라 시기에만 사용된 명칭이고[43] 위진남북조 시기와 원나라 시기에는 비서감(秘書監)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 왕유와 타환이 축국 시합을 벌이는데 심판을 맡은 독만 태감이 들고 있는 깃발은 무려 오프사이드 깃발이다. 일단 오프사이드 자체가 1883년 잉글랜드 축구협회(FA)에서 선수들이 골문 주변에서 죽치고 있는 걸 막기 위해 만든 규율이다. 깃발 또한 그 이후에 만들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나라 시대에는 등장할 수 없는 물건이다.

5. 16화 - 20화

파일:연철_위패.png
元答克罕右丞相燕鐵之柩
원답극한우승상연철지구
일단 위패에 위(位)나 영가(靈駕)가 아닌 '구()'라는 특이한 글자가 써 있는데 구는 시신을 넣는 관짝, 즉 '널'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 문구는 사실 위패에 쓰는 게 아니라 '명정(銘旌)'이라고 해서 관에 덮는 큰 천에 쓰는 게 맞다. 해당 장면을 보면 연철의 관에 누런색의 천이 덮여 있는데 바로 그 천에 쓰는 게 맞다.
또한 답극한(答克罕)이라는 글자 쪽은 답이 없는 수준인데, 아마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이 영웅에게 붙이는 칭호인 '다르칸(Дархан)'을 넣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르칸의 한자 표기는 답극한이 아니라 '답랄한(答拉罕)'이다. 또한 연철은 문종 황제 시기에 있었던 숱한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여러가지 특혜를 받았지만 다르칸의 직위를 받은 일은 없다. 그냥 알려진대로 '태사'나 '태평왕'을 쓰면 되는데 다르칸이라는 맞지 않은 작호를 넣은 것이다.[67]

6. 21화 - 25화

파일:화풍_비교_기황후.png
(위) 드라마 기황후에 등장한 그림 / (아래) 임인발이 그린 오왕취귀도권


* 아예 장면을 위해 자료에 조작을 가한 것도 발견된다. 후궁 3차 경연에 나온 위 그림의 답은 소동파가 지은 시구에서 나온 건 분명 맞다. 그러나 하나의 시에서 발췌된 문구가 아니라 각각 다른 시에서 발췌된 문구다.
매우납세탁옥취(賣牛納稅拆屋炊) - 소를 팔고 집을 헐어 밥을 지으니
여천불급명년기(慮淺不及明年饑) - 내년에 굶는 건 생각도 안하네
- 오중전부탄(吳中田婦歎)의 11, 12번째 줄
백의선인재고당(白衣仙人在高堂) - 흰 옷의 선인( 관세음보살)은 높은 집에 있네
- 우중유천축령감관음원(雨中遊天竺靈感觀音院)의 4번째 줄
그런데 기양이 회상하는 장면을 보면 두 시의 문구가 한 페이지에 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파일:소동파_시장면.png
「오중전부탄」 사이에 「우중유천축령감관음원」 1줄이 섞여 있다
아마도 읽어주면서 잠깐 본 것을 기억하고 있는 기양의 지혜로움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자료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런 연출이라면 그냥 읽는 장면만 넣어도 충분한데 불필요한 자료 조작 부분까지 덤으로 넣는 바람에 생긴 사달이다.

7. 26화 - 30화

8. 31화 - 35화

甲辰,中書省臣言:「興和路起建佛事,一路所費,為鈔萬三千五百三十餘錠。請依上都、大都例,給饍僧錢,節其冗費。」從之。


(3월) 갑진일, 중서성의 대신이 "흥화로[155]에서 불사를 시작하는데 소요된 비용은 (교초) 1만 3,530여 정입니다. 상도 대도의 방식을 따라 승려들에게 식비를 지급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라고 했고 그에 따랐다.
乙酉,中書省臣言:「佛事布施,費用太廣,以世祖時較之,歲增金三十八錠、銀二百三錠四十兩、繒帛六萬一千六百餘匹、鈔二萬九千二百五十餘錠。請除累朝期年忌日之外,餘皆罷。」從之。


(12월) 을유일, 중서성의 대신이 "불사를 베푸는 비용이 너무 광범위하여, 세조 시기에 비해 매년 금 38정, 은 203정 40냥, 비단 6만 1천 600여 필, 교초 2만 9천 250여 정이 증가하였습니다. 모든 연례 기일과 기념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단할 것을 요청합니다." 라고 했고 그에 따랐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기재인이 황후가 100만냥에 가까운 돈을 쓴다, 찬불 행사에만 10만냥이 든다고 한 것은 너무 부풀려진 부분이다.


* 타나실리가 마하 황자를 위해 찬불(讚佛) 행사를 연다고 하는데, 찬불은 말 그대로 부처, 즉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마하 황자의 수명이 길어지는 것을 빈다면 '축수재(祝壽齋)'라고 부르는 게 맞고[156] 공교롭게도 부처님에게 복을 비는 것과 가장 유사한 행사는 고려에서 연례적으로 치렀던 연등회(燃燈會)가 가장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찬불 행사를 왜 뺐냐는 타나실리의 질책에 기재인이 "황실 재정이 바닥이 난 것은 황후가 휘정원을 맡아 방만하게 돈을 써댔기 때문이다" 라고 날카롭게 일침하는 부분이 있는데 틀린 말이다. 휘정원(徽政院)이 원나라 황실의 재정적인 부분에 관여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157] 그것을 총괄하는 것은 대대로 '황태후'의 소임이었다. 당장에 타환이 즉위한 해(1333년) 12월에 휘정원을 만들고 관속(官屬)을 366명이나 배치해 준 것도 황태후 부다시리에 대한 예우였다. 따라서 황후가 휘정원의 인장을 가지고 돈을 방만하게 쓰는 행동은 당시엔 불가능 했다.


* 기재인이 회임을 하자 첩여(婕妤)에 봉하는데 타환 시기에 재인이 부활한 건 사실이나 기씨가 첩여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은 허구다.


* 타나실리가 회임한 기첩여를 증오해 술사[158]로 하여금 견고술(犬蠱術)[159]을 이용해 기첩여를 공격하게 하고 나중에 황제에게 들켰음에도 궁녀들만 끌려가 취조를 받았을 뿐, 황후에 대한 뭔가 조치 없이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사실 원나라에서 저주를 행한다는 건 정말로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몽골인들의 최초의 문자 법전이었던『 칭기스칸 법전(成吉思汗法典)』의 50번째 항목에는 '사악한 방법(邪道)으로 남을 해친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 세조가 재상이었던 아흐마드 파나카티(阿合馬)를 죽인 후 그의 집을 압수수색 했는데, 첩이었던 인주(引柱)가 있던 곳에서 바싹 말린 사람의 가죽(人皮) 2구가 발견되었고 그 용도를 추궁하자 "사람을 저주하는데 쓰며 신좌(神座)에 올린 뒤 주문을 외우면 사람 가죽이 그 주문에 응하는 듯한 소리를 내고 그러면 저주가 더 빨리 스며든다" 고 답했다. 분노한 세조는 인주와 여타 2사람을 붙잡은 뒤 산채로 껍질을 벗기는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160] 즉 칭기스칸 법전과 사람 가죽 일화로 짐작했을 때, 원나라에서 저주술을 시행하는 것은 걸렸을 시 무조건 죽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고로 타나실리가 술사에게 저주를 의뢰하고 그 저주로 기첩여를 해치려 한 것 자체가 대죄(大罪)였으며 걸리는 즉시 산채로 껍질을 벗겨댔기 때문에 드라마 속 묘사처럼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 기첩여가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하는 장면이 묘사했는데 시적으로 너무나도 빠르다. 아유시리다라의 탄생일은 1340년 1월 23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드라마 기황후의 48화에 부근에 해당한다. 타임라인을 보면 아래와 같다.
<1340년>[161]
1월 - 아유시리다라 탄생
3월 - 백안 실각 이후 양춘현(陽春縣)으로 귀양가던 중 사망
6월 - 태황태후 부다시리를 추방하고 문종 황제의 신주 철거

즉, 실제 아유시리다라가 태어날 시기엔 타나실리, 당기세 등이 전부 죽고 백안과 황태후까지 실각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는 타나실리 황후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아유시리다라가 태어나는 장면이 등장하는 35화의 드라마 속 년도를 계산하면 대략 1334년 후반에서 1335년 초에 해당한다.[162] 즉, 아유시리다라는 실제보다 드라마 속에서 5-6년 일찍 태어난 것이다.[163]

9. 36화 - 40화

10. 41화 - 45화

11. 46화 - 50화

12. 51화


[1] 원 세조가 죽고 원 성종이 즉위했을 때 고려 충렬왕의 입지를 보자면 서열은 7위, 연회 내에서의 서열은 4위, 그 밖에도 다루가치들이 충렬왕에게 술 한잔을 받을 때는 일단 공손히 절을 한 뒤 두 손으로 받아야 했다. 그리고 엄연히 황실 일원이었기 때문에 쿠릴타이의 참여도 가능했다. [2] '옥분'이라는 가명을 가지고 있으며 기자오의 첩실로 등장한다. [3] 고려에서 행해진 기씨들의 만행에 영안왕대부인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같은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아예 영안왕대부인의 생신 연회를 핑계 삼아 원나라가 공민왕을 모욕하는 에피소드까지 존재한다. [5] 이 기록은 고려사에만 있고 원나라의 기록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6] 물론 쿠살라는 이후 갑자기 사망했고, 원나라 내에서는 문종과 연철이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7] 사족으로 연철이 죽었을 때 나이가 '48세'였다. 물론 평균 수명이 짧았던 전근대 기준으로는 연철 정도만 돼도 그다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천수를 누린 것도 아니었다. [8] 쿠빌라이의 막내 서자인 쿠르투(闊出) 태자의 손녀다. [9] 1315년(충숙왕 2년) 2월 생이다. [10] 첫 번째 아내는 마알라이다이(邁來迪)로써 타환을 낳던 중 사망했다. [11] 황제의 스승이라는 의미이며 보통은 황실 내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지체 높은 고승이나 도사를 이르는 말이다. [12] 타환이 연철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시역의 원인을 고려인들에게 전가했다. [13] 군사업을 담당하는 총부의 관리를 의미한다. 조선의 병조좌랑(兵曹佐郞)과 동급. [14] 오늘날의 북한 선천군이다. [15] 타환 통치 시기에 광서성 등에서 요구(徭寇)들이 변방을 침략하고 관원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요구는 바로 노역을 하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탈주한 뒤 도적이 된 이들을 말한다. 즉 외적이 아니라 내적(內敵)인 셈. 차라리 연철 일가의 폭정의 부작용을 표현하려고 했으면 외적인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16] 러시아어로는 보카, 중국어로는 고고관(罟罟冠)이라고 불린다. [17] 인종의 황후였던 라드나시리 카툰이다. [18] 오른쪽 사진에 해당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19] 한국에서도 가체가 금지되자 족두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20] 복탁을 쓴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복탁을 꾸미는 가장 비중이 큰 광물은 바로 진주다. 몽골 초원에서는 바다가 없어 진주 자체를 구할 수 없는데다가 좋은 진주는 발해만 일대에서 생산되었고, 크기가 일정한 진주를 구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게다가 진주는 구성 성분이 탄산 칼슘이라 유분, 땀, 습기 등에 매우 취약해 자주 착용하거나 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당시에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가 있었던 게 바로 진주였다. [21] 물이 찬 종기에서 물을 빼는 것. [22] 가래를 뱉어내게 하는 것. [23] 몸 속에 뭉친 진액을 풀어주는 것 [24] 옆구리의 통증으로서 주로 이나 담낭, 신장 등에 문제가 생길 때 발생한다. [25] 피부나 근육에 생기는 화농성 종창 [26]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비장이 붓고 뱃속에 덩어리가 생기는 증상이다. [27] 서양닥나무 껍질에 많이 들어있는 식물 독소 성분이다. 피부에 닿으면 수포가 생기고 섭취 시 궤양을 일으킨다. [28] 주로 식물의 수액에서 발견되는 독성 디테르펜 에스테르이다. 섭취 시 궤양과 복통, 설사 등을 일으킨다. [29] 특히 항이뇨작용이 있는 감초와 혼합해 복용할 경우, 메제레인 성분으로 인한 이뇨와 설사가 몸 밖으로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는 수가 있어서 자칫 중독으로 인해 다른 내장, 특히 신장의 기능이 망가질 수도 있다. 작중에서도 낙태를 유도하기 위해 궁녀 박씨에게 팥꽃나무 꽃이 들어간 음식을 먹이면서 감초탕을 함께 올리는 것으로 나온다. [30] 도장을 찍은 흔적을 의미한다. [31] 도장의 손잡이 역할을 하는 장식물 [32] 타나실리가 인장을 찍는 장면을 보면 아주 살짝 찍어서 인영이 아주 흐릿하지만 나중에 타환이 빼앗은 문서를 보면 선명한 것을 알 수 있다. [33] 이 시기 황태자의 인장은 분실된 상태였다. [34] 원사 본기에 사망 나이가 30살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35] 장안성의 서문이다. [36] 당나라 황실은 혈통 상 한나라와는 관련이 없었으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나라 황손들의 특징을 자신들에게 비유하기도 하였다. [37] 당나라에 충성하던 가서한(哥舒翰)이 동관(潼關)에서 안록산의 군대에 패배한 걸 의미한다. [38] 당나라의 현종 숙종에게 양위한 걸 의미한다. [39] 유목민족들이 복수를 다짐하거나 애도할 때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을 의미한다. [40] 당나라의 선황제들이 묻힌 무덤을 의미한다. [41] 답시로 왕유가 읊은 시 역시 두보가 쓴 '춘망(春望)'으로 애왕손과 동일하게 두보 자신이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성에 억류된 와중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오는 걸 보고 감회에 젖어 쓴 시다. '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강은 그대로고(國破山河在)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네(城春草木深)'라는 첫 구절이 유명하다. 이 시 또한 고려의 왕위를 잃고 볼모가 된 왕유의 신세를 잘 나타내기 때문에 적절한 선정이었고 잘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42] 물론 두보의 시 중에서 북정을 따로 뽑아서 풀이나 해석을 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되면 서적의 이름은 두시북정주해(杜詩北征註解)나 북정시주(北征詩注) 등이 되어야 맞다. [43] 정확히는 비서성감(秘書省監)이라 불렸다. [44] 물론 이 표현도 맞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술사(術士) 내지는 요술사(妖術師)로 우리가 익히 아는 표현으로 불렀다. [45] 한 남자 아이가 실종되자 그 아비가 울고불며 찾았는데 아들을 납치한 범인이 협박문을 보내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아비가 집 밖에 못 나오게 막았다. 아비는 그 말을 지켰으나 결국 아들은 살해됐고 범인은 체포되어 연경으로 끌려오던 중 아들의 아비가 내려친 철퇴에 머리를 세 번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한 일이 발생했고 이 아비의 가문은 이미 몰락했으나 범인을 살해한 죄에 대한 형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니 시시비비를 가려달란 얘기가 담겨 있었다. [46] 현대 시대에 개발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물이 닿는다고 사라지는 먹물은 효용성이 없다. 오히려 물이 묻어도 번지지 않고 남아 있는 먹물이 훨씬 유용하다. [47] 종이에 초를 칠하면 글자가 물이나 접촉으로 인한 손상에서 좀 더 오래 견디는 효과가 있다. [48] 오징어 먹물은 약간 붉은 빛이 돌며 일반 먹물과는 달리 글자를 쓰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글자의 색이 점점 옅어지면서 나중에는 글씨가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희미해지거나 없어진다. [4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장 24-25절) [50] 함무라비 법전의 해당 부분은 해당 문서 참조. [51]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노자가 했다는 "이덕보원(以德報怨, 원한은 은덕으로 갚으라)"이라는 말에 대해 어찌 생각하냐고 묻자 공자는 "그럼 은덕은 뭘로 갚으려고? 원한은 공정하게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는 것이다(以直報怨, 以德報德)" 라고 답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52] 원래는 말 그대로 탕을 갖춰 목욕을 하고 자신의 몸을 가꿀 수 있는 작은 개인 땅 정도를 의미했으나 나중에는 제후들이나 공주들에게 내려 조세를 거둘 수 있게 하는 봉토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53] 대표적으로 영녕왕(永寧王)이었던 뭉케(卯澤)에게 시집간 쿤지타이(完者台) 공주가 있다. [54] 사산화삼납(Red Lead)이라고도 불리는 물질로 불꽃놀이용 산화제 및 촉매로 사용되고 과거엔 옹기에 바르는 유약으로도 사용되었으나, 가열하면 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요샌 유약으로는 잘 사용되진 않는다. [55] 이 때문에 원나라 내에서는 문종과 연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56] 오늘날의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신저우구 양뤄 거리다. [57] 이 때 생산된 포도주가 얼마나 많았는지 산거신화(山居新话)에는 지원(至元, 원 세조 시기)과 대덕(大德, 원 성종 시기)에 진상된 포도주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 때가 원나라가 쫓겨나고 명나라로 교체된 시기였다. [58] 황제가 여름 동안에 머물렀던 상도(上都)를 의미한다. [59] 수많은 홀과 방에 모두 금박을 입히고 새와 짐승, 꽃과 초목을 새겨넣었다는 것으로 보아 매우 화려한 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60] 금나라 몰락 후 몽골 제국에서 일한 장덕휘(張德輝)가 쓴『영북기행(嶺北紀行)』에 나오는 내용이다. [61] 흘사혜(忽思慧)가 지은 원나라 시대의 요리책인 『음선정요(飮膳正要)』에는 문종 황제의 내선(內膳, 왕이 먹은 반찬 재료) 목록으로 수산물과 갑각류도 기록되어 있다. 사족으로 음선정요에는 '호나복(胡蘿蔔)', 즉 당근이 처음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62] 드라마 신돈에서는 영안왕대부인의 생일 자리에서 부원배들이 공민왕을 비웃으며 마유주를 마시고 대충 토막내서 삶은 말고기를 뜯는 장면이 나온다. 이쪽이 훨씬 사실에 근접하다. [63]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모싯대의 뿌리를 말한다. 주로 해독제와 거담제로 사용되었다. [64] 세조(쿠빌라이)는 의학 쪽에도 관심이 컸기 때문에 원나라가 건립되자 인구조사를 통해 의호(醫戶), 즉 의료계에 종사할 인원들을 확보한 뒤 특혜를 주기도 했고 기존의 의료담당 부서였던 상의감(尙醫監)의 기능을 확대하고 태의원으로 명칭까지 바꿨으며 의술만을 배우는 전문 학교인 의학(醫學)까지 만들었다. [65] 물론 제중신편에서 만독을 해독하려면 감초와 검은콩을 각각 5돈(약 20g)씩 물에 달여먹으라고 되어 있다. 암살에 대한 조심성이 많던 기황후 속 연철은 하루에 감두탕을 5번 씩 마셨으니 독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좀 더 강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방법을 연철만 알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66] 감두탕은 그 이름처럼 감초(甘)와 검은콩(豆)만 들어갔지만 작중에서는 쥐똥나무 열매를 넣는다고 설명한다. 만약 고증이랍시고 넣은 거면 틀린 것이 되지만 연철의 나이가 많아서 강장제의 의미로 넣었다고 하면 사실 문제가 없기도 하다. 쥐똥나무 열매는 당뇨 고혈압, 지혈이나 식은땀을 멈추게 하는(지한) 효능과 함께 강장제로 알려져 있다. [67] 아마도 위키백과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철이 다르칸의 작위를 받았다고 언급한 건 한국어 위키백과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사에는 문종을 즉위하게 한 후 연철이 받은 작위는 태평왕이었다. [68] 연철이 독살 당하지 않았다는 걸 기양을 통해 확인하면서 연철 일가를 돕는 쪽으로 작전을 바꿨다. [69] 히포크라테스는 12건의 상상임신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70] 후대의 조선에서도 효의왕후 화빈 윤씨 등이 상상임신을 한 일이 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産事無實)" 정도의 표현만 나오지, 상상임신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적은 전혀 없다. [71] 참고로 타나실리가 뜸을 뜨고 있는 부위는 팔료혈(八髎穴)이라는 부위인데 엉치뼈 위쪽의 8개 혈자리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여성질환 치료에 있어 중요한 부위라고 한다. [72] 흔히 뜸 뜨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피부에 올려놓고 태워서 열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물체를 말한다. [73] 물론 이쪽도 고통스럽다기보단 따끈따끈 하다가 슬슬 따끔하다고 생각할 때 쯤 되면 치료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74] 엄지손가락만 한 뜸봉을 같은 부위에 3번 정도 뜸을 떠서 화상을 일으킨 뒤 그 위에 수지고약 같은 것을 붙여 고름을 배출하는 방식이다. 약 한달에서 한달 반 정도 고름이 빠진다고 하며 이 방법을 통해 몸의 방위 기능을 강하게 한다고 한다. [75] 외상을 입은 피부나 각종 장기에 고름이 생기는 걸 의미하는데, 포도상구균, 연쇄상구균, 폐렴쌍구균, 임균, 결핵균, 장티푸스균, 녹농균 등 화농균이 일으키는 염증도 포함된다. [76] 실어증은 영어로 '어페이지어(Aphasia)'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부정접두사인 '아-(A-)' 와 말을 뜻하는 '파시스(phásis)'가 합쳐진 말이다. [77] 후음은 범위가 좀 넓어서 아예 말이 안 나오는 경우에 쓰기도 한다. 사실 고대 시기 중국이나 한국의 의학에서는 증상을 이르는 말의 범위가 좀 넓은 편이다. [78] 해당 장면에서 실어증 장면에 설명 자막이 붙어 있다. [79]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리(세금징수인)와 똑같은 일을 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그로 인한 폐해까지 동일하다는 게 함정. [80] 고려의 정동행성을 관리하는 직책이 바로 평장정사였다. [81] 그보다 더 예전에 만들어진 예기(禮記)의 혼의(婚義) 편을 보면 "천자는 황후를 세우고 6명의 궁, 3명의 부인, 9명의 빈, 27명의 세부, 81명의 어녀(后立六宮, 三夫人, 九嬪, 二十七世婦, 八十一御女)를 두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82] 따로 품계가 없던 시기엔 황후를 여럿 두기도 했는데 보통 제1황후는 '예케카툰(大皇后)', 그 이하의 황후들은'솔카툰(弱皇后)'이라 부르거나 '허여르더가르 카툰(제2황후)', '거라브더가르 카툰(제3황후)' 식으로 순번을 붙여 불렀다. [83] 이런 방식으로 후궁이 된 게 바로 기황후였다. 기황후는 원래 공녀 출신에 황제에게 다과를 올리던 궁녀였다. [84] 황제가 거처하는 궁을 부르는 명칭이다. [85] 대내를 한 가운데에 뒀던 기존 중국 왕조들의 궁과는 달리 거대한 연못을 끼고 그 흐름에 따르듯이 주변가에 궁을 만든 것은 물 가까이에 거주지를 만들던 유목민들의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86] 후에 순종으로 추숭된다. [87] 학문을 익히고 서화나 서책을 모으는 규장각(奎章閣)이 흥성궁 내에 있었다. [88] 일본의 사학자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흥성궁과 융복궁 모두를 장악한 다기의 시기를 그녀의 씨족명을 따서 '쿵그라트(옹기라트) 시대'라고 평하기도 했다. [89] 드라마 기황후에 등장하는 황태후는 코코진이나 다기와는 달리 문종 황제의 정실이자 황후 출신이었다. 때문에 굳이 두 추존 황후들처럼 융복궁에 머물 까닭이 없다. [90] 고려는 천문 관련 기구가 천문 관측과 역산을 담당하는 태사국과 천문을 읽고 점사를 보는 태복감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민왕 시기에 두 기구를 합쳐 서운관(書雲觀)을 만들었다. [91] 선정원은 티베트 불교 뿐만 아니라 티베트 지역의 군정(軍政) 사무 역시 통괄하고 있었다. 선정원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티베트 지역을 통제하고 티베트 불교를 관할하는 '폰첸(本欽)'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선정원이 폰첸을 선정하면 대도의 황제가 임명장과 인장을 내려 정식으로 임명했다. [92] 관상학이 크게 유행한 시기는 오히려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 시기다. 당장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역시 관상학에 얽힌 일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 [93] 태을식(太乙式)、둔갑식(遁甲式)、육임식(六壬式)을 말한다. [94] 주역을 읽고 점을 치는 것을 말한다. [95] 갑골 문자와 관련이 있기도 한 뼈를 보고 점치는 것을 의미한다. [96] 인간의 운명을 천명, 숙명, 음명(阴命)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인간의 성품이 천명과 합쳐지면 바르고 도덕적이 되며, 성품이 숙명과 합쳐지면 지식, 재물, 능력에 집중하게 되고 성품이 음명과 합쳐지면 분노나 증오, 괴로움 등으로 변한다고 한다. [97] 중국의 점술 중 태양 그리고 오성(금목수화토), 28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는 자기(紫氣), 달이 가깝고 먼 것을 살피는 월패(月孛), 중국의 하늘에선 관측되지 않는다는 별인 나후(羅喉)와 계도(計都)를 연구하는 걸 칠정사여(七政四余)라고 불렀는데 칠정 중 5개의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걸 오성술이라고 한다. [98] 채점하는 종이를 보면 부씨(夫氏)라고 적혀 있다. [99] 그 와중에 자막에 쓸데없는 칙(勅)자가 같이 있다(...). [100] 복령은 주로 소나무 뿌리에서 자라는 버섯을 의미한다. [101] 말린 참마를 의미한다. [102] 흰색의 제비콩을 말한다. [103] 잘 익은 연꽃 열매 [104] 가시연밥의 열매 [105] MBC 대하드라마 대장금에서 각기병에 걸리고도 음식 투정이 심해 식이요법을 못하는 자순대비를 위해 장금이가 마늘을 사용한 달콤한 환약(丸藥)을 만들어 복용하게 한 일화와 흡사하다. [106] 상어나 홍어같은 연골어류 요산 배출량이 적어 살에 누적되기 때문에 조금만 숙성되면 암모니아 냄새가 심각해진다. [107] 타환도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4점을 주었다. [108] 사천행성주 설도관의 딸로 나온다. [109] 황태후가 모란이 설명하는 장면에서 채점하는 장면으로 1번, 섬서행성주의 딸 '적미랑'이 자기 음식(송이와 쇠고기를 곁들인 송이우육)을 설명할 때 타환이 채점하는 장면으로 1번 나왔다. [110] 타나실리의 수족이 된 상궁 연화가 손을 쓴 탓이었다. [111] 다섯 명의 왕이 술에 취해 말을 타고 귀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경매에서 '3억 700만 홍콩 달러(한화 약 454억 7,898만 원)'에 낙찰되었다. [112] 맥박수나 강약으로 병세를 판단하는 것 [113] 환자의 낯빛이나 눈,코,입,혀 등을 눈으로 살펴보고 병세를 판단하는 것 [114] 환자 자신이나 가족의 병력이나 병의 경과 등을 묻는 것 [115] 손으로 부위들을 만져 병세를 판단 [116] 드라마 방영 당시에도 흔히 입대할 때 받는 신체검사의 줄임말인 '신검'으로 들려서 웃겼다는 의견이 있었다. [117] 백합목 여로과 여로속 여러해살이풀 식물로써 7월에서 8월 사이에 흰색의 꽃을 피우는데, 잎은 물론이고 뿌리에도 '프로토베라트린(Protoveratrin)' 성분이 잔뜩 함유된 독초이다. 산마늘과 비슷하게 생겨서 잘못 먹는 경우도 있는데 섭취 시 주로 오심과 구토를 일으키며 그 외에 저린감, 두통, 발한, 침분비, 근쇠약 등이 발생하며 자칫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한방에서도 억지로 토하게 할 때(催吐)나 살충제로만 사용되지 섭취용으로 사용되는 일은 드물다. [118] 드라마에서는 박새를 보여줄 때 분명 뿌리를 보여줬음에도 계속 박새풀이라고 언급한다. [119] 우리가 흔히 창포로 알고 있는 아름다운 꽃은 '꽃창포'라고 해서 관상용이며 그 외에는 별 효용성이 없다. [120] 작자 미상의 시인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에 "어젯밤 좋은 비로 산채가 살졌으니 광주리 옆에 끼고 산중을 들어가니 주먹 같은 고사리오 향기로운 곰취로다 (중략) 낱낱이 캐어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취쌈 입에 넣고 국 한 번 마시나니 입 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 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121] 궁에서 숙식을 하며 지키는 병사를 의미한다. [122] 몽골 제국에서 숙위군은 진수군(鎮戍軍)과 함께 정규군으로 취급되었고 원 세조 이후에 숙위군은 금군(禁軍)이 되어 황제를 지켰다. 따라서 연철이 숙위군으로 10년을 보냈다는 것은 성종 시절에 군인으로써 복무했다는 걸 의미한다. [123] 실제 직무는 없는 사실상의 명예직이다. 정봉대부의 경우는 2품(二品)에 해당했다. [124] 황실의 의례를 담당하는 선휘원의 보좌관이다. [125] 그리고 노소공은 제나라를 떠나 진(晉)나라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가 실패한 뒤 타국에서 객사하고 말았고 그의 동생이 즉위해 노정공(魯定公)이 되었다. [126] 이 또한 일부러 궁녀들을 윽박질러 전달하지 않은 것이다. [127] 여계, 여논어, 내훈, 여범제록(女範捷錄)을 이른바 여사서(女四書)라 부르는데 내훈과 여범제록은 명나라 시기에 집필되었다. [128] 재밌게도 먼 훗날 조선에서는 영조 13년( 1737년)에 홍문관 제학이었던 '이덕수(李德壽)'가 영조의 명으로 여사서를 풀어서 쓴 『여사서언해(女四書諺解)』를 간행하기도 했다. [129] 기재인이 해석한 부분은 여기까지다. [130] 비녀지경 부분은 타나실리가 가로막아서 읊지 못했다. [131] 드라마 기황후 7화에서 타나실리가 동일한 구절을 읊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래도 버벅거리던 과거의 타나실리와 술술 읊는 기재인을 비교하려고 의도한 거 같은데 어찌됐든 인용이 잘못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32] 자막을 보면 언고시(言古詩)라고 하는 쓸데없는 글씨가 붙어 있다. 편집 중 발생한 오류로 보인다. [133] 인간은 선과 악이 혼재한 존재로, 주변 환경과 교육 방식 등에 따라 선하게 혹은 악하게 자랄 수 있다고 주장한 성선악혼설로 유명하다. [134] 여불위는 노애 진시황제의 생모인 황태후 조씨를 이어줬으나 노애가 역심을 품은 바람에 같이 엮여서 몰락하였다. [135] 회남왕 유안(劉安)의 경우는 자신의 아들의 일로 고발을 당했고, 결국 그걸 기화로 한무제에 대한 반역을 획책했다가 손자의 고발로 몰락한 케이스인데 사실 유안 자신도 처신을 잘못한 게 있었다. [136] 물론 나중에 언급되지만 둘이 짜고 친 것이었다. [137] 내의원(內醫院)은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에 궁중의 의약을 맡아보던 관아를 의미한다. [138] 고려 역시 황실의 의사를 태의라고 불렀다. [139] 연경(燕京), 연도(燕都), 경(京) 등의 표현으로 불린다. 물론 대도라는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다. [140] 원 간섭기를 배경으로 한 MBC 사극 신돈에서도 대도라는 표현보단 연경으로 불린다. [141] 물론 한나라 시기에는 여성 범죄자들을 가두던 액정조옥(掖廷詔獄)이라는 감옥이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냉궁과는 의미가 달랐다. [142] 상당히 조잡하게 만들어졌는데 어새에 흔히 사용되는 전서체가 사용되지도 않았다. [143] 어새에 어떤 문구가 새겨졌는지 알 수 있는 까닭은 몽골 제국의 3대 카칸이었던 귀위크 칸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내는 칙서에 찍힌 인장의 모양이 남았기 때문이다. [144] 인(印)이라는 글자는 일반 관리들이 쓰는 업무용 도장이나 즉위를 인정받은 제후국 왕들이 상국으로부터 받은 금인(金印) 등에 사용되었다. [145] 기황후 속 매박의 첩자들은 행성주들의 신임을 얻으며 몰래 정보를 빼내고 수작을 부렸기 때문에 그들이 행성주들이 다 모인 대도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146] 석유의 정제물인 나프타를 의미한다. [147] 강예지(康與之)가 쓴 『작몽록(昨夢錄)』에는 "서북쪽 지역에 모두 땅을 파서 큰 연못을 만들고, 종횡으로 남은 땅을 파서 맹화유를 저장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북송 시기 부터 맹화유를 방어용으로 썼다는 얘기다. 그리고 금나라 군대는 이 맹화유에 여러 번 피해를 입어야 했다. [148] 부마국이었던 고려의 왕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나름 상석에 좌석이 있었다. [149] 쿠릴타이는 주로 목초지 일대에서 이뤄졌다가 카라코룸, 그리고 원 세조 이후에 상도에서 이뤄졌고 문종 황제 시기부터는 대도의 대명전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150] 물론 이 쿠릴타이 또한 형제들이 원정을 간 틈에 기습적으로 카라코룸에서 개최한 것이라 명분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151] 겨울이나 여름 사냥을 위한 쿠릴타이가 열리기도 하였다. [152] 정작 동일한 화에서 적공의 딸로 나왔던 배우는 주황색 복장을 입고 당황한 듯이 쳐다보는 역할로 나온다. [153] 황제가 기양만 고르는 바람에 나머지가 전부 탈락했고 행성주들이 이 사태에 불쾌해하자 운남, 영북, 섬서, 사천행성의 딸들을 재인으로 뽑았다. [154] 이 쪽은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단 포위된 상테에서 버티기에 가깝다. [155] 오늘날의 허베이성 장베이현(張北縣)에 위치해 있었다. 만리장성 북쪽과 내몽골 남동쪽 사이에 있었다고 보면 된다. [156] 물론 축수재는 엄밀히 따지면 왕의 '생일잔치'에 가까웠다. 즉, 왕의 탄신일에 왕이 오래오래 살 것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157] 동궁전의 사무를 맡은 극조원(極組源), 불교 사원을 세우거나 수리를 맡은 연경사(延慶司), 음악을 담당하는 수화서(壽和署), 호적 등을 담당하는 장의서(掌儀署), 직조와 염색, 잡다한 장인들을 담당하는 직염잡조인장총관부(織染雜造人匠都總管府) 등이 전부 휘정원에 속해 있었다. [158] 뮤지컬 배우 박해미가 연기했는데 '불 바차 아부카' 라고 하는 기묘한 주문을 읊는다. 참고로 불 바차 아부카(बुल् वाचा आवूक)는 산스크리트로 '아버지의 말씀이 가라앉았다가 떠오른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59] 개를 이용한 무고술을 의미한다. [160]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고문은 원나라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그것과 관련된 일화가 바로 위의 일화이다. [161] 참고로 이 때 타환의 나이가 20살이었다. [162] 타나실리가 사사된 게 1335년 7월이었다. [163] 사실 드라마 기황후는 역사를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구성이 시간보다는 사건 위주로 흘러가는데다 편의에 따라 바꿔대다보니 정확한 시간을 파악할 길이 없다. [164] 몽골어 발음은 쿠살라. [165] 의외로 원나라 사서에 자주 언급되는 지명인데 칭기스 칸이 장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원나라 황제들이 사망하면 기련곡 일대에서 장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이나 오늘날에는 그 위치가 전해져 오고 있지 않다. [166] 몽골식 시호는 '쿠툭투황제(忽都篤皇帝). [167] 현고(顯考)는 예전에는 고조를 의미했으나 원나라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168] 망엄부 역시 아버지를 잃었다는 의미다. 엄부(嚴父)는 아버지를 높이는 말이다. [169] 불교식으로 지방을 작성할 경우 본관(后人)과 성씨(公)를 작성한다. 박지제길특은 씨족인 보르지긴, 기약온씨는 칭기스 칸의 성씨로 알려진 키야트 씨를 의미한다. [170] 실제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능침사찰(陵寢寺刹)인 용주사(龍珠寺)에 가면 사도세자 정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유교식 시호에 끝에 영가(靈駕)를 붙인 형태를 하고 있다. [171] 만약 혈서에 찍힌 인영이 다르거나, 타환의 옥새가 아닌 다른 형태의 옥새로 인영을 찍는 장면이 나왔다면 당위성이 생겼을 것이다. [172] 칭기스 칸의 법전에는 초원을 소중히 하고 풀이 돋았을 때 구덩이를 파서 훼손하거나 불을 지르면 전 가족을 사형에 처하도록 엄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원나라가 성립한 이후 황제들이 상도와 대도만을 순행할 뿐, 진짜 초원으로는 가기 어려웠던 만큼 궁 안에 초원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173] 드라마 기황후 속 대도 지도는 오히려 고려나 조선의 읍성(邑城)의 조감도와 비슷하다. [174] 고려에서는 태자궁 남문을 여정문이라고 불렀다. [175] 황제의 거처인 대내, 그리고 중서성으로 이어지는 문이 바로 여정문이었다. [176] 탈탈이 지목하며 백안이 직접 뚫을 거라고 한 북문이 안정문 방향이었다. [177] 초원에서는 피를 흘리는 죽음 자체가 불명예였다. [178] 몽골인으로써 진국공(秦國公)이었던 안쿨(按竺邇)의 손자였고, 인종 시기에 다기 태후의 측근으로써 권세를 부리던 테무데르(帖木迭兒)를 탄핵해 쫓아낸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인종이 죽고 테무테르가 보복하려고 하자 동생인 '쇼예르(胥益兒)'에게 자신을 무고해 죽여달라고 간청했지만 당연히 만류되었고 다음 황제였던 영종 역시 조세연의 죽음을 바라지 않아 금릉(金陵)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중서우승 및 동지추밀원사로 임명되었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문종 황제를 받드는데 일조한 덕에 입조할 때 수레를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타환이 즉위한 뒤 1년 후에 성도(成都)로 갔으나 노환으로 인해 6개월 만에 사망했다. [179] 왕() 글자는 어째서인지 잘려 있다. [180] 제후국들은 책봉을 받은 이후 상국으로부터 금으로 만들어진 도장을 받았다. 당시 금보다 귀했던 옥은 황제나 황후의 인장을 만들 때만 사용되었다. [181] 이것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했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2] 도장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183] 고려가 계승을 강조한 국가는 고구려였다. [184]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한자를 인용하면서 불필요한 첨자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185] 명종 황제가 군을 이끌고 왔을 때 연철이 맞이하였고 이에 명종이 내린 게 바로 태사직이었다. [186] 고려에서도 입성책동을 막기 위해 '태사' 연철에게 사신을 보냈다. [187] 원사에서는 킵차크, 신원사에서는 바야후트 가문으로 되어 있다. [188] 원사 118권 열전 제 5권에 나오는 말이다. [189] 딸이 황후가 된 후 육덕왕(毓德王)에 봉해졌다. [190] 메르키트 부족 중 토크토아 베키가 이끄는 우드이트(兀都亦惕) 일파가 보르테를 납치했고, 귀환한 후 장남 주치를 낳은 탓에 주치는 지속적으로 메르키트 핏줄이 아니냐는 의심에 시달렸고 결국 차남 차가타이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간단히 말해 몽골의 화목을 해친 원흉인 셈. 물론 메르키트 출신인 백안이 원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칭기스 칸이 고원을 통일한 후 메르키트 역시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1] 흥덕전은 덕수궁에 있었던 전각의 이름이다. 현재는 터만 남은 상태이며 복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92] 원나라의 기구 중 하나로 황후의 업무 및 황후 소유의 토지와 그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관리했다. [193] 오늘날의 저장성 닝보시다. [194] 물론 푸젠(복건), 광둥(광동)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195] 놀이 문화는 여러 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는 특징이 있다. [196] 실제로 마조의 규칙을 간소화해서 나온 게 투전이다. [197] 위에서 언급된 청나라 광서제가 즉위한 해다. [198] 충선왕, 충숙왕 시기에 각각 1번, 충혜왕 시기에 2번 있었다. 충혜왕 시기에 있었던 입성책동의 경우 1번은 충혜왕 자신이 원에 주청해 막았으나 나머지 1번은 자신이 너무 막장으로 통치를 한 탓에 자기만 폐위되는 결말로 끝맺음 되었다. [199] 고려가 원과 강화를 한 건 1259년의 일이고 1차 입성책동은 1309년에 무종 시기에 있었다. [200] 제사를 주관하던 기관인 태희종인원(太禧宗禋院)을 관장하는 직책. [201] 관리들을 감찰하는 직책으로써 원나라에서는 상당히 권한이 강했다. [202] 근위대인 아수드군의 좌군을 맡았다는 의미다. [203] 일 칸국이 살아 있을 때 전쟁을 하려면 타나실리가 사사되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이래저래 성립할 수 없다. [204] 이전에 언급됐듯이 대도의 대문은 11개였다. 즉 대도의 모든 문 앞에 식량과 재물을 뿌린 것이다. [205] 박부카가 기근으로 죽은 백성들을 묻어준 일화는 원사 204권 환자(宦者, 환관)편에 기록되어 있다. [206] 타환의 통치 2년 만에 재해가 발생한 곳만도 30-40 곳이 넘는다. 그야말로 매 달마다 재해와 기근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207] 연철이 타환의 즉위를 망설였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일관들이 타환이 즉위하면 재해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인 양, 타환이 즉위한 이후 가뭄과 홍수, 냉해와 질병 등 자연 재해와 기근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다. [208] 타나실리의 아버지 연철은 타환의 즉위를 막았던 인물이고 연철의 아들 당기세와 탑랄해는 반역을 일으켰으며 타나실리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애가 생길래야 생길 수 없었다. [209] 같은 방송사에서 만든 드라마 신돈에서도 쿤란태자라고 하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마하와 마찬가지로 타나실리의 소생으로 등장한다. [210] 황태후의 권력욕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부다시리는 타환의 즉위를 찬성하는 댓가로 자신의 아들 엘 테구시를 타환의 후계자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이로 인해 엘 테구시는 기황후에게서 태어난 아유시리다라 이전에 존재한 황태자였다. 엘 테구시는 황태후가 실각했을 때 고려로의 유배가 결정됐으나 타환은 결코 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고, 결국 이동 중에 평장정사였던 사르구차르(月闊察兒)에게 살해되었다. [211] 문종과 부다시리는 처음에는 명종의 아들들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인 아락테나다라가 태자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요절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저주를 두려워 한 문종과 부다시리는 명종의 아들 중 하나에게 황제 자리를 넘길 것을 결정하였다. [212] 이 인물은 코케테무르라는 이름보다는 본명인 왕보보(王保保)로 더 유명하다. [213] 고려사를 보면 인종(仁宗) 13년인 1135년에 노비를 대신승(代身僧)으로 삼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신승은 타인을 대신해 불공을 드리는 승려를 말한다. [214] 아유시리다라는 보통 1339년 1월 23일(음력 1338년 12월 24일)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5] 백안은 권력에 취해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벼슬을 갈아버리는 짓을 즐겨했다. 그러던 중 황실 일원인 담왕(郯王) 체체투(徹徹篤)를 모함해 죽여버리고 선양왕(宣讓王) 테무르부카(帖木兒不花)와 위순왕(威順王) 칸체부카(寬徹普化)의 작위를 자기 맘대로 박탈하는 일을 저질러 타환의 눈 밖에 나버렸다. [216] 티베트 불교의 밀교 분파 중 '얀셰르파(演揲兒法)'가 존재했다. 얀셰르(演揲兒)라는 말은 한자어로 쓰면 대희락(大喜樂), 즉 '아주 큰 즐거움'이라는 뜻이었는데 이는 다른 게 아닌 성적인 교합을 통한 쾌락에서 도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카마는 얀셰르파에서 가르치는 방중술을 황제에게 가르쳐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217]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카마가 아니라 기황후가 한 짓으로 나오지만 어찌됐든 묘사가 되긴 했다. [218] 한국어로 발음하면 '탁발태평'이다. 원래 이름은 하유일(賀惟一)이었으나 황제에게 인정을 받아 탁발씨라는 성씨와 새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기황후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아 결국 참소 당해 티베트로 유배 보내진 뒤 독살되었다. 타이핀의 아들 '에센후투그(也先忽都)' 또한 영특해 지추밀원사에 올랐으나 아버지와 함께 쫓겨났고 귀양가던 길에 행선정원사(行宣政院使)가 쉬었다 가라고 해서 잠깐 머물렀다가 그게 빌미가 되어 결국 타살(打殺)당했다. [219] 탈탈이 기황후의 참소로 사망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220] 로디샤는 타환의 어머니 마알라이다이와 남매 사이였다. [221] 고려 공민왕 시기에 기황후의 명으로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삼기 위해 원나라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진격했다가 탈탈 털렸던 최유가 결국 고려로 송환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베이르테무르가 황제에게 압력을 가해 기황후와 박부카에게 아부를 떨던 최유를 고려왕 손에 죽게 한 것이다. [222] 금이나 은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223] 위구르인 출신이다.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탈탈이 요나라의 역사서인 요사(遼史)를 집필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224] 탈탈은 드라마 속 모습처럼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바른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열전을 보면 「그는 소인배들에게 미혹되고 사적인 원수를 갚는데 급급해서 군자들이 비웃었다(惟其惑於羣小,急復私讎,君子譏焉)」라는 평이 있다. 간신 카마가 기황후를 꼬드겨 탈탈을 모함했던 것도 그가 탈탈과 탈탈의 동생인 예순테무르(也先帖木兒)에게 온갖 아부는 다 했지만 정작 탈탈이 아끼던 중서성 참의(參議)이자 예스맨 기질을 가지고 있던 여중백(汝中柏)이 카마와 충돌하자 탈탈은 여중백의 말만 믿고는 카마를 선정원사(宣政院使) 중에서 3번째 서열로 강등해서 내쫓는 바람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225] 한족 출신으로 설철독과 마찬가지로 탈탈이 송사(宋史), 요사, 금사(金史)를 집필할 때 참여했다. [226] 지폐를 세는 단위다. [227] 성문 헌법, 즉 문자로 남겨 전하는 법을 의미한다. [228] 해봐야 득될 게 없다는 소리다. [229] 흥성궁을 관리하던 황태후 소유의 재정 기구인 휘정원의 소유권을 얻은 뒤 이름을 고쳤고 투멘데르(禿滿迭兒, 독만질아)가 초대 자정원사가 되었다가 투멘데르가 고려로 간 뒤에는 박불화가 자정원사가 되었다. [230] 드라마에서는 탑랄해(탑자해)가 사망했던 그 시점이다. [231] 오늘날의 허베이성 랑팡시 구안현(固安县)이다. [232] 병왕의 봉토는 오늘날의 산시성 일대였고 금인수뉴(金印獸紐), 즉 짐승 모양의 인뉴가 올라간 금 도장을 사용했다. 이전에는 가왕(嘉王)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왕이 되면서 가왕직과 금인을 동생 쿠르쿠(火兒忽)에게 넘겼다. 병왕과는 달리 가왕의 봉토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233] 오늘날의 안후이성 당투현(當塗縣) 일대다. [234] 천연 비소 화합물로서 밝은 주황색인 등황색(橙黃色)을 내기 위한 염료로도 사용되었다. [235] 비소의 삼이산화물로 주로 방부제나 쥐약 제조에 사용되었다. [236] 황산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콩팥을 닮았다고 담()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이다. 반투명한 푸른빛을 띄며 광택이 나기 때문에 얼굴에 바르는 안료로도 사용되었고 살충제로도 사용되었다. [237] 도장을 찍는 인주 부적을 그리는 물감의 재료로 알려져 있다. 수은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238] 해당 드라마의 원작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살해 당한 것까지는 동일하나 기자오의 정실 부인이 따로 존재한다. 때문에 소설에서는 기황후가 기철과 오라버니들의 죽음을 이부남매로써 분노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은 되지만 드라마에서는 아예 그런 설정 자체가 없어서 설명할 길이 없다. [239] 사실 금인 분실은 핑계고 공민왕이 기철과 부원배들을 척살한 일로 죄를 주려고 한 것이다. [240] 왕토크토아부카가 거절하면서 다음 대상으로 물망에 오른 게 바로 덕흥군이었다. [241] 1년 전에 그나마 명나라를 상대로 버티고 있던 코케테무르가 사망한 상태였다. 북원은 4년 후에 수도 카라코룸을 명나라에게 빼앗겼고 카라코룸은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다. [242] 오늘날의 장쑤성 양저우시의 가오유시(高邮市). [243] 오늘날의 장쑤성 화이안시(淮安市). [244] 위치를 보면 오늘날의 미얀마와의 접경지이다. 이전에 기씨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백안보다도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245] 탈탈의 아버지 마자르타이(馬札兒台)가 우승상(右丞相) 베르케부카(別兒怯不花)에게 모함을 받아 감숙성으로 귀양을 떠났을 때, 탈탈은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함께 갔고 아버지가 귀양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가 사망하자, 장례 후 대도로 올라와 업무에 복귀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족으로 탈탈의 아버지 마자르타이를 모함한 베르케부카는 공교롭게도 마자르타이가 유배된 그 해에 "우승상으로서 다스리는 게 부적절하다" 하다는 이유로 어사에게 탄핵을 당해 발해현(渤海縣)으로 유배를 갔다가 울화증으로 2년 만에 죽었다. [246] 물론 이전에 기황후가 카마 등과 짜고 양위를 요구했던 일의 여파가 컸기 때문에 타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양위는 안 하려고 버틴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247] 탈탈이 사사된 후 장사성은 세력을 더욱 키웠고 나중에 주원장과 자웅을 겨루는 세력이 되고 말았다. [248] 새로 건립된 명나라에서는 홍무 3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