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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년경 오대십국 전반기의 형세.
930년경 오대십국 중반기의 형세.
951년경 오대십국 후반기의 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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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五代十國時代 /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당(唐)(618년 ~ 907년) 왕조가 멸망한 10세기 초엽부터 송(宋)(960년 ~ 1279년) 왕조가 개창된 10세기 중엽까지 53년, 약 반세기 동안 이어진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 이 시기는 혼란기로, 한국사에선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광종 치세까지 겹치는 시기다. 이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혼란의 시대를 끝낸 나라가 송나라다.
서진이 멸망하고 전개된 오호십육국시대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시기는 오호십육국이 훨씬 이전으로 완전히 다르다. 다만 그 전개 양상은 비슷해서 과장 좀 보태 제 2의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봐도 될 정도.[1]
당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시기라는 점으로 인해 '당말송초(唐末宋初)', '당송교체기(唐宋交替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2. 특징
똑같은 중원의 혼란기이지만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0년 ~ 221년)나 위진남북조시대(220년 ~ 589년)보다 훨씬 짧게 전개되었기에 일부에서는 이 시기 이미 중국인들에게 통일 왕조에 대한 강한 염원과 이념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중국사를 봐도 알겠지만 고대로부터 중세로 이르는 기간동안 분열의 시기가 점점 짧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대십국시대 이후로는 아예 분열기 자체가 길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2]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 말기 번진 세력이 할거하기 시작한 안사의 난이 발발한 755년 또는 난이 끝난 763년부터 주전충이 애종에게 선양을 받는 907년까지인 번진 할거 시기부터 각 번진별로 반독립적인 막장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대십국시대가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미 당나라는 혼란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당장 안사의 난 이후의 당나라 역사는 반항하는 지방 절도사와 중앙 정권이 대립하다가 토벌하고 역습당하는 어지러운 세월이 이어진다. 안사의 난 때는 곽자의 등이 있어 어찌어찌 버티긴 했지만, 혼란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오대십국시대는 고작 50여 년이었지만 넓게 보면 755년 ~ 763년부터 979년까지 약 200년 정도가 실질적인 혼란 시기라고 볼 수 있어 절대적으로 짧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전의 혼란 시대와 양상이 달랐다고 볼만한 점이 있다. 당 이전의 통일 왕조인 한[3]과 비교하면, 한나라와 당나라 모두 중앙 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자 황건적의 난과 안사의 난이라는 반란으로 국가 막장 테크를 밟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멸망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후한의 멸망 이후 도래한 혼란기인 위진남북조시대의 경우 초기인 삼국시대에는 한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한 통일 왕조 건설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다뤄졌다. 때문에 한나라의 정통성과 국가 구조를 계승한 조위와, 조위를 계승한 진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북방계 유목민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당시로써는 변방이던 강남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당시의 문화와 경제 중심지이던 중원을 차지한 것은 북방 유목민이 중심이 된, 일일이 세기도 힘든 다수의 국가들이었다.
결국 370여년에 이르는 이 기나긴 대혼란기에서 이전 통일 왕조를 계승한 새로운 통일 왕조의 건설이 주요한 정치적 과제로 다뤄진 것은 길게 잡아도 초기의 100년 정도에 불과했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왕조의 경우 북방 유목민의 유입으로 세워진 국가들을 통합하여 세워진 국가라는 점에서 중국의 통일 왕조 개념에서 중요한 '이전의 통일 왕조가 붕괴하면 새로운 통일 왕조가 나타나 대체한다'는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새로운 통일 국가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오대십국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와 혼란의 양상이 조금 다르다. 당나라가 붕괴한 이후에도 당시까지 문화와 경제, 정치의 중심지였던 중원을 통제하던 5대와, 이전 시대에 비해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변방에 가깝던 강남(중국)을 중심으로 독립한 10국의 양상이 이어진 것이다. 즉,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로 외곽 지역의 10국 및 절도사 세력들이 독립해 나갔지만, 통일 제국의 중심부인 중원 지역 자체는 다섯 번이나 왕조가 교체되는 와중에도 단일한 정치적 구조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중심부의 신 왕조로 탄생한 북송이 독립 세력인 10국을 흡수하는 형태로 중국이 재통일되었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오대십국시대의 양상을 제국의 영향 범위 축소와 외곽 지역의 독립 → 제국의 왕조 교체 → 신 왕조에 의한 영향 범위 재확장으로 보는 관점 역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다. 다른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는 통일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이니 논외며 그리고, 당나라 이후에는 왕조가 교체된 사례는 여러 번 있지만 이와 같은 분열로 인한 혼란기는 다시 오지 않았고, 중국 통일 왕조 교체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왕조가 몰락하면 다른 왕조가 그를 대체하는 체제가 구축되었다.
특이한 것은 왕조는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황실만 갈려나갔지 신하와 관료층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재상이 풍도인데 자신이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군주(五朝八姓十一君)"를 모셨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런 경향은 남북조시대 남조의 상황과 동일하다. 후경의 난이 벌어지기 전까지 남조 역시 황실의 성씨만 바뀌었지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송태조의 조씨 가문도 마찬가지로 송태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조가 세 번 바뀌었으나 세 왕조에서 모두 꾸준히 근무했다. 남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 돌아가는 게 확실히 덜 막장스러웠고, 왕조가 바뀌고 전란이 일어나긴 했어도 일반 백성들의 삶이 힘들기는 하나 그럭저럭 유지가 되었다는 것 정도다.
끽하면 백성들을 학살하고 다녔던 남북조시대 남조(유송, 남제, 남량, 남진)의 폭군들에 비하면 이 시기에는 그래도 기본적인 선은 다들 지켰다. 지조 없고 몸보신에 인생 바친 처신의 대부 풍도는 백성들 살리는데는 재산이고 체면이고[4]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온갖 개막장짓을 해대던 후량의 태조 주전충도 기본적인 애민정신은 있어서, 환관이나 문벌귀족이나 당나라 황족들은 마구 썰고 다녔지만 백성들에게는 동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일도 제법 있었다. 심지어 한간이라고 천 년 넘게 욕을 먹고 사는 석경당도 백성들 상대로 학살하거나 크게 문제를 일으킨 기록은 없다.
후당의 황제 이종가는 요나라의 지원군까지 끌고 쳐들어오는 석경당에게 패퇴하자, 절망하여 궁궐에 불지르고 자결하려 했으나 황후 유씨가 궁궐이 불타면 백성들이 다시 짓느라 고생하게 될 테니 그러지 말라는 조언을 듣고 낙양 현무루에 가족들과 함께 올라가 현무루만 불에 태웠다.[5] 기본적으로 백성들 생각은 하고 살았던 시대였던 듯. 백성들 삶이 힘들었다는 이유도 전란이 많고 목숨 부지하기조차 힘들어서 그랬다기보다는, 막장스런 내치 문제가 더 컸다. 후당의 공겸 같은 세금 걷는 악당이 설치고 다녔다든가, 하는 식의 전형적인, '안정적인 왕조 시대의 문제'들로 괴로워했다.
안사의 난이니 황소의 난 같은 반란이나 위구르, 토번, 돌궐 등등이 돌아가면서 괴롭혀온 당 말기와 비교하자면, 갈라진 지방 정권들이 자기 지역은 안정적으로 통치했던 편이라서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되려 좀 나은 면도 있었다. 실제로 이 시대의 지방정권인 10국들의 경우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국가들이나 남조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정권의 안정성도 강했고, 경제나 문화적으로도 제법 번성했다. 실제로 북송이 중국을 재통일하면서부터는 이 시기의 기반을 바탕으로 문화적, 경제적으로 크게 융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삼용(三冗)으로 대표되는 거대 국가의 사회적 비효율 문제가 크게 나타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혼란기이기 때문에 마냥 난세였다고 보는 건 어찌보면 전형적인 전통 중국사 관점의 시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시기에 중국의 '중심'이 한 번 이동하게 된다. 진나라 때부터 수도 역할을 하던 중심지인 장안, 낙양 일대는 황폐화되어 두 번 다시 제국의 수도가 되지 못한다. 후량은 주전충의 봉지였던 카이펑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꼽히는데, 하나는 기후변화다. 안 그래도 오랜 기간 농사를 지어 관개가 중요한데도 이 지역의 잦은 전란으로 인해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되어 환경 파괴가 일어나 토질이 악화, 관중 평야의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수도에 요구되는 막대한 100만 규모 인구를 더이상 자체적으로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강남(중국) 개발이다. 화북 지방 중에서도 대운하에 보다 가까운 지방이 많은 인구를 유지하는 데 유리해진 것이다.
환경변화로 인한 국력 쇠퇴는 문명을 존속하고 발전하는 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중국은 대륙 수준의 광활한 지역이다보니 화북이나 강남 등 대체 가능한 지역이 있어서 계속해서 문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좁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자리했던 앙코르 왕조는 지나친 개발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문명의 쇠퇴는 물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외래민족인 시암이나 베트남에게 빼앗기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한편 북아메리카에 고립적으로 자리잡았던 아나사지[6]나 마야는 아예 망해서 다시는 고전기 당시의 문명수준으로 회복하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오대십국이란 간단히 설명하면 화북 지방에 자리잡은 5개의 왕조를 오대라고 하며, 중원 이외의 강남(중국)이나 사천 지방에 자리잡았던 10개의 나라들을 십국이라고 통칭한다. 단 십국 중 북한(北漢)은 예외로 산서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것은 북한이 후한과 후주의 교체기에 후주의 건국에 반발한 후한의 건국자 유지원의 동생인 유숭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가장 부계혈연에 연연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했는데 후당의 2대 황제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자이긴 한데 혈연상 남이었고[7] 후주의 2대 황제인 세종도 곽위의 양자긴 한데 처조카였다. 후량의 건국자 주전충도 자기 친자식들이 있음에도 양자인 주우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하다가 친자식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3. 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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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후당 교체기(923년)의 지도[8][9] | 후주 건국기(951년)의 지도 |
오대 왕조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이들은 중앙의 정통왕조로 분류되는 다섯 왕조이며,[10] 이 다섯 왕조들의 흥망성쇠가 오대십국이라는 연대의 중추가 된다. 물론 "후"라는 이름은 전부 훗날 붙여진 것이다. 연대를 보면 알겠지만 2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하나도 없었고, 다섯 왕조를 모두 합쳐도 고작 53년밖에 가지 않았다. 단명왕조인 전국시대 통일 후의 진나라, 오호십육국시대에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과 후연, 또는 오호십육국을 처음으로 잠시 통일한 전진이나,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보다 더 짧다. 심지어 후한은 고작 4년이다. 단, 후한은 북한까지 합치면 오히려 오대 중 가장 오래 존속된 나라라고 볼 수도 있다.
이 5대 왕조는 내부적으로 하나같이 막장스러웠던 역사를 자랑한다.[11]
- 후량의 주전충은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과정이 굉장히 비윤리적이고 잔인했던 사람이었으며 사생활 면에서도 굉장히 음란하여 며느리랑 간통하던 인간으로, 결국 아들의 손에 처참히 죽었다.
- 후당의 이존욱은 전쟁 면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웠지만 결혼 한번 잘못해 막장 인성을 가진 황후를 만난 것과 지나친 음주가무, 그리고 어이없는 중과세 등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후진의 석경당은 왕이 되고 싶어서 적국의 황제인 야율아보기와 내통해 요충지를 통째로 바쳤고 요나라를 상국으로 떠 받들었다. 그렇다고 통치를 잘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 후한은 4년 만에 망해버려 최단명 정통왕조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 후주는 잘 가나 싶더니 세종이 죽자 그대로 무너졌다.
다섯 왕조의 국호를 보면 흥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양(梁)을 제외하면 그 이전의 메이저한 통일 정통 왕조의 이름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당 → 진 → 한 → 주) 그리고 후주의 뒤를 이어 탄생해서 통일 왕조를 수립한 송(宋)은 본래 상(은)나라의 후예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것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주나라가 상나라의 후손들을 위해 분봉해 준 땅이 송나라였다. 참고로 하나라 후손에게 분봉한 나라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기나라였다.
특이한 점이 있는데, 처음부터 서로 적국이었던 후량과 후당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시조가 전 왕조 시조의 측근이었다는 것이다.
- 후량의 시조 주전충은 하남군벌의 거두였다.
- 후당의 개조 이극용은 산서군벌의 거두였으며 후당의 2대 황제인 명종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아들로, 이존욱의 인척이자 장수였으면서 반란으로 황위를 획득한 인물이다.
-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그 이사원의 측근이자 사위였다.
- 후한을 세운 유지원은 그 석경당의 측근이었다.
- 후주를 세운 곽위는 또 유지원의 측근이었다.
- 아쉽게도(?)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곽위의 양아들인 시영의 측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국가가 난립한 듯 하면서도 연속성이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나라 한번 바뀌면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오호십육국시대와는 달리 이 당시 중원의 혼란기는 갈린 것은 황성과 국명뿐이고 나머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1인자가가 제거당하고 대신 2인자가 제위에 오른 것일 뿐. 위에서 언급한 풍도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아랫사람들과 정치 체제는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주전충 때 당나라 기득권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일이 있었고, 풍도가 '난세 처세술의 달인' 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그렇지, 이 시대의 관료나 백성들에게 있어 오대십국시대는 이전 시대처럼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 실세가 바뀌면 싹 갈려나가고 피바람이 부는 그런 시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후당 왕조 교체기쯤 되면 당나라 때의 명문가들이나 기득권들도 다시 어느 정도 존중을 받기도 했었고[12], 그 때 만들어진 관료조직이 왕조가 바뀌어가는 과정에서도 송나라가 건국될 때 까지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풍도가 특별히 처신을 잘 했다기 보다는 당시 세태가 왕조가 바뀌는 정도였지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는 것. 그러니 단명왕조의 연속이었던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생각보다는 안정적이었다.
이는 중화의 헤게모니 자체가 혈통이 다른 지도자로 바뀌면, 즉 역성혁명이 일어나면 나라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요구되었던 동아시아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이 자주 바뀐 것이지 유럽이었으면 단일 국가로 지속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로마 군인 황제 시대나, 카페에서 발루아, 부르봉으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왕위 교체 시기, 장미 전쟁 시기의 잉글랜드 같은 유럽의 왕위계승 혼란기와 거의 유사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왕조 하나가 10년 겨우겨우 넘겨가며 단명했던 이유도 역설적으로는 왕조가 바뀌어 봐야 손해보는 사람이 이전 왕조의 황제나 그 가문들 정도나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관료들이나 선비, 백성들의 경우는 왕조가 바뀌더라도 안정적으로 자기 안녕과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왕조가 바뀌는 데 저항할 필요가 없었으니 반발도 적었다. 주전충이 당 애종에게 선양이라는 형태로 황위를 넘겨받은 이후에는 왕조가 바뀌는 과정이 철저하게 힘과 힘의 대결로 이뤄졌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선양이라는 형식을 구태여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분이라는 게 덜 중요한 사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명분이라는 걸 구태여 따져가며 살던 시대보다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부분이 있었다는 게 동전의 양면같은 이 시대의 오묘한 부분이었다.
3.1. 후량
주전충이 세운 나라. 후량 항목 참고.3.2. 후당
이존욱이 세운 나라. 후당 항목을 참고.3.3. 후진
석경당이 세운 나라. 후진 항목 참고.3.4. 후한
유지원이 세운 나라. 후한 항목 참고.3.5. 후주
곽위가 세운 나라. 후주 항목 참고.4. 십국
십국(十國) | ||||
마초 (馬楚) |
오 (吳) |
오월 (吳越) |
전촉 (前蜀) |
민 (閩) |
남평 (南平) |
남한 (南漢) |
후촉 (後蜀) |
남당 (南唐) |
북한 (北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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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馬楚 | 남오 南吳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제3대 | 초대 | 제2대 | |
무목왕 | 형양왕 | 문소왕 | 무제 | 경제 | |
<rowcolor=#ece5b6> 제4대 | 제5대 | 제6대 | 제3대 | 제4대 | |
폐왕 | 공효왕 | 후주 | 선제 | 예제 | |
왕민 王閩 | 전촉 前蜀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초대 | |
무효제 | 사왕 | 명효제 | 홍효제 | 혜제 | |
<rowcolor=#ece5b6>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2대 | ||
대효제 | 주문진 | 공의왕 | 순정공 | ||
남한 南漢 | 북한 北漢 | 후촉 後蜀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초대 | 제2대 | 초대 | |
천황대제 | 상황제 | 신무제 | 효화제 | 명효제 | |
<rowcolor=#ece5b6> 제3대 | 제4대 | 제3대 | 제4대 | 제2대 | |
명효제 | 후주 | 소주 | 영무제 | 공효왕 | |
오월 吳越 | 남평 南平 | 남당 南唐 | |||
<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초대 | 제2대 | 초대 | |
무숙왕 | 문목왕 | 무신왕 | 문헌왕 | 고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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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왕 | 충손왕 | 정의왕 | 고보욱 | 선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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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왕 | 고계충 | 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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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년대 9국 병립도 |
여기에 오월처럼 외왕내제를 택하는 국가가 있었다. 오월의 군주는 다섯명인데 이 중에 처음 3대는 황제를 칭하고 묘호를 정했으며 아예 초대황제의 경우 능호까지 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오대의 제후국을 자처했다. 한편 남당처럼 황제를 칭했다가 제후국으로 쭈그러 앉은 경우도 있다. 밑에 나오지만 남당은 후주 세종 이후 후주-송에게 굽신거리는 국가로 전락했는데 이때 아예 국호까지 강남국으로 바꾸었다.
십국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는 당나라가 멸망하기도 전에 이미 건국된 초(楚, 897년 ~ 951년)와 오(吳, 904년 ~ 937년)와 오월(吳越, 904년 ~ 978년)이었다. 십국 중 가장 나중에 세워진 왕조는 오대 왕조 중 하나인 후한의 황족이 세운 북한으로 951년에 건국되었다. 이들은 멸망 시기도 제각각이어서 가장 빨리 망한 나라는 925년 후당에 병합당해 건국 18년 만에 망한 전촉(前蜀)이었고 가장 나중에 망한 나라는 979년에 망한 북한이었다. 북한을 제외한 대부분은 남방에 건국되었다.
이 중 오월은 지금의 저장성(절강성) 지역에서 존재했다. 존재 기간(75년)도 가장 길었고, 세수 인구수가 최대 55만에 달했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 고려와도 교역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남당이 망하고 송과 국경이 접하자 항복했다.
후기의 남당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 회수 이남의 초와 민을 멸망, 합병시키며 남방의 패자를 꿈꿨으나 후주 세종의 공격으로 많은 땅을 잃고 후주, 송에게 굽신대며 살아가는 소국으로 전락했고 송나라 하에서는 제후국으로 공을 자처했다. 그러다가 송태조의 공격으로 남당의 후주 이욱이 항복하면서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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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대 9국 병립도 |
▲950년대 8국 병립도 |
남방은 촉과 남당을 중심으로 문화와 시서가 발달했다. 촉에서는 화조화의 시조인 황전과 문필가 모문석, 구양형이 유명했고, 남당에서는 한희재 야연도를 그린 고광중, 화조화의 시조 서희, 하북 산수의 창시자인 형호, 강남(중국) 산수의 동원, 문필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서현, 문사 한희재 등이 있었다. 남당 후주(3대) 이욱은 송휘종과 함께 예술가 기질이 다분하나 그 때문에 나라를 망친 인물이지만, 능력만큼은 뒷시대인 송의 4대 문학가에 들어가는 인물. #
십국을 건국 시점을 기준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왕조의 국성(國姓)과 수도 소재지, 그리고 각 나라를 멸망시킨 국가도 함께 기술한다.
4.1. 초
- 초(楚, 897년 ~ 951년, 마씨(馬氏), 담주(湛州), 남당): 통칭 마초(馬楚). 위아래 지도 모두에 등장하지만 뒷지도 시기 직후(951년) 남당에게 멸망당한다.
4.2. 오
4.3. 오월
4.4. 전촉
- 전촉(前蜀, 907년 ~ 925년, 왕씨(王氏), 성도(成都), 후당): 통칭 왕촉(王蜀). 이 나라의 건국자의 이름은 왕건(王建)으로 고려 태조 왕건과 같은 이름이다.[14] 전촉 항목 참고.
4.5. 민
4.6. 남평(형남)
4.7. 남한
4.8. 후촉
4.9. 남당
4.10. 북한
5. 십국 이외의 국가 및 지방 세력
건국을 선언하지는 않았거나 후대에 정식 왕조로 인정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독립 세력을 유지했던 여러 절도사 세력들도 존재했다. 이런 세력들도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다 중앙 정권에 병합되었다.- 봉상 절도사( 기(岐), 901년 ~ 924년): 독립 국가를 형성하기는 했으나 십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황소의 난에 공을 세운 이무정이 관중 일대를 지배하면서 발전한 세력으로, 901년 당 소종을 자신의 근거지인 봉상으로 끌고와서 기왕의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훗날 후량을 세우게 되는 주전충과 전촉을 세우게 되는 왕건의 협공을 받아 당 소종은 주전충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이무정은 서안을 점령하여 자신의 나라를 진나라(秦)로 격상시키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패하고 기나라 또한 약소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후당을 세운 이존욱의 압력에 굴하여 이무정이 후당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15]
- 노룡 절도사( 연(燕), 911년 ~ 913년): 유연(劉燕), 걸연(桀燕)이라고도 하며, 십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본래 당의 하북 삼진 중 노룡 절도사에서 시작된 세력으로, 911년 유수광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스스로를 연왕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913년 뒷날 후당을 세우게 된 이존욱의 공격으로 멸망당하였다.
- 성덕 절도사( 조(趙), 907년 ~ 922년): 하북 삼진의 유력 절도사 세력으로, 절도사 왕용은 907년 후량을 세운 주전충에 의해 조왕으로 책봉받았다. 그러나 왕용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다가 양자인 장문예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장문예는 왕씨 일가를 모두 참살한다. 장문예는 다시 절도사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장처근이 성덕 절도사의 지위를 이어받은 922년에 이존욱의 공격으로 멸망당하였다.
- 천웅 절도사(위박 번진): 하북 삼진의 유력 절도사 세력으로 후량과 후당 사이에서 저울질 하다가 결국 이존욱에게 평정된다.[16] 참고로 위박 절도사 휘하의 근위군인 은창효절군은 이존욱 휘하의 장천은창군으로 재편되어 큰 활약을 하게 된다.
- 의무 절도사( 위(魏), 909년 ~ 929년): 하북 삼진의 유력 절도사 세력으로, 의무 절도사 왕처직이 909년 후량의 주전충으로부터 북평왕에 책봉되었다. 이후 양자인 왕도가 921년 왕위를 찬탈하였다. 929년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왕안구를 보내 북평을 쳐 근거지인 정주성을 깨뜨리자, 왕도는 가솔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하여 의무 절도사 세력은 소멸하였다.
- 무평 절도사( 초(楚)): 통칭 주초(周楚). 십국의 하나인 초나라의 호남성 일대에 위치한 절도사 세력으로, 초나라 멸망 이후 초의 5대 왕인 공효왕 마희악의 장수였던 주행봉이 남당 세력을 물리친 뒤 사실상의 독립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962년 주행봉 사후 세력을 이어받은 아들 주보권은 나이가 11살에 불과했고, 이 틈을 탄 휘하의 대장군 장문표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보권은 이에 송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송 태조 조광윤은 주보권을 돕는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결국 963년 무평 절도사 세력을 소멸시켰다.
- 청원 절도사: 십국의 하나인 민나라가 남당에 멸망한 이후, 현재의 복건성 일부 지역에 잔존한 절도사 세력. 송 태종 조광의에 의해 978년 패망하였다.
- 정해 절도사: 현재의 북베트남 일대에 해당한다. 쿡 트아 주(곡승유)가 906년 당나라에 의해 절도사로 추인되면서 형성된 세력. 쿡씨 정권은 3대까지 이어지다가 쿡 하오(곡호)에 뒤이어 쿡 트아 미(곡승미)에 이르러 930년 십국의 하나인 남한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러나 남한의 직접 지배는 1년에 불과했고, 이후 쿡씨의 부하였던 즈엉 딘 응에(양정예)가 931년 남한의 세력을 물리친 뒤 다시 정해 절도사를 칭했다. 그러나 6년 뒤인 937년 끼에우 꽁 띠엔(교공선)이 다시 즈엉 딘 응에를 죽이고 절도사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끼에우 꽁 띠엔은 이후 즈엉 딘 응에의 사위이자 부장이었던 응오 꾸옌(오권, 베트남 응오 왕조의 시조)의 공격을 받자 남한에 구원을 청했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살해당하였다. 이후 응오 꾸옌은 남한의 군대를 바익 당 강의 전투에서 크게 깨뜨린 뒤, 939년 국왕의 칭호를 사용하여 중국의 1,000년 베트남 통치를 끝내고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 정난 절도사( 하(夏)): 현 중국 영하자치구에 위치한 절도사 세력. 이들은 탕구트족 탁발씨의 세력으로 당말오대에 중앙조정에 신종하였다가 송초 송으로부터 독립한다. 서하의 전신.
-
귀의 절도사: 오늘날의 중국 감숙성에 위치한 이른바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한 세력. 오늘날의 둔황 지역을 근거로 하였다. 그 기원은 848년 한족 계통의
장의조가 본래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번 세력을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귀의군 절도사는 그 지리적 위치상 당시의 중국 영토와 떨어져 고립되어있었다. 심지어 서하의 전신인 정난 절도사보다도 더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육지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17] 이 때문에 송나라도 형식적으로 절도사 직함을 수여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종주권을 확인했을 뿐,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 행세했다.
지도상에서 붉은색선으로 표기된 영역으로 지리적 위치상 당시의 중국 영토와 떨어진 고립된 위치에 있었기에 형식상으로는 중국 중앙 정권에 복속된 절도사였으나 사실상의 독립 왕국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후 914년 조의금(曹議金)이 장승봉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아 조씨 가문이 절도사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지리적 위치 덕에 이들은 송이 건국되고 십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하의 공격을 받고 마지막 절도사인 조현순이 서하에 항복함으로써 1035년 소멸하였다.[18]
6. 영향
6.1. 중국
960년 후주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고, 979년 2대 황제 송태종이 72년간의 혼란기를 끝내고 천하통일을 완수한다.하지만 당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 북쪽에서는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워 만주와 몽골 고원을 장악한 뒤 후진의 석경당으로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아 송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서북쪽에서는 탕구트족이 서하를 건국하여 하서주랑 일대를 차지한 뒤 송나라의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거란, 여진, 서하, 몽골)들의 힘이 가장 강성한 시기로 접어들면서 한족 중심 중원 왕조인 송나라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19]
송나라는 특유의 문치주의 체제로 인해 군사력이 허약하였고 거란이 장악한 연운 16주로 인해 방어적인 이점도 살릴 수 없어 거란에 많은 세폐를 바쳐 평화를 유지해야만 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요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자 송은 금나라와 손을 잡아 요나라를 서쪽으로 내쫒았으나(서요) 곧바로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도피하여 남송을 세웠고 이후에는 몽골에게 서하, 서요, 금나라와 같이 멸망하였다.
6.2. 한반도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하던 남북국 시대가 종결되고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가 시작되었다.남쪽의 통일신라에서는 왕권이 약해지고 나라의 실권을 쥔 지배층인 진골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궁예가 후고구려를,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시대가 성립되었다. 이후 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신하들이 고구려계 호족들의 대표인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고, 왕건은 궁예를 축출한 뒤 고려를 건국하였다. 때마침 중국이 분열되어 혼란한 덕분에 삼국통일전쟁 때와는 다르게 후삼국시대의 통일은 외세의 개입 없이 고려의 주도 아래 진행될 수 있었다.[20] 또한 중원의 분열기 속에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여 새로운 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과거제도를 본격적으로 이식한 후주 출신의 쌍기나, 역시 광종 대 귀화한 채인범 등이 그러했다.
한편 북쪽의 발해 역시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말갈족의 이탈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틈타 발흥한 거란족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한민족의 주활동영역이 한반도로 고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오대십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거란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고려와 친선관계를 맺었고,[21] 고려는 이런 사정을 이용해 송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역으로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동북아의 세력균형 구도는 거란이 금나라에게 멸망하고, 북송이 금의 공격으로 남천한 다음, 이후 몽골에게 남송이 애산전투로 멸망하는 13세기 말까지 무려 4세기 가까이 이어졌다.
다만 고려 내부의 정치적 변동을 제어할 외부 구속력이 부재한 상황은 문벌귀족과 무신정권의 전횡을 연장시켜 고려 중앙정부를 아노미 상태로 이끌었고, 끝내 고려가 몽골제국 체제에 편입되어 그 독립성을 크게 침해당하자 결국 원간섭기 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졌다.
북방민족이 강성한 시기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좌절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고려가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크게 선전하기는 했으나 강동 6주를 회복한 것을 제외하면 영토를 회복한 성과는 적었고, 이후 공민왕의 동북면 및 요동 정벌 때까지 북진정책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6.3. 베트남
한편, 베트남에게는 독립이라는 좋은 기회의 시기였다. 그전까지 베트남 지역은 한무제가 정복한 이래 남북조시기 말에 잠시 전 리 왕조가 들어선 것 외엔 독자적인 정권이 들어서지 못했는데 중국 지역이 화북은 물론 강남까지도 갈갈이 쪼개진 상태가 되자 베트남이 독립해도 막을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중원의 혼란은 970년대에 가라앉았지만 이미 베트남은 응오 왕조를 지나 딘 왕조 말기 시리를 보내고 있었으며 이후 전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 시기에 매번 재정복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호 왕조가 들어선 혼란기에 잠깐 점령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레러이에 의해 다시 쫓겨난다. 이후에도 떠이선 왕조때 내정에 개입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주도권을 쥐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1]
사족으로, 학계는 대체로
한나라의 멸망으로부터 중국사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므로 위진남북조시대는 중국 중세에 포함된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중ㆍ고등학교 역사책에서는 당나라 시절까지를 고대로 본다.
[2]
원말명초,
명말청초 등 왕조 교체기는 있었지만 오대십국시대보다도 짧은 기간이었다. 가장 최근의 혼란기인 군벌시대도
청나라 멸망(1912년)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년)까지 37년인데다 그 사이에 나름대로 안정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기간에는 나름 군벌들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한
중화민국이 있으니 지방 통제력이 저하된 혼란기라고는 할 수 있지만 이 기간 전체가 완전한 분열기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애초에 근대 이전 왕조와 근대 이후 공화국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좀 부질없는 소리다. 이념 문제를 떠나 과학 발달 덕분인 점도 크다.
[3]
수나라와 진나라도 있지만, 존속 기간이 짧고 바로 대체 왕조가 나타났으니 그냥 진, 한 시대와 수, 당 시대로 보는 쪽이 적절할 것이다.
[4]
후진의 출제
석중귀를 사로잡고 개봉에 입성한
요태종이 군대의 약탈을 허용하여 지옥도가 벌어지자, 풍도는 요 태종을 부처에 비유하며 약탈과 학살을 멈춰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5]
다만 이종가가 전국 옥새를 가지고 현무루에 오르는 바람에 시황제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국 옥새가 소실되었다.
[6]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명.
[7]
보통 양자로 즉위하더라도 부계족보상으로는 같은 집안에서 들인다.
[8]
당나라 안남도호부였던
베트남 안남
응오 왕조(주황색 나라)가 포함되어있다. 남청색은 태원의 이극용의 영역
[9]
다만 지도에 오류가 있는 것이 한반도 전체가 신라 영역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기 당시 신라는 이미 후백제나 후고구려 등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한반도 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경상도 일대로 영토가 줄어든 뒤였다.
[10]
이유는 보면 알겠지만 오대의 첫 왕조인 후량부터가 당나라의 선양으로 건국되었으며 이후 오대를 거쳐 송나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1]
통치를 막장스럽게 했다기보다는 왕조의 안정성이 굉장히 취약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12]
이존욱이 제위에 오르겠다고 했을 때 이존욱의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장승업이 다시 당나라 황족을 왕위에 올려야 된다며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홧병으로 죽었던 일이 이 때의 분위기를 어느정도 짐작하게 해 준다. 분명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적인 분위기가 있기는 했다.
[13]
다만 오대의 왕조도 후량과 후당은 동시기에 존재하기도 했다.
[14]
이 나라의 왕건은 중국의 대표적 욕인 왕팔(王八)의 어원이 될 정도로 문제가 많은 폭군이었다.
[15]
그래도 순순히 항복해서 그런지 소원대로 진왕에 봉해졌다.
[16]
이 과정이 참 허무한데 자세한건
이존욱 문서 참조.
[17]
본래는 장의조가 돈황 일대를 비롯한 하서주랑과 하황을 수복하여 당에 바쳤지만 장의조 사후 하서주랑은 회흘에 넘어갔고 하황은 토번에 넘어가게 되었다.
[18]
이 당시의 일을 다룬 작품이 있는데, 바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이다.
[19]
이런 이유로 중원 왕조가 분열된 중원을 통일하거나 왕조교체기를 마무리하면 주변국을 제압하기 위해 원정을 가던 다른 시대와는 다르게 송나라는 주변국 원정은커녕 자국 방어에도 급급하게 되었다.
[20]
다만 그렇다고 후삼국이 외교에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다. 견훤의 후백제가 오대십국을 포함한 중원 국가들은 물론 거란, 일본 등 모든 주변국과의 외교에 적극적인 노선을 취했다면 왕건의 경우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부터 후당, 후진 등 중원 세력과의 외교에 전념했다. 신라 역시 후당에 조공하는 등 생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중원 세력들은 고려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신라를 박대하였다. 당초에 신라는 힘이 다 빠지고 구석에 박힌 신세라 어쩔 수 없긴 했다.
[21]
고려는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덕분에 거란은 고려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