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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7:15

마야 문명

멕시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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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문명
Civilización maya
Maya civilization
파일:external/news.yale.edu/YaleNews_161210453.jpg
파일:external/www.timemaps.com/centralamerica30bc.jpg
치첸 이트사의 피라미드와 마야 문명권의 판도
기원전 2000년[1] ~ 1697년
위치 메소아메리카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제정일치, 도시국가
국가 원수
주요 국왕 자소우 찬 카윌 1세[2]
유크눔 친 2세[3]
키니치 하나브 파칼[4]
언어 마야어
종교 마야 신화
주요 도시 엘 미라도르
티칼
칼라크물
팔렝케
코판
치첸 이트사
마야판
주요 사건 기원전 8000년 고졸기 시작[5]
기원전 2000년 선고전기 시작
250년 고전기 시작
950년 후고전기 시작
1697년 노흐페텐 함락[6]
멸망 이후 스페인 제국( 누에바에스파냐)

1. 개요2. 역사
2.1. 선고전기2.2. 고전기2.3. 후고전기2.4. 유적 발굴과 재조명
3. 신화4. 정치5. 사회6. 전쟁7. 경제8. 건축9. 예술10. 의복11. 식생활12. 문자13. 의학14. 기술15. 달력16. 쇠퇴와 멸망
16.1. 과거의 학설16.2. 현대의 정론
17. 인신공양과 식인풍습18. 주요 유적19. 매체20. 여담2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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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금의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멕시코 중부 ~ 중앙아메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후 17세기까지 약 3,800년에 걸쳐 번영을 누렸던 문명 및 문화권으로, 주요 영향권은 현재 멕시코 동남부의 5개 주( 치아파스 주, 타바스코 주, 캄페체 주, 유카탄 주, 킨타나 로오 주)에서부터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북부, 온두라스 서부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마야 문명의 역사는 크게 선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로 나뉘어진다. 대략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후 250년까지 이어진 선고전기에는 저지대의 대도시 엘 미라도르(El Mirador)를 중심으로 책력이 만들어지고 마야 문화의 기틀이 잡혔으며, 기원후 250년부터 9세기경까지 지속된 고전기에는 티칼 칼라크물 등의 패권국들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국가들이 어지럽게 난립하면서 고대 그리스처럼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과 동맹이 이어지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기에 티칼, 칼라크물 등을 비롯하여 팔렝케와 우슈말, 우아삭툰, 코판 등의 대도시들이 연달아 등장했고, 5,000명에서부터 100,000명에 이르렀던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피라미드와 사원, 석비들이 대규모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벌목과 농경지 개간, 기후 변화 등 복합적인 원인들이 겹치며 여러 도시국가들이 연달아 쇠퇴하여 결국 고전기도 끝나고 말았고, 이후 살아남은 유민들과 북부 지방의 일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후고전기가 시작되었다. 후고전기에는 치첸 이트사 마야판 등의 대도시가 등장해 마야 문명의 명맥을 이었으나, 고전기만큼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는 실패했다.

13세기때 최후의 대도시인 마야판이 멸망했고, 이후 중소 규모의 도시들만이 잠시 남아있다가 이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모두 쇠퇴했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한 1500년대에 이미 마야 문명은 거의 멸망한 상태였고, 1690년대에 마지막 마야 도시였던 노흐페텐(Nojpetén, 또는 타야살·Tayasal)이 스페인 군대에게 함락당하면서 마야 문명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마야인 마야어는 스페인과 멕시코의 지배를 거쳐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보통 현대인들이 남미 문명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글 속에 묻힌 고대 유적의 이미지가 바로 이 마야 문명의 것이다. 신비로운 이미지가 너무 강렬한 탓에 인근의 잉카 제국이나 아즈텍 제국과 헷갈리기도 하는데, 마야 문명이 유카탄 반도 일대의 정글이 주요 무대였던 것에 반해 잉카나 아즈텍은 정글보다는 건조한 사막, 고원 지대가 주요 활동 범위였다.

2. 역사

2.1. 선고전기

파일:El-Mirador-La-Danta-631.jpg
선고전기 마야의 중심도시인 엘 미라도르[7]
마야 문명의 달력은 정확히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에 만들어진다. 이때가 마야 문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문명 최초의 유적은 기원전 18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기원전 3114년은 메소아메리카 문명이 시작되기보다 1,000년 이상 전의 일이다.

현대 고고학계에 의하면 마야인들은 대략 기원전 2600년경에 현재의 벨리즈 지방에 처음 도달했다. 마야인들이 정착한 곳에서는 매년 5월에서 11월까지 비가 퍼부으면 개울과 강이 넘쳐 강변의 낮은 습지대와 호수에 물이 고였으나, 2월이 되면 물이 그쳤고 다음 우기까지 물이 점점 귀해졌다. 때문에 마야인들은 호수나 습지같은 수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작은 마을들을 세웠다.

극초기의 마야인들은 작은 밭을 가꾸고, 정글의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늪에서 먹을 것들을 채취하는 수렵채집 생활과 농경 생활을 병행했다고 한다. 마야의 농부들은 옥수수 호박, , 카사바 등 다양한 채소들을 실험적으로 정글에서 길렀고,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옥수수였기에 옥수수는 이후 마야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옥수수는 재배하기 까다로운 작물이었다. 가뭄이 들면 빨리 시들었고, 새순은 지속적이고 적당한 비가 필요했으며, 가루받이가 일어나는 짧은 기간 동안 또 약간의 빗물을 필요로 했다. 이는 몇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저지대에 살던 마야인들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고, 마야인들은 옥수수를 심는 시기를 건기가 끝나는 때에 잘 맞추어야만 제대로 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농경과 날씨에 관련된 지식이 중요해지자 처음에는 평등했던 마야 사회에도 변동이 일어났다. 농사에 가장 능하여 언제 어떻게 옥수수나 작물들을 심어야 할지 잘 알고 있던 자들이 새로운 권력층으로 떠올랐고, 새 엘리트 계급은 날씨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평민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지도자들은 비와 풍요를 불러온다는 구실로 거창한 제례를 위한 피라미드들과 사원들을 쌓을 것을 요구했으며, 실제로 이들의 말을 듣고 사원들을 쌓아 신에게 제물을 바친 뒤 사제들이 명령하는 시기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으니 풍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야인들은 이제 이 권력층들에게 실제로 무언가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들에게 거스릴 시에는 흉작과 가뭄, 기근이 올까 두려워 지배계급에게 복종했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마야의 저지대 대부분의 마을들에서 일어났고, 기원후 100년경에는 당시 마야 최대의 도시였던 엘 미라도르(El Mirador)가 등장하게 되었다.

엘 미라도르는 BCE 600년에 건설되어 BCE 300 ~ CE 100년경에 가장 번성했고, CE 300년 이후로 크게 쇠락해 900년경에 완전히 몰락했다. 최대 인구는 100,000명 정도였다. 마야 지방에는 엘 미라도르 외에도 타칼리크아바, 산바르톨로, 시발과 같은 도시들이 등장했고, 엘 미라도르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이 경쟁했던 이 시기를 마야의 선고전기(Preclassic period)라고 부른다. 당시 최고의 도시였던 엘 미라도르는 거대한 3중 피라미드와 천문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68m에 달하는 마야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건물인 단타 복합단지를 짓기도 했다.

기원후 1세기경에 엘 미라도르는 대략 로드아일랜드 정도의 왕국을 다스렸다.[8] 그러나 엘 미라도르와 다른 선고전기의 도시들은 이 같은 영광에 대해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엘 미라도르의 마야인들은 피라미드를 포함한 모든 건물에 두툼한 회반죽을 발랐는데, 회반죽을 만들기 위해 숯을 지핀 가마에서 대규모의 석회암 덩어리를 고온으로 가열했다.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량의 생나무가 필요했고, 사람들은 도시 인근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그러나 나무들이 사라지고 비가 내리면서 농사에 필수적인 부엽층이 모두 쓸려내려가 버리자, 결국 식량 공급이 멈추게 되었고 엘 미라도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고전기 도시들은 멸망했다. 300년경 엘 미라도르는 완벽하게 멸망했고, 한때 몇 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살던 대규모의 도시들은 정글 속에 뒤덮인 폐허가 되어버렸다.

2.2. 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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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lakmul.jpg
티칼 칼라크물
선고전기의 대도시들이 멸망하자, 그 뒤를 이어 마야 문명의 최전성기인 고전기가 도래했다. 고전기 초기에는 멕시코의 군국주의적 대도시였던 테오티우아칸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하나, 얼마 가지 않아 테오티우아칸이 망하면서 본격적인 마야인들의 시대가 왔다. 이미 선고전기 시절부터 번영의 조짐을 보이던 저지대의 도시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고전기의 대도시들을 능가하는 영광을 재현하면서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며 전쟁을 벌이고 무역을 하며 부를 쌓아나갔다.

당시 마야의 정세는 마치 고대 그리스와 유사했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최강대국으로 아테네 스파르타가 있었다면 마야에는 티칼 칼라크물이 있었다. 이 두 국가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동맹 도시들을 규합했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마야 세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고전기 마야 시대의 주요 대도시들에는 앞서 언급한 티칼과 칼라크물을 포함해 우슈마신타 강 인근의 팔렝케, 최남단에 자리한 코판, 페텐 분지의 우아삭툰 등이 있었으며, 대략 40여 개 정도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몇 백여 개의 소규모 도시들과 촌락들이 점점히 흩어져 서로를 견제하거나 협력하는 구조였다.[9]

그렇게 티칼과 칼라크물 간의 팽팽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던 중인 562년, 전투적인 강대국이었던 칼라크물이 인근의 도시국가인 카라콜의 힘을 빌려 티칼의 와크 찬 카윌 왕을 꺾어버리는 데 성공했고, 티칼을 약탈한 다음 포로로 잡은 왕을 처형해버리면서 티칼에 암흑기가 닥쳤다. 티칼은 이 시기 말그대로 근근히 연명만 하는 상태로 국력이 바닥을 달렸고, 반대로 승자가 된 칼라크물은 마야 세계의 유일한 패권국으로서 화려한 번영을 누렸다. 티칼의 암흑기는 6세기부터 7세기까지 계속되었고, 티칼 유적에는 이 시기에 지어진 대규모의 건축물이 단 하나도 없다. 마야 세계의 정치적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중대한 사건이었기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고전기의 초기와 후기를 구분하고, 특별히 티칼 히아투스(Tikal Hiatu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티칼은 600년대 초까지 계속 위축된 모습을 보여주다가 682년에 자소우 찬 카윌 1세 대왕이 즉위하고 그가 숙적인 칼라크물을 공격해 함락하는 데 성공하면서 무려 120여 년만에 암흑기를 끝내고 티칼을 부활시켰다. 티칼은 칼라크물의 몰락 이후 그때까지 칼라크물이 지니고 있었던 패권국의 위치를 빼앗아 마야 세계의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으며, 이번에는 반대로 칼라크물의 권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10] 68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2번째로 오래 재위한 군주인 키니치 하나브 파칼 역시 이 고전기 도시국가들 중 하나였던 팔렝케의 국왕이었다.[11]

그러나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서 티칼을 포함한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졌는데, 8세기 경부터 일어난 소빙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식량 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인구가 급감했고, 지속적인 내전과 환경 파괴, 가뭄 등 복합적인 원인들이 두루 겹치면서 대부분의 도시들이 한꺼번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마야 문명의 중심이었던 남부 저지대 지방의 대도시들을 버리고 떠나는 유민들이 대거 발생했으며, 이 유민들은 대부분 아직 제대로 된 도시들이 남아 있었던 북부 지방으로 향했다. 때문에 한때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티칼이나 코판, 도스 필라스 등의 도시들은 버려진 채로 정글의 어둠 속에 묻혔고, 왕성했던 무역은 끊겼으며 모든 것이 잊혀졌다.

본격적인 붕괴의 모습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예시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칸쿠엔의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8세기 중반 칸쿠엔은 주변 국가와 혼인 동맹과 같은 방식으로 우호를 끌어낸 타지 찬 아크(Taj Chan Ahk)의 치세 아래 마야 세계의 중심 도시로 떠오르는데, 770년경에 지어진 마야 최대의 궁전 유적지[12]가 바로 그의 치세때 지어졌다. 문제는 그의 사후에 발생했다. 그의 후계를 이은 칸 마악스(Kan Maax)는 권력의 중심지가 된 칸쿠엔을 노리는 주변국들의 분란에 휘말려 죽었고, 칸쿠엔은 이후 후계자를 내지 못한 채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교역의 핵이었던 칸쿠엔이 붕괴하고 각국이 서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무역 구조가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고질적인 전쟁에다가 기아와 가뭄, 심각한 벌채로 인해 무너진 식량 공급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고전기 마야가 빠르게 쇠퇴한 것이다.

2.3. 후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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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0.-Mayapan.jpg
후고전기 초기 마야의 중심 치첸 이트사 마야 최후의 대도시 마야판
대략 3세기부터 9세기까지 600여 년에 걸쳐 마야 문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고전기의 도시들이 모조리 몰락하고 난 뒤, 그나마 북쪽으로 피난간 난민들과 아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일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문명의 명맥을 이어갔으니 이 시기를 후고전기(Postclassic period)라고 부른다. 후고전기는 대략 10세기부터 15세기, 넓게보면 16세기 초까지 이어졌으며, 선고전기에는 엘 미라도르가, 고전기에는 티칼과 칼라크물이 마야 세계의 패권을 쥐고 흔들었다면 후고전기에는 치첸 이트사가 마야 문명의 주도권을 잡았다. 치첸 이트사는 7세기 즈음에 처음으로 등장해서 인근의 코바약수나 등의 도시들을 정복하며 세력을 불렸고, 마야의 북부 저지대 지역을 통합하면서 나름의 헤게모니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치첸 이트사 역시 13세기 경에 인근의 대도시인 마야판에게 정복당해 약탈당한 뒤 사람들에게 버려지고야 말았다. 마야판은 치첸 이트사의 왕족들을 포로로 잡아 참수하거나 구덩이에 던져 버렸으며, 이후 치첸 이트사는 완전히 기억 속에서 잊힌 채로 정글의 두터운 나무들에게 잡아먹혔다. 한편 치첸 이트사를 꺾고 새로운 후고전기의 패자로 등극한 마야판은 한때 치첸 이트사의 속국이었으나 1221년 즈음에 치첸 이트사의 왕과 귀족들의 학정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 세운 도시국가로, 치첸 이트사를 무너뜨린 후 온두라스 벨리즈 지방의 북부 유카탄 반도의 대부분 지역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마야 문명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마야판의 통치는 1440년대까지 쭉 이어졌으나 1441년에 한 대귀족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마야판을 약탈하고 불지른 채로 방치했고, 이후 마야 문명의 최후의 대도시였던 마야판마저 이렇게 몰락하면서 마야의 대도시들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마야판의 멸망 이후 마야 문명권에서는 이를 능가하는 도시들이 단 하나도 등장하지 못했으며, 소규모의 도시들이 서로 소모적인 전쟁을 벌이는 분열된 상태로 전락했다.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멸망하면서 마야 문명은 1500년 경에는 이미 대부분의 사회구조나 도시들이 붕괴해버린 상태였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1500년대에 유카탄 반도로 진입해 들어왔을 때, 마야 문명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폐허나 유적들마저 빠른 속도로 정글과 초목에 침식당하면서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소도시이자 마야인들의 최후의 보루였던 도시 노흐페텐이 1697년에 스페인 제국 군대에게 함락당하면서 마야 문명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스페인인들이 침략했을 때까지도 마야 문명의 기록은 상당수가 남아있었고 마야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당시의 일부 스페인 학자들은 마야 문자와 그 발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수도 얼마 되지 않았던 마야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싸우다가 많은 숫자가 죽었고, 남은 인구의 상당수도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희생되면서 마야 문자를 읽는 법 등은 완전히 잊히게 되었다. 또한 마야의 기록 대부분도 스페인 선교사들이 불태우고 말았고, 지금 남아있는 마야의 책은 다 합쳐봐야 겨우 4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현대 마야어는 고대 마야어와는 달리 로마자를 이용해서 표기한다.

2.4. 유적 발굴과 재조명

파일:Hubert_Sattler_Der_Tempel_von_Tulum_in_Yukatan.jpg
파일:Catherwood_Palenque_Palace_Courtyar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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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유적들은 스페인인들이 도착하기 이전에도 이미 대부분이 정글 속에 파묻혀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소규모 도시 몇몇 개가 버티고 있었고 일부 부족들이 옛 폐허에 빌붙어서 살아가다시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모든 마야 유적들을 우상숭배의 잔재로 보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마야 문명에 대해 학술적으로 재조명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야 문명을 이해하려 시도한 유럽인은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13]였다.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였던 란다는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야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마야어와 마야인들의 문화,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란다가 마야 문화에 대해 남긴 기록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오늘날 우리가 마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99%는 란다가 말했거나 우리를 위해 남겨놓은 것들'이라는 말까지도 있다. 하지만 란다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란다는 기본적으로 마야 문명이 야만적이고 퇴치해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기에 무려 5,000여 점의 마야 유물과 몇 십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불태워버렸고, 수많은 마야 귀족들과 마야인들을 과도할 정도로 투옥하고 심문했다. 오죽했으면 스페인 본국에서도 원주민들에 대한 심문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냐고 항의했을 정도.[14] 이때 란다가 지나치게 많은 유물과 기록들을 불태워버린 바람에 오히려 후대인들의 마야 문명에 대한 연구가 더 어려워졌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위의 내용만 보고 란다를 무지한 인물이라고만 내려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 마야 문명은 인신공양과 지나치게 잔인한 예식 문화를 동반하는 문명이었는데,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이는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란다는 마야 문명권에서 인신공양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아 곳곳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쿠풀레스를 통과하는 도중 300명 정도의 마을에서 어린 소년을 산 제물로 바치려는 꼴을 보고 격노해 군중 속으로 돌진해 소년을 풀어주고 설교를 하기도 했다. 란다는 진심으로 원주민들이 개종해 신의 곁에서 구원받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원주민들과 익숙해지려 노력했다.[15] 하지만 란다는 편집증적일 정도로 '본인이 보기에 안좋은' 마야 문화를 없애는 데에 집착했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심할 정도로 학대하고 밀어붙였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16] 즉 란다는 한 쪽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복잡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 본국에서도 독특한 마야 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물론 학술적인 목적은 절대 아니었고 유물 수집같은 고상한 취미를 가진 이들의 관심일 뿐이었긴 했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던 펠리페 2세는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팔라시오'에게 자신의 영토에 대해 자세한 조사를 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1576년 과테말라 지방을 탐험한 디에고 가르시아는 코판 유적을 발견한 뒤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스페인으로 보냈다. 이 보고서에서는 '손으로 만든 놀라운 건물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앞에는 돌에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그에 적혀진 문자는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등 당시 유적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마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유적에 대한 약탈로 이어지기도 했다. 샤를 3세가 파견한 안토니오 델 리오 대위는 1786년 5월 팔렝케 유적에 도착해 건물들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왕의 취향에 맞을 법한 유물들을 싸그리 털어갔다. 잘 보존되어 있던 옥좌를 절단해 떼어가는가 하면 곳곳의 석회부조도 통째로 스페인으로 실어보내면서 유적 곳곳에는 흉물스런 구멍들이 뚫렸다.[17]

1500년대 이후 마야 문명에 대한 관심을 그저 이색적인 취향 정도에 그쳤으며 약 300년 간 제대로 연구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등장한 인물이 '장 프레데릭 발덱(Jean Frédéric Waldeck)'이었다. 발덱은 프랑스의 골동품 수집가이자 지도 제작자, 예술가, 탐험가였다. 1825년 영국의 한 광산 회사에 고용되어 남미로 떠났지만 얼마 못가 잘렸고, 해고된 이후에는 메소아메리카 지방의 유적들에 매료되어 폐허 속에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발덱은 1800년대 중후반에 걸쳐 욱스말, 팔렝케 등 수많은 유적들을 그려 책을 출판했는데, 정글 속 아름다운 폐허의 모습이 한창 낭만주의 바람이 불던 유럽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만 발덱의 그림은 은연 중에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풍이 섞여있었고[18] 이때문에 마야 문명이 옛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갈라져 나온 아류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베일에 싸여있던 마야 문명의 모습을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큼은 분명 업적이라 할 만하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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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와 캐서우드의 삽화.[20]
발덱의 뒤를 이어 마야 문명의 신비로움을 유럽 세계에 소개한 또다른 인물 중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프레데릭 캐서우드'가 있다. 둘은 1839년 남미의 유적들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유카탄 일대로 건너왔고, 이후 1840년대 초반에 걸쳐서 수많은 마야 유적들을 탐험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스티븐스와 캐서우드는 의기투합해 3년 동안 열심히 정글 속을 헤멨다. 온두라스 코판 유적에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그려냈으며, 이후 퀴리구아, 팔렝케, 욱스말 등을 방문해 아름다운 스케치를 그렸다. 모험을 끝낸 뒤 뉴욕으로 돌아온 스티븐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출판해 대박을 쳤고, 이후에 캐서우드와 한번 더 남미 여행을 떠나 또다른 유적 스케치들을 남겼다. 이 스케치들을 또 2권의 책으로 나누어 출판했는데 이 역시 대박을 쳤다. 스티븐스와 캐서우드는 발덱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인들이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을 부정했고, 이는 마야 문명권과 구세계 간의 연관성에만 주목하던 마야학의 흐름을 바꾸는 이정표가 된다.[21]
아침이 되어도 숲을 뒤덮고 있던 구름은 걷힐 줄 몰랐다. 태양이 떠오를 쯤이 되어서야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일꾼도 하나둘씩 나타났다. 9시가 되자 우리는 막사를 떠났다. 나뭇가지들은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땅은 질퍽한 진창투성이였다. 우리의 행진은 힘겨웠다. 주요한 유적들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을 다시 한번 지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방대한 작업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즉각 완벽한 탐사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안내자는 이 구역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을에서 1리그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기둥을 본 적이 있으므로 다른 방향으로도 유적들이 분산되어 있을 거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잇었다. 숲 속에 완전히 파묻혀서 이제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미지의 유적들이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숲은 너무도 빽빽해서 그곳을 통과하리라는 꿈을 애당초 꾸지 않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정말로 세심하게 탐사를 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나무를 모두 베어 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무작정 그 일에 매달릴 수도 없거니와 그 일은 건기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략)

격렬한 토론을 거친 후에 우리는 '우상들' 중 하나를 선택했으며, 주위의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이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우리는 도끼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디오들이 갖고 있는 도구라고는 농경용 큰 칼이나 커다란 외날 단검이 전부였다. 그 도구들은 지방에 따라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갈아서 만든 물건인지라 나뭇가지나 관목을 치기에나 적당하지 큰 나무를 베기에는 무리였다. 인디오들은 열성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이내 피곤하다며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겨주고는 앉아서 쉬곤 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지켜보는 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칼을 들고 일을 하는 인디오들을 바라보면서 초조감을 억누를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쉽게 일을 해나갔다. 마침내 우리의 장애물이 없어지자 우상 주변이 환해졌다. 캐서우드는 그 곳에 작업대를 설치한 뒤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 유적에 대해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차마 형언할 수 없으리라. 이곳은 전혀 오염이 되지 않은 곳이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안내자도 없는 순결한 땅인 것이다. 우리는 약 9m 앞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발밑에 무엇이 잠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면을 뒤덮고 있던 나뭇가지와 넝쿨을 걷어 내자 조각의 한귀퉁이가 지면 위로 삐쭉 솟아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인디오들이 일을 하는 동안 초조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들여다보았다. 눈 하나, 귀 하나, 손, 그리고 다리 하나가 보였다. 그 순간 그들의 칼과 무엇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인디오들을 밀어 제치고 손으로 땅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미를 한껏 발산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조각품 - 재잘거리는 앵무새들과 바스락거리는 원숭이만이 장중한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 - 이 도시에 맴돌고 있는 비애와 신비.... 이 모든 것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흥분감을 느끼게 했다.

- 스티븐스의 티칼 탐험 회고록.
19세기 중반 들어 사진기라는 발명품이 등장하면서 마야학의 판도가 뒤바뀐다. 예전에는 그림에만 의존해야 했다면 이제는 사진기로 정확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사진술은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이라,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정글 속을 헤쳐나가야 했으며 습기 많은 열대 지방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것도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이 모든 역경을 뚫고 마야 유적들을 찍고자 한 이가 바로 '데지레 샤르나이'였다. 샤르나이는 밀타, 팔렝케, 이사말, 욱스말, 치첸 이트사 등 유적들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아냈고, 장비 이상으로 사진을 찍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아예 신문지를 활용해 유적들을 통째로 주형을 떠가기까지 했다. 이때 샤르나이와 함께 동행했던 젊은 영국인 탐험가 '알프레드 모슬레이'는 샤르나이로부터 전수받은 사진술과 주형술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실물을 완벽히 재현했다'라는 찬사를 받았다.[22]

1900년대에는 마야학의 판도를 완전히 뒤짚어엎은 2개의 발견이 일어났다. 첫째는 보남팍의 벽화 발견이었다. 사진작가 질르 힐리는 평소 원주민인 라칸돈족에게 구호품, 식량, 약품 등을 가져다주며 우호를 쌓은 인물이었는데, 라칸돈족은 그 보답으로 힐리에게 여러 유적들을 소개시켜주곤 했다. 1946년 5월의 어느 날에는 한 라칸돈족 친구가 이전보다 훨씬 거대한 유적으로 안내해주었는데, 이 유적의 내부에는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벽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눈을 의심할만큼 생생히 보존된 벽화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의 소실되었다고 알려졌던 마야의 회화가 뜻하지 않게 완벽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보남팍 벽화는 다른 쪽으로도 의의가 깊다. 바로 마야 문명의 잔혹성을 가감없이 드러낸 사건이라는 것이다. 보남팍 벽화가 발견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마야 문명을 '별을 관측하는 신관들이 지배하는 평화로운 문명'이라는 신비주의적 환상에 빠져 있었다. 허나 보남팍 벽화에서 목이 잘리고 손톱이 뽑힌 포로들의 모습,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마야인들의 모습이 등장하며 마야 문명이 평화로웠다는 기존의 학설을 정면으로 부정해버리고 기존의 환상을 와장창 깨뜨려버리게 된다.[23]

두 번째 발견은 파칼 왕의 무덤 발견이다. 1949년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루스의 주재 하에 팔렝케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문의 신전 바닥 안쪽에 있던 2개의 홈을 발견한다. 신전 벽면이 바닥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아래쪽까지 내려가는 걸 수상히 여긴 루스는 신전에 깔린 석판을 들어내고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흙과 자갈을 걷어내자 계단과 아래로 내려가는 아치형 통로가 나왔고, 이를 지나자 또 복도와 석벽이 수 차례 등장하며 꾸불꾸불 지하로 내려갔다. 무려 3년 간의 작업 끝에 루스는 거대한 석회암 석실에 도달했다. 석실 안에는 거대한 석조 무덤이 자리해 있었으며 10명의 인물상이 그려진 석판을 6명의 인물상이 받치고 있었다. 기중기로 석관의 뚜껑을 들어내자 안에 병 모양의 틀이 있었고, 이 틀의 뚜껑마자 치우자 마침내 파칼 왕의 유해와 비취로 깎은 데스마스크가 보였다. 유해는 온통 비취 부장품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왕관, 펜덴트, 목걸이, 가슴가리개, 팔찌, 반지 등 모든 것이 비취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마야의 피라미드 역시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왕의 무덤으로 쓰였다는 게 증명된다. 예전에는 마야 피라미드들이 달력과 제례를 위한 일종의 기념물이라고만 생각했다면, 이 발견으로 인해 마야 역시 왕의 묘를 목적으로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24]

마야에서 썼던 문자는 건물과 조각을 비롯하여 곳곳에 남아 있어 해독되고 있다. 문자 자체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수십 개의 도시 연합에 가까웠던 마야의 특성상, 언어 또한 수십 개에 달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수십 개의 도시 연합 중에 통치자의 이름이 남아있는 국가는 코판(Copán), 칼라크물(Calakmul), 믹스코 비에호(Mixco Viejo), 모툴 데 산 호세(Motul de San José), 팔렝케(Palenque), 키리과(Quiriguá), 세이발(Seibal), 티칼(Tikal) 등이다.

2018년 2월, 과테말라 정글속에서 LIDAR 기술을 이용해 무려 60,000개 이상의 건축물이 있는 상주 인구 200,000명 규모의 거대 유적 도시가 발견됨에 따라 그동안 학자들이 믿고 있었던 마야 문명의 모든 기본적인 규모나 역사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고된다.

3.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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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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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문명은 굉장히 계급중심적인 사회였고, 국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들 사이의 구분이 확실했다. 국왕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재자로 숭배받으며 호화의 극치를 누렸던 반면, 평민들은 각종 노역이나 전쟁에 일상다반사로 동원되면서 고달픈 삶을 살았다. 왕위는 아들에게만 물려주었고,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바아 촉(bʼaah chʼok)으로 불렀으며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그냥 (chʼok)이라고 불렀다.[25]

왕위 후계자는 당연히 국왕의 적통이어야 했으며, 어린 나이에 미리 전쟁에 나가 군사적 재능을 보이는 자여야만 했다. 국왕은 화려한 활과 도끼, 온갖 깃털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권위를 내세웠으며, 재규어 가죽이 깔린 왕좌에 앉아 도시를 다스렸다. 한편 국왕 밑에 있는 귀족들은 세습으로 재산과 관직을 물려주었으며, 마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고위직들은 귀족들이 독차지했다. 귀족들은 도시보다도 자기 가문에 대한 애착이 더 깊었고, 이때문에 정치판에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참고로 마야 문명의 도시들에는 딱히 정해진 정치 구조는 없었고, 대부분 군주정이나 과두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야 문명의 최전성기였던 고전기에는 국왕을 아하우(Ajaw)[26]라고 불렀으며, 굳이 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최고 지도자에게 붙이는 칭호라서 과두정을 채택한 곳이라면 한 도시에 여러 명의 아하우들이 있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이중에도 역시 인간의 과시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는지, 아하우들 중에서도 가장 급이 높은 아하우는 칭호 앞에 쿠훌(k'uhul)을 붙여서 스스로를 쿠훌 아하우라고 불렀다. 마야의 왕들 중에 일대에서 가장 강력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세운 쿠훌 아하우는 카롬테(Kalomte)라고 따로 구분해서 불렀는데, 굳이 우리식으로 번역하자면 ' 대왕'이나 ' 황제' 정도에 걸맞은 지고의 호칭이었다. 다만 '카롬테'라고 불렸던 지도자들이 등장했던 시기는 오직 고전기 한정으로, 이전의 선고전기에는 없었고, 후대의 후고전기에는 마야 문명의 세력이 이전 고전기때보다 약해져서 카롬테나 쿠훌 아하우들이 등장하지 않았으며, 설사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예전만큼의 권위는 전혀 갖지 못했다.

사할(sajal)은 아하우 아래의 칭호로, 귀족 직위의 공작 정도에 대응된다. 따라서 '카롬테' - '쿠훌 아하우' - '아하우' - '사할' 순서로 위계가 높았던 것이다. 사할은 무조건적으로 주군인 아하우에게 복종해야 했으며, 전쟁 사령관이나 지역 군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마야의 기록에는 사할을 전쟁과 결부시키는 경우가 높기에, 실제로 전쟁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은 사할이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할'이라는 단어는 마야어로 '두려운 자'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마야 귀족 사회에는 아 티즈입(ah tz'ihb)과 아 출 훈(ah ch'ul hun)이라는 직위도 있었다. '아 티즈입'은 왕실 서기였으며, 무조건 왕족들만 임명될 수 있었다. '아 출 훈'은 고대 기록들을 보관하고 공부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로, 아하우와 거의 비슷한 직위였다.

신관들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로서 거의 왕족, 귀족 계급 = 신관 계급과 마찬가지였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신관들은 아하우 칸 마이, 혹은 아 킨 마이라고 불렀다. 역시나 세습 제도였고 주로 부계 계승, 아니면 가까운 친척들이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하우 칸 마이'의 주요 업무는 제사, 왕에 대한 조언, 책을 쓰고 달력을 기록•전수하며 전통을 후대에 전승하는 것이었다. 신관이 곧 조언자와 학자의 역할을 겸했던 것이다. 마을의 지역 사제들은 '신성한 자'라는 뜻의 아 킨이라고 했다. 달력의 날짜를 잘 보고 마을 축제를 주관하거나 지역 질서를 유지하는 게 주 업무였다. 아 킨은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였기에 이라고 불리는 4명의 나이든 원로들이 보좌했다. 인신공양을 직접 행하는 신관은 나콤이라고 해서 따로 있었는데 이들의 지위는 의외로 높지 못했다. 예언을 하는 신관들은 칠란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특별하다고 여겨져서 지위가 매우 높았다.[27]

현재 무슨 일을 했는지 딱히 알려지지 않은 직위들에는 야하우 칵(yajaw k'ah'k), 티훈(ti'huun), 티 삭훈(ti'sackhuun) 등이 있다. 마지막 2개의 칭호는 아마도 왕의 대변인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왕실 직위들은 압도적으로 남성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으며, 여성이 이 직위를 획득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몇몇 여성이 칭호를 획득한 경우도 대부분 고위 왕실 일원인 경우밖에 없었다. 라캄(lakam)은 위에 나온 직위들과는 다르게, 평민들도 얻을 수 있는 직위였는데, 아마도 지방에서 세금을 걷어 올리는 세리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민들은 거의 도시의 90%에 달하는 인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그들의 주택과 가옥들은 대부분 썩기 쉬운 나무와 짚 등으로 지어져 있었기에 현재 그들과 관련된 유물들조차 많이 찾아보기 어렵다. 몇몇 평민들은 도시 내부의 낮은 지대에 겨우 집을 짓고 살았고, 고고학자들은 레이저 등을 사용해서 이들의 집구조와 생활 방식을 간접적으로 유추하는 방식으로만 겨우겨우 평민들의 삶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중에 도시 내부에 멀쩡한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던 평민들은 극소수였고,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평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별로 없다.

참고로 당시 마야 평민들의 구성 요소는 다양했다. 극도로 가난한 농부에서 부유한 상인들, 장인들, 몰락한 옛 귀족들까지 이 범위에 들어갔고, 이나 카카오 등을 재배하면서 지배계급을 위해 죽을때까지 일했다. 평민층은 식량 생산, 공예품 제조, 도자기 등 모든 물건들을 생산했으며, 전쟁에도 일반 병사로 참여했다. 참고로 평민일지라도 전쟁에서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 출세도 가능했다.[28] 주로 옥수수 가루나 식량, 사치품 등을 귀족에게 세금을 바쳤다.

5. 사회

마야 문명의 어린이들은 여타 문명권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양육했으며 약 15세 정도가 되면 독립적인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보통 영유아 시기에는 어머니가 아이들을 기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일정 나이가 지나가면 여자아이는 어머니가,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길렀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바느질, 재봉술, 요리와 같은 가정일을 가르쳤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냥이나 농사 등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물려받았으니 대개 아버지의 직업을 그대로 아들이 승계하는게 보편적이었고 전투에 특별히 능하거나 재능이 있지 않은 한 대대로 직업을 물려주며 살았다.

마야 문명에서는 독특하게도 사팔뜨기일수록 미인으로 취급받았다. 물론 완전 짝짝이인 사팔뜨기눈을 미인으로 취급했다는 건 아니고 적당히 얕게 사팔뜨기인 눈을 아름답게 보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마야인들은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사팔뜨기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어린 아이의 눈 앞에 조그만 물체를 매달아놓아 물체가 계속 눈 앞에서 대롱거리게 해놓는 방법이 있었다. 이걸 오래 하면 자연스럽게 영구적인 사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마가 평평할 수록 신성한 대접을 받아서 귀족 가문에서는 일부러 두개골이 유연한 영유아 시기에 이마 위에 무거운 물체를 올려놓아 머리를 기형적일 정도로 평평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29] 사실 이러한 편두 풍습은 마야 문명권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있었다.

마야 사회는 혹독할 정도로 계층적인 사회였던지라 10%의 귀족층들을 떠받치기 위해 나머지 90%의 농민과 노예 계급들이 뼈빠지게 일해야만 하는 구조였다. 각 도시의 왕과 귀족들은 제례 의식을 담당하며 호화로운 궁전에서 풍요롭게 놀고 먹었던 반면 농민과 노예들은 죽을 때까지 경작에 목매거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병사로 끌려나가야만 했다. 당시 마야 사회의 빈부격차는 지금까지 발견된 마야인들의 유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야의 신전이나 궁전 유적 아래에서 발견된 귀족층들의 유골 치아에서는 수없이 많은 충치들이 발견되는 것에 대비되게 그냥 땅에 대충 묻힌 유골들에서는 충치를 그만큼 많이 발견하기 어렵다. 단 걸 많이 먹고 풍족한 식생활을 누릴수록 충치가 발생할 확률이 높으므로 당시 마야 사회의 분배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

마야인들은 보통 핵가족 대가족 형태를 적당히 섞어놓은 모습으로 살았다. 한 집에 부모와 자식 이렇게 2세대만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 주위에 수많은 혈족들이 서로 다른 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 집의 가장인 아버지가 사냥을 떠나거나 농사를 지으러 나가면 어머니와 딸, 어린 자식들이 집에서 가축들을 기르거나 먹을 거리를 채집하면서 살았다. 당시 마야 서민들의 가옥은 원룸 형식으로 내부에 방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고 부엌이나 침실 등이 따로 나누어지진 않았다. 가족들 모두가 땅바닥에 깔개를 깔고 그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잤으며 문쪽에는 차양을 드리워 문을 대신했다. 흙과 지푸라기로 지은 초라한 집에 장식은 별로 없었지만 외벽에 석회를 덧칠해 하얗게 보이는 효과를 주기도 했다.

사람이 죽으면 입에 옥수수를 물리고 그 안에 작은 옥 구슬을 넣었다. 옥수수는 사후세계로 떠날 죽은 자를 위한 음식이었고 옥 구슬은 그 여정에 쓸 화폐였다. 옥수수대와 옥을 함께 매장하면 고인이 옥수수신의 길을 따라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왕이나 왕비 등 최고위 계급들은 몸에 붉은 진사 가루를 뿌린 뒤 여러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다. 종종 조개 껍데기같은 바다에서 난 물건들도 함께 묻혔는데, 이는 옥수수신이 바닷속 깊은 곳, 혹은 깊은 동굴 속에서 걸어나왔다는 전설을 재현한다는 의미였다. 무덤이 닫히면 인간의 영혼을 승화시킨다는 뜻으로 그 위에 불을 붙였다. 종종 고인이 사후세계 '시발바'로 가는 길을 쉽게 찾도록 돌을 신이나 동물 모양으로 깎은 호루라기를 함께 묻었다.

고인의 장례 절차도 나름 복잡해서 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친척과 지인들은 금식을 하고 부조를 바쳤다. 시체 주변에서 철야로 장례식을 치렀고 조상들에게 고인을 지켜달라는 뜻으로 향을 피웠다. 장로와 신관들은 시체를 깨끗이 씻고 정갈히 옷을 입혔다.[30] 옷을 입힌 시체를 들어올려 신전으로 옮겼고, 그 과정에서 고인의 영혼이 지상계를 떠나라고 땅을 쿵쿵 쳤다. 신전에서 신관들은 시체를 여러 차례 회전시켜 영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리도록, 그래서 미련 없이 사후로 떠나도록 했다. 시체가 묻히면 고인의 집을 버렸다. 고인의 영혼은 사후세계를 여행한 뒤 9일 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 9일 동안 잠을 잔다고 믿어서 최소 18일 동안은 절대로 버려진 집에 들어가면 안되었다. 마야인들은 이 기간 안에 집 내부에 들어가면 분노한 영혼에 의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6.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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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남팍의 전쟁 벽화와 마야 전사들의 복원 추정도
마야 사회는 언제나 전쟁을 벌일 태세가 되어 있는 사회였다. 전쟁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고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웠다. 마야 문명의 수많은 도시국가들끼리 농토와 물, 자원과 노예 따위를 두고 쉬지 않고 싸워댔던 것이다. 선고전기 이래 대도시들이 등장하면서 전쟁은 더욱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과 전투는 도시간 전면전이라기보다는 국지전에 더 가까웠으며, 전쟁의 목적도 적국을 멸망시킨다는 것보다 포로를 잡아오고 재산을 빼앗아오는 것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에 패배하면 제물로 바쳐져 죽는 사람들은 대부분 엘리트층과 귀족들, 전사들이었고 평민과 농부들은 전쟁의 승패여부와 상관없이 제 할일에 계속 종사했다.[31] 물론 전투에서 죽는 졸병들은 평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마야의 왕과 귀족들은 전쟁이 터지면 최전선으로 나가서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전쟁에 나가지 않는 자는 겁쟁이로 취급받아 경멸받았고 반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왕은 곧 위대한 통치자로 대접받았다. 왕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기면 물론 최고의 대우를 받고 전리품도 가장 좋은 걸 가져갔지만 패배하면 왕권 자체가 흔들렸다. 패배한다면 타국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게 최선이었고, 최악의 경우 타국에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었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부계 상속을 통해 군 직위를 그대로 물려주었는데,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는 경우도 많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면 왕과 함께 적국으로 끌려가 온갖 험한 꼴을 당하다 그대로 신에게 바쳐졌다.

마야 문명의 도시들은 대부분 상비군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숙련된 전사 계급과 용병이 존재해 전쟁에서 장교를 맡거나 선봉에 서긴 했지만 이들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강제로 징발된 평민 농부들이었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이 거의 대부분 농부였던 탓에 거의 모든 전투들은 수확기 전에 치러졌다. 양국 모두 전쟁이 끝나면 어쨌든 수확을 하긴 해야하니 수확을 하기 전에 미리미리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병사들은 당연히 남자였다. 일부 전설에는 전사 여왕이 군대를 이끌었다거나 여자들이 함께 참전해 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고고학자들이 병사들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청년, 중년 남성들이었다고 한다.

마야인들의 전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마야 도시들의 평균 간격은 약 55km 정도로 약 2~8일 정도 행군해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꽤 거리가 되는 장거리였다. 병사들이 물자와 무기 등을 지고 험난한 정글을 뚫고 먼 거리를 행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대군을 동원하는 게 힘들었다. 소나 말 같은 대형가축도 없던 메소아메리카였던 만큼 구대륙처럼 만명 단위의 동원은 어림도 없었다. 대다수의 전투는 양측이 약 500~1000여 명 정도의 규모에 그쳤으며 참전규모가 천 명 단위가 넘어가는 전투는 정말 국운을 건 전면전 정도가 아니라면 거의 없었다. 전투 방법은 일단 전사들이 저멀리서 투창 '아틀라틀'을 던져 적진을 교란시킨 다음, 전속력으로 달려가 근거리에서 칼과 창 등으로 적군의 전열을 깨부수고 전사들을 학살하는 방식이었다. 화약의 존재를 몰랐기에 이나 대포 같은 화약 병기들은 아예 사용되지 않았다.

고전기 초기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지방에서 투창 ' 아틀라틀'이 마야 문명권으로 유입된다. 아틀라틀은 대략 1.5m 길이의 짧막한 투창인데 끝에 흑요석이나 처트로 날카롭게 만든 창날이 달려있어 던지기에 유용했다. 팔근육의 힘으로만 무기를 던진다면 지나치게 사거리가 짧았기에 스틱이나 돌팔매를 사용해 던지기도 했다. 화살처럼 아시아-유럽권의 전통적인 장거리 무기들도 존재는 했지만 선호도가 높지는 않았으며 후고전기 들어서야 전장의 주요 무기로 쓰였다. 근접전을 벌일 때에는 나무에 흑요석 조각들을 박아넣어 만든 양손검을 썼다. 간혹 피해를 더 입히기 위해 오물이나 독을 바르는 경우도 있었다. 면을 소금물에 담궈 단단하게 만든 형태의 갑옷을 입기도 했고,[32] 전사들은 깃털과 동물 가죽으로 덮어씌운 독특한 형태의 방패를 들고 다녔다.

7. 경제

정글 속 고립된 문명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마야인들도 분명 무역에 활발히 종사했다. 마야 문명권에 속한 수많은 도시들이 서로 교류하거나 아니면 저멀리 멕시코 쪽의 도시들과도 교역을 진행했던 것이다. 지역마다 특산품도 달랐는데, 예를 들어 과테말라 고원의 카미날후유 같은 도시들이 흑요석의 공급을 담당했다면 북부 유카탄 반도의 도시들은 소금의 공급을 담당했다. 교류가 편리한 교역로 한가운데 있는 도시들은 중간에 통행세를 받아먹으면서 굉장한 부를 쌓았고, 바다로 진출이 가능한 해안가의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대표적인 게 치첸 이트사. 콜롬비아 파나마에서 황금을 수입했고 뉴멕시코에서 터키석을 수입하는 대신 노예나 직물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다.

마야 문명 극초기까지만 해도 먀야인들은 굳이 다른 도시들과 무역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거의 모든 자원들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고 마을들의 규모도 작아 딱히 사치품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선고전기 들어 거대한 도시들이 등장하고, 엘 미라도르 티칼처럼 인구가 몇 만이 넘어가는 국가가 세워지면서 점차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인구는 기껏해야 소금, , , 생선, 도자기 정도의 소박한 물품만을 소비했지만 통치 계급과 귀족들은 흑요석, , , 카카오, 구리 같은 비싼 사치재들을 필요로 했기에 외부에서 이를 수입해와야만 했던 것이다.[33]

마야인들의 무역에서 가장 큰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물품은 소금이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식량 저장에도 유용했다. 대부분의 소금은 유카탄 반도 북부의 거대한 염전에서 바닷물을 말려 천일염을 제조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내륙 일부에도 조그맣게 암염 광산 따위는 존재했지만 바다 소금이 압도적으로 질이 좋았기에 마야인들은 거의 유카탄에서 만들어진 바다 소금을 먹었다. 수요도 엄청났다. 고기나 야채에 뿌려 먹는 건 당연했고, 방부제로도 사용했으며 출산이나 사망했을 시에도 산모에게 소금을 먹이거나 시체 위에 뿌렸다. 전사들이 쓸 면 갑옷에도 소금물을 뻣뻣하게 먹이거나 소금을 가득 채우곤 했다. 이렇게 용도가 다양해서 고전기 초기 45,000여 명의 인구를 보유한 도시였던 티칼에서는 연 131.4톤에 달하는 소금을 소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도자기 가구 등이 유통되는 일도 잦았다. 평민들은 집에서 조잡한 형태의 가구들을 스스로 만들어 썼지만, 돈이 많은 부자나 귀족들은 장인들이 만들어준 가구들을 사용하고 싶어했다. 이들은 도시의 예술가나 장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해주는 대신 그 대가로 가구나 장신구, 도자기들을 받았다. 마치 르네상스 시기 유럽과 비슷한 느낌. 꼭 자기 도시의 장인들에게 의뢰를 맡기는 건 아니라서 바깥 도시에 실력 좋은 장인이 있다면 그에게도 돈을 주고 의뢰를 넣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역이 일어났던 것이다. 가장 많이 거래됐던 물품은 접시나 화병, 원통형 술병이었다. 이런 도자기들은 사치품에 속해서, 금색이나 붉은색 같이 강렬한 색상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아무나 쓸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다.

마야 최고의 사치품들에는 주로 , , 흑요석, 카카오가 있었다. 개중 마야 최고의 보석으로 쳐줬던 옥은 정말 희귀해서 과테말라 고지대로부터 비싼 값을 주고 사오기까지 했다. 왕관이나 신상처럼 가장 중요한 기물들은 옥으로 만들어졌고 오히려 금보다도 높게 대접받는 경우도 있었다. 흑요석은 옥에 비하면 값어치가 낮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잘 갈라지고 굉장히 날카롭다는 성질 덕에 칼, 도끼, 예식용 기물, 조각상, 구슬, 장신구 등 다양한 물건들을 만드는 데 쓰이는 매우 귀중한 광물이었기 때문. 시간이 흐르면서 흑요석이 시중에 많이 풀리자 평민들도 흑요석을 사용하며 그 가치는 조금씩 낮아졌지만, 귀족들은 여전히 테오티우아칸에서 수입해온 녹색 광택이 나온 희귀한 흑요석을 따로 쓰면서 지위를 과시했다고 한다. 카카오는 '신의 선물'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귀한 작물이었고, 아예 화폐처럼 쓰기도 했다. 종교제례에나 간간히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사치재였던 것이다. 주로 과테말라 저지대에서 주로 유통되었는데, 일부는 카카오 콩을 비우고 그 껍질 안에 아보카도 껍데기나 흙을 집어넣어 사기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마야의 상인들은 마치 귀족처럼 차려입고 다녔다. 상인들은 중산층 계급에 속했지만 무역을 통해 쌓은 막대한 부로 거의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일부 귀족들은 아예 무역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다만 평민 상인이나 일반 상인들은 단거리나 중거리 무역에 종사했다면 명망높은 귀족들은 주로 더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장거리 무역에 참여했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마야의 무역로는 대단히 위험했다. 중간에 낀 도시들이 길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도적 떼거리나 맹수가 튀어나올지 몰랐고, 때문에 상인들은 몸을 검게 칠하고[34] 중무장을 한 채로 다녔다. 당나귀처럼 짐을 나를 동물이 없었기에 모든 짐은 짐꾼이 직접 지는 도리 밖에 없었다. 육로로 짐을 지고 걸어가다가 강이나 바다가 나오면 카누에 짐을 싣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도시 내부 경제도 활발히 돌아갔다. 다만 자유경제시장이라기보다는 엘리트층이 모든 경제활동을 엄격히 통제하는 면이 매우 강했던 걸로 추정된다. 공산재나 사치품을 만드는 장인들은 무조건 귀족이나 왕들의 소속이었으며 함부로 제품을 만들 수도 없었다. 소규모의 상인 감독들이 수요와 공급을 계산해 귀족들의 명령에 따라 장인들을 굴려서 제품을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엘리트 계급은 이들이 만들어낸 제품들을 시혜적으로 평민들에게 뿌리거나 외부에 팔면서 도시의 통제력을 유지했다. 평민이나 하류 계급들은 당연히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비싼 공산재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자신들이 잡은 생선이나 키운 농산물 따위를 근근히 거래하면서 먹고 살았다. 도시에는 고정된 시장판이 존재해서 돌로 된 아케이드에 노점이나 가판을 차려 거기서 제품을 사고팔 수 있었다.

8.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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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칼의 복원도[35]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겹겹이 피라미드들이 덧씌워진 구조이다. 코판의 '로살릴라 신전'[36]
마야 문명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정글 속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들과 아름다운 사원들이다. 먀야의 건축가들은 도시를 지을 때에 기본적으로 계획도시를 짓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도시의 구역들을 확장하면서 숲을 밀어내고 새로운 건물들을 지어 올렸다. 마야의 도시 한중앙에는 넓은 크기의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광장 주위를 여러 피라미드들과 왕의 궁전, 사원들, 구기 경기장[37] 등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 광장과 석조 건물들을 포함하여 마야의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는데, 마야의 도시들은 모두 이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풀과 나무 등의 재료들로 지은 평민들의 가옥들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다만 시간이 흘러 도시들이 버려지자, 썩기 쉬운 풀과 나무로 된 평민들의 주택들은 모두 썩어 사라졌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돌로 만들어진 아크로폴리스 유적들 뿐이다. 도시의 건물들 사이는 '사크베'라고 해서 석조 보도들이 깔려 있어 비가 내릴 때에도 질척질척거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마야 건축의 꽃이자 대표는 단연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층층이 단을 쌓아 올려 만들었으며 꼭대기까지 향하는 계단이 외벽에 나있고 맨 위에는 석조 사원이 자리하는 구조였으며, 천문대와 사원, 무덤의 기능을 모두 겸하는 마야 도시의 핵심 구조물이었다. 마야어로는 '쿠 나(K'uh nah)'라고 불렀다고. 왕과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신을 상징하는 권위와 다름없었기에 피라미드를 지을 때에는 온 도시의 인력들이 들러붙어 지었다. 제일 먼저 흙과 자갈들을 쌓아 둔덕을 만들었고, 그 둔덕을 포장돌로 감싸 외벽을 만들었으며 꼭대기에 사원을 짓고 외벽을 석회로 발라 마감처리하고 장식을 넣었다.[38]

또한 독특한 것이 피라미드를 새로 증축할 때에는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존의 피라미드 위에 새로운 피라미드를 덧씌워서 지었다. 이때문에 현재 마야의 피라미드 대부분은 벽면 아래에 옛날에 지어진 더 크기가 작은 피라미드들이 겹겹이 들어있는 구조로, 마치 러시아의 마트료시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색이 다 벗겨져 돌만 남아 황량한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전성기 시절 마야의 피라미드에는 신성한 색인 붉은색 염료가 칠해져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으며, 꼭대기의 빗돌 장식물에도 푸른색, 초록색, 붉은색, 금색 등 다양한 색들이 입혀져 있었다. 간혹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마야의 피라미드를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굉장히 정밀한 수학적 계산과 엄청난 노동력을 요했던 이집트의 것과는 달리, 마야의 피라미드들은 생각보다 정밀한 기술력이나 계산을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피라미드 내부에는 왕들이나 귀족들의 무덤들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팔렝케 유적의 파칼 왕의 무덤이다.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은 무려 68년이라는 엄청난 세월동안 장수하면서 팔렝케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었는데,[39] 그의 무덤이 바로 팔렝케의 피라미드인 '비문의 신전' 지하에 잠들어 있다. 파칼 왕이 묻힌 석실은 꼭대기의 신전 바닥에 나있는 기다란 계단 복도를 타고 내려가면 나오는 조그마한 석조 방인데, 발굴 전에는 이 복도가 모두 자갈로 채워져 도굴을 방지하고자 했다. 석실 내부에는 파칼 왕의 유해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놓여 있었고, 비취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와 옥으로 만든 각종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40] 파칼 왕의 무덤은 마야 고고학 역사상 최대의 발견으로 인정받으며, 거의 이집트의 투탕카멘의 무덤 급 대성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게 왜 대단한 것이냐면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신전과 왕들의 무덤들은 마야인들이나 모험가들에 의해 도굴이 되어버리거나 털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41] 파칼 왕의 무덤은 전혀 어지럽혀지지 않은 채로 보존되었고, 심지어는 석실에 그려진 벽화마저도 채색이 유지된 상태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무덤은 파칼 왕이 마야의 수많은 국왕들 중 가장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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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렝케의 왕궁 복원도 팔렝케 왕궁 유적의 내부 피라미드 사원 내부
왕궁도 있었다. 국왕이나 귀족들이 모여 살던 왕궁은 대부분 석재로 지어져 있었으며, 물이 잘 고이지 않는 도시의 고지대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평민들이 풀과 나무를 엮어 지은 부실한 가옥들에 몰려 사는 동안, 신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던 왕들은 수많은 방들을 가진 궁전에서 호의호식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왕궁은 단층 구조였고, 일부 궁전들은 2층이나 3층까지 올려 짓기도 했다. 또한 무덤을 왕궁 내부의 지하에 파서 시신을 안장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도시의 멸망 이후 도굴꾼의 표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왕궁 외에도 독특한 건물로는 천문대가 있었다. 천체의 운행에 관심이 많았던 마야인들은 천문대를 지어 주로 태양, 금성의 운동을 관측했는데, 사실 딱히 천문대에서만 관찰한 것은 아니고 높은 건물이나 산처럼 높은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하늘을 관측했다고 한다. 흔하게 마야의 천문대라고 치면 나오는 원통형의 건물은 마야의 최고신 쿠쿨칸을 섬기는 신전들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구기 경기장이 있었다. 마야에서 구기 경기는 목숨을 건 신에게 바치는 예식이었고, 패배자들은 제물로 바쳐질 정도로 굉장히 살벌했다. 주경기장은 양 옆에 기다랗고 높은 벽이 2개 서있는 구조로, 그 벽에 고리가 달려 있어 이 고리 안으로 고무로 된 공을 던져 넣으면 점수를 얻는 경기였다. 이 구기 경기장은 마야 도시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야인들의 피라미드나 건물 내부를 보면 그 거대한 크기와 달리 매우 협소한 편이다. 건축술이 발달하지 못해 아치의 개념을 몰랐던 탓이 컸다. 아치가 없어서 '코벨 아치(Corvel Arch)'라는 방법을 사용해 천장을 지탱했다. 코벨 아치란 벽에서부터 비스듬하게 돌들을 쌓아 천장에서 만나 맞대어 서로 지지하게 만드는 형식의 지지 방식이었는데, 아치보다 더 불안정하고 만들 수 있는 내부 공간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마야인들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사원을 지을 때 장식용으로 건물 위에 거대한 빗돌을 얹었는데, 이 빗돌의 엄청난 하중을 견디기 위해선 벽을 최대한 두껍게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안그래도 코벨 아치 때문에 좁은 공간에 벽마저 두껍게 만드니 더더욱 좁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궁이나 귀족 저택 역시 별로 다르지는 않아서 그 크기에 비해서 내부는 꽤 좁다.

9. 예술

현재 남아있는 마야 문명의 예술은 곧 왕실 예술, 혹은 엘리트 계급의 예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까지 남은 모든 마야 유물들은 죄다 왕실이나 엘리트 계급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평민들이 향유하던 것은 거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도 평민들이 즐기던 예술이나 문화는 존재했겠지만 썩기 쉬운 목재나 흙으로 만들어 모두 삭아 사라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돈이 많은 엘리트층들은 썩지 않고 오래가는 돌이나 보석류, 옥 따위로 예술품들을 만들었기에 현재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마야인들은 녹색과 청록색을 사랑했다. 이 두 색깔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단어로 불렀으며 금색보다도 높게 평가했다. 투탕카멘의 가면이 금으로 만들었다면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의 장례가면은 을 깎아 만들었으며 귀족들은 옥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달고 아예 치아에 옥을 박아넣는 경우도 있었다. 치첸 이트사의 피라미드 방 안에서 발견된 재규어 왕좌 역시 붉은 사암으로 만들고 거기에 옥으로 만든 눈을 박아 만들었을 정도로 옥은 대단히 중요한 재료였다. 왜 마야인들이 옥을 이정도로 숭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야금술이 없어 아직 금속류의 발달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단단한 옥이 더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42] 뿐만 아니라 메소아메리카에서 옥이 상당히 희귀한 광물이다보니 스스로를 과시하고 싶은 지배층들의 마음에 쏙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야인들은 옥의 푸른빛을 과 생명에 연관시켰으며 태양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현재까지 남은 마야 예술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건 당연히 수많은 석조 부조와 돌조각들이다. 마야학자들은 이 석조 유물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했는데, 크게 '석비(Stela)', '상인방(Lintel);, '판넬(Panel)', '제단(Altar)', '의례용 계단(Monumental Stair)', '왕좌(Throne)' 등이 있다. 일단 석비가 개중에서 가장 수도 많고 모든 도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만들어낸 보편적인 유물에 속한다. 길쭉하고 큼직한 돌 하나를 통째로 깎아 거기에 왕이나 신들의 형상, 상형문자들을 빼곡히 새겨놓은 것을 석비라고 부르는데, 주로 왕을 신격화하거나 신의 영광을 기릴 목적으로 세워졌다. 특징이라면 왕의 얼굴이 보편적인 인간의 얼굴로 표현될 뿐 딱히 개인적인 특징을 묘사하지는 않는다는 것 등이 있다.[43] 코판, 티칼, 팔렝케, 칼라크물 등 웬만한 대도시라면 무조건 수십여 개는 세워져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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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칼 왕의 데스마스크 석비 코판의 제단 옥을 박은 재규어 왕좌 옥수수 신의 도자기 인형
상인방은 건물의 기둥들 위에 가로로 길게 걸쳐 올려놓은 석재들을 의미한다. 건물 모든 곳에 조각을 새기던 마야인들답게 상인방에도 섬세한 부조들을 아로새겨놓았는데, 이들 중 보존된 게 많아 고고학적 가치가 높다. 가장 유명한 상인방은 약스칠란에서 발견된 상인방. 판넬은 건물 벽에 덧대 세워놓거나 교각, 플랫폼 측면에 붙여놓는 용도의 거대한 판짝이었다. 특히 팔렝케에 보존이 잘된 판넬이 많으며 파칼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거대한 무덤 덮개도 이 분류에 속한다. 제단은 둥글거나 작사각형 모양의 납작한 돌덩어리인데, 제물을 바치는 제단일 가능성이 커서 제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때때로 서너 개의 바위 다리가 달려있는 경우도 있다. 의례용 계단은 피라미드나 사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인데,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경우 따로 구분한다.[44] 왕좌는 말그대로 왕이나 귀족들이 앉던 의자다. 이게 조금 더 낮고 길어지면 벤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재 유물만을 언급했지만 사실 마야 문명 당시에는 목재 유물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덥고 습한 마야 기후 탓에 목재 유물들은 죄다 썩어 사라졌고, 결정적으로 스페인 식민당국이 목재 유물들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보이는 족족 불태워버렸기에 남은 게 거의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티칼의 피라미드 유적에서 뜯어온 목재 상인방에 새겨진 섬세한 부조들이 유명하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목재 거울 받침대가 남아있는 편이다. 특히 이 목재 거울 받침대의 경우 한 남성이 거울을 받치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가공의 정교함이 7세기의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지금은 모든 사원이 칙칙한 회색 투성이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녹색, 푸른색, 금색, 붉은색 등 다양한 색깔로 형형색색 칠해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왕궁이나 사원 내부에는 화려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주요 모티브는 전쟁에서의 승리, 왕의 업적에 대한 찬양, 신화의 모습 따위였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벽화들은 습한 마야 기후 탓에 곰팡이가 슬고 씻겨내려가 거의 알아볼 수조차 없는 수준이지만 보남팍 유적에 굉장히 잘 보존된 벽화가 남아있다. 포로들을 처형하는 모습, 전장에서 맹위를 떨치는 왕의 모습, 춤을 추는 후계자들의 모습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고고학적 가치는 매우 높다. 무덤이나 동굴처럼 깊고 신성한 곳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붉은색이나 금색처럼 화려한 색을 많이 쓴 사원, 왕궁 벽화와는 달리 이 곳에 그린 벽화들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가끔씩만 붉은색을 사용해 정적인 느낌을 준다. 다만 마야 전통 벽화의 제작 자체는 이미 16세기에 맥이 끊겼다고.

마야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게 도자기다. 마야인들은 점토를 그러모아 재나 모래와 섞었고, 이를 반죽해 길게 돌돌 늘린 다음 원통형으로 감은 뒤 매끄럽게 다듬고 가마에 구워 도자기를 만들었다. 물레는 아직 발명되지 않아 사용하지 못했다. 가마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마가 아니라 나무, 숯, 풀 등 다양한 잡재료들을 몽땅 때려넣고 불을 피워 도자기를 굽는 식이었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도자기들은 귀족들의 가보로 취급받던 사치재다. 원통형의 화병에는 신화나 코덱스의 내용이 새겨졌고 원통형 그릇, 뚜껑이 달린 접시, 사발 등은 만들기가 어려워 아무나 쓸 수도 없었다. 가장 독특한 도자기는 팔렝케에서 발견된 향로. 신 혹은 왕의 얼굴을 한 향로인데 안이 비어서 입으로 연기가 새어나온다. 이외에도 귀족들의 조각상이나 신의 조각상 등 도자기로 만든 인형들도 볼만하다.

마야 문명의 회화는 거의 전부 소실되었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마야인들의 회화를 보면 그들이 유머감각이 뛰어났으며 그림 솜씨도 흘륭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림에 말풍선이나 효과선(냄새를 물결 형태의 선으로 표현하는 등)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특징으로, 오늘날의 만화의 먼 조상쯤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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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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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문명이 위치한 유카탄 반도 지방은 굉장히 찌는 듯이 덥고 습한 열대우림 지역이다. 때문에 마야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제대로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으며, 평민 남성의 경우 아랫도리만을 가리는 천을 둘렀고 고위층들은 그 위에 화려한 깃털 망토나 돌로 된 발찌와 팔찌처럼 장신구들을 두르는 것이 정석이었다. 여성의 경우에는 가슴을 가리기 위해서 상체에도 몸을 가리는 천을 걸쳤으나,[45] 이 역시 매우 얇았으며 체크무늬나 줄무늬를 넣어 장식하고는 했다. 다만 남성들도 상체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무릎까지만 내려오는 짧은 망토를 입기도 했으며 목이나 어깨에 이를 고정시켰다. 평민들의 경우에는 겨우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초라한 망토를 두르고 다녔으나, 귀족이나 왕들의 경우에는 비싼 동물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다녔다고.

마야의 국왕들은 매우 요란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신성한 동물인 재규어의 가죽으로 된 망토를 두르고 다녔고, 보석과 옥, 알록달록한 깃털로 만들어진 왕관을 썼으며 사슴과 영양 모양의 장식들이 붙어있는 팔찌나 발찌 등을 찼다. 또한 이마에는 옥이나 조개 등으로 장식된[46] 하얀 띠를 둘렀는데, 이는 악신들을 물리치고 선의 승리를 이끈 신화 속의 쌍둥이 형제들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온갖 종류의 색색의 보석들을 몸에 둘러 걸어다닐 때마다 햇빛이 반사되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고 하며, 왕권을 상징하는 홀이나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왕을 포함한 귀족층의 경우에는 온 몸에 붉은색, 백색, 검은색 염료로 문양을 그리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 문양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검은색 염료를 몸에 바른 자들은 주로 사냥꾼이나 구기 선수처럼 잔혹한 일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고, 붉은색 염료를 바른 자들은 지위가 매우 높은 귀족층이었다. 또한 바른 문양이 화려하고 정교하면 할수록 해당 인물의 지위가 높았다고 한다.

고전기 마야 사회에서 머리는 곧 사람의 중심이자 영혼이 거하는 신성한 자리였다. 그랬기에 머리장식에 신경을 매우 많이 쏟아서 화려한 관이나 동물 박제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다. 동물 가죽을 머리에 쓰면 해당 동물의 힘을 일부 빌려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예를 들어 왕은 최고의 맹수 재규어 머리 박제를 썼고 그 아래 신하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사슴이나 독수리 따위를 즐겨썼다. 사로잡힌 포로들은 아무 머리장식도 쓰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녀야 했다. 포로들이 길게 길렀던 머리카락은 이때 바닥에 질질 늘어졌는데, 머리를 중시했던 마야 사회에서는 이만한 수치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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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아포칼립토'에 등장하는 마야 고위층들의 모습. 마야인들의 모습을 재현한 몇 안되는 미디어물 중 하나다.[47]
보철물도 즐겨 착용했다. 부위도 가리지 않았지만 가장 대표적인 부위는 였다. 콧대 위에 높은 보형물을 덧씌워서 콧대가 실제보다 훨씬 높게 치솟은 것처럼 만든 것이다. 라텍스나 수지로 만들어졌고 피부 위에 그대로 붙이는 식이었다. 이 보형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귀에도 거대한 귀걸이를 썼다. 귓볼을 뚫어[48] 구멍에 거대한 귀걸이를 달아 심지어 어깨까지도 축 늘어지게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역시 아무나 쓸 수 있는 기물도 아니어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차고 있던 귀걸이를 빼내고 나무로 만들어준 조잡한 귀걸이로 바꿔 써야했다. 심한 경우에는 치아를 날카롭게 갈아낸 뒤, 거기에 구멍을 내고 옥이나 돌로 깎은 보형물을 끼워넣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외모를 가꾸기 위해 여성들이 많이 했다고.

신발은 갈대나 풀, 가죽 따위를 엮어 만들었다. 습기가 많은 마야 문명권 특성상 트여있는 슬리퍼 형태의 신발들을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가장 일반적인 신발은 두 개의 스트랩이 달린 샌들이었는데, 끈 하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발가락 사이, 나머지 하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발가락 사이에 꼈다. 하층민들은 무두질도 제대로 되지 않은 신발을 신었지만 돈 있는 사람들은 새의 깃털을 붙이거나 점토 방울을 달아 걸을 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다른 모든 의상들과 마찬가지로 신발이 화려하고 뭔가 달린게 많을 수록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 일부 왕이나 대귀족들은 아예 재규어 발, 혹은 새 발톱을 통째로 박제해서 신발처럼 신고 다니기도 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북이 껍데기를 넣어 덜거덕거리게 만들기도 했고, 나막신처럼 신발 바닥 아래에 나무로 밑창을 만들어 발이 빗물에 젖지 않도록 신발을 개량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의복과는 상관이 없지만 마야 사회에서는 두개골을 길고 독특한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아직 두개골이 굳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이마 앞뒤로 나무 판넬을 대고 끈으로 단단히 묶으면 점차 두개골이 길어지면서 거의 기형적으로 보일 수준의 길쭉한 두개골이 만들어진다. 두개골이 길어지면 아름다워보인다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사회 계급을 확실히 나누기 위한 계급 구분의 수단이었다. 어떻게든 평민들과 서로를 구분하고 싶어했던 귀족들 사이에서 머리 모양만큼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쉬운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이렇게 두개골을 인위적으로 길게 만들어도 지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두개골 개조 풍습은 훗날 현대인들이 외계인들이 마야 문명에 개입한 초고대문명설을 제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백인 학자들이 기형적인 두개골 형상을 보고 '혹시 외계인들의 피가 섞인게 아닐까?' 혹은 '외계인들의 형상을 따라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한게 아닐까?' 같은 질문을 제기했기 때문. 인디아나 존스 수정해골 모티브도 여기서 따왔다.[49]

11. 식생활

마야인들은 옥수수. 호박, 등 다양한 작물들을 길러 먹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주로 먹었던 건 옥수수였다. 일단 옥수수는 마야 문명의 습한 기후에 잘 자랐을 뿐만 아니라, 보관하기도 편했고 가루를 내어 먹거나 반죽으로 토르티야를 빚어 먹을 수도 있었을 뿐더러 줄기나 뿌리로 바구니나 밧줄 따위를 만드는 등 여러 모로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옥수수를 중요하게 여겼던지 신들이 옥수수 가루로 반죽을 빚어 인간을 창조했다고 여겼을 지경이었다. 옥수수 신은 마야 문명권에서 가장 중요하게 숭배되었던 신들 중 하나였으며 마야 사회는 기본적으로 옥수수의 성장과 수확을 바탕으로 돌아갔다.

옥수수를 먹는 방법은 다양했다. 그냥 다 자란 옥수수를 따서 구워먹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옥수수를 석회가루와 함께 물에 넣어 끓이는게 보통이었다. 옥수수를 알칼리성 석회물에 끓이면 비타민 B가 나오는데, 이 비타민 B를 섭취함으로써 홍반병을 예방하고 단백질 결핍을 보충할 수 있었다. 석회 가루와 함께 물에 끓여낸 옥수수는 건져내서 말린 다음 곱게 가루로 빻았다. 이 가루는 반죽해서 화덕에 토르티야 비슷하게 구워먹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반죽에 고기, 야채로 속을 채워 옥수수 수염이나 바나나 잎 따위에 싸서 구운 '타말'이라는 요리도 있었다.[50] 수프 비슷하게 먹고 싶다면 '아톨'과 '포졸'이라고 해서 처럼 먹는 경우도 있었다. 아톨은 칠리 페퍼, 카카오, 소금 따위를 넣어서 간을 한 짙은 수프 형태의 요리였고, 포졸은 옥수수 가루에 물을 넣어 끓인 음 고기와 양파, 향신료 따위를 얹은 수프였다.

옥수수가 가장 메인 요리 재료였지만 콩과 호박 역시 매우 중요했다. 특히 이 둘의 경우 옥수수와 묶어서 '세 자매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마야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이 3개가 가장 널리 재배되는 작물이었지만 그 외에 토마토. 칠리 페퍼, 아보카도,[51] 구아바, 사워솝, 파파야, 파인애플, 고구마, 카사바도 즐겨 먹었다. 개중 카사바의 경우 기르기도 쉽고 생산량도 꽤나 많아 옥수수 대용으로 먹는 사람들도 흔했다. 일부 학자들은 옥수수가 흉작이거나 양이 부족할 때 사람들이 카사바를 그 대용으로 먹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고위층이거나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옥수수를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옥수수가 그렇게 부족한 작물은 아니었지만, 마야 문명권에서 아무나 먹을 수 있을만큼 풍부한 작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인 남성이 여성이나 아이에 비해 더 많은 양의 옥수수를 소비했으며 식단에서 옥수수가 차지하는 비중도 더 높았다. 마야 도시 팍비툰(Pakbitun)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동위원소 조사해본 결과, 팍비툰에 살던 보통 성인 남성 식단의 약 70~77%가 옥수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도시가 쇠퇴할 수록 옥수수가 식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나중에는 거의 50~60% 수준까지 감소했다. 그 이유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주식인 옥수수가 농지 황폐화로 인해 연달아 흉작이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옥수수 말고 다른 식품들을 섭취해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인구는 자꾸 느는데 옥수수 생산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식량난이 가중됐고, 이 것이 사람들의 식단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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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식 초콜릿 음료 '쇼콜라틀'. 칠리 고추와 옥수수, 꿀 등을 섞어 마셨다.

마야 문명에서 유래한 가장 유명한 음식은 초콜릿이다. 마야인들이 우리가 아는 단단한 바 형태의 초콜릿을 먹은 건 아니지만[52] 카카오의 원산지가 바로 이 마야 문명이 탄생한 메소아메리카 지방이기 때문이다. 고대 마야인들은 카카오를 재배한 최초의 사람들이기도 했다. 마야인들은 카카오를 신의 선물이라고 여겼다. 역사적으로도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필수적으로 사용하던 신성한 음식이었을 뿐더러 결혼식과 약혼식에서 카카오 음료를 마셨으며 화폐로 쓰기도 했다. 부유층들은 코코아 콩을 갈아 칠리 페퍼, 옥수수 가루, 등과 섞어 '쇼콜라틀(Xocolatl)'이라는 독특한 음료를 만들어 먹었다. 아무나 함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절대 아니었고, 귀족이나 신관 등 최고위 계급만 향유할 수 있는 최고급 사치품이었다. 오늘날의 코코아와는 다른 느낌의 음료로, 무가당 초콜릿에 거품을 좀 많이 낸 형태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마야인들도 당연히 고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동물들을 길러 잡아먹는다는 개념보다는 여전히 사냥 중심의 육류 공급 방식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슴, 서인도제도매너티, 아르마딜로, , 페커리, 원숭이. 기니피그, 거북이, 이구아나 등 정글에서 잡을 수 있는 동물들은 죄다 잡아먹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즐겨 사냥했던 동물은 흰꼬리 사슴이었다. 양도 많았고 정글에 사는 웬만한 동물들에 비해 맛이나 냄새도 훨씬 좋았기 때문. 해안가에 거주하는 마야인들은 바닷가재 새우, 소라 같은 해산물들을 즐기기도 했다. 마야인들의 운반 기술이 열악했던 탓에 내륙 도시의 마야인들은 해산물들을 먹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53] 학자들이 마야인들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먹은 동물은 역시나 흰꼬리 사슴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칠면조 같은 소형 조류나 작은 포유류들을 사육해서 먹기도 했다고 한다.

마야인들은 옥수수나 기타 작물들을 기를 때 '펫 콧(pet kot)'이라 불리는 형태의 농경지와 작은 정원을 이용했다. 하도 메소아메리카 지방이 비가 많이 내리다보니 기껏 만들어놓은 농지의 흙이 죄다 쓸려나가기 일쑤였고, 이때문에 밭 경계에 느슨하게나마 돌들을 쌓아 '느슨한 돌의 벽(kot)'을 만들었다는 데에서 '펫 콧'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마야인들이 주로 쓰던 농경 방법은 화전이었다. 정글이 '녹색 사막'이라 불릴 정도로 농사 짓기에는 썩 좋은 환경이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열대우림을 태워서 그 재를 비료삼아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보통 한 번 숲을 불태우면 그 효과가 2년 정도 갔다. 하지만 2년이 지나면 지력이 다해버렸고 해당 농지는 우림이 복원되고 지력이 복구될 때까지 무려 10년이나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면 그 옆의 우림을 또 태운 다음 거기에 새로 작물을 심는 일종의 윤작을 실시했다. 여담이지만 이 화전농법은 훗날 자연환경의 변화로 가뭄과 자연재해가 일어나면서 10년이 지나도 지력 복구가 안되자 식량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는 마야 문명의 쇠퇴를 불러오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12.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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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akmulis( 칼라크물) Kopanas( 코판) Kirigua(키리과) Piedras Negras
놀랍도록 진보한 역법(曆法), 천문학에 대한 발달한 지식에다가 문자 자체의 대가 끊기고 기록물의 대다수가 선교사들에게 소실되었던 이유도 있기에 사람들에게는 마야 문명이 상당히 조용하고 평화적이며 철학적으로 발달했던 이미지로 자리잡혀 있지만, 마야 문자가 해독되어 그들이 남긴 기록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반전이 일어났다. 문자가 해독되기 전까지 마야 학자들은 마야 문명이 고도의 철학적, 평화적 문명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특히 마야 연구의 일인자였던 에릭 톰슨의 경우, 평화적인 마야 문명이라는 환상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그가 살아있을 때 이미 진행되고 있던 마야 문자 해독을 통한 실체 접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마야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으며 결국 그의 사후에야 소장 학자들이 본격적인 기록해독에 나서서 마야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기록물들을 살펴보니 인신공양은 기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마약류의 환각제도 예사로 흡입하던 난세가 벌어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난세였기에 눈부신 문명 발전도 가능했다.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같은 소도시 국가의 연맹 형태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중 가장 뛰어난 자가 '위대한 왕'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 지배를 하는 체제였다. 게다가 한 종족만으로 이루어진 문명도 아니라서, 이 당시에 쓰였던 마야어는 총 33개의 매우 이질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마야 문자로 된 비석을 해독할 때에도 그것이 어떤 언어로 쓰였는지부터 알아야 했기 때문에 매우 난해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현대 마야인들은 같은 부족끼리 소통할 때는 그 지역의 마야어를 사용하지만 다른 부족과 소통하기 위해 지역에 따라 스페인어 혹은 영어를 사용하는 실정이다.

마야는 아주 철저한 기록 중심 사회로 한 해의 조세 기록과 호구 조사 등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으며, 마야 문자는 기본적으로 표어문자이지만 표음문자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알파벳처럼 각각의 발음에 해당하는 문자를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에서처럼 발음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기호를 조합하여 사각형의 공간에 맞춰서 표기했다. 마야 문자는 표기가 대단히 유연해서 한 개의 문자가 사실은 한 개의 단어를 나타낼 수도 있고, 음절로 쓰인 몇 개의 문자가 단어를 따로 표기한 것일 수도 있었다. 또한 하나의 상형문자가 여러 개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체사용될 수도 있었기에 같은 뜻을 적는 데에 다양한 문자를 이용한 표기가 가능했다. 게다가 온갖 종류의 약칭들을 사용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탄생한 것이 대단히 복잡하고 말장난으로 가득찬 문자 체계였다. 게다가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마야의 코덱스, 즉 남아있던 두루마리들과 책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면서[54] 기껏 있던 자료들이 소실되었고, 남아있는 마야의 책은 단 4권밖에 없다.[55] 이때문에 현대 마야 언어학자들은 대부분 석조 신전에 새겨진 문자들을 위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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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조합은, 대체로 하나의 단어 전체를 나타내는지라 한글에서보다 조합이 더 복잡하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마야 문자는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56] 또한 하나의 발음을 나타내는 기호도 여러 개며, 여러 개의 기호가 조합될 때 몇몇 기호는 기호 전체를 표기하지 않고 기호의 일부분만을 앞의 기호 뒤에 붙여서 표기하는 등 표기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표의문자적 성격이 있는 점, 복수 기호 조합 시에 부호의 축약형이 쓰인다는 점 등은 한자의 부수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게다가 하나의 문자가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뜻을 표현하기도 하고, 그 비유성과 상징성도 대단히 심해서 후대 언어학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들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이 마야 문자이다.

다음 비석은 과테말라의 이스투츠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문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야인들의 언어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썼던 것이 아니라, '돌을 심고 물방울을 흩뿌렸다' 따위의 표현을 써서 말했기에 현대인이 보기에는 저게 무슨 뜻인가 싶다. 참고로 '돌을 심다'라는 행위는 돌로 된 건물들을 무너뜨렸다는 의미이고, '물방울을 흩뿌린다'라는 표현은 하늘에 있는 신의 행위로서 신의 힘을 빌어 적들을 물리쳤다는 뜻이다. 마야의 상형문자들을 해독해보면 태반이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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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junchan ajaw
waxakte’ paxiil
utz’apaw tuun
uchokow ch’aaj
aj yayaxjal
baak ucha’n bohb
k’uhul ho’kab ajaw
yila aj k’uhul mutul ajaw
yila waxak winak ajawtaak
12 아하우 8 파쉬(780년 12월 2일), 아흐 야야쉬할 바크, 코요테(보브)의 수호자, 호캅의 위대한 왕이 돌을 심고 물방울을 흩뿌렸다. 그것은 무툴의 신성한 왕과 28명의 왕들에 의해서 목격되었다.[57]
조금 더 언어학적으로 들어가보면 더 복잡하다. 마야인들은 독특하게 생긴 상형문자들을 사용해 뜻을 표현했다. 원래는 수많은 책과 벽화들에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스페인의 반달리즘과 자연적인 풍화 작용 때문에 대부분이 사라져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건물들에 새겨진 것들을 기준으로 문자들을 해독하고 있다. 2008년 기준으로 대략 마야 문자의 60%가 해독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고, 약 80%의 소리를 알아내는 데에 성공했으니 현재는 거의 대부분의 마야 문자를 해독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문자를 해독할 줄 안다고 해도 해독한 내용이 확실한 것은 아니고, 워낙에 문자 체계가 복잡하다보니 번역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는 있다.

마야인들은 문자를 쓸 때 2개의 세로줄을 기준으로 문자를 기록했다. 읽는 방향은 오늘날의 많은 문자들처럼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 방식이었는데, 합자도 가능해서 앞의 문자가 바로 뒤의 문자와 합쳐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문자를 기록할 때는 2개의 세로줄을 바탕으로 썼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어서 여백 공간에 맞게 T자형이나 L자형으로 문자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마야 문자는 기본적으로 표음문자였지만 표의문자의 성질도 일부 가지고 있었다. 마야인들의 문자는 상당히 유연한 편에 속해서 하나의 동일한 문자가 하나의 형태소를 의미할 수도 있었고 하나의 음절을 뜻할 수도 있었다. 표의문자의 성질을 띈 문자들의 경우,주로 모음이나 y, w, h 같은 약한 자음, 아니면 성문 파열음[58]으로 끝나는 단음절 단어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fish fi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이 단어를 해석할 때 단순히 '물고기 지느러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로 해석도 가능하다. 마야어로는 이 단어를 '카(kah)'라고 읽었는데, 이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카(ka)' 음절을 표시하는 단어로 완전히 굳어져버린 것.

이렇게 표음문자가 만들어진 이유에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여러 개의 음을 가진 하나의 문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모를 때 이를 구별해주기 위한 까닭이 있었고,[59] 나머지 하나는 특정 문자가 없었던 혼합문자체계의 경우에 문법적으로 정확히 표기하기 위한 것이었다.[60] 예를 들자면 마야어로는 재규어를 '발람(b'alam)'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마야어에는 재규어를 의미하는 표음문자가 존재했지만 그 방법 외에도 음절을 덧붙여 '바-발람(ba-b'alam)'이나 '발람-마(b'alam-ma)', 아니면 '바-발람-마(ba-b'alam-ma)'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표시할 때 표음문자를 사용해서 음절 하나하나를 표시했다. 아니면 '바-라-마(b'a-la-ma)'처럼 아예 싹다 음절 단위로 나누어서 구분하는 방법도 있었다.

13. 의학

마야인들의 의술은 미신과 의학이 반반 섞인 무언가였다. 주술사, 혹은 사제들이 의사를 겸했고 신들의 힘을 빌어 병을 치료하려 시도했다. 마야인들은 질병을 '악령에 의해 영혼이 사로잡힌 상태'로 인지했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초자연적인 존재를 노하게 하면 질병에 걸린다고 굳게 믿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주로 제사를 지내거나 약초를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약초를 그대로 씹어먹거나 담배로 말아피우는 방법을 주로 썼고, 가루로 만들어 코로 흡입하거나 연고로 문지르는 방법, 심지어 관장으로 몸에 투여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정 수준의 과학이 필요한 외과 수술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정교한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래서 약초가 안통하면 기껏해야 금식, 땀흘리기, 몸 밖으로 노폐물 빼내기 정도에 그쳤다.

마야의 의사, 곧 주술사들은 '아-멘(Ah-men)'이라고 불렀다. 극히 소수의 인원만이 아-멘으로 간택받아 대대로 의학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었으며 이들은 사회 내부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환자가 아프다면 그건 무언가 환자가 과거에 저지른 실수나 잘못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상담을 통해서 과거에 환자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털어놓도록 시켰고, 무언가 짚이는게 있다면 바로 제사를 지냈다. 당연히 제사만 지내면 병이 치유될 리가 없었으니 약초 치료도 병행했다. 약초를 섭취해야 하는 횟수는 성별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어 남자는 보통 13번에 나누어 약을 먹는 게 권장됐고, 여자는 9번에 걸쳐 약을 나누어 먹어야 했다.

마야인들은 해부학에 관련된 용어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창자는 '호브넬'이라고 불렀으며 담즙은 '카'라고 불렀다. 병리학적으로는 기관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기침을 '투후젠'이라 불렀고 후두 기침은 '젠', 박동이 있는 장 통증은 '팁텍'[61]으로 구분해서 부르는 등 무려 200여 개에 달하는 의학 용어들을 사용해 환자의 상태를 진단했다.

병에 걸렸을 때 가장 많이 병행하던 치료법은 땀 목욕인 '테메즈칼'이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사우나와 비슷한 것이었는데 땀을 한 번 쫙 빼고 나면 노폐물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고 몸이 개운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돌을 쌓아 건물을 지은 다음, 천장에는 작은 구멍을 냈다. 방 안을 뜨겁게 달군 다음 덥혀진 돌에 물을 부으면 증기가 발생했고 여기서 몇 십분 가량 머무르며 땀을 뺐다. 아픈 사람들은 땀 목욕을 하면 몸이 정화된다고 믿었기에 매일같이 탕을 들락날락거렸다고. 꼭 아픈 사람만 쓰는 건 아니었다. 임신한 산모들도 땀 목욕이 몸에 좋다고 믿어 자주 테메즈칼을 했고, 생리통, 폐경 치료, 히스테리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도 테메즈칼을 즐겼다. 사제와 왕들은 테메즈칼이 몸을 정화시켜준다고 믿어 제사나 의식 직전에 테메즈칼을 했다. 대부분의 마야 왕궁들에서는 왕과 귀족들 전용으로 쓰던 증기 목욕탕이 딸려 있을 정도.

대부분의 실질적인 치료는 약초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피부 자극, 피부에 난 상처나 두통의 경우 신선한 약초를 짓이겨 고약을 만든 다음 피부에 바르는 형태로 치료했다. 영혼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석고 가루도 함께 문질렀다고 한다. 질병에 따라 식물을 삶아 음료를 만들어 먹기도 했고, 물에 풀어 목욕을 하거나 코로 흡입하거나 인체의 여러 구멍들에 삽입하기도 했다. 가장 주로 사용된 약초는 칠리 고추, 카카오, 담배, 용설란, 파타릴라 나무 등이 있었다. 상황에 따라서 악어와 곤충, 동물, 새의 뼛조각 등 다양한 부재료들을 섞어 쓰는 주술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약초 치료마저도 썩 과학적인 치료 방법은 아니었다. 심지어 식물의 색을 보고 그 색깔에 맞추어 치료법에 쓰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황달을 치료한답시고 노란색 과일이나 식물을 처방하거나 혈액 관련 질환이나 황열병 치료에는 붉은 꽃을 먹고 붉은 새의 깃털을 태우는 비과학적인 방법을 썼다고 한다.

수술을 진행하는 주술사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를 다룬다고 해서 특별한 취급을 받았으며 따로 교육을 받았다. 물론 대부분의 수술은 뼈를 자르거나 팔다리를 절제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마저도 못받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술을 할 때에는 인간의 머리카락으로 상처를 봉합했고 원시적인 드릴을 사용해 두개골에 기본적인 천공 수술을 진행하기도 했다. 보철물들을 만들고 치아를 다양한 모습으로 다듬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마야 문화권에서는 이를 뾰족하게 갈아내는 게 유행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치아 관련 기술이 발전했던 것이다. 귀족들의 경우 이를 살살 갈아낸 다음 그 안에 옥 장신구를 끼워넣기도 했고 기타 장신구들을 입에 끼우기 위해 수많은 치아 수술을 받았다. 특히 여성들이 미모를 가꾸기 위해 이런 수술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충치 치료는 형편 없는 수준이었고, 이가 부러졌을 때에 화덕의 숯을 솜에 싸서 끼우는 등 미신에 의존하는 면이 심했다.[62]

14.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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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를 이용한 마야인들의 장난감. 당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바퀴를 발명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야인들의 기술은 상당히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결코 원시적이라고 볼 수 없는 정교한 디자인의 건물들과 거대한 도시들을 세웠던 문명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야금술이나 제련술을 할 줄을 몰라 철기 등의 고급 금속을 주조하지 못하는 등 시대에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63] 마야인들이 사용한 모든 도구들은 나무와 돌같이 원시적인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가장 기초적인 금속인 청동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수레 바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대규모의 물자 운송이 불가했다.[64] 그렇다고 해서 마야인들이 원시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 마야인들은 0을 사용하는 등 수학적으로 상당히 발전해 있었으며, 10, 100, 1000 등을 나타내는 별개의 기호가 있었던 중국이나 로마 등과는 달리 마야인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아라비아 숫자에서처럼 0과 자릿수를 이용했다. 유라시아의 대부분의 문명과는 달리 마야 문명에서는 20진법을 사용했다는 차이는 있다.[65][66]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기수법과는 대조적으로 마야문명을 포함한 아메리카의 문명에서는 구대륙과는 달리 고급 야금술이 없었으며[67] 그마저도 기원후 600-800 년경에 서부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68] 남미의 잉카 문명과 달리[69] 메소아메리카의 야금술은 발달이 늦은 편이였다. 제련술이 없었을때는 금, 은 같은 귀금속의 자리를 비취(옥) 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퀴 또한 물자 수송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이나 같은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들 중 하나가 마야인들이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다는 오해다. 사실 마야인들도 바퀴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바퀴를 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야인들의 어린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보면 소의 형상 아래에 조그마한 바퀴들이 달려있는 모습이다. 이런 구조의 바퀴 달린 장난감을 만들 수 있었다면 당연히 수레나 이동수단에 바퀴를 붙이는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야 문명이 발원한 열대우림 지대는 바퀴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옮기기가 까다로운 열대우림 + 늪지대 + 석회 구릉 구조였던데다가, 결정적으로 당나귀, , 처럼 바퀴를 끌 거대한 가축들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바퀴를 못 쓴게 아니라 안 쓴 것에 더 가깝다. 허구한 날 비가 오고 움푹 파인 길에 물웅덩이들이 질척질척거리는 곳이었던 탓에 바퀴의 효율성이 극도로 저하된 탓도 있었다.[70]

의외로 건축술은 현대인들의 생각에 비하여 떨어지는 편이었다. 극도로 정교한 건축술과 계산을 요했던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마야인들의 피라미드는 훨씬 필요한 지식과 건축 기술이 낮은 편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은 거대한 돌덩어리들을 깎아 하나하나 쌓아올렸고 그 규모도 압도적으로 거대해서 높은 수준의 수학적, 공학적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마야 피라미드의 경우 자갈을 대충 쌓아올린 뒤 겉면만 층층이 바위로 포장하고 석회를 바른 것에 불과하다. 아치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몰라 '코벨 아치'라는 사다리꼴 모양의 구조를 사용해 내부 공간을 만들었다. 코벨 아치란 돌들을 벽에서부터 경사지게 비스듬히 쌓아올려 천장에서 서로 맞대게 하는 건축 기법으로, 아치에 비해 안정성이 떨어지고 내부 공간도 협소하다. 하지만 코벨 아치보다 더 나은 기법을 찾지 못한 마야인들이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고 한다.

천문학 수준은 대단히 뛰어났다. 마야 문명의 천문학 수준은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은 문화권들 중에서는 독보적인 원탑인 수준으로 높았다. 마야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보다도 더 정확하게 회합 주기를 계산할 수 있었고 열대 태양력의 경우 스페인보다도 더 실력이 좋았다. 춘분 추분의 날짜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 이에 맞추어 천문대를 세우거나 신전의 위치를 맞췄고, 천체의 운동에 따라 사원들의 위치를 정렬시키기도 했다. 마야인들은 두 종류의 달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트졸'킨이라고 260일짜리 달력이었고 하나는 하아브라고 365일짜리 달력이었다. 열대 태양력의 1년이 정확히 365일이 아니라 365.2422일인 것도 이미 알고 있어서, 1,508일마다 하아브에서 1일씩을 빼서 균형을 맞추었다.[71] 마야인들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공전을 관측했으며 이를 모두 문서에 기록해 남겼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대표적인 천문 문서에는 '드레스덴 코덱스', '마드리드 코덱스' 등이 있다.[72]

15.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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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마야 종말론

장ㆍ 마야의 역법은 서기 2012년에 끝난다는 설로 지구가 2012년에 멸망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진실은 그냥 한바퀴 다 돈 것뿐이다. 십간십이지가 한바퀴 돌아서 다시 갑자가 오는 것과 같은 것. 마야에서의 십간십이지에 해당하는 년도는 144,000일, 394.3년이다. 그리고 마야의 역법에 따르면 이 단위조차 한바퀴 순환하려면 서력 477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20진수인 마야력에서 2012년은 고작 13에 해당하는 절기일 뿐. 참고로 1에 해당하는 절기는 BCE 3114년이었다. 마야인들이 가장 큰 단위인 B'ak'tun 이 끝나는 시기마다 큰 행사를 치른 건 사실이지만 지구 멸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서기 2012년 12월 21일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5월 10일 이후 달력이 발견되었다고. 쉽게 말해서 5세기의 끝까지만 남은 달력을 보고 지구가 그때 멸망할 거라고 해석한 꼴이었다.

16. 쇠퇴와 멸망

16.1. 과거의 학설

두 번째, 곧 후기 마야의 쇠퇴 원인은 위의 스페인 선교사의 반달리즘으로 인해서 상세하게 알기가 힘들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과도한 개발로 인한 토양침식, 즉 환경파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출토된 동시대 유물에서 치명적인 영양실조의 흔적이 보였고,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가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애초에 옥수수 자체가 지력 소모가 심한 작물이었으므로[73]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또한, 마야 문명 후반기에 북부지역이 과도하게 성장하면서 산림을 벌채하고 건축물에 사용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화전(火田)을 만든 것이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유카탄 반도의 생태계는 그만한 인구를 버텨낼 정도로 강인한 생태계가 되지 못했다. 숲이 벌목과 화전으로 사라지자, 주요 초식 동물들은 순식간에 멸종하여 사냥으로도 지탱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멕시코 쪽의 군사 개입이 마지막 숨통을 끊었으니, 이는 막무가내식 개발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스터 섬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농법에 대한 설명은 유카탄 반도 북부의 도시들에는 비교적 잘 들어맞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렝케 등의 도시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현재 마야인들의 농법은 화전을 기본으로 하고 북부 해안 가까이 있는 도시들에서는 당시에도 화전을 바탕으로 한 것 같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렝케 등에서는 화전 대신, 세밀하게 짜인 수로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로를 이용해서 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수로 위에 자라는 수초들을 땅에 뿌려서 비료 겸 뿌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화전 방식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야 문명에서는 물이 권력의 상징인데, 수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멸망을 부추긴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배층이 지나치게 전쟁에만 골몰했다는 점이다. 마야의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파괴적으로 변해서 여러 번성하던 도시들이 전쟁으로 멸망했다. 말기로 가면 마야 문명의 기록에 다른 도시를 파괴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며, 실제로 여러 도시의 역사가 끊어졌다. 여기에 과도한 개발 등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 심각해지는데도 전쟁과 인신 공양에만 열을 올리는 지배층에 대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시를 뒤집어엎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 민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지만, 도시들이 멸망한 후에도 농민들은 수백 년 이상 도시 주변에서 계속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정황 증거로 제시된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 제국에 괴멸적인 피해를 준 천연두는 마야에도 마지막 숨통을 틀어막는 수준의 피해를 줬다. 열대우림 지역에 잔존한 마야의 세력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스페인군의 진격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1531년 후기 마야의 중심지였던 치첸 이트사가 함락당했을 때 금방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스페인의 침략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여담으로 당시 스페인인들이 더 거대했던 아즈텍이나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이 마야를 정벌하는 쪽이 더 오래 걸렸는데[74], 역설적으로 이는 마야인들의 문명은 이미 붕괴한 상태라 중앙 정부가 부재하여 쪼개진 세력을 하나하나 점령해야 했고, 경제 구조 자체가 박살나서 마야인들은 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지라 대체로 콩키스타도르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론이 각자 하나씩 있는데 먼저 농경의 경우에는 현대의 화전처럼 대규모 화전으로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면 모를까, 마야 전성기의 인구를 생각하더라도 넓은 열대우림에 비하면 농경지는 아주 적은 비율이었다. 마구잡이식 개발로 자멸할 정도는 아니었던 셈.

16.2. 현대의 정론

21세기 이후, 각종 고고학자의 조사 끝에 불리한 자연환경+고립된 지형+이에 맞지 않았던 사회 및 경제구조였던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수많은 문명이 부적절한 자연환경과 재해 끝에 몰락하긴 했지만, 마야 문명의 경우에는 인류 역사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심각했다.

통념과는 달리, 열대우림은 거의 녹색 사막에 가까울 정도로 굉장히 식량 생산력이 낮은 지역이다. 열대우림은 굉장히 뛰어난 생명력과 재생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곧 '식량 생산량'이 뛰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도 독이 있는 것들이 많고, 먹이도 제한되어 있어서 대형동물들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다.[75] 때문에 아프리카와 같은 다른 열대우림에서는 꽤 오랜 기간 부족 형태로만 인구가 지탱되었다.

게다가 유카탄 반도의 열대우림은 풍부한 강수량과 일조량이 있는 지역이지만, 토양은 석회질이 많아 내린 비는 쉽게 빠져나가서 지표에 남지 않고 강수량은 너무 많아 매우 척박한 라테라이트 토양만 남는다. 이러한 환경은 풍부한 일조량과 강수량 덕분에 삼림의 생산력은 뛰어나지만, 토양 침식으로 영양분이 되는 가용성 염기는 부족해서 식량이 될 수 있는 씨앗이나 과일 종류의 생산력은 부족하다. 이러한 이유로 농사를 지어도 일반적인 농법으로는 생산량이 적다. 거기에 당시 중앙아메리카의 주요 수확 작물은 옥수수였는데 지력이 빨리 쇠하지만, 지력 회복작물이 부족했던 아메리카에서는 그냥 땅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76] 일반적으로는 이 경우, 윤작을 해서 지력을 회복시키지만, 열대우림의 압도적인 재생력은 지력 회복은커녕 그냥 그 일대를 문명 이전의 정글로 되돌려 버리기 일쑤였다. 다른 열대우림들과 마찬가지로 문명이 생기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는 수준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연환경에서 과도한 토양침식에 대항할 가장 적합한 농법은 화전이었다. 불로 필요없는 임야를 태워주면, 가 마치 비료처럼 가용성 염기를 제공해서 땅이 비옥해져서 지력을 회복했다. 이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대우림의 재생력[77]은 아주 뛰어나서 비워진 자리엔 금방 2차림이 들어서고 그럼 다시 태워서 화전을 경작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마야 문명은 열대우림이라는 문명 형성에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화전과 정글의 빠른 회복력을 기반으로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준의 안정적인 농경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고도의 번영 아래엔 당대 마야인들이 알 수 없을 몇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만약 가뭄 등의 문제로 정글이 회복되지 못할 경우 마야 문명 전반이 올스톱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마야 문명은 잔혹한 맬서스 트랩 속에서도 어떻게든 통치력을 발휘하며 문명을 번창시켜 왔으며, 어차피 유카탄 반도 자체가 울창한 열대우림 지대라서 이런 균형은 어느 정도 일정히 유지되어 왔지만… 하필 고전기 말기에 대재앙인 소빙하기가 닥친다.

북대서양 고기압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그로 인해 원래 우기에 유카탄반도에 내려야 하는 비구름이 남쪽으로 가버려, 그 지역에 그야말로 7,000년 중의 최악의 가뭄이 찾아오고 만다. 송수로나 저수시설을 만들 수도, 만들 필요성도 체감할 수가 없었던 마야 문명은 외부와 제대로 된 교류가 불가능한 말라붙은 정글 한복판에 방치되었고, 강도 없는 이런 상황에선 가뭄으로 농사를 망쳐서 굶어 죽는 것보다 수분을 섭취 못해서 죽는 게 더 위험했다. 아사는 3주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물이 없다면 인간은 3일도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야 문명의 구성원들은 탈출 및 생존 수단이 완전히 봉쇄된 상태에서 여러 번의 대기근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된 극단적인 잔혹한 전쟁을 통한 반란과 봉기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지배계층들에게도 이런 가뭄과 대기근은 당대 기술 및 문화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정글 한복판에 고립된 문명이라는 문제로 인해 이런 자연환경을 피해 도망칠 대탈주나 개척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Ancient Apocalypse> 시리즈 3편 <The Maya Collapse>에서는 소빙하기로 인해서 물이 말라버려 농사도 완전히 망치게 되었고, 위에 쓴 것처럼 이전의 10% 혹은 그 이하 수준의 인원만 어떻게 살아남으면서 몰락했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한 유적지에선 도시가 쇠락했을 때로 추정되는 시대를 살았을 가족 단위의 살해된 성인과 아이들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치아에 보석 장식을 하는 등 지배 계층으로 추정되었다. 추측하자면 기근이 닥치고 제사장 계층이 그걸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한 농민들이 제사장과 그 일가를 살해한(추정으로는 인신 공양을 해버린 것 같다고) 것으로 여겨진다. 더는 지배계급의 신성한 능력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소빙기가 끝난 이후에도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랜 기간 누적된 마야문명의 영향으로 유카탄 반도의 토양은 광물성 자원 부족+수은 오염 등에 신음하고 있었고, 아예 땅 자체의 생산력이 떨어져 버리니 밀림을 다시 불태워도 작물이 제대로 자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소빙하기의 타격이 무시할 수 없다지만 예전이었으면 도시가 자연재해 등으로 망해 밀림 속에 버려져도 시일이 지나면 다시 개발하고 번영 했지만, 당대 생존자로선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는 커녕 인식하기도 힘든 환경오염에 노출된 꼴이었다. 결국 고전기와 달리 후고전기에 접어드니 도시 자체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고, 이렇게 거의 모든 수준의 문명적인 생존법이 봉쇄된 마야 북부의 인구는 이전의 10% 혹은 그 이하로밖에 남지 않았다. 당연히 기존의 마야 문명의 모든 행정력은 이런 가혹한 정글 환경에 적응 가능한 부족 단위로 뿔뿔이 분산되었고, 마야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반복되는 재앙 끝에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 500여년이나 지났음에도 원상회복은 커녕 문명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 상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마야인들의 실책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존재했던 많은 문명은 많은 실책과 문제점 투성이었지만 주도권을 잡고 번성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의 장점과 세련된 문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기후의 변화, 화산 활동 등의 자연재해로 멸망하거나 쇠퇴하기도 했다. 다만, 마야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운이 없었고, 이 상처를 수 세기에 걸쳐 회복하기도 전에 스페인 식민시대가 시작되고 천연두 등의 구대륙 질병이 들어오자, 다시금 이런 끔찍한 인구 감소가 재현되면서 뿌리까지 뽑히고 말았다.

선고전기부터 장장 2000여년 가까이 녹색사막인 정글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룬 건 분명 대단한 업적이긴 하나 반대급부로 환경파괴가 누적되어 임계점을 넘어버린 결과는 비참했다. 마야인 자신들도 이런 결과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며 고립된 문명이란 특성상 피할 곳도 없긴 했다. 후세 입장에선 그저 아쉬울 뿐...

17. 인신공양과 식인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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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남팍 유적의 벽화.
왼쪽 아래에 손톱이 뽑혀나가 피를 흘리는 포로의 모습이 보이고, 피흘리는 채로 전사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포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메소아메리카 지방 특유의 지나친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 역시 빈번했다.

흔히 인신공양과 식인하면 이 것 때문에 다른 민족들이 스페인과 함께 싸워 멸망시킨 아즈텍 제국을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아즈텍은 멕시코 최대의 판도를 장악한 거대 제국이었기에 이에 따라 인신공양의 규모가 늘어난 것뿐이다. 마야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비슷한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아즈텍처럼 대규모의 인신공양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야의 인신공양 횟수는 발굴된 유골의 개수만 세어봐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한마디로 아즈텍과 달리 평화롭고 철학적인 마야 문명이라는 기존의 인식은 명백한 기록, 유적, 유물 앞에서 허구로 드러난지 오래이다. 오히려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식인 및 인신공양은 아즈텍이 마야인들한테서 배워간 것이다. 즉 사실상 이 분야의 원조인 원흉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즈텍의 대규모 인신공양으로 인한 피해자들 중에는 마야인들도 있었지만.

주요 사원이나 궁전을 완공하거나, 새 왕이 즉위할 때는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수많은 사람들을 인신 제물로 바쳤다. 적국의 국왕이 가장 가치있는 제물이었고 귀족, 평민 순서였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적국의 사람들을 그대로 제물로 바쳤는데, 곱게 보내준 것도 아니어서 제물로 바치기 전에 구타를 하고, 두피를 벗기거나 불에 태우고 내장을 뽑아버리는 등 매우 가혹한 고문을 가한 후에야 죽였다. 만약 천재지변이나 재난, 전염병이 창궐해 신의 노여움을 풀겠다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칠 때는 전리품인 포로들을 의식의 재물로 삼았고 가슴을 갈라 펄떡이는 심장을 꺼냈다. 살아있는 사람을 바로 제물로 바치면 가 지나치게 많이 튀기 때문에 먼저 입, 코, 귀, 손가락, 음경 등에 구멍을 뚫어 피를 빼냈다.[79] 피를 빼내 축 늘어진 사람을 돌 제단 위로 끌어올린 다음, 갈비뼈가 끝나는 지점을 칼로 갈라 횡격막을 뚫고 그 안 아래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위쪽에 자리한 심장을 꺼냈다. 맨가슴을 가르면 단단한 갈비뼈 때문에 심장을 꺼내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갈비뼈가 끝나는 아래 지점을 갈랐던 것이다.

심장을 꺼내 죽어버린 시체는 피라미드 위에서 던져 계단 아래로 굴려 보냈다. 그러면 피라미드 아래에서 대기하던 사제들이 손과 발을 제외한채 시체의 가죽을 벗겼고, 벗긴 가죽을 뒤집어쓴 다음 제례 의식용 춤을 추며 신의 축복을 기원했다. 특히 용감한 전사나 국왕처럼 고귀한 신분의 시체라면 시체의 고기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전사들이 나눠서 구워 먹었다. 이렇게 하면 생전 고인의 힘을 일부나마 물려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가죽을 벗길 때는 손과 발을 남겨두었는데, 전쟁 포로의 경우 이 남은 손과 발을 잘라 해당 포로를 죽인 전사에게 선물했다. 전사들은 이 손발을 말려서 허리띠에 차거나 몸에 달고 다녔다. 죽은 포로의 손과 발을 많이 달고 다닐수록 용감한 전사로 인정받았기에 전사들은 최대한 많은 양의 손발을 가지려 서로 경쟁했다. 마야문명에 대한 고증을 많이 반영한 영화 아포칼립토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칼로 찔러 잘라낸 펄떡이는 심장을 제물로 삼아 심장을 갈라 죽인 뒤 목을 베어 계단에 굴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꼭 심장을 갈라서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화살을 쏘아 최대한 고통스럽게 포로를 공양하는 방법도 있었다. 희생자는 옷이 벗겨진 채로 푸른 염료로 칠해졌고, 그 상태 그대로 말뚝에 묶였다. 이후 희생자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전사들이 희생자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방식이었다. 희생자의 피가 땅에 많이 흘려질수록 길한 징조라고 여겼기 때문에 일부러 급소나 치명적인 부위는 피해서 쐈다. 코덱스 기록들을 보면 '희생자의 급소에는 흰색으로 원을 그려놓고, 전사들은 일부러 그 지점을 피해서 화살을 쏜다'라고 나와있다. 희생자가 피를 흘릴 대로 흘리고 죽기 직전 상태가 되면 그제서야 급소를 쏘아 희생자를 죽였다.

벨리즈의 어느 인신공양 동굴에선 9,566개에 달하는 어린이의 뼈가 발굴되었는데, 분석 결과 최소 114명의 어린이 노예들이 83조각으로 토막난 채 인신공양을 당했다고 한다. 치첸 이트사에선 127명의 어린이 뼈가 나왔고, 세노테 사그라다에서는 200명의 어린이와 처녀의 뼈가 나왔다. 아즈텍에선 6~7세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의 손톱을 뽑아 틀랄록에게 바치는 끔찍한 풍습이 있었는데, BBC의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마야에선 한 살도 안 먹은 어린이를 참수해 인신공양하거나 6살 꼬마의 얼굴가죽을 도려내는 등 온갖 잔혹한 아동학대가 펼쳐졌다고 한다. 특히 새 국왕이 즉위할 때마다 소년의 심장을 꺼내거나 아기들을 신전 바닥에 죽여서 묻는 습관이 존재했다. 심지어 죽은 어린이의 대퇴골을 공예하여 피리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80]

마야 문명에서는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제물이 될 포로를 잡기 위해 정복 전쟁을 수행하여 타 부족의 전쟁포로들의 심장을 꺼내는 인신공양을 했다. 때론 귀족들만 참여하는 피찰이라 불리는 종교적 스포츠이자 마야식 축구를 하는데, 진 팀은 전원 제물이 되거나 반대로 이긴 팀이 제물이 되어 인신공양을 하기도 했다.[81] 처녀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춤을 추거나, 화살로 쏘아 피를 땅바닥에 적시는 등의 인신공양 풍습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신공양 풍습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문명권이기도 하다. 아즈텍 제국이 1520년대에 멸망했는데, 마야 문명은 1700년까지 근 200년간 인신공양 풍습을 현역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례로 멕시코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해 접근이 쉬웠던 아즈텍 제국과 달리, 마야 문명의 영향권에 있었던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벨리즈 지역의 경우 빽빽한 정글과 산림지대로 이루어져 군마의 기동력도 느려지고 난생 처음 접해보는 정글 환경에 스페인 왕국의 레콘키스타들도 애먹어 식민지 정복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기록도 많이 남아 있는데, 희생자는 대부분 현지의 마야인들에게 붙잡힌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사실 남미 원주민들이 스페인에게 학살당한 것만 잘 알려져 있지만 마야인들이 역으로 스페인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는 사례도 꽤 많았다. 1511년 '산타 마리아 데 라 바르카' 호가 자메이카 근처에서 난파되어 선장 페드로 데 발디비아와 10 여명의 수하들이 겨우 탈출해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는 일이 있었다. 발디비아 선장은 불쌍하게도 유카탄의 마야인들에게 사로잡혔고, 그와 4명의 부하들은 제물로 바쳐진 후 마야인들에게 먹혔다.[82] 1529년에는 한 스페인 원정대가 통째로 마야인들에게 먹혔고, 1555년에도 '도밍고 데 비코' 수사가 선교 중 마야인들의 미움을 사 심장이 적출되고 머리가 잘려 장대에 걸렸다. 최후의 마야 도시라고 불리던 '노흐페텐'도 마찬가지였다. 1620년대에 디에고 델가도 수사와 그가 이끄는 13명의 스페인 군인, 40여 명의 개종한 마야인들이 노흐페텐을 방문했는데, 이들 역시 죄다 목이 잘리고 제물로 바쳐졌다. 스페인 군인들의 시체는 교회의 십자가에 박힌 채로 전시되었다고. 이후 1680년대, 1690년대까지도 스페인 선교사들이 노흐페텐으로 잡혀가 산 채로 제물로 바쳐지는 일들은 비일비재했다.[83]

18. 주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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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마야 문명의 유적지는 멕시코 동남부의 5개 주( 치아파스 주, 타바스코 주, 캄페체 주, 유카탄 주, 킨타나 로오 주)에서부터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북부, 온두라스 서부 일부 지역에 이르는데 조사가 어느 정도 된 것만 해도 400개 이상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소규모이거나 아직도 조사가 안된 것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주요 마야 유적은 다음과 같다.

19. 매체

20. 여담

파일:Interior,_Templo_IV,_Tikal_1957.jpg
파일:chos60ty07d21.jpg
티칼 4번 피라미드 꼭대기 사원의 내부 모습과 외양
오방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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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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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
백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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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오방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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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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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21. 관련 문서



[1] 마야 문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마야 문명의 초기 단계인 선고전기는 기원전 2000년에 시작되지만, 기원전 1800년, 기원전 1500년부터를 마야 문명의 시작으로 잡는 쪽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최초의 도시들이 만들어지는 기원전 750년 경을 마야 문명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잡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마야 문명의 토대가 형성되었던 마야 고졸기는 기원전 8000년부터 시작됐다. [2] 전쟁에서 패해 몰락해가던 티칼을 부흥시켜 마야 문명 최고의 강대국으로 발돋움시킨 성군. [3] 마야 세계에서 티칼과 쌍벽을 이루었던 도시국가 칼라크물의 왕으로 칼라크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4] 팔렝케의 국왕.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2번째로 오래 재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5] 아직 도자기가 발명되지 않은 '선도자기 시대'라고도 부른다. 원주민들이 메소아메리카 지방에 정착하고 기초적인 마을을 형성하는 등 마야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틀과 토대가 잡히던 시기. 대략 6000년 가량 지속되었으나 이 기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6] 최후의 마야 도시였던 노흐페텐이 스페인 군대에게 점령당한 것을 마야 문명의 공식적인 종결로 본다. [7] 지금은 정글속에 파묻혀서 저렇게 보이지만 저 건물은 '단타 복합단지'(La Danta)라고 해서 마야인들이 세운 마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석조 건물이다. 훗날 고전기의 도시들도 이보다 더 거대한 건물은 건설하지 못했다. [8] 대략 한국의 충청북도의 절반 수준 [9] 다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가장 거대한 대도시들이라고 해봐야 인구가 100,000명을 넘지 못했고, 인구는 5,000여 명에서 몇 만명까지 다양했다. [10] 부활에 성공한 티칼과 달리 칼라크물은 다시는 옛 성세를 되찾지 못하고 그대로 쇠퇴했다. [11] 참고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는 캐나다 엘리자베스 2세였다. [12] 2만 3,000m²의 넓이에 200여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13] 1541년 스페인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나 1549년 유카탄에 도착했다. 이후 활발한 선교 활동으로 인해 사후 주교에 봉헌된다. [14] 스페인 왕실 측에서는 '기독교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원주민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유치한 수준'이라며 원주민들을 종교 재판에서 면제해주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란다가 원주민들에게 종교 재판을 진행할 때 필수적이었던 절차 대부분을 생략하고 임의로 처리해버리면서 란다에 대한 본국의 불만은 더더욱 심해졌다. 결국 란다는 지나친 종교 재판으로 고발당해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당했고, 결국 1571년 멕시코에서 숨을 거뒀다. [15] '원주민=정복해야할 열등한 대상'이라고 여겼던 당시 스페인인치고 이는 놀라운 행동이었다. 일부 부족들은 란다와 친해지자 부족 대대로 내려오는 사슴가죽 책을 란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문제는 란다가 원주민들과 친해지려 시도한 동기 자체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 다음 최대한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긴 했지만... [16] 란다는 마야인들의 손목을 줄로 묶어 매달은 다음, 발에 무거운 추나 돌을 매다는 식으로 고문했다. 이 과정에서 지나친 고문을 이기지 못한 마야인들이 죽었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란다는 이를 부인했다. [17] 현재 이 유물들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립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18] 팔렝케의 비문의 사원에 존재하지도 않는 코끼리 머리를 그려넣는가 하면 욱스말의 피라미드를 대놓고 이집트풍으로 묘사했다. 유럽인들은 이 그림만 보고 마야 문명과 구대륙 간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19] 발덱은 방대한 포르노 작품을 출판한 걸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걸맞은 죽음을 맞았다. 까페에서 아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중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자 그녀를 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20] 흔히 '마야 문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이들의 삽화에서 기원했을 정도로 유럽인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스티븐스는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1852년 뉴욕에서 죽었다. 반면 캐서우드는 1854년 타고가던 배가 난파되며 130여 명의 승객과 함께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다. [22] 여담이지만 샤르나이와 모슬레이의 사이는 딱히 좋지만은 않았다. 열정적이고 허풍이 심한 프랑스 출신 샤르나이와,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영국 출신 모슬레이의 상성이 서로 극과 극이었던 것이다. 모슬레이는 자신의 일기장에 샤르나이에 대한 욕을 적기까지 했다. 하지만 둘은 겉으로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샤르나이는 모슬레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대부분을 전수해주었다. [23] 오죽 충격이 컸으면 일부 마야학자들은 보남팍 벽화가 위조된 게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다. 기존 마야학자들이 품고 있던 환상주의적이고 평화로운 마야 문명의 이미지와는 지나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24] 마찬가지로 이 무덤을 발견한 루스 역시 이 발견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했다. 팔렝케의 파칼 왕의 무덤이 예외적인 사례고 마야 피라미드들은 일반적으로 무덤으로 쓰일 목적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훗날 티칼을 포함해 다른 유적의 피라미드들에서도 수차례 유해 발굴이 일어나며 결국 '마야의 피라미드 = 왕의 무덤'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25] 이라는 단어는 마야어로 젊음을 뜻하는 단어였으며, 이후에는 왕자를 뜻하던 단어에서 귀족 전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26] 스페인어식 독음이다. [27] 환각제를 사용해서 예언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칠란'에 대한 마야인들의 존경심이 상당해서 스페인 선교사들에게는 최악의 척결 대상들 중 하나였다. [28] 사실상 당시 마야에서 유일한 신분 상승의 사다리였다. [29] 이런 풍습 때문에 처음에 마야 고위층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두개골을 보고 학자들이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 크리스탈 해골의 모양이 길쭉하게 생긴 것도 이 영향을 받았다. [30] 마야 세계에서 옷을 입지 않고 묻히는 건 대단한 모욕이었다. 그래서 사로잡혀 죽은 전쟁 포로나 노예들은 알몸으로 묻혔다. [31] 대부분의 마야 평민들에게 전쟁에서 자국의 왕이 지고 다른 국가에 편입된다고 해도 그저 세금을 내는 대상이 바뀌는 차이 뿐이었다. 사실 도시 인구의 대다수는 전쟁에 활발히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32] 이 갑옷은 의외로 효율이 매우 좋았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사용하던 강철 갑옷보다도 더 쓸모가 있었다. 덥고 습하고 푹푹 찌는 날씨의 우림에서 금속으로 만든 갑옷은 쉽게 녹슬 뿐만 아니라 굉장히 무거웠다. 하지만 면 갑옷은 경도도 강철 갑옷에 만만치 않게 강했을 뿐 아니라 더 가볍고 통풍도 잘되었기 때문. [33] 마야 도시들이 활발히 무역에 종사했던 것은 아즈텍 제국과 마야 문명이 충돌하지 않았던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 호전적인 아즈텍인들도 마야 문명의 존재를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냥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팔아주고 우리 것을 사주는 저 멀리 사는 이방인들' 수준으로만 알았기에 굳이 마야 문명까지 정복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34] 이는 상인들의 수호신이 지하세계의 두 신이었기 때문이다. 두 신처럼 몸을 검게 칠하고 수호신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길 기원했던 것. [35] 현재와는 달리 피라미드에 모두 색이 입혀져 있었다. [36] 놀랍게도 현대 재현물이 아니라 실제 당시 건물 그대로의 모습이다. 마야인들이 이 사원 위에 새 사원을 그대로 덮어씌우는 식으로 공사를 진행했고, 그 덕분에 기적처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37] 마야의 구기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신에게 바치는 예식과도 비슷한 퍼포먼스였고, 실제로 구기 시합에서 진 팀의 선수들이 제물로 바쳐질 정도로 살벌했다. [38] 마야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와 달리 완전히 암석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겉의 포장돌을 몇 개만 벗겨내보면 그대로 안의 흙과 자갈이 나온다. [39] 당시 마야의 위생상태와 전염병에 걸리기 쉬운 열대우림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대단한거다. [40] 고대 마야에서는 황금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 바로 이었다. [41] 마야인들은 몰래 잊혀진 신전이나 왕궁에 들어가 무덤을 파헤쳐 도굴하는 일이 많았다. [42] 또다른 단단한 재료인 흑요석도 확실히 날카롭고 단단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지나치게 잘 깨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옥은 흑요석에 비해서 훨씬 내구도도 높았고 오래갔다. [43] 즉 초상화처럼 해당 석비에 왕의 얼굴 특징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눈과 코와 입이 달린, 정말 기본적인 인간의 특징만 묘사했다. [44] 이 분야의 최고봉은 코판의 의례용 계단. 무려 2,200여 자의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마야 유적들 중 단일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다. [45] 이 천을 '후이필'이라고 부른다. [46] 야금술이 없어 황금이 없었던 마야에서는 이 제일 귀한 광물이었다. [47] 물론 이 영화에도 고증 논란은 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관점으로 지나치게 마야인들과 그 의상을 야만스럽게 표현했고, 자칫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의 침략을 옹호하는 뉘앙스를 줄 수 있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마야 문명의 전성기 시절 모습과 당대의 생활상을 영상으로 담아낸 정말 몇 안되는 미디어물들 중 하나기에 마야 문명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48] 엘리트 계급들이 이 행위를 많이 했는데, 일단 흑요석 칼로 구멍을 뚫은 다음 가오리 가시를 꽂고 다니면서 구멍을 넗혔다. [49] 물론 나중에는 대부분이 헛소리로 밝혀졌고, 현대 마야학자들은 초고대문명설을 헛소리 취급한다. [50] 타말은 잎 따위로 겉포장이 되어 있는 상태의 음식이었기에 운송, 보관하기가 매우 용이했다. 그래서 마야인들이 이동이나 여행할 때 매우 즐겨 먹었다. [51] 아보카도의 원산지는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지방이다. 마야인들은 아보카도의 부드러운 식감과 풍미 때문에 아보카도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매운 고추와 양파, 라임 주스와 아보카도 등을 혼합해 초기적인 형태의 과카몰리 소스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52] 1500년대 스페인 침략자들이 카카오를 발견한 뒤 그 맛에 반해 유럽으로 카카오를 실어보냈고, 이후 17세기 중반에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기호에 맞춰 설탕 등이 첨가되며 현대인들에게 친숙한 단단하고 달콤한 형태의 초콜릿이 등장한다. [53] 카라콜에서 일부 가오리, 바다메기 등 해산물들의 흔적이 발견되긴 했지만 극소수였고, 그마저도 바다에서 강을 따라 겨우겨우 이동시킨 것에 불과했다. [54] 당시 분서를 주도했던 선교사인 디에고 데 란다 주교는 아이러니하게 마야 문자의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마야인의 문물을 스페인어로 기록한 『유카탄 견문록(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án)』을 쓴 학자이기도 했다. [55] 현존하는 마야 문서에 대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조. [56] 여담으로 마야 문자가 음절언어란 것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은 소련의 언어학자인 유리 발렌티노비치 크노로조프다. 다만 당시 학계의 주류는 상술된 에릭 톰슨이 주장한, 마야문자는 표의문자라고 여겼던데다 냉전시대였기에 그의 연구결과도 오염됐으리라 여겼기 때문에 수십년간 빛을 보지 못했다. 여담으로 그는 당시 자신이 기르는 샴 고양이인 아시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공동저자에도 이름을 실으려고 사진도 같이 찍는 기행을 벌였지만 편집자들이 아시아를 빼는 바람에 화를 냈다고 한다. [57] 모든 비문들의 내용이 다 이런식이니 마야학자들은 일단 내용을 1차적으로 해석했다고 해도 그 진짜 뜻이 무엇인지 짜맞추어야만 한다. [58] 자음의 하나로 성문에서 조음하는 파열음이다. 한국어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음이나, 초성이 ㅇ인 단어(특히 숫자 1)를 발음할 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59] 마치 일본어 후리가나를 생각하면 된다. [60] 이 경우 일본어의 오쿠리가나를 생각하면 된다. [61] 맹장염일 가능성이 크다. [62] 마야인들의 치료법은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뱀에 물렸을 때는 담배를 피우라 시켰고 몸이 아프면 새의 지방을 생으로 먹거나 의 똥을 말려 먹거나 박쥐를 꿀에 재워 술을 만들어 마시는 게 치료법이었다. 심지어 산 두꺼비를 생으로 술로 만들어 마시라는 치료법도 있었는데, 오히려 독두꺼비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야인들의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던 걸 생각하면 다른 치료법들도 당연히 별다른 효력은 없었던 모양. [63] 때문에 마야에는 인근의 잉카 제국만큼 제대로 된 황금 유물이 남아있지 않다. [64] 이는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하지만 바퀴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 자세한 내용은 후술. [65] 다만 이와 같은 숫자체계는 마야문명에서 발명한 것이 아니라 더욱 이전의 문명인 올멕 문명에서 이미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66] 그런데 이들의 20진법은 조금 특이한데, 보통의 기수법에서는 예를 들어 10진법이라면 자릿수가 1, 10, 102, 103, 104 , … 이렇게 나가지만, 마야 문명에서의 20진법은 1, 20, 18×20, 18×202, 18×203, … 이렇게 나간다. [67] 금과 은 구리 같은 금속을 주조하여 제련하는 수준의 야금술은 있었다. 무기를 아예 만들지 않은것은 아니나 대부분 의례용이고 그마저도 흔하지는 않았으며 철기기술은 없었다. [68] 메소아메리카의 야금술은 에콰도르 지방을 통한 해양 교역으로 처음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69] 신대륙의 야금술은 기원전 2000년경에 남미 안데스 지역에서 처음 나타난다. [70] 근현대 시기 러시아 소련이 그 악명 높은 라스푸티차 때문에 자동차나 마차 대신에 철도나 마소, 무한궤도를 단 민수용 장갑차 등에 의존했던 이유와도 같다. [71] 365 x 1,508 = 365.2422 x 1,507 정도로 대략 맞아떨어진다. 일부러 1일을 뺀 다음 주기를 다시 시작해 계산을 맞추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점점 오차가 누적되었는데, 이 것도 따로 계산해 달력을 다시 맞췄다. [72] 안타깝게도 스페인 선교사들이 마야인들의 기록들을 우상이자 악마의 문서라고 여겨 보이는 족족 불태워버려서 남은 게 많지 않은 실정이다. [73] 반면, 북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러한 옥수수의 단점을 인식하여 토질의 영양분을 보충하는 호박, 땅콩과 함께 심어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등, 지력 소모를 방지했다. [74] 물론, 현지 원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스페인의 정벌이 실패하여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받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지금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 남미 중남부 지역을 식민지화했던 마푸체보다는 성공한 편이다. 사실, 중남미에는 마푸체 외에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족이나 온두라스의 렌카족, 페루의 잉카 잔존 세력들 같이 스페인의 식민 침략에 대항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없진 않았는데 결국 이들은 모두 오랫동안 저항을 지속하지 못하고 스페인군에 의해서 진압, 정복되었다. 하지만 잉카 잔존 세력들의 경우, 40년 넘게 스페인군에게 항거하는 저항이 이어졌었다. [75] 중남미 정글에서 초식동물은 이 가장 크고, 맹수는 해봐야 재규어가 가장 크다. 그래서 사람도 목숨걸고 힘들게 사냥해봐야 얻는 고기가 적고, 채집 활동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몇 과일 정도밖에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군이 왜 임팔 작전에서 싸우다 굶어 죽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76] 상술되어있듯 콩은 마야 문명에서 주요한 식량 작물이며 이들의 지력 회복 능력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그러나 열대우림의 압도적인 재생력은 농지도 순식간에 정글화시킬 정도라... [77] 풀과 나무들이 다시 자라는 기간과 밀도. [78] 실제로 스페인의 식민 이후의 중미에서도 여러 번 심한 기근의 기록이 발견된다. 그래서 현대까지도 원주민들 사이에선 기우제 의식이 남아있다. [79] 주로 동물 뼈나 가오리 꼬리뼈로 만든 날카로운 가시를 사용했다고 한다. [80] 중국에선 민심이 나빠질 경우, 왕이 주술을 위해서 아이를 죽인 후 궁궐 기둥에 묻게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상나라 시기에 부족한 건축기술을 주술로 보완하려는 행위였는데, 이후 건축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정치•사회 구조가 정교해지면서 학정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었다. [81] 이 당시 승리 팀의 일원으로서 제물이 된다면 죽음의 신이 된다고 믿었기에 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82] 아귈라와 게로로 등 일부 선원들이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 이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83] 노흐페텐으로 잡혀간 선교사들은 처형당하기 직전에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몸이 묶인 채로 섬 해안가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노흐페텐은 1690년대에 보다못한 스페인 군대에게 공격당해 멸망당했다. [84] 가령 러시아사에서 고대라고 하면, 서구화 개혁을 실시했던 표트르 1세의 치세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85] 아즈텍 제국, 마야 문명, 잉카 제국 [86] 사실 마야 문자에 대한 기록물이 온전히 남았더라도, 인쇄하거나 전산화할 때의 어려움이나, 문해율 문제때문에 로마자로 대체되는 건 똑같았을 것이다. 몽골어 몽골 문자에서 키릴 문자로, 튀르키예어 아랍 문자에서 로마자로 표기법이 바뀐 것도 이 때문이었다. [87] 피찰이라는 스포츠로 중요한 종교 의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전용 경기장 유적이 남아있는데, 양키 스타디움과 비슷한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청 앞이나 동네 축구장, 실내 경기장 등지에서 이루어진다. 지금은 배구공을 쓰지만 예전에는 고무공을 사용했으며, 손과 발을 둘 다 쓰면 안 되고 머리, 상하박과 종아리를 주로 사용한다. 또한 예전에는 마야어를 썼지만 지금은 그냥 스페인어로 경기를 진행한다. 옛 마야 문명에 속했던 국가끼리 모여 국제대회를 치르기도 한다.(벨리즈는 영어를 쓰긴 하지만 스페인어도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공놀이에 참가하려고 하면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이 낫다. 옛 마야 제국의 단결을 위해 대회를 실시하니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88] 유카탄 방송인 만큼 유카탄 마야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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