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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02:10:52

화빈 윤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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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 | 和嬪 尹氏
파일:서삼릉후궁묘역.jpg
서삼릉 빈·귀인 묘역 전경
출생 1765년 5월 19일
사망 1824년 2월 1일 (향년 58세)
능묘 화빈남원윤씨지묘
(和嬪南原尹氏之墓)
재위기간 조선 화빈
1780년 4월 14일 ~ 1824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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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남원 윤씨
부모 부친 - 증 이조참의 윤창윤
(贈 吏曹參議 尹昌胤 1734 ~ 1798)
모친 - 증 숙부인 벽진 이씨
(贈 淑夫人 碧珍 李氏, 1735 ~ 1802)
형제자매
3녀 2남 중 3녀 [ 펼치기 · 접기 ]
언니 - 정동예(鄭東藝)의 처(1758 ~ 1778)
오빠 - 윤형식(尹亨植, 1761 ~ 1815)
언니 - 최경흥(崔慶興)의 처
동생 - 윤정식(尹鼎植, 1769 ~ 1823)
배우자 정조 선황제
봉작 화빈(和嬪)
궁호 경수궁(慶壽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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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집안 배경2.2. 후궁 간택2.3. 후궁 생활2.4. 상상임신2.5. 사망2.6. 의빈 성씨와의 악연
3. 가계
3.1. 본가 (남원 윤씨)3.2. 왕가 ( 전주 이씨)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4.2.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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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조의 두 번째 간택 후궁이다. 성은 윤(尹) 씨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1765년(영조 41)에 태어났다. 삼간택을 거쳐 1780년(정조 4)에 빈호는 화(和), 궁호는 경수(慶壽)를 받고 자경전에서 가례를 올렸다. 1824년(순조 24)에 사망했다.

2. 생애

2.1. 집안 배경

본관은 남원. 판관 윤창윤과 벽진 이씨[1] 의 딸.

2.2. 후궁 간택

정조 정비 효의왕후가 자녀를 낳지 못하고, 첫 번째 후궁 원빈 홍씨가 입궁한 지 1년이 채 안 돼서 자녀가 없이 갑자기 일찍 졸했다. 그래서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해 두 번째 후궁 간택했다.

2.3. 후궁 생활

1780년(정조 4년) 3월 10일, 16세의 화빈 윤씨가 입궁해 후궁으로 책봉되었을 때 정조의 나이는 29세였다. 1780년(정조 4년) 3월 12일, 자경전에서 화빈의 가례를 행했다. 1780년(정조 4년) 3월 12일에 예조가 화빈의 관례 길일을 택했는데, 3월 15일 오시(午時, 낮 11시30분 ~ 12시 30분)였다.
今番新揀擇 卽寧陵令尹昌胤女子也 再昨年洪嬪 則依大明集禮皇貴妃禮典 今則只依本朝內命婦之一品嬪例擧行
이번 새 간택에 영릉의 령으로 있는 윤창윤의 딸이 나갔다. 재작년에는 원빈 홍씨의 의대를 명나라의 예에 따라 황귀비의 예를 따랐다. 다만 이번에는 조선의 예법을 따라 내명부 정1품 빈의 예법으로 거행했다.
- 황윤석, 《이재난고》
和嬪尹氏 僭妬於中宮 喑詛於成嬪 因此得罪 自內嚴囚 方有降宮爲房之議
화빈 윤씨는 중궁(효의왕후)을 분수에 지나치게 질투했고 성빈(의빈 성씨)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저주했다. 이로 인하여 죄를 얻었고 대궐 안에 엄히 가뒀다. 의논하여 대궐에 방을 내렸다.
- 황윤석, 《이재난고》 #
成嬪 子懸之證 暴發而逝 盖和嬪尹氏所密毒也 故尹亟罪黜
의빈은 자현(임신 때에 태기가 조화되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가슴이 부어오르는 것처럼 아픈 병증) 병세가 있었고 사망했다. 대개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고 했다. 윤씨에게 심히 죄를 물어 내쫓았다.
- 황윤석, 《이재난고》 #

의빈 성씨는 약 6년 동안 사서에 따라 최소 3번( 조선왕조실록), 최대 5번( 이재난고)이나 임신하고, 의빈 성씨 사후에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는 14년 동안 순조 숙선옹주를 낳았다. 수빈 박씨가 입궁했을 때 화빈 윤씨의 나이는 23살로 한창 임신을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굳이 새 후궁을 간택한 것을 보면 화빈 윤씨는 그간의 행적과 시기 질투로 인해 총애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입궁하여 빈호와 궁호를 받아 가례를 치르고 입궁한 지 약 9개월 만에 임신까지하면서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지만, 출산 예정달이 지나도록 출산을 못했다. 상상 임신이었기에 유산한 기록도 없다. 당시 정조는 해산달이나 당일에 되어서야 산실청을 세우도록 했기 때문에 겉보기나 진맥 등에서는 진짜 임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효의왕후 의빈 성씨를 질투해 따로 방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당시 여성에게는 금기시되는 투기가 지나치게 심했던 것 같다.

이후 문효세자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홍역으로 요절하고, 몇개월 뒤 세자의 친모인 의빈 성씨(宜嬪 成氏)가 만삭의 몸으로 사망했다. 이때 화빈 윤씨와 고모부 조시위가 저주하고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문효세자 요절의 배후를 성토하는 과정에서 조시위는 화빈 윤씨의 산실청을 30개월이나 주관하여 세자 책봉을 늦추려 했고, 문효세자 의빈 성씨에게 약을 잘못 올리게 했다는 의혹 등으로 위리안치되었다. 화빈 윤씨의 이후 활동상은 60세에 사망할 때까지 찾을 수 없다.[2] 실록에도 일체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 한중록》에도 정조의 다른 후궁들인 의빈, 원빈, 수빈만 언급되고 화빈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2.4. 상상임신

대사간 신응현(申應顯)을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신응현이 상소하기를, "건국 이래로 어찌 20여 달이나 산실청(産室廳)을 둔 때가 있었습니까? 기만하는 습관에 대해 신은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의관(醫官) 오도형(吳道炯), 정문수(丁文壽) 무리들이 감히 이치상 있을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임금의 앞에서 장담을 하여 열 달의 뒤로 3년이란 오랜 세월을 끌어왔습니다."
- 《정조실록》정조 7년 3월 3일 갑오 3번째기사
이어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에게 물으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 일은 산실청(産室廳)에서부터 30삭(朔)에 이르렀을 때까지 여항(閭巷)의 말이 이미 의혹스러운 것이 많았는데, 임인년 가을의 대경(大慶)에 대해서는 참으로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려는 자라면 그 누군들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어떤 종류의 의론은 공공연히 말하기를 꺼려서 ‘나라의 경사[邦慶]’라는 두 글자를 모든 장주(章奏)와 말하는 사이에 금법이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대소(大小)가 함께 분개하고 나라 안의 말이 들끓어 모두 한 곳에 의심을 두었으나 다만 감히 말을 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 《정조실록》정조 11년 1월 19일 무자 5번째기사
尹嬪 過三十餘朔 産事無實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 황윤석, 《이재난고》 #
"선왕께서는 2남 2녀를 두셨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는 문효세자(文孝世子)를 낳고 한 따님은 1년이 못 되어서 죽었다. 지금의 상전하(上殿下)와 숙선옹주(叔善翁主)는 모두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낳았다."
- 《순조실록》 순조 16년 1월 21일 신축 2번째 기사

다른 후궁들은 출산 기록이 있는 《 조선왕조실록》, 《선원계보기략》 등 어디에도 화빈의 출산과 자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동안 임신 기록만 있고 출산 기록이 없어 의문점으로 남았는데, 정조 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 이재난고》에서 대놓고 화빈 윤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명시되어있다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산실청이 30개월 넘게 설치되었다는 《이재난고》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의 기록과 일치한다.[3] 또한 정조가 문효세자 출생 당시,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문효세자가 정조의 첫 아이임을 알 수 있다.

1781년(정조 5년) 1월 17일 화빈 윤씨가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781년(정조 5년) 11월 2일 화빈 윤씨의 출산을 기다리는 기록만 있을 뿐 #, 출산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열 달 동안은 배가 불러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진맥을 잘못했거나 유산한 것은 아니고, 상상 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화빈처럼 효의왕후도 상상 임신이었는데 화빈과 다른 점이 효의왕후의 경우에는 상상 임신이었어도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그에 반해 화빈의 경우는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으며, 여항 말이 이미 의혹스러운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재난고에 따르면 의빈 성씨 문효세자를 낳은 후에도 화빈 윤씨의 산실청이 지속되어 문효세자의 원자 정호(출생 2개월 뒤인 1782년 11월 27일 원자 정호가 실시됨.)가 늦어졌으나[4] 그러나 1784년(정조 8년) 문효세자는 3세(22개월 만1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정조의 차남인 순조가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해 매우 빠른 일이었다.

화빈의 산실청이 30개월 이상 지속된 것 #과 관련되어 1787년(정조 11년) 1월 12일 조시위(화빈의 인척)는 귀양을 갔다.

2.5. 사망

1824년(순조 24년), 60세에 졸했다. 묘의 초장지는 서울 북아현이었는데 이장되었다. 현재는 경기 고양시 서삼릉 후궁묘 '빈·귀인 묘역'에 있다. 표석엔 화빈남원윤씨지묘(和嬪南原尹氏之墓)라고 되어있다.

2.6. 의빈 성씨와의 악연

정조의 세번째 후궁인 의빈 성씨와의 사이는 화빈의 일방적 질투 때문에 최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 화빈이 최종 간택되어 입궁한 시기와 의빈이 승은상궁이 된 시기는 비슷한 1780년인데, 정조가 화빈이 참여한 후궁 간택은 주저했지만[6] 당시 궁녀였던 의빈에게는 자의적으로 승은을 내린 때부터 화빈 쪽에서 의빈을 싫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화빈이 상상임신으로 산실청이 설치된 지 약 1년 8개월 동안 감감무소식일 때 의빈 성씨가 왕자(후일 문효세자)를 낳았고, 이로 인해 화빈의 위치가 애매해졌을 시기에 의빈이 방중술을 써서 왕자를 낳았다는 소문이 지겹게 떠돌았다.[7] 후계를 바라던 왕실의 웃전 어른들이 이런 소문을 퍼트렸을리는 만무하니, 화빈 측에서 의빈을 모함하기 위해 퍼트린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화빈의 고모부인 조시위(趙時偉)는 화빈이 후궁이 된 후 임금의 외척을 자칭하며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했고, 문효세자가 출생한 이후에는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라고 발언하며 의빈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화빈의 출산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는지 시간 끌기로 왕자의 책봉을 훼방 놓던 조시위가 화빈의 산실청 문제 등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자 화빈은 목이 쉬도록 울며 의빈 성씨를 원망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로 화빈을 안에다 엄히 가두고 궁호(宮號)를 방(房)으로 강등할지 의논했다는 소문과[8], 만삭의 의빈 성씨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화빈이 의빈을 독살해서 내쳐졌다는 소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9] 이런 이야기들이 돌 정도로 화빈이 의빈을 극도로 싫어했고 그 이야기가 세간에 알려질 정도로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3. 가계

3.1. 본가 (남원 윤씨)



아버지 윤창윤은 종5품 판관 벼슬로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나, 당시 정조의 최측근이자 영의정이었던 서명선과 인척 관계였고 서명선과 같은 소론계이다. 삼간택을 거쳐 입궁하긴 했으나 사실상 사전에 내정된 상태였다.

화빈 윤씨의 친정 아버지인 윤창윤과 그의 형제들인 윤창렴, 윤창순 세 사람이 피해자의 시할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윤창순의 처를 몰래 매장한 일이 있었고. 피해자는 관청에 청원을 한다. 관청은 윤창순에게 대령하라는 지시를 내리지만 윤창순이 공갈하며 끝내 대령에 응하지 않아 조사에 차질을 빚었다. 이 일이 형조를 거쳐 정조의 귀에 들어갔다. 이에 정조는 "어찌 감히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관찰사에게 단단히 일러 즉시 상세히 조사하고 정조 자신에게 올리는 문서로 보고해서 엄히 처리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

3.2. 왕가 ( 전주 이씨)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파일:이산_화빈윤씨.jpg }}} ||
<colbgcolor=#89236A> 〈이산〉의 화빈 윤씨
2008년 MBC 이산〉에서는 유연지가 연기했다. 극 중에서 의빈 성씨( 한지민 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신해 같은 날에 출산했다. 다들 화빈이 원자를 낳고 의빈이 옹주를 낳으리라 생각했지만 의빈이 원자(문효세자)를 낳았고, 화빈이 옹주를 낳았다. 이후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어 거의 나오지 않았다. 72회에서 옹주를 홍역으로 잃고 다시 회임을 시도하려 한다는 언급과, 아버지 윤창윤( 한상혁 분)과 정순왕후( 김여진 분) 세력과 힘을 모아 문효세자( 차웅기 분)의 세자 책봉을 막으려 하나 결국 실패하고 세자 책봉식에서 씁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극 중 마지막 출연이 되었다.

참고로, 실제 역사 속 인물인 화빈 윤씨가 낳은 딸은 요절했으며 이후 후사를 두지 못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한동안 널리 퍼져 있었다. 화빈이 임신을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이후 기록이 없어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고 그 딸은 요절하여 후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이 퍼진 듯 하고, 그래서 이 드라마도 그 정보를 채택하여 화빈이 딸을 낳았다는 설정을 넣은 듯 하다. 그로 인해 드라마를 시청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화빈이 요절한 딸을 하나 두었을 뿐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 이재난고》의 번역 전까지 자리잡았다.

4.2. 소설


[1] 《남원윤씨족보》에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로 적혀 있다. [2] # 《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김창겸, 김선주, 권순형, 이순구, 이성임, 임혜련 저.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년. pp.343 [3] 실록에도 화빈 윤씨가 30개월이 다 되가도록 아이를 못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되어있지만 《이재난고》와 달리 화빈 윤씨라고 콕 찝어서 말하지 않아 실록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4] 또한, 정조가 만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왕자(문효세자)가 탄생한 경사를 보았기 때문에 석복(惜福) -복을 아껴서 복을 오래 누리려는- 마음을 매양 간직하고 있었다고 정조는 말했다. 《 일성록》 1782년(정조 6년) 11월 27일 기사. [5] 어찌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화빈은 간택을 통해 무품으로 들어온 반가 출신 후궁이고 의빈은 비록 세자를 낳고 정조, 효의왕후, 혜경궁의 총애를 받긴 했지만 그저 궁녀 출신의 승은 후궁일 뿐이었다. 의빈의 성격상 화빈에게 대놓고 대들 일은 없었겠지만 사실 의빈에게는 그럴 신분도 세력도 없었다. [6] 《일성록》 정조 4년 경자(1780년) 2월 21일(경오) 4번째 기사 [7] "厭聞成氏房中 東宮之誕降耶" 황윤석 《이재난고》 38권, 1786년(정조 10년) 5월 29일 신미 [8] “和嬪尹氏 僭妬於中宮 喑詛於成嬪 因此得罪 自內嚴囚 方有降宮爲房之議” 《이재난고》 권39, 1786년(정조 10년) 9월 14일 갑신 [9] “又聞 九月十四日 成嬪 子懸之證 暴發而逝 盖和嬪尹氏所密毒也 故尹亟罪黜” 《이재난고》 권39, 1786년(정조 10년) 10월 24일 갑자 [10] 《남원윤씨족보》 [11] 1853년(철종 4)에 화빈 윤씨의 조부, 부친, 오빠가 증직 되었다. [12] 윤희세의 양자로 입적 [13] 《남원윤씨족보》에는 성주 이씨로 되어 있다. [14] 동래 정씨 문익공파 6권 174쪽 3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