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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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 淑儀 朴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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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후궁 묘역 전경 | |||
출생 | 연대 미상 | ||
사망 | 1854년 7월 24일 | ||
능묘 |
숙의밀양박씨지묘 (淑儀密陽朴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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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조선 숙의 | ||
1817년 11월 19일 ~ 1854년 7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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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밀양 박씨 | |
배우자 | 순조 숙황제 | ||
자녀 | 1녀 | ||
봉작 | 숙의(淑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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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순조의 후궁. 본래 궁녀 출신으로 가계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순조의 유일한 후궁이며, 또한 순조의 유일한 서출인 영온옹주의 생모가 된다.2. 생애
원래 궁인 신분으로, 순조의 승은을 입었다. 1817년(순조 17년) 10월 11일 새벽, 딸( 영온옹주)을 낳았다.궁인 박씨를 숙의에 봉작하다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박씨(朴氏)가 간밤에 딸을 낳았으니, 호산(護産) 등의 절차를 전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궁인 박씨를 숙의(淑儀)에 봉작(封爵)하고, 공상(供上, 진상)도 마련(磨鍊)하라."
하였다.
- 《 순조실록》 20권, 순조 17년( 1817년, 청 가경(嘉慶) 22년) 10월 11일 (신사) 1번째 기사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박씨(朴氏)가 간밤에 딸을 낳았으니, 호산(護産) 등의 절차를 전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궁인 박씨를 숙의(淑儀)에 봉작(封爵)하고, 공상(供上, 진상)도 마련(磨鍊)하라."
하였다.
- 《 순조실록》 20권, 순조 17년( 1817년, 청 가경(嘉慶) 22년) 10월 11일 (신사) 1번째 기사
이날 종2품 '숙의(淑儀)'로 봉작되었다. 그러나 영온옹주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다.[1] 결국 1829년(순조 29년) 4월 8일, 영온옹주가 요절하면서 여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
1854년(철종 5년) 6월 30일에 사망하였다.[2]
3. 사후
숙의 박씨는 사후 효창원[3]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인근인데,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5년 3월에 강제 이장되어 현재 박씨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그녀의 묘는 서삼릉 전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될 때 함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4. 가계
4.1. 시가( 전주 이씨)
4.2. 배우자 / 자녀
5. 대중매체
}}} ||《구르미 그린 달빛》의 숙의 박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