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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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 | 慶嬪 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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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빈·귀인 묘역 전경 | |||
출생 | 1832년 9월 21일[1] | ||
한성부 한사루동 사제 유연당(悠然堂)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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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7년 6월 1일[2] (향년 74세) | ||
한성부 중부
견평방
순화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5길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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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대한경빈김씨지묘 (大韓慶嬪金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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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조선 경빈 | ||
1847년 11월 27일 ~ 1895년 1월 12일 | |||
대조선국 경빈 | |||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 |||
대한제국 경빈 | |||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5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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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광산 김씨[3] | |
부모 |
부친 - 황해도감찰사 김재청 (黃海道觀察使 金在淸 1807 ~ 1855) 모친 - 정부인 평산 신씨 (貞夫人 平山 申氏, 1805 ~ 18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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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헌종 성황제 | ||
봉작 | 경빈(慶嬪) | ||
궁호 | 순화궁(順和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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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24대 국왕 헌종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주부 김재청(金在淸)이며, 어머니는 신명하(申命河)의 딸이다.궁호는 순화궁(順和宮)으로,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의 뒤를 이어서 역사상 마지막 무품 빈(嬪)이다.[4]
2. 생애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김재청(金在淸)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 신명하의 딸이다. 1832년(순조 32년) 음력 8월 27일, 한사루동 사제의 유연당(悠然堂)에서 출생하였다.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1843년(헌종 9년) 16세에 죽자, 새로운 왕비를 뽑기 위한 간택을 시작했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김씨도 참여했는데, 헌종은 김씨를 좋아했으나 왕실 어른들은 홍씨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당시 국혼은 당사자보다 왕실 어른들의 입김과 뜻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 결국 홍씨가 계비 효정왕후로 정해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의 《 승정원일기》를 보면 초간택에 김재청의 딸은 보이지 않는다. 간택을 위한 처녀 단자에 이름이 없었으니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로맨스 소설 급.
대왕대비전이 조석형에게 전교하기를,
"전 정랑 홍재룡(洪在龍)의 딸, 동몽교관(童蒙敎官) 윤규석(尹奎錫)의 딸, 부사과 신태운(申泰運)의 딸, 유학 서기순(徐麒淳)의 딸, 행 부호군 김공현(金公鉉)의 딸, 선공감 봉사 정기승(鄭基承)의 딸, 생원 박흥수(朴興壽)의 딸을 모두 재간택(再揀擇)을 들이고, 그 나머지는 허혼(許婚)하라."
하였다.
- 《 승정원일기》 헌종 10년( 1844년, 청 도광(道光) 24년) 4월 22일 (기미) 2/3 기사
"전 정랑 홍재룡(洪在龍)의 딸, 동몽교관(童蒙敎官) 윤규석(尹奎錫)의 딸, 부사과 신태운(申泰運)의 딸, 유학 서기순(徐麒淳)의 딸, 행 부호군 김공현(金公鉉)의 딸, 선공감 봉사 정기승(鄭基承)의 딸, 생원 박흥수(朴興壽)의 딸을 모두 재간택(再揀擇)을 들이고, 그 나머지는 허혼(許婚)하라."
하였다.
- 《 승정원일기》 헌종 10년( 1844년, 청 도광(道光) 24년) 4월 22일 (기미) 2/3 기사
실제로는 효정왕후가 새 왕비가 된 지 3년 후인 1847년(헌종 13년)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명으로, 후궁 간택을 하게 된다. 이때 김씨가 헌종의 후궁으로 최종 낙점, 경빈(慶嬪)으로 책봉되었다.
김씨(金氏)를 경빈(慶嬪)으로 책봉하였다.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이다.
- 《 헌종실록》 14권, 헌종 13년( 1847년, 청 도광(道光) 27년) 10월 20일 (병인) 1번째기사
- 《 헌종실록》 14권, 헌종 13년( 1847년, 청 도광(道光) 27년) 10월 20일 (병인) 1번째기사
헌종은 효현왕후, 효정왕후보다 경빈 김씨를 총애했고,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를 서로 곁에 두어 순조를 둔 것을 따라한 것으로, 경빈 김씨가 후사를 낳기를 바란 뜻이다. 하지만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김씨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약 2년 간의 짧은 신혼을 누린 셈. 김씨는 궁궐을 떠나 별궁인 순화궁에서 살게 되었으나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요 어른으로 예우를 받는다. 경빈 김씨는 시할머니 순원왕후와 시어머니 신정왕후를 잘 모시고, 헌종의 왕비인 효정왕후에게도 예를 갖추며 조용히 검소하게 살다가 1907년(광무 11년) 음력 4월 21일,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고종은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조령(詔令)으로 조문(弔文)을 직접 지었다.[5]
경빈 김씨가 졸하였다. 이에 대해 조령을 내리기를,
"경빈은 연세가 높아도 아직 정력이 강건하였으므로 병환이 깊긴 해도 내심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문득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날 극진하게 예우해 주던 은혜를 추념(追念)함에 처창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올해는 입궁한 지 주갑(週甲)이 되는 해이므로 더욱 비감에 잠기게 된다. 순묘(純廟) 갑신년( 1824) 화빈(和嬪)의 상례(喪禮) 때의 고사(故事)에 따라 모든 일을 거행하고, 동원부기(東園副器)[6] 1부(部)를 실어 보내라. 성복일(成服日)에는 봉시(奉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 《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6월 1일 (양력) 1번째기사
"경빈은 연세가 높아도 아직 정력이 강건하였으므로 병환이 깊긴 해도 내심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문득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날 극진하게 예우해 주던 은혜를 추념(追念)함에 처창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올해는 입궁한 지 주갑(週甲)이 되는 해이므로 더욱 비감에 잠기게 된다. 순묘(純廟) 갑신년( 1824) 화빈(和嬪)의 상례(喪禮) 때의 고사(故事)에 따라 모든 일을 거행하고, 동원부기(東園副器)[6] 1부(部)를 실어 보내라. 성복일(成服日)에는 봉시(奉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 《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6월 1일 (양력) 1번째기사
본인은 조용히 살았지만 사실 그녀의 노년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심지어 제국 개창과 을사늑약까지 근대 조선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망국의 서막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사망 한 달 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를 비롯하여 정미7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주인 잃은 순화궁 역시 이리 팔리고 저리 팔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3. 사후
경빈 김씨는 1907년(광무 11년) 7월 5일, 경기도 양주목 전 휘경원 천봉 국내 서록 손좌에 예장하였다. 현재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 내 후궁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4. 가족 관계
4.1. 본가( 광산 김씨)
- 아버지 : 황해도관찰사 이조 참의(黃海道觀察使 吏曹參議) 김재청(金在淸)
- 어머니 : 정부인 신씨(貞夫人 申氏)
4.2. 외가( 평산 신씨)
- 외조부 : 현령(縣令) 신명하(申命河)
- 외조모 :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