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fd4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min-height: 33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사도세자|{{{#!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
|||
}}}}}}}}}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숙종의 후궁
명빈 박씨 | 䄙嬪 朴氏 |
|||
명빈 박씨묘 위치 | |||
출생 | 연대 미상 | ||
사망 | 1703년 8월 27일 (향년 미상) | ||
능묘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산 5 | ||
재위기간 | 조선 상궁 | ||
1683년 이후 ~ 1698년 12월 5일 | |||
조선 숙원 | |||
1698년 12월 5일 ~ 1699년 12월 13일 | |||
조선 숙의 | |||
1699년 12월 13일 ~ 1701년 4월 30일 | |||
조선 귀인 | |||
1701년 4월 30일 ~ 1702년 12월 6일 | |||
조선 명빈 | |||
1702년 12월 6일 ~ 1703년 8월 2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밀양 박씨 | |
부모 |
부친 통정대부 박효건 (通政大夫 朴孝健, ? ~ ?) |
||
배우자 | 숙종 | ||
자녀 |
슬하 1남 장남 - 연령군(延齡君, 1699 ~ 1719) |
||
봉작 |
상궁(尙宮) → 숙원(淑媛)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명빈(䄙嬪) |
||
별칭 | 명빈(嫇嬪)[1] |
[clearfix]
1. 개요
조선 숙종의 후궁. 또한 숙종이 가장 사랑한 아들 연령군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밀양으로 아버지는 통정대부[2] 박효건(朴孝健)이며,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3].2. 생애
생년월일은 미상이며, 어린 시절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 희빈 장씨의 나인으로 상궁 시절인 1683년에 숙종의 승은을 입었는데 10여 년이 지난 1698년 11월 4일에야 회임을 했고 그 공으로 내명부 종4품 숙원에 책봉되어 그때 비로소 정식 후궁이 되었다.[4] 이듬해인 1699년에 숙종의 6남 연령군을 낳았고, 단종의 복위를 기념하여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다.[5]이어 1701년 3월 23일 귀인에 올랐다가 1702년 10월 18일 인원왕후의 왕비 책봉을 기념하여 정1품 빈의 자리에 올라 명빈이 되었다.
3. 사망과 그 후
1703년 7월 15일에 사망하여 9월 17일 내명부 정1품의 예우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에 앞서 명빈의 친척인 박동지가 관아에서 보낸 관을 짤 목재가 형편없음을 지적하자 숙종이 해당 관원 및 아전까지 모두 체포하여 추문·나문토록 하고 '장례 기한 내에 관판을 구하지 못하면 사대부가에서 관판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녀의 장례를 앞둔 9월 3일, 숙종은 명빈의 초상에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고 방제[6]에 아명을 넣을 수 없다는 이유로 6세 ~ 7세에 왕자를 봉작하는 관례를 깨고 5세인 그녀의 외아들을 왕자군으로 책봉하여 연령군으로 삼고 '훤(昍)' 이라는 정식 이름을 주었다.처음에는 경기도 금천현 번당리[7]에 묻혔다. 1720년 그의 아들 연령군은 죽으면서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어머니의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그녀의 묘소 근처에 묻혔다. 1935년 경성부 구획 정리 때 원래 있던 자리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구 가야사 터 근처 옥계 저수지변에 아들 연령군의 묘소와 함께 이장되었고 연령군의 묘 왼쪽에 묻혔다. 가야사 터는 명빈의 양고손자 남연군 묘소가 있는 곳이다.[8] 명빈의 묘소 왼쪽 아래편에는 양5대손인 흥녕군 이창응의 묘소가 있다.
[1]
명빈의 한자는 실록에는 '䄙嬪'으로 되어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䄙嬪'과 '嫇嬪' 2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2]
조선 시대의 관계. 정3품의 상계(上階)이다.
[3]
정3품 관료의 딸이 궁녀로 입궁한 것을 보아 측실일 가능성이 있다.
[4]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11월 4일 을해 4번째 기사.
[5]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10월 23일 정해 2번째 기사.
[6]
신주 아래의 왼쪽에 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
[7]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8]
연령군은 아들이 없어
선조의 9남
경창군의 6대손 낙천군을 입양했고
낙천군 역시 자식이 없어
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을 후사로 두었다. 그런데 은신군마저 후손을 두지 못해(...)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을 양자로 삼았다. 다행히 남연군은 자식을 많이 낳아 지금까지 후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