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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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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추존 국왕
장종 | 莊宗
대한제국 추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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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도세자 영정.jpg
서울 은평구 구파발 사신당 봉안 영정
출생 1735년 2월 13일
(음력 영조 11년 1월 21일)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책봉 1736년 4월 25일
(음력 영조 12년 3월 15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762년 7월 12일 (향년 27세)
(음력 영조 38년 윤5월 21일)
한성부 창경궁 휘령전[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현륭원(顯隆園) → 융릉(隆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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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묘(垂恩墓)
→ 영우원(永祐園)
→ 현륭원(顯隆園)
융릉(隆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736년 4월 25일 ~ 1762년 7월 4일
(음력 영조 12년 3월 15일 ~ 영조 38년 윤5월 13일)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1749년 3월 15일 ~ 1762년 7월 4일
(음력 영조 25년 1월 27일 ~ 영조 38년 윤5월 13일)
서명
파일:사도세자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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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훤(愃)[2]
부모 부왕 영조
모후 정성왕후, 생모 소유영빈
형제자매 2남 7녀 중 차남
배우자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헌경의황후)
후궁 숙빈 임씨, 경빈 박씨, 수칙 이씨
자녀
5남 3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 ~ 1752)
차남 - 정조(正祖, 1752 ~ 1800)
3남 - 은언군(恩彦君, 1754 ~ 1801)
장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 ~ 1821)
4남 - 은신군(恩信君, 1755 ~ 1771)
차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 ~ 1802)
3녀 - 청근옹주(淸瑾翁主, 1758 ~ 1835)
5남 - 은전군(恩全君, 1759 ~ 1778)
종교 유교 ( 성리학)
윤관(允寬)
의재(毅齋)
전호 경모궁(景慕宮) → 경모전(景慕殿)
묘호 장종(莊宗) → 장조(莊祖)[3]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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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
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
(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
시호 조선: 사도세자(思悼世子)
→ 장헌세자(莊獻世子)
→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
대한제국: 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
(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tter_of_Crown_Prince_Sado_of_Joseon_3.jpg
친필 글씨[4]
1. 개요2. 이름과 시호3. 생애
3.1. 어린 시절3.2. 아버지 아동 학대3.3. 대리청정과 이후3.4. 극심한 정신질환과 연이은 살인3.5. 임오화변3.6. 장례3.7. 추숭
4. 초상화(어진)5. 가계
5.1. 조상5.2. 배우자/자녀
6. 대중매체7. 기타

[clearfix]

1. 개요

조선 왕세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영조의 차남으로 모친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정실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부친 영조의 아동 학대와 함께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결국 정신질환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주변 사람들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등 수많은 비행을 저지르다 이를 보다 못한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8일 후에 사망했는데 이를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2. 이름과 시호

휘는 '훤(愃)'으로, '너그럽다'는 뜻이다.[5] '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愃'에 '선'이란 음도 있기 때문이다.[6] 그런데 ​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훤'으로 적혀 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煊(마를 훤)'을 써 두었다. 자(字)가 너그럽다는 뜻인 '윤관(允寬)'인데 이름과 자는 뜻이 연관되게 짓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이름도 '잊는다'는 뜻인 '선'보단 '너그럽다'는 뜻인 '훤'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7]

원래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2글자였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장헌(莊獻)'을 존호로 올려 '사도장헌세자'가 되었고 정조 7년( 1783)에는 존호가 추가되어 '사도수덕돈경장헌세자'가 되었으며 정조 8년( 1784) '홍인경지(弘仁景祉)', 다시 정조 18년(1794)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고 한참 뒤인 철종[8] 5년( 1854) '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를 더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식 시호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로 길어졌다. 간혹 "장헌세자가 죽어서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말이 돌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둘 다 죽은 뒤에 붙은 시호인 데다 '사도(思悼)'는 영조, '장헌(莊獻)'은 정조가 붙인 시호라 오히려 장헌이 나중에 붙었다. 어차피 장헌세자가 되고 나서도 사도도 여전히 시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두 칭호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세자로 있는 동안 공식 칭호는 '세자' 단 두 글자이기 때문이다.[9]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한자의 뜻이 생각 사(思), 슬퍼할 도(悼)라 영조가 아들을 죽음을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의미로 여기는 의견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두글자를 시법상에 따르면 사(思)는 이전의 잘못을 후회했다는 뜻이고 도(悼)는 중년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일찍 죽은 세자라는 뜻으로 사실상 고인드립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싫어했으며 일성록의 기록을 보면 조정관료들 역시 사도라는 시호가 좋지 않다는 것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 정조의 의견을 존중했는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추가한 이후에는 실록의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시호를 두글자로 호칭할 때는 장헌세자로만 호칭하였다.

영어권에서는 Prince Sado라고 한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1735년( 영조 11년) 1월 21일, 영조 후궁 영빈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안타깝게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고 42세의 고령에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도 당시 40세였다. 조선 시대의 40세는 손주를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어렵게 얻은 늦둥이 왕자의 탄생을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 조선 시대에는 환갑도 동네에서 잔치를 열어 줄 정도로 드물었고 70대는 나라에서 명예 벼슬을 내리고 해당 인물이 천민이라면 효자라고 자녀가 면천될 정도로 적었다. 10대에 결혼하고 20대에 출산해 40대면 손자를 보고 50대쯤에 죽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대였다. 더군다나 조선 국왕들의 평균수명이 47.1세였다. 그러므로 당시 42세였던 영조도 자신이 곧 노년이 된다고 보았고 그리 오래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10] 하지만 영조는 무려 83세까지 장수하여[11] 조선 역사최장수 군주로 기록되었고 이는 사도세자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실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법적아들)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 영조 12년( 1736)에는 이제 막 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정식 책봉했다. 영조는 갓난 세자에게 기대가 너무 커서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인 자신이 직접 꼬박 밤 새 가면서 필사(筆寫)[12]했고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젖먹이인 어린 나이에도 유달리 매우 총명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태어난 지 4달 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 만에 영조의 부름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며 7달 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써내었다. 3살에 다식을 받자 수() 자, 복() 자가 박힌 과자는 먹고 팔괘(八卦)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는데 이에 궁녀들이 "잡수소서"라고 권하자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라고 대답하였으며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를 그린 책을 보고 "높이 들라."라고 하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5살 때는 밥을 먹던 중에 아버지 영조가 말을 걸자 입에 있는 밥을 전부 뱉고 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왜 음식을 뱉었는지 영조가 묻자 어린 세자는 " 소학(小學)에서 '부모가 부르실 때는 입에 있는 걸 뱉고 말하는 게 효(孝)'라고 배웠습니다"라고 답했다. 말하자면 김시습 수준의 천재이었다.

천자문을 배우던 중에 사치 치() 자와 가멸 부() 자에 이르자 '치'자를 집고 다시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라고 하였으며 영조가 어릴 때 쓰던 감투 중에 칠보로 장식된 것을 씌우자 "사치!"라고 거부했고 돌 때 입은 옷을 입히려고 하자 역시 "사치하여 남 부끄러워 싫다."고 거부했다. 이에 세자를 모시던 나인들이 과연 세자가 알고 말하는가 모르고 말하는가 궁금하여 비단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고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니나이까?"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 "이것은 사치라."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인들이 "어느 것으로 옷을 지어 입으시면 좋으리이까?"라고 묻자 무명을 가리키며 "이것을 입어야 좋으리라."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한중록에 나온 이야기지만 영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런 기록들은 과장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 세뇌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고 한다.[13]
영의정 이광좌: 신(臣)들이 어제 동궁(東宮)을 뵈었는데 어린 나이에 예모(禮貌)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3세에 주상 전하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독(講讀)하고 논(論)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을 면치 못하니, 오직 바라건대, 빨리 덕성(德性)을 함양해 온화(溫和)하고 문아(文雅)함이 날로 성취(成趣)되게 하소서."

영조: "경(卿)의 말이 옳다. 근일(近日)에 문왕장(文王章)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奢侈)와 검소(儉素)를 구분하여 무명옷 입기를 직접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 만약 잘 인도(引導)한다면 성취(成趣)할 것을 바라겠으나, 나는 본래 학문이 없으니[14] 오직 경(卿)들이 잘 이끌어주길 바랄 뿐이다."
영조 45권, 13년( 1737, 정사년 / 건륭(乾隆) 2년) 9월 10일(을미) 1번째 기사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지만 상당히 총명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조도 어린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하며 대신들을 불러 한 번씩 직접 안아보게도 하고 세자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게 하는 등 세자를 무척이나 총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는 이렇게 총명한 세자에게 인생에 있어 큰 화가 될 법한 결정을 했는데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세자를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뜨려서 선의왕후 어씨[15]가 살던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게 하고 경종 선의왕후 내외를 모시던 소론 궁녀[16]에게 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저승전은 1730년 선의왕후가 죽은 후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근처에 희빈 장씨가 머물면서 인현왕후 민씨를 죽게 저주한 것으로 유명한 취선당(就善堂)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는 취선당을 소주방으로 삼아 그곳에서 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게 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자서전 한중록에서 이것들이 남편(사도세자)을 망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한참 부모인 영조, 영빈 이씨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를 품에서 떨어트려 불길한 곳인 저승전, 취선당에서 따로 키우게 했다.

영조 입장에서는 이복형 선왕을 모시던 소론 출신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게 하여 세자의 권위를 세워주고 경종 독살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나름대로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정당성이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이 궁인들은 워낙에 친(親) 소론(경종 지지) 성향이었다. 원래 궁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상전과 친한 당파와 친해지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자신이 누구를 모시는지가 권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17] 따라서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은 숙종 말엽에 경종의 입지가 흔들리자 대놓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모시던 궁인들에 비해 기를 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더더욱 소론 성향이 되었다.[18] 그래서 영조의 뜻과는 다르게 소론 궁인들은 동궁(東宮)에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켰다. 한중록에 따르면 그들의 리더격인 최 상궁과 한 상궁이 그 일의 큰 원흉인데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어릴 적만 생각하고 그녀를 업신여기며 세자를 자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 영빈(英嬪)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했으나 사친(私親)이다. 신분상으로 군신(君臣)의 관계가 있으니 주상을 자주 만나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상을 뵈올 때도 반드시 빈어(嬪御)가 정전(政殿)을 배알(拜謁)할 때 쓰는 까다로운 예절로써 구제(具制)를 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 되자 영빈은 그곳을 자주 갈 수가 없어 혹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하루 걸러서, 혹은 며칠 걸러서 한번 가고 혹은 1달에 한두 번밖에 못 갈 때도 있었다.
헌륭원 지문 中

한중록만의 기록은 아니다. 정조가 쓴 헌륭원(顯隆園) 지문에도 나온다. 실제로 영빈 이씨는 출신이 미천해 한중록을 토대로 유추하면 6세에 궁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다가, 숙종의 대전에서 일하다가 영조 즉위 후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눈에 들어서 영조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니 경종을 모시던 궁녀들에겐 영빈이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세자를 직접 낳은 어머니(생모)는 영빈 이씨라도 세자가 되면서 영조의 정실, 즉 중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세자의 법적 어머니는 정성왕후다.

혜경궁 홍씨는 궁인들에게 문제가 또 있었다고 지적했다. 세자에게 병정놀이, 삼국지나 무인 기룰잡서 등을 익히게 하고 한 상궁이라는 보모는 직접 칼, 활 등을 만들어 세자에게 바쳤다는 얘기도 있다. 이렇듯 공부를 멀리하고 무예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19] 그래서 영조는 이런 것들을 제공한 주변인들을 조진 적도 있었다. 실제로 동궁의 궁인들이나 세자시강원의 기강에 여러 문제가 있었던 건 승정원일기에서도 나온다. 세자시강원의 조라치[20] '박금돌'이라는 자가 세자가 환궁할 때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다가 취조받은 사건도 있었고 송인명이라는 대신이 "동궁에 선량하지 않은 자나 말을 남들에게 함부로 옮기는 자가 있으면 안 되니, 궁인을 고를 때 선량한 자로 잘 골라야 하고, 궁 안의 어떤 일이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라고 충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박문수가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내관들이 나쁜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소서." 라고 충고하고 의관 김수규가 세자에게 유용목(愉用木)이라는 놀이기구를 바쳤다가 적발되어 문책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의 성장 배경과 궁인들의 행적은 "이후 사도세자가 친 소론 성향을 걷게 된 이유" 라는 떡밥의 원인이 되지만 후술하겠지만 사실이 아니다.

3.2. 아버지 아동 학대

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들볶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대리청정을 맡긴 15살 때 부터이다. 세자가 12살 때 까지는 영조 자신이 학구열이 높고 공부벌레로 유명해 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많아 세자가 아픈 구석이 있어도 영조는 끄떡 안하고 지나치게 공부를 시키면서 비록 엄하게 교육을 시키고 질책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칭찬도 많이 하고 세자를 매우 아꼈다. 하루는 10세인 세자가 글 읽기를 좋아한다며 좋아했고, 세자가 지은 시를 보고 칭찬도 하고 신하들에게 자랑하는 일도 있었으며, 12살 때 궁중 잔치에서 영조와 화목하게 시간을 보내는 등, 이때까지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좋았다. 그러나 세자가 13살~ 14살 때부터는 세자를 혹독하게 대하며 엄한 질책을 하는 일이 잦아지고 칭찬하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면서 아동 학대 빌드업이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15살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동 학대를 당하기 시작했다.

영조는 기대가 너무 컸던 나머지 세자를 엄격하게만 키웠다. 그래서 세자는 아버지인 영조를 만나기를 꺼렸고 영조 24년(1748년) 심지어 날씨가 흐린 것을 두고도 영조는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며 꾸짖었기 때문에 세자는 궁인에게 "오늘은 날씨가 어떤가?"라고 물으며 걱정해야 했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저서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사도세자와 함께 자기 위해 저승전에 자주 머물렀으나 경종을 모시던 취선당의 내인들이 영조 영빈 이씨에게 무례하게 굴어 불쾌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자가 7살이 되던 해에 유모인 한 상궁을 드디어 쫓아냈다고 하는데 세자의 입장에서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주 양육자가 바뀌었으니 이것도 아동 학대다. "궁녀가 보기 싫으면 거기 있는 궁녀들을 쫓아내고 당신께서 가르치시지, 왜 사도세자를 경종의 내인들과 지내게 하고 미워하셨는가"라며 혜경궁은 영조를 원망했다.[21]

영조의 정서적 학대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정성왕후 서씨가 병환이 깊어지자 병수발을 직접 들러온 세자가 정성왕후가 피를 토한 그릇을 붙들고 통곡하던 와중에도 영조가 온 것을 보자마자 울음이 뚝 그치고 겁에 질려 방 한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었을 정도다. 영조 본인부터 성격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하고 틈만 나면 신하들에게 욕지거리하던 왕이었는데, 지속적으로 아동 학대에 노출되어 아버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던 사도세자는 아는 것도 우물쭈물해서 잘 대답하지 못한다. 이에 영조는 세자에게 더 실망해 매우 거친 질책과 비난만 자주 했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세자는 대답을 우물쭈물 잘 못하고 그런 모습을 아버지는 정녕 이해하거나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고 갈구기만 하니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이미 일찍부터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우울증 증상 중에 이해력과 기억력 감퇴도 있다. 이런 엄격한 막장 훈육까지 학문과 서연에 대한 흥미, 관심, 의욕을 크게 저하시켰다. 아버지가 질문해서 자신의 생각을 답했는데 아버지의 예상과 달랐단 이유로 구박받는 처지였다.

영조가 세자를 늦게 본 것도 조급증에 한몫 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격무(激務)에 시달려 환갑을 넘기기 힘들었고 평균 사망 나이가 47.1세였는데 영조는 세자를 보았을 때 이미 42세였다. 선대 왕들을 보면 영조는 이미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22] 영조 입장에선 죽기 전에 최대한 세자를 준비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영조가 결과적으로는 매우 장수(83세)했고,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은 세자가 아들을 낳아 세손(뒷날의 정조)을 보고도 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자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23] 영조와의 진현(進見)[24]을 계속해서 거르게 되었다. 왕의 불효가 쿠데타의 정당한 명분이 되는 유교 국가인 조선 왕실에서 왕세자가 그리한 것은 큰 문제이다. 실제로 영조가 "왕세자가 진현을 몇 달째 하지 않았다"고 언급하자 당시 좌의정인 김상로가 "신(臣)들이 밖에 있어서 이러한 줄을 몰랐습니다. 마땅히 입대(入對)하여 조심하도록 아뢰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손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 ( 1757년 11월 8일 병신 6번째 기사) 신하들은 사도세자에게 영조를 만날 것을 계속 요구했으나 사도세자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거부했다. 영조 또한 어느 순간부터 사도세자를 만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성격이 너무나 극명히 달랐기 때문에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영조는 많은 신하들 앞에서 어린 사도세자를 세워 놓고는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화를 내고 흉을 보며 "이게 다 세자 때문이다"라고 망신주길 자주 했는데 저렇게 한 일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꾸중하고 이렇게 한 일은 저렇게 하지 않았다고 크게 꾸중하였다. '심지어 비가 와도, 천둥이 쳐도, 가뭄이 들어도, 한재(寒災)가 나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하였다.[25]

1742년 9월 19일 승정원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8세의 세자 앞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어보라고 시켰는데 세자가 책을 다 읽고 영조에게 달려와 "간신히 한 권을 다 읽었어요"라고 말한다. 당시 동몽선습은 조선에서 천자문을 다 읽고 시작하는 아동용 교과서인데 간신히 읽었다고 대답한 것이다.[26] 1744년 영조는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라고 묻는다. 세자는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영조는 "네가 진실하게 말을 했으니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필사적이라고 할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여 신하들도 압도하곤 했던 영조의 속마음은 이런 세자의 성격과 학문 성취의 미흡함이 당연히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사실 어린 시절 사도세자의 성격은 전형적인 조선 중~후기 왕들과 다를 뿐 객관적으로는 흠이 없었다. 특히 사도세자는 그 좋은 특기와 문제가 없는 성격이 기본적인 천성이었다. 부드럽고 유약한 성격은 영조의 할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증조부인 현종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이해해 주지 않고 무조건 자기 방식에만 맞추라고 고집 및 강요하는 영조의 아들로 태어난 죄로 억울하게 개고생을 해야 했다.

조선의 세자 교육이 혹독했다고 해도 엄연히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교육과정도 국왕이 명망 있는 문신들을 서연관(書筵官)[27]으로 임명한 뒤 그들에게 믿고 맡기며 틈틈이 세자와 스승들을 불러 점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전례도 없이 이런 단계를 싸그리 무시하고 세자에게 무리하고 혹독한 조기교육을 시키며 교육과정에도 과도하게 개입하고 간섭했다.

1743년 9월경부터 9세인 세자는 "눈에 어지럼증( 눈병)이 생겼다"고 스승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스승들은 영조에게 "세자 저하를 먼저 치료받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십시오"라고 영조에게 말하지만 영조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스승들이 재차 충고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내가 세자에게 물어보니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그러니 치료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승정원일기 1743년 11월 10일 11월 14일의 기록이다. 아들이 진짜로 병이 나서 치료해야 하고 스승들도 걱정하는데 영조는 오히려 "세자가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들의 조언을 무시한 영조는 계속해서 공부하게 했고 논어(論語)를 읽게 한 후에 세자에게 공부하라고 훈계하는 글을 내리는가 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라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영조 23년 11월 11일 영조가 세자와 주강을 같이 행하다가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영조: 한나라의 어느 제왕(帝王)이 우수하다고 여기느냐?
세자: 문제(文帝)입니다.
영조: 너는 어째서 고조(高祖)를 말하지 않느냐?
세자: 문제와 경제(敬帝) 치적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영조: 너의 기질로는 필시 무제(武帝)를 좋아할 것인데, 도리어 문제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세자: 무제는 비록 쾌활(快活)하지만, 오히려 오활(迂闊)[28]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조: 어떤 일이 오활하고 어떤 일이 쾌활한 것이냐?
세자: 급암(級岩)을 포용한 것이 영웅의 일이고 쾌활한 부분입니다.
영조: 그것을 어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세자: 급암의 강직함을 포용하고 주었으니 자못 고조의 활달한 기상(氣像)이 있습니다.
영조: 네가 만약 급암을 포용한 것을 두고 참된 영웅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중략) 심하다. 어리석은 말이다. 비록 강직함을 포용하였으나 역시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중서 강도에서 늙어갔고, 급암은 회양으로 내쳐졌던 것이니 진실로 개연한 일이다.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것은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하니, 너는 이러한 것에 더 힘써라!

여기서 나오는 '급암'이라는 자는 무제의 신하로, 왕에게 쓴소리, 즉 바른말 잘하는 신하였다. 한 번은 회의하다가 급암이 한무제에게 대놓고 돌직구를 던진 적도 있었는데 한무제는 쌍욕만 하고 끝냈다고 한다. 급암의 돌직구에 기분이 상해서 욕했지만 따로 벌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문제는 급암을 중용하지도 않았고 그의 주장을 잘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급암은 회양 태수로 세월을 보냈는데 이 일화를 두고 서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의 말을 "어리석다"고 말하면서 가르친다. 말하자면 "돌직구 한번 던진 걸 넘어가 주는 게 영웅이냐? 폭군이 아니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지. 근데 중용(重用)하지는 않았잖아.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건,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해!"라고 질책한 것이다. 이때 세자는 (세는 나이) 13세, 현대의 초등학교 6학년이다. 그러고도 영조 24년( 1748) 5월 19일 소대(訴對)를 행하고 똑같은 내용을 또 물어본다. " 한무제하고 한고조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세자가 "고조가 나았지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그럼 한 문제와 한무제 중에서는 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냐?"라고 물었다. 세자는 "문제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또 화를 냈다.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한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당황한 세자가 "문제, 경제가 무제보다 훌륭한 정치를 했습니다"라고 변명하자, 영조는 수그러들지 않고 "네가 시를 쓴 것을 보니 호랑이가 울부짖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으로 네 기가 매우 승한 것을 알 수 있다."고 꾸짖었다.[29] 영조 23년 겨울에 있었던 소대에서부터 사도세자는 분명 '무제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에게 화만 내고 넘어가는 면모도 있었지만, 사리에 어둡고 곧지 않은 길을 택한 경우가 많아 문경지치가 무제의 정치보다 나았다'는 답안을 내놓았고 영조 24년 여름 소대에서도 같은 답을 내놓았다. 큰 문제가 없는 답이었는데도 영조는 '너 말만 그리 하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갓 공부하려고 마음먹을 때 듣는 잔소리가 더 매섭고 듣기 싫은 법이니, 세자의 처지가 딱 그러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는 성격이 매우 달랐다. 한중록에서 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영조는 꼼꼼히 살피고 재빠른 성품인데, 세자는 덕성은 거룩해도 과묵하고 행동이 빠르지 못하다"고 말한다.[30][31]그래서 세자의 모든 일이 부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평소 묻는 말에도 즉시 대답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면서 대답하고 영조는 매번 갑갑하게 여겼다고 하지만 영유아기부터 학대받고 자란 사람이 그 주체 앞에서 기죽고 눈치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공부를 해도 야단 맞고, 안 해도 욕 먹고, 영조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면 생각과 말이 다르다며 혼나고, 솔직하게 말하면 임금 될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따위냐며 갈굼만 받으니 공부를 더 싫어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도세자와 영조가 이러한 갈등을 빚은 것은 영조가 정통성 문제로 신하들에게 오래 시달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영조는 왕세제를 거쳐 즉위한 데다 어머니 숙빈 최씨마저 무수리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신분이 미천했고 오죽하면 '게장으로 이복형 경종을 암살했다'는 항간의 소문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면 어머니가 비록 후궁일지언정 양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궁녀 출신이었고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니 오로지 아버지 영조뿐이고[32]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투했다" 혹은 "열등감을 느꼈다", "편하게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못마땅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영조의 엄격함은 당시 정치체제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숙종대 사림정치가 변질되어 충역시비로 번지고 당쟁이 곧 살육전이 되자 영조는 아버지 숙종대 제시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탕평정치를 구축했다. 그런데 이 탕평정치라는 건 근본적으로 '황극' 즉 뛰어난 능력의 철인군주가 신하들을 견제하고 또 통합시키는 시스템이었다.[33] 탕평정치는 뛰어난 능력의 군주가 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정치체제였고 이를 위해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행한 것이다.[34] 또한 조선시대 왕의 평균 수명이 40대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일찍 죽었을 경우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올라 발생할 정치적 혼란도 걱정했을 것으로 보인다.[35] 실제로 당시 승정원일기를 확인하면 영조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3.3. 대리청정과 이후

한편 영조는 여러 정치적 목적으로 양위 파동을 벌이곤 했다.[36]

"자꾸 신하들이 말 안 듣고 노골적인 당파 싸움(붕당 정치)만 하니까 왕 노릇 못 해 먹겠다. 이게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니 왕 때려 치울란다."라는 내용으로 난리를 쳐서 노론 소론 신하들에게 "한 번만 더 저희가 당파싸움을 하면 저희를 벌하소서."란 맹세를 받아내는 식이었다. 왕이 선위한다고 하면 신하와 세자가 일단 "아니 되옵니다!!!"라고 격렬히 반대 또는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싹싹 비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다. 왜냐하면 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다른 왕을 세운다는 건 그 다른 왕이 지금의 세자라고 할지라도 금상(今上)에 대한 역모 및 반역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석고대죄를 빈번하게 해야했다. 사도세자가 성년이 되기 전에 한 것은 사도세자에게 부담이 가지 않았지만[37] 사도세자가 15세 때 벌어진 영조 25년의 선위 파동은 "선위가 싫으면 대리청정이라도 시켜라. 그것도 싫으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영조가 막나가는 바람에 선위보단 한 단계 낮은 대리청정으로 이어졌으며, 이것이 희대의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영조의 대리청정은 이름만 대리청정이지, 실제론 왕권 강화를 위한 쇼에 불과했다. 이 대리청정을 들어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믿고 대리청정을 시켰다는 서술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고 영조는 왕의 일을 세자에게 맡길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당장 정사를 보기 시작한지 달포가 안 되는 영조 25년(1749년) 2월 16일에 바로 영조의 의도가 드러난다.[38]

다만 학계에서는 왕권강화보다는 다른 해석이 많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한다.[39]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자신의 신원을 사도세자를 통해 해결하기 위함이었다거나[40] 놀기만 하는 사도세자에게 업무를 일부 위임시킴으로서 책임감을 길러주고 사도세자의 자질을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영조가 심리적으로 많이 지쳐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성에 찰만큼 정치적 식견을 보인다면 핵심 사업을 남긴 채 일부 권한을 나눠주려고 시도했단 의견도 있다.
영조: "오늘은 곧 원량(元良)[41]이 시좌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여는 날이다. 품달[42]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원량에게 품달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 (사도세자에게) 무릇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에 대하여 만약 ‘그렇게 하라.[依爲之.]’라는 3글자로써 미봉적으로 대답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영의정 김재로: " 함경북도 성진[43] 방영[44](城津防營)은 도로 길주(吉州)에 소속시키는 것이 편리합니다."

좌의정 조현명: " 육진(六鎭)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9갈래가 있는데, 길주는 요충에 해당하지만 성진은 단지 3갈래 길만 막을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 "방영(防營)을 비록 길주에 도로 소속시키더라도 성진에 역시 군졸이 있는가?"

김재로: "진졸(鎭卒)[45]이 있습니다."

사도세자: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옳겠다."

영조: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당초 방영(防營)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이미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의당 먼저 대신에게 물어 보고, 또 나에게도 품(稟)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다."

결국 영조는 이 문제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46] 지켜보겠다고 하던 영조가 첫날부터 자기 말을 대놓고 어긴 것이다. 거기다 세자가 한 결정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세자가 처리한 방향이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영조가 화를 낸 이유는 단지 자기가 한 걸 마음대로 바꿨다는 이유였다. [47]거기에 영조는 길주ㆍ성진의 병영 배치 문제를 자신이 직접 그대로 주관한 다음에 또 질책해서 사도세자의 기를 죽이는 발언을 한다.
"너는 깊은 궁중(宮中)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자랐으니 어떻게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겠느냐? 지금 길주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보니 손쉽게 처리해 버리는 병통(病痛)이 없지 않다. 나는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명령도 감히 방심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고, 조제[48]에 고심하여 머리와 수염이 모두 허옇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서로 살해한 적이 없었으니 너는 이를 금석(金石)처럼 지킴이 마땅하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는 그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분리해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저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선대를 따져 보면 모두 혼인으로 맺어진 서로 좋은 사이지만, 당론이 한번 나오게 되자 문득 초(楚)나라 월(越)나라처럼 멀어져 각기 서로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내가 고집스럽게 조제(造製)에 힘쓴 것은 단연코 옳은 것이다. 지금 진언하는 자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당파 하나를 만들었다.’ 하고, 혹자는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편협하다.’ 하며, 혹자는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등 그 말하는 바가 천만 갈래로 나뉘었다. 비록 감히 서로 살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적이 없었다.

오늘부터 네가 만약 신하들이 아뢰는 대로 듣고 믿어서 시원스럽게 그 말에 따르기를 지금 길주의 일과 같이 한다면, 그 결과 종묘사직과 신하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한쪽은 나아가고 한쪽은 물러남이 겉으로는 시원스럽게 보이지만 당쟁을 열어 놓게 되는 것이니, 네가 이 명을 지키지 않으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느냐? 400년 조종(祖宗)의 기업과 한 나라의 억만 백성을 너에게 부탁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특히 위에서 영조는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하여 결정하라고 했고, 사도세자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방영의 일을 마음대로 정했다"고 나무라는 이 대목에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신하들이 옛날부터 혼맥 등으로 연결돼 사이가 돈독해 보여도, 실은 초나라 월나라의 지간처럼 철천지 원수들이라 틈만 나면 물어뜯기 바빠. 네가 신하들 하는 말을 곧이 들어주는 게 일단 시원스러워 보여도, 그렇게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고 뺏고 하다보면 당쟁의 빌미가 된다. 나는 25년 동안 신하들 중재를 게을리한 적이 없는데, 네가 나처럼 안 하고 방금처럼 니 멋대로 하다 나중에 사고 터지면 무슨 낯으로 내 얼굴 볼래? 널 믿고 맡기는 건데 잘 좀 해라!"라고 한다. 이쯤되면 사도세자 입장에선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싶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사실 애시당초 목적이 그냥 갈구는 것이었으니 답이 없기는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마음대로 뭘 할 수 있었을까? 세자는 말만 대리청정이지 "알았다.", "안 된다.", "대조(大朝)[49]께 물어보고 결정하겠다."라는 말들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처럼 이렇게 신하들 앞에서 세자의 권위를 박살내는 건 세자를 견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입만 열면 욕먹는 세자를 신하들이 불쌍히 여길지언정 '윗사람'으로서 권위를 느낄 리는 없고 신하들도 임금을 좋게 볼수 없다. 하필 이 대리청정 쪽 관련해서는 내명부만 관할하는 대비 인원왕후와 중전 정성왕후도 나서서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에 나중에 사도세자를 위로하고 영조에게 충언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친 소론 성향을 보이자, 불안해진 노론 대신들이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론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도세자가 골수 소론이라도 친소론일 수 없다. 영조의 질책이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됐는데 세자가 사소한 걸 물어보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고 화내며 안 물어보면 "제멋대로 했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세자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성질 더러운 숙종조차 아들 경종의 대리청정 기간에 일부러 1시간이나 늦게 입시한 승지[50] 때문에 경종이 벌컥 화를 냈다가 곧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입시시킨 일을 비망기(備忘記)로 책망했다가 신하들이 "그렇게 뭐라 하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지적하자 뻘쭘해한 일이 있었다. 하물며 영조는 신하들과 사도세자 사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도 단둘이 있을 때 혼내거나 꾸짖는 거면 또 모를까 훗날 세자가 즉위하면 신하가 될 대신들 앞에서 갑자기 불러다가 막말을 퍼붓고 보다못해서 이를 말리는 신하에게마저 화를 내며 모욕하는 수준이었으니 사도세자가 얽히면 군신관계에서의 조심스러움마저 안중에 없었다는 거다.

당장 저 시대로부터 200년은 넘게 지난 현대사회에서도, 인사 및 조직관리 측면에서 상급자가 하급자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중간 관리자를 꾸짖고 질책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군대에서 대대장 소대장 부사관들이 보는 앞에서 중대장을 갈구고, 기업에서 부장 대리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과장을 갈구면, 실질적으로 업무를 관장해야 할 중간 관리자가 이른바 영이 서지 않고, 권위가 실추되어 업무 진행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및 계급이 많이 해소된 현대에도 그럴진대, 저 때는 훨씬 더 신분제가 엄격한 전제 군주정인 왕조 시대였고 거기에 갈구는 대상이 권력의 정점인 국왕이라면? 대대장도 아니고 참모총장이 중대 간부들과 병사들 다 있는 데서 일개 중대장을 모욕하며 갈구는 것과 다름없다. 영조가 이랬으니 사실상 세자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수준이 된다. 게다가 현대 시대엔 성인들이 저렇게 하지, 저 때 사도세자는 불과 10대 중반에 불과한 청소년이었다. 당연히 학식 및 경험이 미숙한 상황에서, 첫 업무부터 저렇게 몰아붙이니 탈이 나지 않을래야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사도세자가 병이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도세자가 잘못을 했을 때[51] 사도세자를 엄하게 혼을 내서 사도세자가 혼절하는 사건이 있었다. 상황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 수 없지만 신하들은 사도세자의 잘못이 있어도 조용히 타일러달라 세자를 너무 엄격하게 다룬다며 영조를 말렸는데 영조는 그런 신하들의 말을 무시했다.

다만 사학계에서는 당쟁설 또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도세자가 친소론적이었기 때문에 노론이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것은 아니고 사도세자의 병증과 가혹한 영조의 태도로 인한 부자갈등을 전제로 당파의 일부 인물들이 사도세자의 신임의리와 종사보존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는 논지이다.[52][53] 이로 인해 사도세자가 우선이냐 종사가 우선이냐하는 갈등이 임오화변 몇년 전부터 발발했다.

선위 파동과 관련해서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사도세자가 18살 되던 해 겨울 궐내에 홍역이 돌아 세자를 비롯한 왕족 몇 명이 홍역을 앓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의학이 현대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홍역은 거의 죽을 병이었는데, 영조는 대리청정을 잘못했다는 이유를 들면서 홍역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사도세자에게 질책을 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홍역이 나은 지 불과 1달 된 쇠약한 몸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사흘이나 맞으며 얼음장 같은 박석에 머리를 박고 푹 엎드려 있어야 했다. 영조 28년 11월 4일

뿐만 아니라 영조는 " 중전마마 회갑에 하례(賀例)를 드리게 해 달라"는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 네 엄마 회갑이랍시고 하례까지 받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논지의 글을 써서 세자에게 보내는 등 정서적 학대까지 가했다. 영조 28년 11월 23일 덧붙여 정성왕후의 하례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는, 영조가 정성왕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이가 나쁘며 냉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회갑은 대경사로 취급되었다.[54] 그냥 시골 농부도 환갑을 맞으면 사또가 축하해 주던 시대에, 왕비가 회갑을 맞았는데 싫어한다고 저러는 건 상식 외의 미친 짓이었다.

더군다나 효가 근본인 조선에서 한 나라의 국부가 자신의 아내이자 국모에게 불효를 저지르라는 핀잔까지 주니, 왕실의 위신도 깎이고 아들인 세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학대가 되고도 남는다. 하례를 드리러 가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 불효가 되고 가지 않는다면 분명 어머니께 불효가 되니까.

실록에 따르면 영조가 양위 파동을 벌이자 김상로가 "눈보라가 치는 혹독한 추위에 필시 (세자의) 몸에 손상이 올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신들은 비록 돌보아줄 것조차도 없지만 원량은 생각지 않으신단 말입니까?"라며 영조에게 대놓고 항의한다.

영조는 양위 파동을 벌이기 3일 전 선왕을 들먹이면서 대신들의 하례를 거부한 뒤 송현궁으로 가서 환궁을 거부하기도 했는데 이에 김상로가 급한 마음에 "지금은 신이 한결같이 굳이 간쟁할 수만 없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명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해서 겨우 영조의 마음을 돌렸다. 대사간 서지수는 이를 두고 "송현궁(松峴宮)[55]에 가셨다가 환궁하지 아니하려 하실 때 김상로가 '일단 전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잘못됐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영조 28년 12월 5일. 그러자 영조는 "서지수는 본디 괴상한 무리인데, 그의 아비와 할아버지부터 그러하였다"는 소리까지 했다. 영조 28년 12월 8일.

영조의 저 발언만 놓고 보면 마치 서지수가 어디 근본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집안 출신처럼 보일 수 있는데, 서지수는 당시 조선의 명문가인 달성 서씨의 후손으로서 할아버지 서종태, 아버지 서명균이 각기 영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유서 깊은 엘리트 가문 출신이고 어머니 청풍 김씨 김구의 딸로, 김구도 우의정을 지내고 그녀의 형제 김재로는 훗날 영의정을 지낸 영조의 총신이었다. 서지수도 말년에 영의정을 역임한 바 있다. 막말로 무수리 출신 후궁 태생인 영조가 저렇게 출신 운운하며 함부로 깔볼 수 있는 허름한 가문이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서지수에 대한 비하 발언의 배경은 영조가 냉대했던 정성왕후와 같은 달성 서씨 집안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성왕후의 조카로 서지수와 같은 항렬인 서덕수 때문에 과거 영조가 곤경에 처한 일이 있는데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에 서덕수가 연루되었다. 덕분에 영조는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영조의 첫사랑인 정빈 이씨에게 독을 먹인 사람이 서덕수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 번 싫어하면 끝을 보는 영조의 성격상 저 정도면 평생 극혐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돌던 홍역으로 사도세자의 바로 위 동복누나인 화협옹주가 그로부터 약 열흘 전 20세에 요절했다. 화협옹주도 사도세자처럼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처지라, 둘은 만나면 "우리 남매는 아버님 귀 씻을 물이다."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56] 영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으면 귀를 꼭 씻었는데 귀 씻은 물을 사도세자나 화협옹주의 처소 쪽 방향에다 버리게 해 자식들을 대놓고 엿먹이곤 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아빠한테 우리 남매는 스트레스 풀기 좋은 샌드백이지."라는 말이다. 나중에는 사도세자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고 "먹었습니다"라고 대답이 돌아오면 세자를 보면서 귀를 씻어 버렸다고 한다. 세자를 무슨 '미리 접하고 씻어서 액땜해야 할 불길하고 더러운 것'마냥 취급한 것이다. 화협옹주는 바라던 아들이 아니라 또 딸이라고 영조에게 푸대접받던 처지라서 사도세자가 유독 애달파하며 챙겼던 누나인데, 이 화협옹주가 죽은 지 2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영조는 선위를 하겠다고 했다. 사도세자는 각별했던 누나를 잃고 홍역에서 나은 직후의 성치 않은 몸으로 1752년 12월 8일부터 19일까지 장장 열흘 가까이 다시 한 번 눈밭에서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게다가 이 기간 동안 영조는 세자를 불러 "내 시를 읽을 테니, 네가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아 전교(殿敎)를 거두겠다."고 하여 세자로 하여금 울게 하였고 세자가 충실하게 시행했으나 명령을 거두기는커녕 세자에게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냐!"고 되려 화를 내고 전교는 안 거두고 있었다. 석고대죄가 소극적이면 그걸로도 화를 내서 세자는 계속 울며 석고대죄를 해야했고 결국 이 추태를 보다 못한 대비 인원왕후 나서서 제재하자 드디어 전교를 거둔다.

이런 현상이 나날이 심해지던 와중 사도세자를 귀여워해 주던 할머니 대비 인원왕후 김씨와 적모(嫡母) 정성왕후 서씨가 짧은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나마 브레이크였던 이들마저 떠나 버린 뒤 사도세자는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세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들 생전인 1752년 궐을 출입하던 역술인 김명기를 통해 도교의 주문인 옥추경(玉樞經)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는데, 그해 겨울쯤부터 옥추경에 등장하는 신인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의 환각이 보이기 시작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후 환각을 동반한 세자의 정신이상 증세는 결국 정성왕후와 인원왕후가 연달아 죽은뒤 점점 심해져서 인원왕후가 사망한지 6개월도 되지 않은 상중에 살인을 시작한 것은 물론 나중에는 자신을 모시던 궁녀를 잔혹하게 죽이고 피범벅이 될 때까지 때려서 강간하며 궁궐에서 도망쳐 평양까지 비밀리에 놀러가는 등 갖가지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세자는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거의 죽으려 한다."는 보고를 올리고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세자가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한탄할 지경이었다.

다음은 영조가 대리청정을 진행한 기간 동안 세자를 얼마나 가혹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들로, 단순 선위 파동을 빼고도 세자가 받은 대우를 글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세자를 친손자처럼 아끼고 귀여워해 준 적조모 인원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엄청 학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신하들조차 보다못해 "세자 저하를 좀 그만 혼내시라", "왜 가만 있는 세자 저하를 저렇게 잡으세요!", "저하께서 대답을 못하시는 것은 전하를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이옵니다"라는 등의 충언을 올리다가 영조와 말싸움이 붙기도 했다.

1755년 11월 세자의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이에 세자가 마땅히 선희궁이 기거하던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으로 병문안을 갔는데 그곳에는 동복 여동생인 화완옹주도 있었다. 사도세자와 화완옹주 모두 선희궁 소생이니 문안 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예뻐하는 딸의 곁에 싫어하는 아들이 가까이 간 것을 본 영조가 폭발했다. 영조는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치며 길길이 날뛰었고 친동생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사도세자는 창문과 담벼락을 넘어 허겁지겁 자신의 처소로 달아났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동궁을 나와 청휘문[57] 안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꾸짖은 다음 " 서경의 태갑편이나 읽으라"[58][59]고 명령하며 세자궁을 나갔고 이에 세자도 마침내 폭발했다. 세자는 "아무 잘못 없이 이런 일을 당하니 서러워서 약을 먹고 자결하겠노라"고 하며 크게 울부짖다가 주변인들이 달래서 겨우 진정했다.

1756년 5월 1일 영조가 세자가 기거하던 낙선당에 갑자기 들이닥쳐 을 마시지 않은 사도세자에게 "술을 마신 것을 자백하라"고 닦달하며 몰아세웠다. 세자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60] 일방적으로 술에 취했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그 즈음 사도세자는 동궁에서조차 안절부절못하며 취선당의 음식을 만드는 밧소주방에 자주 있었는데, 깊고 고요하여 마음에 든다는 이유였다. 매섭게 몰아붙이는 아버지를 견디다 못한 사도세자는 "밧소주방 큰나인 희정이에게 얻어먹었습니다."라고 거짓 자백을 했고 이에 보다못한 사도세자의 보모인 최 상궁이 "술 잡숫는다는 말씀은 지극 원통하오니, 술내가 나는가 맡아 보소서."라고 영조에게 항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도세자는 그래도 부왕이라고 아버지가 상궁에게 민망한 꼴을 당하자 "먹고 아니 먹고 간에, 내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소."라며 최 상궁을 물리쳤다. 그러자 영조는 "너, 내 앞에서 상궁을 꾸짖으니, 어른 앞에서는 견마도 꾸짖지 못하는데 그리 하는가."라고 사도세자를 꾸짖으며 춘방의 신하들을 시켜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했다. 사도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을 보고 원통함이 폭발하여 "너희 놈들이 내가 이렇게 억울한 말을 들어도 한마디 아뢰지 않고 나를 모시느냐. 모두 나가라. 어서 나가라."며 춘방 신하들을 쫓아냈는데 신하들이 쫓겨나는 중에 실로 억세게 운 나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촛대가 쓰러져 낙선당에 불이 난 것이다. 심지어 그 불길이 근처의 관의합에 있던 세손의 거처로 향해서 무거운 몸[61]으로 도망치던 혜경궁 홍씨 일행은 구조도 못하여 난리를 치는데 다행히 불길이 방향을 틀어 세손은 무사했다.

영조는 이를 보고는 세자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고 여겨 모든 신하를 모으고 그들 앞에서 세자를 불러 세워 호통치며 "네가 불한당이냐? 이제 방화까지 하게!"라고 크게 꾸짖었다. 하도 무섭게 화를 내니 세자는 무서워서 "촛대가 쓰러져서 불이 난 것입니다"라는 해명도 못 하고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62]

혜경궁 홍씨가 쓴 《 한중록》에서 세자의 후궁의 이름은 박빙애(朴氷愛)로, 숙종의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였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몇년동안 빙애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그래도 자신을 아껴주는 할머니 인원왕후를 생각해서인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정신건강이 이미 잔뜩 피폐해진 사도세자는 "나를 누가 말리겠냐"면서 빙애를 데려온다. 아예 1757년(영조 33년) 9월 빙애를 후궁으로 삼았지만 국상 중에 이런 일을 벌였으니 영조가 세자를 불러내서 심하게 꾸짖고 "빙애를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도세자는 빙애를 화완옹주의 집에 숨겨두고 다른 궁녀를 '가짜 빙애'로 만들어 속였다.[63]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는 크게 화를 내며 반성문을 쓰게 했는데 반성문에 자신이 잘못한 일을 제대로 쓰지 않자 영조가 분노해 사도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나가는 길에 혼절했고 사도세자는 양정합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일 매년 음력 1월 21일마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 세자를 세워 놓으며 잘잘못을 따졌다. 영조식 생일빵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는커녕 아랫사람인 신하들 앞에서 질책만 하고 생일을 예사로이 넘기질 못하고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며 욕을 들으니 세자는 생일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특히 사망하기 2년 전 생일에는 세자도 서러움이 폭발하여 아버지 영조에게 욕을 하며 화내고 "살아 뭣하겠냐"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자녀들인 세손과 군주[64]들이 문안을 와도 "부모도 모르는 것이 자식이라고 알겠냐, 나가라"라며 불호령을 쳐서 아이들이 놀라 어쩔 줄 몰랐다.

1758년 7월 8일 영조실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세자를 대하는 영조의 태도가 너무 가혹하다고 여긴 도승지 남태회가 찾아와 울면서 고한다.
임금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니, 도승지 남태회(南泰會)가 울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게 항상 엄격한 위엄을 가지고 주로 대하셨기 때문에, 저하(邸下)가 지나치게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합니다. 어젯밤의 일을[65]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저하께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조심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지나치다. 이 말은 박홍준(朴弘儁)과 가깝다."

하였다. 남태회가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춘방의 말을 들으니, ‘동궁께서 전하가 진전(眞殿)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서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궁의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한 가운데 이와 같이 초조하고 심려한다면, 어찌 민망하고 절박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이 어찌 이를 알았다는 것인가?"

하였다. 남태회가 말하기를,

"동궁이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에 이를 알았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춘방의 청대(請對)는 지나치다."

하였다.

영조실록 92권, 영조 34년 7월 8일 임진 2번째 기사

세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 온다는 말만 들어도 불안하고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이와 같이 신하들조차 영조에게 "전하께서 저하를 지나치게 엄하게 대하시니,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모습이 조선왕조에서 훈구ㆍ사림과 함께 가장 많은 의견 충돌을 한 노론 소론, 이 둘 외에도 당파를 불문하고 정말, 몹시, 자주 나온다. 심지어 위의 기사조차 신하가 울면서 간하고 있는데도 영조는 그 신하에게 화를 내며 트집잡으려고 한 것이다.

1759년에는 밝은 혜성이 나타났는데[66] "이와 같은 천체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세자가 몸을 돌이켜 수성(羞誠)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세자는 따르겠다고 했으나, 계속되는 돌발 행동으로 영조의 불신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국의 세자가 창문을 넘어 달아나고 자살 소동만 서너 번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세자는 부왕이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고 질책을 계속하며 선위 파동이니 뭐니 해서 석고대죄 쇼를 해야 했고, 심적 부담으로 기절까지 하니, 나중에는 제정신이 유지가 안 될 정도였다. 게다가 냉혹한 부왕은 세자의 대접까지 날이 갈수록 박하게 했는데 1760년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행궁으로 세자가 거동할 때는 호위 병력이 고작 500명에 에게??지나지 않았고[67] 세자의 사부와 빈객들이 하나도 따르지 않아서 한양의 식자들이 이를 보고는 "일국의 세자의 행차가 고작 이 정도냐?!"라고 한탄했다는 기록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68]

이덕일은 "호위 병력이 500명이나 되었으니 세자가 대접을 잘 받은 것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왕족도 아니라 당시의 '한낱 양반'에 지나지 않는 권세 있는 양반들까지도 왕족한테 "저게 뭐냐"고 한탄하는 꼴을 보면 명백한 푸대접이다. 마찬가지로 1760년 여름에 가뭄이 심했는데 영조는 "이것 역시 모두 다 세자 때문"이라며 '차마 듣지 못할 전교'[69]를 퍼부으니 세자가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며느리인 효의왕후가 간택되어 세손빈으로 입궁할 때조차도 참석하지 못했다. 삼간택 중 2번째 간택 과정에선 효의왕후와 정조가 천연두에 걸려서 온 왕실은 물론이고 사도세자도 이를 걱정하며 밤을 샐 정도였다. 그런데도 영조는 사도세자가 간택에 참석하는 걸 막았다. 마지막 삼간택 때는 차마 막을 수 없어서 사도세자도 참석이 가능했는데, 이 때 사도세자는 아래에 언급할 의대증 때문에 망건에 달 관자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세자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정3품 관료가 착용하는 통정옥관자를 착용했다. 이를 본 영조는 이를 꼬투리 잡아서 사도세자를 간택 자리에서 쫓아냈다. 이를 보다 못한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김씨, 영빈 이씨, 화완옹주와 의논해서 효의왕후가 간택 후 세손궁으로 가기 전 잠깐이라도 동궁에 들러서 사도세자와 만나게 했다. 영조에게 쫓겨나서 앓아 누워 있던 사도세자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며느리 효의왕후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

3.4. 극심한 정신질환과 연이은 살인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而 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70][71]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했다.
대천록(待闡錄)[72]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이 아래 1장은 세초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73]
승정원일기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좌의정·우의정이 입시했을 때에 하교하기를 "이제 세자의 하령을 보니, 슬프고 가엾음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여섯 사람에게 판(板)을 주고 베를 주어, 해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간검(看檢)하여 매장하게 하며, 그 처자(妻子)는 후하게 돌보아 주어 자신에 한하여 복호해 주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1757년 6월부터 경모궁의 홧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당번 내관 김한채를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들에게 효시하였다. 나는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날 내인을 여럿 죽였다. - 한중록의 기록

1757년 6월 어느 날 하루에 내시와 나인을 6명 살해했다.[74] 세자 주변 내시, 나인, 종 등 사람을 죽이고 낙형[75]으로 고문하기 시작했다.

아들인 정조에 의해 승정원일기의 내용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대부분 한중록에 적힌 것이다. 원래 사서를 수정하는 것은 극악한 폭군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정조는 후대에 악평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기록을 삭제했다. 사관들이 저항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승정원일기 속 사도세자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를 고문하여 죽이고, 누구를 고문하여 죽이고 이런 내용의 반복이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강박장애 의대증(衣帶症)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현대의 의학용어가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병명이다. 기록에 따르면 옷 1벌을 입자면 10벌에서 20~30벌을 지어 올려야 했는데, 세자는 옷을 입기 전에 옷이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 두거나 결벽증 환자 처럼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고 불사르기도 하는 등, 1벌을 순(純)하게 갈아입는 적이 없었다. 온갖 난리를 치며 가까스로 옷 1벌을 입으면 옷이 해지도록 그것만 입고, 본인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면 수없이 갈아 입으며 강박장애 특유의 불안과 그에 따른 폭력성을 보였으며, 세자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을 폭행하거나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니 나인들과 내관들이 무서워서, 아니 살기 위해서 세자의 옷 입기 시중을 기피하게 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에게 의복을 갈아입히는 일을 맡았지만, 그런 혜경궁조차 영조에게 제대로 얘기를 못했다며 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눈알이 빠질 뻔 했다. 이 사건으로 홍씨는 며칠 동안 앞도 못 보고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흉하게 부은 눈으로 있어야 했다. 결국 세자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박빙애(경빈 박씨)가 세자의 옷 시중을 들었는데, 1761년 1월 옷 입기 시중을 들던 중 세자가 빙애를 때려 죽였다.[76]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 주변 사람들이 숨기려던 세자가 빙애를 죽인 일과 여러 일을 영조에게 고했다. 영조는 무엄하다며 나경언을 다음날 사형시켰다.[77]

영조는 다음과 같이 세자를 혼냈다.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 기사.

세자는 나인을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로 곁에 두었다.[78]

의관(衣冠)을 갖추면 아버지를 찾아뵈러 가야 한다는 사고가 강박증으로 발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79] 즉, 의대증은 영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병이며 아버지의 심한 질책과 핍박을 받고 정신이 크게 피폐해진 것이 원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80] 큰아버지인 경종은 그나마 나아서 생모( 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전까진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사사 이후 아버지가 싸늘하게 변하여 행동도 조심해야 했지만, 숙종 영조처럼 노골적으로 경종을 학대하진 않았다.[81] 질책이 일시적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하고 어릴 때부터 받아 온 학대의 규모를 보면 세자의 강도가 더 심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이러한 사도세자의 황폐해진 정신상태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鬱火)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
나는 한 가지 병(病)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 때 사도세자의 편지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虛荒)되고 미친 듯합니다.
웃대궐을 수구(水口)로 가옵신다 하야, 가시다가 못 가옵시고 돌아오시니 이는 윤 5월 11일 ~ 12일 간이라. 그러할 즈음에 황망한 소문이 보태어서 아니 나리오. 낭자자(狼藉藉)하니 앞뒤로 일이 다 본심으로 하옵신 일이 아니건마는 인사나 정신을 놓으셨을 때는 화를 내시며 하시는 말씀이 "병화(兵火)로 어떻게 할까보다", 검을 끼고 가 어떻게 하고 싶다 하오시니 한푼이라도 상정(想情)이 있으시면 어찌 이러시리오.[82]
한중록

영조실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외모나 생각, 됨됨이가 고조부인 효종과 매우 닮았다고 한다. 일단 덩치가 어지간한 장수들보다 훨씬 큰 것부터 문(文)보다 무(武)를 더 좋아했다고도 하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어릴 때는 총명했다.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볼 때,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은 크다. 외방에 나가면 스트레스의 원인인 영조에게서 멀어졌다는 해방감에 정신이상 증세는 완화될 수 있고, 지방에 사는 관리들과 백성들이야 세자에게 강박관념이나 위협을 주는 대상이 아닌 만큼 너그럽게 대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2014년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한중록을 분석한 결과 "한중록의 내용을 볼 때 사도세자는 양극성장애(조울증)의 증상에 해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는 현대의 정신건강의학 지식이 없이 허구로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중록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묘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연구 결과다.[83] 양극성장애라면 기분 삽화 사이 사이에 정상적인 정신건강상태를 회복하는 기간도 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광증을 보이면서도 때때로 정상적인 판단을 했다는 기록과도 모순되지가 않는다.
"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해당 논문 9페이지

역사학자들이 아닌 의대 교수들이 보아도 한중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정신질환 증상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최소한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을 당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를 놓고 보았을 때 기분이 양극성장애 I형과 양극성장애 II형의 구분이 어려울지언정 조증 우울증을 왔다갔다 했거나 혼재성 삽화일 때 궁비와 환시를 죽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증은 병식을 인식하기 매우 어려우나, 관찰하는 사람은 알 수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나서 돈을 물쓰듯 쓰거나 하는 것이 전형적인 증상인데, 사도세자도 이런 일을 벌여 빚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양극성장애는 유전력이 높기 대문에 유전력이 있을 가능성 또한 지적되었다.[84]

관서행과 임오화변 당시 나경언의 고변 내용을 보면 세자는 유람과 사치에 열중한 것으로 추정된다.[85] 세자는 연회와 아랫사람들에게 주는 하사품 구입 등에 많은 돈을 썼고 이 때문에 세자궁(동궁)의 예산이 텅텅 비어서 시전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86] 나중에 이를 안 영조는 세자한테 크게 화를 내며 질책하고 국고로 상인들에게 돈을 갚았다.

사도세자의 이러한 범죄행각과 살인은 철저하게 약자에게 집중되었다.[87] 사도세자의 주된 피해자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여성가족과 자식[88][89] 그리고 궁인들이었다.[90] 병증 초중기에는 궁인들을 해치고 있음에도 영조나 대신들 앞에서는 멀쩡했으며 홍계희, 신만 등을 매우 싫어했음에도[91] 그들이 사도세자에게 직접 해꼬지를 당하진 않았다.

3.5. 임오화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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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정말 최극단에 달하여 나중에는 그의 비행들을 알고 분노한 영조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때 세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꿇어앉아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사도세자는 영조를 '아버님'이라고 강조해 불렀는데 '전하'나 '아바마마'도 아닌 '아버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모습으로 당시 세자가 얼마나 급박하고 죽고 싶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글도 잘 읽고 다 시키는 대로 잘 할 테니 이러지 마시라"는 아들의 절규와 신하들의 만류, 세손의 간청에도 영조는 끝까지 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자결을 명했다.

영조는 세자가 자결하려는 것도 신하들의 제지로 소용이 없자 격분해, 신하들과 세손을 강제로 끌어내고 세자를 폐서인[92]하며 담는 뒤주 속에 가두어 버렸고 세자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했다. 뒤주 속에 가둬진 세자는 결국 8일 만에 갈증과 굶주림 속에 생을 마감했다( 갈사). 특히 영조는 아들만 죽인 게 아니라 아들의 측근들마저 처형해 버렸다. 세자의 유흥 상대였던 무당들과 기생, 여승들은 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머잖아 참수당했고, 세자의 스승들인 이후, 민백상, 이천보는 자살했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3.6. 장례

처음엔 묘가 양주 배봉[93]에 있었으며, 세자의 예에 따르지도 않고 잡초가 무성히 많았던 초라한 무덤이었다. 초라하기만 한 게 아니고 돌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버려진 무덤 꼴이었다고 한다.

다만 물이 차서 사도세자의 시신이 썩지 않는 흉지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94] 관련 논문에 의하면[95] 영우원은 초장시 풍수지리상 길지(吉地)로 판정된 곳이었으며 정조 및 신하들 또한 이곳을 길지(吉地)로 말하고 있었다.[96] 그런데 1786년 이후 정조 및 신하들이 이를 흉지라고 의견을 바꾸며 이장을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에는 문효세자가 사망하는 비극 등 개인사를 풍수지리를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 영우원이 길지긴 하나 단점이 있어 왕이 쓸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97],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요소 등 다양한 이유가 꼽힌다.한 마디로 정조의 왕권강화와 사도세자를 더 좋은 자리에 이장하고 싶다는 목적으로 정조가 일을 벌인 것[98]

1968년 배봉산의 옛 사도세자 무덤 자리에서 처음 이곳에 사도세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은 세자의 청화백자 묘지석이 발굴되었는데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산(華山)으로 옮길 때 같이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묘지석 자체는 199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공개되었으며 묘지문의 제목은 '어제지문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御製誌文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라고 해서 영조 자신이 지은 것이다. 세자가 처음 태어났을 때 세자가 읽을 책을 국왕 자신이 몸소 필사(筆寫)했다는 점과 함께 놓고 보면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御製誌文
어제지문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思悼世子諱愃字允寬 臨御十一年歲乙卯正月二十一日誕生 卽暎嬪所誕也
生而穎悟 及其長也 文理亦通 其有朝鮮庶幾之望 嗚呼 不學聖人 反學太甲慾敗縱敗之事 嗚呼 訓諭自省編心鑑便作言敎狎昵群小將至國亡

사도세자의 휘는 훤(愃)이요, 자는 윤관이라. 임어 11년 세차 을묘 정월 스무이튿날 탄생하니 곧 영빈(暎嬪)이 낳은 바이라.
나면서 영오(穎悟)하고 급기 자라니 문리(文理) 또한 꿰뚫어 그는 거의 조선의 바람이러니라. 아아, 성인(聖人)을 배우지 아니하고 도리어 태갑(太甲)[99]의 욕패함과 종패한 일을 배우도다. 아아, 자성편(自省編)과 심감(心鑑)을 훈유(訓兪)하나 제멋대로 언교(言敎)를 짓고 군소(群小)와 압닐(狎昵)하니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니라.


噫 自古無道之君 何限 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 其本生於豐豫 不能攝心 流於狂也 夙夜所望若太甲之悔悟 終至於萬古所無之事 使白首之父 作萬古所無之事乎 嗚呼 所惜者其姿 所歎者述編 嗚呼 是誰之愆 卽予不能敎導之致 於爾何有 嗚呼十三日之事 豈予樂爲 豈予樂爲 爾若早歸 豈有此諡

아, 예로부터 무도(無道)한 임금이 얼마리오, 그러나 세자 때에 이와 같다는 이는 내 아직 미문(未聞)인 바이라, 그는 본디 넉넉하고 편안히 태어나나 능히 섭심(攝心)하지 못하니 미치광이(狂人)로 흐르더니라. 숙야로 태갑(太甲)의 후오(悔悟)를 바라는 바이나, 마침내 만고에 없은 바의 에 이르러, 백수(白首)의 아비로 하여금 만고의 없은 바의 을 일으키게 하느뇨? 아아, 애석한 바는 그 자태요 한탄하는 바는 술편(述編)이라. 아아, 이는 뉘 허물인고 하니 곧 내 능히 교도(敎導)하지 못한 소치일지니 네게 무엇이 있으리오? 아아, 열사흗날의 일 어찌 내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 즐기어 하였으랴. 네 만약 일찍 돌아왔으면 어찌 이 시호가 있었으랴.


講書院多日相守者 何爲宗社也 爲斯民也 思之及此 良欲無聞 逮至九日聞不諱之報 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至此不忍呼寫 歲玄黓敦牂月夏五閏而卽二十一日也 乃復舊號特賜諡曰 思悼 嗚呼 近三十年爲父之恩義伸于此矣 此豈爲爾 嗚呼 辛丑血脈之敎 今只有世孫 寔爲宗國之意也 七月二十三日葬于楊州中浪浦酉向原 嗚呼 無他施惠賜嬪號曰 惠嬪於斯盡矣 此非詞臣代撰者 故臥而呼寫 表予三十年之義 嗚呼 思悼將此文而無憾于予矣

강서원(講書院)에서 여러 날 서로 지킴은 어찌 종사(宗社)를 위함이요, 이 백성을 위함이리오.[100]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들음이 없고자 하였거늘, 아흐렛날에 이르러 꺼리지 못할 보고를 들었노라. 네 무슨 마음으로 일흔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만나게 하느뇨. 이에 이르니 참지 못하여 불러 베끼노라. 해는 현익돈장(玄黓敦牂)[임오(壬午)]이요 여름 윤5월하고 곧 스무하룻날이라. 이에 다시 옛 호(號)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특사(特賜)하며 가로되 사도(思悼)라 하노라. 아아, 서른 해에 가까운 아비의 은의(恩義)가 이에 펴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리오? 아아, 신축(辛丑)의 혈맥을 가르침이 지금은 다만 세손이 있으니 참으로 종국(宗國)을 위한 뜻이니라.[102] 7월 스무사흗날 양주 중랑포 유향(酉向)[서쪽] 벌에 매장하노라. 아아, 다른 시혜(施惠) 없이 에게 호를 내리며 가로되 혜빈(惠嬪)이라 하며 이에 다하노라. 이는 신하가 갈음(喝吟)하여 지음(至吟)이 아니요 누워서 불러 베끼게 하여 내 서른 해의 의리를 나타내노라, 아아, 사도(思悼)는 장차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섭섭해 하지 말지어다.


壬戌入學 癸亥行冠禮 甲子行嘉禮 娶豐山洪氏 卽領議政鳳漢之女 永安尉柱元五代孫 嬪誕二男二女 一懿昭世孫 一則世孫 嘉禮于淸風金氏 卽參判時默女 府院君五代孫也 長女淸衍郡主 次女淸璿郡主 側室亦有三男一女矣 崇禎紀元後百三十五年壬午七月日

임술( 1742)에 입학하고 계해( 1743)에 관례를 행하고 갑자( 1744)에 가례를 행하여 풍산 홍씨를 아내로 하니 곧 영의정 봉한의 딸이요. 영안위 주원의 5대손이라. 빈(嬪)은 2남 2녀를 낳으니 하나는 의소세손이요 하나는 곧 세손이라. 가례는 청풍 김씨 즉 참판 시묵의 딸과 하니, 부원군의 5대손이라. 장녀는 청연군주고 차녀는 청선군주라. 측실 또한 3남 1녀라. 숭정기원후 135년( 1762) 임오 칠월 일
이뿐만 아니라 영조는 사도세자의 발인(發湮)에 손자인 정조가 참석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신하들이 상소를 올렸지만 영조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결국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만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마지막 배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날을 사관은 이렇게 비판한다.
"장례의 절차는 예법의 가장 큰 것이니, 제왕가(帝王家)의 예가 필부(匹夫)나 서인(庶人)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 폐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세손이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효성(孝誠)은 마땅히 어른과 차이가 없으니, 황인검의 상소는 가히 예의 바른 도리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성상(聖上)께서 한 번 곡(哭)하고 영결(英結)하는 것도 허락지 않아 지극한 정리(情裏)를 조금도 펴지 못하게 했으니, 그 흠결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영조 100권, 38년( 1762년 임오 / 건륭(乾隆) 27년) 7월 13일(계유) 1번째 기사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아무리 왕실 예법 때문이라고 해도 명색이 아들인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다니 정상이 아니다.'라는 뜻이다.[104]

다만 이에 대해선 영조가 단순히 사도세자에게 잔혹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냉혹이 아닌) 냉철한 행동이란 해석도 있다. 일단 사도세자를 역도(逆道)라는 명분으로 죽인 상황에서 계속 세손을 사도세자의 아들로 규정하고 방치했다가는 '역적의 아들 = 역적'이라는 연좌제 논리[105]로 인해 세손조차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즉, 자칫하면 세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사후에도 영조가 그를 푸대접한 이유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형식상 사도세자와는 무관하게 만듦으로써 세손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영조실록의 직접적인 기록에 의하면 영조 자신이 효장세자가 비록 사도세자에게 형(兄)의 지위에 있으나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만일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살아있었다면 효장세자는 세자위에서 (추존 형태라도) 왕이 되지 못한 순회세자 소현세자의 예를 따르게 되었을 것이지만 임오화변으로 인하여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 장통(長統)[106]을 계승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의리상 불가피해졌다고 발언한 것이 나와 있다.[107] 물론 역시 세손의 인간적인 심정까지 완전히 헤아린 결정은 아니었다.

이와는 별개일 수도 있는데 임오화변 이후 영빈의 장례를 치를 때의 일이다. 이미 이전의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진종)의 장통(長統)을 계승하게 하겠다'는 처분으로 인해 영빈 이씨는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와 공적으로는 단순히 할아버지의 후궁으로서 지위(의붓할머니, 서조모)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영조 왈 "영빈이 죽었는데 장례를 담당하는 예조에서 세손과 혜빈( 혜경궁 홍씨)이 영빈 상(喪)에 임해야 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는 게 말이 되느냐?"며 예조판서 이지억을 파직시킨 후 세손 모자로 하여금 영빈의 발인날 곡림을 하게 했던 사례가 있었다.[108]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된 시점은 사도세자의 사후여서 사도세자의 '적자'인(였던) 정조가 사도세자의 장례에 임했던 방식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최상급 장례용품을 사용하는 등 장례는 나름 정성을 들여서 제대로 치러 주었다. 이는 당시 예조판서 겸 호조판서 정홍순이 "최대한 예를 갖춰 장사지내라"고 어명으로 당부를 했기 때문이다.[109] 1777년 정조가 "장례 당시에 사용한 물품을 검열하겠다"고 하자 정홍순이 견본을 보냈고 정조는 아버지를 제대로 장사지내 준 것에 대해 감격하여 특별히 정홍순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

정조는 즉위한 뒤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하고자 했지만 선왕 영조가 영조 40년(1764년)에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곳에 옮겨 짓는 등의 예우를 보인 다음에 정조에게 "네 아비에겐 할 만큼 했다. 단 한 글자라도 더 높인다면 할아비를 잊은 것으로 알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정조가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즉위 직후의 연설에서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나를 효장세자의 뒤를 잇도록 하셨으니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러니 함부로 추숭(追崇)을 말하는 자는 마땅히 처벌하겠다'라는 발언을 남겼다.[110]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사도세자의 신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곧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을 높여 고쳐 부르고[111]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더해 올렸는데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 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이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邑治)[112]가 있었던 화산(花山 / 華山)[113]으로 옮기고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원으로 격상시켜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하였으며 기존 수원부 읍치와 시가지를 이전하기 위해 현재의 수원시 일대에 수원화성을 축조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자주 이 화성으로 행차했다고 한다. 훗날 고종 때 임금으로 추존되면서 받은 능호는 융릉(隆陵). 능의 양식을 보면 오히려 정조의 능인 건릉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이때는 문성국, 숙의 문씨, 김상로 등이 역률로 추죄된 후라서 오히려 신하들이 "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라고 안도하여 조용했다.

당시에는 아직 임금으로 추숭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세자묘인 '원'(園)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정조는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아버지 무덤을 정성껏 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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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상에서 바라본 융릉(隆陵)의 전경.

다른 조선왕릉과는 달리 정자각이 정면이 아니라 오른편에 비켜 세워졌는데 그 이유는 현륭원의 정자각을 지을 때 능상 바로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서 지어라고 정조가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정조는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앞을 막아서야 죽은 뒤에도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신하들은 통곡했다고 한다.

정조는 부친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했다. 현륭원 자리를 정할 때 신하들이 "한성에서 수원까지의 거리가 88리라서 '임금이 원행을 나갈 때 80리 밖을 나갈 수 없다'는 법도에 어긋납니다"고 반대하자, 정조는 "앞으로 수원을 80리로 정하노라"라고 말해 자신의 성묘(誠墓)를 정당화시켰다. 이장한 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 정조실록 18년 1월 20일의 기록에 따르면, 신하들이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에게 "우리 전하가 현륭원에만 가면 대성 통곡을 하시고 애통해하시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너무 자주 가는통에 옥체 상할까 염려되니, 혜경궁께서 아드님 되시는 전하(정조)에게 제발 현륭원에 그만 가라고 말해 달라"는 호소를 연달아 할 정도였다. 군주의 잦은 방문으로 인해 융릉을 관리하는 능참봉[114]들이 고생했다거나 심지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자세한 것은 능참봉 항목 참고.

그런데 막상 갈 때는 신하들을 독촉했는데, 돌아올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현륭원이 있는 곳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정조가 돌아오는 길에 쉬었던 고개를 지지대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115] 한편 사도세자 묘로 가는 길목에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보게 되었는데, 그 무덤을 지날 때면 항상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 쪽을 보지 않았다고 하며, 나중에는 다른 길을 만들어 일부러 피해갔다고 한다.

야사 중에는 무덤 근처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나 그 꼴을 본 정조가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는데 이후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116] 이후 백성들이 흉년으로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상황이 벌어지자 정조는 처벌 대신 콩주머니를 나무마다 매달게 하여 나무껍질 대신 먹도록 한 일도 있었다.

3.7. 추숭

정조의 갈망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追尊)하는 것이었겠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사당의 명칭인 경모궁으로 높여 불렀다.[117] 이후 순조, 헌종, 철종 대까지 사도세자를 추숭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의가 있었지만, 사도세자 추숭을 반대하던 벽파가 숙청된 다음에도 사도세자 추숭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미 순조 말엽에는 사도세자 추숭을 요구하면 "철 지난 얘기를 왜 꺼내냐"고 면박을 듣는 수준이었다. 훗날 왕실 족보상 현손이었던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1899년 10월경[118] 장종(莊宗)으로 추존하였다가[119] 1899년 12월 태조 및 4대조 추존에 포함돼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로 재추존하면서 정조의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진다. 이때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다는 비원(費願)을 여러차례 말했고 그 측근 중 1명의 자손이었던 서상조(徐相祖)가 고종을 모시게 된 1899년 8월에 그 일화를 전하여 고종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조선 후기 정조 이후의 국왕들은 모두 장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조의 핏줄이다. 고종은 인조에서 갈라져나온 줄기로 전 왕인 철종과는 무려 핏줄로 17촌(거의 남남)이다.[120] 철종은 장조의 서증손자이며 고종의 친할아버지인 남연군은 장조의 친아들이었던 은신군[121]의 양자다. 고종은 즉위하기 전에는 법적(족보상)으로 사도세자의 현손이 아니었지만 즉위할 때 익종( 효명세자)의 양자가 되면서 족보상으로 정조의 양증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양현손자가 되었는데 사도세자가 왕에 이어 황제로 추존된 것은 그가 고종의 법적 고조부였기 때문이다.[122][123] 때문에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은 촌수로 따지면 상당히 멀지만 법적으로는 장조의 후손이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세자여서인지 민간에서는 '뒤주대왕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으로 모셔졌다. # 비슷하게 단종을 영험한 신으로 모신 사례도 있다.

4. 초상화(어진)

파일:/image/038/2007/06/15/jowi200706151029450.jpg 파일:gvWWObl.jpg 파일:사도세자상(思悼世子像)_19세기_작자미상.jpg
상상 어진[124] 우승우 화백의 상상 어진 사도세자상(思悼世子像) / 19세기 / 작자미상[125]

5. 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장조
(莊祖)
<colbgcolor=#fff3e4,#331c00> 영조
(英祖)
<colbgcolor=#ffffe4,#323300> 숙종
(肅宗)
현종
(顯宗)
명성왕후
(明聖王后)
화경숙빈 최씨
(和敬淑嬪 崔氏)
증 영의정 최효원
(贈 領議政 崔孝元)
증 정경부인 남양 홍씨
(贈 貞敬夫人 南陽 洪氏)
소유영빈 이씨
(昭裕暎嬪 李氏)
증 좌찬성 이유번
(贈 左贊成 李楡蕃)
이영임
(李英任)
미상
증 정경부인 한양 김씨
(贈 貞敬夫人 漢陽 金氏)
김우종
(金佑宗)
전주 이씨
(全州 李氏)

5.2. 배우자/자녀


흥미롭게도 효종 이래 아들이 귀한 조선왕실에서 무려 아들을 5명이나 보았지만 일찍 죽은 의소세손을 제외하더라도 각종 역모사건 등에 얽혀서 실질적으로 후손을 남긴 자식은 정조 은언군뿐이며 그나마도 정조 계열은 순조- 효명세자- 헌종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다가 헌종 대에서 대가 끊기고 은언군 계열도 상계군 전계대원군만 제외하곤 아들 없이 죽었으며 전계대원군의 아들들도 하나같이 아들 없이 죽어서 경은군 빼고는 직계 자손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경은군의 손자들이 만약 후사를 잇지 못하였다면 현재 장조의 직계 자손은 완전히 끊긴 것이 된다.

6. 대중매체

영화와 드라마 매체 속 사도세자

아버지 영조에 의해 엽기적인 죽음을 맞은 충격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보니 사극에 자주 등장한다. 아버지 및 아들 정조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비슷한 생애와 결말을 보여준 왕자들인 호동왕자 소현세자보다도 인지도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 노론 음모론 이덕일 사관의 영향으로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모함당해 죽었다는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나아가 "노론의 음모로 죽은 실패한 개혁군주"의 이미지를 그리기도 한다. 이후 음모론에 여러 반론이 제기되고 또다른 역사적 사실들이 더 알려지면서 이러한 작품들은 줄어들었다.

영·정조시대가 18세기 조선의 부흥기였다고 평가되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호감을 사고 있다 보니 대중매체에서 영조-장조-정조 3대의 치부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적다는 의견이 있다. 영조의 아동 학대에 가까운 잔인한 자식교육, 사도세자의 광증과 여러 사람을 죽인 살인행각, 정조가 승정원일기나 사초까지 지우면서 부친의 심각한 행위를 숨기고 미화하기 급급했던 사실 등이 묘사되면 이들의 이미지 하락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묘사 자체가 대중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6.1. 소설

6.2. 노래

금이야 옥이야 태자로 봉한 몸이
뒤주 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 영화도 버리시고
흐느끼며 가실 때엔 밤새들도 울었소

궁성 풍악과 가무로 즐거운 밤
뒤주 안이 웬 말이요 야속한 사도세자
황금 왕관도 사랑도 버리시고
억울하게 가실 때엔 가야금도 울었소

6.3. 드라마

파일:사관은 논한다 등장인물 폐세자.png
2024년 KBS 드라마 스페셜 《사관은 논한다》
배우: 이순원

6.4. 영화

6.5. 만화

7. 기타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 기사 어제장헌대왕지문


[1] 사도세자가 사망할 때 문정전(文政殿)은 정성왕후의 혼전인 '휘령전(徽寧殿)'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문서 참고. [2] 이 한자는 '상쾌할 선', '너그러울 훤'이라는 두 가지 훈음이 있는데, 윤관(允寬)이라는 자와 연관지어볼 때 '훤'이라 불렸음이 더 타당하다. [3] 양자로 입적되어 종법과 혈통상 현손이 되는 고종 1899년 9월에 장종(莊宗)으로 추존하고 12월에 황제로 재추존함에 따라 장조로 재격상되었다. [4]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친서). [5] 작은아버지 연령군의 이름과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연령군의 이름은 '밝을 훤(昍)'이다. [6] '선'으로 읽을 때는 글자 뜻도 '잊다'로 바뀐다. [7] 張裕昇, 2021, 〈조선 왕실의 작명 연구〉, 《東方漢文學》 86집, 동방한문학회. [8] 사도세자의 서출 증손자 [9] 어차피 세자는 동시에 여러 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냥 세자라고만 불러도 헷갈릴 일이 없다. 양녕대군 역시 폐세자 되어 대군이 된 뒤 동생들처럼 '녕'자를 돌림자처럼 쓰고 사양할 양(讓)을 붙인 것으로, 세자였던 때는 단순히 세자로만 불렸다. [10] 영조는 어릴 때부터 약을 달고 살 정도로 허약체질이었으며 성년이 되어서도 병치례가 잦았다. 그러니 자기가 40대까지밖에 살 수 없다고 비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11] 아예 세손이던 정조가 24세가 될 때까지 장수했다. [12] 깨끗한 새 책에 똑같이 베끼는 것. 새 책에 공부 열심히 하겠지 하는 영조의 지극정성한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 [13] 영조가 살아생전 검소를 실천하고 강조한 만큼 내인들이 세자에게 이것을 가장 먼저 가르쳐줬을 것이다. [14] 영조는 본디 천민에 준하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에 이미 세자로 형 경종이 있어서 유년 시절부터 제왕 교육과 동떨어졌지만, 그는 엄청난 공부벌레였기에 아들의 똑똑함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자신을 낮췄다고 보는 것이 맞다. [15] 경종의 계비 [16] 이복동생 연잉군, 즉 영조가 생감과 간장게장을 경종에게 먹여 죽였다는 것을 믿는 작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사도세자의 시중 및 수발을 들게 하였으니 어린 세자가 장성해 가면서 아버지 영조 노론 세력들이 나쁘다고 배울 게 뻔하였을 것이다. [17] 선조 시절에는 " 광해군이 폐세자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소성대비( 인목왕후)를 모시는 대전 나인들은 물론이고 후궁을 모시는 나인들까지 광해군을 모시는 동궁 나인들을 대놓고 괄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 훗날 삼수의 옥의 서막을 올리는 대리청정 소동 때 노론 도승지 홍계적이 장악한 승정원에서 소론 신하들의 알현 요구와 상소를 모조리 물리치고 중상모략을 시도하자 소론파 궁인들은 경종에게 소론 신하들의 입궐을 알려 우상 조태구 등이 경종을 직접 알현해 만나게 하기도 했다. [19] 다만 혜경궁 홍씨가 이러한 내용을 서술한 이유를 '사도세자가 세자로서 해야할 의무를 하지 않았다'라는 비판에서 사도세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20] 나각을 불던 궁중 나팔수. [21] 물론 선왕인 경종의 내인들이었던 만큼, 영조의 입장에서는 내쫓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22] 아버지 숙종이 좀 오래 살아서 그렇지, 왕이었던 형 경종과 할아버지 현종은 30대, 증조부 효종과 어머니 숙빈 최씨도 40대에 죽었다. [23] 승정원일기를 확인하면 실제로 아플 때도 있고 멀쩡할 때도 아버지와 만나기 싫어할 때도 있었다. 신하와 영조가 사도세자가 병을 핑계로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내용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24] 왕세자가 국왕을 직접 만나 문안인사를 드리는 행사다. [25] 조선시대에선 국가에 재앙이 있었을 때 왕이 부덕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사도세자에게도 적용한 것. [26] 일찍 공부를 시작했음에도 이 시기쯤 되면 다른 세자들에 비해서도 진도가 느리다. [27] 세자를 직접 가르치는 스승. 정승급 중에서 명망이 있는 신하가 임명된다. [28] '사리에 어둡고 주의가 부족하다'라는 뜻이다. [29] 이는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고 우회적으로 꾸짖은 것이다. 무예나 좋아하고 놀기만 하는데 문제를 좋아하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3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영조 편에서는 이 때의 일화를 두고 '영조가 자기 딴에는 꼼꼼하지 못한 세자가 정치판을 잘 다루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신중함을 가르치려 했다'고 해석했다. [31] 실제로 사도세자는 꼼꼼하지 못한 성격으로 신하의 말만 듣고 중요한 일을 바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어서 영조가 이에 대해 몇번 훈계한 적이 있었다. 결정으로 일어날 여파같은 건 생각도 안한다는 것 모 학자는 이것을 실제로 영조의 통치와 비교했을 때 사도세자가 보인 단점이라고 지목했다. [32] 품행에 문제가 있어 폐세자되거나 세자가 되지 못한 케이스도 있으나 이들은 다들 장성한 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이 다른 논란을 부르지는 않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행실은 문제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후궁 소생이라는 문제도 같은 이유로 무마된다. [33] 영조는 만학도였음에도 불구하고(서른이 다 되어 왕위를 계승했음에도 세자가 10대에 교육받는 내용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막대한 노력을 들여 관료들을 직접 가르칠 정도의 학문적 지식을 쌓았다. [34] 직계 왕족이 당쟁에 휘말리게 되며 일어난 신임사화도 영조에게 많은 불안감을 주었을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는 이로 인해 '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극심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35] 실제로 정조가 어린 순조를 두고 죽자 정국은 당쟁과 숙청 그리고 끝내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36] 대체로 탕평책을 위해서였다.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이 지나치면 왕자리를 내려놓겠다고 시위해 신하들이 더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37] 이것을 근거로 4살부터 학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한중록>에서도 이때는 아들을 매우 아끼는 아버지란 평가이며, 실록에도 대놓고 당파싸움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적혀있었다. 통치가능한 연령을 고려하면 어차피 어린 아들에게 부담이 가지 않으니 양위선언으로 신하들과 기싸움을 한 것이다. [38] 후술할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세자가 직접 일을 해결하면 "아직 왕도 아니면서 왜 맘대로 결정하냐"며 갈구고, 물어보면 "이런 것도 혼자 못 처리하냐"며 갈구는 식이었다. [39] 이쯤 되면 영조의 왕권은 꽤나 강했다. [40] 영조는 당시 자신의 혐의를 완전히 씻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도세자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효로서 영조의 혐의를 벗기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나서서 이를 처리해주길 바랐다는 것이다. [41] 세자, 세손, 세제 등 차기 왕위 후계자를 다르게 일컫는 표현이다. [42] '웃어른께 여쭈어보다'는 뜻. 즉 결정하기 전에 세자에게 먼저 여쭈고 결정하라는 뜻이지만 역시나 쇼였다. [43] 함경북도 성진시. 이 때 성진은 길주 산하의 읍면이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4년( 광무 8년)에 길주군에서 분리되었다가 1943년도에 시로 승격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책시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44] 각 도의 요지를 방어하는 방어사가 근무하던 방영. [45] 지역 군영에 있는 병사들. [46] 영화 사도에서도 이 때의 일화를 다루었는데, 여기서는 영조가 '네가 함부로 일을 처리하면 이 아비 체면이 어떻게 돼?'라며 면박을 주기까지 한다. [47] 다만 이는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였고 최근에 영조가 다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이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물론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고 정치적 현안에 어두웠던 사도세자의 입장에선 이런 아버지의 반응이 매우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48] 중재 [49] 대리청정 중의 금상을 뜻한다. 반대로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는 소조(小朝)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조는 영조, 소조는 사도세자가 된다. [50] 그러니까 왜 이랬냐면, 왕이 될 자질이 있는지 보는 일종의 테스트 같은 거라고 보면 되겠다. [51] 이유없이 사도세자를 혼낸 것은 아니다. 해당 사건은 한중록과 대조해보았을 때 사도세자가 인원왕후의 국상기간에 이제 말릴 사람이 없다며 인원왕후의 궁녀 빙애를 건든 사건이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할머니 장례기간에 할머니의 비서를 끌고와 강제로 관계를 가진 격이었다. <영조실록>은 정조 재위기에 작성된 만큼 이러한 허물을 자세하게 기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인원왕후와 사도세자 서로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고 오히려 인원왕후 생전까지는 살인 같은 극단적인 행각을 보이진 않았던게 사도세자다. 그런 인원왕후의 궁녀를 건드린건 패륜이라곤 하나 마지막 보호막인 인원왕후가 이미 죽은 시점부터 사도세자의 정신은 극단적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인원왕후의 궁녀인 빙애를 건드린 것이다. [52] 최성환, 영정조대 탕평정치와 군신의리 [53] 이를 해결하고 사도세자 추숭에 대한 합의를 보려고 한 게 정조의 핵심사업 중 하나였다. [54]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0대 중후반이었다. [55] 정원군의 잠저. [56] 다만 실록,승정원일기와 같은 관찬사료나 영조가 남긴 제문을 보면 화평옹주만큼은 아니지만 아낀 걸로 추정된다. 아마 영빈 이씨의 딸중에서 애정이 덜한 정도였던 것같다. [57] 왕의 처소인 대전과 세자의 처소 동궁을 연결하는 문. 이곳에 오지 말라는 건 "네 문안 인사 안 받을 거고 꼴도 보기 싫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58] 방자한 행실 탓에 쫓겨났다가 근신하고 겨우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왕자를 다룬 이야기. 그러니까 누이동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부왕은 그걸 방자하다고 확대해석하고 혼을 낸 것이다. [59] 당시 사도세자는 공부를 너무 안해 영조의 꾸중을 샀다는 기록이 있다. 확대해석을 한 게 아니라 어머니가 아프다고 공부 안할 핑계로 삼을 생각말고 공부하라는 뜻. [60] 의대증때문에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 그런데 영조는 이러한 병증을 인지하지 못했다. [61] 당시 혜경궁 홍씨 청선군주를 회임 중이었으며, 임신 6개월이었다. [62] 영화 사도에서는 이 일화를 각색한 장면이 나온다. 할머니 인원왕후가 죽은 이후 아버지 영조의 학대에 정신이 피폐해진 세자가 공부고 대리청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정말로 술을 마신 상태였고, 이를 보고 분노한 영조는 귀 씻은 물을 세자에게 끼얹으며 폭언을 퍼붓고 자리를 박치고 나간다. 세자는 세자대로 영조가 내동댕이친 사발로 주변의 신하들을 내리치면서 "일개 상궁도 목숨걸고 나서는데, 내 편을 들어 주는 건 어떻게 한 놈도 없냐"며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63] <현고기>를 체크해보면 영조에게 거짓말한 걸 들키자 숨겨준 화완옹주 탓을 해 영조가 친형제간에 어떻게 그러냐면서 화를 냈다. [64] 세자의 적녀 [65] 세자가 예식(禮式)을 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영조가 "세자의 몸이 좋지 않아 보인다"며 예식을 취소했다. [66] 사실 핼리 혜성이 76년 만에 태양계 안쪽으로 되돌아온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혜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천체임을 몰랐다. [67] 조선시대에 국왕의 행차 때는 호위로 4천 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다. 물론 세자가 차기 왕이긴 해도 엄연히 신하의 입장이니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빈약했던 것이라곤 추측이 가능하다. [68] 다만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이미 사도세자가 주변 사람들의 인망을 잃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춘방일기를 보면 차기 후계자와 연을 맺을 수 있기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춘방 설서와 같은 벼슬이 임시직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다. 아무도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69] '차마 듣지 못할 전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의 욕설을 돌려 적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고 사관이 생으로 써버린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는데 인조개새끼 발언이다. 즉, 영조는 아들한테 쌍욕 바로 밑의 극언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70] 백여명이 맞는 지 논란이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백여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학자들도 백여명이란 해석을 그대로 인용한다. [71] 사도세자의 살인은 한중록 기준으로 5년정도 이어졌다. 6명도 한번에 죽인 걸 고려하면 무리가 아닌 수치다. [72] 정조 때의 학자 박하원이 사도세자 사건에 관한 일을 정리한 책. <천유록>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후 정조에게 올렸는데 정조가 읽고 제목을 <대천록>으로 고치게 하였다. [73] 승정원일기 사도세자 부분에 자주 나오는 문구. 승정원일기에서 사도세자의 행동이 100여 곳 이상 찢겨 나갔는데, 정조가 삭제한 것이다. # [74] 참고로 이 때는 적모 정성왕후가 사망한지 6개월도 안 되었고, 적조모인 인원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3개월 정도밖에 안 지난 시점이다. 이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사도세자가 살인행위를 시작했다는 것을 보면, 사도세자에게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존재는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5] 인두로 지지는 것이다. 영조가 재위 초반에 너무 잔혹하다며 금지한 형벌이었다. [76] 박살(搏殺)은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는 뜻이다. [77] 영조는 나경언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을 어떻게 알았겠냐면서 죽이기를 꺼렸는데 신하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죽일 것을 요구했다. [78] 피범벅이 될 때까지 때린 후 강간했다는 뜻이다. [79] 영조가 극심한 강박증 환자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유전력일 수도 있다. [80] 현대의 의학은 아동기의 학대로 인한 불안이 강박증 발생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81] 다만 <단암만록>에서는 숙종이 경종이 마음에 안들 때마다 장희빈을 언급하며 누구의 아들아닐까봐하면서 질책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민진원은 "혹자는 이러해서 경종에게 병이 생겼다고 말하기도 한다"며 우회적으로 숙종의 학대를 지적했다. [82] 이 말은 즉 '조금이라도 제정신이면 이러지 않으실 텐데 어찌 이러실까'란 뜻이다. [83] 본문에서 인용한 글의 Lee DI은 물론 ' 이덕일'을 의미한다. [84] 영빈 이씨와 경종 특히 경종을 의심한다. [85] <현고기>를 보면 거기서도 사람을 죽인 모양 [86] 말이 빌리는 거지 갈취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고 홍화문에 나아갔을 때 백성들의 반응이 매우 흉흉했다고 실록은 기록한다. [87] 사도세자는 영조와의 관계에서는 약자지만 나라의 2인자였다. 사도세자의 범죄행각에 다른 사람들은 반항도 제대로 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었다. [88] 칼을 겨눈 채 살해협박한 화완옹주, 바둑판을 던져서 눈이 빠질 뻔한 혜경궁, 맞아죽은 경빈 박씨, 마음대로 취해놓고 아버지가 무서워서 낙태시키려고 한 것도 모자라 후에 철저하게 방치한 숙빈 임씨 [89] <이재난고>에서는 경빈 박씨를 때려죽인 후 은전군까지 칼로 친 후 연못에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한중록>을 보면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정조를 해치려고 할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90] <한중록>을 보면 영조가 왜 사람을 죽이냐고 묻자 "화증이 차오르면 닭같은 짐승이나 사람을 죽여야 풀린다"라고 답하고 있다. '이나'가 무슨 용법인지 생각해보면 짐승이나 궁인들을 비슷한 시선에서 보고 있다는 뜻이다. [91] <한중록> [92] 평민으로 강제 강등 [93]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 일대가 아니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배봉산 일자락이다. ( 서울배봉초등학교 인근) 지번 주소는 휘경동 29-1번지로, 현재 이 자리에는 삼육보건대학교가 들어서있다. 실제로는 당시에도 한성부 소속이었다. [94]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1307011_001실록에도 침수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95] 60 풍수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고찰-영우원(사도세자 초장지)의 풍수를 중심으로- [96] 일성록, 정조 9년 4월 17일 [97]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깊은데다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하길 원했다. [98] 상소를 올린 사람이 화평옹주의 남편인 박명원이다.정조와 사전협의 하에 이러한 건의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99] 중국 상나라 탕왕의 손자로, 무도하다 하여 신하들에 의해 멀리 추방당했다가 뉘우친 뒤에 다시 복위되었다. [100] 오항녕은 이 문장에서 何의 위치를 혼동하는 바람에 해석에 오류가 발생했으며, '講書院多日相守者何? 爲宗社也, 爲斯民也'로 읽어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킨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 종사를 위해서였다. 백성을 위해서였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임오(壬午)] [102] 여기서 영조의 뜻과 함께 아들에 대한 약간의 변명도 드러난다. 처음에 자결을 종용(從用)한 것도 그렇고 정황상 영조는 처음부터 세자가 아니라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자의 존재는 부담이었고 세자는 영조의 눈밖에 나고 세손이라는 차선책이 생기면서부터 이미 죽을 운명이었다. 영조는 이 글에서 세자의 죽음을 "예상치 못한 사고"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글은 세자가 왜 죽어야 했는지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세자에게 변명하는 것에 가깝다. 다만 영조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지만서도 세자가 비뚤어진 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서쪽] [104] 이와 유사하게 영화 사도에서도 세손인 어린 정조가 세손빈과 함께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찾아와 물을 건네려 하는데 영조가 이를 저지하려고 하자 "자식이 아비한테 물 한 잔도 드릴 수 없사옵니까!!!!!"라며 절규하는 부분이 있다. 끝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그의 장례가 치러지자 유일한 적자였던 정조가 상복을 입고 상주를 지내며 발인에 참석하려고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이 흠이 될 것을 우려한 고모 화완옹주부터 어머니 혜경궁 홍씨까지 상복을 벗겨 영조에게로 보내려고 하자 이를 거부하며 오열하는 장면도 나온다. [105] 逆敵之子 不位君王,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106] 장자 - 장손으로서의 계통 [107] 영조실록 103권, 영조 40년 2월 20일 기사: 나라를 위해 진전에 아뢴 글 [108]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 9월 7일 병진 1번째 기사 [109] 즉 영조의 지시는 아니었다. [110] 이 일화를 이덕일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일성해서 노론 대신들이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는 식으로 왜곡했다. 전형적인 단장취의. [111] 영조가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을 궁으로 봉한 예를 따른 것. 왕의 생모의 사당을 궁으로 봉하듯이 생부의 사당을 궁으로 봉하는 예가 합당하고 애초에 이 제도를 만든 이가 영조였으니 한 글자도 높이지 말라는 영조의 엄명이 오히려 예에 어긋나는 상황이었고 신하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덧붙여 생모인 사도세자빈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혜경궁으로 봉함으로써 이후 왕을 낳은 후궁은 생존 시에도 궁으로 칭하는 법도를 만든다. [112] 고을 소재지 [113]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일대 [114] 다만 '원'의 관리인은 '능참봉'이 아니라 '수봉관'이라는 명칭이 별도로 있다. [115] 遲遲臺. '매우 더디다'라는 뜻으로 지지부진할 때의 그 지지다. [116] 당태종에게도 비슷한 야사가 있다. 메뚜기들이 전국의 농작물을 갉아먹자 메뚜기 1마리를 잡아서 '이 망할 놈들이 내 백성들을 괴롭히느냐! 죄가 있다면 내게 있으니 내 오장육부나 대신 먹어라!'라고 메뚜기를 씹어 삼키자 전국의 메뚜기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조선 태종에게도 동일한 메뚜기 설화가 있다. [117] 실록의 기록을 찾으면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찾는 것보다 경모궁으로 높여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경모궁으로 일반적으로 칭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사실이다. [118] 9월 1일에 묘호를 의논하여 정하고, 11월 12일(음력 10월 10일)에 추숭의 예식을 거행하였다. [119] 이미 제국을 선포한 후에 추숭했음에도 처음에는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때는 4대조 및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기 2개월 전이었으니, 황제 추존 전에 왕으로 추존함으로써 명분을 확실히 하는 차원이었다. [120] 정리하자면 철종 - 전계대원군 - 은언군 - 장조 - 영조 - 숙종 - 현종 - 효종 - 인조(공통 조상) - 인평대군 - 복녕군 - 의원군 - 안흥군 - 진사 이진익 - 이병원 - 남연군(군으로 봉작 후 이채중에서 개명) - 흥선대원군 - 고종. [121] 숙종의 6남 연령군 이훤에게 출계하여 대를 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연령군의 봉사손이라고만 했고 양자 입적이 명확하게 되지 않아서 당시에는 은신군도 사도세자의 아들로 인식되었다. [122] 고조부까지가 커트라인이기 때문에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 않았지만 한참 먼 조상인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여서 특별히 황제로 추존되었다. [123] 사실 정조는 요절한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어 즉위했기에 고종에게 장조는 법적 고조부가 아닌 법적 증조부(정조)의 친부이다. 실제 법적 고조부인 효장세자 역시 진종 소황제로 추존되었다. [124] 이 모습이 실제와 비교적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엔 사도세자를 체격이 '석대하다'고 표현해 체격이 건장한 무골 스타일인 것처럼 묘사해 놨지만 그건 좋은 해석이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체심비풍(몸이 아주 뚱지다)', 즉 그냥 뚱보(...)라고 표현해 놨기 때문이다. [125]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다. 다만 사당에 모셔진 신격화시킨 초상화로 추정한다. 출처: 중국어 위키백과 [126] 헌경왕후와는 13촌 먼 숙질로 엮이는데 헌경왕후의 5대조, 즉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고조부인 홍주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장조는 원종의 6세손이고 헌경왕후는 정명공주의 5세손이니 13촌 지간이다. [127] 첫화에서 뒤주에 갇혀 어린 이산과 대화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회상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128] 특별출연으로 회상장면에서만 등장한다. [129] 아들에게 본모습을 보여준다. [130] < 한중록>에서도 "덕성(德性)이 거룩하나 과묵하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131] 삼종 혈맥은 정말 귀해서 효종(1남)-현종(1남)-숙종(3남) 식으로 이어졌고 숙종도 세 아들이 있었지만 자식을 본 아들은 하나뿐이라서 사도세자는 실질적으로 4대 독자나 다름없었다. 이러니 이인좌의 난 당시 이인좌와 그 무리는 무려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을 앉히려고 했을 정도였다. 허나 이렇게 왕가가 아슬하게 대가 이어지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니라서 왕가의 대가 이렇게 이어지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운이 나빠 대가 완전히 끊겨 버리기 쉽다. 실제로 헌종이 죽어서 정조에서 이어지던 한쪽 대가 끊겨서 은언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고 그쪽도 끊겨서 이번엔 무려 인평대군 가계였다가 은신군 가계로 입양된 남연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다. 족보상으로야 좀 가까운 사이였지 혈통상으로 보면 매우 먼 지간이었다. [132] 世子鼻息有聲, 意或以爲風也。 [133] 사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가 함경도에서 말타고 활쏘던 군인 집안 출신이라서 신장이나 골격이 거대한 편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성계의 아들들인 정종이나 태종을 필두로 무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세종과 문종도 풍채가 상당한 거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도 또래에 비해 덩치가 컸을 것으로 추정되니 사도세자가 이런 체형인 것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 [134] 고양이 그림을 대단히 잘 그려서 당대엔 '변 고양이', '변 닭'이란 별명까지 있었다.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묘작도>란 그림이 유명하다. [135] 다만 사료를 확인하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사실이 아닌 걸로 보인다. 시기가 맞지 않는다. [136] 사도에서는 고종실록의 주장을 채택하여 이천보가 집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137] 사도세자는 유학적 소양, 프리드리히 2세는 군재. [138] 영조는 재위 말엽에는 별다른 업적이 없지만 초중엽에는 많은 업적을 남겼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타국에서 비웃을 정도의 극단적인 검약으로 재정을 마련해 이 재정으로 프로이센군을 양성했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와 2차례의 전쟁을 하여 프로이센을 키운 것도 아버지 대에 만든 기반이 한 몫을 했다. [139] 사실 사도세자가 당한 것은 가벼워 보일 정도로 독하게 다뤘는데 어느 정도냐면 사도세자는 자기가 관심 분야가 아버지가 기대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박을 심하게 당한 것이라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냥 별 이유 없이 얻어맞았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버지로부터 어떻게든 안 맞으려고 아버지가 요구하는 군사 분야의 재능을 보였지만 그래도 얻어맞았다. [140]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그의 아내인 조피 도로테아도 걸핏하면 얻어맞았고 백성들도 조금만 빈둥대는 모습이 들키면 얻어맞았다. 이러다 보니 그가 죽자 가족들이 엄청나게 좋아했고 딸은 얼마 뒤 아버지가 죽은 것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으며 백성들과 신하들도 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길 거부했을 정도였다. [141] 장남은 세례식에서 굳이 왕관을 씌우고 해야 한다고 아득바득 우겨서 억지로 왕관을 씌웠다가 그만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사망, 차남은 강하게 키우려면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우겨서 갓난아기인 애 앞에서 대포를 쐈다가 애가 경기를 일으켜서 사망했다. [142] 조선은 유교 국가여서 질투가 심한 부인을 내치는게 당연시( 칠거지악 중 하나)됐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하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불충한 부인'이라면서 나쁘게 보기도 했다. 중종의 서녀 효정옹주도 아버지에게 "부녀자로서의 투기가 없을 수가 없다"고 탄식에 가까운 질책을 듣기도 했다. [143] 공부 뿐 아니라 왕세자가 궁녀를 건든 것 자체가 문제다. 명목상이라 할 지라도 궁녀는 왕의 여인이다. 그러므로 왕세자는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지 않는다.또한 보통 왕세자일 때는 후궁을 들이지 않는 게 관례였다. [144] 아버지의 핍박으로 오히려 후궁을 두었음을 들킬까 두려워했고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145] 사실 연산군도 세자 시절부터 제위 후 10년 때까지는 의외로 멀쩡한 편이었다. 갑자사화 후 2년 동안 역대급으로 말아먹었다. 세자 때부터 살인과 폭행을 일삼는 미치광이가 된 사도세자와 비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연산군에게 실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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