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에서 "카를 1세"라고 불리던 프랑크 제국 황제에 대한 내용은 카롤루스 대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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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 제2대 |
프란츠 요제프 1세 | 카를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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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11423><colcolor=#fff> 오스트리아 제국 제4대 황제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2대 황제
카를 1세 Karl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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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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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7년 8월 17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페르젠보이크고츠도르프 페르젠보이크 성 | |||
사망 | 1922년 4월 1일 (향년 34세) | ||
포르투갈 마데이라 제도 푼샬 | |||
재위기간 |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 ||
1916년 11월 21일 ~ 1918년 11월 12일[1]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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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7D45><colcolor=#fff> 가문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 |
이름 |
카를 프란츠 요제프 루트비히 후베르트 게오르크 오토 마리아 (
독일어) Karl Franz Joseph Ludwig Hubert Georg Otto Maria |
||
카로이 페렌츠 요제프 러요시 후베르트 죄르지 마리어 (
헝가리어) Károly Ferenc József Lajos Hubert György Mária |
|||
아버지 | 오스트리아의 오토 프란츠 대공[2] | ||
어머니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3] | ||
형제자매 | 막시밀리안 오이겐 | ||
배우자 |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1911년 결혼) | ||
자녀 | 오토, 아델하이트, 로베르트, 펠릭스, 카를 루트비히, 루돌프, 샤를로테, 엘리자베트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177c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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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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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의 마지막 군주, 나아가 600년 역사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군주이다.오스트리아 제국의 카를 1세[4], 헝가리 왕국의 카로이 4세, 보헤미아의 카렐 3세, 달마티아- 일리리아의 카를로 1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카를로 1세,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왕이자 크라카우의 대공작 카롤 1세, 고리치아-그라디스카의 후백작 카를로 1세, 모라비아의 변경백, 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의 공작 카를 5세, 부코비나, 잘츠부르크의 공작 카를 1세, 크라인의 공작 카를 4세.
2. 언어별 표기
독일어 | Karl I. (카를 1세) |
헝가리어 | IV. Károly (카로이 4세) |
체코어 | Karel III. (카렐 3세) |
크로아티아어 이탈리아어 |
Karlo I. (카를로 1세) |
폴란드어 | Karol I. (카롤 1세) |
3. 생애
3.1. 제위 등극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둘째 남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차남 오토 대공의 아들로, 본래는 제위와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다.[5] 그러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불운이 기막히게도 겹치면서 그가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먼저,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첫 번째 남동생 멕시코 제2제국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가 혁명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에겐 자식이 없었다.[6] 그리고 1889년 1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권총 자살했고 슬하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두 번째 남동생이자 카를 1세의 할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그런데 카를 루트비히 대공도 위장병으로 황제보다 먼저 사망하여, 대공의 장남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귀천상혼을 한 탓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들들은 계승 자격이 없었고, 카를의 아버지이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동생인 오토 대공(1865~1906)이 차순위 계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토 대공이 1906년 41살에 먼저 사망했고, 1914년 6월 백부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테러로 암살당하면서 카를이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당시 나이 27살이었다.
3.2. 재위기간
▲ 보슈냐크인 병사들을 사열하는 카를 1세.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6년 11월, 6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제국을 통치한 종조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했다. 제위에 오른 카를 1세는 제국을 세계 대전이라는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선 전시의 군대에서 만연해진 구타를 금지했고, 장교들의 결투도 금지했다.[7] 또 독가스 사용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을 억제하고, 동시에 제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방안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독일계 보수파와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원한으로 크로아티아인과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을 싫어했던 헝가리 정부의 반대로 개혁을 뜻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독일 제국 군부도 그의 개혁 시도를 저지했다.
정치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카를 1세는 궁정 생활과 황실에 대한 평판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배급을 받는 신민들과 고통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그는 흰 빵을 먹기를 거부하고[8],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전쟁터를 방문한 뒤에는 조기 종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하고 협상국을 상대로 '상호 비난이 없는 평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협상국은 그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무엇보다 독일 제국이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당대 유럽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645년 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등 수많은 지위를 역임하며 이미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고, 이것이 다민족 제국을 통합시키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런 사람이 뒷배로 평화협상을 시도한다는 것이 전 유럽인들에게 실망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거기다 카를 1세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영토를 양도하는 것을 거절해버렸기에 협상국에서도 그를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이 이렇게 무시당한 이유는 본래는 계승될 리가 없던 먼 방계 황족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비극적인 가정사 때문에 제위를 이어받은지라 정통성이 부족했던 것도 큰 요인이 되었다. 정통성 같은 경우는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제여도 마찬가지지만 이건 그냥 답이 없다. 또한 선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워낙 실책을 많이 저질렀던 터라[9] 카를 1세가 나라를 살리려고 애를 써도 너무 늦었던 것이다.
3.3. 제국 멸망 및 퇴위
전세가 완전히 기울고, 1918년 10월 31일에 헝가리가 독립을 선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참패하자 같은 해 11월 2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협상국에게 휴전을 제의하며 항복했다. 한편 전쟁 및 패전의 책임이 합스부르크 황실에 있다고 생각한 민중들은 밤낮으로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요구하였으며, 전쟁 책임을 최대한 지고 싶지 않았던 오스트리아 의회와 내각도 카를에게 등을 돌렸다.결국 카를 1세는 1918년 11월 12일 즉위 2주년을 열흘 남겨두고 오스트리아 황제에서 퇴위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6일에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같은 날 신생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에서는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고, 1919년 오스트리아 의회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계 구성원이 왕족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이 되지 않는 한 오스트리아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내용의 반(反) 합스부르크 법(Habsburgergesetz)을 공화국 헌법에 추가하였다. 이로 인해 카를 1세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퇴위 후 스위스에서 거주했는데, 헝가리에서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자 자신이 헝가리에 가면 충신인 호르티가 당연히 옥좌로 모실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호르티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시 국왕으로 옹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실상 전범 취급받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복고하면 대외적으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으며[10], 무엇보다 자신이 실권을 휘두르는 데 합스부르크 가문은 방해물이었다.
호르티는 카를 1세에게 얌전히 스위스에서 거주할 것을 권고했지만, 카를 1세의 측근들과 헝가리의 근왕파들은 카를 1세가 헝가리에 입국하면 진정한 왕을 위해 헝가리 국민들이 봉기할 것이라고 부추겼으며 실제로 요제프 아고슈트 대공이 카를 1세의 복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카를 1세는 1921년 헝가리에 입국하여 두 차례에 걸쳐 왕위를 얻어내려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억류되었다. 결국 카를 1세는 헝가리에서 추방되었으며, 헝가리 의회도 카를을 정식으로 폐위하였다.
한 가지 웃기는 사실은 호르티는 헝가리를 공화국으로 선포하거나 자신이 왕이 되지도 않은 채 화살십자당과 나치 독일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이전인 1944년까지 헝가리 왕국 섭정으로서 왕국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1918년 이후 24여년간 바다 없는 나라에서 해군 없는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 되어 다스리는 기묘한 체제가 계속되었다.
3.4. 쓸쓸한 사망
헝가리에서 추방된 카를 1세는 포르투갈 제1공화국 마데이라 제도의 중심지 푼샬에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전 재산이 몰수된 채로 추방되었기에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초를 겪었다. 결국 카를 1세는 1922년 4월 1일 34살의 젊은 나이에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유언은 "당신의 뜻이 이뤄지소서.. 당신의 뜻대로... 예수님."으로 사망 직전 아내가 들고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남겼다.사후에는 마데이라의 산 성모 교회에 묻혔는데 카푸친 교회의 합스부르크 황실 봉안당에 이장하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긴 세월이 흐른 2004년 10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카를 1세를 ' 복자'로 시복했는데, 카를 1세의 깊은 신앙심, 그리고 그가 제1차 세계 대전을 조기 종결시키려고 노력했던 점을 영웅적 덕행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11] 축일은 10월 21일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집전한 이 시복식에는 당시 생존해 있었던 아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도 참석해 아버지의 시복을 기념했다. #
만약 시성까지 된다면 성 이슈트반 왕관의 처음과 마지막 주인이 시성된 사례로 남게 된다.
4. 가족
부르봉파르마의 치타(1892~1989)와 결혼해 5남 3녀를 두었다. 치타 황후의 생애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의 내용을 참고할 것. 참고로 치타 황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6대손으로 카를 1세와는 12촌 관계이다.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카를 1세 (Kaiser Karl I.) |
<colbgcolor=#fff3e4,#331c00>
오스트리아의 오토 프란츠 대공 (Erzherzog Otto Franz von Österreich) |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트비히 대공 (Erzherzog Karl Ludwig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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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12] (Erzherzog Franz Karl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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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zessin Sophie von Baye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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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Maria Annunziata delle Due Sicil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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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2세 (Ferdinando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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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13] (Maria Theresia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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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von Sach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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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국왕 게오르크 (König Georg von Sach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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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국왕 요한 (König Johann von Sach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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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아말리 아우구스테[14] (Amalie Auguste von Baye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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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아나 (Maria Ana, Infanta de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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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2세 (Fernando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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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2세 (Maria II)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황태자 오토 (Kronprinzen Otto) |
1912년 11월 20일 | 2011년 7월 4일 |
작센마이닝겐의 레기나 공녀 슬하 2남 5녀[15] |
1녀 |
아델하이트 (Adelheid von Habsburg-Lothringen) |
1914년 1월 3일 | 1971년 10월 2일 | |
2남 |
로베르트 (Robert Habsburg-Lothringen) |
1915년 2월 8일 | 1996년 2월 7일 |
사보이아아오스타의 마르게리타[16] 슬하 3남 2녀 |
3남 |
펠릭스 (Felix Habsburg-Lothringen) |
1916년 5월 31일 | 2011년 9월 6일 |
아렌베르크의 안나 오이게니 공녀 슬하 3남 4녀 |
4남 |
카를 루트비히 (Carl Ludwig Habsburg-Lothringen) |
1918년 3월 10일 | 2007년 12월 11일 |
리뉴의 욜란다 슬하 2남 2녀 |
5남 |
루돌프 (Rudolph Habsburg-Lothringen) |
1919년 9월 5일 | 2010년 5월 15일 |
크세니야 체르니셰프베소브라소프 여백작 슬하 3남 1녀 |
브레데의 안나 가브리엘레 공녀 슬하 1녀 |
||||
2녀 |
샤를로테 (Charlotte Habsburg-Lothringen) |
1921년 3월 1일 | 1989년 7월 23일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게오르크[17] |
3녀 |
엘리자베트 (Elisabeth Habsburg-Lothringen) |
1922년 5월 31일[18] | 1993년 1월 7일 |
리히텐슈타인의 하인리히 공자 슬하 4남 1녀 |
장남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1912 ~ 2011)는 훗날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이 되어 활동했다. 오토를 비롯한 모든 합스부르크 가문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오스트리아 대공 (Erzherzog von Österreich)의 지위를 갖고 있으나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직후 성립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공식적으로 귀족제를 완전히 폐지하였고 한 번도 이를 되돌리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작위는 아니다. 2007년 이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오토의 아들이자 카를 1세의 장손인 카를이다.
차남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동생인 로베르트 대공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자신의 아버지, 카를 1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추정 상속자임을 나타내던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위[19]를 물려받았는데 이후 외스터라이히에스테 가문은 로베르트 대공의 장남 로렌츠 대공이 대공위를 물려받으면서 당주가 되었다. 로렌츠 대공은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20]와 결혼하여 장인인 알베르 2세에게 벨기에 공(Prince de Belgique) 작위를 받았다. 현재 로렌츠 대공과 그의 자녀들은 벨기에의 방계 왕족으로 벨기에에 거주 중이다.[21]
34살에 요절한 본인과 대조적으로 아내와 아들들은 모두 80살을 넘기며 장수했다. 그러나 딸들은 비교적 일찍 사망하였다.
본인은 자식들이 장성하기도 전에 사망했지만 아들들과 막내딸도 하나같이 본인처럼 많은 자식을 두어, 손주가 33명에 친손자만 해도 13명이여서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남동생 막시밀리안 오이겐은 슬하 2남을 두었다.[22]
참고로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한 백부 프란츠 페르디난트 역시 프란츠의 3자녀 중 장남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슬하 6남을 두어서 이쪽도 자손이 번성했다.
5. 평가
성실하고 머리가 좋은 인물로, 능력과 자질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마리아 테레지아 이래 가장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된다. 본인의 후원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영향을 받아 모든 제국 내 민족에게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오스트리아를 민주적인 연방국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 중에도 크로아티아인을 끌어들여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을 만들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시대를 잘 타고났더라면 비극으로 얼룩진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를 청산하고 제국을 중흥시킨 명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즉위 당시 제국의 멸망은 기정사실이었기에, 군주 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말년에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려 한 것과 복위 시도가 실패한 후 그를 지지하던 헝가리 근왕파들을 내팽개친 일은 오점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 망국의 군주로 타국에 망명하던 카를이 실질적으로 헝가리 근왕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유럽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며 망명생활을 했고 호르티로 인해 헝가리에서 쫓겨난 이상 그에게 실질적인 영향력과 힘이 없었다. 사망 원인도 폐렴에 걸렸는데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6. 대중매체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동맹국이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유지되고 카를 1세 역시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23] 1937년 7차 대타협을 준비 중이며 대타협을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따라 여러 속국을 거느린 현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고 군대로 소수민족들을 억누르는 독재자가 될 수도 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만들 수도 있다.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매우 유능한 군주이자 개혁의 필요성을 알고 도나우 연방[24]의 황제로서 카를 레너를 총리로 임명하여 자신의 조국과 농민,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여 도나우 연방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명군의 모습을 보인다.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Austromarxism)에 우호적인 모습 덕분에 붙은 별명이 붉은 황제. 개혁 정책 덕분에 원역사랑 다르게 도나우 연방은 발칸반도의 강대국으로 남을뻔 했으나 1923년 경제 위기에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독립하고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붕괴되고 만다. 독일민족주의자들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에 반대된다고 퇴위하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
화약고 제국의 천재 대공에서는 주인공이 이 인물에 빙의한다.
[1]
헝가리 왕위는 11월 16일까지 재위
[2]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둘째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차남.
[3]
작센 왕국의 국왕
게오르크의 3녀이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여동생,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오촌 조카(
조피 대공비의 바로 윗 언니인 아말리의 친손녀)이자
이탈리아 왕국
움베르토 1세의 왕비 마르게리타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4]
신성 로마 제국 및
독일 왕국의 카를 1세는 다름아닌
카롤루스 대제이다. 카롤루스는
프랑스 왕국의 샤를 1세이기도 하다.
[5]
카를 1세의 직계 조상 중 황제였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조할아버지
프란츠 1세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큰증조할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와 큰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직계 조상이 아니기 때문.
프란츠 1세(1768 ~ 1835) - 프란츠 카를 대공(1802 ~ 1878) - 카를 루트비히 대공(1833 ~ 1896) - 오토 대공(1865 ~ 1906) - 카를 1세(1887 ~ 1922)
[6]
다만 막시밀리안이 총살당할 때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장남
루돌프 황태자가 있었기 때문에 후계자 후보는 아니었다.
[7]
결투 금지는 이미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에 규정되어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8]
서양에서 흰 빵은 동양에서의
백미밥처럼 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고급 식품이었다.
[9]
제1차 세계대전 자체만 보면
사라예보 사건이 원인이었으므로 프란츠 요제프 1세도 할말은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가 암살당한 문제라면 누가 황제였어도 세르비아에 대한 초강경 정책과 전쟁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막장스러운 가정관리 능력과 지나친 친독 정책이 큰 실책이자 간접적 원인이 된 건 맞는데, 이것도 사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오스트리아가 지나친 친독 정책을 하지 않고 세계대전 자체를 벌일 일이 없었을 것이므로 커버될 문제였다.
[10]
협상국은 헝가리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복고되면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등 오헝 제국의 영토를 접수한 국가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복고할 시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11]
카를 1세의 조기 종전 시도는 적국이었던
협상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도
아나톨 프랑스 등 일부 협상국 측 인사들이 카를 1세를 고평가하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12]
프란츠 2세의 3남.
[13]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의 장녀.
[14]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4녀.
[15]
카를 폰 합스부르크,
게오르크 폰 합스부르크 등
[16]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의 장녀. 재미있는 사실은 마르게리타의 할아버지인
2대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탈리아 왕국군 제3군 사령관으로 전쟁에 참전한 고위 장성이었다. 그러니까 과거에 군대를 이끌고 자기 아버지를 상대로 전쟁에서 싸운 사람의 손녀와 결혼한 셈이다.
[17]
게오르크에게는 재혼이다.
[18]
유복자로 태어났다.
[19]
1771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남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이
모데나 레조 공국의 상속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하면서 탄생한 분가로
빈 회의 이후
모데나 레조 공국을 통치하였으나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모데나 공국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었고,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후사 없이 죽으며 단절되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자신의 조카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위와 해당 분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이때만 해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는 작위는 아니었지만, 이후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삼촌의 추정 상속인이 되면서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위는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상속자에게 주어지는 작위가 되었다.
[20]
알베르 2세와
파올라 왕대비의 둘째이자 고명딸. 현 벨기에 국왕
필리프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21]
로렌츠 대공에겐 손주들도 있으나 로렌츠 대공의 손주들은 알베르 2세 기준으론 증손주이기 때문에 벨기에 공 작위를 받지 못했다. 물론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으로는 불리고 있다.
[22]
막시밀리안 오이겐의 장남인 페르디난트 대공은 1남 2녀를 두었고, 그 외아들 막시밀리안 대공이 2남 1녀를 두었다. 차남 하인리히 대공은 3남 1녀를 두었고, 그 차남 페르디난트가 1남 2녀를 두었다.
[23]
원래는 아들 오토가 지도자로 등장했지만 패치로 수정되었다. 제국이 유지된 만큼 요절할 일이 없는지라 50대까지 살고 있다.
[24]
나치의 발흥을 막으려는 주인공과 원래 역사와 달리 세르비아가 보인
호전적인 행태가
연합국을 질리게 했고,
루마니아는 전쟁 시작하자 마자 항복하고, 윌슨이 미국을 모범으로 삼겠다는 도나우 연방에 호의를 가졌으며,
이탈리아가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성립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성립되지 않고 도나우 연방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구성국으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루마니아에는 트란실바니아 절반만, 세르비아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만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