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일반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쾨넨호라크는 1861년 2월 15일
빈에서 태어났다.
쾨세그, 흐라니체(Hranice)의 생도학교를 거쳐 1879년부터 1882년까지
비너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다. 1882년
소위로 임관해
쾨니긴그래츠의 제18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885년부터 1887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1888년
중위로 참모장교단에 편입되었다. 이후 1890년에는
대위, 1896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하며 여러 부대에서 근무했고, 1896년부터 1900년까지는
빈 군사지리국에서 일했다.
이후 쾨넨호라크는 1900년
중령으로 진급해
트리엔트(Trident)의 제2산악보병연대로 전출되었다. 1904년
대령이 되어 비소케 미토(Vysoké Mýto) 등지에서 향토방위군 부대들을 지휘했다. 1910년
소장으로 진급해
인스브루크의 제14군단 부사령관이 되었고, 1913년
중장이 되었다.
전쟁 발발 시
인스브루크와
티롤 군관구사령관이 되어 티롤 전선 방어를 조직했다.
이탈리아가 참전하자 1915년 6월 제91보병사단장이 되어 프레사넬라(Presanella)-아다멜로(Adamello) 산군에서 가르다 호(Lago di Garda)를 거쳐 발수가나(Valsugana) 계곡에 이르는 남티롤 방면을 담당했다. 1915년 11월에는 제91사단이 해체되면서 남티롤 방면군 사령관이 되었다.
1916년 봄, 쾨넨호라크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리바 델 가르다(Riva del Garda) 전투와 알베르토 카바치오키(Alberto Cavaciocchi) 장군의 아다멜로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성과로 쾨넨호라크는 같은 해 11월에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17년 8월까지 남티롤 방면군을 지휘하다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제9군단장이 되었으나, 군단이 큰 손실을 입고 2개월 만에 해체되자 10월 제19군단장이 되어
알바니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1918년 7월 건강 악화로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1919년 1월 1일부로 퇴역했다. 전후에는 티롤 지역 참전용사회 회장을 지냈고, 1938년 10월 14일
빈에서 사망했다.
1912년부터 파울리나 마리아 호라크(Paulina Maria Horák, 1871년생)와 결혼했고, 이때부터 '쾨넨호라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14년에는 장인 에두아르트 호라크(Eduard Horák, 1837년생) 대령의 귀족 작위를 이어받아 '쾨넨호라크 폰 회헨캄프' 작위를 받았다. 1917년에는 황제 비밀고문관이 되어 "각하(Exzellenz)" 호칭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