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빅토어 단클 폰 크라시니크 Viktor Dankl von Kraśnik
이름
Viktor Julius Ignaz Ferdinand Dankl 빅토어 율리우스 이그나츠 페르디난트 단클 ↓ Viktor Julius Ignaz Ferdinand Freiherr von Dankl 빅토어 율리우스 이그나츠 페르디난트 폰 단클 남작[1] ↓ Viktor Julius Ignaz Ferdinand Graf Dankl von Kraśnik 빅토어 율리우스 이그나츠 페르디난트 단클 폰 크라시니크 백작 ↓ Viktor Dankl 빅토어 단클[2]
1874년
소위로 임관해 제3용기병연대에 배속되었고, 1877년부터 1879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다니며 졸업했다. 이후
프라그의 제8기병여단 참모장교,
부다페스트의 제32보병사단 등을 거쳐 차례로 진급했다. 그리고 1905년에는 제8보병사단의 제16보병여단장으로 부임하여
콘라트 사단장과
쾨베시 제15보병여단장과 함께하게 되었다. 티롤에 주둔한 제8보병사단은
콘라트의 지휘 아래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정예 부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1902년부터 제15보병여단장이었던
쾨베시와 새로 부임한 단클의 훌륭한 지휘 능력과 참모로서의 자질, 그리고 둘의 성실한 협력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1905년 9월
남티롤 논탈(Nonthal) 계곡에서 열린 황제 기동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제8보병사단이 처음 이틀 동안은
이탈리아 왕국군을 가정한 '적군' 역할을, 셋째 날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역할을 수행했는데, 양쪽 역할 모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쾨베시, 단클이 이끄는 두 여단의 뛰어난 기동과 전투 수행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12년
10월 29일,
기병대장으로 진급했고 제14군단장으로서
티롤 지역 방위를 담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고, 1914년 8월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로로 1917년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받고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크라시니크 백작 작위까지 받았다. 1915년에는
이탈리아가 참전하자 티롤 방면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1916년 5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제11군 사령관이 되어
트렌티노 공세를 지휘했다.
오이겐 대공의 참모장
알프레트 크라우스와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지휘체계를 건너뛰어 직접
콘라트 참모총장에게 보고하곤 했다.
크라우스는
카를 대공이 지휘하는 제20군단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전투 계획을 수정했고, 이로 인해 단클의 제11군 예하 다른 부대들은 포병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 공세는 동부전선에서 시작된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단클은 건강상의 이유로 1916년 6월, 한달만에 자신의 부대 지휘권을
프란츠 로어 폰 덴타
제국상급대장에게 넘겼다. 이후 현역에서 물러나 황제 근위대장을 지냈다.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로
1917년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8년 백작 작위를 받아 최종적으로 '빅토어 단클 폰 크라시니크 백작(Viktor Julius Ignaz Ferdinand Graf Dankl von Kraśnik)'이 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후 수립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에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더불어 귀족 접두어를 철폐하는 법률이 제정되면서 '빅토어 단클(Viktor Dankl)'이 되었다.
단클은 크라시니크 전투에서의 승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첫 승리를 이끈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이는 제한적인 전술적 승리에 불과했고, 이후에는 패배만을 거듭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티롤 공세에서도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후방 지원과 보급 문제로 진격이 둔화되었고,
알프레트 크라우스와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공세가 실패로 끝났다. 전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복귀를 지지하는 정통주의자였기 때문에 1938년
독일 합병 이후에는 공적 활동을 중단, 1941년 사망 시에는
나치 정권이 단클에게 군사적 예우를 거부했다. 그의 군사 경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