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Karl Tersztyánszky von Nád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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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Karl Tersztyánszky von Nádas
독일어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Nádasi Tersztyánszky Károly József 헝가리어 나더시 테르스찬스키 카로이 요제프 |
출생 | 1854년 10월 28일 |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슈칼리츠 (Skalitz)[1] | |
사망 | 1921년 3월 7일 (향년 66세)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빈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5년 ~ 1917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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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2. 생애
2.1. 출신과 가문
카를 테르스찬스키는 기업가이자 지주였던 이슈트반 테르스찬스키(István Tersztyánszky)과 레오노라 링거(Leonóra Linger)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래된 헝가리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니트라 주에 여러 영지를 소유한 가문이었다. 13세기에 헝가리 왕으로부터 트렌친 주의 나더시(Nádas) 도시를 하사받아 이후 '폰 나더시'라는 귀족 칭호를 사용했다.2.2. 교육과 초기 군 경력
10살 때까지 아버지의 영지에서 개인 교육을 받다가 올뮈츠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생트펠텐 군사학교를 거쳐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77년 9월 1일 졸업반 수석으로 프셰미실의 제8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1882년 5월 1일 중위로 진급하여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 1886년 8월 1일에는 1등급 대위로 진급했다. 1887년과 1888년에는 제2군단 사령부에서의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는 제15후사르연대에서 복무했다. 1891년 야로슬라우의 기병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1892년 11월 소령으로 진급했다. 1895년 5월 1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896년 봄에는 노이 주츠카의 장교학교 교장을 맡았고, 니레지하자의 제14 후사르 연대로 전속되었다. 1897년 5월 1일, 타르노폴의 제1용기병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5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1903년 9월 제8기병여단장이 되었고, 1904년 1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1907년 7월 프레스부르크의 제2기병사단장이 되었으며, 1908년 11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0년 4월에는 같은 도시의 제14보병사단장이 되었다. 1912년 9월 빅토어 슈라이버(Viktor Schreiber) 포병대장의 후임으로 부다페스트의 제4군단장 겸 부다페스트 사령관이 되었다. 1913년 4월 2일 비밀고문관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21일 제8후사르연대의 명예대령이 되었다. 1913년 5월 1일에는 기병대장으로 진급했다.
2.3. 제1차 세계 대전
전쟁 발발 시 제4군단장으로서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의 제2군 소속으로 세르비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사바 강 전투에 참전했으나, 세르비아군의 반격으로 후퇴를 강요당했다. 1914년 9월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베레시차 강에서의 반격전에 참가했다. 제7군단도 지휘하게 되어 두 군단을 이끌고 렘베르크 전투에서 우세한 러시아 제국군과 교전했다. 10월 초에는 우조크 고개를 점령하고 10월 10일 투르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1914년 10월 말, 제2군과 그의 제4군단은 실레시아 방어를 위해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동했으며, 특히 슈체초프 근처 전투에 참가했다. 1915년 2월 말 갈리치아로 복귀하여 집단군을 지휘하며 카르파티아 전투에서 포위된 프셰미실 요새 구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915년 5월 세르비아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를 위해 테르스찬스키 집단군이 창설되었고, 9월 7일에는 새로 편성된 제3군이 되어 그가 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민간 노동자 동원 문제를 두고 헝가리 군 당국 및 티서 이슈트반 총리와 갈등을 빚었다. 이 문제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까지 보고되었고, 티서의 요청으로 9월 27일 해임되어 헤르만 쾨베시가 후임이 되었다.
1916년 5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고, 9개월간의 공백기를 거쳐 6월 7일 브루실로프 공세로 큰 타격을 입은 제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군대는 러시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많은 손실을 입었다. 여기서 테르스찬스키 독일 제국군의 장군 알렉산더 폰 린징겐과의 갈등으로 인해 제4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1917년 3월 다시 제3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케렌스키 공세 당시 스타니슬라우와 칼루슈[2]에서 러시아군의 돌파를 막지 못해 7월 12일 최종적으로 해임되었다.
카를 1세 황제는 그를 바로 은퇴시키지 않고 헝가리 근위대 사령관직을 제안했으나, 테르스찬스키는 여러 인사들과의 불화와 헝가리어 구사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1917년 8월 30일부터 빈 궁정 기병친위대 사령관을 맡았다가 1918년 12월 1일에 최종 퇴역했다. 혁명 기간 동안 빈에 머물렀고, 1919년 여름 몇 달간 부코비나의 처가 영지에서 지내다가 1920년 중 빈으로 돌아왔다. 1921년 3월 7일 빈에서 사망하여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