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56년 1월 2일 클라겐푸르트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소령 블라지우스 셰무아(Blasius Schemua) 장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3]
마르부르크의 사관학교를 거쳐 1874년에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79년부터 1881년까지는
페르시아에 파견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사사절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이 시기
이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는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다. 1885년 참모부에 들어갔으며, 1887년
대위 진급 후 1891년까지 군사정보국(Evidenzbureau)에서 근무했다. 1893년부터 1897년까지는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군사학 교수로 재직했다. 1902년에는 제66보병연대장, 1905년에는 제55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08년,
라구사의 제18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1909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갈등을 일으키다 결국 해임되자 그의 후임으로 1911년 12월 3일부터 셰무아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는 재임 중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
소(小) 몰트케와 협력하여 전쟁 준비를 강화했다. 또한 이 시기에 셰무아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유럽 전쟁이 단순한 열강들의 싸움이 아닌 민족들의 전쟁이 될 것이며, 패배할 경우 다민족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1912년 12월 12일,
콘라트가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셰무아는 참모총장에서 사임하고 제16군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1914년에는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휘하의 제4군소속으로 제2군단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동부전선에 종군, 상관
아우펜베르크를 따라서 코마루프 전투에 참전하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후 전투에서의 실패로 셰무아는
아우펜베르크와 함께 1914년 9월에 해임되었다. 이후
크렘스에서
프레스부르크에 이르는
도나우강 방어선 사령관을 맡다가 1915년 3월 23일, 자진 퇴역했다. 종전 후 1920년 11월 21일 고향
클라겐푸르트에서 사망했다.
다윈주의자였으며 란츠 폰 리벤펠스의 신템플기사단 회원이었다(단내 이름: Fra Gotthard) 또한 민족학과 언어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다수의 연구여행을 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셰무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당시 셰무아가 남긴 공식 기록들에는 본인의 이름을
슬로베니아어로 적어도 성은 그대로 슬로베니아식이 아닌 독일식으로 적었었다.
[3]
아버지는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던 엘리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