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59년 2월 27일
프라그 근교 카롤리넨탈[3]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
중위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급 실과학교를 마친 후 1875년
빈 공과군사학교 공병과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79년 4월 24일
소위로 임관하여 제1공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수료했으며, 이후
중위로서 참모본부에 전속되었다.
제58보병여단과 제24보병여단에서 복무하며 참모본부
대위로 승진했다. 1894년 11월 1일
소령 진급 후 제75보병연대에서 잠시 복무했으며,
프레스부르크의 제14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895년 3월 육군성 제5국으로 전속되어 2년간 근무했다. 1897년 5월 1일
중령으로 승진하여 제76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900년
프레스부르크의 제5군단 참모장으로 복귀했으며, 같은 해 11월 1일
대령으로 승진했다. 1906년 11월 1일
소장 진급과 함께 플젠의 제37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10년 2월 플젠의 제19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중장으로 승진했다. 1914년 2월
라구사의 제16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8월 1일
포병대장으로 승진하여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제6군 예하 제16군단을 지휘했다.
세르비아 전선에서 산자크를 통해 우바츠까지 진군했으며, 9월에는 드리나 강을 건너 야고드나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세르비아군의 강력한 반격에도 이를 사수했다. 11월의 발예보 점령 작전에서는 유일하게 계속된 공세를 주장했으나, 결국 세르비아군의 반격으로 철수해야 했다.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의 참전 후, 시르미아에 있던 제16군단과 함께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고리치아 서쪽
이손초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여 4차례의 이탈리아군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1917년 8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했으며, 8월 23일 제1이손초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카포레토 전투에서 플리치-톨미노 돌파작전을 성공시켰고
피아베 강 하류까지 진격했다. 1918년 6월의
피아베강 전투에서는 초기에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으나, 홍수로 인한 보급선 두절과 이탈리아군의 반격으로 철수를 명령해야 했다. 같은 해 10월 24일 이탈리아군이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대공세를 개시했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많은 부대들이 붕괴되고 병사들이 탈영하는 상황에서도 부름이 지휘하는 제5이손초군(구 제1이손초군)은 전선에 있던 모든 대부대들 중 유일하게 질서정연한 후퇴를 수행했다. 다른 부대들이 혼란과 공황 상태에 빠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지휘 아래 부대는 마지막까지 군기를 유지했다. 이후 제국군이 해체되면서 1918년 12월 1일 은퇴 후
빈에서 살다가 1921년 3월 21일 사망했다.
빈 중앙묘지(제2문, 48B구역, 3열, 16번)에 안장되었다.
부름은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917년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과 함께 남작 작위를 받았다. 특히
이손초강에서의 방어전과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성공적인 작전 수행이 높이 평가되었다.
세르비아 전선에서는 부하들에 대한 가혹한 지휘 스타일로 인해 나쁜 평판을 얻었으며, 이후 부대 지휘에서도 부하 관리가 좋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1918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그가 이끈 제5이손초군은 유일하게 질서정연한 후퇴를 수행한 대부대로 기록되었다.
1886년 5월 1일 프라하 출신 이레네 메즈너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한 딸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1895년 첫 부인이 사망한 후, 마리아 나티에스카와 재혼하여 한 딸을 더 얻었다. 독일어가 모국어였으며,
체코어에 능통했고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부름'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1917년 남작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 오헝 제국 해체 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에서 신분제를 폐지하고 귀족 접두어를 철폐한 후에는 본명으로 돌아갔을 듯 하다.
[3]
카를린(Karlí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