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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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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대공국 제5대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Ernst Ludwig, Großherzog von Hes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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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2001A><colcolor=#FFF> 이름 |
에른스트 루트비히 카를 알브레히트 빌헬름 (Ernst Ludwig Karl Albrecht Wilhelm) |
출생 | 1868년 11월 25일 |
독일 제국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 |
사망 | 1937년 10월 9일 (향년 68세) |
바이마르 공화국 헤센 | |
재위 | 헤센 대공국의 대공 |
1892년 3월 13일 ~ 1918년 11월 11일 | |
배우자 |
작센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1894년 결혼 / 1901년 이혼) |
졸름스호헨졸름스리히의 엘레오노레 공녀 (1905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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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엘리자베트, 게오르크 도나투스, 루트비히 |
아버지 | 루트비히 4세 |
어머니 | 영국의 앨리스 공주 |
형제 |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이레네, 프리드리히, 알릭스, 마리 |
[clearfix]
1. 개요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4세와 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장남으로 헤센의 마지막 대공이다.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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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동생 알릭스, 본인, 동생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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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트비히와 빅토리아 멜리타 |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빅토리아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에른스트는 대공으로써의 의무를 우선시했고 빅토리아는 자신에게 더 다정한 남편을 원했다. 빅토리아는 1895년에 딸 엘리자베트를 낳았지만 부부의 사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부부는 각각 하나뿐인 딸을 매우 사랑했다. 특히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딸 사랑은 유명했는데, 그는 외동딸에게 모든 애정을 퍼부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날이 갈수록 엄마를 빼닮아갔지만,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아내에게는 무심한 반면에 딸을 너무나 사랑했다. 결국 가정은 부부가 서로에게 냉담하면서 딸의 애정을 경쟁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에른스트와 빅토리아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싸움이 오가곤 했다. 부부 싸움이 일어나면 빅토리아는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졌다. 빅토리아 여왕은 두 사람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슬퍼했지만, 부부의 딸인 엘리자베트 때문에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고 빅토리아 여왕의 사후인 1901년에야 정식으로 이혼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는 이혼 후 코부르크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빅토리아와 에른스트 부부는 딸 엘리자베트의 양육을 각각 반 년씩 맡기로 했다. 이 이혼은 유럽 왕실에 굉장한 스캔들이었고 빅토리아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오직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그의 누이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만이 이혼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빅토리아는 큰 비극을 마주했다. 이혼한 지 2년 만인 1903년에 딸 엘리자베트가 8살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끔찍히 아끼던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딸이 죽은 지 30년이나 지난 뒤에도 엘리자베트에 대해 "그 아이는 내 삶의 햇살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빅토리아와 이혼하고 딸이 사망한 이후 1905년에 졸름스호엔졸름스리히의 엘레오노레 공녀[3]와 재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들인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루트비히를 낳았다. 이후 아버지인 루트비히 4세가 1892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헤센 대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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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볼프스가라텐 왼쪽부터 부인 엘레오노레, 장남 게오르크 도나투스[4], 본인, 차남 루트비히. |
이후 1900년에 보병대장이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빌헬름 2세의[5] 독일 제국군 본부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만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러시아 제국의 황후였던 자신의 여동생 알릭스와 매제인 니콜라이 2세, 조카들의 총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러시아로 시집갔던 둘째 누나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마저 갱도 안에 끌려가 폭탄으로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8년 11월 11일에 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종전되었고 독일 제국이 멸망하여,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에른스트 루트비히 역시 헤센의 대공위에서 폐위당했다.
대공 직위를 잃은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이후 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193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장례식이 거행된 지 1달 만에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가 일어나면서, 장남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일가족들이[6] 막내딸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7] 이후 명목상의 헤센 대공위를 물려받은 둘째 아들 루트비히마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헤센 대공가의 직계는 사실상 끊어졌다. 1968년 이후 헤센 가문은 친척인 헤센-카셀 가문이 대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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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손자 루트비히, 손녀 요한나, 본인, 손자 알렉산더. |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헤센 대공국 대공 에런스트 루트비히 (Ernest Louis,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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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colbgcolor=#ffffe4,#323300>
헤센 대공국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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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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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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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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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8] (Prince Wilhelm of P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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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여방백 (Landgravine Maria Anna of Hesse-Hom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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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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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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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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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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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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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9]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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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사망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Princess Victoria Melita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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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 |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Elisabeth) |
1895년 3월 11일 | 1903년 11월 16일 (8세) | |
졸름스호엔졸름스리히의 엘레오노레 공녀 (Princess Eleonore of Solms-Hohensolms-L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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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헤센의 대공세자 게오르크 도나투스 (Georg Donatus, Hereditary Grand Duke of Hesse) |
1906년 11월 8일 | 1937년 11월 16일 (31세) |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 공주[10] 슬하 3남 1녀 |
2남 |
헤센의 루트비히 공자 (Louis, Prince of Hesse and by Rhine) |
1908년 11월 20일 | 1968년 5월 20일 (59세) | 마거릿 캠벨 게데스 |
4. 여담
- 전 부인인 빅토리아는 이혼 이후 가까운 가족들에게 그가 사실 동성애자임을 밝힌 바 있다. 빅토리아의 주장에 의하면 1897년에 언니인 마리를 만나고 돌아온 그녀가 에른스트와 남자 하인이 동침하는 것을 목격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빅토리아는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폭로하지는 못했고, 대신 마리에게 "마구간 관리인부터 주방 보조까지 안전한 소년은 없었다. 그는 그들 모두와 꽤 공개적으로 동침했다."고 말했다.
- 불행한 가정사와는 별개로 유쾌하고 예술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 처형인 마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의 밝은 성격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었는데, 손윗동서인 페르디난드 1세가 삼촌인 카롤 1세의 기세에 눌려 의기소침해 있을 때 그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에른스트라고 한다.
[1]
루트비히 4세와 앨리스 공주의 차남 프리드리히는 3살 때 요절했다.
혈우병 환자였고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때 얻은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2]
외삼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알프레드의 차녀.
[3]
누나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끼리 친구였다고 한다. 하지만 엘레오노레와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다이어리스트 헨리 칩스 새넌이 ’정말 소문처럼 두번째 부인은 오직 후계자를 얻기 위해 결혼한 것 같네.‘라고 일기에 쓴 것처럼, 재혼한 후처와도 사이가 안 좋을 거라는 얘기가 돌았지만 빅토리아 멜리타 때와는 정반대로 엘레오노레와 꽤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한다.
[4]
고종사촌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딸이자
필립 마운트배튼의 누나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 공주와 결혼했다.
[5]
이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아들로 이종사촌 지간이다.
[6]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후처 엘레오노레, 아들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며느리
체칠리아, 그들의 두 아들들, 동승했던 간호사, 친한 친구, 비행기 조종사, 승무원 두 명까지 합해서 총 10명이 전원 현장에서 사망했다.
[7]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막내딸 요한나는 당시 나이가 너무 어리고 아파서 비행기에 타지 않아 살아남았고, 부모와 형제의 사망 이후 숙부 루트비히에게 입양됐지만 이 사고가 일어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수막염에 걸려 3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8]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이다.
[9]
조지 3세의 4남이다.
[10]
요르요스 1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