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루시카의 곡에 대한 내용은 히치콕(요루시카) 문서 참고하십시오.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 ||||||
GBE | |||||||
찰스 스콧 셰링턴 (1922) |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
리들리 스콧(2024) |
|||||
KBE | |||||||
프레더릭 벤팅 (1934) |
에드먼드 힐러리 (1953) |
게오르그 솔티 (1971) |
시드니 푸아티에이 (1974) |
찰리 채플린 (1975) |
앨프리드 히치콕 (1980) |
밥 호프 (1998) |
|
앤드루 와일스 (2000) |
로저 무어 (2003) |
팀 버너스리 (2004) |
조너선 아이브 (2012) |
||||
Knight Bachelor | |||||||
아이작 뉴턴 (1705) |
찰스 라이엘 (1848) |
찰스 휘트스톤 (1868) |
조지프 리스터 (1883) |
아서 코난 도일 (1902) |
W. S. 길버트 (1907) |
프랜시스 골턴 (1909) |
|
핼퍼드 매킨더 (1920) |
프레더릭 G. 홉킨스 (1925) |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1935) |
오언 리처드슨 (1939) |
알렉산더 플레밍 (1944) |
랠프 리처드슨 (1947) |
로런스 올리비에 (1947) |
|
존 길구드 (1953) |
칼 포퍼 (1965) |
알프 램지 (1967) |
쉬리다스 람팔 (1970) |
제임스 블랙 (1981) |
마이클 아티야 (1983) |
클라이브 싱클레어 (1983) |
|
렉스 해리슨 (1989) |
V. S. 나이폴 (1990) |
더크 보가드 (1992) |
로저 펜로즈 (1994) |
팀 라이스 (1994) |
캐머런 매킨토시 (1996) |
마이클 스타우트 (1998) |
|
폴 너스 (1999) |
리처드 브랜슨 (2000) |
숀 코너리 (2000) |
톰 커트니 (2001) |
믹 재거 (2002) |
벤 킹슬리 (2002) |
리들리 스콧 (2003) |
|
조너선 색스 (2005) |
헨리 세실 (2011) |
케네스 브래너 (2012) |
안드레 가임 (2012) |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 |
패트릭 헤드 (2015) |
마크 라일랜스 (2017) |
|
제임스 래트클리프 (2018) |
톰 무어 (2020) |
마이클 호턴 (2021) |
마틴 에이미스 (2023) |
||||
CBE + Knight Bachelor | |||||||
데이비드 린 (1953) |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1959) |
알렉 기네스 (1959) |
스탠리 매튜스 (1965) |
맷 버스비 (1968) |
알렉 이시고니스 (1969) |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 |
|
리처드 애튼버러 (1976) |
존 밀스 (1976) |
월터 윈터보텀 (1978) |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 |
윌리엄 골딩 (1988) |
피터 유스티노프 (1990) |
이안 맥켈런 (1991) |
|
안소니 홉킨스 (1993) |
데릭 제이코비 (1994) |
바비 찰튼 (1994) |
사이먼 래틀 (1994) |
조지 마틴 (1996) |
마이클 갬본 (1998) |
아서 C. 클라크 (1998) |
|
엘튼 존 (1998) |
이안 홈 (1998) |
존 엘리엇 가디너 (1998) |
톰 피니 (1998) |
나이젤 호손 (1999) |
알렉스 퍼거슨 (1999) |
프랭크 윌리엄스 (1999) |
|
마이클 케인 (2000) |
폴 스미스 (2000) |
바비 롭슨 (2002) |
앨런 파커 (2002) |
앨런 베이츠 (2003) |
그레고리 윈터 (2004) |
트레버 브루킹 (2004) |
|
제임스 다이슨 (2007) |
크리스토퍼 리 (2009) |
브래들리 위긴스 (2013) |
존 허트 (2015) |
칼 젠킨스 (2015) |
로드 스튜어트 (2016) |
레이 데이비스 (2017) |
|
빌리 코놀리 (2017) |
배리 깁 (2018) |
마이클 페일린 (2019) |
데이비드 수셰이 (2020) |
샘 멘데스 (2020) |
스티브 맥퀸 (2020) |
로저 디킨스 (2021) |
|
조너선 프라이스 (2021) |
존 부어만 (2022) |
브라이언 메이 (2023) |
|||||
OBE + Knight Bachelor | |||||||
어니스트 섀클턴 (1909) |
윌리엄 브래그 (1941) |
리처드 돌 (1971) |
잭 브라밤 (1978) |
지미 새빌 (1990) |
클리프 리처드 (1995) |
트레버 맥도날드 (1999) |
|
스털링 모스 (2000) |
재키 스튜어트 (2001) |
톰 존스 (2006) |
테리 프래쳇 (2009) |
패트릭 스튜어트 (2010) |
밴 모리슨 (2015) |
앤디 머리 (2017) |
|
가즈오 이시구로 (2018) |
마이클 모퍼고 (2018) |
||||||
MBE + Knight Bachelor | |||||||
폴 매카트니 (1997) |
제프 허스트 (1998) |
나이젤 쇼트 (1999) |
니콜라스 윈턴 (2003) |
닉 팔도 (2009) |
링고 스타 (2018) |
케니 달글리시 (2018) |
|
루이스 해밀턴 (2021) |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주요 수상 경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
어빙 G. 설버그상[1] | |||||||||||||||||||||||||||||||||||||||||||||||||||||||||||||||||||||||||||||||||||||||||||||||||||||||||||||||||
제40회 ( 1967년) |
|||||||||||||||||||||||||||||||||||||||||||||||||||||||||||||||||||||||||||||||||||||||||||||||||||||||||||||||||
앨프리드 히치콕 |
{{{#!wiki style="margin:-10px -10px" | <tablewidth=90%><tablebordercolor=#fff,#1c1d1f>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 화이트.svg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
앨프리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
|
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506 Hollywood Blvd. | }}}}}}}}} |
{{{#!wiki style="margin:-10px -10px" | <tablewidth=90%><tablebordercolor=#fff,#1c1d1f>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 화이트.svg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
앨프리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
|
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텔레비전 심볼.jpg 텔레비전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7013 Hollywood Blvd. | }}}}}}}}} |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32373D><bgcolor=#FFF,#1c1d1f> 미국 추리작가협회(MWA) 선정
그랜드 마스터 ||
}}}}}}}}}}}}}}} ||
그랜드 마스터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0.9em" {{{#32373D,#e0e0e0 |
1대 (1955년) |
2대 (1958년) |
3대 (1959년) |
4대 (1961년) |
5대 (1962년) |
애거서 크리스티 | 빈센트 스태릿 | 렉스 스타우트 | 엘러리 퀸 | 얼 스탠리 가드너 | |
6대 (1963년) |
7대 (1964년) |
8대 (1966년) |
9대 (1967년) |
10대 (1969년) |
|
존 딕슨 카 | 조지 하몬 콕스 | 조르주 심농 | 베이너드 켄드릭 | 존 크리시 | |
11대 (1970년) |
12대 (1971년) |
13대 (1972년) |
14대 (1973년) |
15대 (1974년) |
|
제임스 M. 케인 | 미뇽 G. 에버하트 | 존 D. 맥도널드 |
저드슨 필립스 앨프리드 히치콕 |
로스 맥도널드 | |
16대 (1975년) |
17대 (1976년) |
18대 (1978년) |
19대 (1979년) |
20대 (1980년) |
|
에릭 앰블러 | 그레이엄 그린 |
대프니 듀 모리에 도로시 B. 휴스 나이오 마시 |
애런 마크 스타인 | W. R. 버네트 | |
21대 (1981년) |
22대 (1982년) |
23대 (1983년) |
24대 (1984년) |
25대 (1985년) |
|
스탠리 엘린 | 줄리언 시먼스 | 마거릿 밀러 | 존 르카레 | 도로시 솔즈베리 데이비스 | |
26대 (1986년) |
27대 (1987년) |
28대 (1988년) |
29대 (1989년) |
30대 (1990년) |
|
에드 맥베인 | 마이클 길버트 | 필리스 A. 휘트니 | 힐러리 워 | 헬렌 매클로이 | |
31대 (1991년) |
32대 (1992년) |
33대 (1993년) |
34대 (1994년) |
35대 (1995년) |
|
토니 힐러먼 | 엘모어 레너드 |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 로런스 블록 | 미키 스필레인 | |
36대 (1996년) |
37대 (1997년) |
38대 (1998년) |
39대 (1999년) |
40대 (2000년) |
|
딕 프랜시스 | 루스 렌델 | 엘리자베스 피터스 | P. D. 제임스 | 메리 히긴스 클라크 | |
41대 (2001년) |
42대 (2002년) |
43대 (2003년) |
44대 (2004년) |
45대 (2005년) |
|
에드워드 D. 호크 | 로버트 B. 파커 | 아이라 레빈 | 조셉 웜보 | 마샤 멀러 | |
46대 (2006년) |
47대 (2007년) |
48대 (2008년) |
49대 (2009년) |
50대 (2010년) |
|
스튜어트 M. 커민스키 | 스티븐 킹 | 빌 프론지니 |
제임스 리 버크 수 그래프턴 |
도로시 길먼 | |
51대 (2011년) |
52대 (2012년) |
53대 (2013년) |
54대 (2014년) |
55대 (2015년) |
|
사라 파레츠키 | 마사 그라임스 |
켄 폴릿 마거릿 메이런 |
캐롤린 하트 로버트 크레이스 |
로이스 덩컨 제임스 엘로이 |
|
56대 (2016년) |
57대 (2017년) |
58대 (2018년) |
59대 (2019년) |
60대 (2020년) |
|
월터 모슬리 |
맥스 앨런 콜린스 엘렌 하트 |
제인 랭턴 윌리엄 링크 피터 러브시 |
마틴 크루즈 스미스 | 바바라 닐리 | |
61대 (2021년) |
62대 (2022년) |
63대 (2023년) |
64대 (2024년) |
65대 (????년) |
|
샬레인 해리스 제프리 디버 |
로리 R. 킹 |
마이클 코넬리 조앤 플루크 |
캐서린 홀 페이지 R. L. 스타인 |
- |
}}} ||
<colbgcolor=#000><colcolor=#fff> KBE 앨프리드 히치콕 경 Sir Alfred Hitchcock |
|
|
|
본명 |
앨프리드 조셉 히치콕 경 Sir Alfred Joseph Hitchcock |
출생 | 1899년 8월 13일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에식스주 레이던스톤 (現 잉글랜드 런던 월섬포레스트구 레이던스톤) |
|
사망 | 1980년 4월 29일 (향년 80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벨에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작위 | 기사[2] |
직업 | 영화감독, 영화 제작자 |
활동 | 1919년 – 1980년 |
신체 | 170cm |
학력 |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 |
가족 |
배우자 앨마 레빌 (1926년 결혼) 딸 패트리샤 히치콕 (1928년생) |
종교 | 가톨릭[3][4] |
서명 | |
링크 |
[clearfix]
1. 개요
영국 출신의 영화감독.서스펜스의 거장, 최초의 스타 감독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명감독이다.
2. 생애
1899년 8월 13일 런던 출생. 부모는 양계와 과일 도매업을 하는 상인이었으며, 가톨릭 신자였다. 후에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걸작 스릴러 영화들을 만든 감독답지 않게, 어렸을 때는 무척 겁 많고 소심했다고 한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던 탓인지, 공포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 아빠의 심부름으로 경찰서에 갔는데, 아빠의 쪽지를 전해 받은 경찰이 무서운 표정으로 히치콕 감독을 감옥에 10분 정도 가두었다고 한다. 아빠의 장난은 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실제로 그는 경찰 외에도 달걀과 자동차 운전을 무서워했다.1913년 성 이냐시오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 런던 시의회가 설립한 항해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아버지가 숨져 전신회사에 기술자로 입사했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동료의 소개로 런던 백화점 광고 회사로 자리를 옮겨 광고를 기획하고 사보에 삽화를 그리고 글을 썼다.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의 미술학과에 입학해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미술을 배웠다. 미술 공부는 그에게 연극과 영화에 눈을 뜨게 해주어 틈날 때마다 영화관을 찾고 영화 관련 잡지를 탐독했다. 이때 그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한다. 훗날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작가의 작품을 읽은 것이, 공포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모습. |
그는 1926년작 〈하숙인〉으로 평론과 흥행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며,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 받는 영화감독이 된다. 이후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 39계단〉, 〈 사보타주〉, 〈젊음과 순수〉, 〈사라진 여인〉 등 내놓는 작품마다 연속으로 흥행에 성공한다. 특히 1929년 발표했던 자신, 그리고 영국 영화사상 첫 유성 영화 〈 협박〉은 그가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로서 명성을 다지는 첫 시작이었다. 이후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그를 불렀지만 히치콕은 이를 거절한다. 1940년 〈 레베카〉로 할리우드에 데뷔한다. 덧붙이면 레베카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 됐다.
히치콕 감독은 할리우드와 영국을 오가며 수많은 스릴러 및 서스펜스 걸작들을 쏟아냈다. 〈의혹의 그림자〉, 〈 오명〉, 〈다이얼 M을 돌려라〉[5], 〈 이창〉, 〈나는 결백하다〉, 〈 현기증〉[6],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을 거쳐, 1960년 스릴러 영화의 영원한 걸작으로 꼽히는 로버트 블록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 사이코〉를 세상에 내놓는다. 〈사이코〉는 절묘한 촬영술과 완벽한 음악의 활용 등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참고로 영화 속에 등장한 거금 4만 달러가 히치콕 감독이 여러 번 언급한 맥거핀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 준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 이 세 작품은 1958년부터 60년까지 불과 1년 주기로 나왔다.
되돌아와서, 한편 1955년부터는 TV 프로그램 〈히치콕 극장〉에서 자신이 직접 사회를 맡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6년에는 추리/미스터리 소설 잡지인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을 내기도 했는데, 그는 잡지가 얼마 가지 않아 폐간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수준 높은 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지금까지 발간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판은 1997년에 해난터라는 출판사에서 딱 2권 내고 접었다.
〈 새〉 때까지 히치콕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이후 〈마니〉, 〈황옥〉, 〈찢어진 커튼〉 같은 영화들이 별 성과를 못 거두면서, 나이가 들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프렌지〉를 통해 재기에 성공하고, 1976년 77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영화인 〈가족 음모〉를 만드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1980년, 그는 만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히치콕의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
3. 촬영 기법 및 특징
히치콕이 쓴 여러 편집과 촬영 기법은 당대에는 비교할 데 없이 독특하고 새로웠으며, 히치콕 이후엔 액션 영화고 공포 영화고 일반 드라마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작품에서 재생산되면서 잘 쓰이고 있다. 이를 히치코키언(Hitchcockian)이라 불리고 있다.〈 현기증〉에서 쓰인 이른바 현기증 기법(Vertigo effect). 카메라를 뒤로 빼면서 렌즈를 줌하면 발생하는 영상효과로[7] 화면 가장자리는 그대로인데 화면 중앙은 멀어져보인다. 반대로 트랙인/줌아웃을 하면 화면 중앙이 가까워 보인다. 이 기법은 〈 죠스〉, 〈 폴터가이스트〉, 〈 이벤트 호라이즌〉, 〈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 라이프 오브 파이〉, < 공작>,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 헤어질 결심> 등 후대 영화에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거나 인물을 강조할 때 쓰인다. 1950년대 영화의 혁신성이 지금도 유효한 것. 영향을 받은 영화 목록
또한〈현기증〉에서 쓴 카메라 360도 회전 기법이 한국 드라마 〈 질투〉의 마지막 장면에서 쓰이면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심심하면 한국 드라마에서 써먹는 기법이 되었을 정도. 그 외에 〈 이창〉, 〈 현기증〉, 〈 싸이코〉 등에서 쓰인 관음주의적 주관적 시점의 쇼트, 이동 쇼트의 과감한 사용, 오버 헤트 쇼트 등, 현재 영화제작 관련 전공자에게 영원한 연구과제논문이 나오고 있다.
〈로프〉에서, 단 한 번의 커트 없이 롱테이크 원샷으로 촬영된 것으로 유명하다.[8] 배우들은 거의 연극작품 수준으로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의 동선을 다 외워야 해서 세트 촬영이었어도 난이도가 높은 연기였다.
이런 영상적인 테크니션적인 탁월한 부분만이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능력에서도 탁월함을 보이고 후세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는데, 맥거핀이 대표적인 예.
그 외에 상업 영화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온갖 실험적인 시도를 한 감독이기도 하다. 1944년작 〈구명 보트〉는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명선 한 척 위에서만 진행된다든가, 〈 이창〉처럼 아파트 한쪽 면을 실내 세트에 만들어놓고 (심지어 세트에 가구까지 배치했다고 한다) 내내 등장인물들이 그걸 보는 영화라든가,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컷으로 가는 영화를 만든다거나 등.
하지만 이런 독특함과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전성기 시절에는 평론가들에게 그다지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흥행 영화 잘 만드는 감독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히치콕을 추종하고 히치콕 스타일을 본인 영화에 접목시키려 했던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히치콕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걸 '히치콕/트뤼포'란 책으로 내면서 히치콕에 대한 평가가 바뀐다. 장면 하나 하나를 히치콕이 어떻게 만들어냈고, 어째서 사람들이 재밌어 하는가, 하는 서술을 담아냈고 그제야 히치콕의 생각과 연출 의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명의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어 2016년 개봉했다.
앞서 말했듯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흥행감독이나 상업 영화나 찍는, 작품성은 형편없는 감독 등 여러모로 평론가에게는 큰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타계 이후 거의 영화의 신이라는 불멸의 칭송을 받고 있다. 특히 장면 장면마다 다른 영화에서 오마주가 되곤 하는데, 〈 사이코〉의 샤워신은 여러 영화에서 패러디된 것은 물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공포감을 조성하는 신마다 샤워신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새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 데에도 한몫했다. 다만 지금 〈 새〉를 보면, 와이어가 보이거나 인형이라는 티가 좀 나긴 한다. 그러나 적절히 필름에 새의 이미지를 그려 넣기도 해서 현실감을 살렸고, 당시에는 큰 이슈가 된 특수효과였다.
유명한 히치콕 빠가 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이다. 드 팔마의 초기작에 자주 인용되는 장면 역시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 <드레드스 투 킬> 초반부에서 유명한 미술관 장면은 <현기증>,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난도질 살인 장면명은 <사이코> 또한 누벨바그의 감독들에게는 거의 신적인 존재이다. 클로드 샤브롤의 〈도살자(Le Boucher)〉(1970)를 비롯한 '스릴러 3부작'은 대놓고 히치콕에게 바칠 정도였으니.
트뤼포와의 대담에서 남긴 그의 발언은 그야말로 고전이 되었다. 트뤼포와의 대담집 ' 히치콕과의 대화'는 훌륭한 히치콕 영화 해설서다.
"나는 삐걱거리는 문소리로 서스펜스를 자아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운 거리에서 죽은 고양이와 폐물들이 나뒹구는 것보다, 밝은 대낮에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일어나는 살인이 더 흥미 있습니다. 서스펜스가 무엇인지 알려드릴게요. 네 사람이
포커를 치러 방에 들어갑니다. 갑자기
폭탄이 터져 네 사람 모두 뼈도 못 추리게 됩니다. 이럴 경우 관객은 단지 놀랄 뿐이죠. 그러나 나는 네 사람이 포커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남자가 포커판이 벌어지는 탁자 밑에 폭탄을 장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사람은 의자에 앉아 포커를 하고, 시한폭탄의 초침은 폭발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똑같은 무의미한 대화도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죠. 관객은 '지금 사소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조금 있으면 폭탄이 터질 거란 말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요. 폭탄이 터지기 직전 게임이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말하죠. '차나 한잔 하지.' 바로 이 순간 관객의 조바심은 폭발 직전이 됩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이 '서스펜스'라는 겁니다."
빈틈없고 재빠른 영화 촬영도 히치콕의 특징 중 하나. 히치콕은 영화 촬영 전에 영화 전체를 콘티로 만든 후, 콘티와 단 하나의 차이도 없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때문에 현장에서의 수정 같은 게 없어 영화 촬영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런 촬영은 배우들은 철저히 감독의 부품이 되어야 하는 식이라 배우들에 따라선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몇몇 배우에게만 상의를 하거나 의견을 물었다.
이런 식의 촬영은 묘하게도 히치콕이 제작사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편집권한은 감독이 아니라 제작사에게 있기 때문에 제작사에서 히치콕의 완성품에 불만을 가지고 영화를 재편집하려고 시도해도, 재편집에 쓸 장면 같은 게 히치콕의 촬영 필름에는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히치콕의 빠른 촬영 스케줄은 제작사 측이 투자 부담을 더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단, 이 스타일 자체가,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의 히치콕에게 다른 인기감독들보다 제작사 측이 제작비를 약간 덜 준 부분들에 의해 생겨났다는 평가는 항상 있었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성비쪽으로 추구하여 가성비 최대를 추구하는 방식인, 미리 머리속으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려보는 방식을 사용해 스스로를 진화시켰다는 평가.
당대 미녀 배우들을 발굴하고, 주인공 삼아 촬영하기를 즐긴 감독이기도 하다. 특히 관능적이고 섹시한 미모를 가졌지만, 남자 주인공이 호감이라도 보이면 단칼에 거절할 것 같은 차가운 이미지의 금발과 푸른 눈의 배우들을 좋아했는데, 이에 대해 어린 시절에 가톨릭식의 엄격한 금욕주의 교육으로 억압되고 플라토닉한 부부생활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던 히치콕의 성욕이 표출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 해석이 나오는 이유가 부인인 앨머는 갈색 머리를 가진, 지적이고 기가 센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또 영화 속에도 은근슬쩍 앨머로 대표되는 지성적인 여성들을 주인공 남성의 동반자에 해당하는 캐릭터로 삽입하기도 했고, 말기엔 딸이 그런 여성들을 연기하기도 했다. 잉그리드 버그만(버그만은 발굴한 게 아니지만)을 주연으로 여러 영화를 찍었고, 순진하고 공주 같은 이미지로 주로 통하던 그레이스 켈리[9]의 숨겨진 매력을 발굴해내기도 했으며, 〈 현기증〉을 통해 킴 노박의 관능미를 발산하게 했다. 후반기에 발굴한 티피 헤드런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새와 마니의 여주인공으로는 호연.
4. 작품 목록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 무성 영화 ]
- [ 유성 영화 ]
- ||<tablebgcolor=#000000><tablewidth=100%><width=1000><bgcolor=#f7f7f7,#191919> ||<width=33.3%><bgcolor=#264687> ||<width=33.3%><bgcolor=#f7f7f2,#1f1f13> ||
협박 엘스트리 컬링 주노와 공작 머더! 스킨 게임 메리 리치 앤 스트레인지 17번지 비엔나로부터의 왈츠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39계단 비밀 첩보원 사보타주 영 앤 이노센트 사라진 여인 자메이카 인 레베카 해외 특파원 스미스 부부 서스펜션 파괴 공작원 의혹의 그림자 구명 보트 스펠바운드 오명 패러딘 부인의 사랑
- [ 컬러 영화 ]
- ||<tablebgcolor=#000000><tablewidth=100%><width=1000><height=45> ||<width=33.3%> ||<width=33.3%> ||
로프 염소자리 무대 공포증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나는 고백한다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 나는 결백하다 해리와 소동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오인 현기증 파일:North by Northwest Logo.png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새 마니 찢어진 커튼 토파즈 프렌지 가족 음모
4.1. 무성 영화 시기
- 1923 〈Number 13〉, 〈Always Tell Your Wife〉[10]
- 1925 〈The Pleasure Garden〉
- 1926 〈The Mountain Eagle〉[11], 〈The Lodger( 하숙인)〉
- 1927 〈Downhill〉, 〈Easy Virtue〉, 〈The Ring〉
- 1928 〈The Farmer's Wife(농부의 아내)〉, 〈Champagne〉
-
1929 〈The Manxman〉
4.2. 유성 영화 시기
- 1929 〈Blackmail( 협박)〉
- 1930 〈Murder!(살인)〉, 〈Juno and the Paycock〉, 〈Elstree Calling〉
- 1931 〈The Skin Game(스킨 게임)〉, 〈Rich and Strange(리치 앤 스트레인지)〉, 〈Mary〉
- 1932 〈Number Seventeen(17번지)〉
- 1934 〈Waltzes from Vienna〉, 〈The Man Who Knew Too Much(나는 비밀을 안다)〉
- 1935 〈The 39 Steps( 39계단)〉[12]
- 1936 〈Sabotage(사보타주)〉
- 1936 〈Secret Agent(비밀 첩보원)〉
- 1937 〈Young and Innocent(젊음과 순수)〉
- 1938 〈The Lady Vanishes(사라진 여인/반드리카 초특급)〉
-
1939 〈Jamaica Inn(자마이카 인/암굴의 야수)〉
4.3. 할리우드 흑백 시기
- 1940 〈Rebecca( 레베카)〉 @(2018), 〈Foreign Correspondent(해외 특파원)〉
- 1941 〈Mr. & Mrs. Smith(스미스 부부)〉, 〈Suspicion(의혹)〉
- 1942 〈Saboteur(파괴공작원)〉
- 1943 〈Shadow of a Doubt(의혹의 그림자)〉 @(1991)
- 1944 〈Lifeboat(구명 보트)〉, 〈The Fighting Generation〉[13]
- 1945 〈Spellbound( 스펠바운드)〉
- 1946 〈Notorious( 오명)〉 @(2006)
- 1948 〈The Paradine Case(패러다인 부인의 재판)〉
4.4. 컬러 시기
- 1948 〈Rope( 로프)〉
- 1949 〈Under Capricorn(염소좌 아래/염소자리)〉[14]
- 1950 〈Stage Fright(무대 공포증)〉
- 1951 〈Strangers on a Train( 열차 안의 낯선 자들)〉[15]
- 1953 〈I Confess(나는 고백한다)〉
- 1954 〈Dial M for Murder(다이얼 M을 돌려라)〉, 〈Rear Window( 이창)〉 @(1997)
- 1955 〈To Catch a Thief(나는 결백하다)〉, 〈The Trouble with Harry(해리의 소동)〉
- 1956 〈The Man Who Knew Too Much(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16], 〈The Wrong Man(누명 쓴 사나이/오인)〉
- 1958 〈Vertigo( 현기증)〉 @(1989)
- 1959 〈North by Northwest(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95)
- 1960 〈Psycho( 싸이코)〉 @(1992)
- 1963 〈The Birds( 새)〉 @(2016)
- 1964 〈Marnie(마니)〉
- 1966 〈Torn Curtain(찢어진 커튼)〉
- 1969 〈Topaz(황옥/암호명 토파즈)〉
- 1972 〈Frenzy(프렌지)〉[17]
- 1976 〈Family Plot(가족 음모)〉
5. 일화
- 스릴러와 서스펜스의 대가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실제로는 유쾌하고 장난도 잘 치는 성격이었다. 영화 촬영 중 조명기사 한 사람이 자신은 몸이 밧줄에 결박당한 채로 스튜디오에서 하루를 버틸 수 있다고 자랑하자 히치콕이 그에게 내기를 걸었고, 조명기사를 밧줄에 묶고 스튜디오를 나서면서 설사약이 잔뜩 든 커피를 건넸다고 한다. 결과는 어찌 되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또한 TV 드라마 시리즈인 〈히치콕 극장〉에서는, 자기가 감독하지 않은 작품이라도 앞뒤에 꼭 직접 등장해서 작품 내용과 약간 관련된(?) 개그를 하고는 했는데, 이것들이 아주 걸작이다. 온갖 블랙 코미디 소재와 함께, 광고를 사이에 집어넣는 스폰서들을 신랄하게 까는 등.
-
손녀가 자신에 대한 리포트를 쓸 때 히치콕이 도움을 줬다. 그러나 교수의 평가는 'C'였고, 이유는 조사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히치콕은 손녀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화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입시위주 교육의 문제점과 연관되어 유명해졌다. 원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품을 기계적으로 해석하여, 창의성을 배제하고 오직 출제자가 원하는 답만을 요구하는 수능시험의 현실이 그대로 일치하기 때문. 물론 과대해석이라는 의견도 있다.
- 자신의 이미지 마케팅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록 히치콕은 인터뷰에서 " 카메오로 출연할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이다"라고 말은 했지만, 매 영화마다 자신이 감독한 영화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항상 자신이 화면의 중심에 보이도록 장면의 구도를 잡아놓고 카메오 출연장면을 찍었고, 자신의 이름을 본뜬 잡지와 TV시리즈를 만들었다. 감독 경력 초창기에는, 영화계에서 일하는 주변 동료들에게, 일부러 자신에 대한 괴상한 소문이 영화 제작자들 귀에 들어가도록 퍼뜨려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 〈 사이코〉가 개봉된 뒤, 히치콕은 어떤 남자로부터 아주 재미있는 항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제 딸이 〈 디아볼릭〉을 본 후부터 목욕을 하지 않으려 하더니, 〈사이코〉를 보고 나선 샤워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히치콕은 그 남자에게 간단하게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그 내용은 드라이 클리닝을 하시죠. #
- 티피 헤드런의 딸 멜라니 그리피스는 히치콕 감독으로부터 실사 크기의 헤드런 인형이 들어가 있는 모형 관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헤드런과 히치콕 사이에 점점 금이 가다가 〈마니〉 촬영 당시, 티피 헤드런과 히치콕이 아주 심하게 말싸움을 했는데, 이때 헤드런이 히치콕한테 돼지라고 모욕을 했다. 당연히 히치콕은 분노했고, 다시는 헤드런과 작업하지 않았다.
- 〈사이코〉를 완성하고 히치콕은 주변 동료들을 불러 비공개 시사회를 가졌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영화라며, 특히 샤워신은 영화사(映畵史)에 있어 길이 남는 장면이 될 거라고 히치콕을 칭찬하고 있는데, 가만히 영화를 보고 있던 히치콕의 부인이자 영화 편집자이기도 한 앨마 러바일이 샤워신은 다시 편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이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자 앨마가 말하길, " 자넷 리가 이미 죽었는데 침을 삼켰어요". 그 말을 들은 히치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다음 날 샤워신을 재편집했다고 한다. 그 외에 본래 히치콕은 샤워신에 자넷 리의 비명소리 외에는 무음으로 처리하려 하였는데 앨마가 버나드 하먼이 새로 가져온 음악을 듣고 샤워신에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여 현재의 샤워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 부모님으로부터 엄격한 가톨릭식 금욕주의 교육을 받은 데다가, 결혼하기 전까지 여성과의 교제를 해본 적이 없던 히치콕은 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영화 촬영도중 생리 기간이었던 여배우가 시나리오의 물속에 들어가는 장면 촬영을 거부했는데, 히치콕은 이때 카메라맨으로부터 여성이 생리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히치콕이 결혼하기 한 달 전의 일이다. 실제로 스릴러적 연출에 있어서는 가히 신급인 히치콕이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 적잖게 나오는 남녀주인공의 로맨스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개연성을 가진 경우가 많다. 썸도 제대로 탄 적 없는 상황에서 뜬금없는 시점에 사랑 고백을 한다든가 등. 그런데 바로 상대방이 받아준다.[18] 그래서인지 묘한 게이적 코드를 읽는 평론가들도 있다.
- 은근히 변태적인 성향이 영화에 묻어나온 데다 금발 미녀들을 선호하며 굴린 일화 때문에 오해를 사곤 하지만, 부인인 앨마 러바일과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훗날 앨마는 영화 편집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중 갑자기 히치콕과 결혼한 이유를 인터뷰어에게 질문받자, "배 안에서 폭풍우 치는 날씨 때문에 안 그래도 예민한 신경이 더욱 예민해져 있는 여성에게, 갑자기 동료가 비를 다 맞아가면서 프로프즈를 하면 당신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부인도 히치콕 못지않게 재능 있는 데다 성깔 있는 인물이어서, 히치콕은 공처가로 유명했다. 앨마가 저녁을 차릴 시간인 6시 전에는 항상 영화 촬영 스케줄을 끝냈고, 배우 선정이나 대본 수정, 최종 편집에도 앨마가 깊게 관여했다고 한다. 아내인 러바일은 동갑에 생일도 겨우 하루 늦은 1899년 8월 14일생이었다. 1982년 7월 6일에 만 82세로 남편을 따라갔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에 징집대상으로 지목되었지만, C3[19]로 분류되어 면제받았다. 그러나 국내기지에서만 조건부로 복무를 할 수는 있었기에 그는 왕실 공병대의 사관생도 연대에 자원입대했다.
- 스티븐 스필버그가 히치콕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히치콕 본인이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죠스 라이더의 목소리를 연기했기 때문에 죠스를 만든 스필버그를 볼 때면 자신이 남창이 된 것 같이 소심해져서 거절했다고 한다. #
-
사실 작품의 플롯에 구멍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20] 그런데 히치콕 본인은 이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와 작업했던 극작가 리처드 말리봄(Richard Malibaum)의 회상에 따르면 영화의 한 부분이 비논리적이지 않냐며 말리봄이 묻자 히치콕은 난 논리에 관심없다. 내가 관심있는 것은 효과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에 "관객들이 논리에 대해 생각할때는 영화를 보고 집에 갈 때고 그때면 이미 티켓 값은 다 낸 후"라고 덧붙혔다.
#
비슷하게 <현기증> 촬영시 킴 노백은 히치콕에게 시나리오상의 허점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히치콕은 "너무 신경쓰지 말자고.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니까"라 답했다고 한다.
6. 평가
히치콕 감독의 영향은 현대영화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은 곳이 없다. 히치콕은 명암대조가 심한 조명을 선호하는 필름
느와르 장르가 할리우드에 뿌리내리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히치콕의 영향력은
로만 폴란스키,
쿠엔틴 타란티노, 심지어 <
매트릭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 영화학자 마크 랭거
― 영화학자 마크 랭거
상술했듯 서스펜스의 거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현대 영화 제작자들에게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 그리고 영화사 최초의 스타 감독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서 극장 간판에 얼굴이 실린 최초의 감독이다. 그 전에 감독이 극장 간판에 실린 사례는 없었다. 감독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던 1950–60년대 한국에서도 영화가 개봉할 때 대대적으로 이름을 내세워 홍보했다.
각종 영화 매체나 평론가, 팬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영화감독을 뽑을 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언급되는 감독 중 한명이기도 하다. 최고의 영화감독 순위에서 1위를 벗어난 설문을 찾는게 더 빠를 정도로 1위 고정이다. 영국의 영화지 <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2012년 평론가들과 감독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조사에서도 히치콕 감독이 역대 최고의 영화 감독 1위에 선정되었다. 참고로 2위는 '영화 혁명가' 장뤽 고다르, 3위는 '시민 케인을 만든 천재' 오슨 웰스. 전체 리스트 여담이지만 오슨 웰스는 "나는 히치콕 숭배를 결코 이해하지 못 하겠다. 그의 영화는 이기주의와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텔레비전 쇼 같다." 라고 말하며 매우 냉소적으로 히치콕을 평가했다. #
7. 기타
그가 하던 여러 말들은 영화사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있다."나는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답니다. 그는 오로지 카툰만 그리지 않아요? 만약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릴 수도 있고 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의 영화에서 그를 찾아보는 것도 잔재미이다. 〈새〉에서 애견 2마리를 데리고 말없이 가게에서 나오는 신사라든지, 트렁크 가방을 들고 바삐 달려가는 세일즈맨이라든지, 창문을 청소하는 청소부, 경찰관, 지나가는 사람. 별의별 카메오로 나온다. 단, 관객이 영화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을 찾는 것에 몰두할까봐 영화 초반 10분안에 나온다. 하지만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그런거지 본인이 연출, 제작한 모든 영화에 100퍼센트 다 나온 건 아니다.(초창기 흑백영화 중에서는 등장인물이 적은 단편도 있어서 까메오 등장 여지가 없던 적도 있다.) 10분 넘어서도 못찾으면 포기하고 영화에 집중하자.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에 후보로 엄청 오르고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1968년 공로상을 받았을 뿐이다. 아카데미의 굴욕. 이런 거장의 진면목을 한 번도 못 알아봤다는 거니까 굴욕 맞다. 히치콕 본인도 이걸 마음에 담아서인지 공로상을 받을 때 "Thank you!" 한마디하고 얼른 내려갔다는데[23],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짧은 수상소감이다.
영화음악가 버나드 허먼, 의상 디자이너 이디스 헤드와의 협업으로 유명하다.
1924년작인 〈하얀 그림자〉의 경우, 필름이 소실되어 히치콕 팬들 사이에선 전설로만 떠돌다가, 2011년에 뉴질랜드 필름보관소에서 필름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필름보관소 사이트에서 동영상을 업로드하여 일반 네티즌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현재는 DVD 판매로 바뀌었다. 밑에서 2번째 항목 참고
2012년 〈 사이코〉를 기획, 촬영 그리고 후에 호평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영화 〈 히치콕〉이 개봉하였다.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이자 조감독이었던 앨마 러바일의 노고 또한 재조명한다.[24] 안소니 홉킨스가 히치콕, 헬렌 미렌이 앨마, 스칼렛 요한슨이 자넷 리, 그리고 제임스 다시가 안소니 퍼킨스로 분하였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의 서포터로 알려져 있다.
봉준호 감독이 레딧과의 인터뷰 중 받았던 질문인 “최후의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 5인.” 중 한 명으로 뽑혔는데, 질문을 받을 당시 기준으로는 유일한 고인이다.[25]
-
참고할 만한 자료
94.12.28-박찬욱-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1]
공로상격의 상
[2]
대영제국 훈장 2등급(KBE). 2등급이므로 기사 칭호(Knighthood)가 훈장 서훈과 동시에 붙는다. 사망하기 세 달 전 서훈 명단에 올랐다. 유명인들이 받은 기사작위는 대부분 'Knight Bachelor'라는 것인데, KBE는 이보다도 한 단계 격이 높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
[3]
K.V. Turley, "
The Man Who Knew His Faith: The Catholicism of Alfred Hitchcock", 「National Catholic Register」, 2020.2.12.
[4]
Peter T. Chattaway, "
A Cranky Catholic", 「Christianity Today」, 2006.7.25.
[5]
그의 유일한 3D 영화이다. 21세기에 3D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3D로 찍은 작품이다. 놀라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보다 입체경이 약 60여 년 이전에 발명되었고, 무성 영화 시절에도 3D 영화는 있었다. 1950년대 초반이 3D가 본격적으로 광고에 적극 활용되던 시기였는데, 지금과 달리 눈의 피로가 워낙 심하고 2D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대중화되진 못했다. 〈다이얼 M을 돌려라〉 역시 개봉 직후 금방 2D로 상영되었다.
[6]
이 영화는 2012년
영국 영화 협회가 발간하는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전 세계 846명의 영화평론가, 감독, 시나리오작가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최고의 영화 조사에서, 1962년부터 2012년까지 50년 동안 1위 자리를 지켜왔던 오슨 웰스의 〈
시민 케인〉을 누르고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7]
그래서 트랙아웃/줌인(Track-out/Zoom-in) 또는 돌리 줌(Dolly zoom)이라고 불리며 후자가 더 많이 쓰이는 단어다.
[8]
영화상의 시간은 끊김이 없지만, 실제로는 한 번에 촬영한 것이 아니다. 당시 영화의 기술상 필름이라는 매체의 한계로 인해 10분 넘게 연속으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10분쯤 될 때마다 각 배우들이 돌아가며 자연스러운 내용상의 이유로(술을 가지러 가거나 다른 물건을 가지러 간다거나 하면서) 카메라 쪽으로 다가가 카메라를 완전히 가려버려서 화면을 까맣게 만들어 촬영을 멈추고,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필름을 갈아 끼운 다음 그 상태 그대로 촬영을 이어갔다. 그걸 붙여서 연속촬영처럼 보이게 한 것.〈로프〉를 자세히 보면, 약 10분 주기로 배우가 카메라로 다가 오고, 화면이 깜깜해진 다음 0.1초 정도의 어색한 끊김이 느껴지는데, 그런 부분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화면을 가리는 배우 등 뒤에 있는 다른 배우들의 위치도 조금씩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물론 당시 관객들은 영화만 보고 알 수 없었을 것이다.
[9]
그녀는 이런 이미지가 먹혀들어
모나코의 대공비로 간택되었다.
[10]
두 작품 모두 미완성작
[11]
히치콕 장편 영화 중 유일하게 유실된 영화. 독일에서 개봉된 후 영국 배급사 내부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으며 개봉되지 않았다가, 〈The Lodger(하숙인)〉의 흥행으로 1927년 5월에야 개봉되었다. 흥행 성적 역시 좋지 못했다. 훗날 히치콕은 이 영화에 대해 '끔찍한 것'이라 회고하며, 자신 역시 이 영화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영국 영화 협회(British Film Institute, BFI)에서는 영국 영화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유실된 작품을 다시 찾기 위해 BFI 75 Most Wanted라는 리스트를 공개했는데, 이 영화는 그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영화 역사가들의 성배'라고 강조했다.
[12]
첩보물의 시초격으로 여겨지는 영화다.
[13]
1944년에〈 Aventure Malgache〉 〈Bon Voyage〉과 함께 미국 재무부 의뢰로 제작한 전시 선전용 단편 영화.
[14]
히치콕 본인이 실패작이라고 인정한 영화.
[15]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
[16]
1934년 동명작을 제임스 스튜어트, 도리스 데이 주연으로 셀프 리메이크
[17]
여성들을 강간 살인하는
사이코패스 범죄에 대한 스릴러 영화이다. 한국영화 〈
살인의 추억〉과의 차이점이라면, 초반에 이미 범인이 누군지 나온다는 점.
[18]
예를 들어, 영국 정보국에서 지시한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처음 만난 남녀공작원이, 정부가 지정한 사람을 며칠 동안 찾다가 그로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서, 남자주인공이 그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때 갑자기 여주인공이 울며, "나는 사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근데 그런 당신이 사람을 죽이려 계획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은 "사실 나도 그렇소. 미안하오."라고 말한다.
[19]
비대한 몸집과 알려지지 않은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20]
이게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다. 처음부터 원하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개연성을 부여한 수준의 각본을 의도했다고 한다.
[21]
영국의 영화지 <
사이트 앤 사운드>에 기고한 히치콕에 대한 헌정사.
[22]
영국 기자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시는 게 어떤가요?"라고 물은 질문에 무덤덤하게 저 한 마디만 했다. 여러가지로 해석되겠지만, 보통은 '여긴 유명세와 달리 할리우드일 뿐이야. 뭘 기대했어?'라는 해석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23]
다만 내려가다 중간에 "very much indeed"도 내뱉고 가지만 이 타이밍에 브금에 묻혀 대중들 사이에서 Thank you로 많이 알려져 있다.
[24]
http://www.telegraph.co.uk/culture/film/film-news/9832084/Mrs-Alfred-Hitchcock-The-Unsung-Partner.html
[25]
나머지 4명은
케빈 더 브라위너,
지미 페이지,
김연아,
마틴 스코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