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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 램지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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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 램지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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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대
클럽

토트넘 홋스퍼 FC 역대 주장
론 버지스
(1946~1954)
알프 램지
(1954~1955)
대니 블랜치플라워
(1955~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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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 감독
파일:external/static.guim.co.uk/Sir-Alf-Ramsey-006.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알프 램지
Sir Alf Ramsey
본명 알프레드 어네스트 램지
Sir Alfred Ernest Ramsey
출생 1920년 1월 22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에식스주 대거넘[1]
사망 1999년 4월 28일 (향년 79세)
영국 잉글랜드 서퍽 주 입스위치 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 체중 73kg
직업 축구선수 ( 라이트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파이브 엘름 (미상 / 유스)
사우스햄튼 FC (1943~1949)
토트넘 홋스퍼 FC (1949~1955)
감독 입스위치 타운 FC (1955~1963)
잉글랜드 대표팀 (1963~1974)
버밍엄 시티 FC (1977~1978)
파나티나이코스 FC (1979~1980 / 기술 고문)
국가대표 32경기 3골 ( 잉글랜드 / 1948~1953)
1. 개요2. 생애3. 스타일 & 평가
3.1. 선수3.2. 감독
4. 사생활5. 뒷이야기6. 어록7. 기록
7.1. 대회 기록
7.1.1. 선수7.1.2. 감독
7.2. 개인 수상7.3. 서훈
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영국( 잉글랜드)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9년부터 1980년까지 파나티나이코스 FC 감독을 맡았다.

FIFA 월드컵 UEFA 유로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뒀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조국 잉글랜드에 첫 우승컵을 안겼으며, 유로 1968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2. 생애[2]

2.1. 어린 시절

알프 램지의 고향은 런던 동부에 있는 대거넘이다. 더 자세히 서술하면 램지는 할버트(Halbutt)가의 6 패리시 코티지스(Parrish Cottages) 출신으로 농부였던 아버지의 4남 1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램지가 어렸을 때 다른 영국의 시골집들도 그랬지만 램지의 집에 온수와 전기는 부족했고 화장실은 집안에 없었다. 대거넘에 포드 자동차 공장이 들어서고 지역이 발전했음에도 패리시 코티지스는 예외였고 램지의 고향집은 1950년대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램지의 이웃이 말한 바에 따르면 램지의 어머니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마지못해 전기 설치를 허가했고 램지의 고향집은 말 그대로 나무 오두막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램지는 축구를 좋아해서 형제들과 별장 뒤에서 공을 갖고 놀았다. 램지의 집에서 그가 다니던 학교까지는 걸어서 2시간 거리였고 램지는 형제나 친구들과 서로 공을 주고받으며 통학하곤 했다. 그렇게 공을 가지고 놀았던 가락으로 램지는 학교 대표로 축구 시합에 나가기도 하고 그의 형 알버트와 함께 아스날의 경기를 보러 간 적도 있었다. 당시 아스날은 허버트 채프먼 감독의 지휘 아래 첫번째 전성기를 달리던 시기였고 이것이 램지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처음으로 본 공식 축구 경기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램지는 알렉스 제임스의 플레이가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램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특별히 인기있거나 성적으로 두각을 보이진 않았지만 운동에 능해서 육상, 크리켓 등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또한 램지는 용감함도 갖추고 있어서 10살 때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상대와 권투로 싸워서 이기기도 했다.

1934년, 학교를 그만둔 램지는 포드 공장에서 일하려다가 잘 안 되자 청과물 상인이 되려고 했다. 상인이 되기 위해 준비하던 당시의 램지는 식료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축구를 직업으로 삼는 것까지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취미로만 축구를 즐겼을 뿐이었다. 램지는 토요일 오후에 일을 해야 해서 축구를 즐길 수 없었지만 2년 후에는 목요일에 경기를 하던 아마추어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1937년, 램지는 처음으로 축구계에 연이 닿을 수 있었다. 포츠머스의 스카우터였던 네드 리델(Ned Liddell)의 눈에 띄어 램지는 아마추어 계약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램지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바로 사인하는 대신 가족들과 논의해보겠다고 하고 계약서를 집으로 가져가서 가족들과의 논의 후에 우편으로 포츠머스 구단에 서류를 보냈다. 그러나 램지에게는 실망스럽게도 포츠머스 구단측에서 답변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램지가 19세 되던 해인 1939년, 영국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램지 역시 콘월 공작의 경보병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램지는 대공부대의 중대 병참 장교로 복무했고 이 당시의 경험을 매우 스릴 넘치는 경험으로 묘사했는데 호텔에서 처음 잠을 자봤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대 훈련을 받으면서 대거넘에서 식료품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보다 몸이 더 건강해졌고 일반적인 삶에 대해 집에서 몇 년 동안 배웠던 것보다 몇 주 만에 군대에서 더 많이 배웠다고 덧붙였다. 군생활은 램지에게 규율과 리더십, 그의 사회적 기술을 강화했다.[3]
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린 적이 없지만 당신은 군대에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죠.
알프 램지(군생활을 회상하면서)

군복무 기간에 램지는 더 수준 높은 축구를 접할 수 있었고 1943년, 램지는 햄프셔의 바튼 스테이시(Barton Stacey)로 옮겨 군복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바튼 스테이시의 지휘관은 축구 선수 출신이던 플레처 대령이었고 램지가 속했던 대대팀에도 여러 축구 선수들이 있었다. 1943년 10월 8일, 플레처 대령은 사우스햄튼 구단의 연락을 받았다. 연락의 내용은 루턴 타운과의 경기에 수비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플레처 대령은 자신의 사무실에 램지를 불러 사우스햄튼에 입단하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램지는 자신은 경험이 부족하다면서 조심스러워했지만 플레처 대령은 선수 생활을 하다보면 프로 선수로 데뷔할 수 있다고 램지를 설득했고 그의 승낙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램지는 본격적인 축구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사우스햄튼
램지는 1943년 10월 9일, 사우스햄튼 FC에 합류하기 위해 루턴으로 이동하던 기차 안에서 사우스햄튼과의 아마추어 계약에 서명했다. 램지는 루턴의 케닐워스 로드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사우스햄튼이 2대1로 앞서던 후반에 루턴 페널티 킥을 허용하는 반칙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사우스햄튼은 루턴을 3대2로 이겼다.

램지는 더럼 카운티로 부대가 이동하기 전까지 사우스햄튼의 세 경기에 더 출전했다. 1944-45 시즌이 시작되면서 다시 램지의 부대가 남쪽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램지는 사우스햄튼에 재합류할 수 있었다. 사우스햄튼은 램지에게 경기당 2 파운드를 지급하는 프로 계약을 제안했지만 당시의 램지는 자신의 실력과 부대 상황 등으로 인해 선수 경력을 지속하는 것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램지는 사우스햄튼이 원하면 시즌이 끝나면 자신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든 후에 계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램지는 1944-45 시즌을 앞두고 사우스햄튼과 대대팀의 프리시즌 경기에서 부상을 입는 바람에 12월까지 출전을 하지 못했다. 램지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아스날과의 경기에 복귀했고 테드 드레이크를 막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드레이크의 득점을 막지는 못했지만 램지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1945-46 시즌 당시 램지는 아직 군인이었지만 사우스햄튼의 1군 경기에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센터 포워드로 뛰었고 뉴포트 카운티에서 열린 경기에는 해트 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이 끝나고 사우스햄튼은 램지에게 1군 계약을 제시했는데 램지는 한번 구단의 제안을 거절한 후, 더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의 내용은 주당 6파운드, 겨울에는 7파운드, 1군 팀에 합류하면 8파운드를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램지는 군에서 제대하고 사우스햄튼에 합류했다.

1946-47 시즌을 시작으로 잉글리시 풋볼 리그가 본격적으로 재개막했고 사우스햄튼은 잉글랜드 세컨드 디비전[4] 소속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이때의 램지는 센터 포워드 포지션을 유지했고 득점도 했지만 사우스햄튼 구단측은 그에게 라이트 윙 하프로 포지션 변경을 제안했다. 1946년 10월 26일의 플리머스 아가일전은 램지의 라이트 윙 하프 데뷔전이자 사우스햄튼의 당해 시즌 최대 점수차 승리[5]를 기록한 경기였다. 당시 사우스햄튼의 주전 라이트 윙 하프였던 빌 엘레링턴(Bill Ellerington)의 부상으로 램지가 수혈되었는데 램지는 경기를 앞두고 많이 긴장했다. 하지만 팀의 주장이자 숙련된 풀백 빌 로치포드(Bill Rochford)의 지도와 멘탈 케어로 램지는 경기 진행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램지는 후에 이 경기에서 다른 선수들의 템포가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는 회고를 남겼다.
예를 들어 제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이미 패스를 완료했을 정도로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 너무 빨랐습니다.
알프 램지

램지가 한 경기를 더 치른 후 엘레링턴은 스쿼드에 복귀했고 램지는 다시 후보 명단으로 돌아갔고 1947년 1월에서야 엘레링턴이 다시 부상을 입으면서 램지는 출전 기회를 잡아나갈 수 있었다. 뉴캐슬과의 원정 경기에서 사우스햄튼은 1대3으로 패했지만 램지에게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램지는 남은 시즌동안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며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당시 사우스햄튼의 감독은 램지에게 좋은 인상을 받아 1947년 2월의 인터뷰에서 축구를 생각하고, 축구를 말하고, 축구에 사는 선수라고 램지를 칭찬했다.

램지는 1947년 4월,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그의 축구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경기를 치렀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풀백은 잉글랜드 국대 출신이자 38세의 샘 바카스(Sam Barkas)였고 이 때는 바카스의 은퇴 시즌 막바지였다. 그러나 램지는 바카스의 위치 감각과 정확한 패스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를 롤 모델로 삼았다.

다음 시즌인 1947-48시즌에 램지는 팀에서 엘러링턴을 밀어내고 주전 경쟁에 우위를 점했으며 42번의 리그 경기 모두에 출전한 클럽의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램지는 이 시즌에 가끔 주장 완장도 찰 정도로 팀에서 중요한 선수로 성장했지만 정작 사우스햄튼은 2년 연속으로 아깝게 1부 리그로 승격을 못했다.

이때에 램지는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경기를 치르고 다시 사우스햄튼의 브라질 투어 합류를 위해 상파울루로 날아갔다. 사우스햄튼은 브라질 팀들과 경기를 치르는 족족 패해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램지가 합류하고 브라질 팀들의 유동적인 전술에 대처하기 위한 사우스햄튼의 새로운 계획에 기여했다. 램지는 긴 대각선 패스를 이용하면 브라질 수비수들이 공격을 위해 사우스햄튼 진형 깊숙히 올라갔을 때 빈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6] 이 전술은 효과를 봐서 사우스햄튼은 코린치안스를 2대1로 눌렀다. 램지는 남미인들의 축구 실력에는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선수, 언론인, 행정관 또는 팬의 행동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램지의 주변인들은 이 경험이 "램지의 초기 외국인 혐오증을 키웠다"고 추측했다.

1949년 1월, 램지는 플리머스 아가일 원정 경기에서 태클을 시도하다 부상을 입었고 그 기간에 자신이 밀어냈던 엘레링턴이 다시 주전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엘레링턴의 복귀 이후 사우스햄튼의 성적이 더 좋아지자 램지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램지는 스태프진과 불화를 겪게 되었다. 이때 램지는 축구 선수 은퇴까지 고려할 정도로 심각하게 멘탈이 흔들렸지만 팀 동료들은 램지보다는 코치진의 손을 들었다. 팀 수뇌부는 램지의 잔류를 위해 노력했지만, 램지는 지금 자신의 입지가 국가대표팀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이적을 주장했다. 루턴 타운, 리버풀, 번리 등 다른 클럽들이 램지를 영입하기 위해 관심을 보였지만 실제로 사우스햄튼에 영입 제안을 보낸 팀은 셰필드 한 곳에 불과했다. 토트넘도 램지의 이적 사가에 합류했지만 성사되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램지는 시즌말까지 사우스햄튼에서 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램지는 1948-49 시즌을 끝으로 어니 존스(Ernie Jones)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같은 2부 리그에 있던 토트넘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2.2.1.2. 토트넘
램지의 선수 생활은 토트넘에서 꽃피었다. 램지와 토트넘의 감독 아서 로우(Arthur Lowe)는 서로 추구하는 전술-진보적이고 빠르게 공을 돌리는 전술이 비슷해서 빠른 신뢰 관계가 되었고 로우 감독은 푸시 앤드 런 전술을 고안해냈다. 이 전술의 핵심 줄기 중 하나가 램지의 정확한 패스였다.

램지는 토트넘의 주전 수비수로써 200경기가 넘는 출전 수를 기록했다. 램지의 입단과 동시에 푸시 앤드 런 전술이 효과를 보면서 토트넘은 17년 만에 잉글리시 퍼스트 디비전 복귀에 성공했고 램지는 1949년 11월, 그림즈비 타운전에서 커리어 최고의 골을 넣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램지는 하프라인 근처에서 긴 패스를 가로채고 40야드를 드리블하며 그림즈비 수비수 3명과 골키퍼까지 제치며 골을 넣었다. 디 엔필드 가제트(The Enfield Gazette)의 기자는 이 골을 묘사하며 "이 경기를 본 사람들에 의해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토트넘은 7경기를 남긴 시점에 이미 세컨드 디비전 우승을 확정지었고 복귀한 해에 바로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1부 리그 우승도 하는 쾌거를 이룩해냈다.[7] 이 때에 램지는 그의 팀 동료들에 의해 그를 상징하는 별명인 장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토트넘은 1951-52 시즌의 준우승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토트넘이 이때 슬럼프를 겪은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였다. 램지도 이미 30세를 넘긴 노장이었고 빌 니콜슨도 마찬가지였다. 램지는 계속된 복부 부상으로 입지가 좁아져갔다.

1952-53 FA컵 준결승에서 토트넘의 상대는 블랙풀이었다. 램지는 이 경기에서 블랙풀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빌 페리(Bill Perry)를 잘 제어했고 경기는 1대1로 무난히 연장에 접어들 흐름이었다. 램지는 후반 막판에 디치번 골키퍼에게 무릎으로 패스해 공격 찬스를 다시 만들려 했다. 그러나 공은 디치번과 램지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위치로 가고 말았고 하필 그 곳에는 블랙풀의 공격수 재키 머디(Jackie Mudie)가 버티고 있었다. 토트넘은 램지의 치명적인 실수에 그대로 실점하면서 블랙풀에 결승행 티켓을 넘겨주고 말았고 블랙풀은 결승전에서 볼턴을 상대로 대역전극[8]을 써내며 현재까지 유일한 그들의 메이저 트로피를 얻어냈다.

램지는 이 실수로 한동안 곤욕을 겪어야 했다. 토트넘 서포터들과 언론은 램지의 이 실수에 큰 비판을 가했고 램지는 공개사과까지 했다. 1953-54 시즌부터 램지는 친정팀 사우스햄튼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는 루머의 대상이 되었다. 토트넘은 스완지로 떠난 주장 론 버지스 대신 새로운 주장으로 램지를 임명했지만 새 시즌을 맞이하는 토트넘에서는 오히려 여러 갈등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니콜슨과 램지의 라이벌 의식이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 호흡도 잘 맞았고 사이도 원만했다. 그들 모두 은퇴 후 토트넘에 남아 코치가 되길 원했고 아서 로우 감독도 그들의 결정을 지지해줬다. 그러나 로우가 건강상의 이유로 1955년 2월에 토트넘의 지휘봉을 내려놓자 니콜슨과 램지의 라이벌 의식을 제어할 사람이 사라졌고 이 문제는 약간의 갈등으로 떠올랐다. 더 큰 문제는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토트넘 영입이었다. 토트넘은 당시 35세의 니콜슨의 대체자로 블랜치플라워를 영입했는데 블랜치플라워의 플레이 스타일이 어지간히 팀에 안맞거나 부상을 입었거나 심각한 기량미달이지 않은 이상 토트넘은 니콜슨보다 블랜치플라워를 더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블랜치플라워는 니콜슨보다 더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선수라 램지가 오버래핑을 나가면 뒷공간을 제대로 커버하지 못했다. 게다가 램지의 팀내 역할이었던 전략쪽에서도 블랜치플라워가 지분을 가져가게 되자 램지는 블랜치플라워와 다소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여기에 램지가 장기부상으로 피치를 비우게 되자 이 모든 것들은 램지의 토트넘 생활이 끝나간다는 일종의 신호로 비쳐졌다.

토트넘은 1955년, 16위로 시즌을 마쳐 간신히 강등은 피했다. 그러나 토트넘의 새 감독 지미 앤더슨(Jimmy Anderson)은 니콜슨을 코치로 선임했고 주장 램지를 토트넘의 헝가리 투어에서 제외했다. 35세의 램지는 이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의 선수 경력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고 그대로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2.2.2. 국가대표

1948년, 램지는 삼사자 군단에도 선발이 되었고 램지의 데뷔전 상대는 스위스였다. 하이버리에서 열린 경기의 결과는 잉글랜드의 6:0 대승이었다.

사우스햄튼 시절 말기에 램지가 엘러링턴의 주전 경쟁에서 밀렸을 때 램지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제외되었지만 토트넘에서 다시 좋은 활약을 펼치자 1949년 11월 30일, 램지는 국가대표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날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2:0으로 승리했다.

램지는 1950년 월드컵에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선발되었고 당시 대표팀에 토트넘에 소속된 선수는 램지 외에도 디치번 베일리가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있었으며 그 증거는 그들의 홈에서 아직 자신들을 꺾기는커녕 무승부를 거둔 영연방 이외의 팀도 없다는 것이었다. 대회 개막을 1주일 앞두고 잉글랜드는 자신감 넘치게 브라질에 도착했지만 대회 준비는 거의 없었고 램지의 머릿속에는 다소 불안함이 감돌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쉬운 킥 어라운드라도 마치고 나면 홈에서 리그 경기를 바쁘게 마친 후보다 훨씬 더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알프 램지

첫 경기 칠레전에서 램지는 선발로 나섰고 잉글랜드는 그들의 예상대로 2:0 승리를 챙겼다. 다음 상대 미국. 미국은 2조의 최약체로 분류되었고 사람들은 잉글랜드가 미국을 상대로 얼마나 큰 점수차로 대파하느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월터 윈터보텀 감독은 대표팀의 에이스 스탠리 매튜스도 출전시켜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매튜스 없이도 미국정도는 이길 수 있다는 주장으로 묵살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미국에 0:1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잉글랜드는 예상대로 경기 내내 미국을 압도했지만 정작 그들의 슈팅은 모두 골 네트를 외면했다. 대표팀 주장 빌리 라이트는 "어떻게 봐도 완벽한 프리킥 프랭크 보기의 손에 걸리자 경기 내내 무표정이던 램지조차 손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더라."라고 경기 분위기를 묘사했다.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2골차 이상으로 꺾으면 결선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고 램지도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도 잉글랜드는 스페인에 0대1로 졌다. 애국심이 남달랐던 램지는 이 대회에서의 결과를 일생일대의 굴욕으로 받아들였고 한 언론인은 대회 몇년 후 "그의 얼굴은 주름졌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겪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대표팀이 브라질에서 이런 굴욕을 당했음에도 FA의 태도엔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한번의 불운에 불과했으며 잉글랜드는 여전히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했다. 램지는 늦깎이로 국가대표가 되기는 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도 나름 입지를 굳히며 그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시키려 노력했다. 주장 빌리 라이트가 부상 등을 이유로 대표팀에 나오지 못하면 그가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FA의 그 꺾이지 않은 자만심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할 때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1950년 11월 22일, 웸블리에서 유고슬라비아는 2대2 무승부를 거뒀다. FA는 아직 웸블리에서 무패라며 태세 전환을 했고 1951년 11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잉글랜드의 웸블리 무패 행진에 다시 제동을 걸 뻔했다. 램지의 페널티 킥 골을 포함해 경기는 2:2로 끝났고 자만심은 아직 생명 유지가 되었다. 램지는 후에 이 경기를 자신의 대표팀 경기 중 최고의 경기라고 자평했다.

그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경기였다. 잉글랜드 선수들과 축구팬들은 그 상놈들이 유럽 대륙에서 날뛰고 있어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자신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웸블리는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콧대를 꺾어줄 것이며 유럽 축구계의 유일 최강팀은 잉글랜드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램지가 페널티 킥 골을 하나 넣기는 했지만 겨우 페널티 킥 골 하나로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잉글랜드는 3:6으로 웸블리에서 패했고 그들의 웸블리 무패부심은 82년 만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 경기가 바로 세기의 경기였고 그 상놈들은 바로 역대 최강의 국가대표 축구팀들 중 하나로 지금까지도 꼽히고 있는 매직 마자르였다.[9]

2.3. 감독 생활

2.3.1. 입스위치 타운 FC

토트넘에서 막 은퇴했을 때의 램지는 축구계에 더 남고 싶었지만 코치쪽의 경험과 자격은 모두 일천했다. 1955년, 로디지아에서 오프 시즌에 코칭을 하던 램지에게 입스위치 타운 선수 겸 감독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램지는 선수 겸 감독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유는 한가지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램지가 함께 플레이하는 선수들을 코칭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첨언하자 입스위치 타운은 아예 램지에 감독직을 맡아달라고 다시 제안을 했다. 그렇게 램지는 1955년 8월 9일에 입스위치 타운의 감독 자리에 취임했다.

램지가 처음 감독 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그는 훌륭할 것이지만 보스가 될 것 같네요.
윌프 그랜트(램지의 사우스햄튼 시절 동료이자 램지의 감독 취임 당시 입스위치 타운 코치.)
램지를 감독으로 임명함으로써 입스위치 타운은 지능적인 축구를 하는 선수들에게 엄청난 경의를 표했습니다.
빌리 라이트

램지의 취임 당시 입스위치 타운은 2부 리그에서 막 강등당해 3부 리그[10] 남부 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입스위치 타운은 1936년에서야 풋볼 리그에 가입했고 그들의 홈구장은 작았다. 즉, 그들은 내세울 만한 역사나 전통도 없었지만 그래도 팀 수뇌부는 코볼드 양조장의 후원자들이고 서포터 중에서도 귀족들이 많은 편이라 자금력은 괜찮았다. 램지가 부임하자마자 몰두한 일은 축구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없애는 일이었다. 램지는 주로 1, 2부 리그에서만 있었지 하부 리그 선수들과 오랜 시간 함께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전임 감독 스콧 던컨(Scott Duncan) 시절부터 입스위치 타운에서 먼저 있던 스태프들 대부분을 그대로 인수받았다. 던컨은 램지에게 감독직을 넘기면서 클럽 총무직을 맡았고 램지는 경기에 집중하면서 클럽의 전반적인 관리는 던컨에게 맡겼다. 그리고 아무리 당시 입스위치 타운의 자금력이 괜찮다고 해도 그것은 하부 리그 팀들 사이에서나 괜찮은 것이었지 1부 리그 팀들과 돈으로 경쟁해서 선수를 사올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램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클럽의 선수들을 활용하면서 그들에 맞는 전술을 고안하는 방법이 현실적이면서 유일했다.

취임 2년 만에 램지는 입스위치 타운을 2부 리그로 다시 올려놓은 후, 1960년에는 기어이 1부 리그에까지 승격시켰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1-62 시즌에 램지는 승격팀을 이끌고 1부 리그 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거의 모든 축구팬들과 관계자들이 램지의 입스위치를 강등 1순위 후보로 꼽았지만 그것을 통쾌하게 뒤집는 쾌거였다.[11]

그러나 다음 해의 입스위치 타운은 다시 2부 리그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17위로 리그 순위가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유러피언컵에서도 당해 대회 챔피언이 될 AC 밀란에게 합계 2대4로 패해 2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입스위치 타운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램지는 표류하던 잉글랜드 대표팀의 대표팀 감독 제안을 받았지만 입스위치 타운이 흔들리던 상황이라 램지는 대표팀 감독 선임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램지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1963년 5월 1일, 잉글랜드의 두 번째 감독으로 취임했다. 물론 램지가 떠난 입스위치 타운은 1부 리그에서 더 버티지 못하고 1965년에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2.3.2. 국가대표팀

램지의 취임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은 세기의 경기와 잇단 월드컵에서의 광탈로 축구 종주국의 명예 따위는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가 꺼내져 기름에 절여진 후 불에 활활 타버린 꼴이 되었다. 1962년 월드컵에서까지 잉글랜드는 브라질에 패배했고 램지의 스승이던 월터 윈터보텀 감독은 언론의 공격을 받다가 불명예스럽게 사임했다. 그런데 1966년 월드컵 자국에서 열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 월드컵에서의 좋은 성적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떤 단체의 리더로써 가장 어려운 것은 과거의 영광만 남아있음에도 그 영광에 취해 있는 채 정신은 못 차리는 몰락한 단체를 다시 일으키는 것. 남은 시간은 3년, 알프 램지는 이런 일을 떠맡았다.

램지는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대표팀 관리에 대한 전권을 요구했다. 전임 감독 윈터보텀 시절에는 이사회가 선수 선발과 전술 선택 등의 권한을 일부 가지고 있었지만 램지는 이를 개혁했고 최초의 대표팀 전임 감독이 되었다. 램지의 취임사는 간단했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다!

램지가 대표팀 감독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비 무어 주장 선임이었다.
2.3.2.1. 유로 1964
하지만 램지의 잉글랜드는 첫 메이저 대회였던 1964년 유로에서 프랑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1차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2.3.2.2. 1966년 월드컵
잉글랜드 FIFA 월드컵에서의 연이은 실패에 이어 월드컵을 2년 앞두고 치러진 유로에서까지 예선 탈락을 해 버렸으니, 축구종가의 자존심따위는 옛날에 불에 완전히 타버리고 그나마 남은 잿가루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까지 떨어졌다. 램지의 취임사는 공염불과 비아냥의 대상으로밖에 들릴 수 없었다. 정말로 초비상이 걸렸다.

잉글랜드는 개최국 자격으로 지역 예선을 면제받았고 그 시간에 램지는 잉글랜드의 좋은 성적을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그래도 당시 잉글랜드의 선수진에는 찰튼 형제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 등 각자의 포지션에서 당대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다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선수들은 월드컵 무대에서 통할 수준이었지만 딱 한 포지션이 영 부실했다. 그게 바로 윙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전설의 윙어 스탠리 매튜스 톰 피니를 이을 만한 재능들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 중에 그래도 쓸만한 윙어는 존 코넬리 뿐이었다. 그래서 램지는 고민 끝에 자신이 입스위치에서 쏠쏠하게 써먹었던 '윙어가 없는' 포메이션을 대표팀에도 적용시켰다. 어느 포지션에 배치되더라도 1인분은 거뜬히 해내던 바비 찰튼은 기존의 왼쪽 윙어 자리에서 중앙 미드필드로 옮겼고, 좌우 풀백인 레이 윌슨 조지 코헨이 윙어처럼 공격에 가담하도록 전술을 짰다. 측면으로 향하는 롱패스보다는 중앙에서의 허리 싸움을 강조하는 전술이었다. 이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기존의 윙어 대신 마틴 피터스 등의 중앙 미드필더들을 중용했다.

예선 우루과이전에서 램지는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와 존 코넬리를 윙어로 쓰고 스트라이커 지미 그리브스 로저 헌트를 동시에 기용하는 변칙적인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빈 공간이 생길 오른쪽 진영은 앨런 볼이 미드필더와 윙어의 역할을 겸하면서 훌륭하게 메웠다. 노비 스타일스와 바비 찰튼이 수비 가담을 열심히 해줬고 그 덕에 바비 무어&잭 찰튼의 센터백 콤비는 엄청나게 공격가담을 자주 할 수 있었다. 우루과이전에서는 0:0으로 비기면서 객관적으론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웸블리에서 1945년 종전 이후 최초의 무득점 무승부 경기로 기록되었다.

잉글랜드는 그래도 이안 캘러한을 기용하며 남은 두 경기에서 승리를 거둬 조 1위로 예선전을 통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악재가 터졌다. 주전 스트라이커 그리브스가 프랑스전에서 부상을 입어 남은 월드컵 일정에 출전하기 힘들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노비 스타일스는 특유의 터프한 플레이로 인해 FA의 비난을 받았다. 스타일스를 스쿼드에서 제외시키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램지는 스타일스를 스쿼드에서 제외하려면 그 전에 자신을 먼저 자르라고 강력히 맞섰다.

8강전의 상대는 아르헨티나. 여기에서는 4-4-2로 윙어를 두지 않고 캘러한 대신 앨런 볼을 다시 스쿼드에 넣어 중앙 미드필더를 3명을 두는 전술을 사용했다. 아르헨티나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고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4강에 진출했다.

4강전의 상대는 이변의 주인공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에우제비우가 버티고 있었다. 그를 막기 위해 노비 스타일스를 보냈고, 이 결정은 성공을 거두었다. 에우제비우를 페널티 킥 골 하나로 막는데 성공, 잉글랜드는 결승에 진출했다.

종가의 심장에서 쥘 리메 트로피를 들어올리기 위해 남은 시합은 단 한 번. 그리고 그 상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앙금이 많이 남은 서독이었다. 이 시합을 앞두고 램지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부상으로 남은 경기에 출전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져서 대체 카드 정도로 분류했던 그리브스가 예상보다 빠른 회복세를 보여 결승전 출전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온 것이었다. 이름값으로는 그리브스가 허스트보다 훨씬 위였기 때문에 그리브스를 선발 명단에 올려야 한다는 요구가 쇄도했지만 막 부상 회복을 마친 그리브스가 토너먼트에서 지금까지 허스트가 해온 이상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램지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허스트를 결승전에 내보내기로 결정했고 잉글랜드는 연장혈투 끝에 서독에 4대2 승리를 거뒀다. 허스트는 해트 트릭으로 램지의 믿음에 확실하게 보답했다.
램지는 내가 본 어떤 감독보다도 손끝에서 프로페셔널했고 선수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램지는 승자였으며 그가 없었다면 잉글랜드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을 선사했습니다.
바비 찰튼
당신이 해냈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노비 스타일스

램지는 이 우승으로 잉글랜드 전체에 명성을 드높였고, 1967년 월드컵 우승의 공로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에 서임되었다.[12]
2.3.2.3. 유로 1968
알프 램지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다음 유로에서 처음으로 잉글랜드를 본선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본선에 진출한 잉글랜드는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어수선한 경기를 펼친 끝에 아쉽게 패배했다. 이 경기에서 앨런 멀러리가 유고슬라비아 선수의 사타구니를 걷어차 퇴장을 당했고 벌금 50 파운드를 물게 되었다. 그러나 램지는 그 벌금을 대납하면서 보복을 해줘서 기쁘다고 밝혔다.

그래도 잉글랜드는 3, 4위전에서 소련을 2대0으로 꺾고 3위를 차지했다. 이것이 결승에 진출한 유로 2020 전까지 유로 대회 역사상 잉글랜드 대표팀 최고의 성적이었다.[13]
2.3.2.4. 1970년 월드컵 그리고 그 이후
1970년 월드컵 잉글랜드는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그런데 대표팀 주장 바비 무어가 귀금속을 훔쳤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불운의 전주곡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어가 금방 풀려난 것이었다.

예선에서 펠레가 이끄는 역대 최강의 브라질을 만나 아쉽게 패배한 것을 제외하면 램지의 잉글랜드는 나무랄 데 없는 경기를 펼쳤고 8강에서는 서독과 리턴 매치를 펼쳤다. 그런데 시합을 앞두고 주전 골키퍼 고든 뱅크스 식중독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는 악재가 터졌다. 하지만 예상외로 잉글랜드는 서독을 상대로 후반 4분에 터진 마틴 피터스의 골을 포함해서 2대0으로 앞서 나갔다. 여기에서 램지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4강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체력 안배를 위해 팀의 에이스 바비 찰튼을 뺀 것이다. 찰튼을 따라다니던 서독의 수비형 미드필더 프란츠 베켄바워는 자신의 마크맨이 없어지면서 봉인이 풀렸고 서독의 공격력은 물이 올랐다. 결국 뱅크스도 없던 잉글랜드는 서독의 공격을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 연장전에서 역전패를 당하며 서독에게 복수를 허용하고 말았다. 램지는 피터 보네티의 실수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램지의 잘못된 교체 결정에도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뒤이은 유로 1972 1974년 월드컵에서 램지는 잉글랜드의 예선 탈락을 막지 못했다. 1974년 월드컵 예선 탈락은 특히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지역 예선 탈락이었으며 월드컵 우승으로 콧대가 다시 쓸데없이 높아진 FA와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자기네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조차 아예 밟을 수 없다는 그 결과를 용납하지 못했다. 램지를 해임시키라는 여론이 폭발했다. 알프 램지라는 고인물이 잉글랜드 대표팀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시대에 뒤떨어진 알프 램지는 더 이상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의 자격이 없다! 램지는 자신을 교수형에라도 처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속행된 30분간의 회의를 거쳐 1974년 5월 1일에 그렇게 해고당했다. 당시 램지의 해고 소식을 접한 잉글랜드 축구인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고 일부는 이 결정에 대해 FA에 오래도록 원한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잉글랜드의 가장 성공적인 감독은 해롤드 톰슨(당시 FA 회장)의 악의가 없었다면 영웅에 걸맞은 유산을 가졌을 것이다.
레오 맥킨스트리(영국의 언론인이자 작가)
영국 축구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일이다.
앨런 볼

하지만 당시 FA와 잉글랜드의 축구팬들은 대표팀의 이러한 졸전의 원인이 램지의 무능만으로 인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램지는 다시 살아난 잉글랜드 대표팀의 발전을 가로막는 고인물이자 돌감독이 아니라 그나마 추락의 속도를 늦추고 있던 낙하산이었고 램지의 해임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매달려 있는 낙하산의 줄을 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된 순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4. 이후

램지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해고당한 후 입스위치에 아내와 함께 낙향했다.

18개월 정도 조용히 살던 그는 1976년 버밍엄 시티 FC의 이사회로 복귀했다가 1977년 9월, 버밍엄 시티의 감독 윌리 벨이 사임하자 램지가 팀이 후임자를 찾을 때까지의 임시 감독이 되는 조건으로 버밍엄 시티 감독직을 맡었다. 당해 11월 초에 램지는 마음을 바꿔 버밍엄 시티의 감독이 되었지만 1978년에 있었던 트레버 프랜시스와의 갈등으로 버밍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프랜시스는 야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클럽을 떠나고 싶다고 인터뷰를 한 혐의로 벌금을 부과받았고 버밍엄의 보드진은 프랜시스를 이적 명단에 올리라는 램지의 추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3일 후, 서포터들의 반발을 우려해 이적 명단에서 프랜시스가 빠지자 램지가 사임을 통보했다. 클럽은 통지 기간이 끝나기 전에 램지의 사임을 발표했으며 일부 보도에서 그의 사퇴는 코벤트리 시티에 0대4로 패한 것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램지는 프랜시스와의 갈등설을 재빨리 부인하면서 자신은 "누구에게도 공격을 가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이 일이 있고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노팅엄 포레스트로 매각되었으며, 이때 잉글랜드 축구계 최초의 1백만 파운드 이적료가 기록되었다.

1977년 2월, ITV의 온 더 볼(On the Ball)에서 그는 잉글랜드가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경기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선수들은 개별적으로 형편없고 팀은 완전히 무질서하다고 묘사했다. 자신의 후임자인 돈 레비에 대해 동정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램지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감독직에 있는 그는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직책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레비가 동정심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예전에 비해 부드러워졌다.

램지는 파나티나이코스 FC에서 기술 고문을 맡기는 했지만 이것도 단기간으로 끝났다. 이후에 그는 축구 감독 자리에서 은퇴하고 입스위치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가끔 칼럼을 기고했다. 램지는 1998년 6월 9일, 뇌졸중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했고 치매도 앓으며 고생했다. 3개월간 입스위치의 일반 병실에 입원해있던 램지는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1999년 4월 28일, 전립선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

선수 시절에는 다소 느리기는 했지만 수비적인 능력과 단단한 육체, 정확한 패스 능력을 갖춘 수비수였다. 그리고 특유의 냉정함으로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패스 능력과 냉정함을 겸비한 선수답게 램지는 페널티 킥 능력도 좋아서 세기의 경기 당시 페널티 킥을 처리하여 성공하기도 했다. 또한 축구 지능과 학구열이 매우 뛰어난 선수이기도 했다.
램지는 게임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고 싶어했어요. 저는 알프 램지만큼 학습 속도가 빠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액면 그대로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감독의 결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에 감독이 꿈이었던 유형의 선수였습니다. 그의 게임에는 그게 있었어요.
시드니 칸(램지의 사우스햄튼 시절 구단 트레이너)
램지는 매우, 매우 좋은 축구 지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그는 자신이 있던 곳에서 뛸 수 없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는 가장 민첩한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램지는 뛰어오를 만한 키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중에서 강점을 보이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는 괜찮은 태클러이자 훌륭한 패서였습니다. 그는 게임을 아주 잘 읽었고 그것이 그의 큰 자산이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 위대한 감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에요.
(He had a very, very good football brain. If he hadn't, he would not have played where he did, because he was not the most nimble of players. Not particularly brilliant in the air, because he did not have the stature to jump up. But he was a decent tackler and a great passer. He could read the game so well, that was his big asset. That was why he became such a great manager.)
에릭 데이(사우스햄튼 시절 램지의 팀 동료)

3.2. 감독

2008년 데이비드 레이시(David Lacey)는 더 가디언에서 탄탄한 수비 기반을 중시하는 파비오 카펠로를 램지와 비교하면서 문제를 식별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감독으로서 램지는 잉글랜드 출신으로는 역대 최고의 명장이다. 현재까지 잉글랜드 대표팀을 맡은 누구도 램지의 승률[14]과 국제 대회 성적을 모두 비슷하게 거둔 사람이 없다.[15].

선수 램지보다는 감독 램지가 잉글랜드는 물론 세계 축구계에서 더 큰 존경을 받는다. 이전에 포트맨스 워크(Portman's Walk)였던 알프 램지 경로(Sir Alf Ramsey Way)는 입스위치 타운의 홈구장 포트먼 로드 경기장 북쪽에 위치한 도로이다. 램지의 입스위치 타운 감독으로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램지의 사망 직후 그의 이름이 헌정되었다. 2000년에는 포트먼 로드의 포트먼 로드의 북쪽 스탠드와 코볼드 스탠드 모퉁이에 있는 포트먼 로드(Portman Road)와 알프 램지 경로 모퉁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입스위치 타운의 팬인 션 살터(Seán Salter)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입스위치 타운 서포터즈 클럽에서 의뢰한 것이다.

2012년 3월 31일, 포트먼 로드의 남쪽 스탠드는 알프 램지 경 스탠드(Sir Alf Ramsey Stand)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09년에 파비오 카펠로는 필립 잭슨이 조각한 램지의 동상을 웸블리에 세웠다. 이는 선수 입장 터널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지 코헨은 이 동상을 보며 "모든 선수가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라고 평을 남겼다.

램지는 인디펜던트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국 감독 10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램지의 경영 스타일은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지는 못한다. 역사가 프랭크 맥린(Frank McLynn)에 따르면, "그는 단 한 번의 과분한 승리에 명성을 얻은 유머 없는 지루하고 숨막히는 전술가였다."라고 평했다.

4. 사생활

램지는 1951년 12월 10일, 리타 노리스(Rita Norris)와 결혼했다. 그런데 리타는 아서 노리스(Arthur Norris)와의 결혼으로 인해 몇 년 동안 램지와의 결합이 지연되었다. 당시 법률에 따르면 리타는 1947년 별거 후 3년이 될 때까지 아서와 합법적인 이혼을 할 수 없었으며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도 없었다. 램지는 토트넘 구단과 동료들조차 결혼식 며칠 전까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을 정도로 관계를 비밀로 유지했다. 리타는 이름을 빅토리아로 바꾸었고 Ramsey는 일반적으로 아내를 "빅(Vic)"이라고 불렀는데, 빅토리아가 이전 결혼에서 얻은 딸 타나야[16]의 좋은 계부였다고 한다.

빅토리아는 2018년 3월, 95세로 사망해서 남편 알프의 곁에 묻혔다.

5. 뒷이야기

램지는 풍만한 소리를 내는 방식(Plumping noise)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안녕하세요 로드니, 잘 지내세요?"였는데 제게 그것은 모두 완전히 헛짓거리였습니다.

6. 어록

승리 팀을 바꾸지 말라[17]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재능을 이런 식으로 쓰다니 유감이다. 다만 우리의 최고의 축구는 상대가 동물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축구를 할 때 펼쳐진다.[18]
너희들은 이미 한 번 이겼다. 이제 나가서 다시 이기고 와라![19]

7. 기록

7.1. 대회 기록

7.1.1. 선수

7.1.2. 감독

7.2. 개인 수상

7.3. 서훈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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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8년 기준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런던주 런던시 대거넘. [2] 출처: 위키백과 [3] 펠레도 생전에 램지처럼 군생활에 대해 좋은 기억이라고 회고했으며 어린이들에게 조언할 때 군대에 가는 것이 좋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4] 현재의 개념으로는 풋볼 리그 챔피언십에 해당한다. [5] 5대1로 사우스햄튼이 플리머스 아가일을 이겼다. [6] 이 전술은 램지가 처음 감독을 맡았던 입스위치 타운에서 일부가 재사용되며 램지와 입스위치 타운은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7] 프리미어 리그를 포함한 잉글랜드 1부 리그에서 현재까지 승격팀이 바로 우승까지 성공한 사례는 1905-06 시즌의 리버풀, 1931-32 시즌의 에버튼, 1950-51 시즌의 토트넘, 1960-61 시즌의 입스위치 타운, 1977-78 시즌의 노팅엄 포레스트까지 총 5번에 불과하다. [8] 이 결승전이 바로 저유명한 매튜스 파이널이다. [9] 이후에 잉글랜드는 매직 마자르에 재도전장을 내밀었고 부다페스트로 원정을 떠났다. 잉글랜드는 그들의 홈에서 똑같이,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스코어로 그들을 이기는 것만이 자신들의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부다페스트 원정 경기에서 1:7로 대패를 당했고 웸블리에서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자부심은 아예 추락한 신세가 되었다. 이 경기는 아직까지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차로 패배한 경기로 남아있다. [10] 현재의 풋볼 리그 1에 해당한다. [11] 선수와 감독으로 승격팀 우승을 모두 달성한 축구인은 알프 램지가 유일하다. [12] 이 우승 하나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보다 높은 등급의 기사작위를 받았다. [13] 1996년 자국에서 열린 유로에서 4강전까지 간 것이 또 있었다. [14] 61.1%. 113경기 69승 27무 17패 [15] 승률 면에서는 파비오 카펠로가 램지를 유일하게 앞선다. 다만 경기 수에서 카펠로는 램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16] Tanaya. 보통 타냐(Tanya)라고 불렸다. [17] 1966년 월드컵 결승전 당시 부상으로 빠졌다가 복귀한 주전 스트라이커 지미 그리브스 대신 토너먼트에서 그리브스의 공백을 잘 메워주던 제프 허스트를 주전 공격수로 선택하면서 남긴 코멘트. 허스트는 결승전 해트 트릭으로 램지의 믿음에 보답했다. [18] 1966년 월드컵 8강 아르헨티나전 이후 승리 소감. 이 발언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동물로 비하했다고 여겨져 아르헨티나인들은 물론 남미인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19] 1966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연장에 들어가기 전 남긴 라커룸 대화. 서독 선수들이 웸블리의 잔디 위에서 누워 쉬는 것을 보고 남긴 대화이다. [20] 램지는2002년에는 감독, 2010년에는 선수로 헌액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축구 명에의 전당에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헌액된 최초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