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캘러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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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캘러한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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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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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캘러한 Ian Callag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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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
이안 로버트 캘러한, MBE Ian Robert Callaghan, M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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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2년
4월 10일 ([age(1942-04-10)]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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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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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선수 ( 윙어, 미드필더 / 은퇴) | |
소속 |
리버풀 FC (1959~1978) →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즈 (1978 / 임대) 스완지 시티 AFC (1978~1981) → 캔버라 시티 FC (1979 / 임대) 코크 유나이티드 FC (1981) 크루 알렉산드라 FC (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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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4경기 ( 잉글랜드 / 1966~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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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리버풀 FC에서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의 지도 아래 붉은 제국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룩한 장본인이다. 리버풀 통산 최다 경기 출장자이기도 하다.2.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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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제국의 터줏대감
1942년 4월 10일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태어난 로컬 보이였던 캘러한은, 어린 시절부터 리버풀 서포터였으며 일찍이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 16세의 나이에 리버풀 스카우터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이후 1959년에 17살의 나이로 리버풀에 정식 계약을 제시받아 안필드에 입성했는데, 당시 리버풀은 빌 샹클리 감독이 새로 부임하여 기존의 나이 든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고 젊고 포텐셜이 뛰어난 선수들을 모집해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재건하고 있던 시기였고 전대 리버풀의 전설 빌리 리델의 대체자를 찾고 있었다. 당시 팀을 떠나기 직전에 있던 리델은 리버풀 리저브 팀에 '능력 이상의 능력을 가진 아이'가 있다며 캘러한을 코치진들에게 추천했고, 샹클리 감독 또한 캘러한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차 위대한 축구 선수가 될 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 유망주였던 그를 스쿼드에 중용하기 시작했다.
캘러한은 18세 생일을 맞은 지 불과 6일 만인 1960년 4월 16일, 브리스톨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르며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리델의 대체자로 측면 미드필더에서 자리잡은 캘러한의 주무기는 왕성한 활동량과 투지, 그리고 사이드 라인에서의 뛰어난 스피드였다. 그는 오른쪽 윙어로서 1961년부터 정규 시즌에 꾸준히 출격해 리그 23경기, 컵 대회 5경기에 출전, 총 28경기를 소화하며 경쟁력이 있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샹클리는 어린 선수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판단 하에 케빈 루이스를 영입해왔었고 루이스 또한 36경기에서 22골을 넣어 주전 자리를 경쟁했기에 캘러한은 성장에 주력해야했다. 이후 리버풀은 젊은 선수들의 활약을 앞세워 2부 리그를 빠르게 정복했고 마침내 기다렸던 1부 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그리고 훈련장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캘러한은 리버풀 스쿼드에 빠르게 자리를 잡아내 1부 리그 무대에서 주전 자리를 쟁취해내기 시작했다. 이에 캘러한의 성장과 샹클리의 훌륭한 지도력에 힘입어 리버풀은 승격한 지 불과 2년 만에 1부 리그마저 재패하는 파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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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리버풀 최초로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한 캘러한 |
캘러한은 그 후 무려 15년 동안 리버풀의 장대한 전성기를 이끌며 핵심 선수로 활약을 이어갔다. 선수 생활 전반부에 그는 오른쪽 윙에서 주로 뛰었고, 로저 헌트, 이안 세인트 존에게 직접적인 어시스트를 제공하는 공격진의 돌격대장이었으나 1970-71 시즌에 부상으로 무릎 수술을 받은 뒤에는 브라이언 홀이 오른쪽 측면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부상 복귀 뒤에는 샹클리가 중앙 미드필더 자리를 제안했고 캘러한은 새로운 포지션과 함께 지속적으로 활약을 이어갔다. 새로운 포지션에서 캘러한이 가진 노련함과 테크닉은 최대로 활용될 수 있었고, 그는 매경기를 중미로 출전해 왕성한 활동량과 엄청난 스태미너를 바탕으로 중원을 지배하며 리버풀의 승승장구를 이끌어냈다. 1974년에는 리버풀 역사상 최초로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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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리그에서 출발해 빅 이어를 들다 |
리버풀에서 1978년까지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안 캘러한은 총 5회의 리그 우승과 2회의 FA컵, 2회의 유러피언컵, 2회의 UEFA컵을 포함해 총 19회의 엄청난 우승 커리어를 이룩해 냈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경기 소화력에 있었다. 그는 1962년 주전 자리를 확보한 이래 무릎 부상을 앓았던 1970-71 시즌을 제외하면 매 시즌 거의 모든 경기를 출장하는 위력적인 내구성을 보여줬다. 심지어 1972-73 시즌과 1973-74 시즌엔 각각 66경기, 61경기를 출장하는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며, 나이가 30대 중반에 이른 시점에서도 40경기 이상을 시즌마다 너끈히 소화하며 리버풀의 살아있는 전설로 군림했다. 이에 샹클리의 후임인 밥 페이즐리 감독 아래에서도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으며 본인의 마지막 시즌에도 41경기에 출장했고, 팀의 유러피언컵 2연패에 기여했다. 캘러한은 리버풀에서 1959년부터 1978년까지 19년 동안 활약하며 통산 857경기를 소화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리버풀의 역대 최다 출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1975년에는 장대한 축구 선수 경력을 인정받아 대영 제국 훈장(MBE)을 수여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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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제국을 만든 남자들[1] |
그러나 30대 중후반에 접어들자 캘러한은 스스로 노쇠화된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마지막 시즌에 많은 경기에 출장하긴 했으나 그레이엄 수네스와 같은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일이 적어짐을 알았다. 이에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 하에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78년, 마침 미국에서 창단한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즈[2]에 임대를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에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경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 20경기를 소화했으며,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는 리버풀을 떠나 전 팀 동료 존 토샥이 감독하는 스완지 시티로 이적하게 되었다. 캘러한은 스완지에서 3년간 활동하며 76경기를 소화했고, 1979년 스완지가 2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이후엔 잠시 오스트레일리아의 캔버라 시티로 임대되어 9경기를 소화하기도 했으며 1981년 코크 유나이티드에도 잠시 몸을 담았다. 이후 캘러한은 같은 해 크루 알렉산드라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1982년, 만 39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위대한 선수 경력은 979경기에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2부 리그에 있던 팀의 유망주에서 시작해 잉글랜드와 유럽을 지배한 위대한 구단의 아이콘으로 불타오른 전설적인 커리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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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러한이 이룩한 위대한 커리어 |
3. 국가대표 경력
리버풀에서 펼친 아이코닉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대표팀과는 연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캘러한은 1966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와의 시범 경기에서 데뷔하여 2-0 승리를 견인하며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 이에 월드컵 스쿼드에도 승선하여 조국의 첫 번째 월드컵 우승에 함께 이름을 남겼으나 대회 본선에서 1경기 출전에 그쳤고, 대회 이후 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의 감독이던 알프 램지가 전통적인 윙어였던 캘러한에게는 맞지 않은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 램지 감독은 1966년 월드컵 우승 감독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며 이후 잉글랜드를 1974년까지 이끌었기 때문에 캘러한은 대표팀 계속해서 기회를 받지 못했다. 램지가 대표팀을 떠난 이후엔 11년만에 대표팀에 뽑힐 수 있었으나[3] 이때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던 지라 2차례 출장에 그쳤다.4. 은퇴 후 말년
캘러한은 대부분의 다른 축구 레전드들과는 달리 은퇴 후 지도자를 맡거나 행정가로 근무하거나 방송계에서 활동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는 가끔 리버풀 구단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시축을 하거나 리버풀 박물관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 팬들과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일 뿐 그 외에는 별다른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2009년 6월 10일,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자 자격으로 10번지에서 열린 메달 수여식에 참석했고, 고든 브라운 총리로부터 메달을 수여받았다.
2013년 5월, 제이미 캐러거가 통산 710경기 출장을 기록한 채 은퇴하자, 캘러한은 "나는 그가 내 출장 기록을 경신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은퇴하다니 참 아쉽다. 그는 살아있는 리버풀 그 자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59~1978)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61-62
- FA컵: 1964-65, 1973-74
- FA 채리티 실드: 1964, 1965, 1966, 1974, 1976, 1977
- 유러피언 컵: 1976-77, 1977-78
- UEFA 컵: 1972-73, 1975-76
- 유러피언 슈퍼컵: 1977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66
5.2. 개인 수상
- FWA 올해의 선수: 1973-74
5.3. 개인 기록
- 리버풀 FC 최다 경기 출전: 857경기
5.4. 서훈
6. 여담
- 857경기라는 경이로운 플레이 타임을 소화하면서도 단 한 장의 카드밖에 받지 않으며, 당대 축구 선수들의 귀감이 되는 베테랑이었다.
- 잉글랜드 대표팀에 1966년 소집된 이후 전술상의 이유로 오랜기간 소집되지 못하다가 1977년에 다시 소집되어 경기를 뛰었는데, 이는 11년 49일만에 다시 소집되어 출장한 것으로 역대 잉글랜드 대표팀 최장 출전 간격 기록이다. 잉글랜드 대표팀과의 인연이 지독히 없었음에도 그가 얼마나 오랜기간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쳤는지를 반증하는 부분.
- 리버풀 최초의 리그 내 올해의 선수 수상자다. 1974년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 리버풀의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경기에 출장했던 선수였으며, 동시에 리버풀의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트로피를 들어올린 선수였다. 밥 페이즐리 아래에서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 빌 샹클리 아래에서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에도 출전한 선수는 캘러한이 유일했다.
[1]
좌측부터 빌 샹클리, 이안 캘러한, 밥 페이즐리
[2]
고든 뱅크스,
조지 베스트도 이 당시 포트로더데일에 합류했다.
[3]
대표팀으로 출장한 이후 11년 49일만에 다시 소집되어 출장했는데 이는 역대 잉글랜드 대표팀 최장 출전 간격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