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리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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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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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 휴즈 (1954~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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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리델 (1955~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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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휠러 (1958~1959) |
빌리 리델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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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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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리델 Billy Lidd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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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윌리엄 비버리지 "빌리" 리델 William Beveridge "Billy" Lidd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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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2년 1월 10일 | |
스코틀랜드 파이프 타운힐 | ||
사망 | 2001년 7월 3일 (향년 79세) |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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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윙어[1], 센터포워드, 미드필더[2], 수비수[3] | |
유스 클럽 |
킹시트 주비닐스 (1936~1937) 로켈리 바이올렛 FC (1937~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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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클럽 | 리버풀 FC (1938~1961) | |
국가대표 | 29경기 8골 ( 스코틀랜드 / 1938~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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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축구인으로, 1940~50년대 리버풀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이자 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 중 하나. 이안 캘러한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별명은 '리델풀(Liddellpool)'.2. 데뷔 이전
빌리 리델은 1922년에 스코틀랜드 던펌린 근처의 작은 마을인 타운힐에서 광부인 제임스 리델과 몽고메리 사이에서 6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한 생활을 했다. 그의 부모는 자식들이 광부 대신 회계사 등의 밥벌이가 될 만한 직업을 원했으나 장남인 빌리는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빌리가 7살 때 부모를 설득하여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때 그에게 축구화를 선물하였고, 이후 학교 팀에서 8살부터 뛰며 축구에 빠져들게 되었다.이후 고등학교 시절에 화학, 영어, 수학, 물리학 등을 배우는 와중, 웨일스 럭비 대표팀 선수였던 로니 분에게 럭비를 배웠으나 럭비 선수를 포기하고 리델은 다시금 축구에 관심을 쏟았다. 아마추어 클럽 로켈리 바이올렛에서 뛰던 리델은 1938년에 해밀턴 아카데미컬, 파틱 시슬 등의 클럽들로부터 오퍼를 받았으나, 리델을 유심히 지켜본 리버풀의 감독 조지 케이가 당시 리버풀 선수였던 맷 버스비의 추천을 받아 리델에게 계약을 제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리델의 부모는 리델이 안정적인 조건을 제시받길 바랬고, 어린 선수에게 필요 이상의 자금을 쓸 수 없었던 리버풀은 1938년 7월 27일, 일단 아마추어 신분으로 입단을 제의하며 리델을 안필드에 입성시켰다.
3. 클럽 경력
아마추어 계약으로 리버풀에 입단한 리델은 곧바로 구단 리저브 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구단은 1년 뒤인 1939년, 주급 3파운드의 프로 계약을 제시했다. 리델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의 부모님을 위해 리버풀은 리델에게 회계학 공부를 제공하며 안전한 숙소와 더불어, 구단 보드진에서 시간제 회계사로 일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덧붙여야 했다. 그러나 리델의 리버풀 커리어 시작은 쉽지 않았다. 리저브 경기에서 리델은 부상을 입어 재활을 해야했으며, 회복 이후 고대하던 1군 진입을 눈앞에 둔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의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리버풀에서의 비공식전 데뷔는 1940년 1월 1일 크루 알렉산드라와의 경기에서 2분만에 득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으나 이후 전쟁 중이던 1940년부터 1946년까지 리델은 공군에 입대한 상태로 지역 팀과 축구 협회가 소집하는 리그 대표팀에서 뛰며 비공식적으로 실력을 갈고 닦아야만했다. 그래도 해당 기간에 선수로서 발전을 이루며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도 소집되는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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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전쟁이 끝난 뒤 기다렸던 리델의 리버풀 공식 데뷔는 FA컵 3라운드에서 이뤄졌다. 그는 1946년 1월 5일 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해 30분만에 득점을 기록하며 축포를 터트렸다. 리델은 1946-47 시즌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공군에서 제대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즌 전 북미 투어에 동행하지 못했고, 프리시즌 훈련과 시즌의 첫 두 경기를 놓쳤지만 9월 7일 첼시 FC와의 경기에 공식적으로 리그에 데뷔했고 2골을 득점하며 확고한 존재감을 알렸다. 리델은 첫 시즌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리버풀의 1946-47 시즌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왼쪽 윙어로 34경기에 출전해 7골을 넣었고, 팀의 주포였던 알버트 스터빈스, 잭 발머에게 수많은 도움을 기록하며 공격을 이끌었다.
첫 번째 리그 우승 이후, 리버풀은 안정적인 경기력을 펼치지 못했고 다음 시즌 중위권으로 추락했지만 리델은 11골을 뽑아내며 활약을 이어갔다. 그는 구단의 두 번째 북미 투어부터 상당한 경기력을 뽐내며 리버풀의 핵심 선수로 떠올랐고, 그 다음 시즌엔 왼쪽 윙 뿐만 아닌 왼쪽 풀백과 최전방 포워드, 오른쪽 측면자리도 소화하는 멀티성을 보여주며 팀의 이곳 저곳을 메우는 활약을 펼쳤다. 이후 1949-50 시즌에는 FA컵 7경기에 모두 출장해 결정적인 골들을 넣으며 팀을 FA컵 결승으로 이끌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했고, 고통을 참이며 경기를 계속 소화했으나 리델의 부상으로 팀에 속도와 공격성이 사라지자 공격력이 무뎌져 팀은 결국 아스날 FC에게 2-0으로 패했다. 하지만 해당 시즌 모든 대회에서 20골을 올리며 리버풀에서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인 리델은 리버풀로 돌아왔을 때 수천 명의 서포터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시즌이 끝난 뒤 리델은 콜롬비아로의 이적을 제의받기도 했는데[4], 그는 구단에 대한 충성심과 가족들을 이유로 유혹적인 제안을 거절했다.
1950년대로 진입하면서 리버풀은 조지 케이 감독이 건강 악화로 팀을 떠나며 침체기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델은 꾸준하게 활약을 펼쳤고, 1951-52 시즌엔 40경기에 나서 19골을 득점하는 등 리버풀의 스타 플레이어다운 위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리델의 활약에도 팀은 1953-54 시즌 2부 리그로의 강등을 면하지 못했고 최악의 부진에 빠졌다. 그러나 리델은 강등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팀의 추락에도 절대 팀을 떠나지 않음을 천명하였고,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낮은 위치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선수 생활 내내 그는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팀 내에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고 최고라는 이유로 빈둥거리지도 않았으며 타의 모범이 되는 프로 정신으로 구단과 팀 동료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선수로 거듭났다. 리델은 2부 리그 시절 중앙 공격수 자리로 주 포지션을 변경하여 1954-55 시즌 40경기에서 30골을 넣었고, 해당 시즌 FA컵에서는 에버튼을 만나 4-0 승리를 이끌며 팀의 자존심을 지켰다. 1955-56 시즌에는 로리 휴즈의 뒤를 이어 주장직을 맡았고 2부 리그 상위권으로 진입하며 돈 웰시가 경질된 뒤 부임한 필 테일러 감독과 함께 팀의 내실을 다지는데에 주력했다. 리델은 이 시즌 총 32골을 기록하며 팀의 절대적인 존재로 떠올랐고 그 다음 시즌에도 21골을 기록하며 구단 최고의 공격수로 자리를 지켰다. 1957-58 시즌에는 11월에 엘리샤 스콧이 달성했던 430경기 리그 출장을 뛰어넘어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58-59 시즌에 그가 서서히 커리어 말년에 진입하면서는 출장 횟수가 적어지기 시작했고 그의 포지션 또한 후방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리델은 이 때 뉴 브라이튼의 이적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팀에 계속 남아 헌신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리델은 1959년 3월에 466번째 리그 경기에 출전하며 머지사이드 축구사 리그 통산 최다 출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1959-60 시즌, 필 테일러 감독이 물러나고 빌 샹클리 감독이 리버풀에 부임하면서 팀의 역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리델은 당시 부상을 갖고 있어 샹클리호에서 곧바로 출전하지는 못했으나 부상 복귀 이후 선발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샹클리는 1960-61 시즌을 시작으로 팀을 완전히 리빌딩하기 시작했고, 리델의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샹클리는 당시 18세였던 이안 캘러한을 리델 대신 투입하여 팀을 꾸려갔고, 리델은 해당 시즌 사우스햄튼 FC와의 마지막 리그 경기에 출장하며 후에 또 다른 전설이 되는 소년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리버풀은 리델이 보여준 22년간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과의 자선 경기를 개최했고, 리델은 자신이 리버풀 생활을 시작한 리저브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리버풀 마지막 경기는 1961년 4월 29일 블랙번 로버스를 상대한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1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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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리그 우승과 그 이후의 침체기를 이끌며 장대한 기록들과 위대한 전성기를 보낸 리델은 구단과 팬들의 무주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당시 리버풀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상징하는 리델풀이라는 별명은 그의 전설적인 리버풀 커리어를 상징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리델은 리버풀에서 득점한 최고령 선수(38세 55일)로 남아있으며, 이안 러쉬(346골), 로저 헌트(286골), 고든 호지슨(241골)에 이어 통산 득점 4위에 랭크되어 있다.
4. 국가대표 경력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리며 스코틀랜드 국가대표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전쟁 기간 중의 비공식 경기를 포함에 다수의 국제 경기를 일찍이 치렀다. 1946년 5월 15일 스위스와의 경기에서는 첫 번째 공식 경기 출장을 달성했으며, 대표팀에서 주로 왼쪽 윙어 포지션을 맡아 당대 주축으로 활약했다.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의 결정에 따라 대표팀이 아쉽게도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에 참가하지 않으며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참가했으나, 당시 앤디 비티 감독과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와의 선수 선발 갈등 끝에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이 뒤따랐다. 그러나 갈등이 봉합된 이후로는 계속해서 대표팀에 선발되어 뛰었으며,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명경기를 연출하며 스코틀랜드 팬들의 사랑을 얻었다.이후 리델은 1947년과 1955년에 유럽 연합 대표팀을 상대하기 위해 영국 연합 축구대표팀에도 차출된 바 있는데 두 차례의 친선 경기에 모두 선발된 선수는 스탠리 매튜스와 리델이 유이했다.
5. 은퇴 이후
1961년을 끝으로 리버풀을 떠난 뒤에도 리델은 죽을 때까지 리버풀에 거주했다. 리델은 1951년 부친이 타계하자 어머니를 포함 그의 아내와 쌍둥이 아들들이 머지사이드에 머무르도록 했다. 그는 1958년부터 리버풀 지역 평화 재판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리버풀 에코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앨더 헤이 아동 병원에서 라디오 DJ로 일했고, 지역 청소년 조직에서 몸을 담고, 감리교 주일 학교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등 사회를 위한 봉사를 이어갔다. 비록 그는 종교인으로 담배와 술을 금했으나 주위 사람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강요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며, 주위 이웃들을 위한 헌신으로 여생을 살았다. 1961년 은퇴 이후 1984년까지 리버풀 대학교에서 재정 관리일을 돕기도 했다. 이후 말년에는 '나의 축구 이야기'라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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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당시 밥 페이즐리 감독이 이끄는 선수진들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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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전설적인 리버풀의 레프트 윙 존 반스와 함께 |
리델은 축구 감독직에는 욕심이 없었지만, 주주로서 리버풀의 이사가 되고 싶다는 애정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사 선거에서 여러차례 낙선하여 결국 리버풀 보드진에 합류하지는 못했으며, 1967년 페렌츠 푸스카스 등이 참가한 지역 친선 경기에 참가하는 등 축구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그는 이후 리버풀 FC 서포터즈 클럽의 회장이 되기도 하는 등 평생을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고, 이후 투병 끝에 병세가 악화되자 양로원에 거처를 옮겼다가 2001년 7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5] 2002년, 전 리버풀 리저브 선수 지미 롤페는 리델이 생전 착용한 것으로 알려진 유일하게 남은 11번 셔츠를 안필드 내 리버풀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2004년 11월 4일, 리델의 아내 필리스와 그의 후배 이안 캘러한은 박물관 내 리델의 기념 명판을 공개했다. 2008년에는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올라갔으며, 리델의 고향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스포츠 단지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38~1961)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46-47
-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38~1955)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50-51
6.2. 개인 기록
- 리버풀 FC 최고령 득점: 38세 55일 (1960년 3월 5일, vs 스토크 시티 FC)
7. 여담
- 리델의 부모님이 그의 미래를 걱정해 첫 계약 조건에 회계사 업무를 포함시키길 원했기 때문에 구단에 입단한 이후 팀의 회계사 업무를 보기도 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엔 영국 공군에 자원하였고, 처음엔 조종사가 되고 싶었으나 수학에 자신이 있어 항해사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훈련 도중 치러진 친선 리그 축구 경기에서 다리가 부러져 공군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이후 캐나다로 건너가 중앙항법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결국 정식 항해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617 비행대대에 배치되어 연합군 병사들을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수송하는 업무를 맡았다.
- 팀에 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인 선수임과 더불어 구단 회계사로써의 일뿐만 아니라 음주를 안 하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수많은 자선활동을 한 데다가 심지어는 한 병원의 라디오 DJ로도 활동하여 당대 팬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단순히 축구 선수일 뿐 아닌 지역을 상징하는 매우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 1960~70년대에 리버풀 FC에서 활약하며 실질적으로 리델의 대체자였던 역대 리버풀 최다 출장자 이안 캘러한도 어릴적부터 리델을 우상으로 꼽아왔는데, "내 생각엔 빌리 리델과 케빈 키건, 케니 달글리시가 최고의 선수이다. 그러나 나는 리델을 다른 두 명보다 더 위대한 선수로 꼽고 싶다."라고 리델에 관한 존경심을 언급한 바 있다.
- 은퇴 이후의 언급에 의하며 1950년 콜롬비아 리그로의 이적 오퍼에 대해 사실 상당한 유혹을 느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46년에 아내와 결혼했고, 쌍둥이를 출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은 쉬웠다고 한다.
- 리델의 말년에 팀에 부임한 빌 샹클리는 그를 두고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빠르고 강력하며 두 발과 머리에서 나오는 슈팅은 총에서 발사된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화강암처럼 딱딱했다. 엄청난 선수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 리델의 은퇴 기념 자선 경기로 모인 6,340파운드의 모금으로 리델은 자택을 구입했다고 한다.
- 리델은 선수 시절 굉장한 멀티 플레이어로 유명했는데, 그는 리버풀에서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필드 포지션을 소화한 바 있었다.
- 은퇴 후 리델은 '리델풀'이라는 별명을 두고, 자신에게 과분한 별명이라며 자신은 팀을 이끌고 간 적이 없다는 겸손한 답변을 남기기도 했다.
[1]
주로 레프트 윙어였다.
[2]
중앙 미드필더도 소화했다.
[3]
측면 수비수로도 뛰었다.
[4]
당시 콜롬비아 리그는 후에
레알 마드리드의 초창기 전성기를 이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엑토르 리알 등의 선수들이 뛰던 상당히 유망한 리그였다.
[5]
리버풀 전 감독인
조 페이건과 구단의 전설적인 스카우터였던
톰 손더스가 사망한 지 일주일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