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날드 맥킨리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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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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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맥킨리 Donald McKinl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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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출생 |
1891년
9월 16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브룸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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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9년
9월 16일 (향년 68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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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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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선수 ( 풀백, 미드필더 / 은퇴) | |
소속 |
뉴턴 빌라 FC (1909~1910) 리버풀 FC (1910~1928) 프레스콧 케이블 FC (1929~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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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2경기 ( 스코틀랜드 / 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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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선수. 20세기 초 리버풀 FC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2. 선수 경력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브룸하우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라나크셔의 뉴튼 광산 마을에서 자란 맥킨리는, 10대 당시 지역 클럽인 뉴턴 스위프트, 러더글렌 우드번, 뉴턴 빌라 등을 거치며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1910년 톰 왓슨 당시 리버풀 FC 감독에 눈에 띄어 잉글랜드 무대를 밟으며 본격적으로 프로 축구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1910년 리버풀에 합류한 맥킨리는 곧장 리버풀에 적응하여 훌륭한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리버풀에는 맥킨리와 어린 시절 친구였던 골키퍼 케니 캠벨이 있었고, 맥킨리의 안필드 커리어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맥킨리는 리버풀에서 다년간 든든한 좌측 풀백으로 활약하며 명성을 키워갔고, 고전적인 수비수들이 대다수였던 당대 축구에서 유니크하게 오버래핑을 즐긴 공격적인 풀백으로 이름을 날렸다. 스쿼드 내에서는 리더십도 인정받아 1921년부터 팀의 주장직을 맡았고, 다방면에서 중추적인 역할도 해냈다. 맥킨리의 리더십 아래 리버풀은 1921-22 시즌과 1922-23 시즌에 리그 2연패를 달성하며 초창기의 전성기를 어어갔고, 맥킨리는 리버풀에서 약 19년을 뛰면서 총 393경기에 출전하였다. 이에 그는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주장 중 하나이자 리버풀 역사의 위대한 초석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 당대 리버풀에서는 좌측 풀백 에프라임 롱워스와 절륜한 좌우 풀백 파트너십을 이루며 잉글랜드 최고의 풀백 듀오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전성기를 넘기는 시점에서는 윙과 중앙 미드필더를 오가는 다양한 포지션을 수행하며 리버풀에 오랜 기간 헌신하였고 1929년 영광스러운 안필드 커리어를 마치고 프레스콧 케이블에서 선수 말년을 보냈다.
3. 국가대표 경력
1922년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활약한 바 있다.4. 기록
4.1. 선수
- 리버풀 FC (1910~1929)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21-22, 1922-23
5. 여담
- 1910년에 함께 입단한 잉글랜드 출신의 우측 풀백 에프라임 롱워스와 함께 당대 최고의 좌우 풀백 듀오로 불렸다. 맥킨리와 롱워스는 당대 축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풀백들로, 당시 팀의 중추이자 팀의 주장단이기도 했는데, 약 90년 뒤인 2018년에 리버풀에는 또 다른 잉글리시-스코티시 풀백 듀오,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와 앤디 로버트슨이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잉글랜드 출신의 우풀백 아놀드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좌풀백 로버트슨 또한 리버풀의 중추이자 팀 리더로 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