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브래드쇼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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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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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브래드쇼 Harry Bradsha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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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
토마스 헨리 브래드쇼 Thomas Henry Bradsha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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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3년
8월 24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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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9년
12월 25일 (향년 26세)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구 토트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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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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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선수 ( 스트라이커, 윙어 / 은퇴) | |
소속 |
노리치 빅토리아 (1891~1893) 리버풀 FC (1893~1898) 노리치 빅토리아 (1898) 토트넘 홋스퍼 FC (1898~1899) 템즈 아이언웍스 FC (18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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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경기 ( 잉글랜드 / 18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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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적의 前 축구 선수. 초창기 리버풀 FC에서 활약하였다.2. 클럽 경력
리버풀에서 태어난 브래드쇼는 1891년 노리치 빅토리아에 입단하여 축구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이후 1893년 10월,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디비전 2에서의 첫 시즌을 보내고 있던 리버풀에서 센터 포워드로 기용된 그는, 아스날 FC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전에서 데뷔골까지 기록하며 안필드 커리어의 포문을 열었다. 1893-94 시즌 그는 14경기에서 7골을 득점했고, 팀의 디비전 2 우승 및 뉴턴 히스[1]와의 승강 플레이오프 승리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후 풋볼 리그 디비전 1에서는 전 경기에 출장해 17골을 득점하여 팀 내 최다 득점을 올렸으나, 팀은 다시 디비전 2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이 시즌 이후 브래드쇼는 영국 내에서 주목받는 유망주 포워드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895-96 시즌에는 팀 내에서 레프트 윙을 맡아 포워드진에서의 다재다능한 활약을 선보였고, 12골을 득점하여 팀을 다시 디비전 2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1898년까지 약 5년간 리버풀 선수로서 총 138경기에 나서 51골을 득점했으며, 초창기 리버풀이 풋볼 리그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친 선수 중 하나로 알려졌다. 구단의 초기에 대들보같은 역할을 해준 활약을 인정받아 이에 이후 리버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1898년에는 리버풀을 떠나 잠시 친정팀인 노리치 빅토리아로 돌아갔다가 토트넘에 입단했다. 토트넘에서 그는 즉시 주전 윙어로 자리잡아 52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득점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런던 동부에 위치한 템즈 아이언웍스로 다시 무대를 옮겼고 후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가 되는 이 구단에서 그는 즉시 주장으로 임명되어 커리어를 이어갔다. 하지만 1899년 10월 7일, 베드민스터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발에 머리를 차이는 부상을 입어 그는 심각한 상황에 빠졌고, 결국 이후 몇 경기를 더 치렀지만 끝내 몸 상태가 악화되어 이른 나이에 커리어를 종료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1899년 12월 25일, 부상의 후유증[2]에 의해 향년 2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후 1900년 4월 2일, 토트넘과 템즈 아이언웍스는 그의 아내와 두 명의 어린 자녀들을 위해 자선 경기를 열기도 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897년 2월 20일, 리버풀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고 이후 아일랜드와의 경기에 출전했다. 이에 리버풀 선수로서 국제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다.4. 기록
4.1.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893~1898)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893-94, 1895-96
4.2. 개인 기록
- 리버풀 FC 최초 국가대표 경기 출전
[1]
현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
뇌출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