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웰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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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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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웰시 Don Wel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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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
도날드 웰시 Donald Wel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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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1년 2월 25일 | |
잉글랜드 맨체스터 | ||
사망 | 1990년 2월 2일 (향년 78세) | |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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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선수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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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토키 유나이티드 FC (~1935) 찰턴 애슬레틱 FC (1935~1947) |
감독 |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47~1951) 리버풀 FC (1951~1956) AFC 본머스 (1958~1961) 위컴 원더러스 FC (1962~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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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3경기 ( 잉글랜드 / 1938~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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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찰턴 애슬레틱 FC에서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냈고, 은퇴 이후에는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리버풀 FC, AFC 본머스, 위컴 원더러스 FC의 감독직을 역임했다.2. 선수 경력
1935년 이전까지는 토키 유나이티드 FC에서 활약했고 이후 3,250 파운드의 이적료로 찰턴으로 이적했다. 웰시는 전 포지션을 두루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곧 찰턴의 주장이 되었고, 찰턴을 3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연속 승격 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찰턴은 웰시의 활약에 힘입어 1946년과 1947년 연속으로 FA컵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는데, 1947년에는 번리 FC를 꺾고 주장으로서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도중에도 그는 찰턴의 선수로 종종 활약했는데, 당시 리버풀 FC의 객원 선수로도 뛰었던 특이한 경력이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찰턴의 정식 선수로 복귀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도 뽑힌 바 있는데,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총 8차례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했다. 이 중 3경기가 공식 경기였으며, 비공식 경기까지 포함하여 웰시는 9골을 득점했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이 끝난 후 웰시는 1947년 11월, 36세의 나이로 브라이튼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웰시의 브라이튼은 1947-48 시즌에 3부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웰시는 그 후 2년 동안 팀을 이끌어 리그 6위와 8위로 성적을 회복하며 팀을 수습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던 1951년 3월 5일, 조지 케이의 건강 악화로 인해 새로운 감독을 물색하고 있던 리버풀이 웰시에게 접근했고, 웰시는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웰시의 리버풀 커리어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웰시의 리버풀은 1954년 1부 리그에서 강등을 당하며, 50년만에 치욕스러운 성적을 받아들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해당 시즌은 지역 라이벌 에버튼 FC가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하던 해이기도 했다. 웰시의 리버풀은 시즌 도중에 강등을 확정지었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첼시 FC를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가 되었다. 웰시의 리버풀은 1955-56 시즌에 다시 승격될 뻔 했지만 결국 다시 승격되지는 못했고, 웰시는 1956년에 리버풀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리버풀을 떠난 후, 웰시는 1958-59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새로 설립된 비지역 3부 리그의 본머스 & 보스콤 애슬레틱[1]]에서 감독 경력을 이어갔다. 웰시의 본머스는 두 시즌 동안 중위권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 다음 시즌에 부진을 면치 못했고, 웰시는 1961년 2월 경질되었다.
이후 1962년에 그는 런던 북부의 톨링턴 파크 학교에서 축구 코치 겸 교사로 일하며 런던 카운티 의회 교육부에 잠깐 소속되어 있었다가, 1962년 7월부터는 1964년 12월까지 비리그 구단인 위컴의 감독을 맡았다. 그 후엔 친정팀 찰턴으로 복귀하여 구단 스태프로 일했다. 이후 1990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2013년, 찰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기록
4.1. 선수
- 찰턴 애슬레틱 FC (1935~1947)
- FA컵: 1947
5. 여담
- 리버풀 감독직을 맡던 시절 당시 선수단의 증언에 의하면, 감독으로서 꽤 괴팍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 리버풀의 첫 번째 암흑기를 만들었던 감독이다. 웰시 시절 2부 리그로 강등된 리버풀은 이후 빌 샹클리가 올 때 까지 8시즌을 2부 리그에 머무르며 침체기를 겪었다.
- 선수 시절 좌우측면 공격수와 중앙 공격수, 중앙 수비수와 측면 수비수를 모두 뛸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다고 한다. 찰턴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 중 한 명으로, 찰턴에서는 레전드급 선수로 꼽힌다.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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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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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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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머스 AFC의 초창기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