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케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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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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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케이 George K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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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출생 | 1891년 9월 21일 | |
잉글랜드 맨체스터 | ||
사망 | 1954년 4월 18일 (향년 62세) | |
잉글랜드 리버풀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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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선수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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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볼턴 원더러스 FC (1911) 리스번 디스틸러리 FC (1911~1915)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19~1926) 스톡포트 카운티 FC (1927) |
감독 |
루턴 타운 FC (1929~1931) 사우스햄튼 FC (1931~1936) 리버풀 FC (1936~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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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주장직을 역임했고, 은퇴 이후에는 리버풀 FC의 감독으로 족적을 남겼다.2. 선수 경력
1911년 볼튼 원더러스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나 시즌을 다 보내지 못하고 재계약에 실패한 후, 1911-12 시즌 초 리스번에 입단하였다. 이후 아일랜드 축구 리그를 대표하는 팀의 주장을 맡은 최초의 영국인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골드컵과 시티컵 우승으로 이끌었다.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왕립 수비대 포병대에서 복무했고, 전쟁 이후 1919년 7월에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 합류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웨스트햄에서 7시즌을 보내며 선수 커리어에서 가장 굵직한 시기를 보냈다. 그는 1919년 9월 반슬리와의 홈경기에서 웨스트햄에 데뷔하였고, 1922-23 시즌 빌리 코프로부터 주장직을 이어받아 팀을 이끌며 1부 리그 승격을 도왔다. 또한 1923년에는 그의 친정팀 볼턴 원더러스를 상대로 FA컵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해당 대회는 웸블리에서 열린 첫 FA컵 결승이기도 했다. 이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는 못했으나 웨스트햄에서 200번 이상의 리그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선수가 되며 잉글랜드 축구에 족적을 남겼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좋지 않은 몸상태로 고생을 겪었는데, 1926년 스페인 투어 중 병에 걸려 3주 동안 스페인에 머물렀고 영국으로 복귀하였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웨스트햄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27년 스톡포트에서 두 차례 경기에 출전했지만 더 이상 선수생활을 이어갈 몸 상태가 아니었고 곧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1927년 루턴 타운의 코치로 부임하였고 이후 1929년에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감독으로 두 시즌 가량 팀을 이끌었으나 루턴 타운은 리그에서 13위와 7위로 부진했고, 1931년 사우스햄튼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케이가 사우스햄튼에 부임했을 당시 팀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고 유망주들을 위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팀을 지도했으나 초기 다섯 시즌 동안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31-32 시즌에는 시즌 초반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부상으로 팀이 위기에 처했고 결국 특출난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케이는 이후 지속적으로 재정적인 어려움과 경영적 불안을 겪는 구단을 이끌며 고군분투 했으나 결국 팀은 이사회 전체가 사임하고 새로운 이사회가 들어서는 위기 상황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상황 끝에 케이는 팀의 임금을 줄이기 위해 1936년 자진해서 감독직을 사임했다.
이후엔 리버풀의 제안을 받아 리버풀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리버풀은 사우스햄튼의 심각한 재정 문제에 기인한 스쿼드의 지속적인 유출이 케이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판단했다. 리버풀은 케이의 경험이 풍부하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하였고 그의 아이디어를 지원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케이는 구단의 지원아래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으나 리버풀 커리어의 초반 시작은 좋지 못했다. 그는 첫 시즌 부진을 겪으며 1부 리그 18위의 성적을 받아들어야 했다. 이후 점차 케이의 리버풀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하여 1937-38 시즌을 안정적인 순위로 마쳤고, 후에 리버풀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는 빌리 리델과 밥 페이즐리를 영입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듯 했으나,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리그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케이는 선수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 독려하며 전쟁 기간에 팀을 결집시키는데 집중했고 전쟁이 끝나자 팀이 정상적으로 구축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리그를 재개하게된 케이의 리버풀은 사상 최초로 미국과 캐나다 투어를 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당시 영국은 식량난을 겪고 있었고, 케이는 북미의 풍족한 환경에서 선수단을 단련시키자는 보드진의 의견을 적극 지지했다. 이후 이 선택은 제대로 적중하여 리그가 재개된 첫 시즌 리버풀은 일찍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케이의 리버풀은 치열한 경쟁 끝에 결국 다섯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축구 감독으로서 케이에게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리그 정상에 오른 이후 케이의 리버풀은 계속해서 좋은 선수들을 보유하며 괜찮은 성적을 냈으나 다시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또한 FA컵에서 결승에 오르는 호성적을 내기도 했으나 결국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후 케이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1951년 1월 감독직을 내려놓고 축구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케이는 3년 후인 1954년 4월 18일에 사망했다.
4. 기록
4.1. 선수
- 리스번 디스틸러리 FC (1911~1915)
- 골드컵: 1914
- 시티컵: 1913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19~1926)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22-23
4.2. 감독
- 리버풀 FC (1936~1951)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46-47
5. 여담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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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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