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조 페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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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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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 ||||
초대 바클레이 ☆ |
2대 맥케나 ☆ |
3대 왓슨 ★★☆ |
4대 애시워스 ★ |
5대 맥퀸 ★ |
|
6대 패터슨 |
7대 케이 ★ |
8대 웰시 |
9대 테일러 |
10대 샹클리 ( 샹클리 체제) ★★★☆ ★★★ |
|
11대 페이즐리 ( 페이즐리 체제) ★★★★★★ ★★★★★★★★ |
12대 페이건 ( 페이건 체제) ★★★ |
13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1기)) ★★★ ★★ |
14대(대행) 모란 ( 모란 체제) |
15대 수네스 ( 수네스 체제) ★ |
|
16대 에반스 ( 에반스 체제) ★ |
16&17대 에반스& 울리에 ( 에반스&울리에 체제) |
17대 울리에 ( 울리에 체제) ★★★★★ |
18대 베니테스 ( 베니테스 체제) ★★★ |
19대 호지슨 ( 호지슨 체제) |
|
20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2기)) ★ |
21대 로저스 ( 로저스 체제) |
22대 클롭 ( 클롭 체제) ★★★★ ★★★ |
23대 슬롯 ( 슬롯 체제) |
||
★
프리미어 리그 / ★
FA컵 / ★
EFL컵 / ☆
EFL 챔피언십 ★ UEFA 챔피언스 리그 / ★ UEFA 유로파 리그 / ★ UEFA 슈퍼컵 / ★ FIFA 클럽 월드컵 |
[[조 페이건| |
|
제12대 감독 조 페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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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조 페이건 / 제12대 감독 |
코치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모란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이 에반스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루벤 베넷 (피지컬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존 베니슨 (유스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톰 손더스 (분석 코치, 스카우트)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제프 트웬티맨 (스카우트)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크리스 라울러 (리저브 감독) |
주장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그레이엄 수네스 / 제33대 주장 (1982~1984)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필 닐 / 제34대 주장 (1984~1985) |
계약 기간 |
1983년
7월 1일 ~
1985년
5월 29일 (1년 11개월/ 698일) |
계약 종료 (은퇴로 인한 자진 사임) | |
연봉 | 미상 |
전술 스타일 |
패스 & 무브에 기초한 압박 축구 ┗ 4-3-1-2, 4-4-2 포메이션 ┗ 후방 빌드업과 중앙 지향적인 패턴 플레이 ┗ 강한 전방 압박 ┗ 높은 수비 라인과 오프사이드 트랩 활용 |
역대 전적 | 131경기 71승 36무 24패 (승률 54.2%) |
우승 경력 |
1983-84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83-84 풋볼 리그 컵 (우승) 1983-84 유러피언컵 (우승) |
[clearfix]
1. 개요
리버풀 FC의 제12대 감독 조 페이건 체제를 정리한 문서.2. 감독 선임 과정
1983년 밥 페이즐리가 영광의 시대를 끝내며 은퇴를 선언하였고, 리버풀은 빌 샹클리로부터 페이즐리가 지휘봉을 물려받은 것 처럼, 내부에서의 연속적인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조 페이건에게 감독직을 제안하였다. 페이건은 당대 잉글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코치 중 하나였고, 팀 안팎에서 평가가 좋았던 터라, 페이즐리가 은퇴한 후 페이건이 후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페이건은 페이즐리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수석 코치에서 승격하여 감독직을 맡기 꺼렸지만, 당시 리버풀의 전통적인 정책은 '내부 승진을 통한 연속성의 확보'였고, 페이즐리는 구단 보드진 이사회에 페이건이 선수들과 경기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적임자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결국 ' 부트 룸'의 계승을 위해 1983년 7월 1일, 페이건이 전통을 이어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3. 연혁
3.1. 1983~1984 시즌
너무나도 엄청난 커리어를 쌓은 후 명예롭게 은퇴한 페이즐리의 후임이 된 페이건은 1983-84 시즌, 프로 감독으로서 커리어 첫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페이즐리가 트로피 진열장을 가득 채워놓으며 압도적인 시즌들을 보냈기 때문에, 페이건 체제는 트로피를 따내지 못하고 부진한 시즌을 보낼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세간에서 보내기도 했으나, 그러한 걱정이 무색하게도 리버풀은 페이건 휘하에서 첫 시즌만에 구단 역사상 최초 3개 메이저 대회 재패 시즌을 보낸다.페이건은 시즌 시작 전, 케니 달글리시와 이안 러시 듀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공격수로 마이클 로빈슨을 영입하며 공격진의 퀄리티를 늘렸고, 수비수 게리 길레스피를 데려오면서 과감히 팀의 레전드 센터백 필 톰슨을 대체해[1] 센터백진의 역량을 강화했다. 이후 페이건은 그의 첫 번째 공식경기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 채리티 실드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살짝은 자존심을 구기며 시즌을 출발했지만, 이어진 본격적인 리그 레이스에서 붉은 제국의 적임자가 본인임을 증명하듯 우승 경쟁에서 치고나가기 시작했고, 끝까지 리그 1위 자리를 고수하며 절륜하게 시즌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결국 22승 14무 6패, 승점 80점으로 페이건호는 구단 통산 15번째 리그 우승이자, 잉글랜드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
부트 룸에서 전임자 밥 페이즐리와 함께 |
페이건호는 FA컵에서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에게 아쉽게도 일찍이 탈락했지만, 리그컵에서는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리버풀은 준결승에서 월솔 FC를 꺾고 결승에 진출, 1984년 3월 25일 리그 컵 결승에서 더비 라이벌 에버튼 FC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는 0-0으로 끝나 3일 뒤, 재경기가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리버풀은 그레이엄 수네스의 결승골에 힘입어 통산 네 번째 리그컵 우승이자, 잉글랜드 최초의 리그컵 4연패를 달성했다.
유러피언 컵에서도 페이건은 감독 커리어 첫 시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운영을 펼쳤다. 페이건은 본인의 첫 유러피언 컵에서 아틀레틱 클루브, 벤피카, 디나모 부쿠레슈티를 꺾으며 결승에 손쉽게 당도한 뒤, AS 로마를 그들의 홈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상대했다. 1984년 5월 30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필 닐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이후 실점하며 1-1로 정규시간을 끝냈고, 연장전을 넘어 승부차기로 경기를 끌고갔다. 첫 번째 키커인 스티브 니콜이 실축했지만, 리버풀의 춤추는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2]가 이후 2차례 선방을 해냈고, 결국 페이건이 구단 역사상 네 번째 빅이어를 안필드로 가져왔다. 이로써 페이건호는 클럽 역사상 최초의 메이저 트로피 3관왕 시즌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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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로마에서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 승리 이후 |
|
팀의 네 번째 빅이어와 함께 |
해당 시즌 리버풀은 페이건과 함께 페이즐리 시절의 영광을 잇는 붉은 제국의 최고점을 보냈으며, 팀의 주포 이안 러시가 리그 32골을 포함 시즌 47골을 터트려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는 등, 케니 달글리시와의 강력한 투톱 듀오가 화력을 발휘했다. 이 시즌의 리버풀 스쿼드는 클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으로 여겨지며,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도 평가받는다. 수석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하여 단 한 시즌만에 리버풀 클럽 역사상 최고점의 시즌을 보낸 것은 물론, 다양한 기록들까지 달성하는 역대급 임팩트를 남긴 이 시즌의 페이건은 리그 올해의 감독상까지 수상해냈다.
3.2. 1984~1985 시즌
이후 1984년 여름, 리버풀의 주장이자 중원의 사령관 그레이엄 수네스가 삼프도리아로 이적하는 바람에 리버풀은 스쿼드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에 페이건은 얀 몰비, 존 와크, 폴 월시, 케빈 맥도널드 등의 계약을 통해 전력 유지를 꾀했다. 하지만 대체불가능한 주장이었던 수네스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거대했고, 팀의 주포 이안 러시는 부상으로 시즌 초 많은 경기를 결장했으며, 당시 33세의 케니 달글리시만으로는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못했다. 새로운 영입생들도 첫 시즌에 적응기를 거치느라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에 이 시즌 리버풀은 모든 대회에서 다소 약간씩 부족함을 노출하면서 10년만에 무관 시즌을 보내고 말았다.페이건호는 채리티 실드에서 라이벌 에버튼 FC를 만나 석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하며 시즌을 시작했다. 이후 리그에서는 전반기에 다소간 흔들리는 사이 에버튼 FC가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며 우승에 일찍이 가까워졌고, 페이건의 리버풀은 후반기에 연승가도를 달렸으나 리그 2위에 만족해야했다. 또한 리그컵에서는 일찍이 3라운드에서 탈락했고, FA컵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준결승에서 패배해 결승행이 좌절되었다. 직전시즌 유럽 챔피언 자격으로 진출한 인터컨티넨탈 컵에서도 리버풀은 CA 인데펜디엔테에게 석패했고, 유러피언 슈퍼컵에서도 유벤투스에게 패배했다.
이 때, 페이건은 감독직에 약간의 회의를 느끼고 리버풀 보드진에 시즌을 끝으로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후에 발간된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평생을 필드에서 선수들과 가깝게 소통하는 코치로 일해왔지만, 감독직을 맡으며 선수들과 거리가 생겼고 "평소의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또한 부임 당시 62세로 리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감독이었을 만큼 고령의 나이기도 했기에[3] 좋지 못한 시즌을 보내고 있던 페이건은 은퇴를 결심한다.[4]
그럼에도 페이건의 리버풀은 후반기 저력을 발휘하며 유러피언 컵에서는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거두었고 다섯 번째 빅이어를 향한 도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985년 5월 29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벤투스와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 페이건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는 아주 끔찍하게 기억되고 마는데, 이 경기에서 리버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사건인 헤이젤 참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39명의 관중들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열렸고, 결국 미셸 플라티니의 결승골로 유벤투스가 빅이어를 가져갔다.
이후 구단 안팎으로 매우 좋지 못한 분위기 속에서 1985년 5월 29일, 페이건은 예정대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에 부트 룸의 명맥도 끊기는가 했지만, 페이즐리 체제부터 팀의 중심을 지키던 케니 달글리시가 플레잉 코치로서 후임 감독에 부임하며 클럽의 수습을 맡았다. 30년 가까이 팀에 헌신한 레전드급 코치이자 단기간이었지만 찬란한 시즌을 보낸 감독의 마지막이 끔찍한 참사로 인하여 얼룩졌고, 페이건의 퇴장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케니 달글리시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1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조 페이건의 시즌별 주요 성적 |
||||||||||
시즌 | 리그 | FA | EFL | CS | UCL | USC | ICC | 감독 | ||
1983-84 시즌 |
우승 (15회) |
4R |
우승 (4회) |
준우승 |
우승 (4회) |
- | - | 조 페이건 | ||
1984-85 시즌 |
2위 (▼ 1) |
4강 | 3R | 준우승 | 준우승 | 준우승 | 준우승 |
6. 평가
|
리버풀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명장들[5] |
'
부트 룸(Boot Room)'의 모든 것. (what the boot room was all about.)
조 페이건에 대하여 - 前 리버풀 FC 선수, 코치, 그리고 임시 감독이었던 로니 모란
조 페이건에 대하여 - 前 리버풀 FC 선수, 코치, 그리고 임시 감독이었던 로니 모란
그의 생각은 항상 축구를 향해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진정한 사람들의 사람(people’s person)이었다.
前 리버풀 FC 선수 브라이언 홀
前 리버풀 FC 선수 브라이언 홀
조 페이건은 리버풀의 붉은 제국 시대를 견인한 ' 부트 룸'의 핵심 코치 중 한 명이자,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를 이어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아 유러피언 컵 우승을 포함한 구단 최초 단일 시즌 3관왕을 달성한 업적을 남긴 레전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앞선 두 전임 감독에 비해 팀 안팎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적고 심지어 후임 감독인 케니 달글리시에 비해서도 존재감이 약해, 동시에 리버풀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감독 혹은 가장 불운한 감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리버풀 커리어 마지막이 헤이젤 참사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얼룩졌기 때문이다. 물론 고령의 나이로 팀에 부임하여 단 두 시즌만 팀을 지휘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커리어의 기간이 짧기도 했다.[6] 하지만 그럼에도 리버풀의 역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감독들 사이에서 페이건이 빠지지 않고 꼽히는 이유는 그가 지휘한 1983-84 시즌이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붉은 제국의 최절정을 보여준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운과 훌륭한 스쿼드 때문에 우승 트로피들을 들어올린 것이 아니라 페이건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당대 축구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빌 샹클리 체제에서는 리저브팀 감독으로 어린 선수들의 육성을 담당했고, 밥 페이즐리 체제에서는 수석 코치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는데, 그는 선수단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해온 코치로서 팀 스쿼드의 성장과 개발에 중추적인 인물이었다.[7] 그는 코치 시절 내내 선수들의 말을 경청하고 굉장히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능력으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선수들에게 언제 당근과 채찍을 활용하고 어떻게 실질적인 교정을 제공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고령의 나이임에도 페이즐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것도 그가 팀을 가장 잘 이해하는 코치였을 뿐더러 그가 불세출의 맨 매니지먼트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이건은 선수단 관리의 연장선상에서 성공적인 축구 방식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축구 지식의 향상을 위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대 감독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으며, 최대한 선수들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을 추구하는 철학을 중요시 여겼다. 그는 샹클리 시절 만들어진 ' 부트 룸'을 편안한 논의의 장소로 만드는데에 크게 기여했고 클럽의 많은 경기들을 분석하며 클럽의 대소사를 모두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기록물들은 후에 클럽 내 코칭 스태프들을 위한 참고서가 되었으며 리버풀의 성공 비결을 담은 '안필드 바이블' 로 불리기도 했다.[8] 그는 코치 시절부터 꾸준하게 정립해온 노하우를 통해 1984년 유러피언 컵 AS 로마의 결승전을 승리로 이끌어 우승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팀이 상대팀의 홈 구장[9]으로 원정을 떠나 지나친 생각에 잠기고 분위기에 잠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로마에 일부러 늦게 도착했으며, 선수단에게 어차피 우리가 골을 넣을테니 골 넣고 원정 관중들과 충돌하지 않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전하며 선수들의 압박감을 덜어주었다.[10] 뛰어난 선수단 관리를 통해 위닝 멘탈리티를 팀에 불어넣을 수 있는 유연함 뒤에 확실한 전술적인 판단과 경험적인 근거를 더했던 감독이기도 했던 것.
이렇듯 붉은 제국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페이건은 샹클리 체제에서부터 내려오던 패스 앤 무브에 기반한 철학을 이어가되, 페이즐리 체제에서 구사하던 전술을 조금 더 발전시켜 전통적인 4-4-2에서 4-3-1-2[11]로 전형을 변경하는 등, 더 중앙 지향적인 새로운 축구를 구사했다. 최전방의 이안 러시와 마이클 로빈슨이 상대 수비진을 강하게 압박하고 그 아래의 케니 달글리시가 상대 후방 패스를 차단한 뒤 바로 역습에 나서는 방식의 강한 압박과 오프사이드 트랩에 기초한 높은 수비라인도 페이건이 기존의 압박 축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켜 효과를 본 대표적인 아이디어였다.
종합하자면, 헤이젤 참사로 인해 업적과 명성이 다소 가려졌으나,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에 이어 구단 역사상 최고점의 시즌을 보낸 전설적인 감독. 그는 선수단과 늘 가깝게 지냈고 선수 관리에 특히 능하여 수 많은 스타들을 발굴해낸 코치였으며, 축구에 대한 집요한 분석으로 새롭게 팀 전술을 진보시켜 단 기간이지만 엄청난 성적을 거둔 명장이자 함께 일한 이들에게 무수한 존경을 받는 덕장이기도 했다.[12] 그는 차분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주목받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고 누구보다도 선수들과 함께하는 현장을 사랑했던 인물이었기에, 선수단과 일부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감독직에 대한 부담을 가졌고 또 많은 나이로 인해 감독직을 일찍 내려놓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 당대 영국 축구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13][14] 짧은 감독 경력이었지만 30년에 가까운 긴 코치 경력을 통해 구단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페이건은 아픈 참사의 오명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리버풀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들 중 하나이자 붉은 제국을 이끈 ' 부트 룸'의 상징으로 손꼽힌다.
[1]
페이건은 후에 오래 함께했던 팀 레전드 톰슨을 전력에서 제외하는 것이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2]
페널티킥을 막는 그로벨라 특유의 동작은 이후 2004-05 시즌
이스탄불의 기적 당시 승부차기에서
예지 두덱이 오마주하게된다.
[3]
실제로 후임자긴 하지만
밥 페이즐리와 나이차이가 그리 나지도 않는다.
[4]
헤이젤 참사의 여파로 은퇴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미 결승전이 치러지기 몇 주 전에 구단 보드진 이사회에 은퇴의사를 밝혔었다.
[5]
좌측부터 차례로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
라파엘 베니테스,
위르겐 클롭 감독이 자리해 있으며, 모두 리버풀 소속으로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일궈낸 인물들이다. 해당 배너는
리버풀의 홈 구장
안필드의 스피언 콥 스탠드에 대형 플래그로 자주 등장한다.
[6]
실제로 그의 마지막 시즌은 무관에 그쳤기 때문에 팀에 우승을 안겨준 영광의 커리어는 사실상 단 한시즌에 불과하다.
[7]
그는 리저브팀 시절 수많은 구단의 레전드급 선수들을 발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커리어 초반 슬럼프에 빠져있던
로저 헌트를 성을 다해 지도하여 뛰어난 공격수로 탈바꿈 시켰다거나 프로 계약을 제의받아 들떠있던 토미 스미스를 꾸짖어 멘탈을 다잡게 했던 일화들은 그가 당시 팀 선수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8]
특히 그는 1965년
아약스전, 1973년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전 등 유럽 대항전에서의 패배 사례들을 분석해 유럽 대항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팀의 교훈을 실질적으로 정리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9]
당시 결승전은
AS 로마의 홈 구장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렸다.
[10]
페이건은 경기 직전 선수들에게 그냥 자연스럽게 순간을 즐기라는 짧은 지시를 했고, 긴장이 풀린 리버풀 선수들은 경기장 터널에서 크리스 레아의 노래 'I Don't Know What It Is (But I Love It)'를 흥얼거리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에 로마 선수들과 당시
닐스 리드홀름 로마 감독은 리버풀 선수단의 노래를 들으면서 얼어 붙었다고.
[11]
당시 팀의 플레이 메이커였던 달글리시가 30대에 접어들어 투톱에서 다이나믹한 활동반경을 보여주기엔 무리가 있었고, 이에 투톱 아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역할로 달글리시를 배치하는 포지션이었다.
[12]
그와 함께한 선수들과 코치들의 헌사가 이를 증명한다.
[13]
영국 축구사의 전설적인 명장
바비 롭슨이 80년대 초, 페이건을 두고 최고의 코치라고 언급한 바 있다.
[14]
2023년 기준,
최상위 유럽 대항전을 우승한 단 4명의 잉글랜드인 감독 중 한명이며, 그 중 마지막으로
빅이어를 들어올린 감독이다.
유러피언 컵과 당시 1부 리그 우승을 모두 경험한 3명의 감독 중 하나이며, 두 대회를 단일 시즌에 우승한 2명의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