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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페이즐리 체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밥 페이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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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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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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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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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
애시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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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맥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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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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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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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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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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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샹클리
( 샹클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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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대
페이즐리
( 페이즐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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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대
페이건
( 페이건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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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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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대(대행)
모란
( 모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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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수네스
( 수네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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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에반스
( 에반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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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대
에반스& 울리에
( 에반스&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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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울리에
( 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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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대
베니테스
( 베니테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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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호지슨
( 호지슨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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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2기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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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로저스
( 로저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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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클롭
( 클롭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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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슬롯
( 슬롯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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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그 / FA컵 / EFL컵 / EFL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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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페이즐리 체제
[[밥 페이즐리|
파일:리버풀 밥 페이즐리.webp
]]
제10대 감독
밥 페이즐리
<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밥 페이즐리 / 제10대 감독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조 페이건 (수석 코치)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루벤 베넷 (피지컬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로니 모란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톰 손더스 (분석 코치, 스카우트)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제프 트웬티맨 (스카우트)
주장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엠린 휴즈 / 제31대 주장 (1973~1979)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필 톰슨 / 제32대 주장 (1979~1981)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그레이엄 수네스 / 제33대 주장 (1982~1984)
계약 기간 1974년 7월 26일 ~ 1983년 7월 1일
(8년 11개월/ 3263일)
계약 종료 (은퇴로 인한 자진 사임)
연봉 미상
전술 스타일 패스 & 무브에 기초한 포제션 축구
4-4-2, 4-4-1-1 포메이션
스위퍼 키퍼와 볼 플레잉 센터백의 후방 빌드업
┗ 강한 압박 수비
┗ 상대에 대응하는 맞춤 전술
세컨드 스트라이커를 활용한 투톱 전략
역대 전적 535경기 308승 131무 96패 (승률 57.57%)
우승 경력 1974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75-76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75-76 UEFA컵 (우승)
1976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76-77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76-77 유러피언컵 (우승)
1977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77 UEFA 슈퍼컵 (우승)
1977-78 유러피언컵 (우승)
1978-79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79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79-80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80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80-81 풋볼 리그 컵 (우승)
1980-81 유러피언컵 (우승)
1981-82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81-82 풋볼 리그 컵 (우승)
1982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82-83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82-83 풋볼 리그 컵 (우승)

1. 개요2. 감독 선임 과정3. 연혁
3.1. 1974~1975 시즌3.2. 1975~1976 시즌3.3. 1976~1977 시즌3.4. 1977~1978 시즌3.5. 1978~1979 시즌3.6. 1979~1980 시즌3.7. 1980~1981 시즌3.8. 1981~1982 시즌3.9. 1982~1983 시즌
4. 공격 포인트 순위5. 시즌별 주요 성적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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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버풀 FC의 제10대 감독 밥 페이즐리 체제를 정리한 문서.

2. 감독 선임 과정

1974년 FA컵 결승에서 우승한 뒤 빌 샹클리가 예기치 않은 은퇴를 선언하였고, 리버풀은 팀을 이끈 리더십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페이즐리를 그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페이즐리는 특유의 겸손함으로 처음에 감독직을 맡는 것을 꺼려 샹클리를 찾아가 은퇴를 만류하기도 해보았으나 샹클리는 결심을 굳힌 뒤였고, 그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격려만을 남겼다. 이후 그가 적임자라는 구단 내외부의 의견이 이어졌고 결국 페이즐리는 리버풀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3. 연혁

3.1. 1974~197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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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한 밥 페이즐리

페이즐리는 샹클리의 유산을 이어받아 곧바로 전성기의 연속을 위해 힘쓰기 시작했다. 페이즐리는 1974년 여름 로이 에반스의 은퇴와 로리 레이드의 이적으로 생긴 공백에 필 닐 테리 맥더모트를 영입하여 전력을 더욱 강화했다. 샹클리가 자신의 리버풀 커리어 마지막날에 이적을 성사시킨 레이 케네디도 스쿼드에 합류했고, 후에 슈퍼 서브로 엄청난 활약을 펼치는 데이비드 페어클러프도 이 때 리저브에서 발굴되어 1군으로 진입했다.

페이즐리는 샹클리의 수석 코치 출신으로써 샹클리의 철학이었던 패스 & 무브먼트를 기초로한 전술을 이어갔지만, 샹클리의 마지막 시즌에 리버풀이 세르비아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게 패배해 유러피언컵에서 탈락했던 것을 곱씹으며 이제는 좀 더 대륙적인 빌드업과 포제션 축구가 미래에 통할 것임을 확신하였고, 좀 더 후방에서 풀어가는 시스템을 팀에 접목시키기를 원했다. 이에 그는 부임 이후 골키퍼와 두 명의 센터백이 후방 빌드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축구를 도입하게 된다. 이는 현대 축구의 스위퍼 키퍼 및 볼 플레잉 센터백 배치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이었다. 이에 그는 미드필더였던 필 톰슨 엠린 휴즈를 센터백으로 기용했다.

페이즐리호는 샹클리가 비공식적으로 지휘봉을 잡아 고별전 형식으로 치루어진 FA 채리티 실드에서 우승한 뒤 곧장 리그 레이스를 내달렸는데, 초반에 좋은 흐름을 이어갔으나 리그 중후반기 6연속 무승부를 기록하며 부침을 겪었고, 결국 승점 2점차로 더비 카운티에 이어 아쉬운 리그 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당 시즌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FA컵과 리그컵에서 모두 4라운드 조기 탈락했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도 페렌츠바로시 TC에게 2라운드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3년 만에 트로피 없는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 대회에서 1라운드에서 리버풀은 스트룀스고세 IF를 상대로 11-0 승리를 거두어 구단 역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를 달성하기도 했다.

3.2. 1975~1976 시즌

1975년에는 샹클리호의 핵심 라이트백이었던 크리스 라울러가 필 닐의 활약에 의해 팀을 떠났고, 웨일스산의 레프트백 조이 존스가 새로이 팀에 합류했다. 당시 페이즐리의 팀은 '마이티 마우스' 케빈 키건과 창의적인 플레이를 펼치던 스티브 하이웨이, 그 아래의 테리 맥더모트를 앞세워 강력한 공격진 스쿼드를 구축하고 있었고, 직전 시즌 트로피 사냥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진에서의 약간의 변동 외에는 큰 보강없이 시즌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즌을 기점으로 페이즐리는 공격수였던 레이 케네디를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페이즐리호는 자신들의 강력한 스쿼드를 증명하며 리그에서 매우 우수한 레이스를 펼쳤고, 마지막 리그 9경기에서 8승을 올리려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승점 1점차로 제치고 23승 14무 5패로 통산 9번째 리그 우승이자, 페이즐리 체제의 첫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리그 최종전 울버햄튼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리버풀은 후반 76분까지 1-0으로 뒤지고 있다가 키건, 토샥, 케네디의 연속 득점이 경기 마지막 14분 사이에 터지며 3-1로 짜릿한 우승 확정 승리를 챙겨 해당 시즌 리그 레이스의 백미를 장식했다.

이 시즌 리버풀은 FA컵에서 더비 카운티에게 4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리그컵에서는 번리 FC에게 잡혀 3라운드에 그쳤으나 UEFA컵에서는 다시 한 번 본인들이 유럽의 신흥 강자임을 증명했다. 페이즐리호는 히버니언 FC, 레알 소시에다드, 실롱스크 브로츠와프, 디나모 드레스덴을 연달아 만났으나 계속해서 다득점 경기를 선사하며 무난하게 준결승까지 진출했고 4강에서는 FC 바르셀로나를 만나 원정에서 토샥의 득점으로 1-0 원정승을 거둔 후 홈에서 무승부를 만들어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에른스트 하펠 감독의 절륜한 리더십 아래 전성기를 질주하고 있던 클뤼프 브뤼허. 1976년 4월 28일 안필드에서 열린 홈 1차전에서 리버풀은 연달아 골을 내주며 2-0을 끌려갔으나, 후반전 케네디와 지미 케이스, 키건의 연속 득점을 만들어내며 3-2로 역전승을 거두었고, 이후 5월 19일에 열린 2차전에서도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키건이 동점골을 기록한 것을 끝까지 지켜내며 총 합계 4-3으로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샹클리호에서 기록한 첫번째 리그-UEFA컵 더블 이후 두 번째 더블 시즌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페이즐리호의 필 닐, 필 톰슨, 레이 케네디는 이 시즌을 기점으로 재능을 폭발시키며 리그 수위급 자원으로 올라서 잉글랜드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리버풀의 에이스 케빈 키건은 대표팀 주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레이 클레멘스 또한 대표팀에서 입지를 다지는 시즌을 만들었다. 해당 시즌 팀 최다 득점자는 시즌 23골, 리그 16골을 올린 존 토샥. 이 시즌 페이즐리는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였으며, 이 두 번째 시즌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정복하는 절정의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3.3. 1976~1977 시즌

1976년에는 본격적으로 스쿼드에 젊은 선수들이 수혈되며 부분적인 리빌딩이 진행되었다. 샹클리의 유산인 브라이언 홀, 피터 코맥이 팀을 떠났고, 토미 스미스도 기회를 찾아 임대를 떠났다. 대신 리버풀은 데이비드 존슨을 영입하여 공격진의 퀄리티를 더했으며, 리저브에서 새미 리를 발굴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출발한 시즌, 리버풀은 가볍게 채리티 실드를 우승한 뒤, 지난 시즌 처럼 치열한 리그 경쟁을 펼쳤다. 리버풀은 원정에서만 8패를 기록하며 원정 경기력에서 불안함을 노출하기는 했으나, 홈에서 무패를 기록해 23승 11무 8패로 맨체스터 시티를 승점 1점차로 따돌리고 리그 2연패이자 통산 10번째 리그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이는 1921-22, 1922-23 시즌 리그 2연패 이후 처음이었다.

페이즐리호는 이 시즌 리그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조기탈락했으나 FA컵에서 무패를 질주하며 준결승에서 지역 라이벌 에버튼 FC을 총합 스코어 5-2로 꺾고 결승에 올랐고, 지난 시즌 리그 우승자 자격으로 진출한 유러피언컵에서도 홈에서의 강력한 득점력을 앞세워 FC 취리히를 준결승에서 꺾은 뒤 결승행을 확정 지었다. 잉글랜드 리그 역사상 첫 트레블의 기회를 잡았던 것. 트레블까지 남은 경기는 1977년 5월 21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결승전과 5월 25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결승전이었다. 그러나 리버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결승전에서 2-1로 아쉽게 석패해 FA컵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아 사상 첫 잉글랜드 클럽 트레블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기는 기점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라이벌리가 본격적으로 불타올라 노스웨스트 더비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아쉬움을 뒤로한 채 리버풀은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위해 로마의 스타디오 올림피코로 떠났다. 결승 상대 묀헨글라트바흐는 4년 전인 1972-73 시즌, 샹클리 체제의 리버풀이 UEFA컵 결승에서 이미 한 차례 만나 우승을 따냈던 바 있었던 팀이었으나, 그 이후 우도 라텍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더 막강한 전력을 구축해 분데스리가와 유럽 무대에서 절정의 전성기[1]를 구축하고 있던 독일 최강의 클럽이었다. 그러나 페이즐리호의 전력 또한 신구조화가 완벽히 맞아떨이지면서 절정에 올라 있었고, 리버풀은 교체카드를 단 한 장도 사용하지 않고 테리 맥더모트, 토미 스미스, 필 닐의 득점에 힘입어 3-1로 여유롭게 승리. 클럽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 최초의 빅이어를 안필드로 가져왔다.
파일:bobliverpool1.png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빅이어를 안필드로 가져온 감독

해당 시즌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아쉽게 FA컵 결승에서 패하며 트레블에는 실패했으나 리그 2연패와 더불어 그토록 꿈꿨던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당시로서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되었고, 유럽 최정상급 클럽으로 발돋움하며 본격적인 붉은 제국의 절정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리버풀은 샹클리의 유산과 페이즐리의 영입생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뤘고, 이안 캘러한, 케빈 키건, 존 토샥 등의 기존 베테랑들과 필 닐, 테리 맥더모트, 조이 존스, 레이 케네디 등의 새로운 세대들이 절정의 시너지를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시즌을 끝으로 키건과 토샥이 팀을 떠나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입생들이 들어와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이 시즌의 팀이 페이즐리호 1기라고 볼 수 있다. 시즌이 끝난 후 페이즐리는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2연속으로 수상했다.

3.4. 1977~1978 시즌

유러피언컵의 우승 이후, 그동안 리버풀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통했던 케빈 키건이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함부르크 SV로 떠남에 따라 페이즐리는 새로운 시대를 구상해야했다. 더불어 팀의 언성 히어로 역할을 맡아준 알렉 린제이 또한 이적하게 되어 팀의 공-수에 구멍이 생겼다. 이에 페이즐리와 리버풀의 스카우트진은 스코틀랜드로 눈을 돌려 유망주를 발굴하고자 했고, 당시 셀틱 FC에서 넘치는 재능을 뽐내던 케니 달글리시 파틱 시슬 FC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던 앨런 한센이 영입되었다. 특히 달글리시는 당대 영국 내 최고 이적료인 44만 파운드를 기록하며 안필드로 입성했다. 페이즐리는 최전방 공격수 바로 아래에서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달글리시를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스코틀랜드 재능들이 영입된 리버풀은 FA 채리티 실드에서 공동 우승한 후, 달글리시의 대활약에 힘입어 리그에서 지난 시즌과 같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당시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이 이끄는 노팅엄 포레스트 FC에 뒤지며 리그 1위로는 올라서지 못했다. 이에 리버풀은 겨울 이적 시장에서 그레이엄 수네스를 영입하며, 스코틀랜드 출신의 새로운 코어라인을 구축했고, 후반기 마지막 12경기 무패를 달리며 반전을 노렸으나 끝내 24승 9무 9패로 리그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첼시 FC와의 혈투끝에 3라운드 조기 탈락했으나, 리그컵에서 페이즐리호는 순항을 펼치며 첼시, 더비 카운티, 코번트리 시티, 렉섬 AFC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여 아스날 FC까지 격파한 뒤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리그 우승 경쟁을 펼치던 클러프의 노팅엄 포레스트. 그러나 결승전에서 양 팀은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당시 규정에 따라 재경기가 성사되었는데, 재경기에서는 노팅엄이 석연찮은 판정과 함께 1-0으로 승리를 거둬 페이즐리는 아쉬운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유럽 대항전에서의 페이즐리는 다시 한 번 기념비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지난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으로 인해 리버풀은 1977 유러피언 슈퍼컵에 참가해, 이적을 감행해 떠난 케빈 키건이 이끄는 함부르크 SV를 만나게 되었다. 리버풀은 1차전 원정을 떠나 1-1로 비겼으나, 2차전 안필드에서는 맥더모트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화력을 뽐내며 6-0의 대승을 거둬 총합 스코어 7-1로 사상 첫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디펜딩 챔피언으로 참가한 유러피언컵에서는 디나모 드레스덴, SL 벤피카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고, 지난 대회 결승에서 만난 분데스리가 챔피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리버풀은 1차전 묀헨글라트바흐 원정길을 떠나 2-1로 패배하였으나, 이후 2차전 안필드에서는 달글리시를 필두로 막강한 화력을 선보이며 3-0으로 완승을 거두어 묀헨글라트바흐와의 유럽 대항전 맞대결에서 완벽한 우위를 점했다. 그렇게 진출한 결승전 상대는 2년 전, 1975-76 UEFA컵 결승에서 격돌한 바 있었던 에른스트 하펠 감독의 클뤼프 브뤼허. 그러나 페이즐리는 복수극을 허용하지 않았고, 달글리시의 결승골로 리버풀은 1-0 승리, 통산 두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과 영국 최초의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하게 되었다.

해당 시즌 페이즐리호는 리그에서 클러프 감독의 노팅엄 포레스트에 의해 리그와 리그컵 준우승에 그쳤으나, 유럽 대항전에서 명실상부 유럽 최고의 전력임을 입증하면서 유러피언 슈퍼컵과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 붉은 제국의 전성기를 질주했다. 해당 시즌 리버풀에서 데뷔 시즌을 보낸 달글리시는 리그 20골 포함, 시즌 31골을 올리며 잉글랜드와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 떠올랐고, 함께 영입된 스코틀랜드 3인방 앨런 한센 그레이엄 수네스 또한 제대로 팀에 녹아들며 팀의 전력을 굳혔다. 테리 맥더모트도 명실상부 수위급 자원으로 올라서며 잉글랜드 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즌은 리버풀에서 최다 출전 기록을 경신하던 이안 캘러한의 리버풀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으며, 키건, 토샥에 이어 캘러한까지 팀을 떠나며 페이즐리호의 리빌딩이 완성되는 기점이기도 했다. 이 시즌의 성적으로 페이즐리는 유럽 기자 협회로부터 올 시즌의 유럽 리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5. 1978~1979 시즌

페이즐리는 1978년 여름, 이안 캘러한, 조이 존스, 토미 스미스를 떠나보내고 존스의 대체자인 왼쪽 풀백 앨런 케네디를 영입하며 더 젊고 강력한 팀을 구축했다. 유럽 대항전과 리그 경험을 쌓으며 페이즐리의 스쿼드는 완전히 물오른 수준을 과시하고 있었고, 리버풀은 경기당 평균 3골 이상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화력과 함께 리그 개막 후 11경기 10승 1무를 질주하며 단숨에 리그 1위를 사수했다. 이후 리버풀은 케니 달글리시- 그레이엄 수네스- 테리 맥더모트가 이끄는 화력의 공격진과 레이 클레멘스- 앨런 한센- 엠린 휴즈- 필 톰슨- 필 닐-앨런 케네디로 구축된 리그 최강의 수비진을 앞세워 압도적인 리그 레이스를 질주, 직전 시즌 리버풀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던 노팅엄 포레스트를 일찍이 따돌렸다. 페이즐리호는 해당 시즌 리그에서 30승 8무 4패를 기록하며 결국 통산 11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는데, 리버풀은 이 시즌 리그 역사상 최다 승점을 쌓았으며, 42경기에서 16실점만을 기록해 리그 역대 최소 실점을 달성했다.[2] 리버풀의 수문장 클레멘스는 28경기 무실점을 달성했고, 주포 달글리시는 리그 21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압도적이었던 리그 레이스와는 다르게 해당 시즌 리버풀의 컵 대회는 비교적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리버풀은 리그컵 2라운드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게 조기 탈락했고, FA컵에서는 준결승까지 올랐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덜미를 잡혔다. 또한 유럽 대항전에서 모두 디펜딩 챔피언이었으나 유러피언 슈퍼컵에서는 RSC 안데를레흐트에게 총합산 4-3으로 아쉽게 패배하여 준우승을 기록했고, 야심차게 유러피언컵 3연패를 목표로 했으나 유러피언컵 1라운드에서 당대의 리그 라이벌 노팅엄 포레스트를 만나 합산 2-0으로 유럽의 최강 타이틀답지 못한 탈락을 맛봤다.[3] 그러나 잉글랜드에서의 압도적인 타이틀 레이스에 의해 시즌 종료 후 페이즐리는 자신의 세 번째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3.6. 1979~1980 시즌

1979년, 페이즐리는 그동안 리버풀에서 전설적인 커리어를 보낸 주장 엠린 휴즈를 떠나보내고 전천후의 미드필더 자원 로니 웰런을 영입해 전력을 보강했다. 1979년 채리티 실드에서 아스날 FC을 3-1로 꺾고 가뿐하게 우승을 챙긴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이후 리그 초반 7경기에서 2승만을 거두며 지난 시즌 대비 리그에서 다소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이후 8라운드부터 16경기 무패를 질주, 리그 막판까지 다시금 잉글랜드 최강의 면모를 과시했다. 25승 10무 7패로 결국 1위를 쟁취한 리버풀은 승점 2점차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따돌리고 통산 12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 리그 2연패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컵대회에는 2시즌 연속 아쉬운 탈락이 이어졌다. FA컵에서는 무난하게 연승을 달리며 준결승에 올랐으나, 준결승에서 아스날 FC과 3연속 무승부를 기록해 재경기를 두 차례나 치르기에 이르렀고, 결국 1-0으로 석패해 탈락했다. 리그컵에서는 눈엣가시같은 노팅엄 포레스트를 다시 만나 준결승에서 합산 2-1로 패배했다. 그리고 다시금 도전한 유러피언컵에서는 1라운드에서 FC 디나모 트빌리시를 만나 홈에서 2-1로 승리했으나, 원정에서 3-0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2시즌 연속 챔피언의 자존심을 구겼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달글리시와 더불어 데이비드 존슨이 폭발하며 리그 21골을 포함, 시즌 27골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으나 수비진에서 문제를 노출하며 다시 한 번 컵 대회와 유럽 대항전에서의 숙제를 남겼다. 하지만 잉글랜드 리그 내에서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여전히 최고의 위치를 구가하고 있었고, 페이즐리는 자신의 네 번째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3.7. 1980~1981 시즌

80년대로 들어서 페이즐리는 다시금 팀을 다잡음과 동시에 측면 자원인 크레이그 존스턴과 유망주 스트라이커 이안 러시를 영입해 공격의 옵션을 늘리며 스쿼드를 보강했고, 겨울 이적 시장에서는 스위퍼 키퍼 성향을 타고난 브루스 그로벨라를 데려와 골키퍼진의 미래를 대비했다. 페이즐리호는 채리티 실드에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잡고 우승을 차지한 이후 리그 3연패에 도전했으나, 케니 달글리시가 리그 8골에 그치는 부진을 겪음과 동시에 리그에서 너무 많은 무승부를 양산하고 말았고, 결국 17승 17무 8패로 16년 만에 최악의 성적인 리그 5위에 그치고 말았다. 리버풀은 리그 1위를 차지한 아스톤 빌라와 똑같은 8패를 기록했으나, 어마어마한 무승부 숫자에 의해 승점을 많이 잃어 결국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아들어야했다.

FA컵에서는 4라운드에서 지역 라이벌 에버튼 FC을 만나 2-1로 석패하며 또 다시 아쉬움을 삼켰으나 해당 시즌 리그컵에서는 절치부심하여 준결승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꺾고 결승에 진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격돌하게 되었다. 1981년 3월 14일에 치러진 결승에서 리버풀은 연장까지 0-0으로 피말리는 승부를 이어가다가 118분 앨런 케네디의 천금같은 선제골로 우승을 가져오는듯 했으나, 120분 웨스트햄의 레이 스튜어트가 극장 동점골을 기록해 승부는 4월 1일에 잡힌 재경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재경기에서 리버풀은 전반 5분만에 실점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달글리시와 한센이 연속 득점을 올려 결국 2-1로 승리, 팀 역사상 최초의 리그컵 우승을 달성하게 되며 이어졌던 컵 대회 잔혹사를 종결했다.

두 시즌 연속으로 충격적인 1라운드 탈락을 기록한 유러피언컵에서도 페이즐리호는 다시 한 번 본인들의 유럽의 최강자 중 하나임을 증명하는 영광의 시즌을 만들었다. 리버풀은 테리 맥더모트 그레이엄 수네스의 중원 공격력을 앞세워 오울룬 팔로세우라, 애버딘 FC, CSKA 소피아를 연달아 격파하고 준결승에 올랐고 바이에른 뮌헨과 격돌하게 되었는데, 1차전과 2차전에서 모두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2차전 원정에서 레이 케네디가 83분에 극적인 원정 동점골을 터트림에 따라 원정 다득점으로 다시 한 번 페이즐리호는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승전 상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만나게 된 유럽의 강호 레알 마드리드. 1981년 5월 17일,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열린 결승에서 리버풀은 그동안 쌓아왔던 유럽 무대에서의 경험치를 모두 쏟아부었고 결국 82분 앨런 케네디가 천금같은 결승골을 작렬하여 1-0으로 승리[4], 통산 세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당시 유러피언 컵을 3회 우승한 감독은 역사상 전무했기에 페이즐리는 유럽 축구사 최초로 3차례 빅이어를 들어올린 감독이 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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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컵 최다 우승 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다.

해당 시즌 페이즐리호는 리그에서 주포 달글리시의 득점력 저조로 인해 부침을 겪으며 우승에 실패하고 추락했지만, 사상 최초의 리그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실로 오랜만에 자국 컵대회에서 결실을 맺었고, 테리 맥더모트가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면서 리그 13골을 포함 시즌 22골로 팀 최다 득점자에 오르는 활약을 펼친 끝에 유러피언컵을 다시 쟁취하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시즌 맥더모트와 그레이엄 수네스는 중원 자원임에도 팀의 공격수들 대신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이며 공동 유러피언컵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역사적인 세 번째 빅이어에 힘입어 페이즐리는 1981년 유럽 올해의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3.8. 1981~1982 시즌

1981년 여름에는 그동안 팀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쳐주었던 베테랑들이 다수 팀을 떠나게 되었다. 지미 케이스, 콜린 어윈, 레이 클레멘스, 스티브 하이웨이가 이적했으며, 이후 겨울에는 레이 케네디와 데이비드 페어클러프도 팀을 떠났다. 페이즐리는 지난 시즌에 영입된 크레이그 존스턴, 브루스 그로벨라를 비롯해 보유한 선수단이 강력한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었기에 많은 영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수비진의 확실한 안정화를 위해 마크 로렌슨, 스티브 니콜을 영입하여 팀의 밸런스를 다졌다. 그러나 리버풀은 리그 초반 개편된 스쿼드가 자리잡지 못하며 개막 후 11경기 3승 4무 3패의 저조한 성적으로 리그 레이스를 시작하고 말았고, 시즌 중반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했다. 이에 페이즐리는 팀의 주장을 1982년 1월 첫 경기를 기점으로 필 톰슨[6]에서 그레이엄 수네스에게로 넘기는 등 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데 힘을 썼고, 이러한 노력이 효과를 보아 팀은 겨울에 다시 반등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후 케니 달글리시의 폼이 돌아오고 젊은 스트라이커 이안 러시의 득점포가 터지기 시작하자 리버풀은 무섭게 상승가도를 타기 시작했다.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바뀐 분위기와 새로운 투톱진의 파괴력에 힘입어 리그 마지막 16경기에서 11연승을 포함해 13승 3무를 기록하며 리그 1위 자리를 탈환했고,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스위치 타운과 같은 경쟁팀들을 멀리 제치고 26승 9무 7패로 통산 13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FA컵에서는 첼시 FC에게 5라운드에서 패했으나, 리그컵에서 리버풀의 강세는 다시 이어졌다. 리버풀은 해당 대회 이안 러시의 득점 행진을 앞세워 무패로 결승전까지 진출하였고, 결승전에서는 레이 클레멘스가 합류한 토트넘 홋스퍼를 만나게 되었다. 리버풀은 전반 11분 일찍이 실점한 이후 87분까지 끌려가다가 로니 웰란의 천금같은 동점골이 후반 막판에 나오면서 승부를 제자리로 돌렸고, 이후 연장에 돌입하여 웰란의 역전골과 러시의 119분 쐐기골로 3-1 승리, 통산 두 번째 리그컵 우승이자 리그컵 2연패를 달성했다.

유러피언컵에서는 8강까지 순항했으나 8강 CSKA 소피아 원정에서 일격을 맞아 아쉽게 탈락하여 다시 왕좌에 오르지는 못했고, 지난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팀 자격으로 인터컨티넨탈컵에 참가해 도쿄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으로 떠났으나, 당대 브라질 최고의 선수 지쿠가 이끄는 남미 최강팀 CR 플라멩구를 만나 3-0으로 대패하여 유럽 최강의 자존심을 구겼다. [7] 하지만 이 시즌 페이즐리는 본인이 왜 잉글랜드 최고의 감독임을 또 다시 증명했고 본인의 다섯 번째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3.9. 1982~1983 시즌

파일:bobsmilkcup.jpg
밥 페이즐리의 마지막 트로피였던 1983년 리그 컵

페이즐리는 80년대에 접어들며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헌신해온 리버풀을 떠날 결심을 굳혀오고 있었다. 결국 1982-83 시즌 시작 전, 페이즐리는 마지막 한 시즌을 치른 뒤에 감독직을 내려놓겠다며 은퇴를 예고했다. 때문에 이 시즌은 페이즐리의 감독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리버풀은 1982년 여름에 테리 맥더모트 데이비드 존슨을 떠나보낸 뒤, 큰 보강은 하지 않았으나 시즌 시작 후 채리티 실드에서 토트넘 홋스퍼를 꺾고 우승한 뒤 계속적으로 리그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 리그 중반기엔 20경기 무패를 달렸고 시즌 막판까지 1위 자리를 여유롭게 지켜냈다. 이에 리버풀은 마지막 리그 7경기에서 2무 5패를 기록했음에도 24승 10무 8패로 2위 왓포드 FC와 승점 9점차를 만들면서 통산 14번째 리그 우승으로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페이즐리호는 마지막 시즌까지 FA컵에서 5라운드 탈락하면서 그 많은 트로피 중 이상하게도 FA컵과는 끝까지 인연이 없었으나, 리그컵에서는 이전 시즌들처럼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볍게 결승전에 진출했다. 이후 숙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에서 FA컵의 복수를 성공하며 2-1로 승리를 거두어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리그컵 3연패를 이루면서 페이즐리의 마지막은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 시즌 리그컵 결승이 열린 1983년 5월 26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리버풀 선수들은 페이즐리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가 트로피를 받으러 가장 먼저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양보했고, 항상 선수들 뒤에서 트로피를 축하했던 페이즐리는 본인의 커리어 마지막 컵 트로피를 가장 먼저 들어보이며 리버풀 팬들에게 감동적인 순간을 남겼다. 유러피언컵에서는 폴란드의 비제프 우치 원정에서 패배한 스코어를 뒤집지 못해 아쉽게 8강에 그쳤다.

커리어 마지막 시즌, 페이즐리는 자신의 여섯 번째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박수를 받으며 명예롭게 축구계를 떠났다. 은퇴 시즌까지 총 44년을 리버풀에서 보낸 그의 나이 63세였다. 샹클리로부터 이어져와 페이즐리가 완성한 위대한 붉은 제국의 스쿼드는 부트 룸이 낳은 또 한 명의 레전드 코치이자 리버풀 정신의 후계자인 조 페이건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조 페이건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페이건 체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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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밥 페이즐리의 시즌별 주요 성적
시즌 리그 FA EFL CS UCL UEL USC CWC ICC 감독
1974-75 시즌 2위
( = )
4R 4R 우승
(4회)
- - - 2R - 밥 페이즐리
1975-76 시즌 우승
(9회)
4R 3R - - 우승
(2회)
- - -
1976-77 시즌 우승
(10회)
준우승 2R 우승
(5회)
우승
(1회)
- - - -
1977-78 시즌 2위
( 1)
3R 준우승 우승
(6회)
우승
(2회)
- 우승
(1회)
- -
1978-79 시즌 우승
(11회)
4강 2R - 1R - 준우승 - -
1979-80 시즌 우승
(12회)
4강 4강 우승
(7회)
1R - - -
1980-81 시즌 5위
( 4)
4R 우승
(1회)
우승
(8회)
우승
(3회)
- - - -
1981-82 시즌 우승
(13회)
5R 우승
(2회)
8강 - - - - 준우승
1982-83 시즌 우승
(14회)
5R 우승
(3회)
우승
(9회)
8강 - - - -

6. 평가

파일:Legendary Managers of LFC.jpg
리버풀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명장들[8]
파일:8622706-6600173-image-a-20_1547675860899.jpg
리버풀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었던 밥 페이즐리의 커리어

밥 페이즐리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리버풀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장. 페이즐리는 9년의 리버풀 재임 기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조직력과 강력한 전술, 전략을 팀에 불어넣으면서, 리그 우승 6회, 유러피언 컵 우승 3회, UEFA 컵 우승 1회, 리그 컵 우승 3회, 채리티 실드 우승 6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라는 압도적인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1978년과 1981년 사이 안필드 63경기 무패 행진[9]을 이어가는 등, 첫번째 전성기를 이끈 샹클리호보다도 더 월등한 모습으로 잉글랜드의 어떤 클럽도 리버풀의 위상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며,[10]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전역을 호령하는 명성을 떨쳤다.

페이즐리는 9시즌을 감독으로 보내는 동안 리버풀에서 총 20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9년의 시간 동안 시즌마다 트로피 한개씩은 무조건 따내 트로피 진열장을 채워놓는 무서운 저력을 보였다. 그는 감독 커리어 동안 시즌 당 트로피를 평균 2.2개씩 들어올린 셈이며, 이는 잉글랜드 리그 역사상 시즌 당 최다 평균 우승 횟수이다.[11] 그의 커리어가 더 대단한 점은 단순히 트로피의 갯수만 많은게 아니라는 것.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9시즌 중 6번의 리그 우승을 챙긴데다가 1978-79 시즌엔 42경기 30승 8무 4패[12]에 단 16실점[13]을 기록했을 정도로 절정의 리그 운영력을 보여줬음은 물론, 유럽 무대에서도 9시즌 간 77년, 78년의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비롯하여 세 차례나 빅이어를 들어올렸고 UEFA컵과 슈퍼컵을 포함해 5개의 타이틀을 따내는 대단한 지배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그는 2022년 카를로 안첼로티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 41년간 유로피언 컵 최다 우승 감독 기록이기도 했다. 즉, 페이즐리는 비교적 수월한 국내 컵 대회 뿐 아니라 팀에게 최대의 메이저 무대인 리그와 유럽 대항전을 모두 휩쓸었던 감독. 이에 그는 10년이 채 안되는 리버풀 커리어를 보냈음에도 명실상부 리버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임은 물론 역사상 모든 잉글랜드 국적 감독을 통틀어 가장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14][15]

또한 페이즐리는 본인을 스스로 전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리버풀이 최절정의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에 샹클리 시대에서 더 발전한 전술을 도입함으로써, 현대적인 축구를 개발한 감독이기도 했다. 그는 샹클리가 마지막 시즌에 유러피언컵에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상대로 패배하는 것을 지켜본 뒤, 감독으로 부임하여 리버풀에 대륙 축구의 후방 빌드업과 포제션 축구를 처음 제시한 선구자적 감독이었고, 고전적인 피지컬 플레이 중심의 수비진에서 탈피해 미드필더 출신의 엠린 휴즈, 필 톰슨 등을 센터백으로 기용하고[16] 브루스 그로벨라와 같은 스위퍼 키퍼를 활용하는 등 당대로서는 혁신적인 후방 조합을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리버풀은 좀 더 점유와 정확한 빌드업을 중심으로 샹클리의 패스 앤 무브먼트 전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페이즐리는 공격수였던 레이 케네디를 왼쪽 미드필더로 돌려 재능을 만개시키고 케니 달글리시를 스트라이커보다 약간 처진 위치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기용하여 이안 러시와의 강력한 투톱 조합을 구축하였으며 테리 맥더모트- 그레이엄 수네스 투미들 라인을 공격적으로 활용하여 공격진의 부진을 극복하고 득점력을 유지하는 등, 선수들의 장점에 맞는 부분 디테일 활용과 적재적소의 기용 및 판단에도 상당히 능했다. 특히 상대 전술에 맞는 맞춤 전술을 짜서 나오는 능력도 탁월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전임자인 샹클리[17]보다도 더 칼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전성기에서 지난 선수들의 방출에 엄청나게 냉정한 모습[18]을 보여주는 등, 스쿼드에 대한 판단이 매우 우수했고, 케니 달글리시, 앨런 한센, 그레이엄 수네스와 같은 전설적인 영입 성공을 연달아 터트리는 등 대체 선수 영입 판단과 선수 발굴에도 매우 능한 감독이었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선수들과의 의사소통에 능숙한 감독은 아니었고, 앞으로 직접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던만큼 언론 대응에도 좋은 능력을 가진 감독은 아니었다. 이에 데이비드 존슨이 페이즐리의 의중을 읽기 힘들어 팀에 영입된 이후 답답함을 토로했던 사건[19]도 있었고, 샹클리처럼 대외적으로 유명한 인터뷰나 강한 라커룸 토크의 일화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 편. 이러한 지점은 페이즐리의 유일한 단점으로 꼽히며 전임자인 샹클리와 가장 대비되는 지점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샹클리와 같은 카리스마와 달변가적 능력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주장 엠린 휴즈가 부상을 당하자 피치로 들어가 직접 그를 업고 나오는 등 나름의 부드러운 리더십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페이즐리는 감독 뿐 아니라 선수와 코치로도 리버풀에 엄청난 기여를 했던 인물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팀에서 줄곧 핵심 선수로 활약했고 빌 샹클리의 수석 코치로도 리버풀을 이끌었다. 그는 선수로 활약한 기간 동안 24년만의 팀의 1부 리그 우승에 공헌했으며, 경기 중 충돌로 정신을 잃었음에도 곧장 그라운드로 복귀하여 헤딩을 위해 머리를 날렸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선수로 유명했다. 그는 팀의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이에 현역 시절에도 전후 시기 팀을 지탱한 레전드급 선수로 평가받는다. 이후 코치 시절에는 샹클리 사단의 두뇌로서 팀의 전술과 운영에 있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능력있는 핵심 코치로서 알려졌다. 샹클리가 리버풀 감독으로 부임하던 때, 팀의 동기부여 측면은 샹클리가 담당하고 세부적인 전술은 페이즐리가 담당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이렇게 코치 시절에 키워온 전략적 능력이 감독으로 발현되어 상기 언급했듯이 리버풀 역사에 있어 손 꼽히는 전술가가 되었다. 그는 선수와 코치 시절만 해도 1부 리그 3회 우승, 2부 리그 1회 우승, FA컵 2회 우승, 채리티 실드 3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이라는 레전드급 커리어를 보냈다.

종합하자면, 선수, 코치, 감독으로서 44년을 팀에 헌신하며, 리버풀을 2부 리그에서부터 유럽 최정상의 위치까지 올려놓는 과정에 모두 기여한 전설적인 인물. 선수와 코치로서는 팀의 도약기를 이끌었고 감독으로서는 팀의 최고점을 지도했다. 이에 그는 빌 샹클리와 함께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이자 샹클리의 팀을 진일보시킨 감독이자 전술가로 평가받으며, 모든 리버풀 커리어에서 그는 총합 1부 리그 10회, 2부 리그 1회, FA컵 2회, EFL컵 3회, 채리티 실드 9회, 유러피언 컵 3회, UEFA컵 2회, UEFA 슈퍼컵 1회 우승의 기염을 토했다. 빌 샹클리가 구단의 정체성을 다지고 팀의 시스템을 창조한 선구자 격의 감독이었다면, 페이즐리는 명실상부 유럽을 지배한 구단 역사상 최강의 팀을 이끌었던 감독. 이에 리버풀 클럽 한정으로는 샹클리가 최고의 감독일지언정, 외부적으로는 페이즐리가 더 굵직한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0]

[1] 1970년대에만 무려 5번의 분데스리가 우승, 2번의 DFB-포칼 우승과 UEFA컵 우승을 거둔 팀이었으며, 귄터 네처, 유프 하인케스, 울리 슈틸리케, 베르티 포크츠, 라이너 본호프, 알란 시몬센 같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앞세워 1974-75시즌부터 1976-77시즌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이는 오직 분데스리가에서는 바이에른 뮌헨과 묀헨글라트바흐만 가진 기록. [2] 이는 42경기 기준 현재까지도 역대 잉글랜드 리그 최다 승점, 최소 실점 기록이다. [3] 리버풀을 꺾고 올라간 노팅엄 포레스트는 해당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4] 이 경기가 2024년 현재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및 챔피언스 리그 마지막 결승전 패배다. [5] 2014년에 카를로 안첼로티가 타이를 이루기 전까지 페이즐리는 33년간 단독으로 최다 빅이어 보유 감독이었다. 이 기록은 2022년 안첼로티가 4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며 41년만에 추월되었다. [6] 시즌 초중반까지 폼이 좋지 못했고 치명적인 실책을 보이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서 주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주장직을 물려받은 수네스에게 앙심을 품어 두 선수의 사이가 많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7] 당시 리버풀 선수단은 해당 대회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남미 축구를 저평가했고, 도쿄로 원정을 떠나 경기 전날까지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제대로 일격을 맞았다. [8] 좌측부터 차례로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 라파엘 베니테스, 위르겐 클롭 감독이 자리해 있으며, 모두 리버풀 소속으로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일궈낸 인물들이다. 해당 배너는 리버풀의 홈 구장 안필드의 스피언 콥 스탠드에 대형 플래그로 자주 등장한다. [9] 2020년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이 이 기록을 추월했다. [10] 리그에서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1977년부터 1982년 사이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끄는 노팅엄 포레스트와 론 손더스와 토니 바튼이 이끄는 아스톤 빌라와 경쟁했고, 1980-81시즌과 1981-82시즌에는 바비 롭슨이 이끄는 입스위치 타운, 1976-77시즌에는 토니 북이 이끄는 맨체스터 시티, 1975-76시즌과 1976-77시즌에는 토미 도허티가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많은 다른 클럽들의 도전을 받았으나, 그 어떤 클럽도 이 시기 페이즐리의 리버풀을 상대로 우위를 보여주진 못했다. [11] 트로피를 밥먹듯이 수집해온 알렉스 퍼거슨 펩 과르디올라의 경우에도 잉글랜드 무대에서 시즌 당 평균 우승 횟수가 2회를 넘지 못한다. [12] 당시엔 승리 승점이 2점이었다. [13] 42경기 기준 리그 최소 실점 기록이다. 38경기 기준으로는 첼시의 15실점이 기록. 홈 무패 홈에서 단 4실점. [14]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2010년대를 넘어가며 커리어를 완성하기 이전까지는 잉글랜드 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이기도 했다. 재임 기간이 짧아서 그렇지 여전히 재임 기간 동안의 평균으로 따지면 리그 역사상 최고점을 보유한 감독이기도 하다. [15]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즐리는 FA컵을 우승하지는 못하였다. [16] 이후엔 발밑이 매우 부드러웠던 센터백 앨런 한센이 수비진의 주축이 되었다. [17] 샹클리도 대규모 리빌딩에 칼을 빼들었던 감독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선수들을 믿고 지켜보는 기간이 있었던 반면, 페이즐리는 최고의 활약을 펼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테리 맥더모트가 전성기에서 지났다고 판단되자 즉각 팔아버리는 등 샹클리보다 훨씬 더 칼같았다. [18] 물론 본인은 이 작업을 즐기지는 않았다고 하나 무자비하다는 평을 들었을만큼 스쿼드 물갈이에 냉정했다. [19] 존슨은 "페이즐리와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불안감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라는 언급을 남겼다. [20] 실제로 샹클리는 상징성 때문에 팀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케이스이기 때문에, 표면적인 커리어 자체는 개인 수상적 측면에서도 페이즐리가 더 뛰어나다. 페이즐리는 리그 올해의 감독을 6회나 수상했으며, 유럽 올해의 감독, 유럽 시즌의 감독도 각각 1회씩 수상했을만큼 개인 커리어도 뛰어나다. 페이즐리는 2013년 ESPN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순위 4위, 2013년 월드사커지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순위 8위에 선정되는 등 세계 축구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