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테일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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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9대 |
리버풀 FC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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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발머 (1947~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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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테일러 (1950~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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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존스 (1953~1954) |
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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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테일러 Phil Tay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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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
필립 헨리 테일러 Philip Henry Tay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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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9월 18일 | |
잉글랜드 브리스톨 | ||
사망 | 2012년 12월 1일 (향년 95세) |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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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선수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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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브리스톨 로버스 FC (1935~1936) 리버풀 FC (1936~1954) |
지도자 |
리버풀 FC (1954~1956/코치) 리버풀 FC (1956~1959/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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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3경기 ( 잉글랜드 / 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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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으로, 리버풀 FC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뛴 바 있으며 은퇴 이후 리버풀 FC의 9대 감독을 역임했다.리버풀 구단 선수 출신으로 감독직을 역임한 역사상 두 번째 인물이다.[1]
2. 선수 경력
테일러는 1935년부터 1936년까지 그의 고향 클럽 브리스톨 로버스 FC에서 유소년 선수로 뛰며 선수 경력을 시작했는데, 이후 그는 리버풀 FC의 조지 패터슨 감독의 눈에 띄어 5천 파운드의 이적료로 리버풀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는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데뷔 골을 득점하며 팀을 2-2 무승부로 이끈 이후, 잠재력이 풍부한 젊은 미드필더로서 성장해나갔다. 그는 조지 케이 감독이 리버풀에 부임한 뒤에는 포지션을 바뀌, 세련되고 침착한 수비수로 활약을 이어나갔다.리버풀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46-47 시즌에 1부 리그 정상을 차지했던 것으로, 당시 테일러는 35차례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1득점을 기록했다. 그는 팀의 주전 선수로서 꾸준히 활약을 이어갔고 1949-50 시즌에는 팀의 주장직을 맡는 명예를 누렸다. 그는 주장으로 부임한 시즌에 팀을 FA컵 결승전으로 이끌기도 했다.
약 8년간 리버풀에서 활약한 테일러는 1954년 선수 생활을 마감했고, 리버풀 소속으로 총 345경기에 출전해 34골을 기록하며 리버풀 서포터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떠났다.
3. 지도자 경력
1954년 은퇴 직후부터 테일러는 코치로 리버풀 스태프진에 합류하였고, 돈 웰시 감독 아래에서 선수단을 지도하는 역량을 길러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1956년 웰시 감독이 1부 리그 승격에 실패하고 경질당하자 그는 리버풀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테일러는 리버풀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겠다는 일념으로 감독직에 전념을 다했고, 앨런 에이코트, 토미 영, 로니 모란 등 후에 리버풀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게 되는 선수들을 영입하며 전력을 다졌다.팀을 정비하여 테일러는 세 시즌 동안 팀을 리그 3위-4위-4위에 올려놓았고 아깝게 승격에는 계속해서 실패했다. 구단은 1959년 1월 FA컵 3라운드에서 논리그의 우스터 시티에게 탈락하는 충격적 패배를 겪고도 끝까지 테일러를 신뢰했으나, 테일러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1959-60 시즌의 부진한 스타트와 함께 감독직을 스스로 사임했다. 그는 당시 승격을 위한 부담이 너무나도 컸다고 언급하며 지역지 '리버풀 에코'에 "리버풀을 1부 리그로 돌려놓지 못한 전임 감독의 실망이 아무리 컸더라도, 저만큼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목표가 있었고 마음을 다잡고 힘껏 목표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제 노력은 충분하지 못했고, 이제는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역할을 넘겨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테일러는 비록 1부 리그 승격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리버풀을 이끌며, 훌륭한 유망주들과 코치들을 다수 영입하는 성과를 올렸다. 상기 언급한 에이코트, 영, 모란을 비롯하여 리버풀의 전설적인 공격수 로저 헌트가 테일러에 의해 팀에 데뷔했고, 루벤 베넷, 조 페이건, 밥 페이즐리 등의 팀 역사상 최고의 코치들이 테일러에 의해 팀에 자리잡았다. 이러한 테일러의 유산은 후임 감독 빌 샹클리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리버풀을 떠난 테일러는 다른 팀의 감독을 맡지 않고 곧바로 축구계에서 은퇴하였으며, 2012년 12월 1일 사망했다.
4. 기록
4.1. 선수
- 리버풀 FC (1936~1954)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46-47
5. 여담
- 상당히 장수한 인물이다. 향년 91세로 사망하여 빌 샹클리 감독 이전 세대임에도 리버풀의 열여덟 번째 리그 우승과 다섯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지켜봤다.
- 리버풀에서 선수, 코치, 감독을 두루 거치며 구단에 상당히 긴 족적을 남겼다. 선수로서는 2차 대전 직후 리그 우승 멤버이며, 팀의 주장을 역임한 바 있고, 지도자로서는 비록 뚜렷한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으나 후에 레전드급 인물들로 성장하는 위대한 코치들과 선수들을 팀에 불러모았다. 이에 리버풀에서 팀을 구축한 레전드급 인사로 존경받는다.
- 크리켓 선수이기도 하여 실제로 프로 크리켓 경기에 출전한 경력이 있다.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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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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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 ||||
초대 바클레이 ☆ |
2대 맥케나 ☆ |
3대 왓슨 ★★☆ |
4대 애시워스 ★ |
5대 맥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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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패터슨 |
7대 케이 ★ |
8대 웰시 |
9대 테일러 |
10대 샹클리 ( 샹클리 체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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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페이즐리 ( 페이즐리 체제) ★★★★★★ ★★★★★★★★ |
12대 페이건 ( 페이건 체제) ★★★ |
13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1기)) ★★★ ★★ |
14대(대행) 모란 ( 모란 체제) |
15대 수네스 ( 수네스 체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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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에반스 ( 에반스 체제) ★ |
16&17대 에반스& 울리에 ( 에반스&울리에 체제) |
17대 울리에 ( 울리에 체제) ★★★★★ |
18대 베니테스 ( 베니테스 체제) ★★★ |
19대 호지슨 ( 호지슨 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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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2기)) ★ |
21대 로저스 ( 로저스 체제) |
22대 클롭 ( 클롭 체제) ★★★★ ★★★ |
23대 슬롯 ( 슬롯 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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