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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1:50:35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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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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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1949년-1954년)
초대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주석
(1954년-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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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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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지도자들 & 혁명가들 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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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SNS 시나 웨이보에서 발표한 중국인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중국인' 명단이다.
TOP 10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공자 시황제 노자 채륜 한무제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오쩌둥 맹자 수문제 주자 덩샤오핑
11~25위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사마천 한고제 장자 당태종 장중경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이사 송태조 주문공 굴원 동중서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홍무제 석도안 염민 장건 상앙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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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0>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마오쩌둥
[ruby(毛, ruby=Máo)][ruby(泽, ruby=Zé)][ruby(东, ruby=dōng)](毛澤東, 모택동) | Mao Zedong
파일:마오쩌둥.png
출생 1893년 12월 26일
호남성 상담현 소산구
(現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샹탄시 샤오산시)
사망 1976년 9월 9일 (향년 82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시청구 중난하이
묘소 모주석기념당
재임기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1]
1949년 10월 1일 ~ 1959년 4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2]
1943년 3월 20일 ~ 1976년 9월 9일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주석
1943년 3월 20일 ~ 1956년 9월 28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54년 9월 8일 ~ 1976년 9월 9일
서명
파일:마오쩌둥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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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본관 소산(韶山) 모씨 20세손
부모 아버지 마오이창(毛貽昌) ,(1870 ~ 1920),
어머니 원쑤친(文素勤) ,(1867 ~ 1919),
형제자매[3] 큰 남동생[4]: 마오쩌민(毛澤民)
작은 남동생[5]: 마오쩌탄(毛澤覃)
여동생: 마오쩌젠(毛澤建) ,(양녀),
배우자 뤄이슈(羅一秀)
양카이후이(楊開慧)
허쯔전(賀子珍)
장칭(江靑)
자녀 장남: 모안영(毛岸英) ,(1922 ~ 1950),
차남: 모안청(毛岸青) ,(1923 ~ 2007),
삼남: 모원지(毛遠智)[6] ,(1927 ~ 1931),
장녀: 양월화(楊月花) ,(1929 ~ ),
사남: 모안홍(毛岸红) ,(1932 ~ 사망),[7]
차녀: 리민(李敏) ,(1936 ~ ),
삼녀: 리나(李訥) ,(1940 ~ ),
학력 후난성 사오산초등학교 (졸업)
광저우 둥산중학교 (수료)
창사 샹샹중학교 (수료)
창사 저우청 중학교 (수료)
창사 제1중학교 (졸업)
후난성 창사 제1사범학교 (졸업)
종교 불교 무종교 ( 무신론)
신체 172cm[8], 86kg, AB형
국적
[[청나라|]][[틀:국기|]][[틀:국기|]] ,(1893~1912),

[[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북양정부)
]][[틀:국기|
행정구
중화민국(북양정부)
]][[틀:국기|
속령
중화민국(북양정부)
]] ,(1912 ~ 1928),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국민정부) ,(1928 ~ 1931),

[[중화소비에트공화국|]][[틀:국기|]][[틀:국기|]] ,(1931 ~ 1937),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국민정부) ,(1937 ~ 1949),

[[중국|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틀:국기|
행정구
중화인민공화국
]][[틀:국기|
속령
중화인민공화국
]]
,(1949 ~ 1976),
소속 정당
자(字) 룬즈(潤之 : 윤지), 융즈(咏芝 : 영지)
호(號) 쯔런(子任 : 자임) }}}}}}}}}

1. 개요
1.1. 이름 표기
2. 생애
2.1. 세계(世系)2.2. 가족
2.2.1. 기타
2.3.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3. 평가4. 성격
4.1. 지도력4.2. 권력의 달인4.3. 군대식 사고4.4. 전략적 허세4.5. 치밀한 정치가
5. 사생활6. 사상
6.1. 마오주의6.2. 사상적 뿌리6.3. 혁명 이론6.4. 군사 이론6.5. 네팔, 인도의 마오주의자들, 낙살라이트
7. 어록
7.1. 일본 관련 어록
8. 관련 도서9. 기타10. 각종 매체에서11. 참고 문헌12. 관련 인물
12.1. 공산당12.2. 국민당12.3. 해외12.4. 사건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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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마오쩌둥 열병식 초상.jpg
'''2019년 국경절 열병식에 등장한 초상화 '''
同胞們,中華人民共和國中央人民政府今天成立了![9]
동포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수립됐소!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 한국어 번역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국가 주석 및 당 주석 자리를 오래 독점했던 것에 비추어 중화권에서는 마오 주석(毛主席), 영미권에서는 Chairman Mao로도 통한다.[10]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대장정 과정에서 당권을 장악했다. 수십 명에 불과한 일개 게릴라 부대의 지도자였으나 중일전쟁 기간 중화민국 일본군의 격전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고, 일본 패망 이후엔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의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손에 넣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을 수립하고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선출되어 1976년까지 종신 집권했다. 한편으론 농본주의를 강조한 마오주의를 주창해 제3세계[11] 공산주의 혁명에 큰 영향을 준 사상가이자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집권 이후 독선과 권력욕에 의한 실책들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들을 여럿 야기해 중국의 발전을 정체시킨 것을 넘어 퇴보시켰으며, 자신만의 일방적 이념으로 중국 사회를 개조하려고 한 폭군으로, 인류에 대한 전대미문의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로 비판을 받을 때가 많다. 또한 중국의 문화재를 파괴하고 전통 문화를 뿌리뽑은 폭력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며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을 통해 6.25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북진통일을 저지시켜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크메르 루주 폴 포트, 조선로동당 김정일, 에티오피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과 더불어 가장 잔혹한 독재자로 평가 받는다. 또한 천안문 광장에 대형 초상화의 얼굴 모델로 유명하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공과 과가 극명하게 대비대는 인물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러시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국가 발전을 그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행정력으로 밀어부쳐 신화적인 공업화의 성공을 이루어내고 강대한 부국을 이루어 내긴 했으나, 우크라이나 대기근, 카틴 학살, 대숙청 등오로 수천만 소련 인민들에게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폭정과 학정 을 가해하여 수천만 인민들에게 무수한 피눈물과 통곡 소리, 울음소리로 소련의 하늘을 한가득 울린 세계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었다.

이는 마오쩌둥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대장정의 시련을 끝끝내 견디어내어 상황을 역전시키고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거머쥐는 대업을 달성하였다.

대장정은 가히, 전진(오호십육국시대)의 3대 황제인 부견이 천하를 잃은 대전인 비수대전 이후 패주하는 절망적인 상황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견과 달리 마오쩌둥은 끝내 다시 일어나서 농민들의 민심을 얻어내 다시금 세력을 확장하여 끝끝내 혼일사해의 대업을 이룬 명장이었다.

비록 일본 제국의 침략이라는 시대적 강운이 따라주었음은 분명하고, 부견 황제와 달리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마오쩌둥이었으나 운 또한 실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수차례의 초공작전으로 인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존할 수 없음이 필연이었으며, 한고제 팽성대전에서 패주할 때 불어닥친 폭풍우나, 조조 여포의 연주 침공때 황충(곤충)의 범람, 주원장 진우량의 천하결전인 파양호 대전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뀐 상황이 주원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주원장이 원말명초의 최종 승리자로 우뚝 일어선 일처럼, 세상 모든 일은 운팔기이(運八技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법이고, 장제스가 얻지 못한 인민 절대 다수의 농민들의 마음을 얻어내 대업을 이뤄낸 것은 분명한 마오쩌둥의 공이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의 정치인 마오쩌둥은 진시황, 이세황제, 한무제, 한환제, 한영제, 오나라 손호, 후조 석호, 염위 염민, 유송 전폐제, 후폐제, 남제 전폐제, 후폐제, 후연 모용희, 수양제, 당의종, 송휘종, 흠종, 가정제, 만력제와 더불어서, 그리고 이들을 뛰어넘는 최악의 폭정과 학정을 5억 인민들에게 가해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기도 하다.

5천 년 중국사를 대표하는 난세의 명장,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이자 폭군으로서, 한고제, 광무제, 홍무제의 뒤를 이어서 장제스와 더불어 맨몸으로 일어나 혼일사해의 대업을 이룬 인물이긴 하나, 그 공을 다 가리고도 남을 만큼의 폭정과 학정을 가해한 폭군으로서의 양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1.1. 이름 표기

한글 표기의 경우, 신해혁명 이후 중국 인명이므로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한 마오쩌둥이 표준이나, 한국식 한자 독음에 따른 표기인 모택동(毛澤東) 역시 널리 쓰인다.[12] 과거에는 이렇게만 불렀다.[13] 연변 자치주와 북한의 경우에는 아직도 한국 한자음으로 표기하고 읽는 것이 표준이다.

한편 현지음을 표기할 때, 한어 병음 철자 'dong'에 'o'가 들어가기에 '동(똥)'으로 적어야 옳지 않은가 하는 견해가 있지만, 표준 중국어에서 해당 음절(ㄉㄨㄥ)의 운모(ㄨㄥ)는 IPA로 /ʊŋ/이다. /ʊ/는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이다. 한글의 /ㅗ/ 모음보다는 전설성이 강하며 /ㅜ/ 모음보다는 저모음이다. 이 /ʊ/ 모음을 한어 병음에서는 'o'로,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서는 'u'로,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ㅜ'로 전사할 뿐이다. 운모 'ㄨㄥ'은 주음 부호상 'ㄨ(u, 우)'에 'ㄥ(eng, 엉)'이 연쇄된 것이고, 단독으로 발음될 때, 즉 성모가 없는 영성모(零聲母)일 때는 주음 부호 표기대로 [u̯əŋ~wɤ̞ŋ\]으로 발음되나, 앞에 성모가 있는 경우에는 [-ʊŋ\]이 된다.[14] 한어 병음에서는 영성모인 경우를 'weng', 성모가 있는 경우를 '-ong'으로 표기하고,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서는 영성모인 경우를 'wêng', 성모가 있는 경우를 '-ung'으로 표기하며, 외래어 표기법 및 조선족의 중국어 발음 한글 전사에서는 영성모인 경우를 '웡', 성모가 있는 경우를 'ᅟᅮᆼ'으로 표기한다. 즉 '마오쩌둥'이라는 표기는 잘못된 게 아니다.

로마자 표기로는 한어병음 표기인 Máo Zédōng에서 성조 부호를 생략한 Mao Zedong이 널리 쓰이는데, 과거에는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른 표기 Mao² Tsê²-tung¹에서 성조 번호와 diacritics을 생략하여 Mao Tse-tung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영미권의 문헌 중에는 Mao Tse-tung으로 표기된 문헌이 많다.[15]

마오쩌둥의 모어인 상어에 따른 로마자 표기는 Mau²²³ Zeh²³ton⁴⁴이며 대략 [마우쩨똔] 정도의 발음이다.

일본에서의 표기는 신자체를 적용한 '毛沢東'이며, 발음은 일본식 음독대로 'もうたくとう'이고 [모ː타쿠토ː] 정도이다.

베트남에서는 쯔꾸옥응으로 Mao Trạch Đông이며, 외래어 표기법/베트남어에 따르면 '마오짝동'.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마오쩌둥/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1. 세계(世系)

시조부터 본인까지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태화(太華)[16] → 청일(淸一) → 유공(有恭) → 진(震) → 종문(從文) → 산(珊) → 입요(立堯)[17] → 현양(顯暘) → 영욱(榮頊) → 조외(朝巍) → 사고(士翶) → 문방(文邦) → 방순(方淳) → 운선(運選) → 제요(際耀) → 상환(祥煥) → 조인(祖人) → 은보(恩普) → 이창(貽昌) → 택동(澤東)

2.2. 가족

마오쩌둥은 생전 4명의 아내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아내, 아들, 딸이 죄다 각각 4명씩이다.

2.2.1. 기타

2.3.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마오가 처음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은 고향 후배 류사오치였다. 류사오치는 대장정 중의 쭌이 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가 당권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류사오치는 홍구파인 다른 중공중앙의 주류들과 달리 도시 노동자 운동을 전개한 백구파 지도자였고, 농촌에 기반했다는 이유로 마가린 공산주의라고 눈을 홉뜨고 있는 스탈린을 설득하기에도 좋은 선택이었다. 따라서 1945년, 7차 당대회 이후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이 휴가나 외유를 떠날 때마다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대행하면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군신 관계에 가까운 카리스마를 구축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독립적인 후계자로 마음대로 하게 놔둘 생각 따윈 전혀 없었고, 얼굴마담 정도로 적절히 이용해먹으면서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가오강 - 라오수스 사건이 적절하게 이용됐고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에게 기게 된다. 대약진 운동 시기 마오쩌둥은 반모진론을 내세운 저우언라이 천윈을 따르지 않고 국무원 정책 집행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 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서기처에 자신의 대약진 운동 방안을 명령하여 집행시키고 전반적인 당 조직 문제 등을 맡기며 류사오치의 위세는 더욱 올라가게 된다.

대약진 운동이 한창이던 1959년 4월 27일 마오쩌둥은 국가원수로서 귀찮은 의전과 많은 외교 활동이 수반되어 자신을 힘들게하는 국가주석직을 그만두고 이를 류사오치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권력의 중핵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을 넘어가면서 대약진 운동이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참사임이 드러나게 되었고, 둘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오쩌둥은 총노선은 옳았으며 '성공이 9할, 실패가 1할'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나 류사오치는 '천재지변이 3할, 인재가 7할'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마오쩌둥에게 맞섰다. 거기에 국가주석으로서 류 주석으로 불리게 된 류사오치의 위세는 대약진 운동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지성 중시, 도회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초점을 맞춰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총서기[19]와 함께 주도적으로 당 조직 문제를 담당하고, 실용주의 경제 정책을 시행함으로서 더욱 올라가 중국은 마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라는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반면 마오쩌둥의 권위는 상당한 타격을 입어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펑전이 마오쩌둥의 자아비판을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마오쩌둥은 마지못해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결과에 대한 주장인 '성공이 9할, 실패가 1할'의 평가를 정면으로 뒤집고 '천재지변이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다.'라며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분노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말을 막으면서 실패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고 반박했지만, 류사오치는 오히려 성공이 일부 지역에 국한될 뿐이라고 맞서고 마오쩌둥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역사가 이 행위를 심판할 것이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격렬하게 맞섰고 논쟁을 하며 싸웠다. 이러한 주장을 모욕으로 생각하고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에 대해 복수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여기에 1964년 소련에서 흐루쇼프 제1서기(서기장)가 쫓겨나면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자신에게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고 1965년에 그를 후계 선상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문화대혁명을 통해 숙청하였다.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으로 국가주석에서 실각하고 홍위병들한테 조리돌림 당한 다음에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배제한 이후 펑전과 덩샤오핑 중에 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펑전이 7천인 대회에서 반기를 들자 그를 즉각 배제하고 역시 문혁을 통해 숙청했으며, 덩샤오핑도 류사오치급 배신자는 아니지만 교정이 필요하단 이유로 타도하고 지방으로 하방시켰다. 그 이후 떠오른 것은 린뱌오였다. 린뱌오는 정강산 투쟁에 참전한 오랜 전우로, 비록 조금 정신상태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은 제일 확고했다. 그는 군내에서 마오쩌둥 우상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펑더화이,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전, 루딩이 등 마오쩌둥이 공격하라고 던져준 희생양들을 가차없이 물어뜯으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여기에 국방부장 재임 시에 중, 인 분쟁에서 인도군을 대파했기 때문에 군공도 컸다. 덕분에 린뱌오는 1966년 8월, 8기 11중전회에서 유일한 부주석으로 선출,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떠올랐다. 하지만 린뱌오는 국가주석직 폐지 문제를 놓고 마오쩌둥과 티격태격하다가 1970년 9기 2중전회에서 제대로 타격을 맞게 되었고, 이판사판으로 571 공정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달아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다만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군권이 지나치게 강화된 것 때문에 어차피 그를 숙청할 계획이었다는 분석도 있으며 571 공정의 실체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이 4인방의 한 명이던 왕훙원이다. 초등 중퇴인 일자무식이었던 왕훙원은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에서 조반 운동을 하며 떠오르고 곧 문화대혁명의 중심 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중앙 정계로 발돋음했고, 마오쩌둥은 그를 눈여겨보다가 후계자로 삼으려고 여러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그릇이 아니었던 왕훙원은 마오의 기대를 저버리고 중앙 정계에서 권력에 탐닉하고 여러 실무에서 무능을 보이는 등의 실책을 보이다가 눈 밖에 났다. 왕훙원에게 실망한 마오쩌둥은 다시 덩샤오핑을 국무원 부총리로 데려왔지만 덩샤오핑이 실용적 관점에서 실시한 개혁인 정돈사업이 부르주아적이라고 불만을 품게 되었고, 여기에 장칭과 마오위안신이 덩샤오핑이 주자파 반동이라고 이미 판단력이 매우 흐려진 마오쩌둥 옆에서 열심히 세뇌를 하면서 1976년 4월 7일 정치국 회의에서 덩샤오핑을 다시 숙청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이 선택한 사람은 후난성 고향 후배인 화궈펑이었다. 당시 후난성 당서기를 맡고 있었고 중앙 정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마오쩌둥은 그가 문화대혁명을 계속하면서도 장칭에게 지나치게 놀아나지 않고 어느 정도 중용의 노선을 걸으리라고 기대하고 그를 저우언라이의 후임 총리 및 중앙위원회 제1 부주석으로 보선하면서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오쩌둥 사후에 화궈펑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 내부 장군들과 사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듯 했으나, 결국 노회하고 능력도 좋지 않았다. 이때 하방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20]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라는 군부 내 실질적 지배자로서 성공적으로 복귀한 당-군 커리어가 훨씬 높았던 덩샤오핑에게는 역부족이어서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결국 마오쩌둥이 점지한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실패한 셈.

3. 평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이론가로서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를 지닌 중화민국을 상대로 승리한 군벌 지도자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엄청난 악행을 저질러 수억의 인민에게 최악의 고통을 선사한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위해서, 또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인간을 서슴없이 도구로 사용하고 어떠한 인명손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냉혹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신념과 절대권력을 유지하려 한 욕구 때문에 수천만 명이 굶어 죽거나 맞아 죽고, 나머지는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등 중국의 문명은 일시에 후퇴하였다. 이처럼 " 말 위에서 천하를 차지할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라는 중국 격언을 스스로 증명한 사람이며, 마오쩌둥을 계승하는 중국공산당과 중국 외부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을 격하한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와는 달리, 마오가 죽은 뒤 중국의 새로운 절대자로 등극한 덩샤오핑은 마오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했지만 "마오쩌둥의 공과는 7:3"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신화적 위치에서 끌어내리진 않았다. 소련에는 스탈린이 없어도 블라디미르 레닌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가능했다. 1956년 이전에는 주요 관공서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었으나, 스탈린의 초상화와 동상 등 선전물들은 모두 철거되고 레닌이 소련의 절대적인 우상이 되었다.

반면 마오쩌둥의 위상은 중국의 다른 인물로는 대체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비판에 민감하다. 천두슈 등 마오쩌둥 이전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창당 1세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에 모두 사망했거나, 쑨원 사후 장제스의 등장으로 시작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중화민국 국민당 정권의 정치적 탄압으로 급성장한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등을 위시한 신진 세력들에게 정당 내 주도권을 잃고 비공산주의자들로 전향했다.

혼란한 시기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인물이자, 국가 지도자로서는 폭군이며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악인이라는 점에서 20세기 시황제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어찌하던 공식적으로는 현대 공산 중국을 탄생시킨 국부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모든 위안화의 앞면에는 마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베이징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다.

4. 성격

4.1. 지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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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다루는 데 능했고 지도력이 좋았다. 그리고 성격 자체는 매우 친화력이 뛰어났다. 그의 지도력이나 인망이 이렇게 대단했기 때문에, 건국 후 아무리 잘못된 정책을 들고 나와도 부하들이 반대하지 못해 오히려 참극을 빚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집광적으로 의심이 많았고 사소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으며, 관용을 베푸는 것을 "가족주의"라고 하면서 매우 깠다. 일단 그는 한 번 원한을 품으면 잔인하고 비정하게 숙청했다. 이러한 면들이 문화대혁명을 불러왔다고 평가된다.

당 내의 그의 전직 라이벌들[21]은 결국 모두 중국을 떠나 망명했고, 그의 부하였으나 반대해 밉보였던 펑더화이 류사오치, 덩샤오핑, 주더 등은 모두 쫓겨났다.

4.2. 권력의 달인

세기의 독재자답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독재자면은 대약진 운동 실패로 책임을 지고 몰락하겠지만, 마오쩌둥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정치에 아주 능했고,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부하들에게 덮어씌우는 행동에 능했다. 그래서 대약진 운동 실패에 최대한 교묘하게 책임에서 비껴나와 계속해서 인민들에게 황제와 같은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개인 우상화에 얼마나 능한지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한데,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우상화 교과서를 만들면서 수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으니 권력에 관한 능력에서는 의심할 바가 없었다. 문화대혁명 직전 권력을 완전히 회복한 마오쩌둥은 이전보다 더욱 중국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는 그의 무시무시한 정치력을 알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22]

마오쩌둥은 이른바 '2인자 박치기'에 아주 능했다. 그는 어느 한편에 힘을 실어주다가도 너무 힘이 몰린다 싶으면 다른 쪽으로 다시 힘을 몰아주는 식으로 철저하게 권력의 저울을 팽팽하게 유지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린뱌오, 4인방, 저우언라이와 같은 인물들이 이런 식으로 제한된 권력을 가졌다가 몰락을 반복하는 식으로 관료 생활을 했으며, 주류 세력이 바뀔 때마다 계파 세력은 숙청을 당하고는 했다. 이런 권력 유지에 대한 촉은 죽기 직전까지 무척이나 예민해서,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와중에도 덩샤오핑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가 다시 힘을 빼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을 정도. 그래서 마오쩌둥의 부하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의 경우에는 국공내전 때까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 2인자 경쟁을 하면서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을 정도(덩샤오핑 평전 참조). 류사오치와는 7000인회의때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어 과거 자본가에 유화적 행위를 한 것을 빌미로 마오에 의해 실권하였다.

4.3. 군대식 사고

전문적으로 군사 교육을 받은 바 없지만, 게릴라 지도자로서 사고가 군대식으로 굳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실전에서 총을 쏴본 적이 거의 없으며, 게릴라 시절의 사진 중에서도 군복 차림은 많지만 총을 차고 있거나 들고 있는 사진은 거의 없다.

그래서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항상 정책이든 뭐든 간에 군대식으로 사고했으며, 일단 적으로 간주되면 무조건 섬멸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것이 잘 나타난 일화가 " 해로운 새다". 마오의 사상에는 못지않은 "정신주의적" 일화가 많은데, 마오주의가 뿌리는 정신주의에 맞닿아 있으므로 비슷한 문제가 나타났다. 대약진운동도 끝까지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인민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자신을 옹호했다.

원래 고집이 센 성격이었지만, 중국의 주석으로 확실하게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더욱 고집이 세졌다고 한다. 원래 고집 없는 독재자는 없다고들 하지만 스탈린이 독소전쟁 시절 장군들의 말을 듣고 또 자신의 정책이나 전략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며 최소한의 융통성이나 유연성을 보여줬다. 명장 주코프와 스탈린의 애증 어린 관계는 유명하다. 주코프 말을 안 들을 땐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바실레프스키 말도 안 들을 땐 알렉세이 안토노프 말은 들었다. 중국의 지도자로 따지면 차라리 장제스 스탈린과 비슷한 성격에 가깝다.

반면, 마오쩌둥은 그만큼의 융통성마저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약진 운동 초기 천윈, 저우언라이, 류사오치가 소극적으로 반대의 뜻을 내비치자 불같이 화를 내며 자아비판을 강요했을 정도. 또한 대약진운동의 파멸적인 결과가 차츰차츰 드러났을 때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임시키는 모습을 보였고, 이 모습을 본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는 찍소리도 못 하고 마오쩌둥의 뜻을 따랐다. 본인은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의 실행 도중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은 있었을지라도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고 죽을 때까지 믿었다.

4.4. 전략적 허세

어떤 이는 미래의 세계대전으로 절반 이상이 죽고 나머지 절반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정말 미친 자다.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루마니아 공산당 대표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마오쩌둥을 겨냥해서 쏟아낸 비판.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일화.
1957년 11월 러시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니키타 흐루쇼프의 도취감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최초의 ICBM 스푸트니크 위성이 막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새로운 지도자를 싫어했고 탈스탈린주의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 감동적인 기술의 위업은 '객관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의를 진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동풍이 이제 서풍을 압도하고 있다"는 선언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무한한 인력과 제3세계에서 솟아나는 혁명적 조류와 합쳐질 때 소련 군사력의 이 새로운 조짐은 "사회주의의 힘이 제국주의의 힘을 압도할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모인 동지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원자탄과 미사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재래전이든 핵 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단, 이것은 좀 더 당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모르면 뭔 대륙의 기상 내지 중2병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은 전략적인 계산하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1950년대 후반은 중국은 핵무기가 없었지만 양대 핵 강국인 미국 소련 모두 적대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양 강대국이 유사시 중국에 핵 공격을 하려 할 때 한 번쯤 재고하도록 허풍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런 대외 발언을 마오쩌둥의 성격이라고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마오가 저런 말을 하면서 핵무기가 쓸모 없다고 주장했지만, 뒤로는 핵 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은 저 말이 전략적인 처지를 고려한 허세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2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소련의 중국 지원 중단 이후 중국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개발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사정거리 800km짜리 둥팡 로켓에 핵 탄두를 장착하여 발사하는 핵 실험을 실시했다. 참고로 이렇게 직접 미사일에 달아 핵 실험을 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험한 실험이었다.

이런 허세나 비이성을 내세우는 전략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하며, 국제 정치학 용어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한 전략이다. 미국도 냉전 중 공군참모총장이나 전략공군사령관 등 핵무기 사용권에 가까운 자리에 강경파 또라이인 커티스 르메이 등을 기용해서 미치광이 전략으로 사용했다. 상호확증파괴가 국제 정세의 지배적인 논리로 군림하던 시절에, 마오쩌둥은 핵무기에 의한 완전한 파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미 - 소 양국과 나름 대등한 수준의 협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심리적 우위로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희귀한 사례.

물론 상호확증파괴 구도를 안정한 세계 정세의 근본으로 여기고 있던 소련의 지도자들은, (비록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마오쩌둥의 이러한 언행이 핵 전쟁을 억지하려는 미소 양국의 노력을 무위로 돌린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이에 대단히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마오쩌둥은 평생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 진영과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 진영의 양극 체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동시에 지난 세기 동안 중국이 세계에서 누렸던 지위를 복권시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다. 그의 모순적인 성향을 잘 보여주는 부분. 하지만 스탈린을 제외한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 스스로가 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듣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였던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 좋다. 당신네들은 3억이 죽어도 아기를 좀 더 낳으면 된다 치자. 우리는 1천 2백만 명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1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런 정서에 공감했고, 마오쩌둥의 태도가 아주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나중에 말하길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아서는 그가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23]

또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물었다.
"마오쩌둥 동지! 핵 전쟁에서 살아남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에 마오쩌둥은 전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원자탄이 아주 강력하여, 중국에 투하될 때 지구를 관통하는 구멍을 내거나 아니면 지구를 날려버릴지라도, 이것은 태양계에는 중요한 사건이겠지만 우주 전체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1955년 1월 마오쩌둥의 발언.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을 찾은 네루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도 비슷한 개드립을 쳐서 그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선 닉슨과 만난 브레즈네프가 이 일화를 들먹이며 마오를 천하의 미친놈이라고 까댄다.[24]

4.5. 치밀한 정치가

마오쩌둥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예컨대 공산당 내에서 가장 큰 경쟁자였던 정적인 장궈타오는 후에 전향하여 국민당으로 도주했고, 중국이 공산화 된 후 홍콩으로 도주했지만, 마오쩌둥은 본토에 남겨져서 사로잡힌 장궈타오의 가족들을 그냥 홍콩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게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사실은 마오와 장은 엄청난 악연이 있다. 장궈타오는 한때 마오쩌둥보다 세력이 큰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엄연히 미국과 적대국인 처지였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크게 반겼고, 에드거 스노우를 비롯해서 옌안 시절에 친하게 지낸 미국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이 중일전쟁을 비롯해서 중국에 도움을 준 것이 많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이발사인 '털보 왕' 왕후쯔는 193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면도와 이발을 도맡아 했는데, 1942년 정풍 운동 도중에 그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기소된 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자신을 수 년간 옆에서 지킨 왕후쯔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순간이 많았음에도, 그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그를 따로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왕후쯔는 마오쩌둥에게 울면서 면도칼로 그를 죽이려 했었다고 실토했는데, 마오쩌둥이 그간 왜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자 왕후쯔는 국민당이 오면 그때 죽이려 했다고 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국민당이 옌안까지 오면 그들 손으로 자신을 죽이려 할 건데 왜 이발사의 손을 빌리겠냐면서 사실대로 털어놓으라고 하자,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었다고 밝혔다. 이에 마오쩌둥은 관계자들을 불러 사람에게 거짓말을 강요하지 말라고 질책했다. 이후 왕후쯔는 수십 년을 더 마오쩌둥의 이발사로 일하게 되었다.

쉬스유와 관련된 일화도 있는데, 원래 쉬스유는 마오쩌둥의 경쟁자인 장궈타오의 부하였지만 대장정 중에 마오쩌둥에게 붙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믿어 갖은 핍박을 하였고, 견디다 못한 쉬스유는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공산당을 배신할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첩보를 들은 캉성 등은 쉬스유를 즉각 체포해 처벌해야 한다고 마오쩌둥에게 건의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를 물리치고 직접 쉬스유를 불러 면담했다. 마오쩌둥이 쉬스유에게 자신을 믿느냐, 장궈타오를 믿느냐고 묻자 쉬스유는 당연히 마오쩌둥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마오쩌둥은 다시 옌안에 남고 싶은가 떠나고 싶은가를 물었다. 그러자 쉬스유는 눈물을 흘리면서 옌안에 남고 싶다고 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죄를 다신 묻지 않아서 쉬스유는 마오쩌둥이 죽은 후까지 그의 충실한 부하로 남게 되었다.

물론 마오쩌둥은 어디까지나 치밀한 정치가였고, 절대 자신에게 손해를 볼 일은 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전후 처리를 위해 비행기를 보내 그를 충칭으로 초빙했으나,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비행기 채로 자신을 날려버릴 것을 염려하여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가 직접 비행기에 동승하기 전까지 충칭에 가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패트릭 헐리가 옌안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마오쩌둥을 태우고 왔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겁쟁이라면서 조금 전까지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비난하던 마오쩌둥이 이젠 미국인의 보호를 구걸하고 있다면서 엄청나게 경멸했다. 물론 속으로만... 협상장에서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최대한 잘 대접해주었고, 소련 대사관에 기거하면서 나름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여긴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비위를 맞춰주는 듯 하면서도 공산당이 원하던 독자적 무장과 화북의 지배권을 요구하여 장제스를 화나게 했다.

결국 쌍십 협정이라 불리는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회담은 다소 두루뭉실한 결과만을 남겼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 격차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양자강 이남의 모든 해방구를 포기한다는 내용에 동의해야 했고, 옌안에 돌아온 마오쩌둥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의 통역사는 마오쩌둥이 '침대에 엎드려 몸을 떨었으며 손과 다리는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켰고, 온 몸에 식은땀을 흘려 수건을 이마에 얹어주었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덕분에 며칠간 마오쩌둥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했는데,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는 마오쩌둥이 갑자기 앓아누운 이유가 '훨씬 더 드넓은 영토에 의지해야 할 그의 정당이 봉쇄된 세계에서 건립한 통치가 얼마나 협소하고 그의 맞수는 얼마나 견고한가를 깨달은 결과'라고 평했다.

5.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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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가족. 왼쪽이 막내딸 리나, 가운데 남자가 마오안잉, 그 옆이 며느리 류쓰치.

엄청난 골초였다. 하루 3갑(60개비)을 60년 동안 피웠다는데도 불구하고 83살까지 장수한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셈.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20세기 중국의 격변기 때 한 가닥 하던 인물들은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마오쩌둥의 숙적이었던 장제스는 마오보다 연상이었지만 딱 1년 전인 1975년에 88세로 사망했고, 마오쩌둥의 후임인 덩샤오핑도 93살까지 산데다, 비록 마오쩌둥보다 먼저 갔지만 저우언라이도 78세로써 단명하진 않았다.[25] 하지만 끝판왕은 장쉐량. 1898년 생이고 장제스가 노베이스 군바리, 마오쩌둥이 빈농 출신 버러지였을 때부터 거대 군벌의 수뇌부였던 이 양반은 무려 103세까지 살았고, 국부천대로 대만이 중화민국이 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마오쩌둥의 영도로 건국됐을 때는 물론이고 장쩌민, 천수이볜 시대인 21세기 극초반인 2001년까지 무려 3세기를 살았다.

상술한 아버지가 지정한 결혼에 반대하여 가출한 것을 제외하면 결혼은 총 3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스승 양창제 교수의 딸인 양카이후이(양개혜)였다. 둘은 호남 사범의 동급생이었고 아이는 3명을 낳았다. 남편의 혁명 운동 뒷바라지를 하다가 국민당군에 잡혔고, 국민당은 전향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 총살당했다. 이 중 장남 마오안잉 6.25 전쟁에서 전사하고 둘째 마오안칭은 2007년까지 살아남았다. 셋째 마오안룽은 양카이휘가 처형된 후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지 만 4세의 아주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2번째 처 허쯔전(하자진)은 아직 첫번째 아내가 살아있던 때인 1928년 장시 소비에트에서 결혼했다. 여자이지만, 홍군의 명사수였다고 하며, 장정도 같이 했다. 마오와의 사이에서 무려 6명의 아이들을 낳았으나, 너무 어렸던 4명은 장정 중 인근 농가에 맡겼는데, 3명은 영영 행방불명되었다. 이렇게 맡겨진 아이들 중에서 리민이라는 자는 후에 천하를 통일한 아버지가 기어코 찾아내어 베이징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허쯔전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1937년 허쯔전은 모스크바로 갔고, 이후 마오는 장칭과 결혼하기 위해 허쯔전과 이혼했다.

이후 심복이었던 캉성의 소개로 배우 출신 이혼녀 장칭(강청)과 결혼했다. 여기에 대해서 말이 많고, 허쯔전이 모스크바에 가 있는 동안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오와 장칭은 1938년 결혼했고 둘은 딸 하나를 낳았다.

마오쩌둥은 호색한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성인 여자가 아닌 10대의 소녀들을 좋아했다. 나이 든 여자들은 세상 물정에 너무 밝은 데다 순진한 맛이 없다고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의하면 유부녀를 좋아했다고도 한다. 마지막 부인 장칭도 이혼녀 출신. 마오쩌둥은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순박한 시골 아낙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70대 늘그막에 현지 지도할 때 눈에 든 20대 초반의 유부녀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이름을 물어본 후 수첩에 이름을 적으며 좋아했다. 이를 본 심복 왕둥싱이 그 유부녀 남편에게 이혼을 종용하고 마오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 유부녀 사이에 사생아 몇 명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하렘. 또한 마오쩌둥은 남색을 즐겼다. 여색을 즐긴 후엔 항상 양기를 보충한다며 10대 소년들을 방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리즈수이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에 의하면 마오쩌둥의 시중을 드는 젊은 남자들은 모두 잘생기고 힘이 셌는데 숙면을 돕기 위해 밤새도록 마사지를 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마오쩌둥은 그들에게 자신의 사타구니까지 주무르라고 요구했고 또 어느날은 어떤 경호원이 마오의 잠자리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그 경호원을 잡더니 그를 애무하고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평생 자신의 성기를 손수 씻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 번은 그의 주치의가 위생 문제를 거론하자 계속 여자의 몸 안에서 씻고 있으니 상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링크. 또한 그는 몸 자체도 잘 씻지 않았고, 하인들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식으로 대신했다고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세수, 샤워나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며, 당시 전국의 중국인들은 당시엔 수도 시설이 부족하여 씻지도 못했고, 씻어봤자 개울물에서 짧으면 2주, 길면 2달에 한 번씩 종종 씻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이 정도인데, 최고권력자인 마오쩌둥 정도면 당대 중국인 평균으로 위생 관리에 신경 썼다는 소리다.

그 대신에 마오쩌둥은 매일 새벽이나 아침마다 찬물에 몸을 담그는 냉수욕을 즐겼다. 이를 새벽 1교시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건강 비결로 삼았다. 물론 노쇠했거나 혈관이 약한 사람은 골로 가기 딱 좋은 습관이다. 마오쩌둥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냉수욕 대신 미온욕으로 대체했다. 마오쩌둥은 수영도 어린 시절부터 매우 즐겨 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수시로 수영을 하는 등 물 자체를 좋아했다. 마오쩌둥은 아예 중남해의 실내수영장 건물에 서재와 응접실, 침실등을 마련해놓고 기거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택동의 거처를 가리켜 '수영장'이라고 불렀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앞두고 양쯔강을 횡단하는 퍼포먼스를 손수 선보였다.[26] 물론 이때 양쯔강의 수질이 썩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측근들은 말렸지만, 그럼에도 수영이 좋아서 강행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볼 때 몸을 씻는 걸 거부했던 이유는 성향이 비위생적이라기보단 매일 아침에 이미 씻고, 수영도 자주 하는데 굳이 더 씻을 필요가 없겠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마오쩌둥의 치아 건강만큼은 확실히 엉망이었다. 양치질을 별로 하지 않았고, 중국 차의 한 종류인 고차(苦茶)라는 것을 수시로 마셨으며, 양치질 대신 고차를 입에 머금고 가글하는 걸로 대신했다고 한다. 치아 건강은 꾸준히 나빠져서 치아와 잇몸이 변색되기까지 했다. 사실 이런 차를 이용한 양치는 비단 마오쩌둥 개인만의 특성만은 아니고, 당시 물이 부족한 내륙 지방에 살던 중국 농민들 사이의 전통적인 양치법이다. 애초에 마오쩌둥이 한창 나고 자랐을 때는 치약이라는 것이 흔한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치약을 이용한 양치질이 보급된 것은 1960년대에 와서였고, 그 이전에는 보통 소금을 이용해서 양치질을 했다. 물론 지금은 치약이 어딜 가든지 흔해빠진 물건이기에 저런 식의 양치질들은 원시적인 방법들이어서 어르신들 외에는 잘 하지 않는다. 국가원수가 되고도 양치질하는 습관이 자리잡지 않은 이유가 바로 마오쩌둥이 양치질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실상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 셈이다. 한국에서도 60년대 이전 출생자들 중엔 부잣집 출신이라 해도 양치질이 습관화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지금도 존재한다.

하여튼 마오쩌둥의 치아 건강은 좋지 않았는데, 치석이나 음식물 찌꺼기가 많았고, 잇몸에 고름이 차 있었으며, 충치 또한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을 귀찮아해서 치료도 잘 안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55년에 주치의인 리즈수이의 권고로 이를 하나 뽑아야만 했다. 리즈수이와 장광옌이 마오쩌둥에게 양치를 권하자 ' 호랑이는 양치를 하지 않고도 이가 날카로운데 양치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말로 또 거부하였다.[27] 그나마 이를 하나 뽑은 후엔 양치를 잠깐 했는데, 이마저도 며칠 못 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결국 마오쩌둥의 치아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서 인생 말년이었던 1970년대엔 이가 하도 많이 빠져서 윗어금니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결국 마오쩌둥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은 치아가 보이지 않게 정교하게 찍혀야만 했다.

마오쩌둥은 성적으로도 왕성했는데,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고, 성병의 일종인 트리코모나스 질염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성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모두 그 병에 걸렸다. 그러나 마오의 여자들은 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숭배되던 마오쩌둥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링크. 오히려 마오의 성병에 함께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당대에 최고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졌다고... 마오에게 여자를 조달해 소개시켜주는 채홍사 역할은 그의 심복인 예쯔롱과 왕둥싱이 맡았다. 하지만 마오의 방탕하고 불결하고 지저분한 성생활에 그들도 가끔씩 "우리가 이런 더러운 짓만 해야 하나? 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왕둥싱은 마오 사후에 4인방을 실각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죽는 순간까지 트리코모나스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런 마오쩌둥의 성생활은 1970년대 이후로 파킨슨병 혹은 루게릭병으로 추정되는 질환에 시달리게 되면서 끝나게 된다.

마오쩌둥의 호색한 기질과 바람기는 부인들을 굉장히 불행하게 만들었다. 특히 장칭은 툭하면 외도를 일삼는 남편을 보고 남 몰래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매우 잦아졌다. 이는 그녀의 히스테릭한 성격에 날개를 달아주었으며, 결국 문화대혁명에서 잔악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아들인 마오안잉을 한국전쟁 때 중공군으로 참전시켰다. 사령관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이 전선에서 잘못될 경우 자신이 피해를 볼 거라 생각해 반대하였지만, 마오쩌둥과 마오안잉의 고집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이 소대장이 될 경우 전선에 앞장서게 되고 위험한 위치에 노출된다는 점을 우려한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을 소대장이 아닌 통역 장교로 배치했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당시의 전선 상황이라는 게 연합군이건 공산군이건 간에 어느 쪽 군대든 사령부가 직접 타격을 받을 정도로 많이 위태로웠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를 보좌하면서 참모부에 근무했는데 미군기의 공습으로 전사했다. 펑더화이는 이 사실을 보고 받은 후 마오쩌둥에게 전화를 걸어 전사 소식을 알린 뒤 시체를 후송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의 죽은 자식들을 후송해올 수 없는데 자기 자식만 후송할 수는 없다고 그 자리에 묘를 만들라고 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해주고 결혼식 때 거액의 축의금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오안잉의 영구는 중화인민공화국 북한의 우호의 상징이 되었다.

고추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후난성 일대 자체가 매운 요리로 유명한데, 마오쩌둥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대 중국의 건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 건국대업에서 마오의 전속 취사병이 매 끼니 고추를 준비해야 한다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는 영화 건당위업에서는 청년기의 마오가 풋고추 반찬을 허겁지겁 즐겨먹는 장면 등, 마오의 고추 사랑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듯 하다.

마오쩌둥을 탐구하는 서적 '후난, 마오로드-신이 된 마오쩌둥'에서는 마오의 식생활을 소개할 때 "마오쩌둥에게 '붉고 매운 고추'는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뿐만 아니라 혁명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끼니 때마다 고추를 먹었고, 매운 고추를 잘 먹는 사람이 혁명적이라고 여겼다. 마오에게 고추는 붉은 욕망의 상징이었다."라는 표현으로 마오는 붉은 고추를 즐겨 먹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오쩌둥은 고추만두를 즐겨먹었다. 또한 혁명적 의지 때문인지 매운 음식을 의사의 경고를 무시한 채로 즐겨먹었다. 이처럼 매운 요리를 즐기다 못해 장려하다 보니 문화대혁명도 고추 사랑 때문에 성격도 매워져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가 나돌 정도이며,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집권한 덩샤오핑도 매운 요리를 즐겨먹었기에 중국 내에서 후난 요리 쓰촨 요리 등이 널리 퍼지며 유행하게 되었다. 물론 고추 요리만 즐겨먹지는 않았고, 홍소육이나 취두부나 새끼돼지 통구이 등도 많이 즐겨 먹었다. 그래서 취두부 파는 식당이나 노점에서 취두부를 모주석도 즐겨 먹었던 음식이라며 홍보하고 다닌다. 개혁개방 이후로 자영업이 활성화되면서 현재는 모슐랭 가이드 모가채라고 해서 마오쩌둥이 즐겨먹었던 음식들을 파는 식당들도 꽤 있으며, 이 가운데서 모가반점 등이 유명하다.

사실 마오쩌둥은 장쉐량처럼 충분히 더 장수를 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방탕하고 담배를 즐겨하는 안 좋은 생활 습관을 유지하다 보니까 장쉐량보다도 더 빨리 죽은 것이다. 그러나 용케도 폐암에 걸리지 않고도 83세까지 살았으니, 만약 건강 관리만 잘 했으면 100살은 넘게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타고난 강골이었던 셈이기는 한 것이다. 그러나 성생활과는 다르게 식생활은 어느 정도 절제하기는 했다. 비록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면서 평소에도 자극적인 음식을 즐겼다는 점과 마오쩌둥이 나이가 들어서 살이 쪘기 때문에 식탐이 많은 대식가일 거 같지만, 의외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식을 했다. 또한 밥은 백미밥보다는 현미나 보리를 섞은 잡곡밥을 즐겨 먹었고, 자극적인 맛의 요리를 좋아했지만 한 번 먹을 때마다 너무 많이 먹진 않았다. 또 편식도 없어서 채소 요리나 해산물 요리도 자주 골고루 먹는 식습관을 지녔다. 그리고 귀한 산해진미를 찾기보다는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요리를 많이 먹었다. 위에 나오는 홍소육이나 취두부도 중국에서 고급 요리로 치지 않는다. 물론 서태후 같이 취두부를 즐겨먹은 케이스도 있지만... 이렇게 식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절제를 했고, 선을 잘 지켰기 때문에 난잡한 생활 습관에도 장수를 할 수 있다고 할 만하다. 덩샤오핑도 살아생전에 매운 요리를 자주 즐겼다는 점에서 마오쩌둥과 비슷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덩샤오핑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한다는 철칙을 지켰기 때문인지 담배를 그렇게 즐겼음에도 잔병치레 하나 없이 93세까지 장수했다.

또한 의외로 소박한 취미도 있었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이 다차에서 농작물을 기르는 취미가 있듯이 마오쩌둥도 별장에서 채소를 재배했고, 자신이 직접 기른 채소를 먹는 걸 좋아했다.

장제스가 유교 경전을 독파했듯이 마오쩌둥은 고전 역사서, 특히 자치통감 손자병법을 자주 읽었다. 특히 마오쩌둥의 자치통감 사랑은 대단해서 대장정 중에도 자치통감을 끼고 다녔을 뿐 아니라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17번이나 완독하고 몸소 평론까지 쓸 정도로 즐겨 읽었다. 삼국지덕후여서 삼국지연의를 끼고 살았다고 한다. 또 중증 조조빠여서 마오쩌둥 시기에 유비 대신 조조를 주인공으로 한 편집된 연의가 나오기도 했다. 삼국지만큼이나 수호지도 즐겨읽었다고한다.

마오쩌둥은 루쉰의 소설을 굉장히 좋아했다. 마오쩌둥은 옌안(延安) 시절에 루쉰의 책을 밤새도록 읽어서 '마오쩌둥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루쉰을 현대 중국 성인이라고 평했을 정도.

한편으로는 노신과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무협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용(1924)의 작품 또한 즐겨 읽었다. 김용은 과거 부르주아 성분이라는 이유로 공산당 정권에 의해 해를 입고 홍콩으로 망명한 상태였는데, 모택동이 훗날 그의 작품을 몰래 들여와 읽었다고 덩사오핑 등이 증언하기도 했다. 김용은 공산독재에 비판적인 입장이라서 그의 소오강호, 녹정기같은 작품에서 모택동이 벌인 문화대혁명을 간접적으로 풍자하기도 했다.

일명 중국 최후의 유학자라 볼리는 량수밍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량수밍은 불교 유교 양쪽을 공부하면서 향촌건설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먼 인사였다. 그와 연이 있던 인물 가운데서 공산당원이 있었기는 했었고, 마르크스 레닌의 서적을 탐독하기는 했지만, 그와 성향이 멀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을 다녀오면서 마오쩌둥과 중국의 바람직한 미래를 놓고 토론을 나누었는데, 이때 양측의 입장차가 위낙에 컸기 때문에 결론이 난 게 별로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마오쩌둥은 량수밍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모양이다. 후에 야당인사로써 입지가 단단했던 인물이었다. 중공 건국 이후로 량수밍이 1953년도 중앙정부 회의 과정에서 도시 노동자의 삶은 나아졌지만 농민들의 삶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고, 지방 간부들은 호의호식한다며 공산당의 통치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 마오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음날에 마오쩌둥이 량수밍을 비판하는 발언을 냈고, 이에 당원들이 량수밍의 발언에 반대하는 표결을 했다. 량수밍은 이에 추가 발언을 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표결에 붙여지면서 추가 발언이 막혔다.

이때 마오쩌둥은 의외로 량수밍의 발언을 더 듣자는 입장이었지만 여하튼 이때를 계기로 량수밍은 뒷방 늙은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로 전락했고 특히 반우파운동으로 열심히 까이는 처지가 됐다. 문화대혁명 때 류사오치 등 한때 당 동지였던 인물들이 줄줄이 홍위병들에게 수모를 당하거나 강제로 하방 당하는 처지가 됐을 때 량수밍에게만은 특별 지시가 내려져 홍위병들이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부인까지 패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는지 부인은 팼다고 하며 원고는 압수됐다. 받던 돈이 잠깐 깎이기는 했지만 얼마 안가 원상복구됐다. 1972년 마오쩌둥의 생일 때 량수밍이 선물을 보내자 마오쩌둥이 미칠 듯이 기뻐했다고 하며 량수밍은 나중에 마오쩌둥과의 관계를 회고하며 의견이나 사상이 맞진 않았지만 그립기도 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6. 사상

6.1. 마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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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마오이즘)라고 불리는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도시의 노동자들이 아닌 농촌의 농민들을 혁명의 기반으로 파악한 마오쩌둥 특유의 사상이다. 일명 농민들의 맑시즘으로 불리는 사상으로, 한때는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 "빛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68혁명 시기에는 서구에서도 급진적 무장투쟁 조직인 바더 마인호프가 마오이즘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주의 세력의 전반적인 퇴조, 특히 본토에서의 탄압 때문에 거의 듣보잡 신세이다.

6.2. 사상적 뿌리

마오쩌둥 사상은 스스로는 유물 변증법을 토대로 했다고 하나, 객관적인 현실보다는 주관적인 의지를 강조했기 때문에 사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극혐해 마지않는 관념론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중국의 전통 사상에 훨씬 더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중국 철학에서 대가들이 쏟아져나왔을 때 그 대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철학사적 면만 따져도 마오쩌둥은 주요 인물에 들 만한 인물이다. 중국 현대 철학 교과서에는 꼭 마오쩌둥의 실천 이론이 풍유란 웅십력과 함께 언급된다.

또한 마오주의는 아나키즘 사상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애초부터 모택동이 공산당에 가담하기 전에 크게 영향 받은 것도 아나키즘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대약진운동 시대에 만든 인민공사 같은 제도는 아나코 콜렉티비즘(무정부 집산주의)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북한 주체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한 스스로는 부정하지만 인간 중심, 수령론 같은 것은 마오주의와 판박이다.

6.3. 혁명 이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소련식의 마르크스주의인 레닌주의(사실은 스탈린주의)와는 좀 다르다. 이는 당시 중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 당시 러시아 제국은 농업 국가이기는 했어도 도시에는 충분한 수의 노동 계급이 형성되어 있었고, 정부 기관이 도시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만 잘 조직해도 혁명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서 레닌주의에서는 도시의 노동 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뒤쳐진 농업 국가였고, 노동자와 도시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적용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실제로 1차 국공 합작이 붕괴된 후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중국 공산당의 당권을 잡고 소련식의 전략을 차용했다가 모두 망하고 만다. 이렇게 되어 마오에게 자연스럽게 당권이 돌아왔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소련의 혁명 이론 대신 중국 고유의 농민 반란의 역사에 주목하여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삼는 전략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도시의 직접 봉기 대신에 농촌에서 세력을 넓혀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략은 전근대적 사회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한동안 여러 제3세계의 혁명가들이 차용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마르크스 - 레닌 -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교조주의를 "(비료로 쓸 수 있는) 똥보다도 못하다"고 경멸했다. 이런 점 때문에 마오쩌둥은 서구의 사상을 도입한 인물이 아니라 멀리는 한고조 유방부터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사에서 난세마다 등장하는 농민 반란군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 홍위병을 부추겨 중국의 전통을 모조리 박살내려고 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렇게 마오쩌둥의 이론은 소련식의 사회주의와는 영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국공내전의 말기까지도 신뢰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엄청난 원조를 해주기도 했다. 소련 측은 마오쩌둥을 "마가린(짜가) 사회주의자"로 공공연히 무시했는데, 결국 이것은 후에 중소결렬 중국-소련 국경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6.4. 군사 이론

숙적 장제스와 더불어 군사적 사고를 가졌던 걸로 알려져 있다. 차이점이라면 장제스는 제대로 된 군관학교에서 수학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정형화된 사관학교 장교 출신이라면, 마오쩌둥은 비록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게릴라, 빨치산 활동을 통한 실전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만든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군사 이론은 중국의 고대 병법과 클라우제비츠의 < 전쟁론>을 결합한 독특한 것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중심의 유린"을 중시했지만, 마오쩌둥은 일단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중심보다는 주변부를 장악하면서 중심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후, 적의 역량이 감소하고 자신의 역량이 우월해졌을 때 적의 중심을 쳐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전술 레벨에서든지 전략 레벨에서든지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적의 주력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고, 결정적 순간에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오의 군사 이론은 혁명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오는 게릴라와 농민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 수어지교라고 했다. 젊은 시절 삼국지연의를 거의 강박증에 가깝게 탐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 중인전쟁) 때도, 당나라와 원나라 시절 "1.5번"(약탈을 0.5번의 전쟁으로 간주) 전쟁을 치른 양국 간의 관계를 고려해, 양국이 영원히 적대관게에 처할 숙명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 만큼,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것. 즉, 게릴라는 농민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디쾨터처럼 중공체제에 비판적이고 장제스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윤색된 신화라고 주장한다.

여튼 이러한 이론 때문에 기계화보다는 보병의 과감한 기동력과 수적 우위를 중시했고, 무기의 성능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민중의 각성을 더욱 강조했다.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침략자가 중국에 쳐들어오면 중일전쟁처럼 대규모의 게릴라전을 펼쳐 적을 "인민의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킨다는 것. 이런 유격 전술을 마오쩌둥은 "인민 전쟁"이라 불렀다.

어쨌거나 게릴라와 보병 중심의 기동을 중시하는 이러한 전술은 복잡한 상층 구조를 갖춘 현대 국가를 엎어버리는 혁명군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유용했지만, 거대한 현대 국가를 운용하는 단계에서는 당연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건국 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때에 건설된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인민 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문적으로 소련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고, 6.25 전쟁에서 중공군을 지휘하여 미국의 힘을 겪어본 국방 부장 펑더화이는 이런 마오쩌둥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 말 펑더화이는 이제 "우리도 미국이나 소련처럼 프로페셔널한 장교단이 지휘하고 첨단 무기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오쩌둥의 군사이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결국 이것은 펑더화이 실각의 한 이유가 된다. 마치 1930년대 소련에서 당료들과 투하쳅스키의 충돌이 그의 숙청으로 이어진 것과 비슷하다. 마오쩌둥은 다른 혁명 국가들이었다면 초기에 숙청 당했어야 할 매우 강성한 극좌 계속혁명론자였고, 부르주아적인 안정화에 대해 반대하며 외교를 제외하고는 정치, 경제, 군사를 모두 이상적 혁명이론에 따라 운용하였다. 인민의 무제한적 동원이 기술과 자본을 능가할 것이라 믿었던 대약진 운동이나, 일부 반동 주자파만 때려죽이면 나머지 인민들이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신문화를 설립할 것이라고 믿었던 문화대혁명이나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실무진 입장에서 과격한 혁명 이론에 반대해서 여러 차례 마오쩌둥과 충돌을 빚었던 펑더화이의 숙청은 마오쩌둥이 살아있는 한 예고된 일이었다.

어쨌든 마오의 군사 이론은 정치 이론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연구되는 분야이다. 이것은 경영 전략에서도 꼭 한 번쯤은 이야기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월마트 애플이 바로 마오쩌둥 이론을 경영 면에서 제대로 응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6.5. 네팔, 인도의 마오주의자들, 낙살라이트

그러나 농촌 중심의 혁명 전략을 세운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있다. 2023년 현재에도 마오주의자를 자처하는 게릴라가 남미와 같은 저개발 국가에서 활약하고 있고, 특히 네팔에서는 이들이 게릴라전을 벌여 결국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는 데 일조했으니.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들의 적인 네팔의 왕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들을 마오주의자라고 보도하지 않고 '비적'이라고 보도했다는 웃지 못할 사례가 있다. '비적'은 국민당이 공산당을 부를 때 쓰던 말이다.

인도에서도 마오주의자들이 정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근대적인 질곡이 워낙 심하여 가난하고 지주 세력의 힘이 세기 때문에 마오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이 잘 먹혀들혀가고 세력이 크다. 매번 경찰들이 마오주의자들과 교전하다 죽었단 뉴스가 왕왕 뜰 정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지로 관광 갔다가 마오이스트들에게 피랍당한 적도 있다.

근데 목표를 이루려면 도시로 진입을 해서 선동을 하고 그네들이 말하는 소위 혁명을 일으켜야 되는데, 도시에 진입할 능력도 역량도 없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감싸주던 인도 공산당, 인도 마르크스주의 공산당 같은 좌파 세력들도 마오주의자들이 사상이 다르다고 자기네들까지 팀킬해대었다. 원수지간으로 돌아서고 아예 정부랑 편 들고 같이 싸우고 있다. 인도의 좌파 세력들은 현 체제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교육과 복지, 언론를 통해서 농민/노동자 계급을 조직한다는 전략을 오래 전에 채택하였고 실제로 케랄라주에서 실천하고 있다. 사실상 서구의 중도좌파 정당들과 유사하게 변해서 지방정부를 수십 년째 장악하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 이러니 툭하면 무장봉기를 외치는 마오주의자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인도 마오주의자들은 인도에서는 완전히 불온 단체로 찍힌 상태다.

위 항목에 나온 것처럼 마오쩌둥주의와 기타 다른 공산당 분파들의 사상이 다르니 서로 투닥댄다. 다른 분파들은 일단 농민들을 교육시키고 도움을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데, 마오주의자들이 자꾸 총으로 혁명을 일으키자고 설쳐대니 마오주의자들도 자기 계획에 걸리적거리니까 눈엣가시로 본다. 그 예로 공산당이 힘이 있는 데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힘을 못 쓴다. 그래서 마오주의자들이 공산당 당사를 습격해서 당원들을 살해하거나 서로 교전하는 일이 잦다. 실제로 농민과 정부와의 토지 문제로 농민들을 공산당과 마오주의자들이 번갈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공산당은 일단 도와줄 테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해결하자고 하고, 마오주의자들은 총기를 줄 테니 싸우자고 했는데 농민들이 마오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나중에 경찰이 와서 마을 주민들을 전부 쓸어버렸다고 한다.

마오주의자들이 인도 오지 전역에 넓게 산개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형편이라, 정부도 마오주의자들을 억제는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마오이스트 입장에서 봐도 경찰도 버겁다.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도 정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보고 군대를 안 보내고 있다. 정확히는 카슈미르 지역이 영토 분쟁 지역이라 군대를 보냈다가는 외교적으로 골치 아파져서이다.그러므로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 도시민들이 선동될 가능성은 없다. 결국 오지에서 교전하거나 도시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다 민심은 점점 멀어지고 목표하는 건 이루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일게 뻔했다.

7. 어록

마오쩌둥은 시인과 문필가로 유명하다. 이 점에서 조조와 정말 비슷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조조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치하에서 조조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전술했다시피 사서로 일한 적도 있고, 독서를 엄청나게 한 걸로도 유명하며, 게릴라 시절에도 공작원이 신간을 구해오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관련 서적보다는 중국의 여러 고전 역사책을 탐독했으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거의 예를 찾아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했다고 한다. 다독(多讀)과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것은 많은 성공한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습관이기도 했고, 마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오식 사회주의는 원산지인 소련의 사회주의와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자치통감을 17차례나 보고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 차라리 혁명가가 되지 않았으면 그냥 유명한 인문학자나 고전문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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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기록화. 그림에서도 보이지만 저렇게 서재의 책이나 그가 읽던 책들은 공산주의 관련 서적이 아니라 모두 왕조 시대의 사서거나 혹은 그 사서를 읽기 위한 사전이었다.

이렇듯 그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데 매우 능했다. 번역된 문구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원문을 보면 중국 특유의 댓구를 잘 이용한 인상적인 문장이 많다.
"권력은 구에서 나온다." (枪杆子里面出政权)
중화인민공화국은 일반 국가 주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실세이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문명4에서 강선을 개발하면 나오는 어록이다. #. 어감을 살려 번역하면 '총대 안에서 정권이 나온다'.
"가장 높은 곳에 뜻을 두어라."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날이 발전한다." (好好学习,天天向上)
여담으로 21세기의 중국 청년들은 이 문장을 칭글리시로 번역해 "Good Good Study, day day up"이라고 부른다.
"전쟁은 전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총을 드는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人不犯我,我不犯人;人若犯我,我必犯人)
"당대의 인물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다." (数风流人物还看今朝)
"독서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적용한다는 것 또한 배우는 것이며, 보다 중요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말만 늘어놓지 말고, 실천가가 되어라."
"작은 불씨는 들판을 불사르고(星星之火,可以燎原), 큰 불씨는 물에 기세를 그친다."
"스스로 노동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라." (自己动手丰衣足食)
"인민, 오직 인민만이 세계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人民,只有人民才是推动历史发展的决定力量!)
다른 번역으로는 "인민,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발전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힘이다."
"모든 반동파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一切反动派都是纸老虎!)
원문은 1946년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미국 기자는 정말 미국이 종이 호랑이로 보이냐고 하니까 "처음에는 진짜 호랑이겠지만 결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종이 호랑이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것은 단지 만리장성을 완주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这只是万里长城走完了第一步!)
"하늘은 곧 비가 오려 하고, 어머니는 시집을 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게 해라!" (天要下雨,娘要嫁人,由它去吧!)
린뱌오 소련으로 도망친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 한 말. 비와 과부가 된 어머니의 시집은 막을 수 없다는 의미. 김태호 총리 서리가 총리 인준을 포기하면서 남긴 글이기도 하다.
"결심을 했으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마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이기는데 집중해라." (下定决心,不怕牺牲,排除万难,去争取胜利)
"나의 영예가 내 자손들에 의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다리가 없고 배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배우고 또 배워 앞으로 나아가라."
"아무리 큰 우물이라도 하늘보다는 작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평등하지만, 사람마다 능력이나 인격의 우열이 있으니 자기보다 나은 자를 따라야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인민을 위하여 일을 하라." (为人民服务)
"일이란 투쟁이다."
"모든 저항에는 이유가 있고 혁명에는 죄가 없다." (조반유리, 혁명무죄 / 造反有理,革命无罪)
이 문구로 문화대혁명이 촉발된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 百花齊放,百家爭鳴)
온갖 꽃이 함께 피고 온갖 새가 울어재낀다 =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 위에서 봤듯이 '백화 제방, 백가 쟁명' 선언 이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에 돌입했다. 물론 마오쩌둥 자체가 당시의 지식인층들의 불만을 과소평가하고 여유 있게 사상의 자유 정책을 취했다가 호되게 데인 감도 있지만. 여하간 계획대로든 아니든 당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낚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기 만족은 학문의 적이다. 우리가 자기 만족을 면하기 전에는, 우리는 실제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정녕 할 수 없는 일은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마라."
"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다. (政治是不流血的战争,战争是流血的政治)
클라우제비츠도 비슷한 말을 했다.
"굴을 깊게 파고 식량을 비축하며 패권자라 칭하지 말라."(심알동 광적량 불칭패 / 深挖洞 廣積糧 不稱覇)
"법칙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군법과 군사 이론들은 전(前) 시대나 우리 자신의 시대에 산 사람들이 축적한 전쟁 체험의 총화이다. 우리는 피의 대가로 얻은 교훈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 교훈은 과거 여러 전쟁의 유산이다. 그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그런 유산들을 우리 자신의 체험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유용한 것은 소화시키고, 무용한 것은 버리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체험은 덧붙여야 한다. 그 세 가지는 몹시 중요한데,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전쟁을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살았을 때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지함이다."
"실수와 좌절을 겪고 지혜를 얻는다."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거나 깃털보다 가볍다." (人固有一死-惑重于泰山,惑輕于鴻毛)
사기 태사공자서에서 가져온 말로, 항일전쟁 도중 숯을 굽다가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편을 굽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빛나는 날로 나아가는 길은 굽이굽이 사연도 많다."
페루 마오이즘 반군조직 센데로 루미노소, 즉, '빛나는 길'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힘든 일은 눈 앞에 놓인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 움켜쥐고 내 것으로 만들어라."
"분열하지 말고 단결하라."
"세상에는 이유 없는 사랑 없고, 이유 없는 미움 없다."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냉정, 긴장감과 원칙이다."
"사상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적응해야 한다."
"한 번 실수는 실수지만, 두 번 실수는 음모다."
"제대로 가려면 멀리 보라."
"한 번 더 생각하라. 고민하고 예측할수록 지혜가 나온다."
"혁명(革命)은 만찬(晩餐)도, 수필(隨筆)도, 그림도, 한 폭의 자수(刺繡)도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앞뒤를 가리며 점잖게 순순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越杀人就越要革命"을 오역하여 나온 말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살해된 사람들의 수가 많을수록 혁명에 대한 소망은 더 커진다."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지로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일본제국주의가 중국 공산 혁명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한 적도 있다. 1945년 6월에 "事实是反动派杀人越多,革命的力量就越大" 등으로 발언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중국어를 잘못 이해해서 의도치 않게 오역하는 경우가 꽤 있다. 장제스 몬순 발언, 저우언라이 프랑스혁명 발언 등이 이러한 오해로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도 오역이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해석 사례가 많으며, 이 정도 수준이 아닌 이상, 보통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행운에 기대고, 남의 도움으로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라."
많이 알려진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만화 창천항로의 대사이다.
"맹목적으로 소련을 따를 수는 없소. 방귀를 뀌면 냄새가 나는 법인데, 소련이 뀌는 방귀가 모두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동지들! 여러분은 각자 책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오. 똥을 누고 싶다면 누시오! 방귀를 뀌고 싶다면 뀌시오!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오."
"먹은 다음에 X을 눠야 한다는 것 때문에 먹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오!"
"문예는 국가에 봉사해야 하며, 문예는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혁명의 대의에 입지해야 한다! 모든 예술과 표현은 낙관적이여야 하며 당에 대한 어떠한 비판 / 폭로 / 비난도 엄격히 금한다!"
"무산계급의 청원(請願)운동을 허락해야 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

바로 위의 발언과 겹쳐보면 X적X 식 발언(...). 마오쩌둥은 어떨 때는 표현의 자유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어떤 때는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양극단의 상태를 이용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신적 위치까지 끌어올렸고, 사후에까지 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은 해롭다."[28]
"부농들만 보아도,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알 수 있다."
"공산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적을 부수는 망치다."
자유주의는 소부르주아적 이기심에서 비롯되며, 개인적 이익을 먼저, 혁명의 이익을 그 다음으로 두며, 이로 인해 이념적, 정치적, 조직적 자유주의가 생겨납니다.

7.1. 일본 관련 어록

일제의 침략은 중국공산당에 큰 이익이 됐고, 중국 인민에게 권리를 되찾아줬다. 일제 황군의 힘이 없었다면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4년 사사키 고조 일본 사회당 의원이 중국을 찾았을 때 한 말이다.[29]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 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당에 대한 대응에, 나머지 10%를 항일에 사용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의 대륙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합작을 결성하고, 발전하고, 최후의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데, 내가 보건대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8. 관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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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파일:attachment/baton_touch.jpg
인민 정치 협상 회의 전국 위원회 위원이 된 선통제와 찍은 사진.

10. 각종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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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참고 문헌

12. 관련 인물

12.1. 공산당

12.2. 국민당

12.3. 해외

12.4. 사건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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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9년 10월 1일 ~ 1954년 9월 27일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주석이었으며, 이후 중앙인민정부가 전인대 개최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개편되며 이후 1959년 임기 종료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재임. [2] 1943년 3월 20일 ~ 1945년 6월 11일까지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주석으로 역임하였고, 1945년 6월 19일 ~ 1976년 9월 9일까지가 중앙위원회 주석 임기이다. [3] 마오쩌둥은 다섯째이자 삼남이며 장남, 차남, 장녀, 차녀가 요절했다. [4] 여섯째, 4남 [5] 일곱째, 5남 [6] 가 안룡(岸龍)이나 족보에서 안립(岸立)으로 잘못 적혔다. 참고 [7] 소련 전쟁 시 실종. 사망 추정. [8] 시대를 감안하면 마오는 장신이었다. [9]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성의 방언인 상어다. 간체자로는 同胞们,中华人民共和国中央人民政府今天成立了! [10] 영어 단어 기준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단 두명만 Chairman(주석) 직위를 가졌는데 바로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뿐이다. 1976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국가주석은 영단어로 President로 표기된다. 그리고 중화민국 군사독재자였던 그의 숙적 장제스가 총사령관, Generalissimo Chiang으로 통하는 것과 비슷하다. [11] 쿠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마오주의를 따라 공산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예다. 그 밖에 남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극좌 반군 중에도 마오주의 표방하는 경우가 많다. [12] 여전히 전자 보다 후자로 더 많이 불린다. [13] 일본인의 인명 또한 한국 한자음으로 부르는 경향이 강했다. 즉 풍신수길, 이등박문 등의 표기와 발음이 흔했다. 현행 표기법에 따르면 일본 인명은 전근대와 근현대를 가리지 않고 일본음에 가깝게 표기한다. [14] 후자의 경우 'ㄥ' 내부의 /ə/가 탈락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15] 여담으로 게임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도 이 표기를 쓰고 있다. [16] 원말명초 사람으로, 소산 모씨와 난창위(瀾滄衛) 모씨의 공동 시조이다. [17] 소산모씨의 돌림이름이 7세부터 쓴다. [18] 마오쩌둥과 생일이 같다. [19]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군-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상무위원단 내 서열과 명망에서 보다 앞서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서 명목상 서열 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간주됐고, 당 주석인 마오와 총서기인 덩샤오핑 사이에는 부주석인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그리고 루산회의 이후로는 린뱌오 등 6인의 부주석이 존재했으나 당이 모든 분야를 지도하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대리해 당을 총괄한 덩샤오핑의 실제 위상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와 대등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20] 정치인 덩샤오핑이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된 이유로는 공산국가 특성상 군에 대한 계급이 처음에 없어서 국공내전 시절 제2야전군 정치장교로서 참여하여 막대한 군공을 세웠다. 그리고 앞선 군공이 1955년 인민해방군 계급이 생김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와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아 원수 계급도 같이 받을 수 있었지만 당 지도자, 정치인으로 성장함에 따라 덩샤오핑 본인이 한사코 거부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군부내에서 총참모장을 덩샤오핑에게 맡겨도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오히려 환영받았다. [21] 장궈타오, 왕밍 [22] 실제로 마오는 공산독재자의 대명사인 스탈린을 훨씬 넘어섰다. 생전에는 무시무시한 절대 권력자였지만 막상 죽은 후에는 권위는 땅에 떨어져 숨죽이고 있던 부하들에게 격하되고 만다. 반면 문혁은 스탈린이면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던 일이었다. 마오는 독재자를 넘어선 살아있는 국가 자체였다. [23] Gaddis, John Lew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7년, 박건영 역,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서울: 사회평론, 2002년, pp.419 - 420. [24] 영화 시작 후 거의 3시간이 가까워오는 뒷부분에서 나오는데 자막에는 그 자는 돌았다고 표현되는 정도로 나오기도 한다. [25] 한국 나이로 따지면 79세, 즉 팔순이 되기 1년 전으로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으로는 오히려 그 당시에 평균 이상의 상당히 장수한 편이었다. 설명하고 있듯이 중국의 거물들이 80세를 훌쩍 넘기는 건 기본에 덩샤오핑이나 장쉐량처럼 놀라운 장수를 한 사람들까지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 오래 산 것처럼 보일 뿐이다. [26] 이때 헤엄친 거리가 15Km나 된다고 한다. [27] 하지만 호랑이는 충치로 사냥 능력이 떨어져 아사하거나 호환을 일으켜 사살 당하는 경우가 많다. [28] 존 할리데이의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문구로 공중보건에 관한 저작물이 출처인데, 'They would then study and raise their standards mainly through practice. If this kind of doctor is sent down to the countryside, even if they haven’t much talent, they would be better than quacks and witch doctors and the villages would be better able to afford to keep them. The more books one reads the more stupid one gets.(책을 많이 읽을수록 더 바보가 된다) The methods of medical examination and treatment used by hospitals nowadays are not at all appropriate for the countryside, and the way doctors are trained is only for the benefit of the cities.' 라는 내용으로, 당시 중국의 낙후된 촌락의 의료 환경에서 전문가 소수를 엄선하기보다는 일단은 실무를 배운 초급 의료인력을 왕창 찍어내서 도시가 아닌 시골 중심으로 버티자는 뜻으로 한 말이다. 당시 중국같은 후진국에서는 이렇게라도 인력확보가 필요했다. 문자 그대로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이 해롭다는 말은 아니다. 당장 자신이 책벌레였기 때문. [29] 이 점은 마오쩌둥에게 친일 성향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근거 중 하나로 쓰이는데, 이 점은 일본의 물리/사회학자 엔도 호마레가 2015년에 쓴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에서 다루어졌으며 한국에선 2019년 언론인 박상후가 번역해서 출간되었다.( 월간조선) [30] 11cm 차이면 머리 반 개 정도 차이는 나야 한다. [31]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성은 한반도 면적의 94.7%에 달한다. 남한의 두배 가까이 되는 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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