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앞에 조성된 광장에 대한 내용은 천안문 광장 문서 참고하십시오.
검열을 뜻하는 인터넷 유행어의 기원에 대한 내용은 천안문 6.4 항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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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한국어 | 천안문/톈안먼[1] |
간체 | 天安门 | |
번체 | 天安門 | |
영어 | Tiananmen | |
분류 |
혁명고적 및 혁명기념건축물 (革命遗址及革命纪念建筑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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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명 ~ 청 | |
일련번호 | 1-0030-5-030 | |
주소 |
베이징시
둥청구
창안제 톈안먼 北京市东城区前门大街天安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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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 | 1961년 | |
차수 |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SSR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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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东城区)에 있는 명/ 청대의 건축물로, 자금성을 감싸고 있는 황성의 남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광화문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광장도 있고 하니.자금성은 천안문 - 단문(端門) - 오문(午門)을 거쳐야 비로소 내부에 진입하게 되는 구조이며,[2] 천안문 바깥은 내성이, 또 그 주변을 외성이 두르고 있었다.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현장이었으며, 이후에 건설된 천안문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모주석기념당 등 여러 정치적인 건축물이 주변에 건립되었다. 또한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표어, 중국 국장이 내걸려 있고 열병식이 바로 앞에서 거행되는 등 중국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중국 국장과 CCTV의 방송 시작 화면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것에서 중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에서도 중국의 상징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역사
2.1. 명나라
영락 15년 이었던 1417년 베이징 성을 건설하면서 만든 황성의 정문이었으며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앞 현재의 천안문 광장 자리는 어도(御道)[3]가 설치되었던 공간으로 내성의 정남문인 정양문이 건너편에 있었으며 주변을 담장으로 둘러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2.2. 청나라
승천문은 1644년 베이징에 쳐들어온 이자성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한 청나라의 순치제가 1645년 파괴된 승천문의 재건을 명령해 1651년 완공, 현재의 천안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2.3. 중화민국
어도(御道)로 인해 천안문 앞이 통제되었지만 300여년이 지난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여 들어선 국민당 정부가 국경절 14주년(1925년 10월 10일)을 기념하여 자금성을 고궁박물관으로 만들면서 일반 대중에게 개방하였다.2.4.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여러 차레의 내전끝에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위에 마오쩌둥과 여러인사들이 올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을 선포하는 장소가 되어 이곳은 현재까지 혁명유적지로 지정되어 있고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행사가 열릴때면 공산당 고위층 인사들이 올라가는 장소이기도 한다. 여담으로 천안문 성루는 평상시에는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으며[4] 천안문광장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예약을 해야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이 무료인 것과 달리 천안문 성루는 입장료가 있다는 것이 차이점.2.4.1. 구 천안문 해체보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손상된 천안문은 1969년에 완전히 해체한 뒤 단 200일 만에 새로 지어졌다.(…) 그것도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개건 및 보수에 들어간 자재는 모조리 빼내고 자재까지 전부 새것을 썼다. 빨리 조달할 수만 있다면 자재의 출처는 따지지 않아서,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원목도 잔뜩 사용했다. 심지어 함수율이 80%나 되는 축축한 목재를 말리지도 않고 그냥 사용해서 지었다는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멀쩡히 잘 서있다고 한다.덤으로, 복원을 위해 조사해 보니 기존의 천안문에 사용된 목재 중 정말 저질 목재도 있고 심지어는 미국산 목재도 있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이 추정한 자재의 출처는 불탄 원명원이다. 말기에 접어들어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청나라 정부가 보수작업을 위해 주변에서 되는대로 목재를 구하다 보니 의화단의 난 때 폐허가 된 원명원의 건물들을 재활용하여 썼을 것이라고. 게다가 여기저기에 의화단의 난 당시 연합군이 쏜 것으로 보이는 포탄과 총탄이 박혀 있고 알파벳이 새겨진 포탄까지 박혀 있었다고 한다.
3. 시대별 천안문의 모습
3.1. 청나라 말기
청나라 멸망 직전의 천안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
3.2. 중화민국
1928년 8월엔 쑨원의 초상이 작게 걸려 있었다. |
1946년 중국 국민당이 대륙을 통치하던 시기엔 마오쩌둥 대신 장제스의 초상화가 더 크게 걸려 있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현재의 천안문 양 옆에 써 있는 표어가 없었다. 대신 천하위공(天下爲公)(오른쪽부터) 4글자가 걸려있던 적이 있었다. |
3.2.1. 국공내전
1949년
인민해방군이
베이핑(北平)을 점령했을 당시의 모습으로 천안문 현판 밑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작게 걸려있다[5][6]. 참고로 천안문의 현판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한동안 달려 있다가 1950년대 초에 철거되고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이 달렸다. |
3.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에는 번체자[7]로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 '중앙인민정부만세(中央人民政府萬歲)'[8]라는 표어로 걸려 있었다.
다음 해인 1950년에 현재의 표어로,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또한 표어가 '중앙인민정부만세'에서 '세계인민대단결만세'로 바뀌었다.
1956년부터 왼쪽 표어의 '萬'과 오른쪽 표어의 '團'과 '萬'이 간화자로 바뀌는 과도기를 거치다가[9] 1964년부터는 간체자로 완전히 바뀌었다. 또 1970년에는 목제에서 금속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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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중앙에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10]가, 양 옆에는 '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华人民共和国万岁)'[11], ' 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团结万岁)'[12]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로, 매년 5월 1일과 10월 1일에는 마오쩌둥 초상화 정반대편에 쑨원의 초상화가 설치된다. # 또 오늘날 쓰이는 마오쩌둥 초상화는 1967년 왕궈둥(王國东, 1931~2019)이 그렸으며, 매년 10월 1일 직전에 교체되고, 1992년 왕궈둥이 은퇴한 후에는 왕궈둥의 제자인 거샤오광(葛小光. 1953~)이 매년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 초상화의 역사
중국무경이 24시간 3교대로 천안문과 인근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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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문화재는 보통 한국식 독음으로 읽으나, 천안문은 중국어 발음인 톈안먼이라고 읽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2]
즉 오문이 바로 자금성의 진짜 정문이다. 여담으로 단문은 천안문과 똑같이 생겼다.
[3]
임금이 행차하는 도로
[4]
천안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5]
그 아래에는 정체자로 會大放解平北祝慶(경축 북평해방대회)라고 적혀있는데 북평(베이핑)해방대회는 1949년 2월 9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렸다.
[6]
좌우의 초상화들은
주더,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런비스,
녜룽전,
예젠잉이다.
[7]
현행
간체자는 1956년에 발표되었다.
[8]
zhōngyāng rénmín zhèngfǔ wànsuì 쫑양 런민 쩡푸 완수이
[9]
간화자 그 자체가 과도기를 거쳤기 때문이다.
[10]
가로 4.6m, 세로 6m, 무게만 1.5t에 이른다.
[11]
Zhōnghuá Rénmín Gònghéguó wànsuì 쭝화 런민 꽁허궈 완쑤이
[12]
shìjiè rénmín dàtuánjié wànsuì 스제 런민 따퇀제 완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