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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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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초기
1.1. 내력과 출생1.2. 공산주의를 접하다1.3. 귀국과 양카이후이와 결혼, 공산당 창립
2. 청년 시절
2.1. 우파 당권파의 집권과 국공결렬2.2. 난창 폭동의 실패와 마오쩌둥의 선출2.3. 소비에트 지구 건설2.4. 중화소비에트공화국 건국
3. 대장정
3.1. 여러 비난과 제4차 초공작전의 발동3.2. 연이은 참패3.3. 재집권
4. 제2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4.1. 장쉐량 시안 사건 2차 국공합작의 체결4.2. 일본의 침략을 이용하여 세를 회복하다4.3. 아편 수출비로 군자금을 충당하다4.4. 장-마오 평화회담의 결렬4.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4.6. 삼반오반운동
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한국 전쟁
5.1. 6.25 전쟁과 참전5.2. 한반도 파병에 대한 지도부의 갈등5.3. 한반도 파병
6. 반우파 투쟁7. 중소결렬
7.1. 스탈린의 홀대7.2.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난7.3. 소련과의 관계 악화7.4. 핑퐁 외교
8. 과대망상적 정책
8.1. 대약진 운동의 실패8.2. 수치 날조를 비롯한 결점들8.3. 제사해 운동과 대기근8.4. 농업 생산량의 감소
9. 문화대혁명
9.1. 일시적인 사퇴9.2. 류사오치의 사퇴9.3. 무자비한 파괴, 학살의 비극9.4. 토사구팽
10. 말년
10.1. 9.13 사건10.2. 저우언라이의 실각10.3. 건강의 악화와 화궈펑 지명10.4. 사망



1. 생애 초기

파일:970px-Mao_Zedong_1913.jpg
1913년의 마오쩌둥 모습

1.1. 내력과 출생

파일:중국 마오.jpg
1893년 샹탄 서쪽 사오산에서 마오쩌둥이 태어난 고택으로, 홍색 관광의 중심지이다.

1893년 청나라 후난성 샹탄에서[1] 농민 마오이창과 그의 부인 원쑤친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부농으로 취급될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다. 아버지 마오이창은 원래 가난한 빈농으로 집안에 빚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막노동과 장사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가난에서 벗어나서 자수성가 하였고, 마오쩌둥이 어느정도 자랐을 때는 미곡상 일을 열심히 하면서 부농이 되어 있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아무리 못해도 중소기업 오너 수준은 되고, 넉넉히 잡으면 중견기업의 오너 가족이 되는 수준이었다.

마오쩌둥의 집안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가난한 장삼이사의 시대인 청나라 말기에 20마지기를 가진 부농 집안이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건물주에 비견되는 지주 집안 출신이다. 현대 한국으로 치면 강남 빌딩까지는 안 되지만, 서울 도심에 있는 상가건물 하나 가진 소유주 정도의 부라고 보면 된다. 전국구 부자는 아니어도, 누가 봐도 부자라고 평가받는 정도는 충분한 정도다. 1마지기는 평균 200평 정도 된다. #
마오이창은 토지 관련 소송에서 고전에 대한 박식한 상대의 말빨에 휘둘려서 완전히 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에 경전에 해박한 사람이 하나 있기를 원하면서 마오쩌둥을 소학당에 보냈고, 주판굴리는 일을 비롯한 상업에 필요한 공부도 시켰다. 마오쩌둥은 사서삼경과 각종 고전들을 빠른 시일내에 익혔을 정도로 공부를 매우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사업을 물려받길 원했던 아버지의 바램과 달리, 공부를 계속 하는 것을 원했으며, 마오이창은 마오쩌둥이 지식이 해박해지는 것을 좋아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마오쩌둥이 유교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을 포함한 어른들에게 대들어, 수시로 마오쩌둥을 폭행하기에 이를렀고,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식구들을 혹독하게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가 않았다. 다만 마오쩌둥은 아버지가 식구들에게 야박하게 굴기는 했어도, 노력을 통해 빈농에서 부농으로 자수성가한 점은 존경해서인지 아버지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던지라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는 했다고 한다.

14살 때 뤄이슈라는 여인과 혼인하였으나, 이 결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른 억지결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거부하고 가출하였다. 이 영향으로 평생동안 어린 나이에 주변 어른들의 강요에 의한 결혼을 혐오하였다. 그 뒤 장사의 주성중학에 입학하였고,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혁명군에 잠시 가담했다가 후난성 공립고등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후난 제1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스승이자 훗날의 장인이 된 양창지 교수를 따라 베이징대학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다.

1.2. 공산주의를 접하다

필립 쇼트에 따르면, 1918년 마오쩌둥은 후난성립 제1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1910년대 당시 대략 10년 동안 마오쩌둥은 지적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둥산학교 시절 마오쩌둥은 학교 친구에게 《세계영걸전》이란 책을 빌렸는데, 거기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독립전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유럽에서 벌어진 나폴레옹전쟁, 링컨과 노예 해방 투쟁, 루소와 몽테스키외, 영국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와 표트르 대제 등을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공공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던 시기에는 중국어로 번역된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었다고 한다. 이 책들에서 마오는 인민 주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사회 계약, 개인의 자유와 평등 같은 서구의 정치적 개념들을 알게 되었으며, 또 마오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접했고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같은 19세기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의 저작을 읽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6개월간 “자본주의를 공부”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외국의 시와 소설, 고대 그리스 신화도 읽었고, 이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세계 지도라는 것을 본 셈.[2]

이때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 많은 독서와 토론, 강연 등을 통해 사상적 기초를 닦았다. 사실 이때는 공산주의를 접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즘에 가까웠으며 심지어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되는, 통일된 중국이 악의 근원이라면서 중국을 27개의 소중국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는글까지 썼을 정도였다. 후에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로도 아나키즘 서적을 많이 탐독했으며 결국 평화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에 나섰을 때 즈음에 아나키즘 이론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기는 했지만, 마오이즘 이론에 아나키즘 이론의 흔적이 남아 있게 되었다.

어쨌든 청년 시절 마오쩌둥은 정식 학생이 아니었지만 베이징대학 철학과 수업에 들어와 계속 청강을 했다. 한 번은 정식 학생도 아니고 사투리를 쓰는 말단 직원이 자기 수업을 듣는 것을 고깝게 보던 철학과 교수 후스가 수업 시간에 들어온 마오쩌둥을 학생들 앞에서 "자네는 좀 나가주게"라고 모욕을 주어서 쫓아내었다. 이후 국공내전 당시 베이징대학 총장을 맡고 있던 후스는 공산군이 입성할 무렵 마오쩌둥으로부터 "과거는 잊어버리고 자리를 보장할테니, 대만에 가지 말고 남아달라"는 대인배적인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스는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못 믿는다"며 이를 거절한다.

후스는 일찍부터 공산당을 추종하는 대학생들에게 "너희들은 공산당의 실체를 모른다"고 훈계했으며, 미국으로 떠난 후에는 "공산당 치하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건 다 알지만 침묵할 자유도 없다는 건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라고 공산당을 무지막지하게 까댔는데, 공산당을 믿고 남아 있던 학자들은 정말로 침묵할 자유조차 없이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어용학자들로 전락했다.

이후 후스는 미국으로 떠난 뒤, 1960년대 대만으로 이주한다. 대만에서도 장제스의 일당독재가 펼쳐져서 많은 반정부 인사들이 투옥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섣불리 감옥에 보내기에는 후스가 너무도 거물이었기 때문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도 감옥에 보내지지는 않았고 그래서 장제스 1당 독재시절에는 그나마 정권을 비판하는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남았다. 다만 후스가 양심적인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국민당과 관제야당 이외의 정당의 창당을 비판한 일 때문에 보신에 연연하는 어용지식인이라는 욕도 듣기는 했다.

후스의 말처럼 17년 후에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붙은 교수를 비판하는 대자보로부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전국에 회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철학과 교수들은 홍위병 제자들에게 엄청나게 고초를 겪었다. 이때는 중국 대학 내 거의 모든 교수들이 털렸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 의대에서는 의대생 홍위병들이 의대교수들을 잡아패서 청소나 병원 관리 등 보조일을 시킨 뒤, 교수 대신에 자신들이 환자 진료를 한 사건도 있었다.이들 중 슝스리 등 일부 교수는 박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기까지 했다. 후펑, 라오서, 량수밍 등도 가혹한 운명을 맞이하였다. 다만 량수밍은 목숨을 부지하여 마오쩌둥 사망 후에 복권된다. 량수밍은 1988년에 사망했다.

이때에도 유학자 량수민과 같은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후스도 아마 남았으면 비슷한 운명을 겪었을 것이다. 대륙에 남아 있던 후스의 차남 후쓰두(胡思杜) 또한 1957년 반우파 투쟁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후스의 실용주의 사상은 마오쩌둥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쨌거나 후스는 이후 중국에서 장제스, 쿵샹시, 쑹쯔원 등과 함께 국민당 정권을 상징하는 구시대적 악당 중 하나로 낙인 찍혀 중국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3. 귀국과 양카이후이와 결혼, 공산당 창립

고향으로 온 이후에는 사망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학교 사업으로 교장이 되어 꽤 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그동안 사귀던 양창지의 딸인 양카이후이와 결혼하게 된다. 계급으로 치면 그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하지만 후난성을 무력으로 점령한 북양군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반정부 성향이 되었으며 공산주의자 친구 차이허썬 등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어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에 후난성 대표로 참여하여 창립 멤버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창립 멤버 21명 중에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딱 2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거나 혹은 중국국민당이나 일본 측으로 전향했다.

2. 청년 시절

파일:fyJDpC0.jpg
1924년(30~31세) 상하이에서 촬영한 사진

고향인 후난성으로 돌아온 후, 동생 마오쩌민 마오쩌탄 등을 공산당에 입당시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고 후난독군 푸량쭤, 장징야오 등이 후난성의 민의를 가혹하게 탄압하며 독재를 펼치자 이들을 몰아내는 후난성의 반장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와 중국공산당 대회의 결정으로 1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자 1924년 1월에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37호라는 이름으로 참석하여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중국국민당 우파들을 몰아내고 국공합작이 결성됨에 따라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후난성의 향촌 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전부장 대리, 농업부장 등을 맡는 등 꽤 잘나갔으며 이 때문에 서산회의파에서 마오쩌둥을 저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거치면서 대표적인 농업전문가가 되었으며 펑파이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도 유별나게 농촌혁명을 강조하는 인물이 되었다.

2.1. 우파 당권파의 집권과 국공결렬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 중국국민당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당내 좌파와 후한민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가 대립하게 되었는데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계기로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이 숙청되면서 왕징웨이를 비롯한 당내 좌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북벌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반발한 장제스 중산함 사건에 밀려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의 새로운 실력자가 된 장제스는 1926년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와 중국국민당 좌파 및 중국공산당의 관계는 반제문제에 대한 방법론 차이, 당권파의 영향력 강화 시도 등으로 인해서 급격히 악화되었고 천도논쟁 영왕운동이라는 형태로 번졌다. 여기에 과격한 농촌혁명주의자들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중국국민당 장교들의 가족들까지 돌리며 주4일제와 상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최저임금제를 강요하는 등 사회적 소요가 심각해지자 중도파 내부에서도 중국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결국 이 충돌은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이어졌고 국공결렬이 일어나면서 공산당은 국민당과 결렬하게 된다.

2.2. 난창 폭동의 실패와 마오쩌둥의 선출

이후 공산당은 보복을 위해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실패했다. 이에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천두슈는 실각했고 취추바이가 총서기에 올랐다. 이때 취추바이의 눈에 띈 마오쩌둥도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취추바이 역시 폭동과 봉기를 통한 혁명전략을 지휘했고 9월 9일 마오쩌둥도 고향인 후난성에서 추수폭동을 일으켜 장사의 점령을 시도했으나 국민혁명군에게 완패하고 마오쩌둥도 사로잡혔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했고, 이후 패잔병을 규합하여 후난성 남방에 있는 장시성으로 도피, 징강산(정강산)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자신들을 중국 공농 홍군(홍군)이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쫓겨온 주더가 이에 합류해 세력을 확장한다.

중국공산당은 해풍 폭동, 광저우 폭동 등을 전개하면서 총폭동 노선을 지시했으나 모두 국민정부에게 참혹하게 진압당했으며 장타이레이, 펑파이 등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전체 당원의 80%가 처형당하는 등 세력이 급감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한동안 세력을 확장한다는 노선을 추구했으나 중원대전과 대공황에 고무된 코민테른의 지시로 리리싼이 다시 총폭동 노선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1930년 창사 폭동을 일으켰고 마오쩌둥도 참여하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아내인 양카이후이는 창사 폭동의 직접적 피해를 입은 후난성 정부주석 허젠의 지시로 체포되었고, 마오쩌둥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면서 아들 마오안잉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다.[3]

2.3. 소비에트 지구 건설

한편 마오쩌둥은 중앙의 무모한 폭동 노선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징강산, 이후에는 장시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가장 유력한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하였다. 이 당시 주창한 16자 전법은 굉장히 유명하며 유격전술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현대에도 비즈니스 모델로 주창되기도 한다.
적진아퇴(敵進我退) - 적이 진군하면 아군은 물러나 피하고
적주아요(敵駐我擾) - 적이 주둔하면 아군은 교란한다.
적피아타(敵疲我打) - 적이 피폐해지면 아군은 타격하고
적퇴아추(敵退我追) - 적이 물러나면 아군은 추격한다.

장시성에서 마오쩌둥의 해방구는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으며 이에 고무되어 장궈타오의 악예환 소비에트 등이 중국 곳곳에서 건설되었다. 국민정부는 수차례 이를 토벌하려고 초공작전을 발동하였으나 공산군을 그저 비적 떼로 얕잡아보고 무능한 지방군만을 투입하였으며 1차 양광사변, 만주사변, 열하사변의 잇다른 발생으로 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토벌군에 맞서 게릴라 전술, 매복 전술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군사전문가 주더와 함께 토벌을 수차례 분쇄하였고 승리에 힘입어 많은 무기를 노획, 세력을 더욱 크게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2.4. 중화소비에트공화국 건국

이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건설을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 시기 마오쩌둥은 부전사변을 발동하여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훗날 연안정풍과 문화대혁명의 전조로 보이는 매우 잔혹한 숙청을 벌였으며 강서 소비에트의 철권통치자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상하이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임시 당중앙의 국민정부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장시성으로 퇴각하면서 마오쩌둥은 지나친 유혈사태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영도권을 당중앙에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3. 대장정

"홍군은 고난의 장정도 두렵지 않은 듯
천수만산을 가볍게 굽어보네.
오령의 산맥 높아지고 또 낮아지다가
잔물결로 멀어지고
오몽의 굽은 층계들

겹겹이 푸르게 쌓여 있네.
진사 강의 격랑 뜨겁게 바위를 두드리고
다두허에 걸린 적교의 쇠사슬 차갑구나
민산 천리에 신선한 눈 내리니
마침내 마지막 여정을 정복하고
삼군은 웃음을 머금었네."
마오쩌둥 1935년 10월 "장정"
중국의 붉은 별, 두레, 2013, p.268~269
1년 동안 홍군은 위두를 출발하여 거의 8,000km를 행군했고 200회가 넘는 전투를 치렀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땅을 돌파해 왔다. 병사들은 대부분 글을 모르는 농민이었지만 다른 어떤 근대적 군대도 살아남기 어려운 엄청난 고난을 이겨냈다. 전통 군사학에 의하면 한 부대가 병력의 1/4을 잃으면 전투 부대로서 기능이 끝났다고 본다. 초원지대를 벗어났을 무렵 홍군은 당초 병력의 90%를 손실한 상태였다.
마오쩌둥 1,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p.557

3.1. 여러 비난과 제4차 초공작전의 발동

소련 유학파, 국제파가 주도하던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마오쩌둥이 우경 군사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하여 마오쩌둥을 싫어했다. 혁명을 위해 일본의 침략을 이용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의 소련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판단에 따라 마오쩌둥을 기회주의자로 몰아 비난했다. 당시 국제파, 소련 유학파가 중심이 된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취추바이에 이어 리리싼이 폭동 노선을 지도했다가 실각했음에도 여전히 대도시 진공과 전면전 전략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혼란 와중에서 제4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었고,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임시 당중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마오쩌둥이 있는 루이진으로 이전하면서 마오쩌둥은 간저우 공격 문제 등에서 소극적으로 굴었다는 이유로 당권을 박탈당하고 막판에는 거의 연금 수준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마오쩌둥은 일개 상무 위원에 불과했을 뿐 당 내 지위는 열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소련 유학파 출신 간부들로 구성된 28인의 볼셰비키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전쟁에서 적에게 끌려다니게 되며, 세력 확장에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하며 게릴라전을 버리고 정규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실제로 28인인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명단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결국 제4차 초공작전 주더가 총사령관, 저우언라이가 총 정치 위원을 맡은 상태에서 마오쩌둥 없이 승리할 수 있었지만, 악예환 소비에트 등 여러 소비에트가 분쇄되었으며, 그 승리 또한 국민혁명군의 역량 부족과 열하사변의 발생 덕분이지 자체적 역량 덕분이라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제스는 독일 군사 고문단, 외국 차관, 전훈 연구를 통해서 국민 혁명군을 강화하고 있었다.

3.2. 연이은 참패

이후 국민 혁명군은 나치 독일에서 한스 폰 젝트 장군을 초빙하여 벙커를 수백미터마다 설치해서 토치카 작전으로 게릴라전을 원천 봉쇄해서 주민들을 소개하고, 정치 선전을 통해 주민과 공산당의 접촉을 차단시켰으며, 경제적 봉쇄로 공산당 지배 지구를 고립시킨다. 그 결과 1933년 10월 시작된 제5차 초공작전에서 공산군은 참패하였고, 결국 대부분의 지배 구역과 병력을 잃은 공산당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에서 일시적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서쪽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대장정이라고 칭한다.

이때 노력으로 세력을 불리다 28인 볼셰비키에게 어처구니없이 권력을 넘겨주고는 그 노력들을 수포로 만들게 되자, 마오쩌둥도 절망하여 내심 모든 걸 포기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의 말이나 따르다 패배한 게 너무 억울해서 이제는 지더라도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결과로 패배를 맞이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는 군사적으로는 성과를 가져왔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선과 아집으로 흘러서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삽질을 불러오는 비극이 되었다.

3.3. 재집권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좌경 모험주의로 인해서 군사적으로 대실패했다'라고 주장하면서 소련 유학파의 실각을 주장했다. 이에 소련 유학파와 소련 군사 고문 오토 브라운이 '역량 차이가 너무 심해서 진 것이지, 홍군의 전략은 옳았다'라고 주장하면서 맞선다. 이 주장에 대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추종자인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교조주의자들의 비겁한 변명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오토 브라운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릴라전을 한다고 해서 탱크, 비행기를 갖추고 토치카를 만들면서 포위하고 있는 장제스의 중앙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지지한 데다가 일단 소련 유학파의 전략이 실패한 것은 사실이라, 대다수의 간부들이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마오쩌둥은 다시 당 지도부로 올라섰다.

이후 산시성 옌안에서 토착 공산 정권과 합류하는데, 이 과정에서 정적 및 토착 공산 정권 지도부를 숙청했다는 음모론이 신빙성 있게 들려온다.

4. 제2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4.1. 장쉐량 시안 사건 2차 국공합작의 체결

옌안으로 퇴각한 마오쩌둥은 동정 항일 운운하며 기동 사변으로 혼란스러운 서북 지구를 장악하여 재기하려 했으나 옌시산의 반격에 박살나 더욱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고향을 잃고 사기가 떨어진 장쉐량을 상대로는 승리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숨돌린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협상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소비에트 정부를 지방 정부로 격하하고 홍군을 해체하라고 요구하였고, 마오쩌둥도 중화민국 내부의 소요를 획책하여 협상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려는 가운데 장쉐량 장제스를 감금하고 강제로 제2차 국공합작을 강요하는 서안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사회생했다. 후일 장제스는 2주일만 더 있었으면 초공 작전은 완수될 수 있었다면서 한평생 장쉐량에게 원한을 품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양측은 공식적으로 공산당이 국민당에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합작에 합의한다.

4.2. 일본의 침략을 이용하여 세를 회복하다

일본과 전쟁을 시작할 때 국민당의 병력은 170만 명이었던 데 비해 공산당은 약 4만 명에 불과했다. 전투에서 주된 부담은 장제스의 군대가 짊어졌다. 공산당은 그러한 부담을 질 만 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로 전통적 전투를 치른 쪽도 국민당군이었다. 마오쩌둥의 군대는 일본군 전선 뒤편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전쟁 내내 이어졌다.


1938년 겨울까지 공산당과 국민당의 관계는 비교적 순탄했다. 하지만 1939년 1월 국민당 지도부는 공산당을 ‘습격, 점령, 제한, 대항’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린다. 그달은 장제스의 동의하에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공산당 연락부를 충성에 설립하기로 합의한 달이었다. 국민당 지도부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공산당이 행동의 자유를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일본군 점령지 사이의 빈 공간에 근거지를 설립하며 공산당군 세력을 급속하게 늘리고 있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1938년 말이 되면 공산당의 팔로군은 병력이 다섯 배가 늘어나 20만 명에 이르렀다. 2년 뒤에는 50만을 넘어선다.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2, 교양인, 2019, p.50~51
그러나 중일전쟁 시기 마오쩌둥은 세력의 7할을 세력 확장에, 2할을 반장(反)에, 1할을 항일에 쓰라고 지시하면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고, 도리어 국민당의 유격대와 옌시산을 비롯한 화북 지역의 국민당군을 괴롭히며 세력 확장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로 중일 전쟁 시작 당시에 4만명에 불과했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 120만으로 불어났다. 당연히 전쟁 내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고, 그것이 환남사변에서 폭발하기도 했다. 과거 장제스가 노는 동안 일본군을 게릴라로 애먹이면서 그 경험으로 6.25 전쟁 미군과 호각지세로 겨룬 마오쩌둥을 운운하는 찬양성 프로파간다들이 버젓이 있었지만, 일본 제국은 장제스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비적으로 취급했고 1940년 여름에 백단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는 상대도 안했다. 자세한 것은 중일전쟁 문서에 설명되어 있다.

4.3. 아편 수출비로 군자금을 충당하다

게다가 잘 부각되진 않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태업 행위와 더불어 공산당은 막대한 양의 아편을 재배해서 팔아치워서 그걸 군자금으로 삼았는데, 1943년에 마오쩌둥이 판매한 아편의 양은 4만 5천kg이었고 그 수익이 당시 돈으로 6천만 달러에 육박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돈이 궁색해서 벌였던 일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자신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아편 상인, 재배자, 유통업자를 모두 죽이거나 중형에 처하였고 소규모 상인을 사면하였으며, 중독자에게는 재활 치료를 제공하는 등의 초강경책을 2년에 걸쳐 시행했다. 그 결과 아편전쟁 이전부터 고질적이던 아편 문제가 해결되었다. 즉, 이용할 가치를 다 했으면 모조리 숙청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이 아편을 팔아 군자금으로 삼자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이라면서 마오쩌둥에 대한 혐오감을 보였다. 하지만 언론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지 못했고, 중국공산당의 이런 행위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4.4. 장-마오 평화회담의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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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재로 평화 회담을 위해 만난 장제스와 마오쩌둥

1945년, 중국공산당 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은 마오쩌둥 사상을 당장에 삽입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을 설치하여 주석에 추대된다.

중일전쟁 이후, 1945년 미국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을 중재하여 연립 정부를 구성시키려고 했고, 조지 마셜 중국에 방문하여 장제스, 마오쩌둥과 3자 회담을 갖기도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 국민당은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공산당을 공격한다. 이른바 국공내전으로 국민당의 파상 공세로 한때는 공산군의 근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4.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그러나 국민당군은 대도시 위주로 병력을 지나치게 확산시켰고 이에 공산군이 대도시 외곽 지역인 농촌을 중심으로 포위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결국 상황은 국민당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 지역의 중화민국 국군을 섬멸하면서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당황한 국민당은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리쭝런을 대표로 재협상을 시도하지만, 이미 승세를 잡은 공산당은 이를 사실상 무시했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타이완섬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공산당이 집권한 후, 피의 숙청이 따랐다. 국공내전 도중에 만주와 화북에서 50만~100만 단위의 숙청이 있었고 국공내전이 마무리되고 화중, 화남에서 최소 70만, 최대 200만 명이 숙청되었는데, 마오쩌둥은 전국민의 0.1%를 죽이면 좋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공하면서 이러한 학살 작업을 감독했다.당시 중국 인구는 5억 5천만 명이었고 저우언라이는 83만명, 류사오치가 인정한 수치는 71만 명이며 마오쩌둥이 인정한 수치는 2~3백만명이고 보이보가 언급한 수치는 200만 명이었다. 이러한 학살은 1949년부터 1953년의 토지개혁 작업 동안에 이뤄졌고, 많은 지주와 중소부농들, 국민당 잔당 및 국민당에 협력하던 기관원, 흑사회 등도 묶여서 전형적인 인민재판으로 처형됐다. 이후 합작사 운동을 하면서 더 죽였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 중에서 실제 지주는 얼마 없었다.

4.6. 삼반오반운동

1951년부터는 숙련된 공산당원 공무원층이 형성되면서 잠시 살려두었던 국민당 시절의 실무 공무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자행되었는데, 삼반오반운동이라 불린 이 운동에서 400만 명의 공무원이 숙청되었다. 이들 중 공산당 출신은 20만 명에 불과했으니 국민당 출신 공무원을 노린 숙청이 명백했다.

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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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건국 선포를 하고 있는 마오쩌둥

5.1. 6.25 전쟁과 참전

스탈린은 마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면서도 마오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암시했다. 스탈린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 내려야 함이 마땅하다.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극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 북한은 중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2, 교양인, 2019, p.137~138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마오쩌둥의 외교적 현안은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6.25 전쟁이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소련은 직접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고, '마오쩌둥이 참전하지 않으면 한반도를 포기하겠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스탈린은 대외 관계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라서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것은 피하려고 했다.[4]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사실 마오는 전쟁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6주 전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와서, 모스크바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군사 공격을 승인한 상태임을 확인시켜줬다. 1950년 7월 말 북한군이 승승장구하며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자, 마오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보지 못했지만, 마오의 눈에는 북한군의 병참선이 너무 길어져서 미군의 반격에 취약할 위험성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자, 마오는 동료들에게 만약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하면 침략 욕구가 더 커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며, 어쩌면 미 공군이 만주와 중국의 동부 해안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고, 타이완의 국민당 군대가 중국 본토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가능성도 있으며, 심지어 호찌민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중국 남부와 베트남 국경 지역에서 침공할지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6.25 전쟁도 사실 냉전 시대에 대한민국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되었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이 소극적인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을 받으려 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도 나오고, 소련 해체 후 공개된 기밀 문서에도 나왔다. 스탈린은 그리하여 중국마저 북한을 돕지 않을 경우 북한 정부와 북한군을 중국 동북 지방으로 철수시키려고 했다. 다만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 양국의 군사력만으로는 미군을 물리치기는커녕 교착 상태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중국 동북 지방으로 망명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고 지원할 경우에도 중국-북한 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물론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나서 흐지부지되었다.

5.2. 한반도 파병에 대한 지도부의 갈등

한반도 파병안을 놓고 중국 지도부는 갈라졌다. 저우언라이 린뱌오는 참전을 반대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참전 주장에 동의는 했으나, 한반도 파병을 위해 소집된 중국군의 상태가 전쟁을 치르기에는 영 좋지 않은 상태라서 당장 중국군이 참전한다 해도 미군에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비교적 소극적인 참전 지지를 표명했다. 당시 국공내전이 끝난 지 1년도 안 되어 세계 최강인 미국과 맞붙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기 때문이었다. 총사령관인 주더는 중립을 지켰지만 펑더화이는 파병안에 찬성했다. 마오쩌둥도 북한이 망하면 미국의 다음 목표는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에 본토에서 미군과 싸우느니 한반도에서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 순망치한'을 외치며 총 60만 대군을 파병했다.

5.3. 한반도 파병

고심 끝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 중국 인민지원군'을 한반도에 대규모로 파병했다. 정규군인 중국 인민해방군을 투입했으면서도 '인민지원군'을 사칭한 것은 중국 정부가 유엔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피하고, 이 '지원군'이 중국 정부와 아무 상관 없고 이들이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 인민을 불쌍히 여겨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산악 지형을 이용한 보병 위주의 기동 포위전을 펼쳐 한반도의 북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보급에 대한 깊은 생각도 없이 마구 돌격한 결과 유엔 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한반도 중부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서울뿐 아니라 38도선 동쪽 부분과 북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참전한 지 4개월 만에 중국은 14만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미군은 38도선을 따라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고, 전투는 양측의 기존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밀고 밀리는 공방전 양상을 띠었다. 휴전 협상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었으나 양측은 모두 아직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2년 뒤 스탈린이 사망하고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야, 미국과 중국은 타협이 가능해졌으며 남한과 북한이 모두 반대했지만 한반도의 유혈 사태를 끝내는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2, 교양인, 2019, p.148
부지불식간에 중국군에게 반격을 받아 패퇴한 유엔군과 미국의 충격은 대단해서, 1.4 후퇴 당시 미국 정부와 유엔군 사령부는 전선이 전라도 금강에 설치된 방어선까지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축차적인 방어를 하면서 부산까지 후퇴한 뒤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일본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 제주도로 철수한다는 한국 정부 망명 계획을 극비리에 기획하고 있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시행되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중공군의 제3차 공세는 공세 실시 전에 현지 사령관인 펑더화이가 무리한 진격임을 상기시키며 여러 차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지속적인 공세를 원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공세를 지속하도록 명령했고, 그 결과 인민 지원군은 매튜 리지웨이가 이끄는 유엔군의 재반격을 받아 패퇴하여 한반도 중부에서 양군이 교착 상태에 들어가서 남한은 위험한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 여기에 대해서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당시 인민지원군의 다수는 국민당 출신이었는데, 이들을 숙청시키기 위해 고의로 소모했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는 차차하더라도 자신들을 다시 이역만리로 보낸 옛 국민당군 출신들은 공산당에 회의를 품어 인민지원군 포로의 80%는 대만 행을 택했다.

한편 마오쩌둥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뜻을 밝힌 큰아들 마오안잉을 한국 전쟁에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전쟁 도중에 미 공군 네이팜탄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옮길지 여부를 묻는 참모진의 건의에 마오쩌둥은 시신을 북한에 그대로 두라고 지시하여 현재에도 마오안잉의 묘는 북한에 있으며, 이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6. 반우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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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소결렬

파일:attachment/마오쩌둥/1949_Mao_and_Stalin.jpg
1949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70회 생일 기념식에 참가했을 때 촬영된 사진이다. 왼쪽부터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관 스저, 마오쩌둥, 소련 국방장관 니콜라이 불가닌, 이오시프 스탈린, 동독 부수상 발터 울브리히트, 몽골 인민 혁명당 서기장 욤자깅 체뎅발이다.

스탈린 바로 옆에 선 것에서 보이듯이, 마오쩌둥은 공산 진영의 2인자 노릇을 했다. 저 사진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 있는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키가 비슷한데 실제 스탈린의 키는 168cm이지만 마오쩌둥의 키는 젊었을 때 기준 177cm이었다. 하지만 키가 비슷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마오쩌둥이 측근에게 웃으면서 설명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지기 싫어서 사진을 찍기 전에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나와 사진을 찍어서 그랬다고 한다.

7.1. 스탈린의 홀대

1950년대 초반까지 소련은 전세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념의 조국"이라고 불렸다. 중국공산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0년대 초까지 코민테른의 지시를 계속 받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을 "무식한 농부"라고 무시했다. 당시까지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의 입장은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였다. 그런데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이 이론과는 반대로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주축이 되는 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떨떠름했을 것이다. 소련은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을 "마가린 사회주의"라고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당을 타이완 섬으로 몰아내고 1949년 말에 장기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 방문의 목적은 소련에 대해 여러 원조를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으로부터 수억 달러(현재 시세로는 수십 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내고 소련에 다수의 중국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마오쩌둥은 소련과 스탈린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디스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소련이 미국과 직접 맞붙어봐야 손해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중국의 참전을 종용했고 이는 중국 참전의 한 이유가 된다. 물론 마오쩌둥의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망하면 그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겨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다. 사석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 놈은 사이비지? 정말 만나기 싫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모스크바에 왔던 마오쩌둥이 얼마나 홀대받았는지 제대로 열받은 마오쩌둥은 "난 여기에 먹고 똥이나 싸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그런데 67년 뒤인 2016년에 해제된 극비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이 회담에 앞서 진짜로 마오쩌둥의 을 분석 하고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똥을 통해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있다는 루머를 듣고 마오쩌둥의 숙소 화장실에 특수 장치를 설치해 마오쩌둥의 똥을 따로 모았다고 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19회에서 이 내용을 다루었다.

어쨌든 동유럽은 잔챙이 국가들이었던 반면 세계 1위 인구대국이자 4위의 넓은 국토면적을 가진 중국과 틀어지면 소련도 난처했기에 원조를 했다. 당시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교황이나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소련의 국력은 세계 2위였다. 그러나 독소전쟁의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하여 이는 스탈린이 전후 미국과 정면대결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회피한 이유였다. 완전한 전후복구는 1960년대에 접어든 시기에 이루어졌다. 1위는 당연히 미국. 때문에, 중국인들은 소련을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여겼다. # 다만,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각종 원조를 단행하면서도 중국 당국이 내세웠던 계획 중 과도해보이는 계획들은 다소 축소하였다. 하여간. 한국전쟁이 종전된 1953년에 시작해 1957년에 마감한 1차 5개년 경제계획의 연 평균 성장률은 9%대에 달하여 국민당 정부 시절의 공업생산량을 넘어섰다.

7.2.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난

그러나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가 1955년부터 서방과 평화 공존을 외치며 스탈린을 비판하자 중국 지도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평화 공존"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마오쩌둥과 흐루쇼프는 서로 공개적으로 "저 새끼 트로츠키파다"며 욕을 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실제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절대적인 신으로 추앙받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곧 자국에서 스탈린과 같은 위치를 구축한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올 것을 마오쩌둥이 우려한 것이었다.

또한 소련은 중국과의 여러 기술 거래에서 중국을 사회주의 우방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이용할 대상으로 여겼고, 소련이 자신들에게 판 여러 무기들이 다른 나라에 파는 국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것을 알게 되자 중국 지도부는 소련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사상 측면에서도 스탈린은 인간의 의지보다도 기술과 생산력을 중시했는데, 이는 의지나 정신을 중시한 마오쩌둥 사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글에는 오직 기술만 있고 인간은 없다"고 비판했다.

7.3. 소련과의 관계 악화

이후 1960년대 중순부터 중국 소련을 추종하던 그 전의 방침을 바꿔서 스스로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게 된다. 한편 소련은 1960년 중국과 맺은 모든 기술 이전 협정을 취소하고 기술 고문단을 철수시키면서 중소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여파로 동유럽 각국은 당시 소련의 위성국이었기에 소련처럼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당시에는 나빴으므로 1960년대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 탓에 아직 서방으로부터 교역이 봉쇄된 상황이었다. 고작 비슷하게 고립된 알바니아가 중국의 유일한 맹방이었다. 이때 소련과 중국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북한도 상당히 난감한 처지를 가지게 되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분쟁에 일방적으로 소련 편만 들 수도, 그렇다고 중국 편만 들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소련과 중국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물음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 모두가 받드는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는 애매한 말로 빠져나와 중립을 지켰지만, 실제로는 중국 편에 좀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7.4. 핑퐁 외교

1970년대에 접어들어 중소관계가 악화됨을 감지한 미국 중국에 접근했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게 된다. 이 정책을 핑퐁 외교라고 부른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하고 미국-중국 간의 상호 교류 확대와 평화 관계를 도모하는 상하이 커뮤니케를 발표했다. 당시 상하이 커뮤니케는 남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박정희의 대미 불신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지금까지 저질렀던 일들을 뛰어넘는 초특급 바보짓을 실행한다.

8. 과대망상적 정책

(이렇게 대약진 운동이 망하게 내버려둔다면)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할 것이다. 해방군 여러분이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는 홍군을 찾아가 또 다른 해방군을 조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군이 나를 따를 것이라 생각한다.
- 1959년 루산 회의에 앞서 있었던 연설의 일부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평가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극좌적 태도를 보인 것은 1957년 반우파운동시기로 보고 있다. 즉, 이 이후의 주요 행동은 중국공산당도 옹호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과 점점 사이가 악화되자, 마오쩌둥은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불안감을 느꼈다. 남으로는 미국 세력에 봉쇄되어 있고 북으로는 소련까지 적으로 두게 되자, 마오쩌둥은 어떻게든 중국을 스스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 마침 1차 경제계획이 성공했으니, 2차 경제계획을 더욱 거대한 규모로 성공하면 엄청나게 발빠르게 초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계획을 짰던것이었다. 이렇게 나온 구호가 자력 갱생이었다.

8.1. 대약진 운동의 실패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고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모두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할 만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으니 각 마당마다 재래식 토법고로를 설치해 제철소를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공업화는 커녕 철저한 농업국가에 머무른 중국에서 사회주의 지상락원을 건설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의 기치하에 농촌을 집단농장 단위인 공사로 재편성하고, 아무런 기술적·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 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 사업에 총동원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사업은 인력 낭비와 환경 파괴, 그리고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탓에 현대 공업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철강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고철, 똥철만 있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철광석 증산을 꾀하지 않아 철광석을 토법고로에만 쏟아부으면서 국민정부 시기에 창설된 대형 용광로는 방치되어 있었다. 효율은 당연히 대형 용광로가 더 압도적인데도. 통계에 따르면, 이렇게 만든 철강 중에서 약 10%만이 다른 고철 또는 철광석과 함께 재활용이 가능하였고, 나머지 90%는 이용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국가 막장 테크로 가는 힘찬 첫 걸음을 내딛을 때의 징조는 보통 '산업에서 미국 따라잡기'와 '엉터리 통계'에서부터 시작한다. 통계상으로는 세계 최고의 공업국인데 현실은 시궁창이라, 상부 관리들은 하부 관리들을 닦달하고 밑에서는 눈치 때문에 숫자를 속여서 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관료주의에 물들어 현장으로 나가보지도 않고 보고서의 숫자들만 믿고 있으면 막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 테크를 그대로 밟았다.

8.2. 수치 날조를 비롯한 결점들

마오쩌둥이 정권을 잡은 초기에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곡물 생산량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과 철강 생산량을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수치들은 정말로 "우리 이러다 10년 안에 미국 따라잡는 거 아닐까?"라고 착각할 수준이었다. 이러한 수치 날조는 지방의 관리들이 실적을 보고하기 위해 사실을 허위 날조하면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한 지방에서는 논 농사에서 200배의 수확을 올렸다고 해서 덩샤오핑이 직접 확인하러 갔는데 다른 논에서 뽑아다 옮겨 심은 것이었다. 게다가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8.3. 제사해 운동과 대기근

인력이 빠지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린 것만으로도 벌써 농업 생산량은 상당히 저조해졌는데,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마오쩌둥이 "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교시를 내려서 단 1~2년 만에 전국에서 수많은 참새가 도륙당했다. 참새가 사라지자 병충해가 들끓었고, 이후 발생한 자연 재해 등의 수해로 인해 작황은 처참한 수준으로 치닫고 이념만 내세운 무자비한 인민 동원과 강제 공동생활 등으로 인해 인민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소련에 자신의 정책이 성공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식량을 가차없이 징발할 것을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1957~1960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2천만 명, 학계 추산으로 3천~4천만 명, 많게 잡아 7천만 명이라는 역대급 아사자가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1980년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이 발표한 수치다. 이제 형편없이 낮은(...) 수치다. 학계에서는 평균적으로 최소 3천만으로 본다. 경제적 피해도 1000억~1200억 위안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해 투입한 모든 금액의 2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중일전쟁 전사자가 공식적으로 1200만 명 정도고 학계 연구로도 1400만 명 정도다. 중화민국이 대륙을 통치하고 있을 시기에 내전, 질병,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35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대기근은 훗날 옌벤의 조선족 북한이탈주민 사이에 연대 의식이 생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북한은 당시 계획 경제의 효과를 톡톡히 본 덕에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김일성이 주장한 대로 '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는 나라'가 될 것 같았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까지 북한 경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이때 굶주림에 허덕이던 수많은 조선족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왔고, 국경 지대의 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받은 도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선족들은 이제 역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다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오는 북한 주민들을 쉽게 내칠 수 없다고 한다.

8.4. 농업 생산량의 감소

한편, 마오쩌둥의 토지 개혁 결과로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국민당 시절의 3분의 2로 감소했고, 합작사 운동을 하면서 거기서 더 떨어졌다. 세금은 몇 배로 올라갔고 영양 섭취는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배급이 원활했다는 이야기는 도시에 한정되는 이야기고, 대다수 농촌 지역은 3일치 이상의 식량을 가지면 반동으로 몰아서 때려잡는 등 공산당의 탄압으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굶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나마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면서는 도시 지역에서조차도 기아가 번지기 시작하여 수도인 베이징의 노동자들의 절반이 기근 부종을 앓았는데, 영양 실조라는 판단을 내렸다가 숙청될 것을 두려워한 의사들이 전염병이라는 거짓 진단을 하고 엉뚱한 항생제를 먹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천윈은 대놓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시달렸다던 국민당 시절에는 먹을 것이라도 많았는데 위대한 인민 공화국엔 묽은 죽밖에 없다고 비판했고 중앙당에서조차 국민당 시기의 영양 섭취와 농민 수익이 더 높았으며 중일전쟁 시기보다도 영양 섭취와 농민들의 식량 비축이 떨어졌다고 비밀리에 인정했다.

9.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산전수전 다 겪은 중국 공산당 원로들까지도 통곡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리셴녠은 현지지도 후에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다 합쳐도 이런 참상을 본 적이 없다고 통곡했고 류사오치는 고향을 방문하여 무릎을 꿇었다. 저우언라이 허베이성 시찰 중 농민들의 굶주림을 눈치챘으며 어떤 노인으로부터 2년 후엔 총리도 굶어죽을 것이라는 직언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지옥을 맛본 중국인들은 당에서 엄격히 금지한 종교를 신봉했고 심지어 공공연하게 당과 소련을 욕하고 미국을 칭송하기도 했다. 또한 국민당 시절 책자들을 돌려보는 등 반정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당과 정부의 권위는 엄청나게 실추되었다.

9.1. 일시적인 사퇴

한편 마오쩌둥은 1956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국가주석직 수행에 무리가 있다고 밝히고 1959년에 사퇴한다는 결의에 의거하여 류사오치에게 국가주석직을 넘겨주고 요양하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마오쩌둥 본인 역시 대약진운동의 결과에 대해선 충격을 받았지만 그 원인이 자신의 반지성주의와 아마추어리즘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류사오치는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천재가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라는 표현을 가져오고 성공은 열손가락 중에 한손가락도 되지 않는다고 마오쩌둥의 테제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류사오치는 베이다이허에서 휴식중이던 마오쩌둥에게 면담을 신청하여 베이징으로 부르고 면담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격렬한 논쟁끝에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해 피해가 너무 크며 식인도 기록에 남을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했고 마오쩌둥은 삼면홍기가 땅에 떨어졌다고 소리 지르면서 이젠 토지를 재분배해서 토지를 사유화할 것이냐고 맞섰다. 이후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중국공산당 총서기[5] 덩샤오핑 등이 지성 중시, 도회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초점을 맞춰 실용적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효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대약진운동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 있다고 계속 인정하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실권이 줄어든다.[6] 그리하여 서서히 류사오치, 덩샤오핑을 주자파, 즉 자본주의 추종자로 의심하게 되었다.

9.2. 류사오치의 사퇴

한편 전술한 바와 같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미국이 우리의 미래다."라는 구호가 유행하고 국민당 시절의 선전책자나 금지된 서양 도색잡지를 비롯한 불온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공산당에서 그렇게 열심히 때려잡던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으며 홍콩, 마카오, 대만 등으로의 망명은 줄을 이었다. 그리고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는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고 류사오치는 강온양면책을 통해 정국을 수습하려고 했다. 사회 비판 세력에 대해서는 공작조라 불리는 요원들을 파견해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유화적인 조치를 취해서 민심을 수습하고자 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에 주목하여 류사오치가 대중의 목소리를 짓밟고 혁명을 저버린 주자파라고 맹비난하며 류사오치에게 탄압받던 학생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이에 학생들은 홍위병을 조직하여 주자파, 반혁명세력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결국 입지가 좁아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자아비판을 하면서 실각당했고 선동된 젊은이들은 홍위병이 되어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집었다. 이 혼란 속에서 마오쩌둥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다시 정권과 당권을 장악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쫓겨났다. 이후 류사오치는 카이펑으로 하방되었다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원래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홍위병의 위협을 받은 의사가 치료를 거부해서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엔진 공장으로 쫓겨나 강제노동을 했었다.

9.3. 무자비한 파괴, 학살의 비극

중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인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멀쩡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죽어나가거나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고 각종 서적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문화 유산이 파괴되었으며, 학교 수업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이르렀고 탄압으로 인한 정신병자가 늘어나는 등 사회 전반이 개판이 되었다. 약 2년에 걸친 문화대혁명동안 저우언라이를 제외하고 중공정권을 세운 개국공신들은 귀양가거나 숙청당했고, 마오쩌둥은 정부와 당을 모조리 장악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다.

9.4. 토사구팽

그러자 홍위병의 활약으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은 '홍위병이 너무 극좌적으로 행동한다'며 홍위병을 부추키던 것을 그만두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홍위병들을 진압하는가 하면, 농민에게 배우라면서 홍위병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말기에 호적 이동을 동결시키면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주지 이동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아이러니하게도 대약진 운동의 아사자의 절반은 10살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즉 홍위병의 대부분은 대약진 운동 시기 가장 고통받은 자들이었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마오의 잘못을 거론하는 것을 꺼리며, 건국의 공만은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분위기가 있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금기시된다. 워낙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다들 잊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2012년에 원자바오 총리의 '정치 개혁을 하지 않으면 제2의 문화대혁명이 올 수도 있다'는 발언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7할은 공이 있고 3할은 잘못했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부분의 중국 정부의 문서는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다.

10. 말년

10.1. 9.13 사건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의 선동에 적극 가담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린뱌오는 이후 자신을 마오쩌둥과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되고, 이로 인해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게 되는 등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고 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마오쩌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도모했다. 1971년 린뱌오와 그의 아들 린리궈는 연합함대라 불리는 측근 세력들을 동원해 571 공정이라 불리는 마오쩌둥 암살 계획을 꾸몄지만 이를 알아챈 마오쩌둥이 신속히 지방 순시에서 돌아오면서 발각되었다. 결국 린뱌오 일가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이마저 실패하자 소련으로 도주하다가 몽골에서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망했다. 이를 9.13 사건이라고 부른다. 마오쩌둥은 1970년 루산회의 이후 깊어지던 린뱌오와의 갈등이 린뱌오의 자폭으로 끝나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시원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린뱌오가 쿠데타까지 기도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군부는 쉬샹첸, 예젠잉의 주도로 비림비공운동이 벌어져 린뱌오 색채 지우기에 들어갔고 마오쩌둥은 천이의 죽음을 계기로 저우언라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0.2. 저우언라이의 실각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복권시키는 등 의욕적인 정돈에 들어갔으나 이 과정에서 좌파가 너무 약화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마오쩌둥은 극좌파가 바로 반혁명이라고 주장하던 기존의 입장을 뒤집어 사실 린뱌오는 극우파의 수장이었다고 선포하고 다시 장칭을 비롯한 극좌파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저우언라이를 몰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장칭을 비롯한 4인방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해 저우언라이를 공격했고 정돈사업을 통해 기초부터 파괴된 중국을 재건하려는 덩샤오핑을 투항주의자, 수정주의자로 매도하여 1차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실각시키기에 이르렀다.

10.3. 건강의 악화와 화궈펑 지명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1970년대부터 파킨슨병 혹은 운동 뉴런 장애로 보이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방중했을 때 마오쩌둥은 공식 석상에 나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모든 의전을 담당하였을 정도였다. 사실상 국정은 저우언라이가 맡아서 했으나, 저우언라이도 방광암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를 기회로 정권을 노리고 있던 4인방은 마오쩌둥 사후에 국정 장악을 노렸다. 이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여 엔진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불러들여 국정을 넘겨주기 시작했으나, 4인방은 덩샤오핑을 정치적 경쟁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사인방의 기대와는 다르게 후계자 자리를 장칭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후배였던 화궈펑으로 지명했다. 당시 화궈펑은 겨우 현 서기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말년에는 말도 제대로 못 할 만큼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였는데, 1976년 4월 30일 로버트 멀둔 뉴질랜드 총리와의 회담 이후 화궈펑에게 "천천히 하고 서두르지 말라. 과거의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네가 일을 하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메모를 건네 화궈펑에게 힘을 달아 주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초에 먼저 사망했고,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인파가 천안문 광장에 모이자 4인방은 이를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 그리고는 이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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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5월 27일에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 총리를 만나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한 눈에 봐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결국 이것이 마오쩌둥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 되었다.

10.4. 사망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 0시 10분, 저우언라이가 숨진 후 8개월 뒤에 83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중국은 애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여담으로, 죽는 날 오전 5시 50분경부터 7분여간 의사들이 구급조치를 하는 와중에도 독서를 했다. 남송의 학자 홍매가 쓴 용재수필을 읽다가 구급조치 실패 이후 임종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죽은 뒤 저우언라이처럼 화장해달라고 유언했지만, 오히려 미라가 되어 천안문 광장에 있는 모주석기념당에 안치되었다. 캐나다의 고고학 전문가 히더 프링글이 쓴 <미라>에서 마오쩌둥의 엠버밍 과정에 대한 비화가 실렸는데, 사망 당시엔 중소 분쟁 시기였기에 소련으로부터 엠버밍 처리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주치의 리즈수이 등은 독자적으로 엠버밍을 해야 했는데, 처음 엠버밍을 할 당시 마오쩌둥의 얼굴이 축구공처럼 부풀어오르는 참극이 발생했다. 그러다가 리즈쑤이 등이 온갖 수를 다 쓰고서야 원래 모습대로 복구할 수 있었다. # #

얼마 지나지 않은 1976년 10월 6일에 후임 주석 화궈펑은 국정을 농단하던 4인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예전에는 이를 군부가 권유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화궈펑의 결단이었다고 한다. 4인방은 모두 감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하거나 출옥 후 사망했다.

[1] 중국의 현행 행정구역에 따르면 지급시로서의 샹탄시 산하의 현급시인 사오산시 출생이지만, 사오산시는 샹탄현 산하의 현할구에서 기원해 1990년에 신설된 행정구역으로 이 당시에는 샹탄현의 일부였다. [2] 필립 쇼트, 양현수, 마오쩌둥 1, 교양인, 2019, p.103~104 참조. [3] 이 시점은 마오쩌둥이 창사 공격에 실패하고 철수한 지 2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의 아들 마오안잉의 경우 어머니와 함께 감옥에 갇혔으나, 친척들이 경비병에게 뇌물을 주어 빼냈다. 당시 7살이던 마오안칭은 어머니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국민당 병사에게 얻어맞아 머리를 다쳤고 평생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4] 특히 스탈린은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인 1948년에 있었던 베를린 봉쇄 사건에서 미국과 서방의 엄청난 힘을 본 후라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피했다. [5]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군-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상무위원단 내 서열과 명망에서 보다 앞서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서 명목상 서열 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간주됐고, 당 주석인 마오와 총서기인 덩샤오핑 사이에는 부주석인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그리고 루산회의 이후로는 린뱌오 등 6인의 부주석이 존재했으나 당이 모든 분야를 지도하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대리해 당을 총괄한 덩샤오핑의 실제 위상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와 대등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6] 당시 마오쩌둥은 당 총서기로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를 죽은 아버지 모시듯이 한다."라고 비꼬았다. 즉,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최고위, 명예직인 당 주석 자리에 올려놓고 모시기는 극진히 모시지만, 대부분의 실무 의사 결정을 내릴 때는 "뭐 이런 것 갖고 주석을 귀찮게 해 드려야 쓰겠습니까?"라는 자세를 취하면서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였던 덩샤오핑 등 상무위에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해 버리는 식으로 마오쩌둥을 배제해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