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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3대 육해군인민위원
레프 트로츠키 Лев Тро́цкий | Lev Trotsky |
|||
이름 |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Lev Davidovich Trotsky |
||
본명 |
레프 "레이바"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Лев "Ле́йба"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е́йн)[1] |
||
출생 | 1879년 11월 7일[2] | ||
러시아 제국 헤르손현 옐리사베트그라드군
야놉카 (現 우크라이나 키로보흐라드주 보브리네츠군 베레슬라우카) |
|||
사망 | 1940년 8월 21일 (향년 60세) | ||
멕시코 멕시코시티 코요아칸 | |||
재임기간 |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 ||
1917년 11월 9일 ~ 1918년 3월 13일 | |||
러시아 SFSR 군사인민위원 | |||
1918년 3월 14일 ~ 1923년 11월 12일 | |||
초대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장 | |||
1918년 9월 6일 ~ 1925년 1월 26일 | |||
제3대 육해군인민위원 | |||
1923년 11월 12일 ~ 1925년 1월 2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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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다비트 레온티예비치 브론시테인 어머니 안나 리보브나 브론시테인[3] |
|
배우자 |
알렉산드라 소콜롭스카야 (1899년 ~ 1902년, 이혼) 나탈리야 세도바 (1903년 ~ 1940년) |
||
자녀 |
아들 레프 세도프, 세르게이 세도프 딸 지나이다 볼코바, 니나 네벨손 |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
신장 | 174cm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러시아 혁명 |
||
주요 서훈 | 적기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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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연방의 볼셰비키 계열 정치인, 혁명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사상적으로 트로츠키주의를 정립한 인물.경력상으로는 10월 혁명의 주역으로, 붉은 군대의 창시자이자 지도자로서 소련 건설에 지대한 공적을 세웠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였지만,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해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자신이 건국한 나라에서 추방당했다. 추방 이후 망명지를 옮겨 다니며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다 마지막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 하이메 라몬 메르카데르 델리오[4]에 의해 피살됐다.
사용한 가명으로는 페로(Перо, ' 깃펜'), 안티트 오토(Антид Ото),[5] 엘 세도프(Л. Седов), 스타리크(Старик, ' 노인')가 있으며, 한국에서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나 '뜨로쯔끼'라는 표기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레프 트로츠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후예
한국에서는 운동권 조직 노동자연대(구 다함께)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쪽은 절대 본인들을 트로츠키주의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로츠키의 구 소련 사회에 대한 관점을 갖다가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트로츠키의 공과를 확실히 구분하는 편.[6] 본인들을 정체화하기로는 그냥 마르크스주의라 그러고, 굳이 무슨무슨 분파에 드느냐고 묻는다면, 이쪽은 '토니 클리프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운동권 주류인 민족해방파( NL)나, 민중민주파( PD)에 다른 비주류다. 그나마 PD파와 좀 가까운 편이고, 얼마간의 교류가 있기는 하다. PD파는 아니라도 PD를 중심으로 한 범좌파를 따질 때면 노동자연대도 넣어주는 편. 대신 싸움질은 보통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NL-다함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점점이 조금은 있는 PD-다함께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분당 이후에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긴 했는데, 이건 딱히 NL하고 마음이 맞아서라기보다는 자기 당을 만들 수 없기에 가장 세력이 큰 민주노동당에 남은 것이다. 그 후에 통합진보당까지 지지하긴 했는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그나마도 지지 철회하고 허공에 떠 있는 상태. 현재는 당에 소속되지는 않은 상태로, 은근히 정의당을 밀고 있는 분위기이다. 이들은 2000년대 이전에는 국제사회주의자들(International Socialists; IS)이라고 불렸다.[7]오히려 진짜 트로츠키주의를 추구하는 쪽은 제4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추구하면서 트로츠키의 입장을 거의 교조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따르는 볼셰비키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쪽만큼 교조적이지는 않지만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 현장 투쟁 위원회(노건투)도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한다. 다만 이쪽은 조직이 노동자연대만큼 크지가 않고, 집회장에서 눈에 띄게 활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는 매우 낮다. 운동판에서 좀 굴러 본 사람 아니면 존재 자체를 모를 것이다. 정통 트로츠키주의도 아니고, 본인들을 트로츠키주의라 정체화하지도 않는 IST 조직이 대중들에게 트로츠키주의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에서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입지가 약하다는 것을 뜻한다. 꼭 트로츠키주의뿐만이 아니라, 한국 운동판에서 레닌주의의 입지 자체가 아주 좁다.
이러한 이유로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볼셰비키그룹은 다함께-노동자연대가 트로츠키주의를 표방[8]하는 걸 갖다가 가루가 되도록 깐다. 트로츠키 사상의 양대산맥은 '미완성 상태에서 이상하게 변질되어 버린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그 변질의 주범이자 사회주의적 생산 양식에 기생하는 기생충과도 같은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 혁명을 지지하는 것'인데,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을 방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트로츠키주의의 아류라 할 수 있는 IST 노선이 남한에서는 이렇게 원조 트로츠키주의를 몰아내고 트로츠키주의의 대표주자 행세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북한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형성된 냉전 반공주의의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IST가 IBT보다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IST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90년이었는데, IBT는 먼저 들어온 IST가 한참 신문도 발행하고 학습 모임도 열고 그러다가 국가보안법 탄압에 직면해서 최일붕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던 시점인 1995년에야 들어왔다.
사회변혁노동자당도 트로츠키주의를 추구하는 당원들이 일부 섞여 있다. 여기는 온건한 트로츠키주의+유로코뮤니즘+딱히 트로츠키주의나 스탈린주의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는 범(凡) 레닌주의자+신좌파 극단주의자들의 연합체이다. 출범 과정부터 다양한 단위들의 연합체로서 시작되었다.
국제적인 조직으로는 IS 이외에 제4인터내셔널 재건을 추구하는 IBT가 있다.[9] 한국에서는 기존 좌파세력[10]들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혐오가 그다지 없는 편이라서 저명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류 운동권(PD 세력)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강연을 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운동권의 학습서인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쓴 영국의 알렉스 켈리니코스 같은 사람은 한국에 여러 차례 강연을 왔다. 반면에 좌익세력의 연합체인 독일의 좌파당(Die Linke)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참여하려고 했으나 주류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참여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구 좌익세력 중에서도 주류는 아니지만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좀 된다.
종종 트로츠키주의자를 극소수라거나,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오해로, 실질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세력 규모는 주류 중 가장 비주류, 또는 비주류 중 가장 주류 정도는 된다. 세계 각지에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정치결사가 있고, 이들의 국제연대조직까지 있는 세력을 극소수 비주류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한 정통 사회주의자들과 극히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옛날 이야기다. 일단 트로츠키주의와 불구대천의 원수인 스탈린주의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싫어할 만한 정통 사회주의자의 정체성 자체가 모호하다. 지금 각국의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당[11]이 트로츠키주의 당과 사이가 나쁜 것은 다른 당 차리고 있으니까 습관적으로 싸우는 것에 가깝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소련의 주도권이 살아 있던 당시의 서슬 퍼런 증오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정통 사회주의의 정체성을 레닌주의의 계승에서 찾는다면 오히려 트로츠키주의가 정통 사회주의의 계승자가 되고, 레닌주의 혹은 스탈린주의를 탈피한 각국 공산당, 사회당들[12]이 캐주얼 사회주의 당이 되는 수도 있다.
정통 사회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를 "극좌모험주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것은 사이비 혹은 프락치의 딱지였다. 중국-소련 간에 사이가 나빠지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서로를 "저 자는 트로츠키주의자다!"라고 비난한 건 유명한 일화다. 공산주의/사회주의 정당이 야당인 서구권에서 트로츠키주의라는 개념은 확실히 '극좌모험주의'의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공산당이나 사회당이 제도권 정치에 편입된 서유럽이나 일본 등에서 트로츠키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주로 탈 제도권적인 극좌노선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산당에 의한 일당독재가 이뤄진 구 동구권 국가들에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표현은 사실 이념이나 정치노선과는 별로 상관없는 범용 욕설이다.[13] 내부의 적, 프락치, 배신자, 사이비 등 모두 통틀어서, 그냥 무척 나쁘고 싫어서 때려죽이고 싶은 놈인데 파시스트!나 부르주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상대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부르면 되는 거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전자는 대놓고 다른 진영을 욕할 때, 후자는 같은 좌파를 공격할 때 쓰는 단어라 생각하면 되겠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상대를 욕하는 것이 정치 사상과 별로 상관없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 거의 아무 이유도 없이 욕먹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가 거의 찌그러져 버리다시피 한 한국에서는 노정협이나 노사과연에서 차분하게 노동자연대/볼셰비키그룹/노건투/변혁당 일부 등 범 트로츠키주의 단위들의 입장을 비판하는 정도이다. 중요한 떡밥이 투하되거나 정세상 중요한 터닝포인트다 싶을 때면 트로츠키주의고 스탈린주의고 따질 것 없이 연합으로 노동자 집회를 주관하는 경우도 있다. 트로츠키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가 같이 마르크스주의 학습 모임을 갖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트로츠키주의를 심하게 까는 쪽은 신좌파 계열과, 신좌파를 마르크스주의에 혼합시키고자 하는 신마르크스주의 계열[14]이 대부분이다. 그 결과 신좌파 계열과 범 트로츠키주의 계열 운동권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상당수가 1960-70년대의 트로츠키주의 운동권 출신이다. 당장 신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격적 성향은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적인 영구혁명론을 자유민주주의적 영구혁명론으로 번안한 탓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4. 평가
트로츠키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혁명의 영웅'과 '빨갱이 악마'로 갈린 것처럼, 현대의 평가 역시 두 갈래로 크게 갈려 논란중에 있다.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트로츠키를 둡체크나 너지, 티토 등과 함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내세우지만,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이라는 악마와 싸우다 죽었기에 비판에서 벗어난 또 다른 악마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폴란드 출신 유대인 아이작 도이처는 3부작 전기 "무장한 예언자", "무장해제된 예언자", "추방된 예언자"를 저술해 이후 서구 좌파의 트로츠키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전기는 시종일관 착한 트로츠키가 사악한 스탈린의 계략에 빠져 권력을 잃고 암살당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스탈린이 주도한 소련 공산당의 독재정치에 질린 서구 좌파들 중에는 대안으로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나온 소련 장성 출신 역사가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의 전기와 2014년 국내에 정발된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전기는 트로츠키를 그저 권력을 잡지 못한 또다른 스탈린 쯤으로 묘사하고 있다. 볼코고노프(1928-1995)는 소련군 장성 출신으로 정치장교이자 심리전 담당을 했다. 하지만 소련 체제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사상전향을 하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보좌관을 하면서 소련 공산당과 소련의 디스에 앞장섰다. 이 사람은 역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소련 붕괴 시기부터 옐친 시절에 써낸 책들은 딱히 학문적인 측면보다는 소련 체제가 감추고 싶었던 흑역사들을 들춰내면서 쓴 역사적 휘그주의[15]의 일종이다. 볼코고노프의 전기는 그의 많은 저작들이 그러했듯이 대중적으로는 인기를 끌었지만 새로울 것이 없었으며 증거가 부족한 비판을 일삼아 학계에선 큰 충격을 주지 못했는데 서비스의 전기는 트로츠키를 정교하게 까내렸고 이 때문에 수많은 트로츠키주의자가 서비스의 전기에 항의했고, 반박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 소책자,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은 국내에서도 번역하여 노동자연대에서 출판했다. 하지만 스탈린이 10월 혁명을 배반하고 과거 레닌주의와 단절하였다는 60년대의 수정주의는[16] 이미 1980년대 아치 게티, 쉴라 피츠패트릭 등의 2세대 수정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미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고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계승자, 트로츠키의 본질 역시 스탈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기존 인식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연구는 활발히 나오고 있다. 서비스가 공화당 성향 후버 연구소 소속이라 못 믿겠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러나 서비스는 2004~2005년에 문서고를 이용하기 위해 후버 연구소에 있었고, 구 소련 시절에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교환연구원으로 다녀오고 1998년부터 옥스퍼드 대학 교수를 지내는 사람이다. 러시아 혁명 수정주의의 대표적 학자인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도 책 서문에서 후버 연구소에 감사를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대표적 수정주의 학자의 서적들인 '스티븐 A. 스미스 , 러시아 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번역한 류한수 교수가 추천하는 전문서적중 일부가 바로 로버트 서비스의 서적이다.[17]
2010년 대 이후로도 스티븐 코트킨, 노경덕 등에게서 스탈린-트로츠키 논쟁과 트로츠키의 혁명관, 국가관을 탐독한 연구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며 이러한 연구들은 트로츠키의 구상과 스탈린의 구상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로버트 서비스의 정치적 성향을 문제시하기도 그런게, 본질적인 정책이란 면에서 스탈린이 오히려 트로츠키를 때려죽이려고 들면서도 트로츠키의 방식에서 많을 부분을 따왔다는 점은 비단 냉전기 서방의 반공우파 성향 학자들 뿐만 아니라 그 한창 이전부터 좌파 내에서 주구장창 싸우던 아나키즘, 좌파공산주의 같은 진영에서도 줄곧 하던 주장이다.
또한 이러한 세간의 평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 역시 상당히 흥미롭다. 소련 내부의 강압적 실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극소수의 고립된 트로츠키주의자를 제외하면 트로츠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소련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날수록 트로츠키에 대한 관심도 늘어가고, 바르샤바 조약군의 프라하 침공에 반발한 서유럽의 좌파 대학생들이 대거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하면서 소련과 스탈린주의의 대안으로써의 트로츠키주의,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인 트로츠키주의가 탄생하였고[18], 이후 정치세력화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도화된 기존의 공산주의/사회주의 정당과는 차별화된 나름의 노선을 걸어왔다.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이전까지 스탈린주의의 반대항으로써 받아들여지던 트로츠키주의가 오히려 스탈린주의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좌파 중에서도 생겨나고 있지만 우파들 중에서도 생겨나고 있는데, 이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주적을 찾으려는 시도의 결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소련 붕괴의 영향으로 근본적 사회 변화를 고민하는 사람들 중 트로츠키주의에 관심을 돌리는 사람이 있다. 서구권 공산당 이름을 달고 있는 정당들은 개량주의 정당으로 우경화한 경우가 많고, 스탈린주의를 추구하는 정파들은 남한의 전국노동자정치협회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조선로동당에서 보듯이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5. 대표 저작
- 평가와 전망 (1906년)
- 10월 혁명의 교훈 (1924년)
- 러시아 혁명사 1장-10장 / 11장-23장 (1930년)
-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투쟁 (1930년-1932년)
-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1932년)
-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 프랑스 행동강령 (1934년-1936년)
-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조합
- 배반당한 혁명 (1936년)
- 이행기 강령 (1938년)
- 트로츠키와의 이행기 강령 토론 (1938년)
-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며 (1940년)
6. 기타
- 유대인 혈통이지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의식은 태어날때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트로츠키는 민족주의를 경계했고, 공산주의 사회가 완성되면 민족주의 역시 자연스레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볼셰비키에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자치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자, 그들을 맹렬하게 까기도 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대부분 코셔 식단을 따르는데, 트로츠키는 러시아식 돼지고기 햄을 즐겨 먹었으며, 스페인 억류 시절에 새우와 게도 먹는 등[19] 정말로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것 같다. 트로츠키의 부모님부터가 딱히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으며, 집에서 종교적인 행사도 없었다고 한다. 즉 정교회나 유대교의 영향 하에서 유년기를 보낸 다른 볼셰비키 혁명가들과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종교가 없었다.
- 스탈린이 그리도 트로츠키를 죽이려고 한 게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적 두려움에 빠져 그랬다는 주장까지 있다. 우습게도 스탈린의 몇몇 충신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비꼬는 이야기 중에 '부자들은 유대인 혁명가가 두려워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싶어하고, 빈자들은 유대인 자본가가 두려워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싶어한다'는 것이 있다. 소련 및 동구권에서도 이런 이중성에 의하여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의 반유대주의(및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를 소리높여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자국 내부에서 반유대주의적 차별행위를 벌인 사례가 많다. 하지만 초기의 소련 공산당은 상당히 명확한 '반유대주의 반대'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냉전기 동구권의 반유대주의라고 하기에도 뭣한 게 이건 대전 후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중동 문제가 본격적인 미소 대결의 대리 전장 중 하나가 되면서 시오니즘 반대 노선을 타게 됐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한 적은 없다. 스탈린 생전 최후의 숙청이었던 유대인 의사 사건도 마침 본격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떠 오르려고 하던 이스라엘 중심의 시오니즘 운동의 싹을 미리 자르려고 한 정치적인 숙청이었지, 인종적 의미에서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탈린은 인도 등 탈식민국가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하고 있을때 홀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승인하기도 했다.[20]
- 스탈린은 트로츠키에 대한 암살 시도 외에도 트로츠키가 망명생활 중에도 간직하던 트로츠키의 개인 원고와 편지 등을 모은 작은 도서관 분량의 문서고를 테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문서고를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을 찾던 트로츠키는 죽기 한달 전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있던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의 사서와 접촉해 자신이 죽은 후에도 동지들와 전직 동지들이 자신의 문서에 의해 스탈린에게 피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40년동안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서들을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고, 이는 현재 하버드 대학교에 의해 Leon Trotsky Papers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어 있다. 공개되기 이전에도 트로츠키의 부인 등 트로츠키가 지정한 사후 문서 관리인들에 의해 허락을 받은 아이작 도이쳐와 같은 사람들은 이 자료를 참고자료로 사용해 책을 쓰기도 했다.
-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서는 일종의 유토피아주의적 레퍼토리를 내세울 때에, 해외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가 '사회주의 사회가 성경에 나오는 낙원과 같을지는 모르겠는데,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21]면서 이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스탈린의 경우에는 정교회 신학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원을 지상에 건설하자는 유토피아적 선전으로 대중들을 휘어잡아 제 발 아래 복속시키려 했던 반면, 트로츠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무교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일종의 왜곡으로 받아들였고, 개인적 차원에서도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사상에 그런 유토피아주의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 발전한 사회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자본주의 다음 단계는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사회주의 사회가 어떠한 문제도 없고 고통과 눈물도 없는 완전한 이상향이 될 것이라는 내용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 어디에도 없다. 사회주의 사회 역시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해체되어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전망했으며, 공산주의 이후에 대해서조차도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입장이었지 결코 공산주의 사회가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가 유토피아주의적 양상을 띠게 된 것은 스탈린 시기부터다.
- 다만 스탈린이 내세운 유토피아적 레퍼토리야말로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한 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는 해석도 있다. 트로츠키나 레닌이 주장한 복잡하고 모호한 미래상에 비해 신학생 출신이던 스탈린이 제시한 기독교적 천년왕국을 연상시키는 유토피아적 레퍼토리는 기독교(정교회) 신앙에 익숙한 러시아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고, 이러한 지지세를 기반으로 당 내 영향력을 팽창시킨 스탈린이 결국 권력 투쟁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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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아버지는 부유한 농부였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현실세계에 눈 뜨게 되었다고 한다.[22] 어쨌든 부유한 환경 덕분에 트로츠키는 먼 곳에서 유학을 할 수도 있었고
대학을 갈 수도 있었다. 1905년 망명 이후 미국에서 꽤나 오랫동안 있었기에,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로 러시아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동네에 머무는 것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트로츠키의 학생 시절, 마침 공산주의자가 된 트로츠키가 집안에서 불온한 발언을 하자 자식의 장래가 걱정된 아버지는 "이 나라는 앞으로 천년은 더 갈 거다."고 경고하듯이 말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혁명에 성공한 후, 다시 아버지를 만난 트로츠키가 "아버지는 차르의 러시아가 천년은 갈 거라고 하셨죠?"라고 놀리듯이 말하자 아버지는 웃으며 "그럼 이젠 새로 세운 나라가 그만큼 오래가도록 하려무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트로츠키의 영원한 반대항인 스탈린에게도 비슷하지만 정반대인 일화가 있다.
어린 스탈린은 초등교육을 받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인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신부가 되길 원했다. 스탈린은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 조지아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었는데 정치에 대해 잘 모르던 그녀는 스탈린에게 "너 요즘 뭐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어머니! 차르 아시죠? 전 차르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탈린의 말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그래? 유감이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신부가 되는 게 어떠니?"라고 말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스탈린의 어머니가 세속적인 정치권력보다 종교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면, 그 또한 존경받을 만한 삶의 태도겠지만, 혁명가이자 정치가로써 살기로 결심한 자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트로츠키의 아버지가 스탈린의 어머니보다 훨씬 더 자식을 잘 이해했던 셈이다. 두 일화가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듯, 중세적인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스탈린에 비해 트로츠키는 근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이었다.
-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발간하고 남한 노동자연대에서 번역한 '삐딱이들을 위한 트로츠키 가이드'라는 소책자에 보면 트로츠키가 현재 성 2개 쓰는 여성주의자들처럼 두 번째 아내 나탈리아 세도바의 성과 자기 성을 같이 썼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트로츠키는 보통 자신의 글에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혹은 '레온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당연히 트로츠키는 필명이고 법적 이름이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양성평등 정책을 시행해 현대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처럼 결혼한 부부가 남편과 아내 중 어느 쪽의 성이든지 따를 수 있게 했는데, 트로츠키는 이때 브론시테인이라는 본래 성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을 포함해 가족들 전체가 부인의 성인 세도프를 따르게 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의 풀네임은 혁명 이전에는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혁명 이후에는 '레프 다비도비치 세도프'가 된다. 장남인 레프 세도프와 같은 이름이므로 만약 서유럽이었다면 장남은 레프 세도프 주니어라고 불렸겠지만 러시아에서는 부칭을 쓰기 때문에 풀네임이 구분된다.
- 트로츠키는 젊을 적에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대학생 시절에 정치 모임에서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라며 깠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 공산주의자 하기로 했음!" 이라고 선언하고는 그때부터 맹렬하게 공산주의를 옹호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래켰다고 한다. 그와 비슷하게 역시 공산주의자로서도 레닌을 초기에만 지지하다가 이후 결별하고 강력한 멘셰비키의 옹호자였으나, 1917년 갑자기 돌변해 레닌의 철두철미한 지지자가 된다. 그래서 별명이 "레닌의 곤봉". 1905년에 레닌을 만난 곳도 러시아가 아닌 망명지인 런던. 말 그대로 세계를 누빈 사람이다.
-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직후, 학생 신분으로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노동자와 학생으로 구성된 소규모 비밀결사를 만들어 지도자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때 사용했던 가명은 '리보프'. 주 활동은 서유럽에서 들여온 사회주의 관련 소책자들을 번역하여 돌려읽거나, 주변의 친구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조직원으로 포섭하는 것이었고, 공공 도서관의 이용요금 인상 반대운동처럼 유익한 활동도 했다고 한다. 결국 차르의 정치경찰에 검거되기는 했는데 경찰 쪽에서는 이 조직의 활동내역을 포착하고서도 고작 학생 주제에 결사를 만들어서 운영한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배후에 분명히 거물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그 거물을 찾아내기 위해 한동안 내버려뒀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잠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권을 잡은 후 리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동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과거 함께 활동하던 시절에 중년 노동자였던 이 동지는 트로츠키와 다시 만난 1920년 무렵에는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비밀결사가 해산되고 트로츠키와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열성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해왔고, 혁명기에도 상당한 활동을 해서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양반은 젊은 시절의 벗 리보프 동지도 기억하고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 동지도 존경하고 있었지만 둘이 동일인물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이 이야기를 남긴 후 "그리고 그 동지는 나중에 트로츠키가 반혁명분자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라고 뒷맛 씁쓸한 농담을 남겼다.
- 블라디미르 레닌과 더불어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아가리 파이터였는데, 실제로도 말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공격적인 논객이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토론은 커녕 러시아어도 서투른 수준이었지만,[23] 트로츠키는 공격적이고 논리적인 어조로 상대방을 공격했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던 입배틀의 달인이자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기로 유명했던 레닌도 트로츠키의 공격적인 언사를 듣고는 바로 당황해서 트로츠키의 주장을 인정해준 적이 있을 정도. 1905년 파업 때는 자기가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못 배운 노동자들도 쉬운 말로 선동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 고집이 엄청나게 세서, 한번 확신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집어린 성격은 훗날 트로츠키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잃은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레닌도 트로츠키의 이런 점을 굉장히 문제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레닌 눈에 트로츠키는 아마도 '매우 똑똑하지만 지나치게 오만해서 더 재수없는 놈' 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트로츠키가 그나마 존경을 표시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레닌이었다. 다만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데 크게 거리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군사최고인민위원(국방장관)으로써 트로츠키는 '전쟁은 군사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몰락할 때까지 군사작전에 끊임없이 집적거리면서 전쟁을 말아먹었고, 스탈린도 2차대전 초반에 몇번 군사작전에 개입했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는데 비해 트로츠키는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특별히 사고치지 않고도 군사작전은 전문 지휘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 내전기에 트로츠키가 담당한 역할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군대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일종의 최선임 정치장교[24]였다. 장갑열차를 타고 수천킬로미터에 걸쳐 뻗은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각 부대에 들려 연설하고, 기차에서 직접 신문을 제작해서 부대마다 배포하고 다녔다고. 사실 이것도 장관급 요인이 전선에 너무 접근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솔선수범으로써 당시 붉은 군대 내에서는 평판이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트로츠키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들린 부대마다 종점의 기적에 필적하는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 같지만 물론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래도 다른 기록들을 보면 당시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최전선까지 찾아와서 자신들을 격려하고 가는 국방장관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닌게 아니라, 이때만 해도 볼셰비키나 다른 혁명 조직이나 아직은 청년들의 지하 혁명 조직 시절의 낭만주의적 자유로움은 조직 내부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서, 레닌을 비롯한 당 최고 지도층도 부각은 철저히 되었을 망정 개인적 언행에서 막무가네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고, 병사들도 아무래도 구 일본군마냥 썩을 대로 썩은 봉건적 문화가 그대로 남은 제정 군대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나왔다 보니 오히려 계급간의 관계는 자유분방한 경우가 많았다.
- 그가 권력을 잃은 후부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수정주의자, 반동주의자를 의미하는 가장 심한 욕이자 한번 얻으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 과거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복권되었지만 트로츠키는 결국 복권되지 못하였으며 소련과 별로 인연이 없던 중국이나 북한 등에서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표현은 심한 욕설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잘 묘사되어 있다.
- 트로츠키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고 고르바초프도 집권 초기에 트로츠키를 비난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1988년부터 소련이 자유화되면서 트로츠키의 저서들이 검열받지 않고 소련에서 출간되었고 멕시코에서 살던 트로츠키의 외손자가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 활동에 동조하지 않고 조용히 살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된 둘째 아들 세르게이 세도프는 1988년 복권되었다.[25]
-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망명 후 디에고 리베라와 그 아내인 프리다 칼로와 친하게 지냈고, 특히 도시전설에 의하면 프리다와 트로츠키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디에고 앞에서 영어로 애정어린 대화를 하기까지 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나, 이 프리다 칼로와 트로츠키의 연애설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디에고 리베라의 바람을 계속 용서하던 프리다 칼로였지만, 자신의 친동생에게까지 손을 대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트로츠키와 사귀게 되었다'는 것은 2002년작 영화 <프리다>의 내용이고, 이 사건이 영화의 극적 연출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근거가 제시된 바 없다. 프리다 칼로와 트로츠키 모두 여러 편의 전기가 제작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인데, 정작 이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에서는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라는 주장이 제시된 바 없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이 소문이 퍼진 형태인데, 영화 <프리다>의 내용과는 별개로 한국에서 이 소문이 처음 퍼진 형태는 '트로츠키가 자기 동지인 화가의 부인과 바람이 났었다'는 것이었다가 트로츠키의 동지였던 화가가 디에고 리베라라는 지적이 있은 후에 '트로츠키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과 바람이 났었다'는 것으로 변하고,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 프리다 칼로라는 지적을 받음으로써 최종적으로 '트로츠키와 프리다 칼로가 바람이 났었다'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점에서 현 시대에는 디에고 리베라보다 프리다 칼로의 지명도가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라는 형태로 퍼진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차라리 1930년대 당시라면 디에고 리베라의 지명도가 더 높았으니 이런 식의 소문이 퍼질 수 있었겠지만, 이 소문이 퍼진 시기를 생각하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26]
- 해외에서 나치는 사라지지 않았고 달에는 나치의 비밀기지가 있다는 허무맹랑한 음모론과 비슷하게 트로츠키는 죽지 않았고 남극에는 트로츠키의 비밀기지가 있으며 트로츠키 선생님에게 훈련받은 평등한 펭귄들이 혁명 전사로써 황제펭귄을 몰아냈고 전 세계를 공산화시키려 한다는, 음모론을 까기 위한 음모론이 존재한다.
-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를 들렸을 당시 트로츠키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연설에 감명받아서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모스크바의 인상’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7. 대중매체에서
7.1. 역사서
- 유명한 책으로는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 3부작이 있다.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 한번 들어왔다가 절판되었으나 러시아 혁명 100주년인 2017년 즈음에서 트로츠키가 직접 저술한 러시아 혁명사를 비롯한 트로츠키의 여러 저작들과 함께 재판되었다. 고전으로써의 가치는 확실하지만 말 그대로 고전이니까 현대의 연구와 교차검증해서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겠다.
- 소련 장군 출신의 역사가 드미트리 볼코고노프가 트로츠키 평전을 쓴 바가 있으나 스탈린 평전과 달리 트로츠키가 한국에 별로 관심을 못 받는 인물이라 그런지 한국에 정발되진 않았다. 학계적으로는 볼코고노프의 다른 책들이 그렇듯이 비판을 받고 있다.
-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던 영국 역사가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평전이 교양인 출판사에서 정발되었다. 스탈린 평전은 두버전 모두 절판된 것과 달리 이건 현재도 판매되는 중.
-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해석에 대해 불만을 품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내놓은 반박 서적도 있다. 제목은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작가는 폴 르블랑, 출판사는 책갈피다.
7.2. 소설
- 역시나 조지 오웰의 작품인 1984에서는 작중의 배경인 가공의 국가 오세아니아의 배반자 골드슈타인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27] 실제로 작중에서 윈스턴과 줄리아가 읽는 책도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
-
미국의
소설가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Joe Steele>에서는 트로츠키가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중에서
트로츠키그라드 전투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루지야의 인간백정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28]
본격 염소 수염 서기장 동무 VS 강철 대통령 각하
- 트로츠키와 우리 조선 빨갛게 빨갛게라는 소설에서는 동지들과 조선으로 떨어지는데, 원산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한 이후 이유의 난 속에서 피난을 온 단종을 빨갛게 물들여버린다.
- 대체역사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이선이 러시아에 두번째로 방문하였을때 그것을 지켜보는 초등학생으로 첫등장한다. 역사의 변화로 러시아가 1차 세계 대전에서 끝까지 싸워서 트로츠키가 러시아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도착하는데 파리강화회의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을 미친듯이 비난해서 반제국주의 국가와 혁명가들의 우상이 되았지만 원래 역사보다 온건하고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소련임에도 열강들이 공산주의 위협을 더 심하게 경계하도록 만들고 만다. 적백내전에서는 조지아에서 한사람을 자신의 부하로 발탁하는데 바로 스탈린이다.[29] 스탈린이 두각을 늦게 들어낸덕에 서기장이 되고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키지만, 부작용으로 홀로도모르가 일어나자 당내 반대자들을 숙청하고 세계혁명에도 관심을 줄이는 등 원래역사의 스탈린과 비슷한 행보[30]를 이어나간다.[31]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혁명가로서 주인공 조지원의 사악한 본성을 파악하고 경계하나, 그를 제외한 소련의 고위층들이 모두 조지원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버린데다 트로츠키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를 않는다. 세계혁명에 대한 집착 때문에 부하린과 조지원과 갈등을 겪다가 기습적인 핵공격에 사망한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암살미수 이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미국에 밀입국하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이려고 한다. 공산 시위대를 조직하고 이를 탄압하면 보너스 아미의 재현이라는 등의 선동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하필 시기는 2차 세계대전 도중인데다 소련이 미국과 같은 팀이 아니었고, 패튼이 시위대에게 트로츠키의 정체를 까발리자 시위대는 와해되고 남은 진성 공산주의자들은 탱크에 진압당하면서 그의 마지막 공산혁명은 실패로 돌아간다. 트로츠키는 죽어서라도 공산 혁명의 상징이 되겠다면서 스스로 전차에 뛰어들어 끔살당한다. 죽은 이후 자기를 몰아낸 스탈린의 환각에 자주 등장한다.
7.3. 게임
- 어쌔신 크리드 크로니클즈 러시아 편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처럼 암살단원 니콜라이 오렐로프와 뜻을 함께한 동지였다고 나오나(암살단원은 아님)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를 인민의 적이니 처단한답시고 니콜라이와 아나스타샤를 템플 기사단에게 밀고하는 통수를 친다.
- Hearts of Iron II의 공산독일 모드에서는 나치당 대신 공산당이 집권하여 공산화된 독일에 트로츠키가 망명온다. 잡아서 소련으로 넘기거나 거절할 수도 있지만 받아준 뒤에 공산독일의 지도자로 옹립한 뒤 소련을 쳐부수고 스탈린을 몰락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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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s of Iron IV에서는 소련으로 좌익반대파 루트를 타면 4명의 사람들 중 트로츠키가 복귀할 수 있으며 부하린의 우익반대파와는 다르게 무조건 내전이 강제되는 루트 밖에 없는지라 필연적으로 트로츠키의 반란파와 스탈린의 반대파간의 내전이 일어난다. 대숙청을 끝냈다면 멕시코에서 암살 성공 아니면 암살 미수에서 살아남았다는 뉴스가 뜬다. 트로츠키 루트를 탈때의 장점은 대숙청을 하지 않아서 인재들, 특히 4렙 원수인
미하일 투하쳅스키를 살릴 수 있다는 점이고 거기다가 '붉은 군대의 건설자' 중점을 완료하면 트로츠키가 4렙의 원수로 나온다. 중앙파 스탈린의 루트 '대원수' 중점으로 나오는 스탈린이 원수로 나오는 것보다 능력치가 좋다. 스탈린은 보수파에다가 정계와의 연줄 같은 패널티 배경 특성이 달려있는 반면 트로츠키는 공세적 교리 같은 배경 특성만 있다.
단점으로는 내전으로 국력을 까먹게 된다는 점과[32] 트로츠키의 숙청으로 대부분의 정치 장관들과 5렙 장군 게오르기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원래는 트로츠키 자신의 능력치[33]가 별로라서 성능은 그다지 좋지는 않고 안정도를 엄청 까먹는 상급자용 루트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No Step Back DLC로 대규모 개편이 되어 중점으로 꽤 좋은 지도자 특성으로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성능이 별로인 영구혁명가에서 승리한 혁명가로 바꿀 수 있는데 전복 활동 비용 -50%, 전쟁 명분 정당화 시간 +15%, 이념 변화 방어 +50%, 지휘력 최대 증가치 +50%, 매일 지휘력 최대 증가치 +15%로 바뀌게 된다. Man the Guns DLC를 소지하고 있다면 멕시코로 이벤트를 통해 트로츠키를 영입할 수 있다.[34] 이 상태로 공산주의가 되면 트로츠키가 지도자가 된다. 덕분에 트로츠키의 멕시코 vs 스탈린의 소련 구도로 대립할 수 있다. 멕시코가 내전이 벌어지거나 파시스트 국가가 되거나 Arms Against Tyranny DLC를 소지하고 있다면 노르웨이로 트로츠키를 영입할 수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노르웨이가 트로츠키의 망명지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 위 게임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등장이 없다. 처음에는 전사한 레닌, 망명한 스탈린 등과 달리 확실히 죽었다는 언급이 없어 남극으로 도망가 사회주의 펭귄들을 이끌고 있다는 농담이 나돌았고, 카라 서브모드인 카이저리덕스에서 남극 코뮌의 국가 지도자로 등장할 정도였다. 다만 이후 카이저라이히 위키와 영상 설정이 추가되어, 레닌 암살 이후 스탈린, 부하린과 주도권 싸움이나 하다가 1921년 2월 27일 전투 중 사령부에 포탄이 떨어져 확실히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작품 외적으로 설명하자면 너무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대체역사를 진행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어 히틀러[35], 프랭클린 루즈벨트[36]나 장제스[37], 모택동[38] 처럼 사망처리 된 것이다.
7.4. 만화
- 만화 스머프가 공산주의 사회를 묘사했다는 음모론에 따르면, "똘똘이 스머프(안경 스머프)"의 모델이 트로츠키라고 한다. 굉장히 똑똑하기는 하지만 잘난 척이 심해 왕따 취급받는데 바로 이 모델이 트로츠키. 이 음모론에 따르면 스탈린의 모델은 투덜 스머프라고 한다. 파파 스머프의 모델이 마르크스라는 이야기도 있고...
7.5. 영화
- 1972년의 영국에서 상영된 트로츠키 암살 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이라는 영화가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전 남편이었던 리처드 버튼이 트로츠키 역을 맡았다.
- 프리다(2002)에서 중반이후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등장한다. 제프리 러쉬가 연기한다.
- 캐나다의 2009년작 영화 <더 트로츠키>는 자신이 레프 트로츠키의 환생이라고 믿는 17살짜리 고등학생 레온 브론슈틴[39]이 주인공인 코미디물이다.[40] IMDB 링크
- 우크라이나에서 제작된 영화 '전쟁 속 우정: ANTON'(2021)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등장한다. 1차 세계대전 끝무렵, 소련 공산당의 치하에 놓인 우크라이나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모든 소련군의 만행이 그의 머리속에서 나온다. 인민을 다스리기 위해선 상호감시를 조장하여 강력한 통제권을 쥐어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가히 소시오패스 그 자체다.
7.6. 드라마
-
러시아 대혁명 100주년이 되는 2017년 러시아에서 8부작 드라마 "트로츠키"가 방영되었다.[41] 암살당하기 직전인 1940년 멕시코에서 트로츠키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형식이다. 주인공인 트로츠키는
제독의 연인에서 콜차크 역을 맡았던 콘스탄틴 하벤스키[42]가 분했다. 드라마 속 배우들이 실제 인물들과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닮았으며, 당시 시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었으나, 2020년 10월에 서비스가 종료됐다.
그런데 트로츠키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찬반논란이 거세다. 특히 러시아 국내 학자들이 아닌 로버트 서비스의 평전을 원전으로 두고 고증을 거쳤던지라 스토리 전개상 오류가 다소 많다. 가령 레닌이 트로츠키 멱살을 잡고 '유대인 새끼'라고 읊조리는 묘사나[43] 레닌이 트로츠키와 반목하는 묘사가 있으며[44], 1917년 10월 혁명을 트로츠키가 사실상 혼자서 주도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죽음은 라몬[45]이 뒤에서 트로츠키를 공격한 게 아니라 라몬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눈치챈 트로츠키가 먼저 라몬을 도발해 자신을 죽이게 만든 것으로 각색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국영채널인 러시아 채널1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푸틴 정부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비판도 있다.[46]
8.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 1898 - 1903 | |
볼셰비키 | 1917 - 1932 | |
[[소련 공산당|]] |
1918 - 1927 | |
스위스 사회민주당 | ? - ? | |
제4인터내셔널 | 1938 - 1940 |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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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어: Лейба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ейн (레이바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이디시어: לייבל ברוינשטיין (레이바 브로인슈테인)
영어: Lev "Leyba" Davidovich Bronshteyn [2] 1990년 초만 해도 여러 학습용 서적(금성출판사나 삼성당 같은 곳에서 낸)에선 1877년 생으로 나오기도 했다. [3] 혼전성은 '지보톱스카야(Животовская)'. [4] Jaime Ramón Mercader del Río (1913–1978) [5] 이탈리아어 안티도토(antidoto, '해독제')에서 유래함. [6] 물론 노동자 연대가 트로츠키를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건 사실이다. [7]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ISSK)는 1990년에 창립된 비합법 지하조직이다.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국가 탄압으로 인해 수 차례 대규모 구속 사태에 직면한 바 있고, 1999년에 공식적으로 조직을 해소하였다. 이후 지하조직 노선을 청산하고 대중 노선으로 전환하여 2000년에 민주노동당 학생그룹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다함께(2001~2012)-노동자연대다함께(2012~2014)-노동자연대(2014~)로 이어지고 있다. [8] 예를 들어 노동자연대 가판에서 파는 소책자에는 '삐딱이들을 위한 트로츠키 가이드'가 있고, 이 조직의 실질적인 지도자 격인 최일붕은 한동안 '한국 최초의 트로츠키주의자'로 소개된 바 있다. [9] 제 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 자신이 창설한 조직이고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 국가로 보지만, IS(또는 IST)는 트로츠키 사후 자생적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으로서 소련이 처음부터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10]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선 기존 진보-좌파세력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이 전통적으로 안 좋다. 예를 들어 영국의 주류 진보정당인 노동당과 비주류 트로츠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은 원수지간이다. 옛날 소련이 건재했던 시절부터 활동하던 노년층은 옛날 구소련의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늙어죽거나 은퇴했고, 사실 이런 냉전기 지정학적 큰 구도보단 서구권 좌파판 내부 운동권 문화에서 생긴 문제가 더 크다.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은 좌파판 밖에선 공산주의자들 전반이 주로 한다고 욕먹는, 처음에는 어디 좋은 의도나 순수한 공감인양 이런 저런 시민단체나 운동 단체에 가입해 놓고 알게모르게 자신들만의 파벌질로 자기 계파 사람들만 꽉 채워 놓은 다음 조직 전체를 도둑질해 버리는 운동권 쁘락치, 정치적 도둑질이 상당히 심했다. 이런 어설픈 침투전략이 통할 리가 없는 영국 노동당 같은 거대 정당 상대로도 이런 짓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80년대 대처리즘 시절 영국 마르크스주의자 세력 전체가 위축되는 사고도 많이 쳤다. 게다가 2010년대 전후로 음습하고 운동권 내부 폐쇄성으로 인해 뒤늦게야 폭로된 평당원들 상대로 저지른 간부들의 권력형 성범죄도 SWP 본진인 영국과 호주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전력이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서구 좌파 정치판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음습하고 폐쇄적인 사이비종교에 가까운 집단스런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11] 당이 없는 경우에는 운동 단위가 된다. 한국에 이러한 운동 단위로는 스탈린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 정치 협의회(노정협)와 노동사회과학 연구소(노사과연)이 있다. 실제로 노정협에서 발간하는 노동자 정치 신문을 보면 가장 많이 까이는 단체 1위가 노동자연대고, 2위가 변혁당이다. [12] 이것을 유로코뮤니즘이라 하는데, 이미 1970년대부터 서유럽 공산당들 사이에서 시작된 풍조이다. [13] 위에 예시로 나온 흐루쇼프와 마오쩌둥 간의 논쟁을 보더라도,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을 극좌모험주의자라고 불렀고,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우파수정주의자라고 받아쳤다. 그런데 양쪽 다 상대를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다. [14] 전국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 변혁당 중앙당과 학생위원회가 이런 경향이 있고, 노동자연대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세상을 위한 연대(구 변혁재장전)는 더욱 두드러진다. [15] Whiggism, 즉, 현재 시점을 '바른 상태'로 보면서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역사철학의 한 갈래. 조선시대 펴낸 고려사의 공민왕 이후 부분이 바로 이런 식의 서술이라고 볼 수 있다. [16] 사실 미국과 유럽의 1960년대 자체가 68운동의 영항으로 사상적 혼란이 크게 일어난 만큼 트로츠키 동정론이 힘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염증과, 자본주의의 반감에 대해 제3의 길을 찾다보니, 스탈린에 의해 시종일관 비난받던 트로츠키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고 생각하게 된 것. [17] 박종철출판사에서 출간한 '러시아 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 번역판에서 류한수 교수가 제시한 '더 읽을 거리' 참고 [18] 물론 공정하게 말한다면 이 당시의 학생들이 이상화한 트로츠키주의가 실제 트로츠키의 이념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19] 유대인들은 해산물 중 비늘 없는 것은 먹으면 안 된다. [20] 물론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의 대등한 연방 국가로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것이지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승인한 것은 아니긴 했다. [21] 출처: 10월 혁명을 옹호하며(1932) [22] 그의 회고록에선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 아버지는 러시아 내전 당시 당신의 아들이 트로츠키란 이유로 백군에게 탄압당하셨고 적군에게는 부농이란 이유로 비판당하셨다." [23]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고 고향에선 시인이었지만 러시아어는 그리 잘 하지 못해서 러시아어로 말을 할 때면 되도록 짧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남겨진 자료를 통해 분석한 스탈린의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대략 고등학생 정도 수준으로,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언어를 주된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한 수준이었다고 여겨진다. [24] 통상적인 정치장교의 역할에서 감시역할을 뺀 것. [25] 세르게이의 딸은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아 1979년까지 소련에서 살다가 1979년 소련이 유대인들의 이주를 허가할 때 출국 허가를 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트로츠키의 외손녀(첫째 딸의 딸)도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아 흐루쇼프 시대에 복권되었다. [26] 아마 요제프 멩겔레의 이야기가 와전된 듯 싶다. 멩겔레는 나치가 패망하자 신분을 숨기고 남미로 도주했는데 자신을 받아준 친나치인사의 부인과 불륜을 벌이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27] 체제의 배반자, 염소 수염, 안경, 유대인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 [28] 스탈린이 어렸을 때 스탈린의 부모가 그루지야에서 일어나는 탄압을 피하고자 그루지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Joe Steele'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 [29] 역사의 변화로 레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공산주의 연구를 하느라 스탈린하고 레닌이 만나지 못했다. [30] 실제로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비슷한면이 매우 많다. [31] 그나마 트로츠키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숙청된 사람은 적었다. [32] 다만 부하린 루트보다는 쉬운 편.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반란 가능 지역을 넓힐 수 있고,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와 같은 주요 도시들과 가깝기 때문에 딱히 국력도 그렇게 소진되지는 않는 편이다. 거기다 군대도 붉은 군대의 다수가 트로츠키의 군대로 오기 때문에 난이도는 더더욱 쉽다. [33] 정치력에 페널티를 주는 특성이 달려 있고 업그레이드를 해야 겨우 본전을 뽑는 수준. [34] 이때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입할 수도 있는데 공산주의 지지도가 오르지만 무려 군사 조직력을 8%나 올려주기에 성능은 좋은 편이다. [35] 1차대전 가스공격 중 방독면 고장으로 전사 [36] 소아마비 악화로 사망 [37] 암살 [38] 국민당 봉기에 참가했다 사망 [39] 트로츠키의 본명을 영어화한 것. [40] 이쪽은 굉장히 자칭 전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생계획을 7단계로 세워놨는데 1단계-혁명 기초 닦기, 2단계-(되도록이면 이름이 알렉산드라[47])인 연상 여자랑 결혼하기, 3단계-??, 4단계-21살때까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AKA 레닌) 만나기(서두르자), 5단계-추방당하기, 6단계- 추방에서 돌아오기, 7단계-(되도록이면 따뜻한 곳에서)암살당하기 라던가, 신문기사랑 트로츠키 관련서적을 모아놓고 이탈리아 공산당기가 벽에 걸려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런데 정작 모습은 키 큰 안토니오 그람시 닮았다. [41] 레닌을 다룬 "혁명과 악마"도 같이 방영되었는데, 시청률에서 트로츠키가 훨씬 앞섰다고 한다. [42] 콘스탄틴 하벤스키도 유대계이다 [43] 레닌도 모계가 유대계다. [44] 물론 레닌-트로츠키가 반목한 시기도 있었지만 반대로 두 사람이 가까웠던 시기의 트로츠키는 '레닌의 곤봉' 이라고 불릴 정도로 레닌의 맹렬한 지지자로 활동했으며, 두 사람이 껄끄러운 관계가 된 시기에도 노선이나 방법론의 차이로 갈등한 정도이지 서로를 적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부분을 다 떠나서, 죽음을 눈앞에 둔 레닌의 유언장 내용을 보면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가장 적합한 인물", 즉 레닌의 후계자로써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트로츠키를 레닌주의자가 아닌 독자적 정파의 수장으로 보고 적대시하거나 배척한 다른 레닌주의자 고참 볼셰비키들과는 달리 레닌 자신은 트로츠키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할 정도로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트로츠키 역시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에는 자신을 명백하게 '레닌주의자'로 규정했다. [45] 작중에서는 실제로 사용한 가명인 프랭크 잭슨으로만 나오며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46] 푸틴 본인은 소련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심장이 없다.는 등 소련 시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했고, 대조국전쟁 기념일을 성대하게 챙기는 등의 행보를 보이지만 이는 러시아인들의 소련 시절의 향수를 자극해 애국심을 고양하고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당초 푸틴의 저 발언 뒤에는 "소련이 돌아오길 바라는 자는 머리가 없다."라는 반공적인 주장이 따라붙으며, 그외에도 소련과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발언도 많이 했다.
이디시어: לייבל ברוינשטיין (레이바 브로인슈테인)
영어: Lev "Leyba" Davidovich Bronshteyn [2] 1990년 초만 해도 여러 학습용 서적(금성출판사나 삼성당 같은 곳에서 낸)에선 1877년 생으로 나오기도 했다. [3] 혼전성은 '지보톱스카야(Животовская)'. [4] Jaime Ramón Mercader del Río (1913–1978) [5] 이탈리아어 안티도토(antidoto, '해독제')에서 유래함. [6] 물론 노동자 연대가 트로츠키를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건 사실이다. [7]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ISSK)는 1990년에 창립된 비합법 지하조직이다.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국가 탄압으로 인해 수 차례 대규모 구속 사태에 직면한 바 있고, 1999년에 공식적으로 조직을 해소하였다. 이후 지하조직 노선을 청산하고 대중 노선으로 전환하여 2000년에 민주노동당 학생그룹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다함께(2001~2012)-노동자연대다함께(2012~2014)-노동자연대(2014~)로 이어지고 있다. [8] 예를 들어 노동자연대 가판에서 파는 소책자에는 '삐딱이들을 위한 트로츠키 가이드'가 있고, 이 조직의 실질적인 지도자 격인 최일붕은 한동안 '한국 최초의 트로츠키주의자'로 소개된 바 있다. [9] 제 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 자신이 창설한 조직이고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 국가로 보지만, IS(또는 IST)는 트로츠키 사후 자생적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으로서 소련이 처음부터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10]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선 기존 진보-좌파세력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이 전통적으로 안 좋다. 예를 들어 영국의 주류 진보정당인 노동당과 비주류 트로츠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은 원수지간이다. 옛날 소련이 건재했던 시절부터 활동하던 노년층은 옛날 구소련의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늙어죽거나 은퇴했고, 사실 이런 냉전기 지정학적 큰 구도보단 서구권 좌파판 내부 운동권 문화에서 생긴 문제가 더 크다.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은 좌파판 밖에선 공산주의자들 전반이 주로 한다고 욕먹는, 처음에는 어디 좋은 의도나 순수한 공감인양 이런 저런 시민단체나 운동 단체에 가입해 놓고 알게모르게 자신들만의 파벌질로 자기 계파 사람들만 꽉 채워 놓은 다음 조직 전체를 도둑질해 버리는 운동권 쁘락치, 정치적 도둑질이 상당히 심했다. 이런 어설픈 침투전략이 통할 리가 없는 영국 노동당 같은 거대 정당 상대로도 이런 짓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80년대 대처리즘 시절 영국 마르크스주의자 세력 전체가 위축되는 사고도 많이 쳤다. 게다가 2010년대 전후로 음습하고 운동권 내부 폐쇄성으로 인해 뒤늦게야 폭로된 평당원들 상대로 저지른 간부들의 권력형 성범죄도 SWP 본진인 영국과 호주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전력이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서구 좌파 정치판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음습하고 폐쇄적인 사이비종교에 가까운 집단스런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11] 당이 없는 경우에는 운동 단위가 된다. 한국에 이러한 운동 단위로는 스탈린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 정치 협의회(노정협)와 노동사회과학 연구소(노사과연)이 있다. 실제로 노정협에서 발간하는 노동자 정치 신문을 보면 가장 많이 까이는 단체 1위가 노동자연대고, 2위가 변혁당이다. [12] 이것을 유로코뮤니즘이라 하는데, 이미 1970년대부터 서유럽 공산당들 사이에서 시작된 풍조이다. [13] 위에 예시로 나온 흐루쇼프와 마오쩌둥 간의 논쟁을 보더라도,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을 극좌모험주의자라고 불렀고,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우파수정주의자라고 받아쳤다. 그런데 양쪽 다 상대를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다. [14] 전국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 변혁당 중앙당과 학생위원회가 이런 경향이 있고, 노동자연대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세상을 위한 연대(구 변혁재장전)는 더욱 두드러진다. [15] Whiggism, 즉, 현재 시점을 '바른 상태'로 보면서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역사철학의 한 갈래. 조선시대 펴낸 고려사의 공민왕 이후 부분이 바로 이런 식의 서술이라고 볼 수 있다. [16] 사실 미국과 유럽의 1960년대 자체가 68운동의 영항으로 사상적 혼란이 크게 일어난 만큼 트로츠키 동정론이 힘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염증과, 자본주의의 반감에 대해 제3의 길을 찾다보니, 스탈린에 의해 시종일관 비난받던 트로츠키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고 생각하게 된 것. [17] 박종철출판사에서 출간한 '러시아 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 번역판에서 류한수 교수가 제시한 '더 읽을 거리' 참고 [18] 물론 공정하게 말한다면 이 당시의 학생들이 이상화한 트로츠키주의가 실제 트로츠키의 이념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19] 유대인들은 해산물 중 비늘 없는 것은 먹으면 안 된다. [20] 물론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의 대등한 연방 국가로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것이지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승인한 것은 아니긴 했다. [21] 출처: 10월 혁명을 옹호하며(1932) [22] 그의 회고록에선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 아버지는 러시아 내전 당시 당신의 아들이 트로츠키란 이유로 백군에게 탄압당하셨고 적군에게는 부농이란 이유로 비판당하셨다." [23]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고 고향에선 시인이었지만 러시아어는 그리 잘 하지 못해서 러시아어로 말을 할 때면 되도록 짧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남겨진 자료를 통해 분석한 스탈린의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대략 고등학생 정도 수준으로,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언어를 주된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한 수준이었다고 여겨진다. [24] 통상적인 정치장교의 역할에서 감시역할을 뺀 것. [25] 세르게이의 딸은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아 1979년까지 소련에서 살다가 1979년 소련이 유대인들의 이주를 허가할 때 출국 허가를 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트로츠키의 외손녀(첫째 딸의 딸)도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아 흐루쇼프 시대에 복권되었다. [26] 아마 요제프 멩겔레의 이야기가 와전된 듯 싶다. 멩겔레는 나치가 패망하자 신분을 숨기고 남미로 도주했는데 자신을 받아준 친나치인사의 부인과 불륜을 벌이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27] 체제의 배반자, 염소 수염, 안경, 유대인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 [28] 스탈린이 어렸을 때 스탈린의 부모가 그루지야에서 일어나는 탄압을 피하고자 그루지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Joe Steele'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 [29] 역사의 변화로 레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공산주의 연구를 하느라 스탈린하고 레닌이 만나지 못했다. [30] 실제로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비슷한면이 매우 많다. [31] 그나마 트로츠키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숙청된 사람은 적었다. [32] 다만 부하린 루트보다는 쉬운 편.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반란 가능 지역을 넓힐 수 있고,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와 같은 주요 도시들과 가깝기 때문에 딱히 국력도 그렇게 소진되지는 않는 편이다. 거기다 군대도 붉은 군대의 다수가 트로츠키의 군대로 오기 때문에 난이도는 더더욱 쉽다. [33] 정치력에 페널티를 주는 특성이 달려 있고 업그레이드를 해야 겨우 본전을 뽑는 수준. [34] 이때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입할 수도 있는데 공산주의 지지도가 오르지만 무려 군사 조직력을 8%나 올려주기에 성능은 좋은 편이다. [35] 1차대전 가스공격 중 방독면 고장으로 전사 [36] 소아마비 악화로 사망 [37] 암살 [38] 국민당 봉기에 참가했다 사망 [39] 트로츠키의 본명을 영어화한 것. [40] 이쪽은 굉장히 자칭 전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생계획을 7단계로 세워놨는데 1단계-혁명 기초 닦기, 2단계-(되도록이면 이름이 알렉산드라[47])인 연상 여자랑 결혼하기, 3단계-??, 4단계-21살때까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AKA 레닌) 만나기(서두르자), 5단계-추방당하기, 6단계- 추방에서 돌아오기, 7단계-(되도록이면 따뜻한 곳에서)암살당하기 라던가, 신문기사랑 트로츠키 관련서적을 모아놓고 이탈리아 공산당기가 벽에 걸려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런데 정작 모습은 키 큰 안토니오 그람시 닮았다. [41] 레닌을 다룬 "혁명과 악마"도 같이 방영되었는데, 시청률에서 트로츠키가 훨씬 앞섰다고 한다. [42] 콘스탄틴 하벤스키도 유대계이다 [43] 레닌도 모계가 유대계다. [44] 물론 레닌-트로츠키가 반목한 시기도 있었지만 반대로 두 사람이 가까웠던 시기의 트로츠키는 '레닌의 곤봉' 이라고 불릴 정도로 레닌의 맹렬한 지지자로 활동했으며, 두 사람이 껄끄러운 관계가 된 시기에도 노선이나 방법론의 차이로 갈등한 정도이지 서로를 적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부분을 다 떠나서, 죽음을 눈앞에 둔 레닌의 유언장 내용을 보면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가장 적합한 인물", 즉 레닌의 후계자로써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트로츠키를 레닌주의자가 아닌 독자적 정파의 수장으로 보고 적대시하거나 배척한 다른 레닌주의자 고참 볼셰비키들과는 달리 레닌 자신은 트로츠키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할 정도로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트로츠키 역시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에는 자신을 명백하게 '레닌주의자'로 규정했다. [45] 작중에서는 실제로 사용한 가명인 프랭크 잭슨으로만 나오며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46] 푸틴 본인은 소련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심장이 없다.는 등 소련 시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했고, 대조국전쟁 기념일을 성대하게 챙기는 등의 행보를 보이지만 이는 러시아인들의 소련 시절의 향수를 자극해 애국심을 고양하고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당초 푸틴의 저 발언 뒤에는 "소련이 돌아오길 바라는 자는 머리가 없다."라는 반공적인 주장이 따라붙으며, 그외에도 소련과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발언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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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첫번째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