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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5:49:11

줄피카르 알리 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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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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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제4대 대통령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제9대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
ذو الفقار علي بوتو
Zulfikar Ali Bhutto
파일:Prime-minister-of-Pakistan-Zulfikar-Ali-Bhutto.jpg
출생 1928년 1월 5일
영국령 인도 제국 신드 주 라토데로
(현 파키스탄 신드 주 라토데로)
사망 1979년 4월 4일 (향년 51세)
파키스탄 펀자브 라왈핀디
국적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
신체 약 180cm[1], B형
학력 UC 버클리 (정치학 / 학사)[2]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정치학 / 석사)
링컨 인 (Lincoln's Inn)[3] (변호사 자격 취득)
배우자 Shireen Amir Begum
Nusrat Ispahani
자녀 슬하 4명[4]
정당 파키스탄 인민당
재임기간 제4대 대통령
1971년 12월 30일 ~ 1973년 8월 13일
제9대 총리
1973년 8월 14일 ~ 1977년 7월 5일
종교 이슬람
주요 경력 파키스탄 8대, 12대 외무장관
파키스탄 4대 대통령
파키스탄 9대 총리

1. 개요2. 생애3. 정치 경력4. 쿠데타와 축출, 그리고 사형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키스탄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1971년부터 1973년까지 파키스탄 4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파키스탄의 제9대 총리를 역임했고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창립자였으며 1979년에 처형될 때까지 당 대표를 역임했다.

오늘날의 파키스탄 신드 주에서 태어나 UC 버클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딴 후 이스칸데르 미르자 초대 대통령의 내각 위원 중 한 명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8년 10월 27일 아유브 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내각에 남아 여러 직책을 거쳤고 1963년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파키스탄 인민당(PPP)을 설립하고 1970년 야히아 칸 대통령이 실시한 총선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여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야당인 PPP는 서파키스탄(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971년 3월 당시 동파키스탄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파키스탄은 인도-방글라데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같은 해 12월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오늘날의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야히아 칸 대통령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그는 1971년 12월 20일 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2년 7월 심라 협정에 서명한 후 43,600명의 전쟁 포로와 5,000평방마일의 땅을 인도로부터 되찾았다. 그는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인정했으며 1974년 라호르에서 제2차 이슬람 회의 기구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1973년 의회가 새로운 헌법을 만장일치로 승인하는 것을 보았고 그 때 부토는 파이잘 일라히 차우드리 대통령을 임명하고 본인은 총리로 영전했으며 국가의 핵 프로그램에 시동을 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가 파키스탄의 신생 산업, 의료 및 교육 기관의 대부분을 국유화한 것은 경제 침체에 부딪혔다. 발루치스탄의 지방 봉건 정부를 해산한 후 1973년 이 지역에서 군 작전을 명령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국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PPP는 1977년 총선에서 큰 차이로 승리했지만 야당은 광범위한 투표 조작과 폭력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7월 5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추방되었고 1979년 파키스탄 대법원에서 정적 살해를 승인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민족주의 세속주의에 기반한 정치인이며 정적을 탄압하고 인권 침해를 자행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가장 위대한 파키스탄 지도자를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며 딸 베나지르 부토는 두 차례 총리로 선출되었고 베나지르의 남편이자 사위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무엇보다 파키스탄은 지금은 이슬람권에서도 꼴통 취급받는 막장 이슬람 국가지만 부토 시절까지만 해도 세속주의가 널리 퍼지고 나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였다.

2. 생애

1928년 1월 5일 영국령 인도 제국 라르카나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늦둥이로 태어났는데 첫째 형은 1914년 폐렴 때문에 7살의 나이로 죽었고 둘째 형은 1953년 간경변 때문에 39살의 나이로 죽었다. 아버지는 부유한 지주에 상당히 영향력 있는 지역 관리였다. 어린 시절 봄베이에서 학교를 다녔고 학생 운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1943년 15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194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49년 UC 버클리로 편입했고 이듬해인 1950년 정치학 학사를 딴 후 졸업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다니면서 아시아인 최초의 학생 자치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학사를 딴 직후인 1950년 6월 영국 유학길에 올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 석사와 변호사 자격증을 딴 후 잠시동안 링컨스인 법학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1951년 9월 8일에는 이란 출생 쿠르드족 출신의 누스라트 부토와 재혼했다.[5] 미국 유학 시절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한 후 신드 무슬림 대학에서 법학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3. 정치 경력

1957년 파키스탄 UN 대표단 멤버가 되었는데 당시 29살로 멤버들 중 나이가 가장 어렸다. 1958년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은 그를 상무부 장관에 임명했고 같은 해 10월 아유브 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계속 내각에 남아있었다. 칸 대통령은 젊은 그를 매우 신임했고 그는 그의 고문 역할을 했다. 1960년 인도 인더스 강 물 관련 조약을 맺을 때 칸 대통령을 도왔고 이듬해인 1961년 소련과 석유 탐사 협정을 맺어 파키스탄에 경제 및 기술 지원을 제공하도록 합의했다.
파일:25312784769_acf5627faa_b.jpg

1951년 9월 8일 결혼식 사진. 부부는 1953년에 딸 베나지르를, 1954년에 아들 무르타자를, 1957년에 딸 사남을, 1958년에 아들 샤나와즈를 낳았다.

1963년 6월 15일 칸 대통령은 그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는데 그는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6] 당시 많은 국가들이 중공과 대만 중 하나만 중국으로 인정했는데 그는 둘 다 중국이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소련은 중국과 사이가 매우 나빠서 1964년 중국과 관계 단절을 선언했는데 파키스탄과 알바니아는 중국 편을 들었다. 그러면서 미국과의 밀월도 시도했는데 부토의 중국 옹호는 미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3년 3월 2일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영토 750㎢를 중국에게 이전하는 협정에 서명하기도 했다.

파일:gettyimages-515951706-2048x2048.jpg

1963년 3월 18일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는 부토 외무장관

그는 이슬람권 국가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해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등과의 관계 개선도 모색했다.

동독은 물론 서독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서도 노력했고 1962년에는 폴란드를 방문했는데 그 해 파키스탄과 폴란드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62년 10월 중인전쟁이 터지자 중국은 파키스탄에게 공습에 동참해줄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에 찬성했지만 아유브 칸 대통령은 인도의 보복이 두려워 반대했고 오히려 인도와의 공동 방위 연합체 구성을 제안했다. 이는 그와 칸의 사이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은 중국의 요구를 거부했다.[7] 당시 미국이 인도를 지원했는데 이에 그는 미국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칸 대통령에게 카슈미르 지방을 인도로부터 되찾기 위해 군사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칸 대통령은 이에 응해 지브롤터 작전을 개시했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인도는 파키스탄에게 반격했는데 이것이 1965년 3월 발발한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다.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났고 얻은 게 없었기 때문에 파키스탄 국민들은 칸 정권을 비난했다. 그도 인도와의 합의안에 불만을 터뜨렸고 이는 그와 칸의 사이가 더 나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66년 8월 31일 외무장관에서 물러났다.

이듬해인 1967년 11월 30일, 라호르에서 파키스탄 인민당을 창설했다. 이후 인민당은 전국적인 시위와 파업 운동을 벌였고 1969년 3월 25일, 아유브 칸 대통령이 물러나고 야히아 칸 육군 총사령관이 대통령이 된 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인민당은 계속해서 반정부 활동을 벌였고 1969년 11월 12일 그는 체포되기도 했으나 금방 풀려났다.

야히아 칸 대통령은 1970년 12월 7일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총선 결과 서파키스탄에서는 인민당이 압승했으나 총선 자체는 아와미 연맹이 승리했으며 동파키스탄에서도 아와미 연맹이 의석을 휩쓸었다.[8]

그러자 칸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는 짓을 저질렀다. 거기다 11월에 사이클론 볼라가 동파키스탄을 강타해 무려 50만명이 사망했는데 파키스탄 정부가 구호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동파키스탄인들은 더욱 분노했다.

결국 1971년 3월 26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12월 16일까지 계속되었고 인도가 방글라데시를 지원했으며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은 패배하고 동파키스탄은 독립해서 오늘날의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2월 20일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그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그는 마침내 대통령 겸 외무장관에 취임했다.

파일:5581387601_15b6943640_z.jpg

1971년 12월 20일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맨 오른쪽)

그가 처음 대통령이 되었을 때 파키스탄은 인도-방글라데시 연합군에게 패배해 영토와 국민을 잃었고 남아있는 파키스탄 국민들은 큰 패배감과 상실감에 젖어 있었다. 어쨌든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야히아 칸 대통령을 가택연금하고[9]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분리독립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탄압했으며 노동자와 노조의 권리를 강화하는 새로운 노동 정책을 발표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화학, 시멘트 같은 국가 기초 산업도 국유화했다. 공무원 2000명 이상을 부패 혐의로 해고했으며 1972년 4월 21일에는 계엄령을 철회하고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인도를 방문해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와 평화협정을 맺고 93,000명의 파키스탄군 포로들을 데려왔으며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인정했으며 파키스탄의 핵개발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그는 집권 직후인 1972년 1월부터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11월에는 카라치에서 파키스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했다.[10]

1973년 3월 30일 군 장교 59명이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발각되었는데 당시 군사 재판소를 이끌고 이들을 조사, 재판한 사람이 바로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이었다. 4월 12일, 국회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고 파키스탄은 공화제에서 의원내각제가 되었다. 8월 14일 파키스탄 9대 총리에 취임했다.

1974년 1월 1일에는 전국의 모든 은행을 국유화한 후 전국의 밀가루, 쌀, 면화 공장도 국유화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국유화 정책은 실패했고 파키스탄 사회에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11]

하지만 부토 정권은 전국에 약 6,500개의 초등학교, 900개의 중학교, 407개의 고등학교, 51개의 대학 및 21개의 전문대학을 포함하여 다수의 학교를 설립했고 학교에서 이슬람과 파키스탄의 역사에 대한 교육을 의무화시켰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독립하자 전국 곳곳에서 또다른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발루치스탄 주에서 독립운동이 극심했는데 파키스탄 정부는 1973년 2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독립운동을 아주 철저히 진압했다.

미국은 물론 이란, 중국, 인도와도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베트남, 라오스,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물론 일본, 태국 같은 친미, 친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도 모색했다.[12] 4차 중동전쟁 당시에는 아랍권의 편을 들었으며 1976년에는 방글라데시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다만 미국과는 1976년부터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전 국민이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게 하여 수많은 파키스탄인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고(특히 중동) 지금도 이들이 송금하는 돈은 파키스탄 경제에 아주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2022년 기준으로 해외에 나간 파키스탄인들이 고국으로 송금하는 돈은 매년 300억 달러가 넘는다.

4. 쿠데타와 축출, 그리고 사형

하지만 이런 그의 급격한 사회주의, 세속주의 정책은 많은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야당은 물론 여당인 인민당에서도 反 부토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진압했지만 이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1977년 7월 3일 칼리드 마흐무드 아리프(1930~2020) 육군 소장[13]은 비밀리에 그를 만나 GHQ(General Combatant Headquarters:전투총사령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하며 더 늦기 전에 야당과의 협상을 서두르라고 조언했다. 그도 이에 동의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고 이틀 뒤인 7월 5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육군참모총장은 작전명 "페어플레이"를 개시했다. 무혈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그는 구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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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의 부토 가문 사진. AP 통신 기자가 찍은 사진으로 뒷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인 누스라트 부토, 장남이나 둘째 샤나와즈 부토, 부토 본인, 장녀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베나지르 부토, 차남이나 막내인 무르타자 부토는 아랫줄 왼쪽 아래에 있고 셋째이자 차녀인 사남은 아랫줄 오른쪽에 있다.

한 달 동안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그는 이후 국내 여행을 떠났고 가는 곳마다 인민당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9월 3일 다시 체포되었으며 10월 24일부터 파키스탄 대법원은 그를 살해 혐의로 재판하기 시작했다.

대법원은 그에게 정적 살해 혐의로 사형 판결을 내렸고 이후에도 항소와 재판이 오고갔으나 결과는 변하지 않았으며 1979년 2월 6일 최종 판결이 선고되었다. 3월 24일 상고는 기각되었으며 4월 4일 라왈핀디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는데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저는 결백합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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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처형되고 다음날인 4월 5일, 파키스탄 최대 신문사인 DAWN지가 부토의 사형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발행한 모습

훗날, 2024년 파키스탄 대법원이 재판 자체가 불공정했다고 판결받았다. #

5. 여담



[1] 정확히는 180c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다니다 편입했다. [3] 런던에 소재한 4대 법학원 중 하나.
위키피디아 참고
[4] 이 중 한 명이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이다. [5] 그의 자식 4명(2남 2녀)은 모두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것이다. [6] 파키스탄과 철천지 원수 사이인 인도가 1962년 중국과 전쟁을 벌인 것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7] 전쟁은 중국이 승리했다. [8] 현재 방글라데시 집권 여당이다. 칸 대통령은 무소속이었다. [9] 1977년 부토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야 가택 연금이 해제되었으며 1980년 사망한 후에는 명예훈장도 수여받았다. [10] 캐나다가 만드는 걸 도와줬다. [11] 훗날 총리가 되는 나와즈 샤리프도 이 국유화 정책 때문에 큰 손실을 봤다고 한다. 샤리프 가문은 철강기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다만 일본은 70년대 중반부터 파키스탄과 사이가 틀어졌으며 지아울하크 정권 시절에야 관계를 회복했다. [13] 훗날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지아울하크 정권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4] 더 큰 사진을 보고 싶다면 여기 [15] 당장 이 문서 위에도 1963년에 둘이 만난 사진이 있다.